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아이보리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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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755E><colcolor=#ffffff> 제임스 아이보리 James Ivory | |
이름 | 제임스 프랜시스 아이보리 James Francis Ivory |
출생 | 1928년 6월 7일 ([age(1928-06-07)]세) |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영화감독, 프로듀서, 각본가 |
활동 | 1953년 – 현재 |
신체 | 180cm |
학력 | 오리건 대학교 (미술학 /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영화학 / 석사) |
파트너 | 이스마일 머천트 (1962~2005 사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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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영화감독, 영화 제작자, 각본가.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보낸 감독으로, 시대극 영화를 우아하게 연출해 명성을 얻었다. 그를 대표하는 연출작으로 '전망 좋은 방'(1985), '모리스'(1987), '하워즈 엔드'(1992), '남아있는 나날'(1993)이 있으며, 각본가로서 대표작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 있다.
2. 생애
2.1. 초기
제임스 아이보리는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에서 태어나 오리건 대학교에서 건축과 미술을 전공했다.프랑스어를 배우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오리건 대학교를 졸업 한 후 잠시 프랑스로 갔는데, 그곳에서 영화감독의 꿈을 꾸게됐다. 이후 아이보리는 영화학과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영화예술대학원에 입학했다. 아이보리가 첫 번째로 연출한 영화는 자신이 각본을 쓰고, 촬영을 한 다큐멘터리 '베니스: 주제와 변주곡'이다. 이 작품은 석사 논문이었는데, 6.25 전쟁으로 인해 징집되어 중단되었고, 이때 그는 2년간 독일에서 복무했다. #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와 30분짜리 석사 논문 다큐멘터리를 끝내고 1957년에 USC를 졸업했다. 이 다큐는 1957년 뉴욕 타임스가 그해 최고의 비극장 영화(non-theatrical films) 10편 중 하나로 선정했다.
이후 아이보리는 인도 미니어처 그림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두 번째 영화인 '검과 피리'라는 단편 영화를 연출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인도 도시에 관한 영화인 '델리 웨이'를 만들기 위해 뉴욕 아시아 협회로부터 보조금을 받게 됐다. 당시 인도인 배우 내레이터를 기용하고 있던 인도의 영화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뉴욕에서 친해지게 되는데, 이후 이들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1961년 아이보리는 이스마일 머천트와 협력하여 영화 제작사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을 설립했다. 이 제작사는 적은 제작비로 뛰어난 시대극을 제작하는 영화사로 유명했었다. 또한 독립 영화 역사상 가장 긴 파트너십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으며, 머천트가 사망할 때까지 40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아이보리와 머천트 콤비가 첫 번째로 만든 장편 영화는 루스 프라워 합발라의 초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63년 작품 '가장'이었다. 1965년에는 인도를 무대로 연출한 '셰익스피어 왈라'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정식 출품작으로 출품됐으며, 주연을 맡은 인도의 배우 마두르 재프리[2]가 은곰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후 2편의 영화를 인도에서 찍은 후, BBC에서 다큐멘터리를 감독하기도 했다.
2.2. 전성기
1979년의 제임스 아이보리[3] |
제임스 아이보리는 1953년 20대의 어린 나이에 영화계에 데뷔를 했지만,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활동을 한 시기는 1970년대부터다. 이 시기의 아이보리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거나[4],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해 시대극 영화를 연출했다. 아이보리가 자신의 파트너 머천트와 설립한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를 통해 만든 17편의 영화는 대부분 고전 소설이나 일반 소설을 원작으로 해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두 편의 헨리 제임스 작품, 조셉 몬큐어 마치의 작품, 루스 프라워 잡발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히트 앤 더스트', E. M. 포스터[5]의 소설으로 원작으로 한 '전망 좋은 방', '모리스' 같은 영화들이 있다. 1979년에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유럽인들'을 연출해, 처음으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6]
1981년에는 매기 스미스와 이자벨 아자니가 출연한 프랑스 영화 <4중주>를 연출했는데, 이 작품은 이자벨 아자니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줬고, 공동 출연한 매기 스미스에게는 이브닝 스탠다드 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연기를 이끌어냈다. 3년 후에 공개한 <보스톤 사람들>은 헨리 제임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대극이었는데, 이 작품으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85년 아이보리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작품인 <전망 좋은 방>이 개봉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생겨 유명 감독이 됐으며, 주연을 맡은 헬레나 본햄 카터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전망 좋은 방>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의상상과 미술상, 각색상에서 3개 부문을 수상했고,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또 1986년 영국 비평가 서클 영화 부문,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 미국 국립 리뷰 위원회, 이탈리아에서 최우수 외국어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1987년 또다른 대표작인 퀴어 영화 <모리스>를 공개했는데, 이 작품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 을 수상했고, 제임스 윌비와 휴 그랜트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총 3개부문을 수상했다. '모리스'는 퀴어 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아이보리의 연출작 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 중 하나다.
<모리스>가 성공을 거둔 이후에는 두 편의 미국 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로 연출한 작품은 미국의 여성 작가 타마 야노비츠[7]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장미빛 모자>이다. 3년 후에는 <브리지 부부>가 1990년에 개봉했는데, 미국의 소설가 에반 S. 코넬의 소설을 각색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조앤 우드워드)과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로부터 여우주연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영화는 어느정도 호평을 받았으나, 흥행에서 큰 실패를 거뒀다.
1992년에는 다시 E. M. 포스터의 소설 <하워즈 엔드>를 원작으로 해 시대극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아이보리의 재기작으로, 다시 성공을 거두게 됐다. 관객들과 비평가들 양쪽 모두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로저 이버트는 2005년 자신의 '훌륭한 영화' 리스트에 이 영화를 등재했고, 레너드 말틴은 4점 만점의 4점을 주며 극찬했다. 흥행에서도 제작비 대비 3배가 넘는 수익을 거둬 성공을 거뒀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여우주연상(엠마 톰슨), 각본상, 미술상에서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또한 칸 영화제 45주년 특별상, 영국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전미 비평가 위원회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미국 감독 조합에서는 아이보리의 업적에 대해 최고의 영예인 D.W. 그리피스 상을 수여했다.
1993년에는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8]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 <남아있는 나날>을 공개했다. 주연은 '하워즈 엔드'에서 호흡을 맞춘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다. 이 작품은 제임스 아이보리 영화의 전성기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평가는 상당히 좋은데 원작소설 못지 않게 훌륭하게 만들어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제임스 아이보리의 최고작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 또한 아이보리의 작품들 중 가장 큰 흥행 성공을 거뒀는데, 제작비 대비 4배의 수익을 거뒀다.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잡아냈기 때문에 '제임스 아이보리 커리어 절정기의 작품'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남아있는 나날>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8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으나, 대진운[9]이 좋지 못해서, 단 한 부분도 수상하지 못했다. 아이보리는 아카데미에서 세 번째로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나, 또 다시 수상하지 못한다.[10]
2.3. 침체기 그리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1995년 샐리 헤밍스와 토머스 제퍼슨을 등장시킨 사극 영화 <대통령의 연인들>을 공개했다.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나, 전작에 비해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이듬해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전기 영화 <피카소>를 연출했으나 비평적으로 실패를 거뒀다.1998년에는 카일리 존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군인의 딸은 울지 않는다>를 연출했고, 이 작품은 이전 두 작품에 비해 호평을 받았다.
2000년대에도 네 작품을 연출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 흥행과 비평에서 실패를 거뒀으며, 1980년대~90년대 전성기에 거뒀던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다. [11] 2009년 개봉한 <시티 오브 유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이후 제임스 아이보리는 사실상 은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영화계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다. [12]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 소감 |
그런데 2017년 8년만의 복귀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대성공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아이보리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본을 쓰고 공동 제작자로 참여했는데, 원래는 루카 구아다니노와 공동 감독직에 있었으나,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각본가로 참여했다. 이 영화는 그가 각본에 참여했지만 연출하지 않은 유일한 장편 영화였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평론가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는데, 그의 세련된 각본과 완성도 높은 각색으로도 높은 평을 받았다.[13] 개봉 이후 많은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각색상을 수상해 오스카 위너가 됐다. 또한 89세의 나이로 오스카상과 BAFTA상을 수상해 두 상 모두에서 역대 최고령 수상자가 되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로는 2018년 영화 '댄스 어게인 위드 미 헤이우드!'를 제작했고, 2022년에는 다큐멘터리 'A Cooler Climate'를 연출하는 등 고령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3. 작품의 특징
The First Loves of James Ivory |
자신의 연인인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함께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를 설립해 300만 달러가 넘지 않는 중간 규모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문학의 결을 섬세히 살린 고풍스러운 시대극 영화를 주로 제작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또한 독일 태생의 영국인 여성 각본가인 루스 프라워 합발라가 그의 작품에 자주 각본가로 참여했는데, 이 세 명은 2002년 BAFTA에서 평생 공로상(BAFTA Fellowship)을 수상했다.[14]
아이보리 자신은 미국인이지만 영국의 소설들을 원작으로 해 호평을 받았다는 것도 특기할만하다.[15] 특히 문학의 기풍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우아하고 서정적인 스타일로 한 세대를 요약하는 형식미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초기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 연출은 사티야지트 레이와 장 르누아르의 스타일의 영향 아래 있다. 이후로는 영국 문학의 위대한 저작들에 바치는 영화를 주로 찍었고, 이때 나온 작품들이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줬다.
'하워즈 엔드', '전망좋은 방', '모리스' 등 E. M. 포스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 과거 영국 귀족사회의 모습을 담아내 대부분 이상주의와 강박관념, 그리고 계급적인 위치에 따른 위선을 단아한 형식으로 묘사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는 시대의 모순과 개인의 갈등이라는 고전적인 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비통한 슬픔을 전해준다. 아이보리의 후기작들은 주로 영국 귀족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왔으며 서정적인 동시에 내면적이고 사실주의적 정확함을 지닌 고전적이고 단아한 영화 형식미의 정수를 보여줬다. 출처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의 양식화된 이미지를 쉽게 떠올리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지만, 인도에 관한 그의 초기 영화에 내재된 다른 문화의 상호작용에 대한 통찰력 있는 조사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제임스 아이보리가 가장 잘 하는 것은 원작이 있는 작품을 명품스럽게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4. 필모그래피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제작 | 비고 |
1963 | 가장 The Householder | ○ | ○ | 장편 영화 데뷔작 | |
1965 | 셰익스피어 왈라 Shakespeare Wallah | ○ | ○ | ||
1970 | 봄베이 토키 Bombay Talkie | ○ | ○ | ||
1972 | 세이비지[16] Savages | ○ | |||
1975 | 공주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a Princess | ○ | |||
와일드 파티 The Wild Party | ○ | ||||
1977 | 로즈랜드[17] Roseland | ○ | |||
1978 | 조지와 보니의 사진 위의 훌라벌루 Hullabaloo Over Georgie and Bonnie's Pictures | ○ | |||
1979 | 유로피언 The Europeans | ○ | |||
다섯시 사십팔분 The Five Forty-Eight | ○ | ||||
1980 | 맨하탄의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in Manhattan | ○ | |||
1981 | 4중주 Quartet | ○ | |||
1983 | 인도에서 생긴 일 Heat and Dust | ○ | |||
1984 | 보스톤 사람들 The Bostonians | ○ | |||
1985 |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 | ○ |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영국 영화 협회 선정 20세기 최고의 영국 영화 73위[18] | ||
1987 | 모리스 Maurice | ○ | ○ | ||
1989 | 장미빛 모자 Slaves of New York | ○ | |||
1990 | 브리지 부부 Mr. and Mrs. Bridge | ○ | |||
1992 | 하워즈 엔드 Howards End | ○ |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 ||
1993 | 남아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 ○ |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영국 영화 협회 선정 20세기 최고의 영국 영화 64위 | ||
1995 | 대통령의 연인들 Jefferson in Paris | ○ | |||
1996 | 피카소 Surviving Picasso | ○ | |||
1998 | 군인의 딸은 울지 않는다 A Soldier's Daughter Never Cries | ○ | ○ | ||
2000 | 러브 템테이션 The Golden Bowl | ○ | |||
2003 | 프렌치 아메리칸 Le Divorce | ○ | ○ | ||
2005 | 화이트 카운티스[19] The White Countess | ○ | |||
2009 | 시티 오브 유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The City of Your Final Destination | ○ | |||
2017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 ○ | ○ |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 |
5. 여담
제임스 아이보리 (왼쪽) & 이스마일 머천트 |
- 1965년부터 2005년까지 아이보리와 그의 연인인 영화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는 꾸준히 다양한 영화를 제작하거나 연출했다. 1987년, 이 두 사람의 업적은 크리스토퍼 리브, 샘 워터스톤, 그레타 스카치, 상원의원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을 포함한 수십 명의 지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워싱턴 D.C.의 케네디 센터에서 열린 모리스 시사회에서 영예를 안았다.
- 대기만성형 영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제임스 아이보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된 영화 '전망 좋은 방'은 그가 50대 후반에 연출한 영화다.
- 1951년 오리건 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2003년에 그의 개인 논문을 대학에 기부했다.
- 1996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의 1등급인 코망되르를 수여받았다. #
- 배우 새뮤얼 웨스트는 인터뷰에서 "그(제임스 아이보리)는 매우 착해서 그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와 계속 일하고 싶어합니다. 내 직업 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경험 중 하나입니다."라고 말했다. #
- 아이보리의 영화 판권 대다수는 코헨 미디어 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복원판 재개봉 및 블루레이도 코헨 미디어 그룹 쪽에서 담당한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하워즈 엔드는 옛 판권사였던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블루레이 출시했다가 절판되었다. 전망 좋은 방만 크라이테리온에서 출시한 상태.
- 2020년 CGV에서 ‘제임스 아이보리 특별전’이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열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전망 좋은 방’, ‘모리스’ ‘하워즈 엔드’까지 4편이 상영됐다. #
- 2021년 회고록을 집필해 출판했다. 제목은 "Solid Ivory." #
6. 외부 링크
[1] 인도인 영화 제작자로, 아이보리 감독과 함께 머천트-아이보리 프로덕션스를 설립해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다.[2] 요리책을 출판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3] 유로피언 촬영 당시 찍은 사진이다.[4] 때문에 사트야지트 레이랑 연관이 있었던 편이다. 루스 프라워 합발라랑 레이랑 어느 정도 인연이 있었던 편이라 생겼다고. 레이의 몇몇 영화는 아이보리 프로덕션에서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5] 당대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으로, 대표작으로 기나긴 여행(1907), 전망 좋은 방(1909), 하워즈 엔드(1910) 등이 있다.[6] 아이보리는 1979년 '유럽인들' 이후 2000년 '러브 템테이션'까지 칸 영화제에 자주 초대받는 칸 패밀리가 된다.[7] 미국의 여성 소설가이며, '장미빛 모자'의 각본가로 참여했다.[8] 제임스 아이보리의 2005년 영화 '화이트 카운티스'의 각본가로 참여하기도 했다.[9] 쉰들러 리스트, 피아노(칸 황금종려상), 아버지의 이름으로(베를린 황금곰상)[10] 당시, 쉰들러 리스트와 피아노가 대부분의 상을 가져갔다.[11] 당시 머천트-아이보리 영화가 너무 많이 나와서 대중들이 물렸던 것도 큰 원인으로 있었다.[12] 이 영화는 제작 당시 트러블이 많아서 안소니 홉킨스와 수잔 말릭이 출연비 미지급 문제로 고소하기도 했다. 평도 좋지 않았던 편.[13] 원작 소설을 뛰어넘은 각색이라는 평도 받았는데, 실제로 원작자도 자기 책보다 낫다고 말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각색을 보며 여러 가지면에서 놀랐는데 우선 제임스 아이보리가 88세임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의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감각적인 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90세를 앞둔 노인이 ‘이 정도의 지적인 생산물을 내놓을 수 있구나’라는 사실이 놀라웠다”라고 평했다. 또한 소설과 다른 영화의 엔딩 부분도 언급하며 “각색이 정말 기가 막히다”라고 덧붙였다. #[14] 정확히는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 명의로 수상했다. 참고로 BAFTA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첫 번째 단체다.[15]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국인으로 오해받았다고 한다. #[16]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 주간에 초청받았다[17]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들과 젊은 크리스토퍼 워컨이 출연한다.[18] 1999년 조사[19]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가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