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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한국군

이라크 파병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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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여론
2.1. 언론
3. 결과4. 이라크 파병의 이해득실5. 여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1. 개요

파병 병력 수로만 따지자면 3,000명이 넘는다. 따라서 병력 규모만 따지자면 한국미국, 영국에 이은 연합군의 3위 규모였다. 오스트레일리아폴란드는 전투병을 파병했지만 각각 2,000명, 200명 정도였다. 영어 위키백과의 이라크 전쟁 다국적군 관련 내용에도 한국 자이툰 부대만 따로 문서가 있을 정도.

2. 여론

한국의 경우 이라크 전쟁 초기 미국의 파병 요구에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한 찬성론이 있었다. 당시 집권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진보 세력들은 이라크전이 명분없는 침략 전쟁이므로 반대하였다. 반면 찬성 측에서는 미국이 한국과는 군사 동맹에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최우선 우방국이며 이라크에 대한 민주주의 전파 및 아랍 지역의 평화라는 깃발 아래 유럽 국가들 역시 참전 의사를 밝히는데 한국만 빠진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왕 보내는 거 전투병 파병을 보내야지 전투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긴 했는데 일부 밀덕후들이 한국군의 실전경험을 위해 기갑부대나 기계화부대를 파병해야 한다고 코리아와 같은 밀덕 사이트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 한국군 파병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이라크 전쟁 때와 달리 여긴 묻혔다.

결국 참여정부는 진보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치안 유지 및 시설재건 등 평화 지원을 위한 자이툰 부대 파병을 결정하였다. 주둔지는 아르빌 등 사실상 '쿠르드 지역'으로 정함으로써 전쟁에서는 발을 뺐다. 개입을 아예 안 하자니 미국의 눈치를 안 살필 수가 없었는데, 특히 한국은 간신히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국가를 안정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의 협력이 절실한 가운데 미국을 자극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극적으로 파병하자니 아랍 국가들의 반감을 살 것은 물론 테러의 위협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당시 참여정부의 결정은 현명한 타협안이었던 셈이다.

2.1. 언론

당시 보수 언론들도 반응이 매우 엇갈렸는데 우선 조선일보는 참전을 적극 지지하며 월간조선에서 이라크 전쟁 초기에 특집 기사로 사담 후세인을 김일성 뺨치는 독재자랍시고 상당한 분량으로 보도했으나 후세인을 미국이 지지하던 이란-이라크 전쟁 이야기라든지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즈펠드가 당시 이라크에 가서 후세인을 격려했던 이야기는 쏙 빼먹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파병지로 처음 거론되던 키르쿠크 유전지역을 취재하며 안정적이니 한국군이 주둔하고 전투병 보내도 문제없다고 하다가 키르쿠크라면 더 위험하다는 보도가 나오고 한국 정부에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쿠르디스탄 자치령이 있는 아르빌로 파병지를 옮겼고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아르빌에서도 주둔지에 여러 차레 로켓공격과 총격이 있었던걸로 철군후에 밝혀졌다.

일부 진보나 중도 성향에서는 한미동맹의 현실을 고려하여 파병을 하되, 전투병 대신 다른 유엔평화유지군 참여 처럼 공병 의료 병력만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다른 보수 언론들까지 전투병 파병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를 보냈다. 동아일보는 미국이야 중요한 우방이지만 이번 전쟁은 너무 억지라며 참전을 부정적으로 봤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도 아니지만 전투병 파병은 한국군이 연합군의 전투력 측면에선 도움이 될지 몰라도 반대로 아랍권에서 한국의 이미지 또한 나쁘게 만들어 국익적으로도 손해일 것이라 보았다. 게다가 이 전쟁은 걸프전쟁과 달리 미국과 극히 일부 동맹의 군대만 주력으로 나섰고 세계적으로도 반대가 많았다. 그래도 일단 한미동맹인지라 대충 평화유지군 파병 정도로 타협하자는 투로 노무현 정부에 대하여 이해하는 보도를 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 이후에 게릴라전이 커지면서 전쟁이 길어지자 주간동아에선 만화로 거봐, 이라크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잖아~라는 태도를 싣기도 했다. 주간동아는 이라크 전쟁 초반부에 끝없는 밀림과 수렁이 가득한 곳에 스스로 들어가는 미군을 그리면서 제대로 예견하는 시사만화를 그렸던 바 있던 만큼, 그 시사만화가도 나중에 그 밀림에서 여태 나오지 못하는 미군을 연이어 그리면서 거봐 내가 뭐랬어, 이건 시작이라고~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정말로 10여년 뒤까지 미국 골머리를 앓게 하는 이라크가 되었다.

중앙일보도 동아일보와 비슷한 보도를 하며 우방 미국이야 중요하지만 이번 전쟁은 베트남 전쟁과 달리 너무 국제적으로 부정적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고 컬럼에서도 아랍권 분위기도 생각해야 한다며 평화유지군 파병 정도만 해도 된다는 반응이었다.[1]

진보 언론인 한겨레는 전투병 파병반대이지만 역시 비전투 대민지원 병력 파병에 대해선 지지했으며, 경향신문도 전투병 파병은 반대하며 비전투 평화유지군이나 의료 및 현지 민간인에게 도움이 되는 부대라면 찬성했다. 진보계열 말고도 중도성향 신문들도 거의 이렇게 뜻을 보였기에 조선일보를 빼면 거의 모든 언론은 전투병 파병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3. 결과

그러나 이라크 전쟁이 길어지고 미군도 점차 지쳐가자 참전을 지지하던 이들도 대부분 뜻을 돌렸으며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파병 논의에 대하여 아주 친미적인 이들이나 밀리터리 계열 일부나 지지를 보였을 뿐, 깊은 수렁에 같이 들어가자는 이들은 없었고 조선일보나 한나라당도 더 이상 파병 및 전투병 참전에 대하여 침묵하게 되었다. 미군도 죽어나가는 전장에서 한국군이 파병되어 봐야 결국 수백명의 전사상자만 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적어도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의 저항세력을 사살하는 전과도 올리겠지만 피해가 아닌 결과로 승패를 결정하는 자들이 이라크 저항세력이니 의미가 없다.

결국 한국군은 쿠르드 지역에서 재건과 민심 안정에만 힘쓰다가 2008년 말 조용히 철군하는 길을 택했고, 그 덕택에 이라크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간혹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2]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군대인 페슈메르가의 저지로 대부분 막혔고, 저항세력들도 굳이 한국군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자기들과 충돌하지 않기로 작정한 군대와 굳이 정면으로 충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역 쿠르드족과 한국군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저항세력이 공격을 하여 한국군을 도발할래야 할 수도 없었다. 게릴라전의 특성상 지역에서 주둔군과 지역민간의 갈등이 커야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쿠르드 지역은 게릴라들이 설칠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2014년 이라크 내전이슬람 국가를 보면 전투병 파병은 더더욱 거론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곳에 한국군이 몇 만이 투입되어 봐야 이라크 정부군이 형편없는 이상, 한국군이 가서 막아준다고 해도,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처럼 이라크 정부군에게 무기 넘겨주고 철수한다고 해도 맥없이 무너졌던 남베트남의 사례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3] 다행히 최근 페슈메르가가 그나마 이라크에서 가장 잘 싸우는 세력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베트남 전쟁 당시의 1번 국도지역 꼴은 면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때와 달리 페슈메르가쪽이 제대로 된 역량을 갖춘 것 뿐이지만.

2015년 초중반까지는 이라크군이슬람 국가에게 일방적으로 털리고 있었지만 내전이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오합지졸이었던 이라크군의 실전 경험이 상승, 여기에 중동 각지에서 몰려든 시아파 민병대의 도움까지 더해지면서 이라크 정부 쪽으로 승기가 확실히 기울었다.

4. 이라크 파병의 이해득실

당시 이라크에서 연합군은 기존의 연합군 사령부를 2003년 6월 14일자로 제7합동통합임무부대(CJTF-7: Combined Joint Task Force-7)로 명칭 변경을 하고, 2003년 11월 기준으로 효율적인 점령 통치를 위해 이라크 18개주를 6개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각 지역은 북부 구역(아르빌등 쿠르드 자치구역, 모술), 북중부 구역(키르쿠크, 티크리트), 바그다드 구역, 서부 구역(라마디, 팔루자), 중남부 구역(나자프), 남동부 구역(나시리야, 바스라)으로 구분되었다. 광활한 면적의 다른 지역과 달리 바그다드만 그 상징성과 인구 560만 명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단일 구역으로 분류되었다.

이중에서 북쪽의 4개 지역은 미군이 관할하고, 중남부는 폴란드 다국적 사단, 남동부는 영국군이 담당하였다.

2004년 6월 말에 탄생하는 이라크 임시정부로 주권 이양에 맞추어, 5월 15일자로 제7합동통합임무부대를 해체하고 이라크 다국적군(MNF-I: Multi-National Forces in Iraq)을 창설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쿠르드 자치구를 담당하는 북부 지역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어서 기존의 미 공수101사단을 스트라이커 1개 여단만 남기고 철수시키는 것이 골자이다.

다국적군은 여전히 남쪽의 2개 지역만 담당하여
중남부 – 다국적사단(중남부): 폴란드군 주도 + 18개국 참가
남부 – 다국적사단(남부): 영국3사단 주도 + 12개국 참가
식으로 사단 명칭만 변경되었다.

한국군의 파병이 거론되자 미군은 전투병이 너무 필요한 시점이라 북중부의 키르쿠크 지역을 담당해주길 원했다. 이 지역은 이른바 수니파 삼각지역으로 이라크 내에 최대 접전 지역이다. 사실 미군 담당 4개 지역중에서 서부 구역에는 책 <팔루자 리포트>에서도 나온 라마디와 팔루자라는 지옥같은 도시가 있고, 바드다드 구역이야말로 현세에 강림한 아수라장이었다. 그에 비해 북부 지역은 이라크 자유작전에서 전투가 없던 지역으로 안정적이었다. 북부 지역에서 서쪽 모술은 북부 최대의 도시라 그 중요성 때문에 미군이 주둔 중이었고, 동쪽의 아르빌과 쿠르드 자치구는 전쟁과는 별 관련 없는 평화지대라서 미군 부대 자체가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키르쿠크 지역은 거부하고, 다국적사단의 관할 안으로도 들어가지 않았으며, 미국의 입장에서는 약간 어이없게 평화로운 쿠르드 자치구의 주도인 아르빌로 파병지를 선택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파병 목적을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이라크의 재건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쿠르드 자치구역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건할 작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보수쪽 주장인 이라크 재건 사업에 참여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는 것' 역시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당시 이라크에서는 누구든 쿠르드 족을 돕는 자들은 국물도 없다고 했는데, 한국은 ‘에이 설마~’ 하며 쿠르드 자치 지역으로 파병 간 것이다. 이 때문에 이라크 자치 정부에 단단히 찍혀서 한국 업체들은 이라크 재건사업에 참여하기가 오히려 힘들어졌다. 당시 조선일보 등에서 “이라크는 빨대만 꽂아도 석유가 나오는 곳이다”라는 주장을 했는데, 석유가 나오는 곳은 영국군 지역인 이라크 남부 지대였으며,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 자치구 전체에서의 석유 개발 사업 자체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쿠르드 자치구로 파병가는 것은 '이라크 유전 개발 사업에 참여 금지'와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다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도 그 어느 나라도 이라크 파병 대가로 유전 개발에 참여하지 못했다.

가끔 모술에 있는 다국적군 사령부에 방문하러 가거나, 모술로부터 보급품 수령할 때가 꽤나 위험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장 상황인 수니파 삼각지대, 바그다드, 또는 팔루자-라마디에 비해 모술도 별다른 전투가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어쩌다 기지로 박격포탄이 한번 날아오면 그게 신문에 날 정도였다. 초대 부대장인 황의돈의 회고록을 읽어 봐도, 이라크가 위험하다는 글만 있지 귀국할 때까지 전투 자체는 없었다. 책 후반부는 고국의 VIP들이 부대 방문을 오면 아르빌 근처를 관광시켜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온다.[4]

다국적 사령부의 전투 지역으로 가달라는 요청을 뿌리치고 굳이 외국군의 존재 자체가 필요 없는 쿠르드 자치구역으로 간 것은, 이후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비난받은 것을 생각해 볼 때 현명한 선택이었다. 다만 당시 인도적인 견지에서 이라크 재건 사업을 돕고, 우리의 맹방인 미국을 도우며, 전투 경험을 쌓고, 향후 이라크 재건 사업에서 우선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파병 갔었는데, 쿠르드 자치구로 가는 바람에 네 가지 다 망했다. 여기에 덤으로 당시 참여정부를 지지하던 세력은 보통 파병 반대 세력이었는데 이들의 지지를 한번에 잃어 이후 재임기간 내내 레임덕에 시달리게 되었다.

위의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이고 전술적으로 보자면, 당시 M1A2SEP 전차나 M2 보병전투차도 IED에 녹아나는 막장 상황에서 한국군은 60 트럭 몇 대 몰고 이라크에 나타나서, 다국적군 사령부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에 미군 측에서 긴급하게 한국군의 안전을 위해 장갑 험비와 지뢰방호차량인 MRAP등 장갑차량을 제공하였다. 사실 장갑판 두른 60 트럭은 양반이고 파병 초기에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지만 현대 마이티에 방탄판 붙이고 다니기까지 해서 국내 언론에게도 신나게 까였다.[5]

사실 미군 및 다국적군 역시 초기에 험비나 전술차량 차문에 방탄복을 덕테이프로 붙이고 다녔긴했다. 그런데 한국군은 파병이 1년 가량 지연되어 미군의 실수를 다 보면서도 파병 1진이 이렇게 맨몸으로 온 것이다. 그래도 이후 K200 APC 계열 장갑차와 바라쿠다 장갑차로 대체되었다. K200과 바라쿠다는 RPG 등에 의한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슬랫아머를 두르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으며 바라쿠다는 철군시점까지 운영되었다.[6] 그런데 누차 다시 말하지만 쿠르드 자치구역은 절대적인 안전구역이다. 60트럭도 총알 한방 맞지 않았다.

5. 여담

2003년 11월 정부가 이라크에 국군 자이툰 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이라크 파병 결정이 침략적 전쟁 부인을 규정한 헌법에 위배되고 직업군인이 아닌 일반사병을 파견, 헌법상 국가안전보장 및 국방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헌법소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라크 파병 결정이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통치행위에 해당하여 사법심사가 자제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해당 헌법소원은 각하되었다.[7]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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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은 베트남 전쟁도 이라크 전쟁만큼 반전 분위기가 강했다. 이라크전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은 상당수 미국인들조차 부정적으로 보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언론들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단 한국군을 안 보내면 미군이 빠져서 안보 공백이 심각해질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할 충분한 대의명분도 있었다. 6.25 전쟁에서 북한에 맞서 싸웠던 한국으로서는 자유진영의 남베트남과 공산진영의 북베트남 간의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이 당연히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6.25 때 여러나라들의 참전으로 이겨냈었기 때문에 공산세력과 싸우는 남베트남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그래서 6.25가 끝난지 몇년 지나지도 않은 1950년대 말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하겠다는 의지를 미국에 피력하기도 했다.[2] 02군번 육군 장교 중 한 명이 자이툰 부대 모 여단 여단장 전속부관으로 근무했을 당시, 여단장 집무실 근처에 박격포탄이 떨어져서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3]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주둔했던 1번 국도지역의 남베트남 지역은 되레 인구가 유입되어 증가했고 밤에도 민간인들이 활동할수 있는 지역일 정도였다. 게릴라인 베트콩이 한국군을 겁내서 활동에 소극적인 지역이 되어버리자 생긴 일이었는데 문제는 한국군이 철수하자마자 그동안 숨죽였던 베트콩들이 들고 일어났고 남베트남군은 통제도 못했다. 게다가 북베트남군의 남진으로 싸워보지도 않고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그 지역들을 내줘야 했다.[4] 황의돈 부대장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승승장구하였지만, MB정권이 들어서면서 부동산 문제로 사퇴한다. 한겨레에 의하면 MB의 포항 동지상고 후배인 김상기를 육군참모총장으로 만들기 위해 뒤에서 꾸민 짓이라고 한다. 작전명 ‘황의돈 퇴출 일주일 전격전’[5] 이동 중에 미군 전차도 줄줄이 작살나는데, 한국군은 60트럭 타고 모술까지 위험하게 보급품 받으러 다녔다. 특별히 파병용으로 오픈형인 60트럭 화물칸에 철판을 키 높이로 둘러 쳐놓기는 하였다. 다만 위는 뚫려 있었고, 이거야 이라크 반군들이 항공기를 갖고 있지 않으니 그렇다 쳐도 지뢰를 막는다든지 하는 개념이 없었던 건 심각한 문제였다.[6] K200은 파병 말기에 미리 철수되었다.[7] 헌법재판소 2004.4.29. 2003헌마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