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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당인 일본공산당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일본 사회운동 논쟁 ② 전후 일본공산당의 오류
은근히 흑역사가 많은 당인데, 일본공산당의 특이한 점은 공식 입장에서 자신들의 흑역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언제나 옳은 길만을 걸어왔고, 공산당에서 이탈하거나 대립한 다른 좌익 정파들은 분열주의자, 종파주의자, 기회주의자이며, 공산당만이 일본에서의 좌파운동의 정통성을 독점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전전의 흑역사 뿐 아니라 전후에 벌어진 여러 병크나 노선전환에 대해서도 실무자 개인에 대한 꼬리자르기로 일관하고 당은 역사적으로 무류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중이다.
2. 전전사
2.1. 제1차 일본공산당 (1922년 ~ 1924년)
일본의 자생적 사회주의는 굉장히 일찍부터 발달했는데, 경술국치 이전부터 공산당 선언이 번역되고 평민사 같은 결사체들이 만들어지고 아나키즘도 수입되곤 했다.그러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떡상하고 국제혁명기구를 자임하는 코민테른이 만들어졌다. 코민테른은 1922년 1월 극동민족대회에서 일본지부를 건설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1922년 7월 15일 지하정당으로서 제1차 일본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창당은 시부야구에 있었던 사회주의 운동가 타카세 키요시(高瀬清, 1901~1973)의 집에서 작게 이뤄졌다.
이들은 같은 해 11월 코민테른 제4회 대회에 대표를 파견해서 일본지부로 정식 승인을 받았고, 니콜라이 부하린이 써 준 강령(22년 테제)을 받아 왔다. 당 강령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군주제와 귀족원 폐지, 18세 이상 모든 인간에게 보통 선거권 부여, 집회·결사·출판의 자유, 1일 8시간 노동 실시, 실업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 및 최저임금제, 누진소득세에 따른 과세 실시 등 현대 일본의 제도와 가까운 것들이었다. 나아가 식민지와의 분리까지 주장했었다. 하지만 이 강령은 부하린이 써 준 것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타율적이고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일본인 노동대중들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것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특히 군주제 폐지 항목을 둘러싸고, 탄압을 초래할 뿐이라며 일본공산당 당내에서도 반대가 일어나 22년 테제는 정식 강령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심의미필되었다. 그러다 1923년 6월 지도부가 일제검거되어 활동이 지지부진하다가, 1924년 해당론이 제기되어 아라하타 칸손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해산되었다.
냉정히 말해서 제1차 일본공산당은 그전까지 흩어져 있던 60명 안팎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아나키스트들만 제외하고[1] 한데 뭉친 동아리 연합체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고, 제대로 된 정당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2.1.1. 일본공산당 재건뷰로 (1924년 ~ 1926년)
1924년 3월 제1차 일본공산당이 해산되자, 잔무정리를 위한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뷰로(bureau)다. 제1차 일본공산당 시절 이론적 중심자였던 야마카와 히토시는 이 때부터 공산당 계열과 거리를 두고 이탈하게 된다.1924년 5월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카타야마 센, 토쿠다 큐이치, 사노 마나부, 콘도 에이조가 파견되어 일본공산당 해산을 보고했다. 코민테른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즉시 당 재건을 명령했다. 코민테른이 이렇게 나온 이유가 또 황당한데, 제1차 일본공산당이 공작금을 받으려고 당원 수를 부풀려 보고해서 코민테른이 일본에서의 혁명 가능성을 굉장히 낙관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5년 일공당 재건을 선언한 1월 테제가 발령되었고, 이와 별개로 일본 국내에서도 당재건 움직임이 이루어져 이 움직임들이 재건뷰로로 결집되었다. 재건뷰로 위원장은 토쿠다, 정치부장은 사노였고, 아라하타도 관서담당 총책으로서 재건뷰로에 참여했다.
그런데 1926년, 유럽에서 카를 코르쉬와 게오르크 루카치에게 제대로 이론을 배우고 온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후쿠모토 카즈오가 뷰로에 합류하면서 이론적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후쿠모토는 당재건보다 대중운동을 우선시하던 야마카와의 “방향전환론”을 비판하고, 우선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전위성을 갖춘 뒤 다시 결합해야 한다는 “분리 후 결합론”을 주장했다.
후쿠모토는 1925년에서 1926년 사이 일본 좌파 사상계의 황태자였고, 많은 추종자를 몰고 다녔다. 아라하타 칸손은 자기 혼자 반대했던 제1차 공산당 해산을 주장했던 토쿠다 등이 재건을 지휘하고 있는 것을 꼽게 보고 있었는데, 후쿠모토 노선에 의문을 제기했다가 후쿠모토주의자들에게 틀딱 절충주의자라고 비난을 받자 완전히 삔또가 상해서 뷰로에서 이탈, 야마카와에게 합류한다.
2.2. 제2차 일본공산당 (1926년 ~ 1929년)
1926년 12월, 고시키온천에서 당대회를 개최하고 공산당 재건이 결의되었다. 이 재건은 후쿠모토주의자들이 주도했다.당시 일본 좌익은 야마카와주의(공산당에서 이탈)와 후쿠모토주의(공산당 당권파) 사이의 대립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코민테른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일본문제위원회를 개최, 27년 테제를 발령했다. 부하린은 야마카와주의와 후쿠모토주의가 모두 틀렸다며, 다시 한 번 일방적으로 강령을 써 주었다. 강령의 골자는 “일본은 반봉건 국가로서, 근대국가가 아니다. 군주제 폐지, 부르주아 혁명을 당분간의 목표로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공산당에서 이탈한 야마카와는 말할 것도 없고, 천황제를 절대군주제로 해석하여 일본을 근대국가로 간주한 후쿠모토마저 코민테른의 말 한 마디에 홀라당 날아가버렸다. 이후 후쿠모토주의는 두 번 다시 당권을 잡지 못하고, 일본공산당은 코민테른에 대한 종속성이 심화된다.
한편 아라하타, 야마카와 등 노장파 사회주의자들은 1927년 잡지 『노농』을 창간해 비공산당 사회주의자 집단 노농파를 출범한다. 공산당에서 이들을 제명했으나, 노농파 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제2차 공산당에 참여한 적이 없으므로 이 제명 처분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 노농파가 좌파사회당의 기원이 된다.
1928년 기관지 『적기』가 창간되었고, 표면조직인 노동농민당을 창당하여 야마모토 센지 등 국회의원 당선자도 2명 배출한다. 그 밖에도 공산당의 지도를 받지 않는 노농파 무산정당까지 합하면 총 8명의 좌파 국회의원이 배출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치안유지법을 휘둘러 일제검거를 단행하였으며, 토쿠다, 후쿠모토 등 지도자급을 포함해 1,652명이 체포당했다(3·15 사건). 그 해 연말, 공산당은 소련식 “적색노조” 노선을 내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을 결성하여 기반 확대에 나섰으나, 이듬해 1928년 4·16 사건에서 사노를 비롯한 지하당원들까지 검거되면서 당중앙이 완전히 궤멸되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제2차 일본공산당"은 여기서 끝을 맺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아래의 무장공산당, 비상시공산당, 린치공산당도 제2차 일본공산당 재건운동에 포함된다. 현재의 일본공산당은 당사(黨史) 서술에서 무장공산당, 비상시공산당, 린치공산당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데, 자기들의 흑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2.3. 무장공산당 (1929년-1930년)
4·16 사건으로 고참들이 모조리 체포되었기 때문에, 청년당원들이 당재건운동을 하게 된다. 당수격인 타나카 세이겐은 불과 23세였다.1930년, 일본공산당은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사회파시즘론[2]의 영향을 받아 합법대중조직들을 해체하고 경찰당국에 대한 적색 테러 노선을 채택했다. 공산당 활동가들은 가두선전을 할 때 경찰을 마주치면 권총이나 창포검으로 살상했다.
공산당 계열 노조인 전협도 “무장”으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카와사키 무장메이데이 사건을 일으켰으나,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대중의 반발만 샀다. 그래서 전협 내부에서는 공산당의 지도에 대한 불만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노조와 당 사이의 알력은 비상시공산당 시대에 윤기협 사살사건과 같은 비극을 낳는다.
한편, 감옥에 갇혀 있던 3·15 및 4·16 사건 피고들 가운데서 후쿠모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코민테른의 일방적 방침 강요에서 벗어나 당을 해산하고 일본의 환경에 맞게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30년 6월 보석으로 풀려난 이들은 코민테른과의 관계 단절과 군주제 폐지 구호 포기를 통한 현실화를 내걸고 “일본공산당 노동자파”를 결성했다. 타나카 지도부는 이들을 제명했다.
그러나 무장공산당의 무모한 노선은 애초부터 지속 불가능한 것이었고, 1930년 7월, 타나카가 검거되면서 당중앙은 다시 궤멸했다. 8월의 프로핀테른 제5차 대회에서 일본공산당의 무장방침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2.4. 비상시공산당 (1931년 ~ 1932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당중앙이 재건된 시기. 대중화 방침으로 전환해서 3·15 및 4·16 양대 탄압사건의 타격으로부터 당세를 겨우 회복하고, 전전 최대의 당세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나 허망하게 몰락한다.2.5. 린치공산당 (1933년 ~ 1935년)
아타미 사건 이후 당재건을 시도하고 망하고 시도하고 망하고 반복하다가 당재건을 시도할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의 시기. 당재건을 거듭할 때마다 잡혀가서 활동가는 오히려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아타미 사건의 원인이었던 특고밀정의 당중앙 침투가 상시화되어, 서로 밀정이 아니냐는 의심에 사로잡혀 린치를 가하는 등 막장으로 갔다.2.6. 붕괴 이후 (1935년 ~ 1945년)
3. 전후사
3.1. 무장투쟁과 레드퍼지
일본의 패전 이후 1945년 GHQ 미군정 당국에 의해 치안유지법 폐지와 함께 합법화된 정당으로 다시 출발하였고, 개헌 정국에 헌법 개정안도 내면서 일본사회당과 같이 큰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세에서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 승리하고, 1950년 5월 인민 광장 사건으로 공산당이 GHQ와 충돌한 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1951년 2월에 열린 일본 공산당 제 4회 전국협의회(약칭 4전협)에서는 반미 무장 투쟁 방침을 결정하고,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식 유격전 전술을 받아들여 전국의 농촌에 해방구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공산당 제 5회 전국협의회(약칭 5전협)에서 농촌 지역의 게릴라전을 규정한 문서인 "일본 공산당의 당면 요구"가 채택되고, 시골에서는 산촌 공작대, 도시에서는 중핵자위대 등의 무장대를 만들어서 미군기지, 경찰서, 법원 등을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등 무장 투쟁과 마오이즘적 선전을 감행했다. 1952년에는 피의 메이데이 사건(일본 위키)으로 인해 사실상 일본 공산당이 폭력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좀 복잡한 배경이 있다. 1950년 1월 6일 코민포름의 기관지에서 일본의 정세와 일본 공산당에 관한 비판 글이 실린다. 당시 일본공산당 의장 노사카 산조는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평가했고 "점령 하의 평화 혁명론"이라는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코민포름의 기관지에서 일본 공산당의 이러한 노선을 비판하는 논문인 "일본의 정세에 대하여"가 실렸고, 일주일 뒤 일본공산당 정치국은 "'일본의 정세에 대하여'에 관한 소감"(『“日本の情勢について”に関する所感』)을 발표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까지 일본 공산당 비판에 나서자, 당 내부는 둘로 분열되게 되었다. "소감"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소감파"라고 불리게 되고, 중국 공산당과 코민포름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국제파"라고 불리게 된다. 국제파는 미야모토 켄지를 위시로 한 파벌이었다. 애초부터 노사카 산조와 일본공산당 주류는 친 중국 공산당 성향이었다. 노사카 산조는 1940년대 중국 연안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고, 태평양 전쟁이 끝날때까지 팔로군과 함께 활동했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마저 일본공산당을 비판하니 일본 공산당 지도부가 충공깽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레드 퍼지가 일어나게 되고, 많은 숫자의 공산당원과 공산당 간부들이 정치 활동 금지를 당하게 된다. 일본 공산당 간부들도 정당 등 규정법에 따라 검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노사카 산조와 토쿠다 큐이치 등의 지도부는 국내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여행(사실상 망명)을 떠난다. 중국으로 건너간 일본공산당 간부들은 베이징에서 지도부를 만드는데 이를 북경 기관이라 부른다.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한다. 일본에는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중앙 위원회를 해체한 뒤, 토쿠다 큐이치가 임시 중앙 위원회를 지정해서 남겨 놓은 상태였다. 이 당시의 역사는 일본 공산당 내에서도 정식 절차를 따르지 않은, 정식 기관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당과 무관하다고 밝히고 있다. 일종의 흑역사.
이들은 소감파 중 잔류파들로서 당 지도부가 중국으로 이동하기 전에 초안을 잡아놓은 "일본 공산당의 당면 요구"를 5전협에서 그대로 올려서 무장 투쟁 노선을 확립하게 된다. 1951년부터 일본의 농촌에는 산발적인 산촌 공작대의 게릴라전이 펼쳐졌고, 도시에서는 중핵 자위대가 경찰서와 공공 기관에 화염병으로 불바다를 만드는 짓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심지어 이 시기의 일본은 아직 군사 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던 수직적인 사회였다. 공산당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산당에 젊은이들이 가입한 뒤, 선배가 소년이여 전사가 되어라라고 지시하면 그대로 산촌 공작대에 합류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딴 식으로 병력을 충원하니 뭐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소감파가 국제파들을 손 봐줄 목적으로 일부러 산촌 공작대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산촌 공작대와 중핵 자위대는 목적도 상당히 달랐고(산촌공작대는 무장대와 대중 노선을 혼합, 중핵 자위대는 도시 폭동을 목적으로 한 폭력 혁명 노선) 명령, 지령 체계도 달랐다고 한다. 애초부터 싹수가 보였다. 게다가 산촌 공작대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예외적으로 의료반을 파견하여 순회 진료를 하는 경우는 상당한 호응을 받았지만 봉건 지주를 공격하는 내용의 그림 연극등은 주민들로 하여금 저게 뭔 소리다냐 싶은 반응만 얻을 수 있었고, 신문이나 삐라는 지역 주민들이 입수하는 대로 경찰에 신고했다. 결국 산촌 공작대는 경찰 단속에 의해 소멸했고, 일부는 산에 그대로 남아 자활의 길을 모색했으나 당으로 부터는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고, 자연스럽게 병마와 기근에 시달리다가 소멸했다.
이 시기에 재일 조선인들도 일본 공산당과 함께 미군정에 맞서 투쟁했는데, 이후 조총련이 창립되면서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공산당 대신 (북한의 단일 체제당이던) 조선로동당을 추종하게 되었다. # # #
여하튼 이런 무장 투쟁 노선은 별 호응을 얻지 못한 채 1952년, 1953년 두 차례에 걸쳐 치러진 중의원 선거와 1953년에 치러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공산당은 각각 1석만 얻는 참패를 당했으며 이런 참패의 영향으로 무장투쟁 노선은 사실상 폐기처분 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일련의 폭력 투쟁은 파괴활동방지법(破壊活動防止法) 제정에 명분이 되기도 했다.
1955년 즈음이 되면 베이징으로 피신했던 대부분의 간부들이 돌아오게 된다. 토쿠다 큐이치는 이미 건강이 매우 안좋았고, 결국 1953년 베이징에서 병사한다. 1955년 베이징 기관의 간부들이 귀국할 때, 토쿠다의 유골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제 소감파는 국제파와 화해하고 다시 당을 통일하게 된다. 여기에도 엎치락 뒤치락 하는 공산당 당내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1국 1당 원칙에 의해 국제적으로 하나로 단결하게 되어있었고, 코민포름에서 분파로 인정받으면 정통성을 잃게 되었다. 국제파는 코민포름에 의해 분파로 인정이 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베이징으로 도피한 간부들에게 있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소감파와 화해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었다.
3.2. 6전협과 무장투쟁노선 포기
그리고 1955년 7월 일본 좌익/진보 운동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된 일본 공산당 제6회 전국 협의회(약칭 6전협)가 열리게 된다. 일본공산당은 이때 무장투쟁 노선의 포기를 선언한다. 무장투쟁을 좌익 모험주의로 평가하고 정세 판단의 오류가 있었음을 스스로 시인한다. 게다가 일단 소감파와 국제파의 통일을 선언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과 국제파가 제기한 문제를 소감파가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무장투쟁을 했지만 이에 따른 피해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게다가 소감파가 중국에 나가있는 동안 국제파가 사실상 당권을 장악했다. 이후 소감파는 조금씩 쓸려 나가더니 국제파의 미야모토 켄지가 당권을 장악하였고, 서기장이 되었다. 당의 실권을 잡은 미야모토 켄지는 당의 통일을 우선으로 하여, 6전협의 방침에 따라 각 개별 당원의 행위는 불문에 부치도록 하였다. 결국 소감파계 당원도 새로이 주류가 된 미야모토 파로 흡수되어 갔고, 무장투쟁기의 불법투쟁 기록은 굳게 봉인되었다.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애초부터 코민포름의 지시에 반대했던 것은 소감파였는데, 어째 국제파가 결국에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오히려 소감파의 당초 취지에 부합하는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때의 무장 투쟁 노선 포기가 나중에 신좌익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당시 6전협에 충격을 받은 많은 당원들이 공산당 지도부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당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산촌 공작대에 참여한 당원들 중에는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급진적인 청년학생 당원들은 이후 다음해에 있던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봉기로 인해 공산당을 스탈린주의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들은 결국 1958년에 공산주의자동맹을 만들게 되며 때마침 재통합한 일본사회당에게 밀려 군소야당으로 큰 세를 나타내지 못했다가, 1960년대 중반 자주노선을 표방하고 사회당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사회당의 지지기반 일부를 뺐으면서 리즈 시절을 맞게 되는데 이 무렵 공명당도 주요정당으로 부상하게 되며 사회당이 지지부진한 결과를 낳게 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때를 즈음해 극좌단체 적군파가 결성되면서 일본의 도시게릴라 운동이 활발해지고 요도호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 등의 테러를 일으키며 일본 사회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의 과격 좌파들인 신좌익과 적군파는 실제로 직접적으로 일본공산당과 관계가 없다. 신좌익이라는 말 자체가 구좌익인 일본공산당과 결별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들은 일본 공산당 중앙당사가 있던 요요기(代代木)의 이름을 따서 반(反)요요기파라고도 불렸다. 이와 다르게 일본 공산당은 합법정당으로서 꾸준히 제도권 안에서 활동하게 된다.[3] [4]
3.3. 사회당과 연합과 파기
6-70년대 공산당은 지방선거에서 사회당과 연합하면서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고 대표적인 사례가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도쿄도지사로 재임한 미노베 료키치다.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미노베 다쓰키치의 아들로, 1971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면담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참의원 선거에서도 선전해 1972년 중의원 선거와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대승하며 전성기를 이어왔다. 다만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록히드 사건등의 호재에도 타 정당에게 의석을 빼앗기는 바람에 참패했다. 그래도 득표율은 소폭 감소에 그쳤다.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패배했지만, 6개월 뒤에 펼쳐진 중의원 선거에서 사상최다 의석수를 기록했다. 이것이 이른바 1970년대의 "사-공(사회당-공산당 연정)" 시대였다.그러나 1980년 사회당에서 공산당과 결별하기로 방침을 정하며 사실상 왕따로 전락하게 된다. 1971년 참의원 선거 이후로 자민당이 늘 지지부진한 결과를 낳았지만 사회당이 사공민(사회-공명-민사 연정) 노선과 사공노선(사회-공산 연정) 가운데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를 보였고, 결국 이런 애매한 스탠스를 놓고 1976년 중의원 선거를 기점으로 계파갈등이 심해져서 1977년 참의원 선거와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잇다라 부진한 결과를 거두는데 그쳤다. 1979년 중의원 선거를 기점으로 자민당의 계파갈등이 심해지며 사회당에게 간만에 기회가 찾아왔고, 이렇게 된 김에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다 보고 연립정부 구상을 하고있었다. 공명당, 민사당에서 사회당과 공산당과의 결별을 하지 않으면 연립정권을 구성할 수 없다고 결별을 요구했다. 이는 공명당, 민사당과 공산당의 사이가 매우 적대적이라 공산당과의 연대에 부정적이었던 사회당 우파의 세가 강해진 영향도 있었다. 공명당은 공산당과 지지층이 어느 정도 겹쳐 있는 데다가, 공산당의 데마때문에 이미지가 나빠진 적이 있어 공산당에 우호적일수 없는 입장이었다. 공명당의 지지모체인 창가학회와 공산당이 1974년에 신사협정을 맺은 적이 있었으나, 공명당이 반발하여 결국 사문화되었고,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 또한 민사당은 민주사회당이라는 당명과는 다르게 반공주의를 표방하던 정당[5]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6] 이렇게 되면서 1980년대 내내 선거에서 의석수가 계속 줄어들게 된다.
3.4. 1990년대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일본공산당도 위기를 맞게 된다. [7]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일본 정치권이 혼미를 거듭하며 한동안 소외되었던 공산당은 중흥기를 맞았고, 이 시기에 사회당 지지층과 무당파 성향의 지지율이 높아져서 표를 받아 비례대표제 하에서 1996년 중의원 선거와 1998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그러나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선거에서 전멸한 걸 시작으로 당세가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2003년 일본 민주당이 약진하며 양당제가 고착화되며, 사실상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0년대 후반엔 일본의 경제난 여파로 인해 청년 당원들이 급증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이 있는 20대를 주력 지지층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니코니코 동화 생방송에 일본공산당 소개 방송을 개설하기도 할 정도였다. 민주당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기존에 민주당을 지지하던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이 공산당으로 결집해, 의석수가 늘기도 했다.
- 2013년 도쿄도의회 선거
2013년 6월 23일 치러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17석을 확보하여 민주당을 꺾고 도쿄 제1야당에 등극했다. 흥미롭게도 당선된 17명의 의원 중 11명이 여성인데, 이는 공산당이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여성 후보를 가장 많이 낸 덕이다. 도쿄도의회 선거가 대체로 일본 참의원이나 중의원 선거의 전초전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산당이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약진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 2013년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위에서의 예상과 같이 정말로 약진했다.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에서 목표로 하던 5석을 획득하고, 선거구에서도 12년 만에 의석을 획득했다. 도쿄도(개선수 5)에서 3위, 오사카부(개선수 4)에서 4위, 교토부(개선수 2)에서 2위를 기록해 당선되었다. 특히 교토부에서는 창가학회 등에서 공산당을 떨어트리기 위해 막판에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는 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 공산당의 일본 참의원 개선+비개선 의석은 총 11석으로, 향후 6년 간(2016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3석 확보만 한다면) 공산당 단독으로 법안 제출이 가능해졌다. 덧붙여서, 총 의석 수가 10석 이상이기 때문에, 당 대표가 총리를 상대로 1:1 토론을 하는 당수 토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보여준 모습은 진격의 공산당. 유신이 망하고 민주가 의석수를 10여석 정도 늘린 것 이외에는 의석변동이 거의 없었으나, 일본 공산당만은 혼자서 2배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2000년 이후 처음으로 20석 이상(21석)을 확보했으며 특히 이때 오키나와 출신의 전직 교직원 아카미네 세이켄이 오키나와현 제1구에서 당선됨으로써, 일본공산당은 제41회 이후로 18년만에 중의원 의석을 확보했다.
- 상당수 지역구에서 팀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 상황에서는 팀킬이라는 용어가 매우 적절하지 않다. 우선 정당이 선거에 후보자를 내는건 당연한 권리이고, 일본 공산당이 다른 일본의 야권 정당과는 성향이 다르다. 일본 공산당을 사회민주당과 함께 유이한 진보정당으로 볼 수 있으나, 사회민주당의 당세가 정말 심각하게 기울었다. 그리고 공산당이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냄으로써 당세를 과시했는데 당세가 기울어가는 일본 민주당으로써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일본 공산당은 정당으로써 당연한 권리인 선거에 출마할 권리를 행사한 것이고, 일본의 야권은 애초에 한 팀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제 1야당인 민주당의 정체성은 사실상 그냥 반자민당이다. 이 때문에 야당이라고 해서 하나로 뭉칠 근거나 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 이번 선거에서 공산당이 타 야당과 차별화 된 점은 소위 블랙기업에 대한 대책을 주요 정책으로 어필했다는 것으로, 이것이 공산당이 약진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다. 그외에도 반 개헌 세력의 중심이 된 점도 있다. 테레비 아사히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큰 정부·작은 정부에 대한 각 당의 의견은 명확했으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는 자민·공명·차세대의 찬성에 비해 민주당은 입장이 미묘했고, 유신회는 하시모토(집단적 자위권 용인) 와 에다(개별적 자위권으로 충분한 입장) 공동대표의 입장차, 사민·생활의 약소화에 비해 공산당은 명확한 반대와 명분 때문에 집단적 자위권 반대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이라 하였다. 이런 식으로 아베 정권의 폭주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 최근 일본 진보 세력, 반아베 세력의 표를 흡수하고 있다. 또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측면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여성의 정치 활동 장려를 열심히 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 의원 비율이 다른 일본의 정당에 비하여 높고, 최근 그 비중을 더욱 늘려가고 있다. 실제 2015년 현재 일본 참의원+중의원 여성 의원의 수는 10명으로, 다른 정당들에 비해 그 비율이 월등히 높다. 이처럼 일본 공산당이 블랙기업 정책 마련, 선명성, 여성의 정치 참여 장려 등의 효과로 반등한 것을 정의당 등 한국의 진보 정당들도 본보기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2015년 통일 지방 선거
- 그리고 2015년 열린 일본 통일 지방 선거에서도 크게 약진하였다! 4월 12일 열린 전반전에서는 선거가 실시된 모든 41현 부 의회에서 의석을 획득했다. 교토부에서는 전체 60석 중 14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24.52% 나가노현에서도 전체 58석 중 8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 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13.08% 고치현에서도 전체 37석 중 4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13.98% 4월 26일 열린 후반전에서도 의석수를 크게 늘렸다.
- 10월 25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미야기 현에서 치러진 광역 의회 선거에서 전 의석보다 2배 증가한 8석을 차지하여 제2당이 되면서, 역시 약진하였다.
- 미야기 현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후 지방 선거를 따로 치르고 있다.
- 2013년 이후 현재까지 약 3년간 일본 공산당이 각 선거마다 약진하는 사실을 분명하고 일본 공산당 '당 자체'에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보다 크게 볼 때 일본의 현 야권이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일본 민주당 등 일본 공산당보다 오른쪽에 위치해 있고 더 대중적인 세력의 부활이 절실하다. 일본 공산당이 팀킬을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본 공산당은 자기 역할을 나름 잘하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 공산당 외 야권이 결집 혹은 혁신을 통해 자기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거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아베 신조 현 총리가 안보법 개정 파동을 통해 일본의 야권에게 결집의 계기를 준 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야권 연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현재 다수임을 볼 때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야권 지지 성향 국민 혹은 중도층에게도 희망을 주는 전략이 필요할 듯.#
- 2015년 이후 집단적 자위권에 관한 법이 통과되면서 국민연합정부라는 말을 만들어서 야권의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알다시피 민주당과 이념, 성향에 안 맞고 사민당, 자유당과는 연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대중적인 정당으로 만들기 위해 대표적인 예가 당의 핵심 강령인 미일안보조약 폐기 주장을 당분간 봉인과 천황이 참석하는 국회 개회식에 1947년 1회 이후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 공산당이 가지는 당명과 당의 지향점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단은 목표를 지켜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 2016년 3월에 일본 공산당이 폭력적 혁명을 일으킨다는 정치권발 악성 루머가 나왔는데 이에 대해 3월 22일에 국무회의에서 스즈키 타카코 중의원 의원이 정면으로 반박을 하였다. 앞에서 얘기하듯이 일본 공산당은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폭력적 혁명을 포기하였으며 1961년 당 강령에 의회의 다수를 얻는 것이 혁명이라고 명시 이후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3.4.1. 제24회 참원선
이러한 급격한 상승세를 바탕으로 일본 공산당은 2016년 7월 열리는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득표율 15%, 약 850만표 득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정도 득표면 참의원 비례대표에서 8석정도를 획득할 수 있다.지역구에서도 23대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오랜만에 획득했던 지역구 의석이었던 도쿄도(5명 선거구, 3위), 오사카부(4명 선거구, 4위), 교토부(2명 선거구, 2위) 3곳을 수성하고, 아쉽게 의석 획득에 실패했던 카나가와현(4명 선거구, 5위)[8], 아이치현(3명 선거구, 4위)[9]에서 의석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할 듯하다.
참고로 지난 통일 지방선거에서 '전체 2당(제 1야당)'으로 도약한 나가노현에선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선 19.6%를 득표했지만 2인 선거구이기에 의석 확보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는 통일지방선거에서 역시 '전체 2당(제 1야당)'으로 도약한 고치현에서도 마찬가지다. 2013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24.1%를 득표, 민주당을 제치고 2위를 기록했지만 1인 선거구라 의석확보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정이 현실화되면 개선의석 기준 10석을 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재로선 일본 공산당의 목표이다. 쉬운 목표는 아니나 최근의 상승세와 아베 내각 반대층의 표심을 어떻게 끌어오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2015년 9월 19일 안보법안이 통과가 되고나서 시이 가즈오 공산당 위원장[10]은 폭동을 일으킨 사람에게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이 내린다 라고 말할 정도로 가장 비판적이면서 그 전에도 아베 신조의 역사인식부터 시작해 꾸준히 반(反)아베에 대한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안보법안에 대한 실체 등 전반적인 활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선거연대는 물론이고 야당끼리 힘을 합쳐 반 아베 전쟁법 폐지를 위한 국민연합정부를 구성하자고 말하기도 하였다. 야당의 연립 정권 ‘국민 연합 정부’구상이 현실화 될 경우 당 강령에서 정한 미일 안보 조약 폐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당히 전향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간의 일본 공산당의 선거전략을 생각해보면 인상적인 변화가 아닐수 없다.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팀킬을 한다고 비판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비판이 적절한지는 위의 해당 선거 항목을 읽고 각자 판단해야 할 듯.
조선일보에서 일본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 위원장과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사민당, 생활당과는 이미 큰 틀에서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민주당과의 공조는 민주당 내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어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민주당이라고 해도 보수적, 중도적 태도를 가진 인사가 있고 그 때문인지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편이다.
본격적인 선거 운동을 돌입하면서 홈페이지도 리뉴얼하면서 정책 공약이 공개되었는데 특히,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이후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규탄하며 아베 정권과 극우단체간의 결탁,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를 지목해왔다는 점이다. 헤이트 스피치 문제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다. '영토 문제' 파트에 독도, 센카쿠 열도, 북방 영토를 함께 명시해 놓아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센카쿠 근해에 침입한 중국 해군에 항의하고, 북방 영토는 즉시 반환을 요청한다는 입장이지만, 독도에 관해서는 강경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않고, 우선은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을 하며, 그후에 한국 정부와 교섭해서 해결하겠다는 방침이다. 참의원 선거 정책 공약 영토문제에 대한 일본 공산당 위원장 시이 가즈오의 입장표명. 2012년의 입장표명이지만, 2016년에도 재차 이 노선임을 밝혔다.
이번 선거의 최대 승부처인 32곳의 1인 선거구에서 야권 단일화를 이루어냈다. 공산당은 그 중 1개 선거구에 출마한다. 나머지 15개 민진당, 16개 무소속 단일. 도쿄에선 야마조에 타쿠 후보가 당선은 확실하고 심지어 6명 중 3위를 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카나가와현 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게 여겨지고 있다. 다만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교토에서는 의석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오사카에서는 의석을 얻을 가능성이 있으나 경쟁상대가 오사카 유신회라 힘든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이외 의석 획득 가능성이 있는 선거구는 아이치, 홋카이도, 치바, 사이타마 선거구이다. 종합적으로 일본 공산당은 2013년 이후 계속된 상승세를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예측으로는 선거구에선 1~8석, 비례대표에선 6~7석으로 총 7~15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아사히 신문의 예측 결과로는 최저 4석, 평균 8석, 최대 11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지역구는 도쿄, 카나가와현. 심지어 성향이 정반대인 산케이 신문의 예측 결과로도 최저 7석, 평균 10석, 최대 13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아직 선거가 끝난 것이 아니다. 중앙정치의 중심인 도쿄가 남았기 때문이다. 호헌 4개 야당(민진, 공산, 사민, 생활당)은 2016년 7월 10일에 치러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처럼 야당 간 공조를 통해 단일 후보를 출마시킨다는 계획이다. 결국 2016년 7월 12일 민진당이 최종적으로 내세운 후보는 언론인 도리고에 슌타로이다. 다음 날, 우츠노미야 겐지 후보가 대국적인 관점에서 후보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도리고에 슌타로가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 3위로 나왔다. #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에 대해서 진보계열의 정당과 비슷하게 정치의 책임으로 생전 퇴위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2020년 올림픽 준비의 일환으로 철거될 쓰키지 시장을 도요스 시장으로 교체하려 하고 있지만 그 전에 도쿄가스 시설이었기 때문에 환경 기준에 크게 웃도는 유해 물질이 있어서 도쿄도의원단을 구성하여 토양 오염과 지하수 오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 이미 대책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일본공산당 필두로 집단적 자위권인 안보법안 폐지(일본공산당 내에서는 전쟁법이라고 불린다.) 서명을 진행하고 있는데, 무려 1580만명이 서명했다. 2016년 하반기 정치권에서 부상하고 있는 쿠릴 열도 4개 섬 반환에 대해서 반환할 수 있지만 먼저 러일평화조약부터 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10월 13일에 주일 한국대사관을 방문하였다. #
11월 4일. TPP를 강행 처리하자 날치기와 역사적 폭거라는 말을 쓸 정도로 거세게 반발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것에 대해 기성 세력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고 규정하는 반면 내심 TPP의 파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쓰키지 시장 이전에 관해서 도쿄 가스와 도호쿠 가스의 밀실협상으로 도요스 시장의 토양 오염 부담금을 줄이려고 한 것을 밝혔다.# 러-일 정상회담에서 쿠릴 열도 의제가 무산되자 쿠릴 열도에 대한 러시아의 주권을 인정해주는 것을 비난하기도 했다.
2017년 신년사는 창당 95주년 맞아 민공공투(야권 연대)가 더욱 단결되어야 하며, 일본국 헌법 시행 70주년 맞아 평화헌법 개정을 막아야 한다는 요지로 발표하였다. 1월에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제27차 전당대회에서 여당 연합 정권과의 연대, 아베 정권 타도, 중의원 선거와 도쿄도의회 선거 승리 등 결의안을 냈다.# 2017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는 기존 17석을 넘은 19석을 획득하며 제1야당 민진당보다 4배에 가까운 의석수를 차지했다. 고로 민진당이 영 힘을 못쓰는 가운데 혁신 진영의 자존심을 그나마 지켜나아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3.4.2. 제48회 중원선
2017년 9월 28일 아베의 중의원 해산으로 치러지게 될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진-공산-자유-사민 야4당의 야권 공조가 점쳐졌으나, 민진당 내부에서 고이케 신당인 희망의 당과의 연대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으며 급기야 당이 해체 수순을 밟기에 이른다. 자유당도 고이케와 연대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공산당과 일본 내 보수진영과는 연대가 불가능한 상극이기에 야4당의 공조가 깨졌다. 결국 공산당은 사민당과만 선거 연대를 하기로 했다. 이후 민진당의 호헌,리버럴 성향의 의원들이 희망의 당에서 거부당하자 이에 반발한 에다노 유키오가 입헌민주당을 창당했다. 공산당은 이를 환영하면서 선거연대를 추진할것을 시사해 입헌-공산-사민의 신 야권공조 가능성이 있어보인다.10월 3일에 입헌-공산-사민의 공동 투쟁을 선언했다. 입헌민주당의 1차 공천 후보를 발표함에 따라 일본 공산당 후보들이 야권 연대 차원에서 후보 등록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선거전에서 반아베 정당의 기치를 빼앗기면서 당 지지율이 입헌민주당 쪽으로 쏠린 추세로, 오히려 공산당 측이 손해를 입게 되었다.
선거 결과 12석으로 기존 21석에서 9석이나 줄어드는 피해를 입었다. 입헌민주당 후보가 출마한 지역구의 후보를 몽땅 내리는 등 반아베 호헌세력의 결집을 위해 희생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무의미한 희생은 아닌 것이 단순 계산으로 입헌민주당에게 뺏긴 9석을 유지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입헌민주당의 의석이 46석으로 줄어드는데 이렇게 되면 제1야당이라는 상징성이 호헌야당인 입헌민주당에서 개헌야당인 희망의 당으로 넘어간다. 고이케 지사가 이끌던 희망의 당으로서는 그나마 유일한 버팀목 하나를 얻게 되는 셈이었고, 이렇게 되면 여론상으로도 개헌을 막기는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입헌민주당의 선전으로 이번 선거에서 호헌파의 전체 의석은 줄었으나 기세는 줄지 않았다. 이것이 공산당의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는 이유이고 시이 가즈오 위원장이나 고이케 아키라 서기국장이 입헌민주당의 선전에 기쁘다고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희생이 쓰라리지만 오히려 정치적으로 득이 된 측면도 있다. 바로 공산당이 강조해오던 '야권 공투'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된 것. 이번에 입헌민주당이 당선된 지역구 18곳 중 모든 지역에서 공산당은 후보를 내렸다. 여기에서 공산당이 후보를 냈으면 도쿄 1구, 6구, 18구, 가나가와 6구, 12구, 가고시마 1구의 6개구는 무조건 떨어진다. 현재 공산당 지지자 성향상 자민, 공명, 유신 3개 당에 표가 갈 일이 없다고 보면 되고 일반적으로 입헌민주당에 표가 가야한다고 봐야한다. 이 지역구들은 격차가 3% 이내이며 공산당은 일반적인 경우 8% 이상을 득표하기 때문에 공산당이 후보를 내면 무조건 떨어진다고 봐야한다. 반대로 도쿄 19구 같은 경우는 입헌민주당과 공산당이 동시에 후보를 낸 경우인데 이 지역구는 2.7% 격차로 자민당이 이겼다. 여기는 공산당이 7.4%를 득표했다. 2/3정도를 입헌민주당이 가져온다고 가정하면 당선자가 뒤집힌다. 이런 눈에 보이는 효과에 공산당은 이번 선거에 자발적으로 출혈을 감수했기 때문에 진정성을 인정 받아 이후에 있을 선거에 야권 공투를 주장했을 때 힘을 받게 될 공산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예로는 야권 거물 오자와 이치로는 이번 선거에서 공산당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신경썼다. 오자와는 그의 선거구에서 33,600표 정도의 격차로 넉넉하게 이긴 편이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나온 지난번 공산당 득표수가 34,000표이다. 다시 말해서 공산당이 표 안 몰아주면 여기도 떨어졌다.(기사 링크)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2016년 정치자금 수입이 정당으로는 자민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18년에 메이지 유신 150년 기념식을 전쟁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전후의 역사를 함께 해 150년을 통째로 긍정하는 입장에 서지 않는 것으로 불참했다. 자유당, 사회민주당도 불참했다. 게다가 교토부 오야마자키 정 정장선거에서 자민-입헌-국민-공명 추천 현직 정장을 이겼다. 다시 한번 교토가 텃밭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키나와 현에서는 사민-사회대중당과 함께 주민투표 실시 조례안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오키나와 현 이시가키 섬에서의 군사 기밀 작전에서 주민 보호 작전이 없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이 기밀문서는 공산당이 빡쳐서 일부러 공개했다는 것이다.#
3.4.3. 제25회 참원선
1월 말에 아베노믹스 관한 통계 조작 파문이 일어나면서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과 함께 공세를 펼쳤다.2019년 4월 7일에 있었던 통일지방선거에서 아이치현 의회 선거에서 2석 모두 잃어버렸지만, 기타 지방의회 선거에서 선전하면서 공산당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선거구에 13명 · 비례대표 26명으로 총 39명이 공천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지지율을 유지하면서(1석은 줄어들었다.) 정당 투표에서는 호헌파에서 입헌민주당에 이어서 혁신정당 2인자로 굳혔으며 이후에 야당 연합 정권의 구상을 제안하였고, 레이와 신센구미와 협력을 가지기로 했다.
11월 말부터 불거진 벚꽃 스캔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 공산당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시도로 하고 있다. 공산당이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번도 정당 보조금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연립정부에도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 공산당의 목적은 아베를 퇴진시킨 뒤 검찰 수사를 통해 아베 내각이 7년간 집권하면서 저지른 죄를 낱낱히 파헤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일본 정치권은 "일본 공산당이 죽느냐? 아베 내각이 죽느냐?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어야 끝난다." 라는 분위기이다.
2020년 1월 14일 - 18일까지 제28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중국 패권주의, 인권 침해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해 "사회주의를 위한 새로운 탐구가 시작됐다" 라는 당 강령을 삭제했다. #
3.4.4. 제49회 중원선
국민민주당의 입헌민주당 합당에 대해서 환영을 표하기도 했으며, 야권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스가 요시히데 총리 지명 투표에서도 에다노 유키오 입헌민주당 대표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는 1998년 이후 처음이다.
게다가 코로나19 경제적 어려움과 벚꽃스캔들로 인해 아베 신조 총리직 사퇴로 존재감을 부각하면서 젊은 층에서 입당선언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도 야당이 무력하다는 혹평을 하던 와중에 공산당은 일을 열심히 했다는 언급하기도 했다.
2021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지난 선거에 비해 1석밖에 안 늘었지만, 입헌민주당과의 야권 연대를 긍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선거이기도 했다. 특히, 분쿄구에서 기존의 자민당을 떨어트려서 1석을 획득하였다는 점이다. 메구로구에서는 6표 차이로 당선되지도 못하는 일이 있었다.
TBS 프로그램에서 야시로 히데키 변호사가 일본 공산당에 대해 "아직 폭력 혁명이라는 것을 당 강령에서 폐지하고 있지 않다"며 비판했는데, 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해당 내용이 루머라고 반박하며 "야권 공투에 균열을 내기 위한 의도적 행위"로 규정하면서 사과와 정정을 요구했다. #
총선 결과, 야당 공투를 주도했던 입헌민주당과 공산당이 모두 선거 전 대비 의석을 잃는 패배를 당했다. 의석 수에서도 이제 일본 유신회와 국민민주당에 밀려 원내 5당으로 내려앉았다. 도쿄도 등 수도권에서 공산당의 고정적인 지지층이 여전함을 확인한 것은 일부 성과지만 교토부 등 그 외 지역에서는 지지층이 이전만 하지 못한 상황을 확인했고 가장 큰 문제는 이상으로 뿌리깊은 일본 국민들의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표로 확인됐다는 점이다.
선거가 끝난 후 원내 입지도 애매해졌는데 입헌민주당에서는 야권 공투를 주도했던 에다노 유키오 대표를 비롯한 현 지도부가 일괄 사퇴하기로 하면서 야당 공투의 실익에 대해 철저하게 재검토하고 있는 상황이고, 국민민주당은 아예 선거 이후 기존의 호헌파 연대를 끊고 유신회와 밀착하기 시작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벚꽃 스캔들 등 국면에서 공산당에 희망을 걸었던 호헌파 유권자들의 깊은 실망으로 당 외부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높지만, 정작 당 내부에서는 당 지도부 책임론을 회피하고 오히려 이를 추궁하는 언론에 반발하는 등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선거 후 당 지지율이 NHK 기준으로 2013년 이래 최저치인 2.1%까지 추락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3.4.5. 제26회 참원선
시이 공산당 위원장은 2022년 4월 7일 중앙당 회동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감안해 급박하고 부정한 주권침해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자위대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행사해 국민의 생명과 일본의 주권을 지켜내는 것이 당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7월 10일 열린 선거에서 지역구 1석, 비례대표 3석으로 합계 4석밖에 획득하지 못하고 패하자 상임위원회에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전했다. 다만 개헌파가 의석수의 2/3을 확보했다고 독단적으로 평화헌법 개정을 노릴 경우 이에 저항하는 국민적 운동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했다.#
참원선 이후로는 자민당의 통일교 논란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아무래도 자민당만큼은 아니더라도 통일교와 커넥션이 적지 않은 다른 정당들과 달리[11] 공산당은 이 문제에서 완벽하게 깨끗하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반공주의를 외치는 통일교가 공산당에 후원을 할 리 없다.) 열성적으로 자민당을 공격할 수 있는듯 하다.
[1] 이들은 1911년 고토쿠 슈스이가 사법살인되면서 한 차례 타격을 받았다가, 1920년대 초기 아나-볼 논쟁에서 볼셰비즘을 추종하는 공산당과 사상논쟁을 벌였으나, 지도자격인 오스기 사카에가 관동대지진 와중에 헌병에게 살해당하면서 궤멸되었다.[2]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사실상 파시즘의 동조자이며, 사회민주주의를 비롯한 합법좌익, 온건좌익을 먼저 때려잡아 좌익 내부에서의 지도성부터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3] 심지어 일본공산당 청년조직인 일본민주청년동맹 일원들이 전학련, 전공투로부터 회색분자라고 짱돌을 맞고 다닐 정도였다![4] 일본 공산당은 1960년대에 무장혁명노선을 포기하면서 마오이즘을 같이 버렸다. 그런데도 아직 일본에서 일본 공산당은 마오이즘 신봉 연상, 1960년대 폭력적 무장투쟁 연상, 그리고 적군파 등 테러 이미지 연상 등에서 모조리 벗어나진 못하고 있다. 산케이 신문을 비롯한 우익 언론의 프레이밍도 강력히 작용했지만, 심심하면 일본 공산당 내부에서 급진파들이 들고 일어나다가 짤리는 상황이 1960년대까지 지속됐고, 공산당원 활동을 하다가 과격파로 전향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공산당에 거부감이 강해졌다.[5] 민사당은 칠레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하늘의 계시'라고 하는 수준이었다.[6] 일본은 태평양전쟁 이전에 무산정당들이 제국의회에서 활동할 시절에도 반공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상당수 활동하고 있었다. 무산정당들 중 노동농민당은 공산당에 친화적이었고, 당원들 중에 공산당원들이 있었지만, 사회민중당이나 일본노농당에는 국제공산주의 노선에 반대한 사회주의자들이 꽤 있었다. 이들 중 우파가 패전 이후 민사당을 형성하게 된다. 정확하게는 1959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개선의석의 1/3을차지하지못하는 부진을 보이자 일부계파가 탈퇴해서 민사당을 결성한 것이다. 사회당과의 결별에는 사회당의 친북 성향과, 일본 공산당이 방문단을 보냈더니 도청이나 하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이 팽배한 일본 공산당과의 입장 차이도 있었다고 한다.[7] 여기서 소련의 붕괴가 일본 공산당 의석수 저하와 직접 관계가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 당시 일본 공산당의 의장 후와 테츠조는 소련의 붕괴를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었다.[8] 불과 0.4%(16,000여 표)차로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9] 2.5%-76,000여 표차로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10] 아베 신조 총리와 동갑이고 정계입문 시기도 같으나 상당히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11] 교도통신 조사에 따르면 통일교는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레이와 신센구미, N국당을 제외한 원내 모든 정당들과 커넥션이 있음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