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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0:34

이숭용/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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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태평양 돌핀스 시절3. 현대 유니콘스 시절4.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시절
4.1. 2008 시즌4.2. 2009 시즌4.3. 2010 시즌4.4. 2011 시즌

1. 개요

이숭용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태평양 돌핀스 시절

경희대 체육학과(1990학번) 시절 1993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타격왕 수상과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차출되었고 어느 정도 준수한 활약 덕에 1994년 신인 지명회의 2차지명에서 전체 1번으로 태평양 돌핀스에 지명됐다. 계약금 5천만원을 받고 입단한다.[1]

첫 해에는 팀내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거포 겸 주전 1루수였던 김경기와 내기를 했다. 당시 새파란 대졸 신인 이숭용은 숭의야구장 라커룸에서 쉬고 있는 김경기에게 무턱대고 찾아가서 "제가 선배님 자리를 차지하겠습니다. 못하면 외야로 떠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당시 김경기는 매년 두자릿수의 홈런을 칠 정도로 장타자로서의 기량이 만개할 때이자[2] 비극의 물방망이 타선에서 독보적 존재를 뽐내던[3] 부동의 4번타자였으며 팀에서는 연고지역이던 인천광역시 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였다.[4]

김경기는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저 어린 후배에게 감명받았다. 남자답게 도전하고, 당당하게 경쟁하고, 깨끗이 승복하고, 이게 사나이잖아."라고 회상했다. 사실 새파란 신인 후배가 팀내에서 가장 탄탄한 입지를 갖춘 스타 선배에게 저렇게 얘기를 한다면 타팀에서는 싸가지 없는 놈이라며 군기잡이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상명하복의 사회 풍조가 뚜렷했던 1990년대 중반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숭용의 행동은 다소 무모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평소 대인배적 풍모를 보였던 김경기였기에 그냥 넘어간 것 같다.

실제로 이숭용은 1994년 개막전에서 역전 홈런을 치며 신인 돌풍을 일으키는 듯 했다. 그러나 체력 저하로 타율 0.224 홈런 3개를 기록하는데 그친 반면 김경기는 시즌 2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결국 김경기와의 내기에서 패배를 인정한 이숭용이 다시 김경기를 찾아와 "선배님께는 제가 안 되겠습니다. 1루수 포기하고 외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태평양을 지휘한 정동진 감독은 이숭용을 지명타자로 주로 기용했고 외야수로 기용된 날도 꽤 됐다. 이 내기를 계기로 김경기와 이숭용은 절친한 선후배가 됐는지 훗날 김경기와 이숭용이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은 상황에서도 서로 히죽히죽 웃고 다니는 모습이 TV에서 자주 보였다. 실제로 이숭용은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김경기를 꼽았고 김경기 역시 가장 착하고 성실한 후배가 이숭용이라 했다.

1995년에는 선배 김경기와 1루수를 번갈아서 뛰면서 프로 데뷔 첫 두자릿수 홈런을 치며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

3.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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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시절[5]

현대로 구단이 인수된 첫 해에는 주로 좌익수로 있었고 주전 중견수로 활약한 1998년을 제외하곤 2000년까지 시즌 중 1루와 외야수를 이동해가면서 주전으로 활약했다.[6] 이후 01시즌엔 주전 중견수로, 02시즌엔 주전 1루수로, 다시 03시즌엔 주전 중견수로 매해 팀의 상황에 맞게 포지션을 이동하면서 활약했다. 그리고 04시즌부턴 붙박이 주전 1루수로 고정된다. 물론 간간히 중견수로 나오기도 했지만 05시즌부턴 그마저도 없이 1루수로만 나왔다.

이숭용의 포지션 이동은 현대의 사정에서 기인하는데 당시 현대의 주전 1루수였던 김경기가 부진하면 이숭용이 1루수로 나왔다. 이후 스캇 쿨바가 주전 1루수로 합류한 1998 시즌에는 김경기를 3루로 보내는 대신 이숭용을 외야로 보냈고 쿨바가 떠난 이후에는 외야수로도 나왔지만 이명수와 더불어 1루수로 출장했다. 이후 2000년도 동일한 양상이었다.[7] 2001년에는 J.R. 필립스[8]가 퇴출된 이후에는 1루수로 정착했다가 박재홍이 팀을 떠나면서 다시 중견수로 갈 수 밖에 없었다.

1996년 팀이 이변을 일으키며 정규리그에서 4위를 하는데 중심타자로서 공격력에 보탬이 되었다. 97년엔 커리어 중 가장 좋으면서 리그에서도 상위권의 타격 생산력을 보였고 이후에는 뛰어나진 않았지만 꾸준히 중상급의 성적을 냈다. 신인급이던 2~3년차엔 하일성에게서 "저 선수 펀치력 있다"는 호평도 들었다.

1997년 데뷔 첫 3할 돌파를 하지만 팀은 가을야구에 탈락한다. 박재홍-이숭용을 제외하면 다른 타자들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팀내 고과는 외야수 박재홍 - 투수 정민태 다음 가는 3위다. 기록만 놓고 본다면 그냥 교타자에 가까웠지만 굇수급의 볼삼비를 기록하면서 무려 wRC+ 7위를 기록한다.(153.1) OB와 한화를 대표하는 중심타자 김상호, 장종훈, 그리고 20-20을 기록한 홍현우, 최익성보다 높은 득점생산력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를 손에 쥐며 본인의 커리어 사상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팀에게는 만년 꼴찌 시절의 설움을 날리는 프랜차이즈 사상 첫 번째 우승이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었던 6차전에는 중견수로 선발 출전해서 팀의 우승을 결정짓는 선제 투런 홈런을 터뜨렸고 9회초 마지막 수비 때는 우승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그런데 공을 잡아낸 뒤 따로 챙기지 않고 담장 밖 외야석의 관중에게 그 공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당시는 본인 스스로도 우승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보니 우승구에 대한 상징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기념구에 대한 인식이 그리 뚜렷하지 않던 시절이라서 공을 던진 듯하다. 이숭용 스스로도 나름 팬 서비스라고[9] 생각하고 한 행동이었지만 나중에 팀 프런트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고(...) 한다.

99년 시즌 중 라이벌 팀에 있는 양준혁과 트레이드가 될 뻔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파기가 되었다. 양준혁은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었고 반대쪽에서는 임창용이 왔다고 한다. 시즌 중 이라는걸 보면 아마도 해태의 김응용 감독과 김재박 감독 사이에서 주고 받은 이야기가 와전이 된 듯 만약 건너갔다면 4년전 팀 동료 최상덕과 재회 했었을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는 98년도 건너온 박경완[10]이 있었는데 김재박과 김시진이 가장 필요한 포지션 포수 라고 할때 프런트들은 거포를 데려올까 말까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만약 박경완을 포기하고 김기태를 받아왔다면 이숭용이 그 상대가 되지 않았을까 라고

다만 2000년까지는 성적이 평범했던 데다 포지션 역시 고정되지 않은 채 1루수와 외야수를 오가면서 당시 사기급 라인업을 자랑하던 현대 선수단 내에서는 딱히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른이 넘은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으로 타격 실력이 완전히 만개하게 되는데, 2001년 규정타석 첫 3할, 2002년에는 최다홈런인 19홈런, 2003년에는 개인 최다안타와 최고 장타율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2004년에는 85타점을 올리며 한 시즌 개인 최다타점을 기록하며 현대의 중심타선 겸 정신적 지주로 활약한다.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그 빗속의 혈투로 유명한 9차전에서 1루수로 출장, 현대의 4번째 우승을 확정짓는 끝내기 땅볼을 잡았던 선수도 이숭용.

2003년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는데, 일찌감치 현대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3년 17억 5,0000만원에 현대와 FA 재계약을 맺었다.[11]

2005년부터는 주장직을 맏형 김동수에게 넘긴다.[12] 시즌 전반기에만 13홈런을 치면서 홈런 랭킹 1순위에 들더니 무릎부상으로 시즌 중간에 아웃되며 결국 망해버렸다.[13] 대신 홈런왕은 같은 팀 용병이던 래리 서튼이 이어 받았다. 이후에 1루수에 들어오는게 바로 포수 출신이었던 이택근.[14] 이듬해 역시 전반기 좋은 활약을 보이다가 점점 순위권 바닥까지 떨어졌다. 현대의 마지막 해 이숭용은 4월 ~ 5월 사이 양준혁과 타격왕 대결을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심한 발목부상으로 4할 타율이 깨지면서 0.350 타율 역시 마지막 경기 뛸 때까지 0.301 수직하락 하면서 이숭용의 시즌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숭용이 타격에 부진할 때 이택근 - 정성훈 동갑내기 둘이 메꿔 주었지만 노장 베태랑 전준호, 송지만 등이 부진하면서 현대 선수단 성적에도 악영향을 줬다. 그래도 본인은 아쉬운거 뒤로 한 채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2006년 시즌이 끝나고 현대와 맺은 FA 3년 계약이 끝났는데, 다시 FA 자격을 취득하려면 아직 1년이 더 남은 상황이었지만 2007년 시즌 후 FA를 선언하지 않는 조건으로 현대와 3년 총 12억에 다년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2007년 12월, KBO에서 시상하는 페어플레이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소속팀인 현대 유니콘스는 오랜 재정난을 문제로 2007년을 끝으로 해체를 통보했다. 설상가상으로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을 기반으로 재창단을 노렸던 KT[15]마저 협상 문제로 창단 백지화를 선언해버리는 바람에 자칫하단 7구단 체제로 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했다. 당시 현대 주장이었던 이숭용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며 "8개 구단 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해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4.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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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20024> 히어로즈의 눈물겹던 초창기를 지켜준 '숭캡'

4.1. 2008 시즌

2008년 2월, 그렇게 어렵사리 팀은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에 인수되어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이장석 대표이사 - 박노준 단장은 경영 효율화라는 명분으로 김시진 감독 및 코칭스태프 대다수를 해임하는 등[16] 사실상 현대 색을 지우기 시작했고, 신임 감독으로 이광환을 선임한 뒤 베테랑 선수들의 연봉을 크게 삭감했다. 특히 이숭용송지만, 김수경 3명은 FA 신분이었음에도 해체 후 재창단이었기 때문에 FA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되는 상황에 놓였다.[17] 결국 이숭용은 3억 5천만원에서 1억 7천만원으로 연봉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삭감되었다.[18]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결국 팀 분위기도 영 좋지 못했다. 이숭용은 전지훈련도 연봉 협상이 길어지면서 다녀오지 못 했고 전년도에 비해 출장 경기는 늘었지만 타율은 2할 7푼으로 하락했다. 또한 새로 바뀐 감독, 프런트와도 여러 일들로 인해 썩 좋지 못한 상태였던지라 시즌 중 SK 와이번스정상호를 상대로 트레이드 될 뻔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당시 SK는 FA로 잔류한 이호준이 무릎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데 이어, 박정권마저 정강이 부상으로 아웃되는 바람에 주전 1루수가 비어 이진영이 1루수로 나오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도 해당 트레이드를 반겼는데 이 과정에서 이장석이 추가로 1억원을 요구하면서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19] 하지만 각주에서 설명한 두 선수의 가치나 활용은 둘째 치고 15년간 헌신한 프랜차이즈 선수를 토사구팽하듯이 타 팀에 팔아버렸다는 점에서 팬들의 반발이 극심했을 것이고 이숭용이 빠진다면 강병식, 조중근, 전근표가 대신 1루수로 나왔을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문제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4.2. 2009 시즌

2009년 역시 전년도 마냥 비슷하게 가다가 2대 감독으로 선임된 김시진 감독 아래서 뛰게 된다. 구단은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이숭용의 연봉을 1억 7천만원으로 동결시킨다. 단 시즌 초에 너무나도 어수선한 팀 때문에 송지만과 쌍으로 엮여 2군으로 10일간 유배를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8월 중순 말에 삼성/롯데/KIA를 상대로 4강 티켓이 걸려있는데 이 경기에서 각각 승패를 거듭 반복하면서 광탈하고 팀은 6위로 전년도보다 1단계 상승했다.

4.3. 2010 시즌

2010년도에는 이택근이 LG에 38억원에 팔렸고, 장원삼은 삼성에 35억원, 마일영은 한화에 12억 5천만원, 이현승은 두산에 30억에 팔렸다. 팀의 핵심전력 4명을 팔고 115억 5천만원과 투수 4명과 야수 2명을 얻어오며 시궁창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이숭용은 전 시즌의 호성적에 힘입어 연봉이 2억 3천만원으로 다시 상승한다.

정규 시즌에 들어서 이숭용은 마치 07년 마냥 타격이 잘되다가 또 불볕더위 여름이 오면서 헛방망이 질하면서 망쳤다. 물론 40대에 접어든 이상 체력 저하 기량 하락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래서 강병식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강병식은 이 기회를 잘 살리며 호성적을 거두었다.

4.4. 2011 시즌

전 시즌의 부진으로 인해 연봉이 다시 1억 7천만원으로 삭감되었다. 주장직도 강병식에게 넘겼다. 전반적으로 나이도 있고 강병식의 대두와 2군에서 잘 하다가 올라온 조중근[20]의 성장 등으로 기회를 서서히 잃기 시작한다. 다만 강병식이 근육통으로 시즌을 2군에서 시작하면서 조중근이 시즌 초반에 주로 나왔고 어린 유망주인 장영석이 가세했다. 이후 오재일도 1군에 합류했다.

4월 5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 경기에서 파울 플라이로 통산 6,000타수를 달성했다. 통산 6번째로 달성된 기록이다.

4월 27일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는 통산 1,700안타를 달성했다. 통산 7번째 기록이며, 현역 선수 중에서는 장성호, 송지만, 이종범에 이어 4번째.

이후 2011년 7월 31일에 마감시한을 앞두고 LG 트윈스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21] 박병호가 1루에 정착하면서 기회를 점점 잃어갔다. 박병호는 2군 본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2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던 타자였지만 1군에서는 맥을 못 췄는데 히어로즈에 합류한 이후 호성적을 내면서 주전 1루수가 되어버렸다.

갑자기... 9월 5일, 각 언론 매체를 통하여 현역 은퇴를 전했다. 은퇴 경기는 9월 18일 삼성 전으로 결정되었다.

9월 6일 확대엔트리를 통해 1군 복귀를 했다. 사실상 단일구단 2,000경기 출장을 위한 콜업이라는 것이 정설. 9월 16일 두산전에서 통산 2,0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8회 박병호 대신 1루수로 출전. 그리고 팀은 끝내기 역전승으로 레전드의 대기록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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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왕조의 황태자가 현역 생활을 마감하기로 한 것에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하였다.[22] 특히 넥센 히어로즈 갤러리에서는 이 소식이 들리기 3일 전부터 한화 이글스에 스윕을 당한지라 분위기가 초상집이었는데 이 소식이 들리자 공황상태가 벌어졌고, 3,000경기 50살까지 하라는 의미에서 제작 중이었던 댓글북은 은퇴 선물이 되어 버려서 눈물 바다가 돼버렸다.

그리고 대망의 9월 18일, 본인의 통산 2,001번째 경기이자 은퇴 경기인 목동 삼성전에 선발 출장했는데, 턱돌이가 레드카펫을 깔고 옛날 왕들에게 사용하던 햇빛 가림막을 드는 연출을 했다. 이숭용이 첫 타석에 들어서며 3루 1루 관중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고 환호성이 울려퍼지며 상대 팀 포수 진갑용조차 포옹을 하는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이 날 경기는 4:2로 넥센 히어로즈가 삼성에 승리하며 은퇴 경기를 치른 이숭용에게 유종의 미를 안겨 주게 되었다. 그 날 선발로 등판한 문성현이 승리하였고, 상대 선발은 장원삼이었으며, 장원삼은 이 경기를 포함하여 문성현과의 맞대결에서 3연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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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최훈 작가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을 패러디하여 영원한 캡틴의 표현을 담아 카툰을 만들었다. 18시즌 동안 통산 2,001경기 출전. 통산 타율 2할 8푼1리, 1,727안타, 162홈런.

김동수, 양준혁, 김민재, 전준호, 박경완에 이어 프로 통산 6번째로 2,000경기에 출전하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은퇴했으며, 태평양 입단 이래 단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000경기 출전의 위업을 이뤘을 때 수많은 언론사들이 '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2,000경기 출전'이라는 문구를 언급하며 이 소식을 전했다. 사실 팀이 중간에 현대에서 넥센으로 재창단 되긴 했지만 현대의 선수단, 프런트가 그대로 넥센으로 인수되면서 사실상 인수형식으로 재창단된 것과 선수 본인은 한 번도 타 팀으로 이적한 적이 없기에 KBO에서는 이숭용의 단일 팀 2,000경기 출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념패까지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삼청태현을 계승했다면서 태평양 유니폼 데이까지 하던 SK 와이번스가 반대했으나, KBO가 묵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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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7일 KBO에서 배포한 공식 보도자료이며, 분명히 한 팀에서만 뛰면서 2,000경기를 출장한이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 구글 검색창에 '이숭용 2,000경기 보도자료'를 타이핑하면 그 문서파일의 전문을 볼 수 있다.

전형적인 중거리형 교타자 스타일로, 2할 8푼대를 왔다갔다하는 타율에 전성기 시절엔 두자릿수 홈런도 곧잘 칠 정도로 장타력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준수한 선구안을 바탕으로 박병호에게 넘겨 줄 때까지 히어로즈의 1루를 지켰다. 신인 시절인 1994, 1995년과 2007년을 제외하면 매년 100경기 이상 출장하며 통산성적과 비슷한 성적을 찍어주는 늘 꾸준한 선수였다. 또한 수비력도 그 당시 1루수 중 최상급[23]. 1루 수비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쉽다는 말이 있었으나 1루 수비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는것을 깨우쳐 준 선수이기도 하다. 다만 팀의 멤버들이 너무 화려했던 터라 구 유니콘스/히어로즈 팬을 제외하면 큰 주목은 못 받은 편.[24][25] 그래도 외모가 좋아서 여성 팬들에겐 인기가 제법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라는 별명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황태자는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 그런데 일부 팬들은 이 별명을 서른 넘었는데 아직까지 황태자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존경의 뜻으로 사용한다.

1994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해 현대 유니콘스에서 활약했고, 2007년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 후 히어로즈로 재창단됐기 때문에 비록 공식적인 계보는 끊겼지만, 현대 유니콘스의 후신으로 간주되는 넥센 히어로즈에서 뛴 선수 중 태평양 시절을 경험한 마지막 선수다. 보통 해체/인수된 팀의 최후의 현역선수는 고졸신인인데 태평양 출신중에서는 이숭용보다 선수 생활을 길게 한 이가 없다.[26] 2011 시즌에는 태평양 출신의 마지막 현역 선수였다. 특히 2007~2008년 현대 유니콘스 해체 당시에는 팀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했다.


[1] 2차 1라운드 치고는 저렴한게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당시만 해도 신인 계약금이 저렴한 편이었다. 더구나 1990년대 중반의 물가 수준을 고려할 때 5000만원은 상당한 수준의 대우였다. 물론 현대 피닉스가 창단된 이듬해부터는 신인에 대한 대우가 급격히 폭등한다.[2] 실제로 1994년 김경기는 사상 최초의 좌타 홈런왕이 된 김기태에 이어 시즌 홈런 랭킹 2위에 올랐다.[3] 당시 태평양 주전 야수 중에서 그나마 밥값을 하던 선수라고는 김경기, 김동기, 윤덕규 정도였다. 나머지 선수들은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나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둬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타격이 약했다. 대표적 사례가 김성갑염경엽.[4] 김경기는 본인의 출중한 타격 실력에 '인천야구의 대부'로 존경받던 아버지 김진영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인천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인천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스타였다.[5] 사진은 2005 시즌. 오랜만에 홈런 상위권을 찍고 있던 시즌이었다. 알다시피 무릎 부상으로 완전히 시즌을 접었다.[6] 특히 1997년에는 전준호가 롯데에서 무상 트레이드로 합류하고 쌍방울에서 교타자인 김광림까지 합류하면서 기존의 선풍기이자 물빠따였던 김인호와 성장중인 이숭용과 더불어 외야 자원이 상당히 풍부해졌다. 그래서 박재홍이 부상으로 한달을 결장하고, 김경기가 부진했음에도 이숭용이 1루와 외야를 오가면서 그 공백을 대체할 수 있었다. 이 풍부한 외야진으로 98년 우승을 거뒀고 김광림이 현대에서 방출을 당하고 쌍방울로 되돌아간 후에도 이 포지션은 유지되었다.[7] 외야에는 전준호 - 박재홍 - 심재학이 있었기 때문에 이숭용은 주로 1루수로 나왔다. 물론 전준호가 시즌 초반에 못 나오면서 이숭용이 고스란히 외야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이후 김경기가 SK로 이적하고 박종호의 재능이 만개하면서 주전 2루수 자리가 확정이 된 이후 이명수는 지명타자와 백업 1,2루수로 나왔다.[8] 빅리그에서 뛰어 본 선수다.[9] 이숭용에게 사인을 받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인을 후하게 해준다는 소리가 자자하다. 예전에 방송에서도 팬들이 음식비도 대신 내주고 택시비도 대신 내주는 일이 빈번했다고 할 정도면 팬덤 내에서 이숭용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10] 이근엽김형남이 현금 9억원으로 함께 쌍방울에 이적했다.[11] 다만 현대는 이 당시 이숭용을 잔류시키는 대신 같은 해 FA 자격을 얻었던 2루수 박종호와는 금액 차이로 협상이 결렬됐다. 이후 박종호는 시장에 나간 뒤 삼성 라이온즈와 FA 계약을 체결하며 이적한다. 사실 2000년대 이후 모기업의 부도로 인해 현대는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어 FA 선수 중 한 명만 잔류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12] 당시 김동수는 프로야구 선수협회장도 겸직하고 있었다.[13] 구단 역시 현대로 넘어온 이후 최악의 성적인 7위를 기록했다. 2005년 이전의 최저 순위는 1997년의 6위.[14] 사실 이택근은 데뷔 시즌인 03시즌에 사실상 주전 1루수로 뛰었고 04시즌부턴 송지만의 영입으로 이숭용이 주전 1루수로 출전하게 되어 05시즌까지 1루 백업과 대타로 있다가 타격에서 재능을 보이며 06시즌부터 주전 중견수로 자리잡았고 상당한 활약을 보인다.[15] 나중에 kt wiz를 창단해 2015년 1군에 진입한다. 저 당시에는 모 블로거 때문에 엠바고가 터져서 현대와의 협상이 깨졌었다. 훗날 이숭용이 kt에서 타격코치 및 단장으로 몸담게 된다는 걸 생각하면 뭔가 묘한 인연이다.[16] 이 과정에서 현대의 마지막 감독이던 김시진을 포함해 이광근, 이명수 등 태평양-현대 시절부터 팀을 지켜온 코치들이 유니폼을 벗었다. 이들은 2008년 한 해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시즌 후 박노준 단장 - 이광환 감독이 모두 물러난 뒤 후임 감독으로 김시진이 다시 복귀하며 히어로즈에 합류한다.[17] 이 중에서 송지만은 3년 계약 중에서 마지막 1년을 보장받지 못 했고, 김수경은 1+2 계약이었다. 이숭용은 FA 계약이 2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18] 송지만은 6억원에서 3억 5천만원이 삭감된 2억 5천만원에 도장을 찍었으나, 2009~2010년에 연봉 4억원을 받았다. 팀의 중심타자임을 감안해도 뭔가 오버페이 스러운 느낌이 있는데 내막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금액이었다.[19] SK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는데 일단 이숭용이 외야수로 활용될 수 있다고는 해도 당시 SK에는 박재홍, 이진영,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호준이 부상에서 돌아온다면 나이도 많고 장타력이 떨어지는 이숭용의 역할은 백업으로 제한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상호는 박경완이 부상을 당한 이후에 계속해서 꾸준히 나왔기 때문에 이 트레이드가 실현되었다면 전력만 놓고 보았을 때는 히어로즈는 김동수의 뒤를 잇는 주전포수를 얻게 되는 것이며 이숭용이 38살의 고령이라는 점, 정상호가 27살의 젊은 선수라는 점을 보면 큰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20] 시즌 중반에 교통사고가 나면서 곧바로 아웃되었다. 비록 많은 출장은 아니지만 3할 1푼 까지 치고 있었다.[21] 송신영, 김성현이 LG 트윈스로 이적하고 심수창, 박병호가 15억원과 함께 넥센 히어로즈로 오는 트레이드였다.[22] 왕조의 전반기를 함께한 현대의 최고 타자 레전드인 박재홍이 현역이었기에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다. 다만 박재홍이 KIA에 팔려간 이후에도 이숭용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23] 그래서 박병호가 트레이드되고 1루 주전을 차지하자 모든 넥센팬들은 이숭용의 수비력의 존재감을 실감했다. 다만 이숭용은 1루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박병호가 있어 은퇴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24] 현대에서만 골든글러브 4개, 최초의 30홈런 30도루와 홈런왕, 타점왕을 1년차에 해서 신인왕을 차지했고 현대에서의 마지막 해에는 미스터 올스타가 된 박재홍, 골든글러브 1회, 도루왕 1회를 현대에서 거두고 프로야구 제2호 2000안타를 거둔 전준호, 포수 최초의 20홈런 20도루를 거두고 골든글러브 2회, 홈런왕 1회, MVP를 거둔 박경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범한 이숭용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25] 더군다나 삼성은 동 시기에 이승엽이라는 역대급 공격력을 지닌 1루수가 있었고 한화도 장종훈 - 김태균으로 이어지는 걸출한 1루수가 있었다. KIA의 장성호는 말 할 것고 없고 그래서 이숭용의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26] SK 와이번스소속이었던 전준호가 이숭용과 함께 데뷔한 1994년 신인 선수였다. 그러나 전준호는 부진하다가 2011 시즌 후 방출되었다. 이숭용이 가장 마지막까지 경기에 출전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간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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