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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7:34:04

정복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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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성립 원인3. 대표적인 정복왕조
3.1. 몽골계
3.1.1. 요나라 (거란)3.1.2. 원나라 (몽골)
3.2. 티베트버마계3.3. 만주-퉁구스계
3.3.1. 금나라 (여진)3.3.2. 청나라 (만주)
4. 비슷한 사례와 반론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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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복왕조(Conquest dynasty)는 독일계 미국인 사회경제사학자인 카를 비트포겔(Karl A. Wittfogel)이 제안한 개념으로, 중국정복한 비한족 계열 왕조들 중 , , 서하, , 처럼 중국 문화에 일방적인 동화를 거부한 왕조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1] 오늘날 중국의 시진핑 정권에서는 동북공정북방공정을 시행하는 입장에서 혹은 티베트와 위구르 및 내몽골의 독립운동을 부추길 수 있다는(중국 입장에서는 이른바 분리주의를 조장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서, 해당 정복왕조라는 개념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2. 성립 원인

동북아 지역은 북방의 기마 유목민 사회와 남방의 농경 사회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북방의 초원지대의 기마 유목민은 전투력이나 기동력이 우월했지만, 대신 남쪽의 농경 사회로부터 생필품공급받아야 했다. 한편 농경 사회는 유목 사회에 비해 인구밀도와 생산력이 압도적이었으나, 전쟁에서 유리한 점이 많은 기병을 대규모로 양성하기 힘들었고[2], 이 때문에 북방의 유목민이나 수렵채집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들이 날뛰지 않게 선물을 어느 정도 줘야 하고 군비를 어느정도 유지해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그런 과정에서 백등산 전투영가의 난, 정강의 변, 토목의 변 등 한족 왕조들은 생산력이나 인구에서 훨씬 열세인 북방 유목민 집단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는데, 결국 이런 딜레마에서 기존의 중화 제국이 무너지면 북방에서 유입된 비한족 민족이 침투왕조나 정복왕조를 세우고 다시 중국의 북방을 여타 다른 비한족 침략자로부터 보호하는 상황이 거듭되었다. 다만 정복왕조는 한족과 동화되어 정체성이 흐려지는 것을 경계했고, 한족들로부터 최대한 많은 자원을 수탈해야 했기 때문에 자민족 통치와 한족 통치를 분리해서 시행하였다.

전쟁사 전문 출판사인 오스프레이의 Men at Arms 시리즈 중국편(Soldiers of the Dragon) 저자 크리스 피어스 역시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데, 중국이 부유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그 어떤 중화 왕조도 용병을 통해 북방 국경을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는 못했다. 유라시아의 교차로 신장의 역사(Eurasian Crossroads: A History of Xinjiang)를 저술한 제임스 A. 밀워드도 같은 내용을 지적하고 있는데, 역대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북방 국경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관중, 영하에서 동튀르키스탄으로 이어지는 서북부의 척박한 변방지대를 손해를 보면서도 계속 유지해오는 정책을 취해왔다.

중세 이래 중국은 국경을 안정적으로 방위하는 문제 때문에 비옥한 강남 지방의 물산을 척박한 북방 혹은 내륙으로 꾸준히 이송하는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결국 정복자로 유입된 북방 민족이 한족들을 또다른 새로운 침략자의 유입으로부터 방어하고, 한족들이 이른바 오랑캐 전사 집단에게 세금을 바치는 상황에 타협점이 생기는데 그 결과가 중국사 특유의 정복왕조들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통치할 경우에, 통치자가 피통치자보다 고도의 문명 수준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고, 통치자가 피통치자보다 낮은 수준의 문명를 보유하는 경우도 있다. 첫 번째 경우에는 통치의 조직과 정책이 정복민족 고유의 것을 기준으로 하는데 무리가 없다. 따라서 피통치자 고유의 사회조직을 변화시키거나 동화하는 것을 통치정책의 중심으로 삼게 된다. 두 번째 경우, 정복민족의 미숙한 통치조직은 피정복민족에 대한 장기간의 안정적인 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피정복민족이 가지고 있는 체계와 조직을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개조하여 새로운 통치방법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경우 정복민족 고유의 통치조직과 정책에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즉 정복국가 지배층의 고유의 사회 문화 제도가 피정복국가 고유의 것을 답습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통치에 있어서 피정복민족의 참여는 필수적이 된다.
전야생활은 의심할 나위 없이 용기의 원천이기 때문에 야만적인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더 용감하다. 따라서 그들은 지배권을 획득하거나 다른 민족이 소유한 것을 탈취할 가능성이 더 많다. 이런 점에서 동일한 부족이라도 그 상황은 시간에 따라서 바뀐다. 사람들이 비옥한 평원에 정착하여 사치품을 집적하고 풍요롭고 세련된 생활에 익숙해지면, 전야에서의 습관이 사라져가는 것에 비례하여 그들의 용맹함도 줄어들어간다.

이것은 산양, 들소, 나귀와 같은 동물들이 가축화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도 입증된다. 그들이 인간과 접촉하면서 야수성을 상실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면, 그들의 활력과 난폭성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것은 심지어 그들의 동작이나 모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야만적인 사람들이 사회적, 사교적인 인간으로 바뀔 때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익숙해진 습관이 인간의 성질과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배권은 노력과 용기를 지닌 특정한 민족에게 주어진다. 만약 어떤 두 집단이 숫자나 무력이나 연대의식에서 서로 비슷하다면, 전야의 습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보다 더 거친 생활을 하는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더 크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기술자나 전문적 장인들을 강제로 부려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도록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지니는 가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들에게 보상을 해주지도 않는다. 노동은 이윤의 진정한 원천이기 때문에, 노동이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면, 이윤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따라서 생산적 노동도 행해지지 않게 된다. 도회민은 흩어지고 문명은 쇠퇴해버린다.
이븐 할둔, 역사서설

일찍이 육가가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듯이 유목민족들은 중국을 정복할 능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다스릴 능력은 부족했다. 그리하여 중국에 있었던 정복왕조들은 요나라나 금나라처럼 한화되고 문약해져서 다른 유목민들의 침공을 당해 멸망하거나, 혹은 원나라처럼 내치에 실패하다가 한족들의 역공을 받아 초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장 대비되는 것이 침투왕조의 대표사례로 꼽히는 북위원나라이다. 북위는 효문제 치세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펴 나갔다. 이는 기득권을 상실한 여타 선비족들의 반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기마 유목민 전사들이 문약해지는 문제를 불러일으켰다.[3] 원나라의 경우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 중국 전통 관료제의 개입을 가능한한 최소화하고 한족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정책은 한족들의 반발은 둘째치고 행정력의 한계로 이어졌고 원나라 단명의 원인이 되었다.

, , 이 세 왕조는 만주에서 기원한 왕조로, 일찍이 중원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농경민들과 유목민, 수렵채집민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던 만주 지방 출신이다보니, 중국 정복 이후 한족 통치에 있어서 훨씬 더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부 지역이긴 하지만 서하 역시 비교적 점령지역을 성공적으로 지배한 사례의 국가이다. 이들은 가능한한 정교한 이원적 지배체제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방법을 찾았다. 유목민족은 유목민족의 방식으로 한족은 한족의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3. 대표적인 정복왕조

3.1. 몽골계

3.1.1. 요나라 (거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거란 제국)는 북면관과 남면관이라는 통치 기관의 이중화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였다. 상경임황부의 북면관은 유목민족들을 통제하였고 중경대정부의 남면관은 한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북면관은 요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관제로 행궁, 부족, 속국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고 주요 기관으로는 최고 권력 기관인 북추밀원이었다. 남면관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해서 조직한 관제로 주현 · 세금 · 군마 · 한인과 발해인에 대한 민정을 담당했다. 남면관의 최고 권력 기관인 남추밀원이었다. 황제는 날발(捺鉢)이라는 제도를 통해 제국을 순행하면서 지방을 위무하고 신료회의를 하여 전국을 다스렸다.

요나라 군대의 핵심은 정규군인 오르도 부대였다. 이들은 중무장 기병으로 기병창과 활, 검, 철퇴 등을 가지고 싸웠다. 병사 한 사람마다 보급 담당과 잡역꾼 한 사람이 배정되어 정군 1인과 부군 2인의 3인 1조 편제를 이루었고, 여분의 활, 창, 극을 가지고 다녔다. 보급 담당 역시 갑옷을 입고 무기를 지녔으며 잡역꾼도 무기를 사용했다. 이러한 편제는 그대로 3열의 야전배치로 이어졌다. 1열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이 배치되고 2열에는 갑옷을 입은 기병이 서며, 3열에는 말까지 갑옷을 입힌 중기병이 배치되었다. 오르도 부대는 3열에 서서 정예 예비대 역할을 하고, 잡역꾼과 보급 담당이 각각 1선의 전초전 부대와 2선 지원대 역할을 하였다. 오르도 군 이외에도 거란 부족병 동맹군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유목민 방식으로 산발적인 기마전을 담당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징집한 한족 농민 무리를 전투부대 앞에 내세워 화살받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상술한 특징 및 그 밖의 여러 측면을 볼 때 요나라의 전술은 후대 몽골군 전술의 선구적 형태였다. 보통 유목민 기마궁수들이 넓게 산개하여 스웜 전술을 사용하는 데 비해, 요나라 군대와 후대 원나라 군대는 좀 더 밀집된 대형을 이루었다.

3.1.2. 원나라 (몽골)

원나라는 몽골인은 천호제, 한족은 행상서성으로 다스리는 이원적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천호, 만호는 추밀원으로, 행상서성은 중서성으로 변화하였고 중서성의 행정관청으로 행중서성을 설치하였다.

원나라는 몽골 특유의 군사제도를 유지하였고, 중앙군은 추밀원, 지방군은 행중서성이 통제하게 하였다.

원나라는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 순서의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신분제를 시행하였다. 최상위 계급에 해당하는 몽골인 뿐만 아니라 색목인들 역시 한족들에 비해 우월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대표적으로 원 무종 때에는 티베트인 승려(西僧)를 구타하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욕하는 자는 혀를 절단한다."라는 황명이 내려졌다. 절대권력을 얻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한족들의 논밭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의 횡포를 부렸던 바 있다. 또한 이전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가 한문을 모방한 표음문자를 사용했던 것과 별개로 원나라의 몽골 문자는 한문과는 완전 별개의 기원을 가진 문자[4]로 이를 바탕으로 원나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관료제와 나름 구분되는 중앙아시아식 관료제를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나라에서 아합마(아흐마드 파나카티) 등을 통해서 도입된 중앙아시아식 관료제는 남중국 실정에 안 맞는 부분이라든지 정교함 면에서 떨어졌고, 이는 원나라의 지방 행정력이 취약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3.2. 티베트버마계

3.2.1. 서하

한화 현상을 두려워하고 경계했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변발을 유지했다. 유교, 불교 경전을 서하 문자로 번역했다.

3.3. 만주-퉁구스계

3.3.1. 금나라 (여진)

초기에는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였으나 송나라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중앙의 발극렬(포기레) 제도와 지방의 맹안모극제, 도포긴·포긴제 군사제도의 맹안모극제와 북방수비에 거란인을 배치하였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달리 초원지대를 직접 통제하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복속해 오는 일부 유목민 족장을 지원하여 유목민들끼리 서로 맞서도록 함으로써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나라가 칭기즈 칸의 경쟁자를 지원하자 칭기즈 칸은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1209년부터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야호령 전투는 정복 왕조 금나라 군대가 어떻게 약화되었는지는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투였다. 몽골군을 저지하기 위해 금나라는 완안승유가 지휘하는 50만 대군을 파견하였는데 금나라 군대는 여진족과 거란족 기병 및 대규모의 한족 보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완안승유의 참모들을 고비사막을 넘어 온 몽골군들이 말에게 풀을 뜯기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기병대로 급습을 가하자는 부장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한족 보병들이 따라붙을 수 있도록 천천히 진군하는 쪽을 택했다. 야호령에서 완안승유는 기병을 보병 앞에 일렬로 배치하였다. 몽골 기병들이 훨씬 더 용맹하게 싸웠던 것은 물론 초원의 몽골 기병의 활은 여진족들이 삼림에서 사냥할 때 사용하는 활보다 훨씬 더 사정거리가 길었다. 몽골군의 공격에 금나라 기병이 후퇴하는 와중에 한족 보병들이 금나라 기병에게 치어죽거나 깔려죽고 기병과 보병 전열 모두 흐트러졌고, 금나라의 50만 대군은 어이없이 궤멸하였다.

야호령 전투의 대패 이후 금나라는 야전에서 병력 부족에 시달리며 몽골군에게 끌려다니게 되었다. 이미 금나라는 1194년 황허강의 대홍수로 커다란 재해가 일어나자 한족 농민들이 계속 반란을 일으키며 국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1215년에는 북방의 도읍인 중도를 잃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217년 남송이 조공을 중단하자 금나라의 선종은 남송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는 몽골과 남송 사이에서 남북으로 포위당하는 상황을 만들었고 1235년이 몽골군이 개봉을 함락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3.3.2. 청나라 (만주)

오늘날의 만주는 세 개의 생태 지대에 걸쳐 있었다. 서부는 초원인데 일반적으로 몽골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목축 유목민들은 주로 양과 말로 생계를 유지한다. 북쪽은 삼림으로서 시베리아의 연장이다. 이 지역에서는 수렵채집민들이 살았는데 대단히 다양한 부족 집단이 있었다. 남만주, 즉 랴오닝은 농민들을 부양하는 기름진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데, 농부들은 주로 남쪽에서 이주해 온 한족이었고 만주족은 일부였다. 만주족이 지닌 힘의 비밀 중 하나는 이 세 지대 모두에서 자원을 끌어들이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들은 몽골의 기병, 만주의 기병 및 보병, 식량과 의복을 공급하는 한족 농민 모두를 활용했다.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 1부 유라시아 대륙의 제국과 미개척지들 / 피터 C 퍼듀
과거의 해석은, 만주족은 중국의 다른 야심찬 이민족 정복자들처럼 그들 지배의 통치나 정당화에 중국식 방법을 적용했고, 그 결과로 사실상 문명화된 중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청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했다 보기 힘들다. 청 통치자들은 일인 다역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신민들(만주족, 몽골인, 티베트인, 한인)을 동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스렸다. 청나라의 황제는 중국 백성에게는 천자였고, 몽골인에게는 칸 중의 (카간)이었으며, 티베트인에게는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이었다. 청나라는 다양하면서도 다민족적인 세계 제국이었다.
《하버드 중국사 청》 / 윌리엄 T. 로

청나라는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한이 피지배 민족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청나라 황제는 만주의 한, 몽골의 대칸, 한족의 천자, 티베트의 보호자인 전륜성왕,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 등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는 한족에 대한 유화책으로 표기에 있어 한자만주 문자를 병기하는 만한합벽, 관직임명에 있어 만주족과 한족을 같이 두는 만한병용제[5] 등을 시행하였다. 반면 강경책으로는 변발호복 강요와 문자의 옥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청나라는 군사적 기반인 팔기군을 만주팔기, 몽골팔기, 한팔기로 구분하였다.

4. 비슷한 사례와 반론

서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대에도 정복왕조들과 비슷한 기원(기마 유목민들의 유목 제국이 농경민들을 정복하면서 성립된 왕조)의 왕조들이 들어선 적도 많았다.[6] 그 외 아프리카나 유럽에도 비슷한 역사의 정복왕조들이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몽골계와 퉁구스계가 주로 많이 활약했다면 서양과 중근동 및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에서는 튀르크계들이 대부분 차지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해당 개념은 중국사에서 비한족 왕조들이 이른바 "원래부터 이들은 중국의 왕조였고, 이는 외침이 아니라 내전이었다."라는 전근대 중화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고 다각도로 해석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온 개념이다.

우선 중국사에 적용되는 이른바 정복왕조, 침투왕조 개념을 타 문명권에 직접 대입하는 것부터 불가능하다. 여타 정주 문화권 중에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유목민 사회와 꾸준히 대립해왔던 이란이나 인도 문화권과 비교해보자. 우선 한족, 중국인 같은 단어는 중국어를 쓰는 특정 민족을 지칭하지만, 페르시아인, 이란인 등등의 개념은 정의가 간단하지 않다. 북쪽으로는 만리장성, 서쪽으로는 티베트 고원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는 열대우림 정글과 동쪽으로는 황해에 막힌 중국과 다르게 역사상 페르시아의 여러 왕국들은 국경이 건조한 평원 지대로 사실상 열린 마당이나 다름 없었다. 동쪽에서는 맨날 유목민들이 쳐들어왔고 서쪽에서는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왔다. 문제는 이란 입장에서 중국중원에 해당되는 이란고원 지대는 건조지대에다 고원이라서 생산성이 높지 않았고, 그 때문에 페르시아의 여러 왕국들은 절대 중국처럼 장성 쌓고 방어만 하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이란의 왕국들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지방,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외국과 맨날 싸워야 했다. 한족들의 거주지가 천천히 서서히 변동되어 왔던 것과 다르게, 이란인, 페르시아인들의 정의 및 거주지역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분류 기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환되어 왔다. 인도의 경우 무슬림인 튀르크계나 아프간계 군벌들이 인도인들의 주류 종교인 힌두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역시 중국사의 정복왕조 개념과 비교가 어렵다.

유사 개념으로 근세 이슬람권에서 발흥한 무굴 제국, 사파비 제국, 오스만 제국을 일컫는 화약 제국이 있다.

5. 여담

그리고 남은(南誾)과 깊이 결탁하여 은(誾)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기를,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자못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은(誾)이 여러 번 말하므로, 태상왕도전(道傳)에게 물으니, 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論)하여 은(誾)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준(浚)은 〈병으로〉 휴가〈休暇〉 중에 있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도전(道傳)과 은(誾)이 명령을 받고 준(浚)의 집에 이르러 이를 알리고, 또 말하기를,

"상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

고 하였다.
-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6월 27일 신묘 1번째 기사
조선에서 제3차 요동정벌을 계획 할 당시에 정도전태조 이성계에게 중국 역사 속의 '정복왕조'들을 근거로 하여 제3차 요동정벌의 실행을 강하게 요구하였다고 한다. 즉, 조선도 정복왕조들처럼 중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으므로 명과의 충돌을 피할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인 것이다. 물론 알다시피 얼마 안가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중국의 시진핑 정권에서는 티베트위구르내몽골 등의 독립운동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이른바 분리주의를 조장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정복왕조라는 개념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모양.#

6. 관련 문서



[1] 이미 요나라 이전부터도 위진남북조 시대 등 중화권을 침입한 비한족 계열들은 많았으나, 이들은 결국 대부분 중화문명에 동화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침투왕조도 비슷한 처지.[2] 농경지로 사용이 가능한 땅을 목초지로 전환할 경우 상당한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당장 중세 프랑스의 경우 기사의 말 한 마리를 사육할 수 있는 땅 면적이 농가 3~4가구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용과 맞먹었다. 반면 몽골 고원의 목초지는 애초에 농경지로 운용이 거의 불가능한 땅이었기 때문에 이런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웠다.[3] 참고로 이를 참고한 후대 북주 무제는 한족들을 선비족화 시키는 호화 정책을 실시했다.[4] 아람 문자 - 소그드 문자 - 중세 위구르 문자 - 몽골 문자[5] 하급관리에 한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6] 출저: 김호동 교수의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124-125페이지) 참고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저술한 르네 그루셰 역시 몽골 제국의 헝가리 침공을 몽골 제국의 금나라 침공과 유사하게 묘사했던 바 있다. 물론 해당 케이스 역시 몽골 제국이 헝가리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공격하고 파괴만 하다 돌아간 것이므로 중국사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정복 왕조라는 개념과 매칭이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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