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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5-25 17:38:54

적벽대전/배경


1. 개요2. 조조의 남진3. 노숙유비의 만남4. 제갈량의 낚시5. 동맹을 누가 제안했는가6. 의 내분
6.1. 의 기록
7. 주유의 등장8. 시기 문제9. 아직 불안10. 유비주유
10.1. 기록의 신빙성
11. 기타

1. 개요

적벽대전의 발생 배경을 다룬 항목.

이 문서에서의 타임라인은 자치통감을 따라갑니다.

2. 조조의 남진

당시 조조원소와 그 아들들의 잔당을 모두 처리하고 208년 6월 한나라의 승상에 오른 후, 7월에 남하하여 유표가 죽고 유종이 뒤를 이은 형주를 침공해 9월에 항복을 받아낸다. 유비군은 장판파에서 조조의 추격을 받았으나 하구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조조는 가후가 말림에도 불구하고 강동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운다.

3. 노숙유비의 만남

유비가 이렇게 거듭 패퇴할 동안 208년에 오범의 예측대로 유표가 죽었다. 오나라에서는 노숙이 유표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유비를 설득할 것을 손권에게 권하였고, 손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노숙이 유비가 이끄는 군세에 도달하기 전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고, 유비는 장판파에서 추격해오던 조조의 팔천 기병에게 한바탕 당한 뒤였다.

당양의 장판에서 유비를 만난 노숙이 이제 어찌할 요량이냐고 묻자, 유비는 옛 친구 오거에게 의지하러 가겠다고 한다. 노숙은 오거에게 가기보다는 손권에게 귀순하기를 설득하였고, 이어 제갈량에게 제갈근과 친분있음을 밝혔다. 결국 유비는 노숙의 말을 따라 악현 번구[1]에서 행군을 멈춘 후, 제갈량을 오나라로 보냈다.

4. 제갈량의 낚시

제갈량은 시상에서 정국을 고민하고 있던 손권을 만난다.
"해내(海內)에 대란이 일자 장군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강동을 점거해 차지하고 유예주(劉豫州-예주목 유비)께서는 또한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거두어 조조와 천하를 다투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어려움을 제거하고 대략 평정을 끝냈습니다. 마침내 형주까지 격파하여 위세를 사해(四海)에 떨쳐 영웅들이 용병할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예주께서 도피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역량을 헤아려 대처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吳), 월(越)의 군사로 중국(中國)과 능히 맞설 수 있다면 (중국과) 일찍 관계를 끊느니만 못합니다. 만약 능히 당해낼 수 없다면 어찌 무장해제하고 북면(北面)하여 조조를 섬기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께서는 겉으로는 복종의 명목을 내세우며 내심으로는 망설이십니다. 일이 급한데 결단하지 못하니 머지않아 화(禍)가 닥칠 것입니다!"

손권이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유예주는 어찌 끝내 조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오?"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사(壯士)이나 오히려 의(義)를 지키며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2] 하물며 유예주께서는 횡실의 후예로,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덮어 뭇 선비들이 앙모하는 것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하는 분이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곧 하늘의 뜻일 뿐, 어찌 남의 아래에 들어가겠습니까!”

손권이 발끈하며 말했다,

"나는 오(吳) 땅 전부와 10만 군사를 들어 남에게 제어당할 순 없소. 내 계책은 이미 정해졌소!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소. 그러나 예주가 이제 막 패한 직후니 이 어려움에 어찌 대처해야 하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예주의 군이 비록 장판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병 만 명이고, 유기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조조의 군사는 멀리 와서 피폐해졌고, 제가 듣기로 예를 추격해 경기병로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왔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한 화살이 끝에 이르러서는 노나라의 명주 천도 뚫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3] 이 때문에 병법에서 이를 꺼려 '필히 상장군을 꺾이게 하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물싸움에 익숙지 않고 또한 조조에 귀부한 형주민은 병력에 핍박당한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실로 맹장(猛將)에 명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예주와 협력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 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 이 격파되면 틀림없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형(荊), 오(吳)의 세력이 강해져 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패의 계기는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해 조공에 맞서게 했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5. 동맹을 누가 제안했는가

내용을 보게 되면 노숙이 동맹을 제안했는지 제갈량이 동맹을 제안했는지 확실하지가 않은데 배송지는 노숙전에 이렇게 주를 달았다.
배송지가 생각하기는 이와 같습니다. 유비가 손권과 협력하여 함께 중국(조조군)에 저항하였던 것은 이미 노숙이 꾸민 계략입니다. 또한 제갈량에게 '나는 자유의 친구요.'라 말했던 까닭으로 제갈량도 곧 노숙의 의견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촉서 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이 동맹의 계책을 손권에게 설파하자 손권이 크게 기뻐하였다.'라 말하고 있어, 마치 그 계략이 제갈량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적고 있습니다. 양국의 사관들이 각기 견문을 기록하고, 자국의 우위를 칭송코자 다투어, 서로 그 공적을 빼앗으려 하는 듯합니다. 지금 이 두 글(오서 노숙전과 촉서 제갈량전)은 한 사람(진수)에게서 나온 것인데, 이렇게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저술로서의 체계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양측의 사관들이 자기네들 재상이 공적이 있다고 다투었는데 진수가 제대로 정리를 안했다는 뜻이다.

자치통감의 타임라인을 따르면 노숙이 장판까지 쫒아와 동맹을 맺자고 하고 유비는 이미 제갈량한테 융중대를 듣고 손권과의 동맹이 최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오거에 의탁하겠다' 하고 노숙에게 말을 해보았다. 이에 노숙이 손권이야말로 최상의 동맹감이라며 동맹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이에 유비가 기뻐하며 노숙의 설을 따랐다. 이후 제갈량에겐 제갈근과의 친구임을 말하고 서로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제갈량은 하구에서 자기가 사자로 가겠다고 나섰다 하여 양측을 적절히 조합했다. 사실 이 부분은 정사나 연의나 거의 비슷하다. 노숙이 장판에서 유비를 만나 번구에 주둔시키기까지 하면서 동맹하자고 나서는거 빼곤 말이다.

따지고 보면 노숙이 먼저 나섰지만 원래부터 손권과의 동맹에 뜻이 있던 제갈량이 맞장구치는 형태로 이 두 사람이 이해관계가 맞았다고 보면 될 듯한데 어차피 제갈량 역시 융중대에서 오와 화친하여 동맹으로 삼아 조조에 대항하자는 의견은 이미 제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둘은 유손동맹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게 되지만. 제갈량은 "형주를 토대로 촉을 삼켜라"고 말했고, 노숙은 "형주를 삼켜서 촉을 어렵게 만든 뒤 조조에 맞서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형주를 두고 불같이 싸우게 된 것.

그리고 이후 서로 형주를 익양대치로 적절히 나누어 형주 분쟁을 종결하려 했는데 노숙 사후 여몽은 형주 분할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유손동맹은 파탄을 맺고야 만다. 일설에 의하면 제갈량이나 노숙 외에도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렸던 말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가 아는 형태의 천하삼분지계는 제갈량만의 계책이 맞다.

6. 의 내분

손권은 싸울 것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부하들을 불러 모은다. 하지만 이때 조조가 보낸 편지가 도착한다.
근래 천자의 말씀을 받들어 죄지은 자를 처벌하였소.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니 유종이 손을 모았소. 지금 수군 80만 명의 무리를 다스려서 바야흐로 장군과 함께 오에서 만나 사냥하려고 하오.

유종도 그냥 항복했으니 이제는 손권의 양주를 정복하겠다는 뜻. 손권 자신이 10만이라고 칭할 정도의 병력이었으나 각지에 흩어져서 반란병들을 토벌하던 세력들도 있어서 전군은 동원할 수는 없었는데 조조는 손권군 전군이라고 쳐도 8배가 되는 군사를 끌고 온다는 편지가 떡 하고 오니 이 편지를 본 오나라의 신하들은 장소진송을 필두로 항복을 주장한다.

이들은 조조는 천자를 끼고 있어 명분이 있다는 점과 오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 이점인 장강을 이미 조조가 형주를 얻었기에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고 유표의 몽충 1천척을 비롯한 잘 조련된 수군을 얻었으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고 한다.

이때 동오의 명분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손책과 손권이 구축한 세력은 어디까지나 동오 지역의 호족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많은 인물들이 그저 일시적으로 난을 피하기 위해 손씨의 세력에 가탁했을 뿐, 한나라 황실이라는 중앙의 권위에 대항하여 할거하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손책이 공들여 영입했던 화흠 같은 경우는 이미 손권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붙어버렸다. 심지어 손씨 내부에서도 손권의 사촌형인 손분은 아들을 볼모로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려고 할 정도였고 이는 주치가 나서서야 겨우 말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오직 노숙만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화장실에 가는[4] 손권을 따라잡아 처마 밑에서 만난다. 노숙이 무슨 뜻으로 왔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 손권은 노숙의 두 손을 잡고 의중을 물으니 이에 노숙은 다른 사람은 모두 항복해도 주공(손권)만큼은 항복할 수 없다. 신하들이 항복하면 모두 적당히 대우를 받고 태수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으나 손권만큼은 갈 곳이 없으니 항복하자는 개소리는 무시하고 어서 대계를 정할 것을 권한다.

이는 다른 신하들은 조조의 세력으로 전향하면 벼슬을 하면서 출세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뜻인데 실제로 다른 세력에 있다가 조조 측에 투항하여 높은 벼슬을 받은 사례는 여러 명이 있었다.[5] 하지만 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손권은 투항해봤자 잘 해야 목숨만 건지고 견제 받으면서 한직이나 내도는 처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들이 견지한 의견은 나의 소망을 크게 실망시키는 것이었소. 오늘 그대가 원대한 계획을 분명하게 밝힌 것은 나와 생각이 일치하오. 이것은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내려 준 것이오!
그 말에 손권은 탄식하며 곧장 파양에 있는 주유를 돌아오게 한다.

6.1. 의 기록

노숙전에 주석으로 있는 위서와 구진춘추에는 제갈량이 손권을 도발한 것이나 싸우자고 주장한 것도 모두 노숙이 한 것으로 되어 있어 다른 기록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손성오서강표전에는 노숙이 처음으로 손권과 회견하였을 때부터 조공을 막아야 한다고 진술하여 제왕의 계략을 논하였고, 유표가 죽은 뒤, 곧 사자를 보내 정세를 관찰하게 하도록 요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제 와서 의견을 바꾸어 조공을 맞이하도록 권하여 도발하려 한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행동인데다가 이때 조공을 맞아들이도록 권하는 자가 많았는데, 노숙 한 사람만을 베려고 하였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평했다.

7. 주유의 등장

파양에서 돌아온 주유는 사실상 황실의 적인 조조를 오히려 이 기회에 무찔러야 한다며 항복 측의 의견을 반박하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로 인해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1. 수전에서는 우리 오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
  2. 북쪽에는 아직 마초, 한수 같은 배후의 세력이 남아있다는 것.
  3. 지금은 겨울이라 말에게 먹일 것이 없다는 것.
  4. 중원의 사람들이 이 먼 곳까지 왔으니 반드시 질병이 돌 것이라는 것.
주유의 이 같은 말에 손권은 전쟁을 결심하고
사악한 적이 한 왕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려고 한 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 여포, 유표만을 꺼렸을 뿐이오.[6]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그리고는 칼을 뽑아 앞에 있는 주안[7]을 찍으며
제장과 관리들 가운데 감히 다시 마땅히 조조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탁자와 같게 되리라!
하고는 회의를 끝마쳤다.

8. 시기 문제

주유전에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자 주유가 나서 이들을 물리쳤다고 되어있는 반면 노숙전에는 다른 이들이 모두 항복을 논할 때 노숙이 혼자 반대하고 주유를 불러온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배송지는 주를 달아 노숙이 먼저 반대를 한 뒤 주유를 부른 것이 맞다고 확정하며 주유전의 내용은 노숙의 기록을 가로챈 것이라고 기록했다.

9. 아직 불안

주안까지 내려찍으며 결의한 손권이었지만 조조의 80만의 군대는 확실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주유는 그런 손권에게 밤 중에 다시 찾아가 80만은 아무리봐도 무리이며 조조가 원래 거느리고 있던 병사는 많아야 16만명, 거기다가 아직 확실하게 항복하지 않은 유표의 병사 8만이 다라고 하며 자신에게 5만의 병사만 주면 이들을 무찌르겠다고 한다. 손권은 주유의 등을 어루만지며
공근, 경이 여기까지 말한 것을 들으니 아주 내 마음과 같소. 자포와 원표[8]와 같은 사람들은 각각 처자식을 생각하며 사적인 생각을 마음속에 품어서 기대하던 것을 깊이 잃었으며 오직 경과 자경만이 나와 같을 뿐이고, 이것은 하늘이 경 두 사람으로 나를 돕게 한 것이오.
5만 명의 병사를 군사를 갑자기 모으기는 어려우나 이미 3만 명을 뽑아놓았고, 배와 양식, 전쟁도구를 다 갖추었소. 경과 자경, 정공[9]은 편리한 대로 앞서 출발하면, 는 마땅히 인원을 계속 발동하고 자신과 양식을 많이 수레에 싣고서 경을 위하여 후방에서 지원하겠소. 경은 이번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니 진실로 해결하시오. 해후하는 것이 의도대로 아니 된다면 편리한 대로 에게 돌아오시오. 고가 당연히 맹덕과 이것을 결판내겠소.

그런데 건강실록에 따르면
유비는 제갈량으로 하여금 손권에게 이르게 하였고, 손권은 주유, 정보와 장병 2만, 제갈량과 더불어 유비를 따르게 하여 남쪽에서 조조와 맞섰고, 손권은 스스로 장군이 되어 중군 1만으로 이어나가게 했다.
라고 되어 있다. 오주전에도 정보와 주유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가 2만명으로 되어 있는데 건강실록과 함께 해석하면 실제로 싸운 군대는 주유, 정보의 2만 군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는 주유와 정보를 좌우독으로 삼아서 유비와 함께 힘을 합쳐서 조조와 맞서게 하고 노숙을 천군교위로 삼아 방략 세우는 일을 돕게 하였다. 사실 이 당시 정보는 주유를 그렇게 좋게 보고 있지 않았으니 주유 입장에선 내부 균열을 봉합해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었을 듯하다.

이건 주유뿐만 아니라 손권도 마찬가지였던 듯, 주유가 말한 5만명도 모아주지 못해서 기껏해야 3만명밖에 모으지 못했고 그나마도 1만은 자신이 중군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제갈량 앞에선 10만 대군을 논했던 당찬 모습과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인데 워낙 주전파와 항복파간의 격렬한 논쟁끝에 일이 결정된 것이라 정작 싸우기로 결정되었어도 몸을 사린 호족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으로 호족연합체인 동오의 태생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10. 유비주유

번구에서 손권의 원군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비는 드디어 손권이 보낸 주유의 배를 발견하고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한다. 그런데 자신의 아랫사람이 되는 주유는 부서를 떠날 수 없다면서 거꾸로 유비보고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유비는 관우, 장비에게 이 자리에서 이미 힘을 합치기로 했는데 부르는 것을 안 갈 수는 없다면서 말하는데 아무래도 동맹이랍시고 이렇게 나오는 주유의 이런 태도에 저 둘이 화가 난 모양이라 달랜 모양이다. 그래서 유비는 직접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주유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유비는 주유의 군대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 3만인 것을 주유에게 듣고 발견한다. 노숙의 말에 허풍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겨우 3만?[10]유비가 실망감을 나타내며 적다고 말하자 주유는 실병력도 2만인 주제에 3만이라고 뻥카를 치면서 '그냥 자신이 공을 세워 적을 쳐부수는 것을 지켜보기나 하라'고 오히려 핀잔을 준다. 유비는 예전에 만났던 노숙 등을 불러다가 함께 얘기를 하자고 하지만 주유는 이번에도 '노숙은 명을 받아 움직일 수 없으니 (본인이)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라고 공명도 조금 있으면 올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 말한다.

아랫사람이 이렇게까지 대하니 빡칠만도 하지만 유비는 노숙을 부르려고 했던 자신의 잘못에 부끄러워하는 한편 한 군대를 이끌 주유의 엄정함을 확인한 것에 대해서는 기뻐한다.

10.1. 기록의 신빙성

이 기록은 선주전의 강표전에 있는 기록인데 이 뒤에 유비는 주유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보고 2천 명을 이끌고 형세를 관망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손성은 이 기록에 대해
유비는 웅재로, 필히 죽을 형편에 처하자 위급함을 오에 고해 도움을 얻어 달아날 수 있었으니, 다시 강변을 고망[11]하며 훗날의 계책을 품을 까닭이 없다. 강표전(江表傳)의 말은 응당 오인(吳人)들이 전미[12]하려는 말이다.
라고 기록했으며 자치통감 또한 강표전의 내용은 기록하되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강표전 기록에는 저렇게 나와있는데 자치통감에는 이후 유비가 느낀 감정이 딱 네 글자로 서술되어 있다. 저 위의 서술도 이 네 글자를 보고 해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에선 유비가 주유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異瑜)는 기록이 없으며 그저 유비(備)가 심히(深) 수치스러워하고(愧) 기뻐했다(喜)는 기록뿐이다.

1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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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사진

실제 적벽대전이 벌어진 츠비(赤壁: 적벽). 한국에서 위와 같은 사진만 보고 '등애가 오르내린 친링산맥에 비하면 동네 뒷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직접 가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바로 저 엄청난 수역으로 보는 사람을 너비로 압도해버린다. 백만 대군이 연환계로 배를 묶어놓고 싸운 게 이해가 된다.[13]

이곳의 원래 명칭은 푸이(蒲圻: 포기)였으나, 1998년, 도시 이름을 츠비로 변경했다. 사실 양쯔강의 수역이 계속 변화한지라 지금의 츠비가 정말 그때의 전쟁터인지도 잘 모른다. 참고로 저 사진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적벽'이란 글자는 적벽 대전의 승리 이후 주유가 크게 기뻐하며 손수 쓴 글씨라고는 하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 풍화면역 오파츠 염료


[1] 악현은 강하의 속현인데 호종이 악현장을 지내는 등 손권의 땅이었다.[2] 한신, 관영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제왕 전광(田廣)을 사로잡자 숙부인 전횡(田橫)이 제왕에 올랐는데 그 후 고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5백 여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달아났는데,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한 한고제가 투항을 권유하며 위협하자, 이에 응해 경사로 오던 도중 "나는 처음에 한왕(漢王-한고제)과 함께 같은 왕이었는데 이제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도망친 포로 신세가 되어 북면하여 그를 섬겨야 하니 치욕을 감당키 어렵다"하여 자결한 고사를 뜻한다.[3] 여기서 널리 퍼진 고사가 바로 강노지말.[4] 당시 옷을 갈아입는다는 말은 화장실에 간다는 말을 에둘러 이르는 말이었다. 당시 화장실은 사용방법이 좀 복잡했다. 입고 있던 옷을 꽤 벗고 일보고 다시 옷을 입었기에 화장실은 일보는 장소만 있는게 아니라 여유공간이 꽤 되었고, 한무제는 누나집에 놀러갔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유흥을 위한 가수로 온, 뒤에 황후로 세워주는 위씨)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거사를 치루기도 했다(...)[5] 대표적으로 조조의 친아들, 조카, 심복을 죽인 것을 포함해서 조조에게 두번이나 빅엿을 먹였음에도 조조의 생전에는 측근으로 중용되었던 가후를 들 수 있다.[6] 사실상 조조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세력들이었다.[7] 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올려놓는 책상.[8] 각각 장소진송[9]. 정보를 말한다.[10] 그나마도 건강실록, 오주전 기록에 따른다면 유비가 직접 본 병사는 2만으로 본인이 보유한 병사랑 똑같다(...).[11] 顧望 - 형세를 관망하며 거취를 결정하지 아니함.[12] 專美 -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함. 그러니까 오나라 쪽이 적벽대전 승리를 자기들에게 좋게만 포장하려고 했다는 뜻이다.[13] 정사에선 대략 15만~20만 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