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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7-02 23:18:26

존 디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존 디
John Dee
파일:John_Dee_Ashmolean.jpg
출생 1527년 7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타워 워드
사망 1608년 12월 또는 1609년 3월 (향년 81세)
잉글랜드 왕국 서리주 모틀레이크
아버지 롤랜드 디
어머니 조안나 와일드
배우자 캐서린 콘스터블 (1565년 결혼 /1574년 사망)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 (1575년 결혼 /1576년 사망)
제인 프롬온드 (1578년 결혼 /1604년 사망)
자녀 아서, 마이클, 롤랜드, 캐서린, 마디니아, 프랜시스, 마거릿, 시오도어
직위 수학자, 천문학자, 교육자, 점성술사, 연금술사
1. 개요2. 생애3. 가족4. 존 디의 사상과 업적5. 평가6. 기타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시기에 헤르메스주의를 추종한 수학자, 천문학자, 교육자, 점성술사, 오컬티스트. 엘리자베스 1세의 고문으로서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웨일스의 마법사(Welsh Wizard)'[1]라는 별명이 있다.

2. 생애

1527년 7월 13일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 런던의 타워 워드에서 웨일스계 혈통의 젠트리인 롤랜드 디와 윌리엄 와일드의 딸 조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 '디(Dee)'는 웨일스어 'du(검은색)'의 영어식 표기이다. 조부 베도 두(Bedo Ddu)는 웨일스 래드너셔 필레스의 난트이그로스 출신으로, 존 디는 평생 그 지역과의 인연을 유지했다. 그의 집안은 헨리 7세보스워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을 무렵에 런던으로 이주했으며, 아버지 롤랜드 디는 런던에서 직물업에 종사한 부유한 상인이었으며, 헨리 8세의 궁정 신하이기도 했다. 존 디는 훗날 9세기 귀네드 왕국의 통치자였던 로드리 마우르 압 메르번(Rhodri Mawr ap Merfyn)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가계도를 작성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존 디는 일찍이 첼름스퍼드 채플 스쿨을 다녔고, 1542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카리지에 재학해 1545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547년 5월, 그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젬마 R. 프리시우스와 그의 제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와 함께 연구했다. 트리니티 칼리지를 위해 메르카토르의 천문 기구를 구한 존 디는 몇 달 후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이러한 기구와 지도의 확보는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과 경쟁하는 신흥 식민 강대국으로서의 잉글랜드의 역할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1548년, 디는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를 떠나 프랑스 왕국저지대 국가의 루뱅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연금술과 자연 마법을 비롯한 여러 주제를 연구했으며, 뛰어난 학문적 명성을 얻어 최고위층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는 만토바 공작 요한 카피 토, 덴마크 왕의 주치의 루이스 데 라 세르다(훗날 메디나 셀리 공작), 윌리엄 피커링 경(1516/17~1575, 1550~1553년 프랑스 대사), 궁정 수학자 마티아스 하쿠스와 교류했다.

1550년, 디는 파리로 가서 인문주의 학자 아드리앙 투르네브, 페트루스 라무스, 아마루스 랑코네, 장 프랑수아 페르넬, 페드로 누네스와 교류했다. 1552년에는 런던에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 학자 지롤라모 카르다노를 만났다. 디와 카르다노는 서로 교류하는 동안 영구기관을 연구하고 마법적인 효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보석을 조사했다. 디는 파리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강의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에도 방문했다. 1564년에는 뒤스부르크에 거주하는 지도 제작자 메르카토르에게 브리튼 제도의 벽걸이 지도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지도를 가져다주었다.

1554년, 디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수학 교수직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는 당시 영국 대학들이 수사학문법에만 지나치게 치중하고, 철학[2]을 소홀히 한다고 여겼다. 디는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에게 고서, 필사본, 기록물 보존을 위한 선구적인 계획을 제시했고, 1556년에는 국립 도서관 설립을 제안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몰트레이크에 있는 자신의 집에 개인 도서관을 짓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 책을 끊임없이 수집했다. 약 4,000권에 달하는 그의 도서관은 당시 잉글랜드 내에서 최대 규모였고, 많은 학자들을 끌어들였다. 1555년, 디는 아버지처럼 길드의 세습 제도(Patrimonium)를 통해 머서스 조합(Worshipful Company of Mercers) 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디는 메리 1세를 상대로 흑마술마법을 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이후 메리 1세에 대한 반역죄가 추가되었다. 디는 성실청(스타 체임버, Star Chamber)에 출두하여 자신을 변호했지만, 종교적 평가를 위해 가톨릭 주교 에드먼드 보너에게 회부되었다. 다행히 보너는 그를 무혐의로 처분하고 풀어줬고, 디는 보너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디를 점성술과학에 관한 가장 가까운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디는 재정적 독립을 보장하는 직책을 받지 못했다.

존 디는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식 날짜를 정하는 데 관여했으며, 1550년대부터 1570년대까지 잉글랜드의 탐험 항해에 대한 고문으로 활동하며 항해에 대한 기술적 지원을 했다. 이 때 그는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1577년에는 해상 세계 제국에 대한 자신의 비전과 신대륙에 대한 잉글랜드의 영토 주장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저서인 <완벽한 항해술에 관한 디의 일반적이고 희귀한 기록(Dee General and Rare Memorials pertayning to the Perfect Arte of Navigation)>을 출간했다. 이 저서는 훗날 영국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이념적 근거로 작용한다.

존 디는 탐험가 험프리 길버트와 친분이 있었고. 잉글랜드의 저명한 시인필립 시드니 경과 그의 지인들과도 가까웠다. 디의 친구이자 제자 중 한 명은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대중에 소개하고 옹호한 인물인 토머스 디지스였다. 엘리자베스 1세가 모틀레이크에 있는 디의 집을 여러 번 방문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1574년에는 디가 여왕에게 마법의 수정을 보여주었고, 1577년에는 윈저에서 여왕에게 새로 나타난 혜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으며, 1578년에는 여왕의 건강에 대해 조언했는데, 이것이 그가 약재를 구하고자 독일로 여행한 이유이기도 했다고 한다. 여왕은 1580년에 다시 그를 방문했다.

디는 1564년에 모든 창조물의 신비로운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해 금속 원소를 포함한 다양한 기호의 조합인 독특한 상형문자에 대한 철저한 카발라적 해석인 헤르메스주의 저서 <상형문자 모나드(Monas Hieroglyphica)>를 출간했다. 이 저서는 독자들이 묵상하면 영혼이 깨달음을 얻고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으며, 디의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 책의 인쇄를 준비하기 위해 안트베르펀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570년, 디는 헨리 빌링슬리의 기하학 원론 영어 번역본에 수학 서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서문에서 수학의 중요성과 다른 예술과학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조했다. 비록 교육을 받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했지만, 이 서문은 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여러 차례 재판되었다.

1580년대 초, 디는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데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북미 탐험 항해 계획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궁정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점점 불만을 품었다. 그는 지혜를 얻기 위해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수정점을 통해 천사들을 점치는 "스크라이어"를 통해 천사들과 소통하려 했고, 이 스크라이어는 디와 천사들 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디는 본인이 저술한 방대한 서적 컬렉션에서 알 수 있듯이 천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천사론, 특히 천사와의 소통에 몰두했으며, 인간과 천사 사이의 대화에 대한 모든 기록을 수집했다. 그는 이러한 천사와의 대화와 피치노,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 등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저서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 그리고 널리 유포된 성경, 외경위경 사이의 공통점을 연구했다.

이러한 디의 행적은 당대에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디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인 제롤라모 카르다노와 친분이 있었는데, 카르다노 는 자신의 수호천사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또한 디가 자주 참조한 저서들을 집팔한 독일 학자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은 독자들에게 "위에서 오는 목소리, 위에서 가르치는 목소리"를 찾으라고 권했다. 아그리파의 스승인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는 《72세기론(De septem secundeis)》 에서 "고대 현자들의 전통에 따라" 7개의 고전 행성과 그 행성의 천사들을 기반으로 한 원거리 소통에 대해 논했다. 디는 로버트 그로스테스테의 저서 16권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로스테스테와 디는 천사뿐 아니라 광학, 수학, 천문학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천사를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이 모든 수학자, 암호학자, 철학자들은 신성한 사자, 계시 여정의 동반자,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천사들이 고대 족장들에게 공통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었다는 데 동의했다.

디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초기 연구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1582년 과거와 성격이 의심스러운 인물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그를 크게 감명시킨 영매 에드워드 켈리를 만났다. 디는 켈리를 자신의 하인으로 삼고 초자연적인 탐구에 몰두했다. 이러한 "천사와의 대화" 또는 "영적 회의"는 강렬한 기독교 신앙과 끊임없는 정화, 기도, 금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디는 이러한 활동이 인류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천사들이 이런 방식으로 여러 권의 책을 받아쓰게 해 주었다고 주장했으며, 이 책들이 에녹어를 계시하고 새로운 마법 체계를 열어주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켈리와의 강령회와 그 후의 여행에 대한 일기를 썼고, 이 일기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 강령회에서 기록된 대화는 1659년 메릭 카소본에 의해 출판되었다.

1583년, 디는 폴란드 귀족 알브레히트 라스키를 만났다. 라스키는 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돌아가는 여정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디는 켈리를 통해 천사들에게 이에 관한 몇 가지 문의를 한 후 여정에 동의했다. 디, 켈리,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1583년 9월 잉글랜드를 떠나 네덜란드와 뤼베크를 거쳐 슈테틴에 있는 라스키의 영지로 갔다가 크라쿠프로 향했다. 그러나 라스키는 재정이 바닥나자 디와 켈리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를 찾아가라고 제안했다. 유럽에서 명성이 높았던 디는 루돌프 2세의 환영을 받았지만, 에드워드 켈리는 수상한 인물이라고 의심받았다. 디와 켈리는 라스키의 도움으로 프라하에서 몇 ​​달 동안 잘 지냈지만, 교황 특사 말라스피나와 세가가 두 사람을 이단자이자 마법사로 간주하고 종교재판에 넘기려 하자 도시를 급히 떠나야 했다.

그 후 디와 켈리는 에르푸르트와 카셀로 갔지만 환영받지 못했고, 다시 크라쿠프로 돌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스테판 바토리의 환영을 받았다. 두 사람은 스테판 바토리가 루돌프 2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언해 왕의 호의를 사려 했다. 그러나 스테판 바토리는 그들의 끊임없는 금전적 요구에 곧 싫증을 느꼈고, 그들은 보헤미아로 돌아가 비팅가우에 있는 빌헬름 폰 로젠베르크의 트르제본 성 에서 새로운 후원자를 찾았다.

이 무렵, 디와 켈리 사이의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었다. 디는 영매술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고수하고 천사들과 소통하는 데 힘쓸 분, 영매술로 돈을 벌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켈리는 연금술사이자 금세공사로서 빌헬름 폰 로젠베르크와 함께 일하며 독자적으로 큰 수입을 얻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와 루돌프 2세까지 켈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심각하게 다퉜고, 결국 1587년 켈리가 비팅가우에서 열린 강령술 모임에서 디에게 별거 의사를 밝히면서 관계가 끝났다.

1589년 잉글랜드로 돌아간 디는 자기가 없는 동안 많은 책과 악기가 도난당했고 서재는 폐허가 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당시 잉글랜드에선 오컬트에 대한 비판이 갈수록 증폭되었고, 초자연적 현상을 연구한 그에 행적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다. 이에 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여왕은 1592년 그를 맨체스터의 크라이스트 칼리지(현재 맨체스터 문법학교) 학장으로 임명했다. 이전에 사제단이었던 이 기관은 1578년 왕실 칙령에 의해 개신교 기관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그는 흑마술를 부린다는 비난을 널리 받았기에 교직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그를 해임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임기 초기에 일곱 아이의 악령 빙의 에 대한 자문을 받았는데, 그는 그 사건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관련된 사람들이 여전히 방대한 자신의 도서관을 열람하도록 허락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후 새 잉글랜드 국왕이 된 제임스 1세는 일찍이 노스 베릭 마녀 재판을 단행해 100여 명에 달하는 인사들을 마녀로 몰아 처단하고, 마녀에 관한 저서를 손수 집필할 정도로 흑마술과 강령술에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존 디를 매우 불신해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디는 1604년 자신에게 흑마술사라는 낙인이 찍힌 것과 관련해 제임스 1세에게 해명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제임스 1세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존 디는 1605년 맨체스터를 떠나 서리주의 모들레이크로 이동했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한 유일한 자녀인 캐서린은 늙은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 여러 소유물을 팔아야 했다. 1608년 12월에나 1609년 3월, 81세의 존 디는 캐서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교구 기록부와 디의 묘비가 모두 없어서 정확한 사망일은 알 수 없다. 그 후 2013년 몰드레이크의 성모 마리아 교회 내부에 존 디를 기리는 기념 명판이 설치되었다.

3. 가족

존 디는 세 번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아내인 캐서린 콘스터블과는 1565년에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고, 그녀는 1574년에 사망했다. 두 번째 아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1575년에 결혼했지만 1576년에 자녀 없이 사망했다. 1578년, 51세였던 디는 23세의 제인 프롬온드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제인 프롬온드는 디와 결혼하기 전까지 링컨 백작부인 엘리자베스 피츠제럴드의 시녀로 일하며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과 인연을 맺었다. 그들에게는 아서 디(1579~1651), 마이클 디(1594년 사망), 롤랜드 디, 캐서린 디, 마디니아 디, 프랜시스 디, 마거릿 디, 그리고 아마도 시어도어 디(1588~1601) 등 7~8명의 자녀가 있었다.

디는 웨일스 민담 속 무법자 트웜 시온 카티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토머스 존스를 사촌이라고 언급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존스는 디를 여러 번 방문했다. 또한 디는 1577년부터 160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기(일명 그의 연감)를 썼는데, 이 일기에서 당시 그의 삶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587년, 영매사 에드워드 켈리는 디에게 천사가 자신과 디가 제인 프롬온드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디와 제인은 이에 대해 깊이 고민했지만 끝내 받아들였다. 그래서 9개월 후 태어난 시어도어 디는 디가 아닌 켈리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제인 프롬온드는 1604년 3월 맨체스터에서 흑사병으로 사망하여 맨체스터 대성당 묘지에 묻혔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마이클은 1594년 아버지의 생일에 사망했다. 트르제본에서 태어난 시어도어는 1601년 맨체스터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아서와 롤랜드,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한 딸 캐서린은 그보다 오래 살았다. 막내딸 마디니아(때때로 마디마로 표기됨), 프랜시스, 마거릿에 대해서는 1604년 이후 기록이 없으므로, 디가 일기를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어머니를 앗아간 전염병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서는 아버지의 연금술 및 과학 연구의 많은 부분을 도제처럼 도왔고, 켈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종종 아버지의 점술가 역할도 했다. 아서는 이후에는 연금술사이자 헤르메스주의 저술가가 되었으며, 그의 저서는 엘리아스 애쉬몰에 의해 출판되었다.

4. 존 디의 사상과 업적

존 디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그의 종교성은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헤르메스주의신플라톤주의,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만물의 근본이자 지혜의 열쇠는 숫자에 있다고 믿었으며, 신의 창조는 수를 세는 행위였다고 생각했다. 그는 헤르메스주의에 기반해 인간에게는 수학을 통해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잠재력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목표는 가톨릭개신교의 분열을 치유하고 고대의 순수한 신학을 복원함으로써 세계 종교의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카발라적 천사 마법과 실용 수학 연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스펙트럼의 고귀하고 현실적인 양 극단이라고 여겼다.

존 디가 세운 모들레이크 도서관은 파괴되기 전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도서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는 이 도서관을 짓고자 막대한 개인 비용을 소모해야 했고, 이 때문에 말년에는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그는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의 궁정에 점성술, 과학, 지리학 자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을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찍부터 옹호했고, 북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대영제국이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아서 왕의 왕국이 그린란드러시아까지 뻗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이러한 자신의 뜻을 뒷받침했다. 또한 그는 튜더 왕조트로이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으며, 1580년대에 등장한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숭배 풍조에도 힘을 보탰다.

디는 항해술과 지도 제작술을 발전시키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중요한 지도, 지구본, 천문기구 컬렉션을 소유했다. 그는 새로운 기구를 개발하고 극지방에서 사용할 수 있는 특수 항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일조했으며, 항해사들을 선발해 훈련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존 디는 수학이 인류 학습의 발전에 핵심적이라고 믿었다. 그의 관점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비록 디의 수학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지만, 그를 이 분야에서 프랜시스 베이컨보다 현대와 더 관련성 있는 인물로 보이게 한다. 존 디의 가장 오래 지속될 실질적인 업적은 대학 밖으로 수학을 보급한 것이다. 그의 유클리드 기하학 서문은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수학을 배우고 응용하도록 장려하는 데 기여했다. 이 서문은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기술 장인 계층인 '기계공'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작품이 되었다. 디의 서문은 독자들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수학적 원리를 제시했다.

존 디는 티코 브라헤의 친구였으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천문학적 계산 중 상당수는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에 기반을 뒀지만, 그가 공개적으로 지동설을 지지한 적은 없었다. 디는 이러한 지식을 활용해 그레고리력을 잉글랜드 달력으로 채택하는 걸 지지했다. 다만 그는 7가지 수정 사항을 제기했다. 그 중 첫 번째 수정 사항은 달력을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시점으로 되돌리기 위한 10일이 아니라 예수 탄생 시점으로 되돌리기 위해 11일로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또 다른 제안은 민간력과 전례력을 일치시켜 둘다 1월 1일부터 시작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종교 문제로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레고리력을 채택하는 걸 거부했다.

여러 학자들은 종종 존 디를 보이니치 문서와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1912년에 보이니치 문서를 구입한 윌프레드 미하일 보이니치는 디가 그것을 소유하고 루돌프 2세에게 팔았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디와 루돌프 2세의 접촉은 생각했던 것보다 광범위하지 않았으며, 디의 일기에는 판매에 대한 증거가 없다. 다만 그는 또 다른 암호화된 책인 <소이가의 책> 사본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5. 평가

존 디가 사망한 지 약 10년 후, 골동품 수집가인 초대 코닝턴 남작 로버트 코튼은 디의 집 주변 당을 사서 디가 생전에 남긴 문서와 유물을 발굴했다. 이때 그는 디의 천사와의 소통 기록인 여러 원고를 주로 발견했다. 코튼의 자녀들은 이 원고들을잉글랜드의 고전학자 메릭 카소본에게 팔았고, 카소본은 1659년에 이 원고들을 긴 서문과 함께 출판했다. <존 디 박사와 몇몇 영혼들 사이에서 수년간 일어났던 일에 대한 진실하고 충실한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저서의 서문에는 존 디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카소본은 디는 자기가 천사와 소통한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악령의 무의식적인 도구로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잉글랜드 대중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존 디를 악령의 속임수에 넘어간 흑마술사로 간주되는 데 일조했다.

마술사로서의 존 디의 명성과 영매 에드워드 켈리와의 관계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는 존 디를 허구 작가, 공포 소설 작가, 그리고 후대의 마술사들 에게 매력적인 인물로 여겨지게 했다. 디에 대한 허구적인 정보가 축적되면서 그의 놀라운 삶에 대한 사실들이 종종 가려졌다. 또한 이는 기독교 신앙이 투철했던 그의 진짜 모습이 가려지는 데에도 일조했다. 디는 천사들에게 가톨릭, 잉글랜드 국교회, 청교도 사이의 깊고 심각한 갈등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문의하곤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를 궁정 천문학자로 여러 번 고용했는데, 이는 그가 헤르메스주의를 실천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깊은 기독교 신앙심을 갖고 학식이 풍부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존 디의 성격과 중요성에 대한 재평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역사가인 샬럿 펠 스미스와 프랜시스 예이츠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 시대 르네상스에서 마법, 과학, 종교가 동시에 수행했던 역할에 주목했다. 펠 스미스는 존 디에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역사상 디처럼 후대에 의해 끊임없이 오해받고, 심지어 비방까지 당한 학자는 없을 것이다. 3세기 동안 그를 위해 공정한 평가를 요구하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이 모든 보편적인 비난의 원인을 이성과 과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는 그가 당대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앞서 나간 사변적 사고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재평가가 통용되면서, 존 디는 이제 학계에서 진지한 학자이자 서적 수집가, 독실한 기독교인, 유능한 과학자, 그리고 당대에 가장 학식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6. 기타


[1] 역대 영국 총리 중 유일하게 영어가 모어가 아닌 자유당의 마지막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별명이기도 하다.[2] 당시엔 인문 철학 뿐만 아니라 산술, 기하학, 천문학을 포함하는 자연철학도 여기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