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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9:33:10

제독의 결단(함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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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등장인물3. 스토리
3.1.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3.2. MIDWAY3.3. 철저해협3.4. 라바울 19433.5. 절대국방권3.6. あ호 작전으로의 길3.7. 레이테에 산산이 흩어지다3.8. 일억특공3.9. 칸무스의 가장 긴 하루13.10. 칸무스의 가장 긴 하루2

1. 개요

염세주의적 동인서클 타코츠보야가 종전 70주년인 2015년을 맞아 C88 코믹마켓부터 출품한 함대 컬렉션+2차 세계대전 동인지. 게임 제독의 결단과 이름만 같다. 칸코레 갤러리 등에서는 진군하라 전차도를 피떡인지로 칭했던 전적 때문인지 제독의 결단은 통구인지로 칭하는 경우가 있다.

TK 특유의 염세적인 플롯과 배경에 대한 기대, 이미 예고판에서부터 언급되는 국민과 내각, 군부의 광기와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분석[1][2], 일본군 특유의 똥군기를 발산하는 1함대의 포스[3]를 보여주어 나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부터 국내 칸코레 유저와 밀덕들의 호응을 얻었었다.[4] 다행히 10권 끝까지 나온 현 상황에서는 극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마지막까지 광기로 작동하는 일본의 수뇌부를 어느 정도 묘사했기에 극우들의 찬양 메시지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전반부에서는 일본군의 무모함과 비합리성[5] 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작중에서 드러난 것에 비해 수탈행위나 전쟁범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하는 국내 팬덤이 많은 편. 그러나 후반부에 전황이 심각하게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일본 사회 내부가 미쳐돌아가는 내용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일본어 위키에서만 나오는 사호작전의 학살명령이 독일에게서 나왔다는 대목으로 보아 애초에 타코츠보야가 언급한 내용들은 일본이 대놓고 전과에 대해 대국민 사기를 친 것이 아니라면 서구 자료들과의 엄밀한 교차검증을 거치는 게 아니라 일본어 위키피디아나 일본내 사료들을 사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로 도조 히데키 과대 미화 의혹도 있는데, 작중에서 도조 히데키가 신중론자들을 몰아낼땐 언제고 옥음을 듣고 자기 주장을 철회해 반전주의자가 되어 자기가 밀어낸 인간들처럼 대미개전을 실제로 개전될때가지 반대한 것이 한국 일부 팬덤들이 지적한 것인데 실제로 개전직전까지의 도조 히데키의 의견은 신중론자들과 유사한 대미전쟁 반대였다. 개전직전까지의 모습만 보고 믿은건지 급진파좀 조용히 시킨다고 개전이후 그들의 수장인 도조 히데키를 끌어들인 쇼와 덴노의 판단[6]과 거기에 일단 충신이랍시고 옥음을 받든다며 자기 주장을 180도 바꾼 도조를 비꼬는 듯한 블랙조크에 가깝다. 즉 작중에서 도조가 전쟁저지를 못했다며 소리죽여 오열한건 충신임에도 덴노의 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불충때문이지 절대로 평화주의자라서거나 현실주의자라서 운게 아니다.[7] 다만 실제로 '전쟁전에는 개전에 반대한 인사도 있었다'는 사실을 책임축소에 이용해 먹는 경우도 많고, 개전반대라는 내력 하나만으로 '제정신 박힌 장군/제독' 취급을 받는 인물도 많다. 개전반대 때문에 거품이 제대로 낀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야마모토 이소로쿠다. 후술하겠지만 TK가 원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아무리 전쟁에 미쳐있었다는 전제 하에서의 발언이라고는 해도 욱일기 하치마키(반다나)를 메고는 "동양민족을 대변하여 미제에게 철퇴를 내린다"는 발언을 하는 모습을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이 있다.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이 단순히 만화의 상황과 멋만 본다면 실제로 그렇게 오해할 정도로 그렸다. 또한 문제가 많을 뿐더러 사실이라고 해도 선전포고 없는 기습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헐 노트설을 차용, 개전을 정당화하려는 듯한 어조 또한 지적된다,[8] 해당장면에서 태평양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친 "마치 쳐 들어와 달라는 것 같잖아..."라는 좀 어이없는 대사는 덤.[9]

사실 후반부는 제목 그대로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을 크게 인용한 것인데 이 책은 총력전연구소의 소장 관료들이 극심한 관료주의의 병폐에 철저히 무시당했음을 비판하는 것이 주요 내용중 하나였다. 때문에 이 작품을 자세히보면 작중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건 총력전연구소(를 대신해 등장한 시라누이) 뿐이고 대부분의 칸무스를 포함한 나머지 인물들은 전부 변명과 책임회피만을 일삼고 있거나 대본영의 세뇌에 넘어가서 모든 것을 믿어버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간에 제독이 "해군에 몸을 담았다면 누구나 이길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육군은...."식의 독백을 하는 장면이 있어 해군선옥론을 펴는 듯 했지만 몇 페이지 넘겨봐도 알수 있 듯이. 마지막에는 육군과 대립하지 않고 개전에 동의한건 정부나 해군도 마찬가지었고 실질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도 해군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타코츠보야는 염세주의 성향이 강해 작품속에 제정신인 등장인물을 거의 넣지 않는지라 누구에게나 감정이입해버리면 망한다.[10][11]

하지만 TK는 애시당초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책 자체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용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은 일본의 전쟁 책임에 관한 책이 아니라, 1980년대부터 지적된 일본의 수동적인 관료주의가 알고보면 유서깊고, 또 치명적인 패전을 초래했음을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한 책이다. 따라서 해당 책이 비판하는 범주는 굉장히 좁고, 오히려 소수의 잘못된 책임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변명에 가깝다. TK는 그저 책에 나온 사실을 베끼기만 할 뿐[12], 정작 왜 당대 일본이 미쳐있었는지, 왜 전쟁을 벌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은 없다. 앞서 언급된 콩고의 발언도, 도조의 오락가락하는 태도 역시 사실은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에 나오는 장교의 말을 그대로 베껴온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책이 전쟁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했다는 평가는 작가 본인을 포함한 밀덕들의 어설픈 역사 이해에 불과하다. 뭔가 있어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원작의 해석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몇 부분은 책 내용의 복붙조차 제대로 안했다.

또한 칸코레 팬덤에서 꽤 민감한 주제인 심해서함 = 미해군 설이 그대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심해서함은 외모와 이름만 다를 뿐 서방에서 운용하는 칸무스라는 설정[13]이며 맨 처음 외에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칸코레 매체에서 흔히 묘사되는 무차별적으로 싸우는 괴물들이 아니기에 첫 장면에서 해상봉쇄 중 석유와 폐철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상선을 보고 넘어가 준다.

하여튼 칸코레가 일본 군함의 의인화라는 요소를 차용한 점에 있어서 공식에서는 단순히 군함과 태평양 전쟁에서 벌어진 전투와 그 주변요소만을 차용하고 그 외에는 철저히 침묵하는 쪽으로 극우논란을 피하고 있다면 제독의 결단에서는 정 반대로 미소녀로 의인화한 군함으로써의 라이트 밀리터리 요소는 최소화하고 정치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14] 당대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2부부터는 전쟁과정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일본측이 자기들의 전과에 대해 왜곡보도나 오인을 한 경우가 아니면 주로 일본측의 입장에서 쓴 내용들이 대부분이다.[15]

2부, 3부는 1부때보다 더 심각한 역사 설명충 학습만화라는 비판을 듣고 있는 상황이다. 걸판배틀로얄이라는 큰 틀과 전쟁영화 패러디 등을 통해 포텐셜이 발휘된 진군하라 전차도와 달리 진주만 공습부터 미드웨이 해전까지의 태평양 전쟁의 큰 흐름을 굉장히 장황한 텍스트로 요약해버렸기 때문. 내용의 절반 가량이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군의 연승행진에 할애되어있고 나머지 절반도 그 절반은 미드웨이 해전의 전초전을 다루기에 실제 미드웨이를 다룬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3부에서도 과달카날 전투의 해설에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일본 편향적인 사료 사용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말해 칸코레판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비판을 듣고 있기도 한다. 특히 후부키의 경우 1권만 하더라도 주인공에서 3권이 되자 준주연급으로 대우가 수직 급락하였다. 그나마도 죽어버리고 이젠 서사를 이끌어갈 주인공도 없다. 그나마 1권 맨 앞장에 콩고가 반쯤 가라앉은 컷이 있어서 콩고가 이후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 그러기에는 1권 이후 콩고의 비중이 너무 적다. 4권 이후부터는 전후생존함인 유키카제가 주인공이 되긴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작가 스스로 이게 19금 동인지인지 역사책인지 갈피를 못잡는 듯한 낮은 H신의 퀄리티와 엄청난 텍스트량으로 오죽하면 번역을 하던 깡갤에서 H신만 지워서 전연령으로 내놓았고, 8권쯤 가서는 번역자가 텍스트량을 못버티고 도망쳤다.

위의 플룻의 실사구현에 대한 옹호/비판은 둘째치고 '칸코레의 2차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데 이쿠가 "데찌"라는 대사를 하는 것과 이나즈마와 이카즈치를 계속해서 혼동하는 것, 아이오와가 뜬금없이 에식스의 대역으로 등장하는등 작가가 칸알못 인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 개인 창작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준영리적 목적의 판매용 책인데다가, 이미 작품의 재해석을 넘어 도용 수준으로 캐릭터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영락없는 동인파락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깡꼬레도 처참한 역사를 모에로 팔아먹는 역사파락호긴 하지만 어쨌든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다.

2. 등장인물


* 무츠키(함대 컬렉션)
후부키와 같은 동기생. 같은 훈련병으로 친해졌지만 하필이면 후부키가 속한 조가 꼴지를 하자 서로에게 주먹질 하는 가혹행위를 당하기도 한다. 역사 그대로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군 중폭격기의 폭격에 맞아 굉침.
일본의 입장에서는 개전 직전에 육군의 폭주를 막아보려고 쓴 땜빵 인사였기 때문에 내정 부분에서 극히 무능했다. 전쟁이 개전되자 자기가 미국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며 점점 미쳐돌아가다가 전쟁 과정은 통수권을 지킨다며 해군과 육군이 알아서 하도록 냅두면서도 자신의 정적을 숙청했고 자기자신은 정신력 타령이나 하면서 독전행위를 지속하면서 헌병대 등을 동원해 언론을 탄압한다.
작품에서 당시 일본 국민들이 가진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캐릭터.[27]


[1] 이미 예고편부터 '총력전 연구소'의 일동 전원이 '일본이 반드시 필패한다.'라고 주장하는데 '총력전 연구소'는 실제로 일본제국이 전쟁당시 일본의 인재들을 집어넣은 가상 전투&결과 분석실로 실제로도 연구원들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일본이 필패한다.라고 주장했으나 모은 의미도 무색하게 일제 수뇌부는 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2] 일본 현지에선 타코츠보야가 주요 참고서적으로 삼은 책이자 그 계기인 총력전 연구소의 연구내용에 대해 분석한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이란 서적이 있는데 타코츠보야는 제독의 결단의 후기에서 이시바 겐 방위대신이 간 나오토 총리에게 일독을 권했던 일화를 듣고 흥미가 생겨서 접했다가 읽을수록 '일본은 왜 질 수 밖에 없었나'가 문화론이나 조직론에 대한 내용까지 들어갔다는 게 흥미로웠다고 한다.[3] 실제로 2차세계대전 당시 일제에서 전함들을 여러 흉흉한 것에 대해 빗댄 구절로 귀신 야마시로, 지옥 공고 소문난 뱀 나가토 / 휴우가에 갈까, 이세에 갈까, 아예 해병단에서 목이나 맬까 / 지옥 하루나에 귀신 콩고, 나찰 키리시마 야차 히에이 / 타지마라 야마시로 귀신보다 무섭다(鬼の山城、地獄の金剛、音に聞こえた蛇の長門 / 日向行こうか、伊勢行こか、いっそ海兵団で首吊ろか / 地獄榛名に鬼金剛、羅刹霧島、夜叉比叡 / 乗るな山城、鬼より怖い)라는 게 유행했었다. 단 작중에선 적어도 칸무스끼리는 똥군기를 잡긴 커녕 오히려 야마토혼이 있으니 귀축영미는 그냥 때려밟는다고 주장하던 후부키에게 콩고급자매들이 영미국민들은 영미혼이 있다며 자제시키기도 했다.[4] 밀덕갤과 깡갤에서 일부 갤러들이 상술한 진군하라 전차도에 대해 밝히며 혹시나 모를 극우전환 사태의 가능성을 낮다고 알려준 것도 한몫했다.[5] 일본군 하부에서 성행했던 똥군기와 가혹행위, 상부의 '기름이 없으면 인도네시아를 점령해 비축유를 접수한다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울고갈 전쟁계획, 그나마 육군이나 일제정부측에 비하면 상대적으론 전력차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렸지만 오로지 천황에게 복종한다는 이유만으로 패배할거라 말한 사람들을 갈궈대며 자기들도 안믿는 근성론을 강요한 해군 수뇌부와 중국과 싸우며 자기나라를 자기들 전쟁에 견인하려는 폭주기관차가 되어 버린 노답 육군. 복화술인형과 다름없는 존재였으면서 정작 자기자신의 결단이 필요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기나라를 지옥으로 끌고갈 선택을 한 쇼와 덴노에다 막부가 하던 것처럼 천황 꼭두각시화부터 시작해 서로간의 손발조차 안맞는 여러모로 막장이 되어버린, 제어장치가 증발한 답이 안나오는 정치체계, 윗물이 흐려지니 아랫물도 따라 흐려져 오만함 밖에 없는 미제따윈 응징하라며 전쟁에 찬성일색인 여론과 국민등등 어지간한 그 당시의 병크는 거의다 그려놨을 정도.[6] 실제로 그나마 쇼와 덴노가 총사령관을 지정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이 생겼던건 그 당시 고노에 내각이 총 사퇴한덕에 원래 정치를 담당한 사실상 총책임자인 총리와 그 측근들이 물러가며 순간적으로 명목상 총책임자일뿐인 천황이 권력까지 가지게 된 영향인데 문제는 이 틈을 잡아 황족 후보를 수상으로 추대하여 천황 내각을 굳혀 천황으로 권력을 집중시켜 한창 폭주와 의심암귀등으로 개판인 군 통수부에 관한 엄격한 권위적 제압을 실행했으면 그래도 어느정도 상식적인 판단을 보여준 그 당시 덴노였으면 이후 대미개전을 저지하는등의 성과를 이룰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히로히토(쇼와 덴노)는 한순간 맛이 간건지 아니면 그 정상적인 모습이 사실 맛이 간 모습이었던 건지 과격파를 다스린답시고 자신에게 임시적으로 쏠린 권력을 굳히긴 커녕 도조 히데키에게 태반을 양도해 도조 내각을 만들어버렸다. 그나마 천황의 의도대로 과격파들이 얌전해졌다면 어느정도 호평이라도 해보겠는데 정작 개전직후의 도조 히데키는 과격파를 관리하긴 커녕 오히려 자기가 앞장서서 과격파들을 이끌어버린 화려한 전과를 들고왔다.[7]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원작에 따르면 사실 도조가 태평양전쟁의 총대를 맨 책임이 있지만 도조 자신은 서방과 결착을 짓더라도 일단 중일전쟁을 마무리짓고 전쟁이 터지더라도 일단은 유럽에 정신이 팔린 영국과 먼저 개전하는 쪽으로 가급적 중국을 정리하고자 했으나, 도조의 반대파는 하필이면 중국에서 발을 빼고 국력을 최대한 키워서 미국과 결전 준비를 하자던 이시하라 간지였던 이유도 있다. 또한 대본영 육군부 전쟁지도반의 기밀전쟁일지는 도조 내각의 이같은 입장변화를 두고 도대체 도조 육군대신에게 절조는 있는가 없는가?라는 비난을 가했다. 원작에서도 이런 도조의 이중행위를 육군은 물론이고 개전 반대파들까지도 지적하고 나섰을 때 도조 자신은 '지금은 육군만을 맡는 게 아니라 한 국가를 맡기 때문에 입장이 변할 수밖에 없다'고 해명하긴 한다. 어쨌든 그는 내각 구성 이후 어쨌든 개전을 막으려고 노력은 했다. 진짜 황당한 것은, 대미개전이 결행되었을 때만 해도 소리죽여 울던 그가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 직후에는 육군대신 시절의 호전광으로 되돌아와 있었다는 점. 그야말로 줏대 없는 인간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그가 수상이라는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천황으로부터의 명을 받은 중압감 때문으로 추측되며, 전쟁이 개시되었을 때는 그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진주만 공습이 생각 외의 성공을 거두자 의외로 미국도 별거 아니다라는 오판을 해버리고 맛이 가버린 것이다.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에서는 진주만 공습 성공 이후 맛이 가버리는 걸로 나오지만 제독의 결단에서는 진주만 공습이 묘사된 미드웨이편에서 맛이 가버린다.[8] 다만 헐 노트를 보고 "이 정도라면 개전해서 져도 잃을게 없다!"라고 소리치는 게 방금까지 판단력 없는 모습만 보여줬던 군관료들이다 보니 정말로 직접적 원인제공으로 지적하는건지는 애매하다. 또한 우익들의 18번인 "일본은 전쟁할 생각 없었는데 헐 노트로 협박당해서 어쩔수 없이 개전했다" 같은 주장은 딱히 없고, 앞으론 교섭을 말하면서 뒤로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에게 미국이 강경하게 최후통첩을 날리는 장면에 가깝게 그려졌다. 원작에서도 나오는 "일본을 구슬릴 시기는 끝났소. 문제는 우리가 너무 큰 위험에 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본이 먼저 공격하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오." 루즈벨트의 발언은 일견 영악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사실 미국은 바보같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게 아니다. 처음부터 그 나치 독일과 동맹이었던 일본을 좋게 봤을리는 없고 도조가 수상에 취임했을 즈음에는 전쟁을 거의 확신했다. 물론 필리핀이나 태평양 남방에서 적절하게 대처하면 될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가 선전포고도 없이 중요 전략거점에 선빵을 맛깔나게 맞아버려서 완전히 스위치가 올라간것이지....[9] 다만 바로 전에 미국이 도조의 수상취임 소식을 입수하고 상선들을 우호국들 쪽(토러스 해협)으로 뺐다는 내용이 나왔었다. 즉 일본이 멋대로 낚인 것. 사실 미국이 정치적으로 어느정도는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한 정황은 충분히 존재한다. 이에 대해 선전포고 없이 본국의 군항에 공습을 가하는 미친 짓으로 대답했다는 게 전혀 정당화되지는 않지만.[10] 타코츠보야의 작품에는 (진군하라 전차도 정도를 제외하면) 독자들이 '공감할만한 캐릭터'가 들어가지 않는다. 멀쩡한 캐릭터라도 중간에 정신이 나가 버린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캐릭터들을 '관찰'하며 인간 비판현시창론에 동참하는 게 거의 유일하게 즐길수 있는 방법인데 타코츠보야는 그걸 하필 2차창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다.[11] 사실 이 작품은 주인공들은 둘 다 살짝 미쳐있는 부분이 있고, 나머지 단편적으로 나온 칸무스들은 대부분 역사 그대로 죽어나간다. 게다가 그 주인공들마저 역사 그대로 전부 퇴장. 인간 비판 보다는 현시창 쪽에 더 비중이 높다.[12] 본인은 더 조사를 해보았다고 하지만,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책에 나온 것 이외의 새로운 내용은 없다.[13] 따지고 보면 제독의 결단 자체가 태평양전쟁을 다루는 만화이니 굳이 적 캐릭터인 심해서함을 두고 1권 제작 당시에는 실장되지도 않았던 미해군 칸무스를 일일이 새로 디자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서방을 귀축영미라 부르며 그들의 함선들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당시 일본의 정신상태로 볼 수도 있다.[14] 오히려 칸무스의 함생에 대한 접근은 이 동인지보다는 '역사상의 칸코레'라는 웹코믹이 더 제대로 접근하고 있다. 물론 이쪽도 초반에는 잘못된 정보를 풀기도 했다.[15] 가령 전황에 논란이 있는 와레 아오바는 일본측에서는 정설로 취급되고 있고 이 동인지에서도 언급되지만 미군측에서는 이런 발광신호를 수신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보충설명으로 미군은 와레 아오바와 관계 없이 이미 SG 레이더를 통해 일본군임을 식별하였다고 쓰고 있다. 어찌보면 나름 절충을 한 셈.[16] 다만 미군의 선전 프로파간다에 뻐드렁니에 원숭이로 묘사되어 나오기는 한다.[17] 하지만 실제 일화에서 유구모의 수병 하나가 자신에게 커피를 건네 준 미군을 총으로 쏴죽였다가 분노한 미군들에게 처단되었다. 이후 미군들은 다른 유구모의 수병들도 모두 죽이려 했으나 어뢰정의 정장이 만류해서 그만 둔다.[18] 그도 그럴것이 아카기가 서술하는 미래의 항공모함과 잠수함에 의해 주도되는 전장은 앞으로의 해상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털어먹는데 근간이 되기 때문[19] 실제 역사에서도 나구모의 기함이 아카기였다.[20] 쇼카쿠가 먼저 굉침하자 구하러 가려는 다이호를 저지할 정도로 단단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다이호도 가솔린 항공유 가스 유폭으로 허망하게 사망하자 멘붕.[21] 칸무스들은 허위전과를 진지하게 믿고 있어서 전황이 좋은 가운데 시라누이가 좌천되어 속이 상해 저러는 정도로만 치부했다.[22] 다만 구리다 턴에 관한 내용은 요즘에는 재해석되어 그다지 욕을 먹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별로 자세한 설명 없이 도망쳤다는 언급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23] 실제 정황과는 다를 수 있지만 사실상 나치가 모가미의 속도를 제대로 측정 못 해서 충돌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상황이다. 정확히 나치가 제대로 피하지 않아서 충돌한 것으로 묘사.[24] 이 때 전함파를 상징하는 다른 전함들도 나가토한테 대놓고 반론을 제기하는 후소를 보고 다 놀란다.[25] 실제 도조도 완전히 생각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기에 서구와의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영국과 미국을 동시에 적대하는 것은 육군으로써도 수지에 맞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어떻게든 협상을 통해 중국의 육군을 빼지 않으면서도 당장은 중립을 지키는 미국과 개전을 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미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는 중국 및 동남아 침략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이면서도 협상으로 시간이나 끌어보자는 개수작에 불과하다고 여겼고 이는 도조 내각이 성립되면서 확실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양 전쟁 개전을 저지하기 위해 꺼낸 마지막 안전장치가 도조였다는 점은 미국으로써도 이제 태평양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실감하게 하였다.[26] 이말을 들은 오빠인 카즈토시가 그런말 하면 걱정된다고 하는 것을 보면 현실에 있는 서로에게 티격 대는 남매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27] 당시 일본은 1944년부터 본격화된 전략 폭격 이전까진 전쟁은 그저 무용담으로 받아들여졌고 대일 전략 폭격에 대한 체계가 잡히기 전에 일어난 폭격도 일종의 이벤트라고 생각하였다.

3. 스토리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3.1.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1941년,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배급제가 시행된 일본과 이들에게 무역봉쇄를 가하는 미국의 심해서함[28], 그리고 애초에 일본본토를 공격하지 않고도 해상봉쇄만으로 일본을 패배시킬수 있었다고 보고한 미 전략폭격조사단 폴 닛츠의 발언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29]

어느 시골마을의 칸무스 후보가 되어 일본해군에 입대하는 후부키는 신체검사 결과 구축함 적성으로 해병단에서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부푼 동경을 품고 들어간 해병단은 구타와 매질, 심지어 훈련병들끼리 서로 죽빵을 치도록 하는 가혹행위가 횡행하며 칸무스에게 총검돌격과 상륙전 훈련같은 영 도움되지 않아보이는 똥개훈련이나 시키는 곳이었다. 자살자까지 나오는 해병단을 악으로 깡으로 버텨가며 훈련을 통과한 후부키는 제3 수뢰전대 제11 구축대에 배정된다.

"귀신의 야마시로, 지옥의 콩고, 내일은 나가토에서 목을 맬까"같은 흉흉한 소문과 달리 콩고는 원작대로 유쾌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30] 또한 입대 전 신문이나 라디오 등으로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말들을 듣고 살아온 후부키의 미국인들은 정신력이 딸려 야마토정신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말에 "America 사람들에게는 Yankee정신이 영국인에겐 John Bull 정신이 있다"며 정신력 타령을 부정하기도 한다.[31] 그러나 아무리 해군이라도 결국 일본 해군. 그들 내부에서도 일본이 직면한 자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에 적재되어있는 서구열강의 비축유를 접수하고 동남아의 자원을 접수해 서구를 굶주리게 해야 한다는 막장 계획이 승인되고[32] 작전에 대해 실제 교전의 주력을 맡을 하급자들의 소신적인 비판은 모조리 묵살된다. (이후 전황은 실제로도 수뢰전대 등의 하위 함대들이 뼈빠지게 구르고 신형 전함들은 함대결전이 성사될 때까지 전력을 보존하다가 결국 결전 한번 못해보고 다 작살나는 결말을 맞게 된다.)

한편 미국에 의해 석유를 비롯한 자원의 압박을 당해 점점 열악해져 가는 상황에서, 시라누이를 비롯하여 육해군과 정재계의 젊은 엘리트들을 모아 영국의 국방대학교를 모방하여 만든 총력전 연구소의 일원들은 일본이 전쟁을 벌이면 승산이 없음을 보고하지만[33], 총력전연구소의 모의내각은 군 통수부에 개입할 권한이 없었으며, 실제 민간 내각으로써도 이미 육군을 비롯한 일본의 수뇌부의 폭주는 그들로서도 막을 도리가 없었고, 해군조차도 말로는 이길리 없는 미국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이대로 협상만 길어지면 비축유가 떨어지고 나서 대함대가 움직이지도 못해 비웃음거리가 된다면서 기왕 할거면 미국과 빨리 결착을 봐야한다는 식으로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고 민간 정부는 결국 육군과 해군의 태도에 질려 내각을 총사퇴한다.[34][35]

태평양 전쟁을 저지할 마지막 안전장치가 사라지자 히로히토는 강경파의 제어를 위해 도조 히데키를 총책임자로 도조 내각을 성립하고 도조는 자신의 입장을 바꿔 강경파들에게 온건책을 제시하나 도조 조차도 그가 시동을 건 폭주기관차를 막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강경파인 도조가 내각의 중심에 올라선 것을 확인한 미국이 제시한 헐 노트가 일본 본영에 전해진 후 회의끝에 미국과의 전쟁이 결행되어 공격대가 이함한다.


[28] 여기서는 단순히 이름만 다를 뿐 서방에서 운용하는 칸무스라는 설정이다. 당시 일본 정부가 귀축영미로 부르며 무슨 괴물인것 마냥 국민들을 세뇌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나 적절한 설정.[29] 폴 닛츠는 1946년 전략폭격조사단에서 전면적 해상봉쇄만으로도 대규모 폭격으로 도시를 불태우거나 소련을 끌어들이거나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고도 일본을 항복시켰을 것이라면서 르메이 등이 입안한 폭격등의 실효성을 비판했다.[30] 나머지 캐릭터들도 단역이기는 하지만 캐릭터성이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31] 콩고의 이러한 친절때문에 훈련소에서 겪은 막장 분위기에서 잠깐 벗어나나 했더니 갑판사관이 신병을 기지 안내해주는 콩고보고 "시국이 불안정 한데 칸무스가 할일이냐!"면서 둘에게 싸대기를 갈긴다.[32] 아닌 말로 연합군에게 비축자원을 뺏어 진격한다는 계획은 비축된 자원들을 적에게 자원을 넘겨주기 전에 불지르고 파괴해버리면 결국 접수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고 실제로도 연합군의 야적장에서 기름을 접수해 아르덴에서 몰아낸다던 독일군의 계획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니 길가의 풀을 뜯어먹어 진격한다는 작전계획들이 모두 위와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사실 추축군에게야 연합군이 전방에 쌓아놓은 자원들이 아쉬웠겠지만 연합군에게는 당장은 비축자원을 손실한 피해가 생기더라도 탄탄한 수송망을 통해 본국에서 물자를 가져올 수 있었으므로 적에게 넘어갈지도 모르는 물자들을 파괴하는걸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33] 보통 세간에서는 1941년을 독일이 소련에게 승승장구하며 파죽지세로 나아간 시기로 기억하지만 총력전연구소에서는 이미 독일의 공세가 모스크바를 앞두고 한풀 꺾여 앞으로 일본의 참전을 요구하는등 발목만 잡을 것임을, 그리고 소련이 실상 미국과 뒤에서 손을 잡고 불가침조약을 위배하지만 일본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손만 빨다가 결국 상황을 본 소련이 개입할 것임을, 결정적으로 단기결전으로 빠르게 승전하지 못해 미국과의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대량의 수송선을 손실하여 결국 총동원 체제경쟁에서 패배할 것임을 정확히 집는다.[34] 본래 제2차 고노에 내각은 1941년 4월 미일교섭을 하면서 중국에서 철수하는 대신 만주국을 승인받고, 괴뢰였던 왕자오밍 정권과 국민당 장개석 정권이 연계하여 미국과 반공전선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았다.(일명 미일양해안) 그러나 외무대신이던 마츠오카 요스케가 히틀러, 무솔리니와 세계 분할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는 이 공식석상에서 미일양해안을 엿먹이는 발언을 한데다 마침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소련과도 추축과 소련이 서로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돌아와 버렸으며(이는 얼마 가지 않아 독소전쟁 발발로 오판이 되어버리며, 결국 독일의 발목까지 잡게 된다.), 고노에 내각이 총사퇴후 3차 내각을 재결성했을 때는 이미 어전회의에서 남방으로 진출하며 이를 위해서는 영미와 전쟁도 불사한다고 결정되어버렸고, 결국 미국은 이에 반발해 미일양해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일본에 자원금수조치를 취한다. 즉, 일본 우익들은 미국이 석유를 끊어서 자위적 차원에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이 먼저 나치스에 동조하여 서방 연합국을 침략할 의도를 보여주었기에 미국은 일본의 자산을 모조리 동결하고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던 것이다. 일본은 그마저도 치졸함의 끝판왕인 선전포고 없는 기습으로 자기들의 조금 남은 정당성도 나락으로 떨어트린 셈.[35] 그러나 이 동인지나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원작에서 고노에 내각이 그나마 전쟁을 막아보려던 개념인처럼 나온 것은 그가 대미개전에는 반대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지, 고노에 후미마로 역시 전범으로 취급되고 있다. 해당항목 참조.

3.2. MIDWAY


결국 진주만 공습이 시작된다.

1차 공격에서 미국의 전함 4척이 침몰, 1대 중파, 3대 소파(보고는 2척 굉침, 4척 대파로 이루어졌다)라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함의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히류는 3차 공격대를 출격시켜 마저 적을 소멸시키자 주장하지만 추가공습의 기습효과 약화와 적 항모임무부대의 반격을 고려해 아군의 희생을 내고싶지 않았던 아카기의 판단하에 기동부대는 귀환을 택하게 된다.

후부키는 제11 구축대에 소속되어 오자와 지사부로의 지휘하에 콩고, 하루나와 함께 남방작전을 지원하게 된다. 처칠은 이미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킨 전적이 있는 동양함대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출격시키나 말레이 해전에서 진주만 공습의 양상이 재현되어 POW는 굉침, 동양함대의 필립스 제독 역시 전사해버린다. 반면 무츠키와 키사라기는 웨이크섬을 공략하나 결국 예정대로 하야테와 키사라기가 굉침.[36] 지휘관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개전초 유일한 패배로 인해 전쟁 하수라는 비난을 들으며 명예가 실추된다.

개전과정은 굉장히 순조로워 당대 어떤 전함도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비밀병기 야마토가 너무 늦게 데뷔했다는 평가까지 있었으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 과정에서 두가지의 오판을 깨닫는다. 첫째는 잠수함이 군함 사냥에 그리 유리하지 못하여 점감요격보다는 미국의 수송선단 기습작전에 더 유리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진주만 공습의 의의 자체가 미국의 전의를 초장부터 꺾어버리는 것이었는데 선전포고가 늦게 전달된 탓에 미국은 야마모토를 기습을 가한 무도한 살인자로 낙인찍고 더 열광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원하게 된 것이었다.

일본 해군은 어느새 자바 해전에서 ABDA 연합함대를 분쇄하는 등 승전을 거듭하면서 R작전을 개시, 라바울을 점령하나 이 시기에 카가가 파도에 손상을 입어 후송된다. 남은 아카기 등을 필두로 포트 다윈 등을 공습하며 남방을 확실히 장악하고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항모임무부대는 당장 가진 유일한 전력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통해 게릴라적 반격에 나선다. 이후 바타비아 해전에서 도르만 소령이 남아 분전하던 최후의 ABDA 함대를 격멸하는데 성공한다.

개전후 4개월차, 본국에 입거한 카가를 제외한 1항공함대와 합류한 5항전 등에 의해 실론 해전에서 콜롬보 군항과 트린코말리 요새, HMS 허미즈 등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고 1단계 작전이 종료하면서 후부키 등의 일동은 이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자신들이 승전했다고 당연하게 믿고 있었다.

초창기의 승전에 자신이 붙었기 때문이었는지, 자바의 군정을 담당한 이마무라 장군은 현지 민간인들의 자유행동을 허가하는 등, 나름대로 관대한 점령지 정책을 펼쳤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현지인들은 서구 식민제국에게 쌓인 반감이 있었기에 일본군을 환영했다.[37] 일본에서도 전승축하식이 벌어지고 미국과의 개전에 반대 의사를 보였던 도조도 자신감을 되찾는듯 했으나 우려를 멈추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다. 총력전연구소 소속의 시라누이였다.

영국/미국/일본의 군함 보유비율은 과거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5:5:3, 런던 해군 군축조약등을 거치며 10:10:7이 되었으며, 이를 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한 함대파와 영미의 해군증강을 막았다고 보는 조약파와의 대립이 극심했고 런던 조약을 체결한 하마구치 총리는 우익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일본은 조약을 최대한 이용해 조약에 명시된 보유제한의 95%까지 해군을 늘렸으며, 중립국 지위상 65%만을 준수하던 미국도 이를 경계하며, 칼 빈슨 하원의원의 발의로 제 1차 해군확장법이 통과된다. 1935년, 런던조약의 만료와 함께 일본은 평등한 군함보유를 요구하며 해군조약을 탈퇴하고 무제한적 건함경쟁이 벌어지고 만다. 미국은 38년 2차 해군확장법을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기 시작하고 히틀러는 영국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하면서 스타크의 건의로 2대양 해군법이 통과된다. 43년부터 46년까지 태평양과 대서양 양측에 일본 해군의 규모와 맞먹는 함대를 준공시켜 지구 북반구의 바다를 미국의 내해로 만들어버리는 안이었다. 해군은 예산 뻥튀기라며 일축해 버리나[38] 시라누이의 추측상 45년까지 100만톤 보유를 달성하기 어려운 일본에 비해 미국 해군은 이 증강안이 효과를 보는 1943년에는 200만 톤, 1944년에는 350만 톤을 보유하게 된다는 괴리적인 예상이 뒤따랐다.[39]

승전을 맛본 후부키는 고향에서 가족과 재회하여 전공을 자랑하나 하필 그 시점에서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이 실행되면서 그녀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미국이 이 정도로는 협상에 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야마모토 제독은 미국령 사모아와 호주를 공격하여 미국이 태평양의 서쪽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자는 해군 군령부의 제안, 더 이상 전선확대를 자제하고 중국의 항공기지를 소멸하는 육군의 제안, 이집트로 진출하여 수에즈를 장악하는 독일의 제안 대신 미드웨이를 정면 공격하여 미군을 하와이로 몰아내고 협상장에 올리는 방안을 제안한다. 본래는 상부에서도 이를 거부해왔으나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체면이 구겨진 해군은 결국 야마모토의 안을 승인하게 된다. 동시에 포트 모레스비를 공략하는 MO작전에 5항전이 배속되나 산호해 해전에서 쇼호가 침몰, 5항전이 반격에 나서나 악천후 상황에서 미국은 레이더를 통한 정찰관제를 실행하여 첫 공격대를 패퇴, 이후 서로 30분 거리에서 격전을 벌여 렉싱턴 침몰, 요크타운 중파에 쇼카쿠 중파로 인해 즈이카쿠가 항공대를 수습하여 퇴각한다. 상부는 추적격멸을 지시하나 이를 따르지 않은 이노우에는 전근처리되고 최초로 항모와 항모간에 벌어진 격전은 양측의 전과 부풀리기로 끝나버린다.

이후 일본군은 알류샨과 미드웨이의 동시공략을 결정하며, 북방으로 향한 함대는 더치하버에 공습을 가해 애투와 키스카를 무혈점령하고, 미드웨이로 향한 함대는 6월 5~6일 제1항공함대의 항공전, 이후 제 2함대의 상륙전과 제 1함대의 함대결전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빠르게 미군에게 새버렸고, 미군은 요크타운을 긴급수리하여 전장에 투입, 이들을 요격하기 위한 잠수함대도 2일 차이로 TF-16/17을 놓친 상황.

첫 교전에서 미드웨이 기지의 요격기를 무력화하나 전과가 부족하여 2차 공격대는 기습은 없다는 판단하에 폭장으로 전환하던 도중 토네의 4호기에서 미군 함대를 식별한다. 그러나 호넷의 위치를 너무 멀게 잡고 보고한 탓에 폭장으로라도 공모를 공격하자는 히류의 요청과 달리 아카기는 공격대를 수용하고 뇌장으로 전환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때 미군 항공대들이 들이닥쳤고 저공에서의 뇌격은 어떻게 막아내나 이에 정신이 팔려 고공을 주목하지 않다가 함폭대를 너무 늦게 발견하고 운명의 5분이 시작되어 버린다.

10시 22분, 카가에 4발이 명중. 10시 24분, 소류에 3발이 명중, 10시 26분, 아카기에 1발 명중으로 유폭. 히류는 더 이상 미국의 함폭대가 남지 않았다 판단하고 미 항모와 동귀어진을 결심한다. 이때 요크타운을 발견하여 세발을 명중시켜 화재 및 항행불능으로 만들고 항공대는 이를 격침으로 보고하나, 얼마 뒤 응급수리를 실행하던 요크타운을 다시 발견, 다른 항모라 판단하고 뇌격 두발로 다시 항행불능으로 만든다. 일본군은 항모 2척 격침이라는 오보를 통해 아직 희망적이라고 믿고 마지막 하나를 잡으려 하나, 히류는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집중타격에 네발을 피탄한다. 나구모 기동부대의 지휘권을 인계받은 나가라는 미 함대에 근접하여 수뢰전으로 마무리지으려 하나 이때 치쿠마의 정찰기로부터 미 항모 네척이 추가로 발견되었다는 오보가 들어온다. 이를 들은 제독은 전투속행 명령을 철회하고 퇴각을 명령한다. 이 과정에서 모가미와 미쿠마가 충돌, 미쿠마는 느려진 속도로 인해 미군기에 격침되고 아카기와 히류는 항공대의 생존자를 수습한 후 뇌격처분되나 히류는 그 후로도 표류하다 결국 굉침한다. 요크타운은 그 와중에도 겨우 살아서 진주만으로 귀항하려 했으나 결국 이168의 뇌격으로 침몰하게 된다.

해군군령부는 이 같은 피해에 대해 알리지 않기로 했으며 육군도 참모본부만이 이 소식을 전해들으나 결국 은폐되고 만다. 대본영에서 발표하기를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격침. 120기 격추. 일 항모 1기 격침 및 1기 대파, 중순양함 1기 대파, 미귀환기 35기로 발표하나 총력전연구소의 석학들은 이미 그 사실을 어렴풋이 접해버렸고 이 전쟁은 졌다고 생각한다. 니미츠는 이에 대해 "목표에 절반 가량(Midway) 도달했다."는 말을 남기며 일본 해군을 모조리 수장시켜버리겠다는 말을 남긴다.


[36] 이 장면은 심지어 깡애니의 그 구도를 심해서함폭을 미군 와일드캣으로 바꾸어 그대로 사용했다.[37] 후일 남방의 일본군은 이를 "자바는 천국, 버마는 지옥, 살아돌아올 수 없는 뉴기니'라고 부르게 된다.[38] 이때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팔모양을 하며 설마 미국이 이런 정도로 전시물자를 생산해 버리겠냐?라고 무시했지만 1943년 이후부터는 진짜로 그렇게 된다[39] 심지어 독일과 이탈리아의 해군이 약체임이 확실시 되자 대서양 주력함대들은 대개 태평양에 재배치되었다.

3.3. 철저해협

아이언 바텀 사운드에서의 과달카날 전투와 그에 연관된 해전, 지상전 등을 다루고 있는 파트.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 이후 즈이카쿠가 나름대로 모아본 항모전력은 산호해 해전의 피해를 수복중인 쇼카쿠를 제외하고 준요, 류죠, 즈이호 정도에 불과했던 상황, 미드웨이에서 승전한 미 항모부대가 알류샨으로 올 것이라 판단하여 남아있는 항모들을 끌어모아 북쪽 바다에 보내나 예상과 달리 미 항모가 오지 않아 이들은 철수하고 반면 남방에서는 자원 이송을 위한 호위부대 위주로 해군 편제가 개편된다.

1,2항전이 가라앉은 후 일본 해군항공대의 기량은 점점 떨어져가고 있던 상황. 군령부는 어떻게든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왜곡된 수치를 발표하고[40] 사령관들에 대한 패전책임과 경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군의 군령과 군정은 서로가 서로를 선출하는 관계이기에 서로의 눈치보기에 급급해 엄격하게 책임을 추궁할 수 없었고 해군인사 전부가 해군병학교에서 한솥밥을 먹던 선후배관계에 황족 군인들을 제외하고는 철저한 상명하복 원칙, 기수, 성적에 의한 임관에 따라 선배가 후배의 명령을 들을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운영되었다. 이 조치는 평시에는 군 내부 파벌의 생성을 막는 효과가 있었지만 전시에는 적재적소에 사관을 배치하기 어려운 비효율이 강제되어 재앙의 씨앗이 되고 만다. 거기다 해군의 사령관, 육군의 사단장 이상 계급은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친보직이라 본인이 직접 경질하기 전에는 해임도 불가능했다. 패배를 보고하지 않는 이상 처벌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마할 수도 없어서 미드웨이의 패전은 참모 일부를 갈아치우는 선에서 끝나고 만다.

1942년의 일본군에게 있어서 전함이나 수뢰전대가 건재함에도 미 기동부대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쇼크였다. 군령부는 결국 건함계획을 항모중심주의로 바꾸고 2대양 해군법에 대항한 5계획에서 전함과 중순양함을 삭제, 정규항모를 3척에서 18척으로 늘리는 방침으로 바꾸면서 야마토급 3번함 시나노가 항모로 바뀌고, 이세급, 모가미급 등의 항공전함/순양함 개장이 검토되기도 했다. 또한 비축유 840만 톤 중 미드웨이에다 60만 톤을 날려먹으면서 석유 문제가 악화되고 군령부는 하루라도 빨리 미국과 종전을 해야된다며 미국도 화평을 생각하고 있을거라 자신한다. 그러는 반면에 지휘체계 통일, 방공레이더 탑재, 항모호위교리의 개편 역시 이루어진다.

반면 후부키는 제3함대의 제1항공전대를 찾아와 아카기의 행방을 찾지만 이미 쇼카쿠와 즈이카쿠로 바뀐 상황. 그들에게서 1,2항전은 적 항모 둘을 수장시키고 멋지게 최후를 맞아 야스쿠니에 갔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받고는 가장 강한 칸무스인 아카기가 가라앉았으니 일본은 전쟁에서 지는거 아니냐 걱정하다가 '싸움의 결과와 관계없이 칸무스는 싸우다 죽는다'는 콩고의 말이 떠올라 아카기는 제국을 위해 할 일을 하고 순국했을거라고 자신하면서 자기도 아카기처럼 멋지게 죽을거라 다짐하면서 미드웨이를 향해 만세삼창한다.

미드웨이의 패배를 맞고 전황이 1개월 전 수준으로 후퇴한 일본군은 이제 각자의 목적하게 따로놀기 시작한다. 해군 군령부는 미-호주 단절을 위한 SN작전 속행, 육군은 MO작전이 취소된 대신 육로로 포트 모레스비를 목표로 '살아돌아갈 수 없는 뉴기니'를 공략하기 시작하고 연합함대 사령부는 인도양 방향의 통상파괴를 목적으로 B 작전을 실행한다. 후부키와 제11 구축대는 이중 B 작전에 소속되어 인도양으로 향한다.

반면 미군은 일본군의 과달카날 비행장 구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자 '망루 작전'을 확장시켜 뉴브리튼 일대의 섬들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초카이 휘하, 유바리, 텐류 등의 제8함대가 대응에 나서고 라바울의 제11항공전대가 미 상륙군을 요격, 플레처 제독은 이 일대에 일본 항모가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선단을 방치하면서 항모기동부대를 철수시킨다. 8월 8일 밤, 일본군은 사보섬 해전에서 격렬한 전투끝에 승리한다. 그러나 날이 밝아오자 미군기의 공습이 염려되어 철수를 결정하고 퇴각하던 중 카코가 미 잠수함의 공격에 격침되고 8함대의 전과는 항공전대의 과장보고 끝에 전과가 크게 부풀려져 이 보고를 받은 야마모토 제독은 전투에서 이겨놓고 수송함대를 놔두고 철수했다며 격노하여 수훈을 취소하면서 이 일로 8함대는 항공대의 전과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이후 해군은 육군에 과달카날의 비행장 탈환을 요청, 본래 미드웨이에 상륙할 예정이었던 이치기 지대와 이치기 기요나오 대좌를 파견한다. 야마모토는 이를 보고는 인도양 작전을 중지, 연합함대를 트럭 섬에 파견한다.

이후 과달카날에 상륙이 시작되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야간전을 두려워하여 전력을 철수시키기에 야간에 구축함을 통해 병력을 상륙시키고 낮에는 카게로를 제외한 함선들이 철수하는 식으로 상륙이 이뤄졌다. 그러나 8월 20일, 미 항모기동부대의 합류로 제공권이 미군에 넘어가고 이치기 지대의 선발대는 사기가 높아서 후발대를 기다리지 않고 전진, 핸더슨 기지에 반자이 돌격을 한 끝에 전멸하고 만다. 야마모토는 이에 상륙전 주변 함대의 격멸을 위해 트럭에서 대부대를 출격시키나 전력의 보존을 고려하지 않아 차후 연료문제가 터지고 만다. 11항전 역시 트럭에 기지를 두고 지원을 했으나 거리와 기상상태의 문제로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못하자 연합함대사령부에서는 3함대에 항모 하나를 별동대로 끼워 과달카날에 파견한다. 8월 24일, 양측 항모가 서로를 발견하여 교전이 벌어지고 여기서 류죠가 침몰, 엔터프라이즈가 중파된다. 미항모에 충분한 피해를 주었다 판단한 쇼카쿠가 호위부대에 돌입을 명령하나 통신장애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야간전에 돌입하기로 한 무츠는 발이 늦어지고 만다. 이때 돌입한 8함대는 비행장을 포격하나 관측을 하지 못해 10분간 대강 포격하고 귀환한다.

8월 25일, 상륙부대가 남하하기 시작했으나 미군에 발견되면서 B-17 폭격기 3기의 수평폭격으로 무츠키가 침몰, 상륙부대는 라바울로 후퇴한다. 이때쯤 이치기 지대의 전멸을 눈치챈 육군은 17군이 가용할 수 있는 전력 6000명을 동원하여 과달카날에 상륙하기로 결정하고 8함대는 뉴기니에서 연합군 비행장을 발견하여 육군을 요청하지만 거절, 자체적으로 육전대를 투입하지만 패퇴하고 만다. 이때쯤 과달카날에 도착한 후부키와 3수전은 병력의 쥐수송에 들어가나 구축함으로 옮길 수 없는 중장비들은 피해를 보고 만다. 라바울의 11항전은 거리가 멀어 지원이 어렵다 판단, 급조한 부인 기지에 항공대를 옮기고 수상기들을 전진배치한다. 계속되는 쥐수송에 센다이가 짜증을 내는 와중 후부키는 키사라기와 무츠키의 죽음을 나름대로 애도하며 자신도 죽게 된다면 미 항모를 하나라도 길동무삼기를 원했다.

9월 12일, 총공격이 개시된다. 사령부에서는 이치기, 카와구치, 아오바 지대가 밀림을 통해 3면에서 기습하기를 택하지만 밀림행군의 어려움으로 결국 이틀에 걸쳐 축차공격으로 변질되고 미군은 이를 파악하여 맹포화를 퍼부어 병력들을 전멸시킨다. 아오바 지대는 겨우 미군의 방어선을 뚫고 비행장에 도달하여 항전하지만 이틀을 가지 못했다. 일본군이 마타우카우 강 너머로 후퇴하면서 전선이 형성되고 9월 16일에는 포트모레스비 공략 병력들도 보급 곤란으로 철수한다. 그나마 이19가 가져온 미군함 타격 소식만이 희망적일 뿐이었다.

반면 트럭섬에서 썩은 귀축영미는 함대결전을 회피한다며 잊혀진 배 취급받던 콩고와 하루나에게 과달카날 섬의 총공격을 위한 중장비 수송 호위와 핸더슨 기지 포격 명령이 내려지며 작전의 중요성을 감안, 대본영에서도 츠지 마사노부를 참모로 파견한다. 11구축대 역시 반으로 갈려 후부키는 비행장 파괴조에 붙게 된다.

다음 날 밤, 에스페란스 곶에서 신원 미상의 함대를 발견한 기함 아오바는 수송부대일거라고 지레짐작, "와레 아오바"를 송신하나 포격을 받는다. 이들은 오인사격을 받고 있다 판단했으나 사실 미 함대는 이때 수상탐색용 SG레이더를 장비하였기에 이들의 위치를 알고 포격을 한 것이었으며 회피기동 중 피탄하여 치명상을 입은 후부키는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유언으로 남기고 굉침한다. 이후 후루타카가 응전하나 90발 이상의 명중탄을 맞고 침몰, 키누가사의 활약으로 일방적인 패배만은 면했지만 최초로 야간전에서 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으며 수시간 후 무라쿠모 역시 수송함대 구조 도중 공습당해 뇌격처분된다. 그 와중에 후부키의 가족들은 그녀가 물범벅이 되어 돌아오는 꿈을 꾸고 있었다.

10월 13일, 컹고와 하루나는 삼식탄 966발을 퍼부어 핸더슨 비행장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면서 17군의 사기도 조금 올라갔고 이때부터 미군은 야간초계에 PT 보트를 동원하나 호위구축함들에게 격퇴된다. 14일, 고속수송선단이 도착하여 양륙작전이 실행되어 초카이와 키누가사가 지원포격에 들어갔으나, 미군은 1개월 안에 전투기용의 짧은 활주로를 급조하여 후방기지의 B-17과 연계, 상륙거점을 타격한다. 이때 화물 양륙에 성공한 함선은 단 한척으로 나머지 세척은 작업중 전복, 두척은 중도철수하여 본래 목적의 2할 정도만 완료되고 만다. 이후 육군과 해군의 협력관계가 악화되면서 해군은 쥐수송으로 병력만 나르는 상황으로 돌아간다.

반면 미국측도 일본의 지속된 공세에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니미츠는 대응이 소극적인 곰리를 경질하고 윌리엄 홀시를 자리에 앉힌다. 그는 '광인' 홀랜드 스미스의 장담을 듣자 일본항모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일본측은 해안 공격이 무리라 판단, 산을 우회하여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 길조차 만들지 않은 터라 육군의 공세는 본래 예정일이던 20일로부터 하루하루 미뤄지고 총공세에 맞춰 출발한 연합함대는 남하와 북상을 반복하며 연료를 낭비한다. 20일 예정대로 공세를 개시한 중화기 부대는 먼저 전투가 개시되면서 총공세에 써야할 탄약과 연료를 소모하고 24일, 츠지는 미군의 강화된 진지를 보고 연기를 주장하는 카와구치 소장을 경질하고 '오늘 밤엔 승리가 확실함, 다음 번엔 무전으로 만세를 보낼 것임.'이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무전을 보낸다.

24일 밤, '천우신조에 보답하여 돌격해서 성지에 보답할 것'이라는 무전을 받은 일본군은 총공세에 들어갔으나 이미 예전에 전차부대를 상실하고 총검돌격을 고수하던 2사단이 괴멸되면서 야습전력을 상실, 16군은 철수를 결정한다. 반면 3함대 역시 TF-16,17과 교전에 들어갔으며 1차 교전이 끝나고서 미드웨이의 패배를 상기한 쇼카쿠가 2차 공격대의 준비가 끝나지 않은 즈이카쿠를 놔두고 먼저 공격대를 이함시킨다. 미군의 대공방어 강화에도 불구하고 공격대가 호넷을 대파시키는데 성공, 전위함대가 미군 항공대를 유인하던 중 15기의 급강하폭격기가 쇼카쿠를 공격하여 이탈시킨다. 이후 남은 즈이카쿠와 준요가 호넷을 계속 공격하여 회생불가로 만들고, 미군은 호넷을 뇌격처분하나 실패하여 퇴각, 일본군의 뇌격처분끝에 침몰한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개전 11개월만에 대서양에 있는 레인저를 제외한 모든 미 항모를 무력화하는데 성공하면서 준요와 즈이카쿠는 서로 손잡고 "봤냐 양키새끼들아!!"라고 소리치지만 일본 역시 이것을 위해서 400여명의 정예 파일럿들을 대부분 상실하고 만다. 일본 해군은 본래 함대결전을 중시해 파일럿의 육성은 보충분 만큼만 하고 있었기 때문. 1943년부터 2년에 가까운 육성과정을 6개월로 단축하여 대규모 확보에 들어가려 하나 파일럿 기량 저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와중 미군은 마타니카우 강에서 반격을 개시, 오키 강까지 일본군을 몰아내고 말라리아에 대비해 기지 주변 밀림을 소각하고 DDT를 뿌렸으나 일본군은 공습을 피하기 위해 밀림에서 온갖 풍토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츠지 마사노부 본인 역시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되었고 이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대본영은 전략을 수정한다. 뉴기니가 아닌 과달카날을 결전의 장으로 잡고 1월에 총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11월 12일, 히에이와 키리시마의 비행장 포격과 함께 수송선단이 돌입하는 작전을 세우나, 홀시는 일본측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워싱턴, 사우스 다코타와 수리중이던 엔터프라이즈를 출격시킨다. 13일 새벽 1시, 유다치가 지근거리에서 미군을 발견하고, 미군측도 레이더로 일본군을 발견했지만 캘러한 제독의 명령에 혼선이 와서 유다치의 돌진으로 난전이 벌어지고 만다. 일본군과 미군이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두를 쏘는 대혼전이 벌어지고 30분동안 치고받은 끝에 비행장 포격이 중지되고 양군은 개별적으로 철수한다. 날이 밝자 현장에는 항행불능이 된 히에이밖에 남지 않았고 오후4시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자침한다. 다음날 8함대가 야간에 돌입하여 비행장에 포격을 하나 중순의 화력으로 비행장을 무력화하는건 불가능했고 서쪽으로 퇴각하다 엔터프라이즈의 정찰기에 발각되어 키누가사 굉침, 마야, 이스즈, 초카이도 손상을 입는다.

다음날 수송작전이 재개되나 이번에도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대에 발각되고 수송작전이 와해 직전까지 몰린다. 23시, 연합함대가 남하하면서 TF-64와 접선, 철저해협 제3라운드가 개시되고 3수전이 미전함 2척의 미끼가 되어 돌입한다. 호위가 사라지자 타카오, 아타고, 키리시마는 혼자 남은 워싱턴과 전함대 전함의 포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전투는 일방적으로 워싱턴에게 유리한채 키리시마가 굉침하고, 타카오와 아타고의 추격에 선단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한다. 2시,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다나카 소장은 배를 침몰시키지 않기 위해 수송선을 좌초시켜 양륙작전에 들어가나 암초에서 양륙이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날이 밝자 미군기의 공습을 받고 수송선단이 전멸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육군은 수송선 37만톤, 해군은 25만톤의 증산을 요구하나 정부는 육군에 24만톤, 해군에 3만톤을 인가하고 육군에 반년 후 18만톤을 해산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 일로 육군성의 사토 겐료와 총참모부 작전국장 다나카 신이치는 주먹다짐까지 벌인다. 이후 정해진 할당량을 바꾸지 않으려는 도조의 결정에 다나카는 노성을 지르고 도조는 그자리에서 고성을 지르지 않았지만 다나카를 좌천시킨다. 애당초 도조는 개전을 막자고 수상직에 올린거라 내정이나 경제에 대한 방침이 전무했던 것, 개전 당시에도 총수권의 독립을 운운하며 전쟁 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정신력 타령이나 하면서 국민 전의고양에만 힘쓰고 있었다. 또한 반대조직을 용서하지 않고 헌병을 통해 언론을 탄압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 헌병정치라 불리게 되고 육군대신을 겸임해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자기 반대파를 좌천시키는 독재자 행보를 남발한 것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뉴기니에서도 제공권을 빼앗겨 정글로 퇴각하면서 아사자가 급증하고 과달카날에서는 쥐수송에 의존하다 미군이 PT보트로 대발동정을 사냥하기 시작하면서 그마저도 막혀버리고 만다. 잠수함에 의한 수송도 이3이 어뢰정에 격침당하면서 중단되고 미군은 일본군이 자멸하기를 기다리면서 수상한 행동이 보이면 포격하기를 반복하면서 장비도 버리고 먹을 것을 찾아 방황하는 '과달카날의 실업자들'이 되어버린다. 11월 30일, 이번에는 드럼통 수송이 시작되었지만 미네아폴리스에 발각되면서 양륙을 포기, 수뢰전에 들어가 대승리하나 타카나미가 굉침하고 수송작전은 실패로 끝난다. 두번째 드럼통 수송은 미군이 구축함을 공격하는 대신 드럼통을 '격침'하기 시작하면서 3할밖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 수송의 실패로 해군항공대의 소우카 중장이 육군 제8방면군의 이마무라 소장에게 철수를 건의하나 기각되고 12월의 드럼통 수송은 테루즈키가 격침당하고 1/6밖에 도달하지 못한다. 반면 뉴기니에서도 증원군이 왔으나 포위된 부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남은 병력을 모아 철수, 포트 모레스비 공략은 철수하지 못한 병력들의 옥쇄로 끝을 맺는다. 12월 20일에는 항공기로 보급품을 투하해보기도 했으나 효과가 미미하여 결국 12월 31일 과달카날에서 철수가 결정된다.

일본군 총참모부는 철수를 위해 이모토 참모를 파견하지만 현지 참모진들이 철수 불가를 외치는 가운데 적의 비행장에 역상륙하여 옥쇄한다는 거짓 명령을 전달하여 병력들을 승선지점으로 끌어모아 공세작전처럼 보이게 양동작전을 벌인 끝에 철수작전인 케호작전이 발령된다. 한때 정예라 불리던 황군은 피골이 상접한 거지꼴이 되어있었고 세번에 걸친 작전 끝에 모두를 철수시킨다. 대본영은 이를 계속해서 상륙하는 우세한 적을 격전 끝에 격파하여 다른 목표로 이동한다고 축소발표했으나 실상 상륙군 31404명 중 생존자가 10652명뿐으로 2/3이 갈려나가고 그중 8할이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패전이 되었다.

1943년 2월, 이미 이 전쟁은 졌다고 한탄하던 시라누이는 어떻게 해서든 단 한번의 대승리라도 얻어내서 미국을 강화에 응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 독백하는 와중 미국에서는 CV-9 에식스가 취역하면서 즈이카쿠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동시에 야마모토도 최후의 도박에 나서려 한다.


[40] 여기서 해군이 천황에게도 은폐를 했다고 쓴 부분은 사실 고증오류, 이후 도조가 자신이 받은 왜곡된 정보와 교차검증을 하게 된다.

3.4. 라바울 1943

6개월간의 치열했던 철저해협의 전투가 끝나자 양 진영은 잠시 함대를 물리고 휴식기에 들어간다. 과달카날에서 겨우 철수한 일본 육군 병력들은 완전히 피골이 상접한 거지꼴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해군의 칸무스들은 숙소에서 미국이 뿌린 선전물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의 적 간무수다!'라고 씌여있고 칸무스를 귀크고 뻐드렁니 나온 옐로 몽키로 묘사한 것을 보고 이게 누구가 모티브냐고 놀려먹다가 전사한 후부키라는걸 알게 되자 경악한다. 선전책자에는 일본군이 항복한 미군 파일럿을 참수하는 사진도 실려있었고 카게로가 설마 우리 군대가 이런 짓거리까지 해먹었겠냐며 반신반의하고 그 다음 장에는 키사라기의 해골이 한 미국 여인의 필통꽂이가 되어있는 사진을 보자 역겨움을 감추지 못하고 텐류가 굉침하여 타츠타는 매일같이 유골함 앞에서 흐느끼는 와중에 유키카제와 토키츠카제는 이제 전쟁이 언제쯤 끝날까 걱정한다.

1942년 말,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일본 제국은 아직 그간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점령 판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발동한 미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일본의 수송선 230척 백만여톤을 격침시켰지만,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 전과가 독일 유보트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고 평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통상파괴에 나설 것을 요구했고, 기존의 불량률이 높던 근접신관을 구형이지만 그나마 신뢰성있는 충격신관으로 바꾸도록 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었을 때부터 자국 경제를 전시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정부는 군수공장을 만든 뒤, 이를 전시체제가 끝날 때까지 민간에 연간 1$에 대여하였다. 또한 산업을 군수산업으로 전환하는데 세금 혜택을 제공하고, 일본이 영국/네덜란드령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점령하여 천연고무 유통을 장악하자 석유를 이용한 인조합성고무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민간에 불하된 군수공장에는 대규모 무기 생산주문이 이어졌으며, 민간 물자는 일부 제한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이상 탄약을 사지 않는 연합군 열강은 없다시피 했으며, 모든 미국의 민간 공장들도 전시물자 생산에 주력했다. 미군의 규모가 계속 늘어나며 대공황으로 인해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되자 미국은 대공황의 후폭풍을 해결하고 '민주주의의 조병창'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시경제로 만들어진 생산시설들은 전후 민간 산업으로 되돌릴 수 있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된 유럽을 대신하여 전세계 GDP의 60%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3.5. 절대국방권

야마모토 사령장관의 전사 이후 코가 미네이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부임하게 된다. 이미 일본의 전함 전력 조차도 무츠의 폭발과 히에이, 키리시마의 침몰로 소모되어가고 있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회의에서 라바울에 대한 패전 원인을 분석하나 이구동성으로 비행기의 등장을 원인으로 꼽는다. 전쟁 이전 아카기의 생각대로, 그러나 그녀가 바라던 방향과 정 반대로 미국의 항공대가 점점 태평양의 하늘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일본 해군으로써는 대응도 어려워졌기 때문. 해군은 이에 새로운 항공전대 사령부를 만드는 등 나름대로 대응에 고심하여 아무리 미 항모임무부대[41]라도 한번에 받아내기 어려운 5000여기 이상의 항공기를 결전에 동원하려 한다.

두번째 문제는 수송선의 부족으로 인한 전선의 붕괴였다. 이미 민간으로부터 선박 징발은 동원력에 한계를 보이고 있었고 그마저도 육군과 해군이 어떻게든 갈라먹으려 했기 때문. 이번에는 육군에서 저자세로 라바울을 포함한 태평양의 섬들을 일부 포기하고 전선을 후퇴시키기를 요청하나,[42] 해군에서 최대 거점인 라바울을 포기할 수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면서 제자리걸음만 한다.

반면 독일 역시 롬멜의 이집트 공격과 동부전선에서의 캅카스 공략이 좌절되며 미국이 본격적으로 무기대여법을 발동하자 통상파괴를 시도하며 일본에게도 인도양을 공략하여 동맹으로써의 의무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자위적 전쟁의 취지에서 벗어난다며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 물론 연합군 측도 인도와 태평양에서 동시에 대일공세를 개시해야한다는 미국과 프랑스 침공에 더 집중해야한다는 영국의 의견이 갈리면서 고성이 오간다. 그러나 적어도 연합군 군부는 이대로 결론이 나지 않을경우 전쟁계획에 있어 아마추어인 루즈벨트처칠이 전쟁계획을 주도할 것이라 보고 어느정도 합의를 본다.

반면 미국측은 드디어 에식스급 항공모함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이 전선에 배치되면서 어느정도 도찐개찐이었던 양측 항모전력[43]의 저울추가 미군에 우세하게 기운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유리하다고 장담한 전황이 어째서 이 모양이냐며 5개월이면 전쟁이 끝난다고 장담한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참모총장과 하스누마 시게루 시종무관장, 수상 도조 히데키를 질책하고[44] 도조는 해군에게 어느정도 양보하더라도 협력하여 절대방어선을 만들 것을 약조한다.

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태평양에 파견되어온 이탈리아 잠수함들은 전부 독일 해군에 인계된다. 맥아더의 미군과 호주 연합군은 뉴기니에서 대치하던 일본군의 후방 거점에 공수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장악하면서 전선이 붕괴되고 미 항모임무부대가 길버트 제도를 기습공격하였으며 호주군이 뉴기니 북쪽에 상륙하여 일본군에게 불리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나마 전쟁에 대해 가장 냉정한 평가를 내려왔던 시라누이는 야마모토 사령장관의 죽음과 이호작전의 실패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전쟁을 지속하는 의미가 없다고 보아 현재의 전황과 정치적인 현황을 정리하여 올리고 전선을 축소할 것을 요청하는 제안서를 올리고 육해군의 젊은 참모장교들은 거기에다 일본군 지휘권의 개혁과 육해군 통합참모본부의 창설을 골자로 한 제안서를 올린다. 그러나 여전히 육군과 해군 상부는 서로의 조직을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고 담당참모가 제안을 너무 정직하게 올린것이 화근이 되어 독일이 독소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다음해 봄에 태평양에서 결정적인 전황이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상부에서는 "전쟁 질 준비나 하라는 말이냐"라며 반려해버린다. 제안서의 방어선 설정 필요성은 그나마 양측이 동의하여 절대국방권이 형성되었으나, 육군과 해군의 해석이 달라[45] 육군과 해군이 서로 다른곳을 절대방어선이라면서 쥐고있는 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도 방어선이 후방에 설정되자, 솔로몬 제도에서 일본군의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콜롬방가라에서는 성공적으로 철수가 이뤄졌으나 베야라베야 섬에서는 일본군이 막다른 길에 몰려 구조요청을 타전한다. 상부에서는 구출 포기와 결별 전보를 보내나 3수전에서 철수작전에 응하면서 인근 미군의 DesDiv 4[46]와 교전, 유구모가 전투불능에 빠져 침몰하나 미 구축부대의 피해가 커 퇴각한다.[47] 유구모 본인은 의장을 잃고 간신히 몸만 살아남아 미군에 구조되나 항복을 거부하고 미군의 총에 죽으려 했지만 미군병사들은 유구모에게 비상식량과 물을 던지고 자기들 갈 길을 가버린다[48]

반면 미군은 카사블랑카급의 초고속 건조에 들어가 '주간 공모'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항공모함을 양산해대며 이렇게 불린 전력으로 웨이크섬을 공습한다. 이때 공습의 피해가 너무 큰 나머지 현지 일본군들이 분노하여 미군 포로를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은 조종사의 긴급 확충을 위해 학도병들을 모집하였으나 이들은 사관학교 출신에게 하대를 받았으며 최전선이나 특공대로 보내졌다. 정보전에서도 이미 일본의 암호를 꿰고있던 미국과 달리 해독능력이 떨어지던 일본측에서는 미군의 무전빈도를 통해 내용을 예측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여기서 마셜 제도로 미군이 향한다는 정보를 얻어 드디어 함대결전에 돌입하나 했지만 주먹구구식 정보의 한계로 미군의 위치를 잘못 계산하여 허탕으로 끝나고 이 기동 한번으로 트럭섬의 비축연료 수십만 톤이 한번에 바닥나 '연합함대의 거창한 산책'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군이 부겐빌 공략에 들어가면서 일본군도 대응으로 로호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습격부대가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서 센다이가 굉침, 부겐빌 섬에 들어간 공습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역으로 홀시의 심기를 건드려 라바울에 대규모 공습이 벌어진 탓에 수많은 함선이 피해를 보고 미군측의 피해는 고작 함재기 10기에 불과했다.

일본군의 전황이 전혀 좋게 돌아가지 않는 이 와중에 도조 히데키는 '아무래도 아시아 해방을 부르짖는 일본이 식민지를 가지는건 이상하다.'는 논리로 버마와 필리핀을 독립시키기로 결정, 중국 괴뢰정부의 왕징웨이, 만주국의 장징휘, 필리핀의 호세 라우렐, 버마의 바 마우, 타이의 완 와이타이쿤, 자유 인도 임시정부찬드라 보스를 초청하여 백인들을 제외한 아시아인들만의 국제 회의를 결성한다. 물론 일본에게 필요한 석유, 고무 자원지대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는 독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사이에도 미군은 세배나 증강된 병력으로 라바울을 공습으로 탈탈 털어버렸으며, 결국 구사카 류노스케 참모장이 트럭섬으로 함선들을 퇴피시키고 71기의 기지항공대로 보복공격을 가했으나 미군은 이미 대공레이더, 조기경보기, 전투초계(CAP), VT 신관등을 총동원하여 일본군 공격기를 전멸시켰으며 피해는 전혀 없었다. 코가 사령장관은 어쨌든 미군에게 피해를 입혔다며 로호작전을 종결하였으나, 그간 즈이카쿠와 쇼카쿠가 재편성한 1항전에게서 빼간 항공기 70%, 승무원 절반을 상실한 빈껍데기로 돌아오고 만다.

악화되는 전황에 통상항로를 보호할 배들까지 남방에 징발해가자 결국 조선과 일본 사이의 만주 식량 루트에 미군 잠수함이 출몰하여 일본군은 항로에 기뢰를 까는 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미군이 동해상의 통상파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아 어느정도 효과가 있긴 했으나 남방에서의 선단호위에는 너무 넓고 기뢰를 대소련 전략예비물자로 분류하여 얼마 내려오지 않아 영 도움이 되지 않는다.

11월, 미군이 중부 태평양에서 대규모 침공작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일본군도 이에 대응하여 함대결전 Z작전 병작전 제3법을 실행하나 전함에게는 연료가 없었고 중순은 피해가 커 전부 입거했으며 항모에게는 함재기가 없었다. 일본군은 어쩔수 없이 경순과 잠수함을 중심으로 결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즈이카쿠의 남은 항공대가 분전하여 공모 8척을 격침했다는 엄청난 소식이 들어오나 언제나 그랬듯이 허위보고였고 실제로는 인디펜던스에 어뢰 한발을 맞춘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 주력이었던 경순들은 미군의 상륙작전이 끝난 뒤에나 도착하여 퇴피해야했으며 점감요격에 나선 잠수함들은 산개선을 설정하여 그나마 전과를 올렸으나 대잠체계가 확충된 미군에 모조리 갈려나갔다.

전후 잠수함부대 출신이었던 체스터 니미츠는 잠수함을 왜 이렇게 써먹었냐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으며 나가노 군령부 총장을 심문했으나 자신은 잠수함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답변만 얻게 된다. 결국 미군은 일본군과 조우하는 일 없이 타라와 등의 섬을 장악하였으며 부겐빌에서 미군의 비행장이 만들어져 비스마르크 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코가 사령장관은 어쨌든 미군 기동부대가 돌아갔으니 격퇴한 것이고 Z작전은 황군의 승리라면서 결전태세를 끝내고 대형함들을 본토로 돌려보낸다.[49] 일본 내에서는 오랜만에 결전에서 승리하였다는 소식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고 히로히토 천황은 코가 사령장관에게 분전을 축하하는 칙어를 하사한다.[50] 구축함들은 해상호위로 돌려진다. 유키카제와 아마츠카제는 해상호위총사령부로, 반면 시라누이는 신설된 9함대에 단독으로 웨이크섬으로 배속된다.

그 와중 영국과 중국, 미국은 카이로 회담을 발표하였고 날뛰는 중국을 응징하자는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한 일본 육군은 이에 분개, 미국이 한동안 활동하기 어렵다는 해군의 보고를 믿은 육군은 만주의 관동군을 빼서 중국에 투입, 대륙타통작전과 인도의 보급선을 끊기 위한 우호작전을 승인한다. 장개석이 돌아간 뒤, 영미는 이번에는 스탈린과 테헤란의 소련 공관에서 테헤란 회담을 개최하며 이곳에서 오버로드 작전의 조율과 소련의 대일 참전 약속이 이뤄진다. 일본 해군의 칸무스들은 소모된 전력을 보충하며 솔로몬에서 미해군을 격멸하고 승리하였다는 소식에 취해 연합군의 '일본의 무조건 항복' 강요를 무시하며 비웃으나 애초에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허위보고를 믿지 않았던 시라누이는 현실적으로 겨우 비행기 100대로 미군을 격멸하고 이제 중국과 인도를 정복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질타하며 떠나가 버린다.[51]

반면 해상호위총사령부에 새로 배속된 유키카제와 아마츠카제는 일본의 해상호위를 전담하는 부대의 호위함 주력이 해방함인데다가 구축함은 이제 전근온 둘이 전부고 호위항모랍시고 치토세급 둘이 붙은 게 끝인데다 중요한 호위가 아니면 수송선들을 내팽개쳐둔다는 말을 듣고 뭔가 잘못된게 아닌가 의심한다.

1943년 말, 이 시점에 남방에서 석유 670만톤이 생산되고 563만톤이 소모되었으며 1944년 일본군이 가용가능한 석유는 고작 187만톤에 불과했다.


[41] Carrier Task Force, 일본의 공모기동부대에 대응함[42] 육군은 5호 작전으로 중국군을 섬멸시키려던 계획이 중국에 묶여있던 병력들을 과달카날에 들이밀었다가 심각하게 피해를 보았던 일로 취소됐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선에서 현상유지를 원했다.[43] 일본측은 미드웨이에서 1,2항전을 말아먹었지만 어느정도 수습이 가능했으며, 미국측은 전세를 뒤집긴 했지만 한때 태평양에서 가용가능한 항모가 없을 정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44] 여기서 군부가 천황에게도 전쟁의 분위기를 속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45] 육군은 이를 더 이상 뺏기면 안될 방어선으로 해석하였으나 해군은 이를 미군을 함대결전으로 격멸할 마지막 방어선으로 생각하여 해군측이 병력을 방어선 바깥으로 빼버린다.[46] Destroyer Division, 구축부대, 일본군의 구축대에 대응[47] 이후 일본은 이를 순양함 셋, 구축함 셋을 침몰시켰다며 전과를 과장한다.[48] 여담으로 실제 유구모가 격침된 후 유구모의 승무원 70여명이 미군 어뢰정에 의해 구출된다. 이때 한 미군이 구출한 어느 일본군에게 커피를 건냈는데, 그 일본군이 숨겨놓은 권총으로 미군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진다. 그 일본군은 곧바로 사살되었으며 분노한 미군은 다른 일본군들도 죽이려 했으나 어뢰정장의 만류로 넘어갔다.[49] 문제는 여전히 미해군 TF-50이 남아있었다는 점이고 이들은 일본군이 돌아간 틈을 타 마셜 제도를 공습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 항모가 피습되고 목표를 완수한뒤 모항으로 귀환하자 이마저도 일본군은 항모를 격침했다는 허위 보고로 또 자신들이 승전했다고 착각한다.[50]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판이었냐면 미군들은 애초에 타라와 상륙작전을 위한 함대운용 정도로 생각했고 이걸 함대결전이라고 칭하는건 일본군의 장대한 착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일본 육군은 이 소식을 듣고 '미군이 더 이상 중국에 개입하지 못할거다'라고 생각하여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예비대였던 관동군을 빼다 중국에 들이붓는다.(그 결과 1945년 8월 초 소련이 만주를 공격했을 때 관동군은 빈껍데기만 남게 된다.) 얼마 뒤 미군은 마셜 제도의 공격을 위해 진지하게 쳐들어오나 정작 이에 대응해야할 일본 해군은 결전이 끝나 함대의 재편성에 들어갔고 미군에게 거점들이 모조리 박살나는걸 구경만 해야 했다.[51] 이 모습을 본 다른 칸무스들은 그냥 시라누이가 좌천되어서 기분이 상해서 저런다고 넘겨 짚었다.

3.6. あ호 작전으로의 길

1943년 12월, 로호작전과 Z작전, 라바울 공습을 거치며 갈려나간 일본의 항공대가 보충되고 각 항공대가 새로 재편성되나 편성을 거칠수록 베테랑 파일럿의 비율은 점점 적어져 갔다. 일본 해군은 소멸한 1항전을 즈이카쿠 항공대로 재편성하여 전선에 남기고, 본토에서 수리중이던 쇼카쿠를 중심으로 1항전을 다시 만들었으며, 역시 소멸한 2항전은 전선공군 부대인 26항공전대로 재편, 히요와 류호를 중심으로 2항전을 다시 만든다.
반면 미군은 라바울 뉴브리튼과 뉴기니에 상륙하여 라바울과 뉴기니간의 보급선을 끊어버리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휘하의 통합참모본부는 이미 항공기지로써의 구실도 못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9만명의 병력이 남아있는 라바울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우회한다.[52] 그래도 라바울이 전선비행장 역할도 못하도록 마지막으로 공습을 벌인다.(카트휠 작전) 그러나 이후 미군들의 공습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자 일본군은 자기들이 승전했다고 착각, 뉴스나 선전영화로 라바울 공중전을 크게 과장하기에 이른다.[53] 반면 뉴기니의 후방부대들은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정글을 통해 후퇴하면서 3000여명에 가까운 손실을 내고 만다.

반면 웨아크 섬에 선단호위를 온 시라누이는 잠시동안 남국의 스콜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나 정글에 서식하던 벌레와 거머리에게 된통 당한다(...) 이곳에서 일본 육군이 중국쪽 전역에 집중하느라 뉴기니에 남겨진 15만명의 군 단위 병력들을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는 채로 내버리고 서쪽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라누이는 이때 만난 육군 병사에게서 고향에 이곳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뉴기니'가 아니라 '죽어서도 돌아갈 수 없는 뉴기니'라 알려달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말대로 처음부터 질 전쟁이었다며 분노한다.
유키카제와 아마츠카제가 소속된 해상호위대는 얼마전부터 미군의 어뢰 성능이 향상되었다는 소식을 논하다가 미 잠수함의 습격을 받는다. 일본군은 전쟁 후반기가 되어서도 수송선단들이 상부에 자신들의 위치를 보고하게 하면서 사실상 미군들에게 자기들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축함조차도 돌릴 여력이 없는 해군은 그나마 해방함폭뢰를 주고 잠수함에 대응하도록 시키지만 원래 무장 어선이나 호위하던 배라 함대함 전투가 약하다보니 숨어야할 잠수함이 오히려 부상해서 해방함을 주포로 공격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아마츠카제가 이에 미 잠수함 '레드핀'을 공격하나 오히려 레드핀이 뒤로 돌아 아마츠카제를 뇌격하여 선체를 절단시키는 수준의 피해를 낸다. 유키카제는 그나마 선단과 함께 동남아에서 공출한 석유가 쌓여있는 싱가폴에 도착하나 이미 바닥을 보인 일본군의 선단수송능력으로 물자를 다 가져가는건 무리였다.

1944년 1월 24일, 일본의 특무대가 미군의 통신빈도를 분석하여 미군 항모임무부대가 하와이에서 출격하여 마셜 군도로 내습할 것이란 경보를 보낸다. 일본군도 나름대로 대응 태세를 갖췄으나, 미군은 역으로 일본군이 별 전략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요새화하지 않은 섬들을 점령하여 비행장을 세우는 식으로 대응한다. 반면 마크 미처 소장의 TF-58은 나름대로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는 콰잘레인 환초를 장악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요새진지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진지파괴용 철갑탄을 퍼부었고 요새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콰잘레인의 일본군은 공습과 포격만으로 전멸한다. 그러나 Z작전의 종료 발표로 대형함들을 퇴피시키고 항공대를 날려먹은 일본 해군은 변변한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국은 아예 일본군이 전면적으로 함대결전으로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결전은 해군 수뇌부의 환상으로 끝나고 만다.
이 추태에 일본군은 점점 극단적인 해결책을 생각하게 된다. 육군에서는 '함상공격기(뇌격기)로 미군을 공격하겠다'며 텐잔의 양도를 요구했고 해군도 이에 육군 전투기의 일부 양도를 요구한다. 그러다가 반려되긴 했지만 드디어 자폭 병기인 신요가이텐이 면전에 나타나게 된다. 미국에서 에식스급 8번함이 취역되는 와중, 육군에서는 해군은 더 이상 미군을 막을 능력이 없다며, 필리핀에서 미군과 결전을 벌이겠다며 해군에게 할당된 항공기를 자신들에게 빼달라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토 육군대신과 시마다 해군대신, 대본영 총장이 합석한 회의에서 해군측에서 격노, 나가노 군령부 총장과 스기야마 대본영 총장간에 고성이 오가고 사토 육군대신이 해군에 대신 알루미늄을 제공한다는 합의안이 통과되자 이번엔 해군에서 시마다 해군대신에게 비난이 집중되자 도조에게 사의를 표명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서로 항공기 댓수로 싸우는 와중에도 마셜 제도 공략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니미츠 제독은 애너웨탁 환초 공략을 4개월 앞당겨 실행했으며(캐치볼 작전), TF-58은 이에 인근기지 무력화를 위해 잠수함 9척으로 트럭섬을 봉쇄하고 마셜 점령으로부터 고작 10일만에 트럭 섬을 포함한 일본군 비행장 파괴에 들어간다(헤일스톤 작전)
아카시로부터 응급수리를 받고 본토로 출항한 아가노가 봉쇄에 걸려 미 잠수함 스케이트의 뇌격으로 침몰한 것을 시작으로 트럭 기지의 레이더에 대규모의 미군기가 감지되나 전날 경계가 풀린 영향으로 기지의 일본군들은 휴양 상태에 들어가 무방비로 공습을 받는다. 기지에 주기된 항공기 200여대를 모조리 파괴한 미군은 그 다음 선박을 목표로 9차례의 파상공세를 실행했고 아가노의 수색구조를 위해 출항했다가 돌아온 나카가 60여기의 공습을 받아 침몰, 민간 인양선을 퇴피시키기 위해 긴급출항한 선단은 스프루언스 제독의 매복에 걸려 그의 지휘하에 있던 아이오와의 포격으로 카토리와 마이카제, 아카기마루가 침몰하며 노와키는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시구레와 하루사메는 공습을 피해 퇴피에 성공하고, 반면 방위능력 보강을 위해 트럭섬으로 향하던 육군 수송선단이 공격을 받고 7천명의 병력과 물자가 하루아침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은 고작 97식 함공 넷과 1식 육공 셋으로 반격을 가했으나 그나마도 미 항모 한척에 어뢰를 맞추는 수준에 불과했다. 다음날에도 공습은 계속되었으며 빠져나온 함선은 아키츠시마 뿐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일본은 순양함 셋, 구축함 넷, 그외 다수의 수송선과 상선을 손실하나 미군의 피해는 25기의 뇌격기와 항모 한척이 어뢰를 맞은것에 불과, 더 큰 문제는 이 공습으로 일본의 수송선 20만톤 가량이 가라앉으면서 하루아침의 수송력의 10%가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이에 진주만의 복수가 이것으로 달성되었다고 평한다.

반면 미군들은 이제 마리아나에서 후속공격을 개시하였으며 1항공함대가 미 기동부대의 정보를 획득하나 반격을 지시하는 사령장관인 카쿠다와 전력온존을 위한 퇴피를 주장하는 진주만 공격대의 영웅으로 불리던 참모 후치다 마쓰오의 의견이 대립, 카쿠다의 공격지시로 공격대가 출격하여 미 공모를 5척 격침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나 이 역시 허위보고였다. 이후 트럭 섬과 같은 방식으로 마리아나를 공습, 93기의 베테랑을 포함한 140기의 제1항공함대는 고작 3기만 남고 전멸한다. 기지항공대의 대전력으로 결전에 임한다는 구상은 이 공습으로 붕괴하였으며, 미군이 목적달성을 이루고 돌아가 일본군은 전투력을 복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3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 사이 남방에서는 윌리엄 홀시더글러스 맥아더가 무력화된 라바울 인근을 완전히 포위한다. 특히 맥아더는 쇼맨십을 위해 작전의 피날레인 로스 니그로스 섬에는 자기 자신이 직접 장병들과 같이 상륙했다. 그 결과 라바울 기지는 배와 항공기를 모조리 상실, 12만여명의 일본군이 라바울과 그 인근에 고립되어버리면서 3개월에 한번씩 수확가능한 고구마로 연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통합참모본부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전과를 좀더 유리하게 인정하면서 맥아더 장군은 본국에서 높으신 분들이 현지의 명장들을 몰라보고 발목이나 잡는다는 식으로 언플을 벌여 필리핀 상륙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도 했다.
반면 일본 국내에서는 트럭섬의 참극에 대해 한개 사단이 통째로 증발한 육군의 항의로 도조는 스기야마 참모총장을 압박, 참모본부의 통수권을 장악하였으며 도조의 편에 붙어있던 시마다 해군대신도 트럭섬 공습을 해군정사건으로 비화, 나가노 군령부 총장을 경질하고 자신이 대신과 총장을 겸임한 후 사건을 덮어버린다. 이로써 도조는 좀 더 독재자에 가까운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황실에서도 덴노의 동생 지치부노미야가 권한을 독점하는 행보에 대한 경고를 보내나 자신은 결의를 굳혔다며 '결전비상조치요강'을 발표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정부 비판이나 평화 운동은 정부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한다. 우선 학생들에게 1년간의 공장 노동을 의무화하여 비행기를 조립하도록 시켰으며 아직 전통주의적인 면이 남은 여성들의 정식 징용이 무산되자 '여자정신대'를 창설, 노동봉사와 죽창술 교육을 독려하였으며 육탄 돌격 병기의 도입을 허가, 카미카제, 가이텐신요, 오카 등의 개발이 진척을 이루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항공기 생산 문제로 도조와 시마다가 육군의 손을 잡자 불만을 가진 해군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마이니치 신문에서 도조의 정신론과 죽창술 교육을 비판하는 죽창사건이 벌어진다. 도조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마이니치를 폐간하려다 기자 개인을 징병하려 하고 알리바이로 200여명의 40대 퇴역군인들을 재징집하는 추태를 벌인다. 이때 같이 징집된 노병들은 결국 이오지마에서 옥쇄하고 만다.

일본의 자원수송역량은 점점 퇴화하여 44년 2월에는 선단 호위함에 고작 시무슈 하나만 붙은 상태에서 미 잠수함의 매복에 걸려 유조선 5척을 잃고 시무슈가 퇴각하는 큰 피해를 본다. 일본군은 이에 호위함을 늘리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대선단 방식을 사용하기로 한다.[54] 그동안 함대결전사상에 기반하던 함대운용에도 변화가 일어나, 나가토 중심의 제1함대가 해체되고 오자와 지사부로 휘하에서 모든 공모를 집중운용하는 제1기동부대를 창설, 전함은 더이상 결전전력이 아닌 전위전력으로 취급하여 2함대에 배속되자 나가토는 1함대가 해체되었다는 불명예에 분노하지만 이것도 결전이라며 납득한다.[55]

3월에는 인도 방면에서 육군의 '우호작전'에 앞서 지원을 하기 위해 아오바를 중심으로 인도양 통상파괴작전 사호작전이 실행된다. 문제는 연합군을 교란하기위해 미군 깃발을 걸고 위장하는 시점에서 국제법 위반이었다는 점. 이 작전의 지원을 위해 독일에서도 몬순전대가 지원되고 일본도 잠수함을 보강하여 제8잠수함대와 함께 통상파괴에 나선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지만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연합군의 선박생산능력때문에 수송선단을 격침해도 얼마 뒤 재보충이 가능해서 연합군 수송전력은 금방 복구되니까 이를 참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가 승무원 학살을 요구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독일 해군과 이들이 파견한 몬순함대에서는 칼 되니츠 제독이 이 명령을 묵살하여 포로 처형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히틀러의 선원 학살명령은 리벤트로프를 통해 주독 일본대사에게 전달되었고, 일본군은 나치 독일군보다 이 지시를 더 충실히 이행했다. 인도양에 나가있던 잠수함[56]들이 상선을 격침한뒤 부상하여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하는 포로학살 행위가 이뤄지기 시작하며 이8은 이에 항의하지만 결국 자신도 명령에 따라 학살에 참여하고 만다.[57]
3월 9일, 토네가 영국 상선 베허호를 발견, 처음에는 미군 함선으로 위장하여 정선을 명령하나 상선이 이를 무시하자 일본군이라 송신하고 다시 정선하라 하지만 응하지 않자 상선을 격침한다. 이 과정에서 100명의 포로를 확보하고, 인도인과 여성 20명은 적국 선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카르타에서 하선시켰으나, 80여명을 수용할 포로수용소를 찾지 못하고 상부가 사호작전 명령이었던 포로 학살을 재촉하자 결국 포로의 폭동 방지를 위해 하나하나 몰래 불러내어 군도로 살해하고 만다.

반면 육군의 우호작전은 시작부터 대차게 꼬이기 시작한다. 55사단은 버마의 영국군을 포위하였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보급 부족으로 전멸 위기에 처했으며 사단장 하나야 중장은 일이 조금만 꼬여도 하급자에게 폭언을 하며 돌격 혹은 자결을 종용하는 등의 폭거를 저질러 휘하 직속사관들이 노이로제로 자살하며 부사관들이 프래깅 시도를 하려 드는 등의 악재가 겹쳤다. 슬링과 스틸웰 휘하의 연합군은 이미 일본군의 행보를 감청하여 일본군을 유인하기로 하였고 인도 진공작전의 계획을 알게 된 처칠의 지원도 늘어났다. 타쿠시로 핫토리 작전과장의 구상 하에 일본 육군은 다수의 전력을 상실한 해군 대신에 44년 대륙을 장악하고 45년에 필리핀에서 미군과의 결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남방군은 독단적으로 자신들이 가진 물자만으로 임팔을 공략하려 들었고 전황 악화로 내각에서의 권위를 의심받고 있던 도조는 자신의 입지를 되찾기 위해 임팔 공세를 공개적으로 홍보한다. 반면 마셜 제도가 함락된 해군은 마리아나에서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중부태평양방면함대를 신설하고 육군 31군 사령부의 지휘권을 편입해가면서까지 방어선 강화에 주력한다. 그리고 다음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2항전으로 재편된 히요와 준요가 모였으며, 장갑항모 130호가 '다이호'로 개명되면서 드디어 불침공모가 전선에 등장했다며 만세삼창을 외친다.

44년 3월경, 자신들은 결전에서 몇번은 승리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미항모의 공습이 계속되자 결전 전과를 재확인하면서 그제서야 실은 자신들의 전과가 굉장히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재 미군의 정규항모는 못해도 13척 이상은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한다.(실제로는 12척)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했던 해군은 항모들의 정박지에 제2의 진주만 공습을 벌일 수 있는지 다방면에서 검토하였으며 25일에는 뉴기니의 일본군들이 절대국방권 내의 웨아크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웨아크까지 가는 길은 100km가량이 되는 먼 길이었으며 정글을 뚫고 나가야만 했다. 그나마 사정이 좋은 사단사령부는 대발동정으로 후퇴하였으나 퇴각중 미 어뢰정에 걸려 전멸하였으며 남은 병사들이 총 한자루만 가지고 미군과 호주군, 불어난 물과 악어, 수많은 해충들, 심지어 굶주린 전우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야했다. 물자는 극히 부족해졌고 병자들에게는 자결 명령이 내려왔으며 패잔병들은 전사자들의 의복과 장비를 모조리 벗겨갔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은 트럭 섬의 방식대로 파라오 정박지를 공습하였으며, 일본군은 군함의 퇴피를 최우선시하면서 수송선단을 미군의 공습에 노출시켰다. 홀랜디아에서는 미군의 공습으로 항공기 130기가 앉은 자리에서 파괴되었으며 이 일로 참모들 몇명이 경질되고 만다. 코가 미네이치 사령장관은 사령부가 다바오로 퇴피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실종되었으며, 후쿠도메 참모장은 세부 섬에 불시착하여 항일 게릴라에게 작전계획을 전부 빼앗기고 석방된다. 참모장은 게릴라들이 서류에 관심이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나 이미 맥아더의 손을 거쳐 하와이의 통합정보센터에서 해독과 번역을 마치고 각 함대 사령부에 보내지면서 신Z작전의 상세한 개요는 이미 미군에 넘어가버린다.


[52] 이는 무의미한 전투를 벌이지 않으려는 맥아더의 의중이 크게 반영되었는데, 딱히 휴머니즘에 기반한 게 아니라 그의 명예욕과 영웅심리에 연관되었다. 이후 자신의 명예와 이해관계가 얽힌 필리핀에는 적극적으로 상륙작전을 벌인다.[53] 하루에 미군기 69대를 격추하고 일본기 손실은 0기라거나 에이스 파일럿 이와모토 테츠조가 미군기를 202기나 격추했다거나, 항공폭탄 한발로 미군 폭격기 24기를 한번에 폭파했다거나 하여 맥아더가 라바울 공략을 포기했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개소리.[54] 사실 영국도 유보트에게 수송루트가 유린당하는 어려운 시기에 대잠호위함을 선단에 6~7기 이상 붙이고 독일의 고속전함 통상파괴에 대응하기 위해 전함을 선단호위에 붙이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틀린 선택은 아니지만 영국이 1차대전때나 하던 실수를 반복했다는 게 문제.[55] 실제로 항모의 호위로 전함을 두게 될경우, 강력한 방공화력과 대형함이라는 특징 덕분에 항모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탱커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미 타국은 전함의 용도를 결전 대신 지상포격, 대공방어, 선단호위 등에 동원하여 놀리지 않고 사용다. 그러나 일본만이 콩고급을 제외한 나머지 전함들을 결전 전력으로 처박아둔다(...) 전함의 전위전력화는 니미츠 제독이 일본군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평가한 야마모토, 다몬마루, 오자와 셋의 경험에서 체득하게 된 것인데, 오자와가 현역 중에 최고기수가 되고서야 이 구상이 실현된 것이다.[56] 로110, 이26, 이8 등이 학살에 관여했다.[57] 현실에서 이8의 함장 아리즈미는 이401의 함장이 되었지만 결국 전후 귀국하지 않고 401을 미군에 인도한 후 함내에서 자살한다.

3.7. 레이테에 산산이 흩어지다

한때는 해군의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결국 상부에 밉보여 뉴기니의 쥐수송 부대로 전출된 시라누이가 수송부대가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악몽을 꾸며 시작된다.

아호 작전, 즉 마리아나 해전의 패배로 재기불능이 된 제1기동부대가 귀환하며, 미군의 사이판 상륙은 더 이상 저지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일본의 상층부는 심각하게 체면이 구겨져 어떻게든 사이판을 구원할 방안을 모색하며, 천황 히로히토까지도 군을 질책하는 등, 아랫사람들을 마구 갈구어보지만 무언가 대책이 나올 턱이 없었다. 1항전의 기함인 즈이카쿠는 이미 모든것을 포기하고 드러누워버렸으며, 결국 뭘 해도 답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사이판 섬의 포기가 공식으로 결정된다.

3.8. 일억특공

3.9. 칸무스의 가장 긴 하루1

3.10. 칸무스의 가장 긴 하루2

일본 패망 이후 70년대까지의 시간대를 그리고 있다.
나가토는 차기 미국의 미사일 무기의 표적으로 처분당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유키카제와 히비키가 마지막 생존자로 남으며, 각각 대만과 러시아로 인양되 단양과 베르니로 활동하게 된다.[58]
단양으로 개명된 유키카제는 나름 호위임무와 연습전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했으나, 노후된 몸을 이끌다 큰 재해에 피해를 입게 되어 출격 불가능 상태에 빠지게 되고, 구조 이후 돌아가지 못한 일본의 근대화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베르니의 경우, 데카브리스트로 개명되면서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히키코모리로 지내다, 원자미사일의 표적으로 처분된다. 그 순간 6구축 멤버들의 가호가 들리고, 자신은 히비키다라며 선포하며 최후를 맞이하고 제독의 결단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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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게임 내에 단양이 실장되기 한참 전에 나왔으므로 복장은 유키카제 개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