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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23:50:08

정사와 야사


1. 개요2. 정의3. 신뢰성
3.1. 여러 반례3.2. 야사 범주의 애매함
4. 정사/야사 구별에 대한 비판5. 동아시아 외 지역에서6. 유사 개념

1. 개요

역사 문헌을 나누는 용어인 정사(正史)와 야사()를 비교하는 문서이다. 후술하듯 예전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철저한 관료제를 시행하여 국가 주도로 역사를 공인해온 전통이 있는 한국중국에서만 주로 쓰이는 개념이다.

오늘날에는 정보 매체의 발달로 정사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늘어났다. 정사는 대개 양이 매우 많아[1] 과거에는 일반인이 접하기 매우 어려웠지만 지금은 조선왕조실록처럼 방대한 사서도 인터넷으로 쉽게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는 갈 길이 멀다.[2] 그러나 정사에 접근하기 쉽게 된 것은 좋지만 그 반향으로 야사에 대해서는 "정사에 없고 야사에만 있으니 이는 날조다"라며 무시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는데, 후술하듯 이는 정사/야사 구별 기준에 대한 오해에 의한 것으로 비판의 소지가 있다.

2. 정의

고대 중국에서는 이전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것은 군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믿었다. 또한 역사는 군주가 보고 배우기 위한 기록이었다.[3] 그래서 국가가 역사를 관리하기 위한 작업이 있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정사(正史)는 곧 나라의 입장에서 공인된 정통 사서를 의미한다.[4]

더욱이 직접 역사를 편찬하는 관찬 사서 작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왕조의 기록을 사관을 통해 기록하여 실록(實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전대 왕조의 역사는 사(史)로 정리했다. 중국의 경우 이십사사가 바로 그것이며, 한국사에서는 삼국사기고려사가 이러한 예를 따른 것이다. 여기에 더해 시대별로 특정한 역사서를 정사로 지정하여 특별 관리했다.[5] 중국의 흠정 이십사사와 추가로 언급되는 4권,[6] 한국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일본육국사 등이 정사에 속한다.

한편 국가와는 무관하게 지식인 선비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역사를 기록한 것도 존재한다. 비록 개인의 기록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으나, 이것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의 증언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바로 야사(野史)다.

단, 정사라고 해서 항상 국가가 직접 편찬하는 관찬(官撰) 사서인 것은 아니다. 개인이 저술했지만 나중에 국가가 공인한 것도 존재한다. 비유하자면 관찬 사서가 국정 역사 교과서라면 사찬(私撰)이지만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것은 검정 역사 교과서에 가까울 것이다. 오히려 그런 것이 상당 수 있기에 정사의 기준에서 관찬 여부는 그다지 필수적이지 않다.[7] 대표적인 예로 진수정사 삼국지나 범엽의 후한서, 구양수신오대사 같은 여러 사찬 사서들이 후일 정부의 공인에 의해서 정사 계보에 포함되게 되었다.

3. 신뢰성

정사의 정(正)이라는 한자가 오해를 부르지만, 정사는 "국가 공인"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왕조가 인정한 역사 기록'이라는 뜻이지 '정확하니까 믿을 수 있는 기록'이라는 뜻이 아니다.

일단 정사가 전반적으로 야사보다 조금 더 신뢰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국가가 공인하는 과정에 의하여 국가 인력이 투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성 검증 같은 작업도 어쨌든간에 노동력이 소모되는 일이니[8] 같은 방향의 노력을 들인다면 개인보다는 좀 더 효과적으로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9] 더욱이 관찬인 경우 국가 기관만이 알 수 있는 사실에 대한 내용까지도 폭넓게 다룰 수 있다. 가령 왕과 사관 둘만 있는 상태에서 있었던 일 같은 것은 사관이 실록에만 적지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것이 아니니 개인 사서에서는 이런 내용을 다룰래도 다룰 수가 없다.

한국 고대사의 양대 사서로 평가받고 흔히 비교되는 삼국사기삼국유사만 해도,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한다는 의미는 매우 크지만, 일연 개인의 정보수집으로는 한계가 있다보니 같은 내용을 다루는 부분은 대체로 관찬 정사인 삼국사기가 더 신뢰도가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관찬 사서의 대표적 사례인 조선왕조실록 역시 대체로 신뢰성이 높으며, 이는 연려실기술 등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다. 사실 연려실기술은 저자인 이긍익의 염격한 분류와 고증을 통해서 최대한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여 개인이 할 수 있는 역량 내에서는 신뢰도에 많은 노력을 기한 축에 드는 문헌인데, 그래도 국가에서 작업한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러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정사만 진짜 역사고 야사는 찌라시라는 생각은 간단하게 비유하면, 정부 편찬 출판물만 사실이고 이외의 학술기관과 언론 또는 출판물은 가짜라는 말이다.[10] 야사 역시 충분히 신뢰도에 신경을 써서 서술할 수 있고, 이 모든 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신뢰성은 '관찬이니까'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1. 비교적 동시대에 저술되었다는 점 2. 비교적 1차 사료에 가깝다는 점[11] 등에서이다. 그러나 그 조선왕조실록마저도 임진왜란 해전을 연구할 때는 사찬(야사)인 《난중일기》에 비하면 2차 자료일 뿐이다.[12][13]

오히려 정치적 목적에서 이전 왕조의 기록을 왜곡하거나 누락하고 당시 통치왕조의 입맛대로 곡필할 가능성도 아주 높다. 과거의 역사서는 유교 성리학식 도덕 사관에 의해 사서를 해석하기 때문에 현재와 동떨어진 통설과 인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고려조 비판은 당시에도 과잉충성(?)으로 보일 정도라 세종이 여러차례 반려할 정도. 광해군 일기에서도 중초본과 정초본의 차이로 볼 때 실록 편찬시에도 전정권에 유리한 내용은 삭제하고 현재 권력에 유리한 내용으로 편집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더욱이 유교 문화권에서는 춘추필법이라고 하여 역사서술에서 대상(주로 인물)에 대한 주관적 관점을 반영하여 표현을 달리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14] 이게 단순히 "사관은 말한다. ……"와 같은 직접적 서술만이 아니라 전후 맥락이나 용어 등에도 편찬자의 편견이 개입하여 취사선택이 발생하고는 하였다. 예컨대 태종은 명군으로 남고자 《진서》, 《수서》, 《구당서》 등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들을 고쳐서 아버지나 형제에게 허물을 뒤집어 씌웠다고 비판받았으며, 고려사의 경우 세종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감히 천자국을 참칭하였다 하여 각종 용어들이 제후국의 것으로 고쳐 쓰일 뻔했다.

정사로 인정된 것에도 개인이 쓴 내용이 끼어들어가는 경우가 있으며, 개중에는 소설 같은 허구의 이야기들도 더러 있다. 삼국사기에서 김유신의 열전은 김유신의 후손이 쓴 전기소설의 내용을 압축해서 넣은 것이며, 중국 명나라의 역사를 다룬 정사인 명사이자성장헌충 같은 도적들을 다룬 부분은 명말청초에 나온 소설들의 내용을 그대로 넣은 것이다. 심지어 명사에 포함된 도적 이암이나 홍낭자 같은 부분은 다른 역사 기록들과 교차검증하면 사실이 아닌 허구적 소설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중국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바 있다.

3.1. 여러 반례

3.2. 야사 범주의 애매함

정사/야사의 신뢰성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야사는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라는 것이다. 야사로 분류되는 것 중에서는 민담수준의 것들도 많이 들어가 있고, 특히 시기 차이가 많이 난다면 신뢰도는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야사 중 가장 주목도가 높은 삼국유사에도 곰이 사람이 된다는 단군신화부터 시작해서 '사실 그대로의 역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고, 여기서 실제 역사를 읽어내는 것은 독자와 역사가의 몫이다. 매천야록처럼 당대의 설화도 개판일 판이라... 사육신 항목처럼 승자에 대한 기록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기소설 육신전을 바탕으로 대응하면, '판타지일 수도 있는 것'을 '판타지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덮는 꼴이 된다. 두문동 72현 전설 쯤 되면 거의 프로파간다 수준이다. 정사가 기본이 되는 것은 그나마 사료 비판이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야사에 대해서 논할 때는, 야사의 출처가 되는 텍스트에 대해서 이해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 야사의 출처로 수도 없이 언급되는 용재총화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 책은 저자가 본인 스스로 역사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써낸 사기같은 책과는 많이 다른 작품이다. 그 책은 전형적인 필기(筆記)방식으로 쓰여져 있는데, 이는 그 당시 문인들의 하나의 글쓰기 방식으로 본인의 관심사를 자유롭게 서술,기록한 글이다. 그렇기에 거기에는 본인이 직접 겪은 여행기, 사람들로 부터 전해들은 괴상한 사건이나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각색한 글도 있고, 야사(野史)에 속하는 나라 안의 일 등도 나란히 기록하고 있다. 즉, 책 전체가 아닌 그 안에서 사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일부분의 내용을 우리가 야사라고 착각해서 부르는 셈인 것.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은 다른 야사라고 부르는 내용의 출처들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부분이다. 파한집, 어우야담, 패관잡기 같은 책들은 저러한 필기의 방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또 이런 야사의 출처 중의 몇몇 책들은 저자 본인이 스스로 저술한 '문집'의 일부로 남아있는 것들이다. 문집이 어떤 저술가의 작품모음집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면 저 텍스트들이 가진 다양성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야사라는 분류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정사와 야사와 민담에 대한 분류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책들은 애초에 역사서가 아니며, 야사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들은 기본적으로 역사서의 형식도 갖추지 않고 있으며, 필자조차도 자신이 역사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분류를 보면 이들 책은 문학 카테고리, 더 정확하게는 필기잡록류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요컨대 이런 책들은 역사서라기보다는 역사적 내용이 일부 담긴 수필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것들은 저자부터가 역사 저술의 의도가 없으니 역사 저술에 필요한 사실 검증에도 자연히 신경을 덜 썼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소위 고기류 책들은 실제로는 대부분 위서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는 거의 없지만 야사에 포함되기는 한다. 이것은 야사가 기본적으로 역사서이냐 아니냐로 갈린 것을 다시 정사이냐 야사이냐로 쪼갠 것이지 역사적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분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흔히 "야사에 따르면..." 식으로 '야사'라고만 언급하곤 하는데 오히려 야사는 더욱 출처를 면밀히 밝혀야 한다. 야사라는 이야기도 다 출처들이 있다. 한국사의 대표적인 야사집으로 삼국유사연려실기술이 꼽히는데 이 책들을 열람해 보면 일화의 출처를 꼭 뒤에 붙여놓고 있다.[15] 용재총화, 오산설림, 청파극담 등이 많이 출처로 거론되는 민담 서적들이다.

4. 정사/야사 구별에 대한 비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들은 전근대 시기 오랫동안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정사(正史), 정통(正統)이라는 관념을 내세우고 이를 중시하였다. 중국의 왕조들은 이미 당(唐)나라 때부터 특정 역사서를 정사로 지정해왔다. 따라서 정사로 규정된 것 이외의 역사책들은 잡사(雜史), 야사(野史) 등으로 불리며 구분되었다. 정사라는 관념은 물론 왕조의 정통적인 계승관계를 밝히는 것이 역사서술의 핵심이 되는 전근대 왕조국가의 이념과 역사관에 기초한 것이 었다. 애초부터 정사는 정통이라는 관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중국에서 비롯된 정사 관념은 한국,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는 것이 되었다. (중략)

‘공식적 역사서술(official history)’이란 서구에서 주로 쓰는 말인데, 이 용어는 주로 군대나 재무부, 법무부 같은 개별 국가기관 또는 협회나 사회단체 등 민간기관들이 자신의 기관에 대한 역사서술을 각 기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특정 기관이나 단체에 대한 역사서술을 이야기할 때 주로 쓰이는 것으로, 국가 전체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사용되지는 않는다.[16] 이는 기본적으로 국가 내부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근대 민주 주의 국가에서 상정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이다. (중략)

특히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 국면에서 이를 추진했던 사람들은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표방했다.[17] 이들이 주장했던 “올바른(正) 역사(史)”에 문자 그대로 정사 관념이 투여되어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들이 검인정 제도하의 다양한 교과서들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단일한’ 교과서를 추구하고, 국가가 주도하여 나라의 최고 학자들을 모아 교과서를 편찬하면,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고 또한 동의해야 하는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 것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그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단일한”, “올바른”, 또한 “객관적”이거나 “균형 잡힌”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발상에는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정사 관념이 투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런 측면에서 정사·정통성 관념을 바탕으로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관념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그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국가 중심의 배타적 역사인식, 국가권력이 역사인식에 너무 과도하게 개입하는 문제 등에 대해 학계 내부에서 보다 철저하고 지속적인 자기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홍석률, 〈역사전쟁을 성찰하며 - 정사(正史) · 정통성(正統性)론의 함정〉
정사/야사의 구별법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즉, 다양한 역사서에서 '정사'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정사만이 옳다'라는 독단을 낳기 쉽다는 것이다.

정사/야사 구별이 문제를 빚는 사례로, 동아시아의 정사/야사 식의 구별에 익숙한 이들은 다른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들 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 구분법은 일견 편리할지 몰라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편견을 만들기 쉽다.

가령 애초에 정사를 따로 지정하지 않는 지역에서 '정사'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살펴보면 대체로 "신뢰성이 높아보이거나 관찬인 것"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포로 학살 기록은 야사성이 짙다"라는 것은 "신빙성이 낮다"라는 의미로 종종 쓰이는데, 이에 대해 "해당 기록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 연대기에서 나온 것인데, 관찬 사서이므로[18] 믿을 만할 것" 식으로 반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관찬이라고 해서 신빙성이 반드시 높다고 보장이 된 것은 아니다. 신뢰성이 높아보이는 것을 정사로 분류하면 그런 것들을 정사로 간주하니까 신뢰성이 높은 것은 당연한 순환논리이다. 신뢰도는 정사냐, 야사냐로 따질 것이 아니라 각각의 문헌의 상황을 고려하고 다른 문헌과 교차검증하여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정사란 게 있어서 "여기 있으면 사실, 아니면 날조"라고 생각하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애초에 정사/야사를 나눌 수도 없는 지역이 많으며, 각각의 역사 문헌에 대한 검증 노력을 소홀히 하게 된다.

결국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5. 동아시아 외 지역에서

위에서 보듯 정사/야사의 구별은 동아시아 문명권에 한정하여 주로 나타난 개념으로, 서양 사학에서는 이러한 구별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연대기를 비롯한 전근대 유럽의 역사 기록 전통은 일반적으로 국가 권력이 공인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어떤 주체가 직접 혹은 후원을 통해서 저술하는 "문학"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동아시아의 "정사"와 유사하다고 볼 만한 것은 근대 국가 성립과 함께 관료제가 정착하면서, 특히 군사 전통에서 본격화되었다. 군사학이 정립되어 가면서 당대는 물론 과거의 전훈까지 분석할 필요성이 생겼고, 전문 연구기관에 의해 군사사 편찬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를 "공간사"(公刊史; Official history)라고 하였다.[20]

6. 유사 개념




[1] 국가 기관으로서 저술에 인력을 많이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방대한 문헌을 보관하기도 용이하다. 아닌 말로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 규모의 창고를 조선시대에 개인이 구비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개인 저술 문헌은 필연적으로 분량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2] 정말 핵심적인 정보만 기록한 실록에 비해 세세한 국정에 관한 논의를 전부 다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그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제 초서정자로 풀어쓰는 작업인 탈초(脫草)가 끝나 한국어로 번역하는 단계에 있으며, 이 과정은 AI를 활용하여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3] 자치통감에서 보듯 동아시아 역사 서적 명칭에 주로 들어가는 '-감'(鑑)은 이러한 인식을 보여준다. 거울(鑑)처럼 돌이켜보라는 의미이다.[4] 촉한정통론/조위정통론 등의 관념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5] 오늘날 이들 국가의 후속 현대 국가들은 '정사'라는 개념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문헌들은 해당 국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높게 평가 받는다.[6] 이십사사의 선정이 청나라 초기이기 때문에 청나라 멸망 이후에 중화민국 정부에서 청의 역사를 다룬 청사고, 중화민국 총통 쉬스창이 원사를 보충하게 공식적으로 언급하여 편찬된 신원사가 주로 정사로 언급되고 있으며, 여기에 이십사사 형성 이전 시기에는 정사에 포함되었다가 이십사사에서 제외된 동관한기나 청나라 멸망 이후를 다룬 중화민국사 정도가 억지로 꼽으면 정사에 포함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4권.[7] 신승하, 2011, pg. 25[8] 특히나 과거에는 인터넷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니 문헌 검증을 하는 것도 다 하나하나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다.[9] 이는 비단 역사서 뿐 아니라 전근대 시대 대다수 문헌이 그러하다. 근대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개인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된 회사기업의 형성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미비했으며, 대규모 사업을 할 수 있는 조직은 국가뿐일 때가 많았다. 책이란 것도 (지금이야 혼자서도 개인출판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거엔 매우 노동력이 필요한 산업이었기에 전세계적으로 민간 출간은 근대에나 활성화되는 것이 보통이며, 품질은 대체로 국가 출간보다 열악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은 민간 출간의 발전이 중국, 일본에 비해 조금 더뎠는데,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책이 국가 출간이며 이에 따라 책의 품질(외형적 마감이든, 내용적 오탈자 검수 등)은 중국, 일본보다 훨씬 더 좋다.[10] 특히나 오늘날에는 개개인도 언론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취재 능력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국가에 무조건 꿀린다고만은 볼 수 없다. 물론 그럼에도 국가 권력에 의해 전파가 통제되는 기밀 등 국가의 정보력의 우위는 어느 정도 남아있다.[11] 그리고 바로 이 2가지 이유 때문에 실록이 승정원일기 앞에서는 한 수 접고 가는 것이다.[12] 당연히 난중일기도 (이순신에 대한 한국인의 존경심과는 별개로) 사료 비평의 대상이다. 그러나 난중일기가 '사찬이라는 이유로' 실록보다 열등한 사료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13] 사실 선조실록도 전쟁으로 대부분의 역사 자료가 훼손된 상태에서 서술된 것이라 내용이 부실하고 부정확하여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중에 다른 기록들에서 가져온 내용들로 보충한 선조수정실록이 나왔을 정도였다.[14] 이는 위정자의 공과 과를 후세에 전하여 유학적 왕도정치를 권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관찬과 사찬을 막록하고 편찬자 개인이나 권력의 관점을 반영하여 기록의 진실성을 훼손하게 되었다.[15] 다만 삼국유사는 출처라고 쓴 책들이 일연이 살아있던 고려 말에는 존재했겠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다수가 실전되어 삼국유사가 가장 오래된 기록이 되어버린 기사가 많다.[16] (논문 내 주석) Martin Bluemenson, “Can Official History Be Honest History?”, Military Affairs, March 1, 1963; A.M. J. Hyatt, “Official Histrory in Canada”, Military Affairs, August 1, 1966.[17] (논문 내 주석)‘올바른 역사’라는 말은 황교안 국무총리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고시하면서 발표한 담화문(2015년 11월 3일)에 나오고, 보수단체의 국정화 지지 성명서에서도 빈번히 사용되었다. 편집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논리와 반대 의견을 기록한다」, 『역사와 교육』 13호, 2016 참조.[18] '반례' 문단에서 다루었듯이 비잔티움 역사관에서는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 스킬리치스의 문서를 참고하면 궁에서 일하면서 접할 수 있었던 자료를 종합한 것이기에 동아시아 기준의 관찬 사서로 볼 여지가 있긴 하다.[19] 참고: 신승하, 중국사학사(2011), Anthony Kaldellis, Streams of Gold, Rivers of Blood(2017)[20] 동아시아에서도 서구 군사 전통의 영향으로 군대에서의 공식편찬사서를 주로 "공간사"라고 칭한다. 가령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구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韓國戰爭史)』가 이에 해당한다.[21] 대개 종파가 정립되기 이전의 선지자가 구술/저술했다고 알려진 문헌들을 경전으로 삼는다. 물론 번역은 중앙에서 행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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