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9:17:38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D.W. 그리피스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데이비드 그리피스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물리학자에 대한 내용은 데이비드 제프리 그리피스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감독의 주요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
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맥도날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헨리 루스
<편집자>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파일:oscar_logo.svg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Academy Honorary Awar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20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927/1928년1928/1929년1929/1930년1930/1931년
워너 브라더스 찰리 채플린 없음
1931/1932년1932/1933년1934년1935년1936년
월트 디즈니 없음 셜리 템플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시간의 행진
1936년1937년
W. 하워드 그린
해럴드 로슨
에드가 버겐 W. 하워드 그린 현대미술관 영화도서관 맥 세네트
1938년
J. 아서 볼 월트 디즈니 디아나 더빈
미키 루니
고든 제닝스 외 10인 올리버 T. 마쉬
앨런 데이비
1938년1939년
해리 워너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디 갈랜드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 영화구호기금
1939년1940년1941년
테크니컬러 USA 밥 호프 네이선 레빈슨 월트 디즈니
윌리엄 가리티
존 N. A. 호킨스
RCA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그의 동료들
1941년1942년
레이 스콧 영국 정보부 샤를 부아예 노엘 코워드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1943년1944년1945년
조지 팔 밥 호프 마가렛 오브라이언 리퍼블릭 스튜디오
대니얼 J. 블룸버그
리퍼블릭 스튜디오 사운드 부서
월터 웡거
1945년1946년
내가 사는 집 (영화) 페기 앤 가너 해롤드 러셀 로런스 올리비에 에른스트 루비치
1946년1947년
클로드 자먼 주니어 제임스 바스켓 윌리엄 니콜라스 세릭
앨버트 E. 스미스
조지 커크 스푸어
빌과 쿠 (영화) 구두닦이 (영화)
1948년1949년
월터 웡거 무슈 빈센트 (영화) 시드 그라우만 아돌프 주커 진 허솔트
1949년1950년
프레드 아스테어 세실 B. 드밀 자전거 도둑 (영화) 루이스 B. 메이어 조지 머피
1950년1951년1952년
말라파가의 벽 (영화) 진 켈리 라쇼몽 (영화) 메리안 C. 쿠퍼 밥 호프
1952년1953년
해럴드 로이드 조지 미첼 조셉 M. 쉔크 금지된 게임 (영화) 20세기 폭스
1953년1954년
벨 & 하웰 컴퍼니 조셉 브린 피트 스미스 부스 & 롬 컴퍼니 대니 케이
1954년
켐프 니버 그레타 가르보 존 휘틀리 빈센트 윈터 지옥문 (영화)
1955년1956년1957년
사무라이 i: 미야모토 무사시 (영화) 에디 캔터 영화 및 텔레비전 기술자 협회 길버트 M. 앤더슨 찰스 브래킷
1957년1958년1959년1960년
B. B, 카헤인 모리스 슈발리에 버스터 키튼 리 드 포레스트 게리 쿠퍼
1960년1961년
스탠 로렐 헤일리 밀스 윌리엄 L. 헨드릭스 프레드 L. 메츨러 제롬 로빈스
1962년1963년1964년1965년1966년
없음 윌리엄 J. 터틀 밥 호프 야키마 카넛
1966년1967년1968년1969년
Y. 프랭크 프리먼 아서 프리드 존 챔버스 오나 화이트 케리 그랜트
1970년1971년1972년
릴리안 기시 오슨 웰스 찰리 채플린 찰스 S. 보렌 에드워드 G. 로빈슨
1972년1973년1974년
앙리 랑글로아 그루초 막스 하워드 혹스 장 르누아르 메리 픽포드
1976년1977년1978년
없음 마가렛 부스 월터 란츠 로런스 올리비에 킹 비더
1978년1979년1980년1981년
현대미술관 영화과 할 엘리아스 알렉 기네스 헨리 폰다 바버라 스탠윅
1982년1983년1984년1985년
미키 루니 할 로치 제임스 스튜어트 국립예술기금 폴 뉴먼
1985년1986년1987년1988년
알렉스 노스 랄프 벨라미 없음 코닥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
1989년1990년1991년1992년
구로사와 아키라 소피아 로렌 머나 로이 사티야지트 레이 페데리코 펠리니
1993년1994년1995년1996년
데보라 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커크 더글러스 척 존스 마이클 키드
1997년1998년1999년2000년
스탠리 도넌 엘리아 카잔 안제이 바이다 잭 카디프 어니스트 리먼
}}}}}}}}} ||
21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2001년2002년2003년2004년
시드니 푸아티에 로버트 레드포드 피터 오툴 블레이크 에드워즈 시드니 루멧
2005년2006년2007년2008년2009년
로버트 올트먼 엔니오 모리코네 로버트 F. 보일 없음 로렌 바콜
2009년2010년
로저 코먼 고든 윌리스 케빈 브라운로 장뤽 고다르 일라이 월랙
2011년2012년
제임스 얼 존스 딕 스미스 돈 앨런 페네베이커 할 니덤 조지 스티븐스 주니어
2013년2014년
안젤라 랜스버리 스티브 마틴 피에로 토시 장클로드 카리에 미야자키 하야오
2014년2015년2016년
모린 오하라 스파이크 리 제나 로우랜즈 성룡 린 스털마스터
2016년2017년
앤 V. 코츠 프레더릭 와이즈먼 찰스 버넷 오웬 로이즈먼 도날드 서덜랜드
2017년2018년2019년
아녜스 바르다 마빈 레비 랄로 쉬프린 시실리 타이슨 데이비드 린치
2019년2020년2021년
웨스 스투디 리나 베르트뮐러 없음 새뮤얼 L. 잭슨 일레인 메이
2021년2022년2023년
리브 울먼 피터 위어 유잔 팔시 다이앤 워런 안젤라 바셋
2023년
멜 브룩스 캐롤 리틀턴
}}}}}}}}} ||
}}}}}}}}} ||

{{{#!wiki style="margin:-10px -10px"<tablewidth=90%><tablebordercolor=#fff,#1c1d1f>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 화이트.svg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David Wark Griffith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535 Hollywood Blvd.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David Wark Griffith
파일:220px-David_Wark_Griffith_portrait.jpg
출생 1875년 1월 22일
미국 켄터키주 올덤 카운티
사망 1948년 7월 23일 (향년 73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영화감독
활동 1908년 – 1931년
배우자 린다 어비드슨(1906년–1936년)
에블린 볼드윈(1936년–1947년)
서명
파일: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서명.svg

1. 개요2. 생애3. 논란4. 기타5. 연출작 일람

[clearfix]

1. 개요

우리 모두의 스승.
찰리 채플린#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보통 이름을 이니셜로 표현해 D. W. 그리피스, 간단히 그리피스라고도 한다.

밀짚모자[1]를 쓰고 큰 메가폰으로 소리치는 영화감독스테레오타입의 기본이 되고[2] 현대 영화 기법의 기본을 마련한 감독이다. 또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의 4명의 창립자[3] 중 한 명으로써, 후대의 영화 발전에도 힘썼다.

2. 생애

원래 연극 연출가였으나 당시 한창 뜨던 새로운 미디어였던 영화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영화계로 진입 후 《국가의 탄생[4][5]을 연출하며 유명해진다.
파일:external/image.cine21.com/M0010013_01.jpg 파일:attachment/그리피스/intolerance.jpg

1915년작인 《국가의 탄생》은 토머스 딕슨의 1905년작 《더 크랜스맨》을 각색한 것인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11만 달러를 들인 초특급 블록버스터였다. KKK단을 미화하는 동시에, 남북 전쟁 이후 남쪽으로 몰려와 땅을 사재기하고 남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북부 자본가들(carpetbagger)을 까는 영화로, 작중에 등장하는 흑인들 중 백인에게 충성하는 흑인은 좋게 그려지지만 나머지 흑인의 대우는 좋지 않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만연하던 인종차별 때문인지 흑인은 캐스팅하지 않고 백인들을 분장시켰다. 그럼에도 조연이나 엑스트라는 주변의 반대에도 흑인들을 캐스팅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탄생은 미국에서만 1천만 달러, 전세계에서 1억 달러로 추정되는 엄청난 금액을 벌어들였다. 이는 무성영화 역사상 최고로 높은 수익을 벌어들인 영화로, 현재 물가로 따지면 10억 달러는 그냥 넘어간다.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치냐면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미국 박스오피스 역사상 흥행 순위 12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이다.[6] 이러니 사람들에게 금방 입소문을 탈래야 안 탈수가 없을 정도. 웃긴 건 그리피스는 이 영화를 자신의 흑인 하녀에게 보라고 티켓을 줬다가 돌아온 하녀가 화를 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포레스트 검프》에서도 패러디되었다.

1916년에는 《인톨러런스》를 제작했다. 흑인들을 비하한 것에 대한 사죄라고는 하는데, 대신 비하 대상이 유대인으로 바뀐 게 문제. 그러나 지금은 4가지 스토리를 평행 구조(액션)로 보여주고, 소비에트 몽타주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영화상 걸작으로 재평가받아서 국가의 탄생보다 더 평이 좋다. 이외에도 <꺾인 꽃>이라던가 <풍운의 고아> 같은 릴리안 기시와 함께한 멜로드라마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릴리안 기시의 대표작들도 그리피스와 작업했던 영화들이다.

《인톨러런스》를 제작할 때는 외부단체에서 유대인들을 조금 출연시키라고 압력을 넣자, 영화사가 그리피스에게 유대인의 수를 줄이고 로마인의 수를 늘리라고 해서 필름을 불태웠다.[7] 한편 반라의 여자 노예들을 많이 등장시키라고 했지만 그리피스가 거절해서, 그 부분은 다른 감독이 촬영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걸작 영화들을 제작하다 1924년 <삶은 아름답지 아니한가(Isn't Life Wonderful)가 26만 달러 제작해 손익을 넘기지 못하자 책을 지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나갔다.

1920년대 중반, 유성 영화가 생겨나자, 그도 유행에 맞추어 <도로의 여인>을 부분 음성 영화로, 이윽고 <에이브러햄 링컨>, <몸부림>을 연달아 음성 영화로 내놓았으나, 실패 후엔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1948년, 호텔 로비에 뇌출혈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 병원에 이송했지만 그대로 사망했다. 사망 1년전에 이혼도 했고 여러모로 말년 운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인지도도 떨어진 상태였기에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3. 논란

국가의 탄생에서 보여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시각은 당대에도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고, 지금은 논란의 여지 없이 모두가 비판한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어떤 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인 것이다.

사상적 문제와는 별개로 영화라는 매체의 역사에 큰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는 인물인 탓에,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할 때 교수들이 상당히 골머리를 앓는 문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 학문적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것은 권장하되,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견해에는 절대 동조하지 말라고 강력히 주의를 주는 식으로 넘어가는 상황이다.

한편 그리피스가 골수 인종차별주의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많다. 국가의 탄생 이외에 만든 영화들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대표작인 '꺾인 꽃'은 차별당하는 중국계 미국인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이고, '라모나' 역시 당시에는 백인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체로 그의 대표작인 국가의 탄생이 인종차별적 색깔이 짙은 작품이라는 것은 인정하되, 감독 본인이 확고한 인종차별주의자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의식은 있긴 했지만 그 생각의 깊이가 얕았고 본인만의 신념이 없어서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쉽게 찬동한 것에 가까웠다는 의견이 다수다.

그리고 의외로 초기 공산주의자, 즉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술되었듯 본인만의 줏대가 부족해서 당시 전형적인 백인 지식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이의 대표적인 예시로 상술된 흑인 하녀에게 국가의 탄생 관람표를 줬다가 크게 항의를 받은 일화가 자주 거론된다.

4. 기타

특히 나한테서 표절해 간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어.

5. 연출작 일람



[1] 대머리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해 썼다고 한다.[2] 영화를 감독할 때 메가폰을 쥔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리피스가 대규모 촬영을 할 때 스탭들에게 메가폰으로 소리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3] 찰리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그리피스.[4] 누군가는 이 영화를 '최초의' 극영화, 혹은 '최초의' 장편영화라고 말하는데, 이는 엄연히 잘못된 주장이다. 첫 번째로 최초의 극영화, 즉, 이야기로서의 영화를 말한다면 《달 세계 여행》이 선행한다. 두 번째로 최초의 장편영화는 1906년에 공개된 《켈리 강도단 스토리》다. 그러므로 《국가의 탄생》은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없는 영화다.[5] 사실 이러한 오해를 낳은 이유는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의 문법, 이른바 '고전적 편집'이 체계화되었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 여러 영화적 시도는 있었으나 그리피스에 이르러서야 20년간 찾아낸 영화제작방식을 효율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틀을 만든 것이다. 후대부터 계속 발전한 제작기술 정도만 배제한다면 그야말로 현대의 영화 만드는 기초틀은 이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6] 이 위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E.T., 십계, 스타워즈 같은 영화사에 손꼽을만한 걸작들 뿐이다.[7] 원래 영화 상영이 끝나버린 프린트 필름은 특수한 시설에서 다 소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