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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 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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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AB3A1><colcolor=#fff> 이치로 마키
[ruby(一路, ruby=いちろ)] [ruby(真輝, ruby=まき)] | Ichiro M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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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ruby(石川, ruby=いしかわ)] いづみ (이시카와 이즈미, Izumi Ishikawa)
출생 1965년 1월 9일 ([age(1965-01-09)]세)
아이치현 나고야시 코호쿠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64cm, B형
배우자 우치노 세이요(2006~2011 이혼)
자녀
소속 [[도호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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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무대 1982년 다카라즈카 가극단 화조공연 《봄의 춤》
입단 성적 35명 중 4등

1. 개요2. 활동
2.1. 다카라즈카 시절 무대2.2. 다카라즈카 퇴단 후 무대2.3. 콘서트
3. 입단 전4. 다카라즈카 가극단 설조 재단 시절5. 퇴단 후6. 평가7. 사생활8. 여담

[clearfix]

1. 개요

다카라즈카 가극단 설조 출신 뮤지컬배우로 1982년남역으로 입단하여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설조 톱스타였다. 1985년 당시 설조 톱스타였던 아사미 레이의 퇴단공연에서 남역이 아닌 여주인공 클라리체 역을 맡아 얼굴을 알렸다. 그후로 쭉 남역으로서 공연을 해오다 1993년 톱스타로 취임하였으며 1994년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다시 한번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했다. 1996년 퇴단작으로 엘리자벳에서 토드 역을 맡아 공연한 후 다카라즈카를 퇴단했다. 퇴단 후에는 토호 버전 엘리자벳, 안나 카레니나, 왕과 나, 더 라스트 키스에 출연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여역을 했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로 입단 당시에는 남역을 맡은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남역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큰 키와 저음부터 고음까지 훌륭하게 부르는 가창력을 소유해 그런얘기는 사라졌다. 춤도 꽤 잘추는 편이지만 극단 당시에는 잘추지 않았다.

2. 활동

2.1. 다카라즈카 시절 무대

2.2. 다카라즈카 퇴단 후 무대

2.3. 콘서트

3. 입단 전

1965년 1월 9일 이시카와 가문에서 2남 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고향인 나고야 시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다가 다카라즈카 음악학교로 편입하게 되었다.

어렸을때 다카라즈카 공연을 보고 입단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입학 시험을 봐서 합격하였다.
이때 설조의 아사미 레이의 공연을 보고 입단을 결심하였는데 살제로 설조에 들어가 입단 후 거의 바로 아사미 레이와 같은 무대에 서게 되었다.

4. 다카라즈카 가극단 설조 재단 시절

1982년 음악 학교를 졸업한 후 극단 설조로 배정되었다. 1985년 당시 설조 톱스타였던 아사미 레이의 퇴단작에서 히로인 클라리체역을 연기하게 되었다. 이때 아름다운 얼굴로 이치로 마키가 남역인지 몰랐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타이라 미치의 상대역인 톱 여역 칸나미호와는 음악학교시절 아주 친한 선후배로, 칸나 미호가 설조에 오고[13] 나서도 엄청 아꼈다고 한다.

1989년 다카라즈카 최고 인기작인 베르사유의 장미 오스칼과 앙드레 편에서 오스칼을 맡아 중성적인 매력을 많이 뽐냈다. [14]

1987년 니방테[15]가 되었으며 1993년 설조 톱스타로 취임한다. 당시 전임 톱스타인 모리 케아키[16]가 굉장한 인기를 끌었기에 그 뒤로 설조의 인기가 주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관객을 유지하는데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면서 마음고생도 엄청 많이 했다고. [17] 1994년 설조가 공연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클라리체에 이어 다시 한번 여자 역할인 스칼렛 오하라를 맡았다. 이때 아름다운 미모와 자태로 남성 팬들을 많이 생성했다.

같은 시기에 톱스타이던 안쥬 미라[18], 시온 유우[19], 아마미 유키[20]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유명하다.[21]
1995년 대지진 당시 화조 톱스타이던 안쥬 미라의 퇴단 공연이 취소 될 뻔 하였는데 시온 유우, 아마미 유키, 이치로 마키 셋이서 극단 관계자에게 찾아가 전 공연 일정을 수정해 안쥬 미라의 퇴단 공연을 올리게 해 달라고 한 일화는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이후 1996년 한국에서도 유명한 뮤지컬인 엘리자벳에서 죽음을 연기한 후 퇴단하였다.[22] 톱스타의 퇴단작으로 죽음 역을 맡는것에 대해 주변의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고 2018년까지 다카라즈카 10회 이상 재연될 정도로 명작이 되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하나후사 마리와 함께 일본 뮤지컬계에서는 전설이 되었다. 여담으로 1998년 실제로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 엘리자벳 공연에 죽음으로 출연한다.[23] 이때 엄청난 호평을 받게 되는데 같이 공연을 하러 간 시라키 아야카는 1997년 다카라즈카 엘리자벳의 히로인이였다. [24]

5. 퇴단 후

퇴단 후에는 토호 엔터에 소속되어 왕과 나의 안나를 연기하였다. 이때는 퇴단 후 1년도 되지 않아서 아직까지 목소리가 남역이었을때 그대로였기 때문에 혹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후 남태평양에서는 피나는 노력 끝에 다카라즈가 시절과는 다르게 완벽한 여역이 되었다.

엘리자벳 비엔나판 초연 10주년 기념 콘서트에 출연하였다. 이때 컨셉은 각국의 토트(Der tod)와 엘리자벳이 같은 노래를 각국의 언어로 부르는 것이었는데 이치로 마키는 혼자 토드 역 엘리자벳 역 다했으며, 그 전에 비엔나판 공연 커튼콜에서 토트로 게스트 출연하여 토트의 '마지막 춤'을 부르고 쿤체와 르베이에게 찬사받기도 했다.

2000년부터 토호 버전 엘리자벳에서 주인공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역을 맡아 토드에 이어 엘리자벳까지 연기하게 되었다.[25] 이후 2006년까지 총 5번 토호에서 엘리자벳을 연기하였다. 2007년부터 결혼과 출산으로 활동을 하지 않다가 2010년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복귀 후 더 라스트 키스, 키스 미 케이트, 셜록홈즈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다카라즈카 OG로서 관련 콘서트에도 자주 출연하며 아직도 뛰어난 가창력과 춤 실력을 자랑한다.

2005년에는 후쿠오카 하카타좌 공연 한정으로 뮤지컬 모차르트에서 발트슈테텐 남작부인 역할을 맡았다. 당시 발트슈타텐역으 남작부인은 쿠제 세이카, 코쥬 타츠키 트리플 캐스트 였다. 비중이 크지 않은 역할임에도 이치로 마키가 캐스트 된 비하인드에 대해 토호 무대 관계자가 밝힌 바 있는데, 이는 르베이가 이후의 차기작 타이틀롤로 강력히 올리기 위한 대비로 이치로 마키를 발트슈타텐 남작부인역에 캐스트 하라고 지시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이치로 마키의 임신으로 무산되었고, 동시에 토호 레베카 댄버스 부인 역을 이치로 마키로 내세우려 했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2006년 초연과 2010-2011 안나 카레니나 재연에서 안나로 분하였다. 초연 당시에도 연기력과 높은 넘버 소화력으로 호평을 받았으나 결혼과 출산 이후인 재연에서는 실제 본인의 결혼 생활에서 느낀 감정을 잘 녹여 먀우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극에서 결말의 핵심키가 되는 아들 세르자에 대한 모성을 딸아이의 엄마가 되어 실제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재연 당시 다카라즈카 톱스타 출신의 후배 세나 준과 더블 캐스팅이었는데 결혼을 하지 않았던 세나준보다 잘 표현하였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한가지 웃긴 사실은 극중에서는 브론스키와 불륜을 저지르는 안나 역을 맡았지만 실재 사생활에서는 남편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점…

뮤지컬 뿐만 아니라 드라마와 갈라콘에도 많이 출연한다. 엘리자벳, 모차르트, 레베카의 작곡가인 실버스터 르베이 갈라콘서트에도 출연하였으며 다카라즈카 극장에서 열린 베르바라 45주년 콘서트에서 가창력을 과시했다.[26]

2015년과 2016년에는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이자 일본에 수출된 뮤지컬 셜록 홈즈에 제인 왓슨역으로 출연하였다. 이때 홈즈역의 하시모토 사토시와 멋진 콤비력을 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2편인 블러디게임에서는 춤을 추는 씬이 있는데 과연 다카라즈카 톱스타 답게 나이가 꽤 많음에도 불구하고 앙상블보다 잘 추는 것은 물론이고 춤선이 좋아 대충 추는데도 멋있다는 평이다.

최근에는 베토벤의 편지와 숨겨진 연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베토벤 op. 110에 베토벤의 연인 역으로 출연했으며 게임 도검난무를 연극으로 재현하는 무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내 코다이인 역으로 출연한다고 하여 팬들이 놀라하고 있다. 충격 반 기쁨 반
도검남무 공연에서 엄청난 찬사와 환호를 받고있다.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과 강인한 카리스마를 잘 표현했다는 평이다. 또한 관객들의 말에 따르면 공연장의 안 좋은 음향시설에도 이치로의 코다이인만 잘 들렸다고... 다카라즈카 시절부터 다져온 탄탄한 발성과 중성적인 목소리가 코다이인을 매력있게 그린 것이다.

1999년과 2000년 2004년에는 개인콘서트를 열었고 이 시기 뮤지컬계에서 탑급의 인기를 누렸다. 이때 게스트로는 남편인 우치노 세이요, 현재 일본 탑 뮤배 이노우에 요시오, 초연 엘리자벳 토드역 우베 크뤼거가 있다.

관계자와 팬들 사이에선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초연 당시 르베이가 토호연극부의 제안을 뿌리치고 이치로 마키를 마리 앙투아네트 초연 멤버로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이치로 마키가 딸을 임신한 바람에 무산되었으며 동시에 레베카 일본 초연때 댄버스 부인으로 계획하려 한것도 무산되었다. 대신, 이는 실버스터 르베이 갈라 콘서트인 《쿤체와 르베이의 세계》에서 조금이나마 실현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출산으로 인해 음정 흔들림 및 발성문제가 나타났다는 평이 있다. 실제 토호 레베카 초연은 비다카라즈카 뮤지컬 여배우 실비아 글랩이 댄버스 부인을 맡았다.[27]

매년 다카라즈카 후배들과 해오던 갈라콘서트 형식의 무대 Life Is Songs에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하였다. 이에 팬들의 아쉬움과 걱정이 커져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좋지 않았던 신장 쪽에 문제가 생긴 듯 하다.

6. 평가

가창력 부분에서는 다카라즈카 출신 배우들과 비교하거나 다른 배우들과 비교해도 탑급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다카라즈카 여배우들의 노래 실력이 더욱 뮤지컬 창법에 적합하다는것이 나오면서 "다카라즈카 네임드""이치로 마키도 다카라즈카 남역 발성 부작용을 드러낸 한명"으로 꼽히고 있는 추세다. 특히, 일본에서는 다카라즈카 시절땐 탑급으로 인정받지만, 레미제라블이나 미스사이공에 갈 실력까지는 아니라는 점과 발성극복을 안한 상태에서 토호판 엘리자벳으로 인해 제극무대에 특혜 캐스트로 올라온 다카라젠느 중에 한명이라는 비판도 만만찮게 있다. 일본 올드 뮤지컬 팬층의 레포(후기)를 찾아보면 다카라즈카 출신자 배우 중에선 다이치 마오를 이치로 마키 보다 더 높게 평가해준것도 볼 수 있으며 오히려 토호 레미제라블이나 미스사이공에 참여한 시마다 카호[28]를 비롯한 비다카라즈카 뮤지컬 여배우극단 시키(四季) 출신쪽 여배우들의 발성이 더 안정적있다란 평도 볼 수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선 반은 맞고, 반은 부합되지 않는 말이다. 반정도 맞는 것이라면 레미제라블미스사이공에서 비다카라즈카 여배우들은 오디션을 통해 캐스트 되는 것에 비해 이치로 마키를 포함한 다카라젠느들은 그 네임드로 오디션을 거의 보지않고 쉽게 캐스트 되는 걸 볼 수가 있다. 다카라즈카 올드팬들도 이치로 마키를 포함한 다른 젠느출신자들의 발성도 외부에 와서는 부작용을 드러낼때가 상당하며 이를 극복한 젠느출신자는 다이치 마오아란 케이, 카즈네 미오마나키 레이카, 사키히 미유 정도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동시에 이치로 마키 역시 외부 뮤지컬 무대계에서 발성 부작용을 보인 젠느출신자 중에 한명이란걸 인정하면서 역대 토호판 엘리자벳에서도 이치로 마키도 아니고 하나후사 마리가 아닌 마나키 레이카 쪽이 발성면에서 안정적이고 가장 비엔나판의 초연노선을 잘 반영한것이 보였다는 것을 인정하는게 많다.[29] 일본내에서도 성악이나 보컬, 합창을 전공한 이들도 이치로 마키의 발성은 안정적이지 않다고 평가한 것도 그걸 증명한다. 이는 이치로 마키 본인도 인정한 부분인데 자신이 퇴단 후 여역으로 발성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도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밝혔으며, 이는 현재진행중이고, 다른 다카라젠느들도 퇴단 후 외부 뮤지컬 무대에서 발성으로 인한 고생을 겪는게 상당수라고 인터뷰에서 언급을 했던 바가 있다.
또한, 엘리자벳도 발성부작용을 포함해서 이치로 마키가 연기한 씨씨도 빈판과 부합하지 않은 외강내유라는 비판이 있던것도 역시 사실이다. 이치로 마키 역시 당시엔 번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씨씨를 표현하는데 완벽하지 못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치로 마키 본인이 직접 봐왔던 엘리자벳 공연 중 높게 평가한 씨씨는 비엔나판 초연의 피아 다우스와 다카판 엘리 96 설조 초연때 상대역이었던 하나후사 마리, 다른 유럽권의 엘리자벳 배우들과 한국 EMK판의 씨씨 배우 중에 한명인 옥주현이다. 이는 이치로 마키도 자신이 연기한 엘리자벳에 대해선 만족한 쪽이 아님을 인증한것이라 볼 수 있다.[30][31]

다만, 이치로 마키가 토호판 엘리자벳 초연때 타이틀롤이 될 수 있었던것은 코이케 슈이치로 감독의 푸쉬도 있지만,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이치로 마키의 실력을 인정했기에 토호판 엘리자벳의 타이틀롤로 적극 내세운것도 있다. 실베스터 르베이미하일 쿤체와 함께 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벳 초연(1996년 설조)때부터 이치로 마키가 연기한 토트를 보고 극찬했고, 코이케를 통해 이치로가 씨씨가 되는것에 열렬히 찬성하면서 토호판 엘리자벳 초연때에만 불렸던 "꿈과 현실의 벽에서(夢とうつつの狭間に)"라는 씨씨의 새로운 곡까지 지어주며 이치로를 토호판 엘리자벳으로 내세우는데 굉장히 적극적이었다.[32] 그 정도로 이치로 마키가 "실력이 없진않다", "과대평가라고 불릴정도는 아니다"라는 얘기다.
또한 이치로 마키는 이노우에 요시오야마구치 유이치로, 우라이 켄지, 사사모토 레나, 니이즈마 세이코, 오츠카 치히로, 이시카와 젠, 히라노 아야, 하나후사 마리, 하마다 메구미, 히라카타 겐키, 사토 타카노리, 타시로 마리오, 요시노 케이고, 사카모토 켄지, 소닌, 콘 나츠미, 사카모토 켄지, 키노시타 하루카, 카이호 나오토, 후루카와 유타, 야마자키 이쿠사부로, 마나키 레이카, 오노다 류노스케, 요시하라 미츠오, 우에하라 리오와 함께 그 실베스터 르베이가 인정한 일본 뮤지컬 배우 중에 한명이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33] 이런 것만 봐도 이치로 마키에 대한 혹평•지적 내용의 반은 부합되지않는다고 할 수 있다.

토호판 엘리자벳 관련으로 말하자면 일본 내부에서만 한동안 돌던 소문이라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1998년 12월 일본에서 무대 홍보 광고지[34]에서 토호판 엘리자벳 상연이 제극에서만 한다고 결정났지, 정확한 날짜나 스텝진과 캐스트가 아직 뜨지않았던 시절에 한동안 다카라즈카에서 상영되는 것과는 다른버전일지, 토호판 무대감독과 씨씨를 맡을 배우에 대해 당시의 일본 무대ㆍ연극 덕후들에게 여러가지 얘기와 희망사항 등이 나오곤 했다.[35] 무대연출 감독으로는 영화계와 무대계에서도 활약한 명연출감독 나나가와 유키호(蜷川幸雄)와 나카다이 타츠야(仲代達矢) 등이 거론되었고 약간이나마 다카라즈카판 감독 코이케 슈이치로도 주목했고, 씨씨를 맡을 배우로는 마츠 타카코를 가장 많이 떠올리거나 언급되었고, 그 다음으로 다이치 마오가 씨씨를 연기할 것이다라는 소문도 돌았다.[36] 그 당시에 다카 외부 무대계에서는 이치로 마키보다 마츠 타카코와 다이치 마오가 제극을 포함한 메이져 극장의 인기 여배우였고, 마츠 타카코의 경우 가부키 4대가문의 금수저 딸[37]이라는 것도 있지만 아역으로 시작할때부터 마츠 타카코는 인기가 있었으며 당시 청순계열 아가씨하면 마츠 타카코를 제일 떠올린 것을 포함하여 무엇보다 마츠 타카코가 무대극 햄릿 1998년 공연에서 오필리아역을 맡을때 크게 주목 받은것도 있다.[38][39] 다이치 마오가 그 다음으로 거론 된것은 1985년에 다카라즈카를 퇴단 후 1987년에 제극에 올려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으로 성공을 거둬 다카 남톱 출신이라는 느낌이 들지않았을 정도로 아가씨 연기에서도 호평받았으며, 스칼렛 오하라 뿐만 아니라 마이 페어 레이디의 이라이자[40], 영화 원작 • 토호 제작 뮤지컬 로마의 휴일 1998년 초연때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41]그래서 다이치 마오는 다카 남톱 출신임에도 드레스마저 잘 어울리는 우아한 배우라는 평도 많았다. 그러나, 소문과는 달리 다카판에 코이케 슈이치로가 토호판에서도 무대ㆍ연출감독을 맡게 된 것으로 결정나고[42], 씨씨연기를 맡게 될 배우는 다카라즈카 시절엔 설조 남톱스타였지만 외부에서는 와카테와 비슷한 인식을 받았던 이치로 마키로 정식 해금되었으며 당시 다카시절때부터 이치로 마키의 출연 무대를 보러왔던 팬들은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다카 이외의 외부극단이나 제극내 공연만 보러간 이들에겐 의외의 캐스팅이라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토호 엘리 초연은 공연자체는 꽤 성공을 거뒀지만 초기엔 이치로 마키가 맡은 씨씨에 대해 찬반논란도 많았다고.[43] 다행히 이치로 마키는 뒤로 갈수록 다카 이외의 무대 덕후들에게도 평이 괜찮아진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44]
또한 상기의 소문과는 별개로 당시 토호에서 스테프로 일한 관계자에 의하면 토호연구부측에서는 본래 다이치 마오를 엘리자벳으로 내세우려는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치로 마키는 퇴단 후 무대에서 여역을 할땐 혹평이 가득할 정도로 와카테에 지나지 않았던반면, 다이치 마오는 퇴단 후 1987년에 제국극장에서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스칼렛 오하라로 완전 뜬 이후 토호 뮤지컬ㆍ연극 프리마돈나라 불릴만큼 외부의 무대에서의 티켓파워도 이치로 마키 보다 엄청났고, 동시에 다카 남톱 출신 중에서도 여역에도 위화감 없을 정도로 히로인역 넘버도 잘 불렀으며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일라이저 둘리틀을 장기 롱런 했던만큼 다카남역에서 외부 무대계의 히로인 배우로써 성공적인 전환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 스테프의 이야기에 따르면 anan에서 토호 엘리 22주년 기념으로 출간이 된 엘리자벳 애니버셔리북(エリザベート Anniversary Book)에서 토호측에서 엘리자벳은 다카라즈카 출신자가 보다 안정적일거 같다라고해서 다카라즈카 출신자를 권했던 것은 사실이나 책의 언급 된 이야기와는 달리 토호측에서는 씨씨역을 먼저 다이치 마오를 언급했었고 강력히 추천했었다고.[45]그러나, 코이케 슈이치로는 다카 남역 톱스타로서는 실력자이면서 퇴단 후 외부 무대에서는 계속 혹평을 받고있는 제자나 다름없는 이치로 마키를 제국극장 무대에 데뷔시키기 위해 토호에서 제안한 다이치 마오를 강력히 거절했으며[46] 이를 위해 원작자 실베스터 르베이와 각본가 미하일 쿤체에게 토호판 엘리의 상연이 결정 되었다는 자세한 이야기와 이치로 마키를 엘리자벳을 내세우고 싶다고 연락을 취하게 된다. 이를 들은 르베이는 은쾌히 찬성하여 이치로 마키를 토호판 씨씨로 내세우기 위해 오리지널 넘버곡을 작곡까지 했으며 그게 바로 토호판 초연에만 연주가 되었던 2막의 프랑스병 장면 다음에 나오는 씨씨의 넘버곡 「꿈과 현실의 벽에서(夢とうつつの狭間に[47])」이다. 토호판 엘리자벳이 2000년 6월 6일 첫날 공연 후 커튼콜에서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가 이치로 마키의 씨씨 및 당시 초연 첫 날 출연자였던 야마구치 유이치로(토트), 스즈키 소마(프란츠), 이노우에 요시오(루돌프), 하츠카제 준(조피)를 비롯한 출연자들에게 호평하였고, 연출ㆍ윤색을 담당한 코이케 슈이치로도 나와 당시 씨씨였던 이치로 마키를 가리키며 "어떻게든 이치로씨를 이 제극 무대에 데뷔시키고 싶었습니다."고 말한적도 있다.[48]

이러한 찬반논란이 있다해도 다이치 마오아마미 유키때까지만을 기점으로 보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올드팬이든 이치로 마키에게 비호의적인 토호 뮤지컬 팬들이든 이치로 마키가 일본 엘리자벳의 공헌자이자 그 실베스터 르베이를 일본 및 아시아 뮤지컬계로 이끌고 온 사람이라는 사실엔 변함없다라는 중론이다. 토호판때의 씨씨는 혹평이 아주 없진않지만, 다카라즈카 퇴단 공연을 엘리자벳으로 정하고 그것도 원판에서는 비중이 적은 토트를 연기함으로써 르베이와 쿤체에게 인정을 받게되었고, 이를 통해 독일어판과 다른 유럽권의 역수입하듯 영향을 끼쳤으니 이치로 마키가 르베이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카라젠느답게 이치로 마키의 안무실력에서는 탁월하다는 것도 팬이든 안티든 거의 공통적이게 인정한다. 이는 다른 다카라젠느도 그렇지만, 이치로 마키는 크게 춤을 추는것이 아닌데도 안무의 선이 아름답다는 평이 꽤 많다. 상기한 뮤지컬 셜록때에 왓슨 안무씬이 그걸 증명한다. 이치로 마키를 비롯한 다카라젠느의 안무 움직임은 훗날 똑같이 토트를 연기하게되는 이노우에 요시오후루카와 유타, 야마자키 이쿠사부로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중 이노우에 요시오는 이치로 마키를 경외함과 동시에 안무 및 동작에서도 이치로 마키를 비롯한 다카라젠느들의 움직임을 많이 참고하고 연구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7. 사생활

나고야 시에서 명문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이시카와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이치로 마키라 하여 성이 실제로 이치로라고 생각하는 견우가 많은데 이 이름은 본명을 쓸 수 없다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스마레 코드에 의해 만든 예명이고 실제로는 위에 쓰여있듯 이시카와 이즈미이다. 위로 오빠가 하나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가부키 배우로 할아버지의 재능이 이치로에게로 유전되었단 의견이 많다.

이치로 마키의 사생활에서 오점이라 하면 첫번째가 그녀의 아버지인데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녀가 유명해진 후에는 자신이 아버지라며 난동을 부리거나 이름을 파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一路真輝 父 구글링해서 확인하면 이에 대한 내용을 알 수가 있다.

두번째는 남편이었던 우치노 세이요와의 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 우치노와는 2000년 엘리자벳 공연 당시 엘리자벳과 죽음으로 처음 만나 2006년 혼전임신으로 결혼하였다. 초대형 뮤지컬 스타 커플의 탄생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2010년 남편인 우치노 세이요의 불륜 현장이 파파라치에 의해 포착되었다. 이때 우치노는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한 정황도 포착되어 크게 논란이 되었다. 이에 우치노 측은 불륜은 인정하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며 잡아뗐다. 덧붙여 아직도 아내를 사랑한다며 이혼을 절대 없을거라 말했다. 이치로 쪽에선 공식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우치노가 다른여자랑 온천여행을 갔다왔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결국 2011년 이혼했다. 또한 이 결혼으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연예계를 잠정 은퇴했으며, 토호 버전 엘리자벳마리 앙투아네트, 모차르트 등 굵직한 작품들을 놓치게 되었다.[49]

딸이 태어나기 전에는 조카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아낀다. 조카와 딸의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조카들이 어렸을 때는 친자식처럼 사랑했다고. 다카라즈카 퇴단 공연인 엘리자벳 96년 막공 당시 조카가 공연을 관람을 왔는데 커튼콜 때 환호를 지르며 소리를 치자 활짝 웃었다고 한다.

딸은 늦은 나이에 얻었고 자신의 이혼으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미안하고 애틋하다고 한다. 이혼 당시에는 아이를 남편에게 보이지 않기를 원했으나 아이가 티비에 아빠가 나올 때마다 좋아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제는 아빠집에 갈 때 배웅하는 정도까지 되었고, 어느정도 화해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치로도 우치노도 서로 재혼예정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메이저리거 출신 일본의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와 열애설이 난 적이 있었다. 다카라즈카에서 활동하던 때로 스즈키 이치로가 이상형이 이치로 마키라고 밝혔다는 소문도 있다. 실제로 스즈키 이치로가 결혼한 후에도 마키의 공연을 보러다니는 것도 여러 번 포착된 적이 있다.

8. 여담


* 엘리자벳은 일본에서 토드역과 엘리자벳을 합쳐 가장 많이 공연한 배우이고 엘리자벳 역만해도 하나후사 마리보다 더 많이 했다. 토호버전 엘리자벳 공연 횟수의 40% 정도를 이치로가 했을 정도니...


[1] 신인공연에서 당시 2번수이던 타이라 미치 역.[2] 케이트 블란쳇이 출연한 영화와는 상관없다.[3] 이 공연은 신인시절 공연이지만 여주인공역을 맡았다.[4] 신인공연 주연.[5] 더블[6] 톱스타 여역이던 칸나 미호와 더블 히로인 이었다.[7] 톱스타 피로 공연.[8] 상대역이던 하나후사 마리의 톱여역 피로 공연이다.[9] 당시 각 조의 2번수 남역 젠느들이 레트 버틀러로서 특별 출연하였다.화조 소속이던 마야미키도 출연[10] 퇴단공연. '죽음의 의인화'라는 설정과는 달리 일본판은 다카판토호판 모두 '황천의 제왕'이라는 설정이 붙었다.[11] 갈라 콘서트라 봐도 무방하다.[12] 신종코로나바이러스 확산에 따라 2021년에서 2022년으로 연기되었다.[13] 아사미 레이의 퇴단 후 타이라 미치가 톱에 취임하였는데. 전 공연부터 톱 여역이 부재였기 때문에 화조에 있던 칸나 미호가 설조에 와 톱 여역에 취임한다.[14] 오스칼은 남장여자다[15] 2번수[16] 츄신구라로 다카라즈카 를 퇴단하였다. 가창력과 연기가 유명했다.[17] 이치로 마키 에세이 "진실"[18] 화조 톱스타[19] 성조 톱스타[20] 월조 톱스타[21] 4명이서 레스토랑에 가 식사를 하는 모습이 자주 발견되고, 같이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22] 당시 엘리자벳은 아시아 초연 공연이기도 하였다.[23] 다카라즈카 공연처럼 흰 가발과 죽음 의상을 챙겨가서 화제가 되었다.[24] 시라키 아야카도 이치로 마키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으로 퇴단 하였다.당시 인형같은 비주얼과 초연 하나후사 마리의 노래와는 또 다른 가창력을 선보여 호평을 받는다.[25] 엘리자벳을 할 때 나이가 36세에서 41세까지로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안인 덕에 어린 씨씨부터 나이 든 모습까지 완벽하게 소화하였다. 그러나, 지금와서는 발성부작용 문제가 심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빈판의 피아 다우스와는 달리 외강내유의 씨씨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동시에 토호판 엘리자벳 씨씨 캐스트 문제의 원점이라는 비판도 존재하며, 토호 레미제라블미스사이공 팬들은 이치로 마키때부터 이어진 토호판 엘리자벳의 다카라즈카 특혜 묶음 캐스트에 대해서도 좋지않게 보고있다.[26] 이 콘서트를 관람한 한 블로거의 말에 따르면 전체 출연자 중 노래를 가장 잘했고 특히 합창에서는 이치로만을 의지해 들었다고...[27] 발성적으로는 이쪽을 이치로 마키나 스즈카제 마요보다 더 높게 쳐준다. 실비아 글랩은 오페레타에서도 활약한 배우이기도 했으므로.[28] 단, 시마다 카호는 미스사이공에 참여경력은 없다. 대신, 레미제라블의 연출감독 존 케어드의 인정을 받았고, 레미제라블 국제 퍼포먼스에서 일본인 에포닌 배우로서 참여하기도 했다.[29] 이는 서양쪽에서도 이치로 마키가 아닌 마나키 레이카를 더 인정하는 평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30] 물론, 여기엔 연출감독 코이케 슈이치로의 연출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치로 마키를 포함한 남역 씨씨가 출연했던 시기인 토호판 엘리자벳 구판무대 Ver1과 Ver2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토호판 엘리자벳의 초연이자 구판무대 Ver1(2000~2001)은 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벳의 외부무대 버전이라 할만큼 다카판을 굉장히 의식한 프롤로그와 엔딩묘사가 강하단 지적이 있었으며, 구판무대 Ver2(2004~2012)는 프롤로그부터 씨씨의 시신을 관에서 소생시키는 연출부터 보이더니 엔딩에서는 씨씨가 토트의 키스를 받고 완전히 숨이 끊어지자 토트가 관을 꺼내면서 씨씨의 시신을 안에 집어넣고 승리를 쟁취하는 듯한 포즈를 보이곤 프롤로그와 연결시키는 암시를 주면서 주면서 막을내리는 결말처리를 하여 비엔나판 오리지널 캐릭터상에 기반한 씨씨를 자아있는 여성으로 해석하는 측에서 꽤 찬반양론이 거셌고 "씨씨는 자유를 원하는 인물인데, 토트의 소유물로 만들는 결말을 주면서 씨씨가 자유를 못 찾게했다."라는 반응이 꽤 많았다.[31] 신무대판이 시작되었던 2015년과 2016년 토호판 엘리자벳 공연때는 최초의 여역 출신 씨씨인 하나후사 마리란노 하나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벳 시절과 다름없는 캐릭터 해석을 보였다는 비판이 있었으며 특히 란노 하나의 경우 발성문제도 함께 지적되면서 그 전부터 지적됐던 토호 엘리자벳 씨씨 캐스트 논란의 불을 더욱 지펴지게 만들기도 했다. 신무대판에서 연출을 살짝 바꿔올린 2019년 토호판 엘리자벳 공연때 마나키 레이카가 씨씨로 나오면서 비로소 비엔나판 원전에 가까운 발성과 연기에서도 균형잡힌 씨씨와 엔딩결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평가받았고 르베이도 22-23 공연때 직접 일본에 오면서 두 번 이상 관극 후 꽤 만족하기도 했으며 토호측에 지시하여 22년 도쿄 공연 원반과 23년 후쿠오카 하카타좌 공연 하이신(配信)이 나오는 것을 허가까지 했다.[32] 반대로 르베이는 다카판 엘리 초연부터 시작해서 2014년 토호제작 뮤지컬 레이디 베스 초연때까진 하나후사 마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호의적이었다. 이유는 하나후사 마리가 연기한 엘리자벳이 자신들이 원하는 캐릭터상이 아닌 "고귀하고 가련한 여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발성관련도 포함되었지만 가장 큰이유는 캐릭터 해석이었다.[33] 동시에 다이치 마오가 르베이 뮤지컬과 인연이 없었다는 것도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가창까지 신경 쓰는 일본 뮤덕 팬층으로부터는 다이치 마오가 마츠 타카코와 토호 엘리자벳 W캐스트로 나왔으면 엘리자벳 캐스트 논란 점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다이치 마오도 르베이에게 인정받을만한 실력은 있었다는 의견도 보인다.[34] 요즘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에서 선홍보 하는식으로 진행되는게 당연시 되었지만 당시엔 SNS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이렇게 종이로 나눠주는게 흔했으며 주로 홍보지를 통해 무대와 뮤지컬 신작 관련소식을 접할 수 있던 시대였다. 신문을 예로 들자면 종이신문에서 전자신문으로 바꼈다는걸 생각하면 된다.[35] 이 소문에 대한 출처야마구치 유이치로 출연의 오페라의 유령부터 시작하여 이치무라 마사치카가 출연한 미스 사이공의 엔지니어, 다이치 마오가 출연한 마이 페어 레이디와 이노우에 요시오의 루돌프역 데뷔한것도 봤다는 일본 구세대 뮤덕에서 나온 말이다. 단, 어디까지나 당시 잠깐 있었던 소문 겸 덕후들의 바람과 망상에 불과한 내용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고 당시에 이런 소문이 있었다라는 정도로만 알아두자.[36] 당시 1996년 다카라즈카 설조 초연때 씨씨를 했던 여역톱배우 하나후사 마리도 거론되긴 했었는데, 실제 하나후사 마리는 98 주조 엘리 공연에서도 씨씨로 출연했고 이 주조 엘리 공연을 보러간 다카 이외의 외부무대 공연을 주로 보러갔던 일본뮤덕의 말에 의하면 아름답고 청순하고 애수가 가득하여 하나후사가 다카 외 무대에서도 출연되길 바라는 이들이 당시에도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하나후사 마리는 후술하듯 일본내 높은 신분의 집안에서 분가된 가문의 따님이라 다카내에서 집객력이 꽤 높았다. 허나, 이 시기에 하나후사 마리는 아직 다카라즈카 주조 여톱으로서 파트너인 와오 요우카와 톱스타 콤비로써 활동중이었기에 토호판 씨씨로는 절대 캐스트 실현불가 상태였다. 하지만, 2015년이 되어서야 진짜로 토호 엘리자벳에도 나오게 되는 하나후사 마리.[37] 무려 아버지가 유명 가부키 배우이자 일본내 문화유산급 존재로 추앙받는 마츠모토 하쿠오이며 고로 마츠 타카코는 일본예능계 로열 블러드 중 한 명 이다. 심지어 마츠모토 하쿠오는 항목에 나와있듯이 자국의 문화훈장을 수훈하여 인간 국보에 해당되는 인물이며, 가부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화ㆍ드라마 등 대중미디어에서도 출연한 명배우다. 1978년, NHK 대하드라마 『황금의 나날』에서 주연이 루손 스케자에몬을 연기하며 대호평을 받아 이후 NHK 대하사극 시리즈에 자주 출연하였고, 2016년 사나다마루에서도 루손 스케자에몬을 맡았다. 뮤지컬 분야에서도 활약했으며 대표적인 배역은 라만차의 남자의 세르반테스/돈키호테이며 1969년 일본 초연부터 2023년 4월 공연까지 캐스트 변경없이 꾸준히 맡을 정도로 일본 돈키호테의 명인으로도 불린다. 또한 26세에 브로드웨이 활동시 아시아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뉴욕 브로드웨이 라만차의 남자 공연에서 주역인 돈키호테 역에 발탁되어 대호평을 이아 동양인의 브로드웨이 진출의 긍정적 기반이 되었다. 마츠 타카코 역시 부친과 함께 라만차의 남자 공연에 출연하여 히로인 알 돈자를 맡았다.[38] 이 오필리아 역으로 당시 마츠 타카코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귀족 여인이나 왕비역할에 대한 기대도 많이한 팬들의 바람도 있었다고 한다. 마츠 타카코가 오필리어를 맡던 사진을 보면 그 당시 다카가 아닌 외부 무대 연뮤덕들 사이의 소문상에서 씨씨를 맡을 배우로 떠올릴 법한 외형은 갖추고 있었다.#98 햄릿 연극무대 시절 오필리어로 출연했던 마츠 타카코[39] 창법은 다르지만 마츠 타카코의 옛날 노래를 들어보면 확실히 이치로 마키보다 마츠 타카코가 보다 더 빈판 초연의 피아 다우스와 음색과 느낌이 비슷하며 2019년부터 토호판 씨씨를 맡은 마나키 레이카랑 음색이 비슷하면서도 다카판 초연의 씨씨였던 하나후사 마리와 비슷한 청순함이 있단걸 느낄 순 있다. 겨울왕국의 엘사 넘버곡이나 제인 에어 2009년 일본 초연 영상을 보면 이를 확인 할 수가 있다. 겨울왕국2, 제인 에어 2009년 일본 초연[40] 다이치 마오의 장기 레퍼토리 배역이며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이라이자를 연기했다.[41] 98 토호 뮤지컬 로마의 휴일 초연에서 신문기사 존을 맡은 건 다름아닌 부장님 야마구치 유이치로. 이 실황은 라이브 음반으로도 발매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이 음반의 음원을 들어보면 확실히 다이치 마오가 다카 남역 톱스타라는게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순진무구한 앤 공주역 목소리에 잘 들어맞는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42] 당시 일하던 토호관계자에 의하면 토호판 라이센스 체결당시부터 토호 연극부에서 처음부터 다카판의 코이케 슈이치로를 기용하는 걸로 결정했다한다. 엘리자벳 세계관에 대해 일본에서 가장 이해가 깊은건 당시엔 코이케 슈이치로 뿐이었다고.[43] 그것도 그럴것이 이치로 마키는 현재는 레전드급 배우로 꼽히지만 당시엔 다카팬들 한정에서의 인기스타였고, 제극을 포함한 외부무대 공연을 보러간 이들에겐 와카테(若手)로 인식받았으며, 이치로 마키는 1996년에 다카라즈카를 퇴단 후에 참여한 무대가 왕과 나의 애나하고 남태평양 두개 뿐이었다. 퇴단후 외부왔을때 반응도 다카 팬들이 아닌 이들 사이에선 그리 좋지만은 않았는데, 이유는 왕과 나남태평양 출연 당시 "아직 다카 남역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과 "목소리가 여역치곤 지나치게 두껍다", "연기력이 약하다"라는 지적이 꽤 많았다. 국내에서는 다카라즈카 팬층이 많아서 이에 대한 얘기는 잘 알려지지 않아 믿겨지진 않겠지만.[44] 다만, 최근엔 이치로 마키를 씨씨로 싱글캐스트 했던것에 대한 비판도 볼 수 있다. 당시 이치로 마키를 싱글캐스트가 아닌 초연 시기부터 이치로 마키나 그 전에 제극에서 프리마돈나의 위치해 있던 다이치 마오같은 다카라즈카 출신자와 가부키의 명인이면서 일본 돈키호테 최고봉으로 꼽는 금수저 집안의 부친의 친딸이자 아역부터 시작해서 당시엔 청순한 아가씨역으로 유명했던 마츠 타카코라는 비다카 출신자로 일찍 더블캐스트를 시행했더라면 다카라즈카 묶음식 캐스트라는 지적이나 2021년 콘 나츠미 콘서트에서 나온 언급으로 인한 논란같은건 적었을 거라고. 애초에 초연때부터 씨씨 캐스트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일본 비다카, 외부 무대 연뮤 팬의 글도 볼 수 있다.[45] 이 같은 비슷한 사례는 이노우에 요시오나카가와 아키노리가 모차르트의 넘버곡 제목을 패러디하면서 진행한 "우리들이야말로 음악(僕らこそミュージック)"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그것도 절대 평범하게 출연하지 않은 이케코 코이케 슈이치로의 모차르트 캐스트 비화 언급에서도 나온다. 본디 토호판 모차르트의 볼프강은 싱글캐스트였으며 당시 토호측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으면서 티켓파워마저 갖고있던 이름은 사정상 비공개 되어있던 어떤 배우가 볼프강으로 내정 되어 있었으나, 곡의 난이도가 엄청 심했기에 캐스트로 내정 되어있던 볼프강역을 거절한 일이 발생했고, 처음부터 다시 캐스트했어야 했으며 이에 코이케 슈이치로가 엘리자벳의 토트역에서 처음 적용한 더블 캐스트 방식을 도입하자고 토호에 권했고, 조역과 단역에는 인기스타를 캐스트하는 조건하에서 당시 데뷔 2년차였던 이노우에 요시오와 완전 뮤지컬에선 샛파란 신인이었던 나카가와 아키노리로 더블캐스트가 된 것 이다. 그래서 토호판 모차르트!는 초연때부터 지금까지 볼프강역은 더블캐스트로 진행되었고, 이런 신인 등용을 토호보다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인해 코이케 슈이치로에게 비호의적인 시선을 갖고있는 일본인 뮤지컬 덕후들도 여기서만은 반박의 의견을 하지 않는다.[46] 거기다 다이치 마오는 다카 월조 남역 톱스타 시절 당시 코이케 슈이치로의 무대와 인연이 닿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47] 이 곡은 이치로 마키가 자신이 가장 최애로 여기는 곡이며, 2004년부터 삭제가 되자 이에 대한 아쉬움을 공식 블로그에 가끔씩 언급하곤한다. 그래서인지 2001년에 개최가 된 Diva콘서트 및 다른 연주회에서 자주 부르고 있고, 가장 최근에 불렀던 것은 2023년 9월 10일 도쿄 시어터 클리에에서 시행되었던 「쿤체&르베이 세계 3rd」콘서트 출연기간때이다.[48] 이러한 비슷한 사례는 2023년 11월 9일에 제극에서 상연한 아르센 뤼팽의 이야기를 다룬 『뤼팽~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비밀~#』에 출연한 칼리오스트로의 W캐스트 배우인 유즈키 레온과 마카제 스즈호를 들 수 있는데, 실제로도 코이케 슈이치로는 유즈키 레온을 향해 "어떻게든 제극 무대에 데뷔시키고 싶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첫 날 커튼콜 영상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이러한 코이케 슈이치로의 발언때문에 일본 연뮤덕들은 다카라즈카 연줄을 의심하는 반응도 보이고 있으며, 2023년 9월 30일부터 다카라즈카 가극단 내부에서 불미스러운 일과 코이케 슈이치로의 동성 스태프 성희롱 및 갑질건도 보도 되어 코이케의 연줄 캐스트건도 보도 되어야한다는 외침도 나오고있다.[49] 왜 이게 이치로 마키의 것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그 당시 남녀를 통틀어 실력과 인기의 최정상이 이치로였으며 위 작품들의 작곡가와 제작자 모두 이치로의 실력을 인정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 놓친 게 맞다고 한다.[50] 다카라즈카는 전문적으로 춤을 배운 사람도 합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경쟁률이 아주 높아서 재수 또는 3수를 해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치로 마키의 경우는 정말 희귀하고 대단한 케이스다[51] 2년차에 톱여역을 제안했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일이다. 다카라즈카 여역의 전설이라 불리는 하나후사 마리도 4년차에 겨우 여역톱이 됐는데 그보다 2년 더 빠른것이다[52] 다른 톱의 팬들은 밀어주기라고 욕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