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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David Wark Griffith | |
출생 | 1875년 1월 22일 |
미국 켄터키주 올덤 카운티 | |
사망 | 1948년 7월 23일 (향년 73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영화감독 |
활동 | 1908년 – 1931년 |
배우자 | 린다 어비드슨(1906년–1936년) 에블린 볼드윈(1936년–1947년)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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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보통 이름을 이니셜로 표현해 D. W. 그리피스, 간단히 그리피스라고도 한다.
밀짚모자[1]를 쓰고 큰 메가폰으로 소리치는 영화감독의 스테레오타입의 기본이 되고[2] 현대 영화 기법의 기본을 마련한 감독이다. 또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의 4명의 창립자[3] 중 한 명으로써, 후대의 영화 발전에도 힘썼다.
2. 생애
원래 연극 연출가였으나 당시 한창 뜨던 새로운 미디어였던 영화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영화계로 진입 후 《국가의 탄생》[4][5]을 연출하며 유명해진다.1915년작인 《국가의 탄생》은 토머스 딕슨의 1905년작 《더 크랜스맨》을 각색한 것인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11만 달러를 들인 초특급 블록버스터였다. KKK단을 미화하는 동시에, 남북 전쟁 이후 남쪽으로 몰려와 땅을 사재기하고 남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북부 자본가들(carpetbagger)을 까는 영화로, 작중에 등장하는 흑인들 중 백인에게 충성하는 흑인은 좋게 그려지지만 나머지 흑인의 대우는 좋지 않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만연하던 인종차별 때문인지 흑인은 캐스팅하지 않고 백인들을 분장시켰다. 그럼에도 조연이나 엑스트라는 주변의 반대에도 흑인들을 캐스팅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탄생은 미국에서만 1천만 달러, 전세계에서 1억 달러로 추정되는 엄청난 금액을 벌어들였다. 이는 무성영화 역사상 최고로 높은 수익을 벌어들인 영화로, 현재 물가로 따지면 10억 달러는 그냥 넘어간다.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치냐면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미국 박스오피스 역사상 흥행 순위 12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이다.[6] 이러니 사람들에게 금방 입소문을 탈래야 안 탈수가 없을 정도. 웃긴 건 그리피스는 이 영화를 자신의 흑인 하녀에게 보라고 티켓을 줬다가 돌아온 하녀가 화를 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포레스트 검프》에서도 패러디되었다.
1916년에는 《인톨러런스》를 제작했다. 흑인들을 비하한 것에 대한 사죄라고는 하는데, 대신 비하 대상이 유대인으로 바뀐 게 문제. 그러나 지금은 4가지 스토리를 평행 구조(액션)로 보여주고, 소비에트 몽타주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영화상 걸작으로 재평가받아서 국가의 탄생보다 더 평이 좋다. 이외에도 <꺾인 꽃>이라던가 <풍운의 고아> 같은 릴리안 기시와 함께한 멜로드라마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릴리안 기시의 대표작들도 그리피스와 작업했던 영화들이다.
《인톨러런스》를 제작할 때는 외부단체에서 유대인들을 조금 출연시키라고 압력을 넣자, 영화사가 그리피스에게 유대인의 수를 줄이고 로마인의 수를 늘리라고 해서 필름을 불태웠다.[7] 한편 반라의 여자 노예들을 많이 등장시키라고 했지만 그리피스가 거절해서, 그 부분은 다른 감독이 촬영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걸작 영화들을 제작하다 1924년 <삶은 아름답지 아니한가(Isn't Life Wonderful)가 26만 달러 제작해 손익을 넘기지 못하자 책을 지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나갔다.
1920년대 중반, 유성 영화가 생겨나자, 그도 유행에 맞추어 <도로의 여인>을 부분 음성 영화로, 이윽고 <에이브러햄 링컨>, <몸부림>을 연달아 음성 영화로 내놓았으나, 실패 후엔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1948년, 호텔 로비에 뇌출혈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 병원에 이송했지만 그대로 사망했다. 사망 1년전에 이혼도 했고 여러모로 말년 운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인지도도 떨어진 상태였기에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3. 논란
국가의 탄생에서 보여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시각은 당대에도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고, 지금은 논란의 여지 없이 모두가 비판한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어떤 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인 것이다.사상적 문제와는 별개로 영화라는 매체의 역사에 큰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는 인물인 탓에,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할 때 교수들이 상당히 골머리를 앓는 문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 학문적으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것은 권장하되,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견해에는 절대 동조하지 말라고 강력히 주의를 주는 식으로 넘어가는 상황이다.
한편 그리피스가 골수 인종차별주의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많다. 국가의 탄생 이외에 만든 영화들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대표작인 '꺾인 꽃'은 차별당하는 중국계 미국인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이고, '라모나' 역시 당시에는 백인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체로 그의 대표작인 국가의 탄생이 인종차별적 색깔이 짙은 작품이라는 것은 인정하되, 감독 본인이 확고한 인종차별주의자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의식은 있긴 했지만 그 생각의 깊이가 얕았고 본인만의 신념이 없어서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쉽게 찬동한 것에 가까웠다는 의견이 다수다.
그리고 의외로 초기 공산주의자, 즉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술되었듯 본인만의 줏대가 부족해서 당시 전형적인 백인 지식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이의 대표적인 예시로 상술된 흑인 하녀에게 국가의 탄생 관람표를 줬다가 크게 항의를 받은 일화가 자주 거론된다.
4. 기타
특히 나한테서 표절해 간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어.
- 릴리안 기시와 라이오넬 배리모어가 출연한 백주의 결투 촬영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옛 스승의 등장에 릴리안과 라이오넬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리피스는 지정된 장소에 숨어서 봐야 했다.
- 블라디미르 레닌이 특히 좋아했던 영화 감독이기도 했다. 감독이 사회주의 성향인 것도 있었고 그리피스 감독의 작품 속에 담겨져 있는 함의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5. 연출작 일람
- 1908년 돌리의 모험
- 1909년 도둑들의 헌신
- 1910년 거친 도로
- 1911년 언덕 위의 사랑
- 1912년 보이지 않는 적
- 1913년 어둠의 집
- 1914년 영광스럽지 못한 메달, 학살,탈출
- 1915년 국가의 탄생
- 1916년 인톨러런스
- 1918년 위대한 사랑
- 1919년 꺾인 꽃
- 1920년 동부 저 멀리
- 1921년 풍운의 고아
- 1923년 하얀 장미
- 1924년 인생은 훌륭하지 않다
- 1925년 모래 위의 샐리
- 1926년 사탄의 슬픔
- 1928년 사랑의 드럼들, 남녀의 전투(1914년판 리메이크작)
- 1929년 포장도로의 레이디
- 1930년 에이브러햄 링컨(유성영화)
- 1931년 몸부림(마지막 영화)
이외 수십편의 영화들이 있다.
[1] 대머리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해 썼다고 한다.[2] 영화를 감독할 때 메가폰을 쥔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리피스가 대규모 촬영을 할 때 스탭들에게 메가폰으로 소리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3] 찰리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그리피스.[4] 누군가는 이 영화를 '최초의' 극영화, 혹은 '최초의' 장편영화라고 말하는데, 이는 엄연히 잘못된 주장이다. 첫 번째로 최초의 극영화, 즉, 이야기로서의 영화를 말한다면 《달 세계 여행》이 선행한다. 두 번째로 최초의 장편영화는 1906년에 공개된 《켈리 강도단 스토리》다. 그러므로 《국가의 탄생》은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없는 영화다.[5] 사실 이러한 오해를 낳은 이유는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의 문법, 이른바 '고전적 편집'이 체계화되었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 여러 영화적 시도는 있었으나 그리피스에 이르러서야 20년간 찾아낸 영화제작방식을 효율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틀을 만든 것이다. 후대부터 계속 발전한 제작기술 정도만 배제한다면 그야말로 현대의 영화 만드는 기초틀은 이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6] 이 위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E.T., 십계, 스타워즈 같은 영화사에 손꼽을만한 걸작들 뿐이다.[7] 원래 영화 상영이 끝나버린 프린트 필름은 특수한 시설에서 다 소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