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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3:45:41

유벤투스 FC/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유벤투스 FC
1. 개요2. 역대 엠블럼3. 초창기4. 세리에 A 개편 및 국내 강자로의 부상, 첫 전성기5. 보니페르티 시대 - 유럽 최고의 구단으로의 성장, 두번째 전성기6. 리피 시대 - 세계 최강의 구단, 세번째 전성기7. 카펠로 시대, 세계 최고의 전력을 갖춘 팀, 그러나..
7.1. 2004-05 시즌7.2. 2005-06 시즌
8. 칼치오폴리와 그 이후
8.1. 세리에 B에서 보낸 2006-07 시즌8.2. 2007-08 시즌8.3. 2008-09 시즌
9. 페짜델 시절
9.1. 악몽의 2009-10 시즌9.2. 끊이지 않는 부진의 2010-11 시즌
10. 콘테 시대 - 제왕의 귀환11. 알레그리 시대 - 리그 8연패, 역사그리12. 사리 시대13. 피를로 시대14. 알레그리 2기15. 모타 시대16. 역대 감독17. 역대 회장18. 역대 유니폼19. 울트라스 응원단 부적절 응원 징계 사례

1. 개요

유벤투스 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역대 엠블럼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0,#e5e5e5><tablebgcolor=#000,#e5e5e5> 파일:유벤투스 FC 로고(화이트).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svg유벤투스 FC
역대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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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8px; margin-bottom:-6px"
<rowcolor=#fff,#000>1905~19211921~19291929~19311931~19771977~1982
<rowcolor=#fff>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05~1921).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21~1929).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29~1931).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31~1977).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77~1982).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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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2~1989).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2004~2017).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2017~2020).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 화이트(2017~2020).svg 파일:유벤투스 FC 로고.svg파일:유벤투스 FC 로고(화이트).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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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창기

파일:Sport-Club_Juventus_1897-1898.jpg
1897-98 시즌 촬영된 유벤투스의 첫 사진

파일:external/bianconeri.tripod.com/juvepanca1.jpg
유벤투스의 역사가 시작된 벤치

유벤투스의 창단은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리노의 세 고등학생이 한 벤치[1]에서 영국과 그들이 살던 토리노에서 한창 대유행이던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구단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와 만들게 된 것이 구단 창단의 계기이다. 13명의 공동 창립자 중 에우제니오 칸파리(Eugenio Canfari)가 초대 구단주를 맡았는데, 당시 그는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1년 후 형인 엔리코 칸파리(Enrico Canfari)[2]가 구단주 자리를 이어받아 3년간 역임하였다. 라틴어로 '젊은이'을 뜻하는 클럽명 유벤투스는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클럽이라는 역사로부터 비롯되었다.

1905년 첫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당시 구단주이던 알프레드 딕(Alfred Dick)이 승부에 집착하는 구단 운영 방향에 환멸을 느껴 반대파를 이끌고 새로운 클럽을 창설하게 된다. 이 클럽이 현재 유벤투스와 지역 라이벌 관계에 있는 토리노 FC이다. 이후 첫 우승 시 핵심 플레이어로 활약했던 카를로 비토리오 바레티(Carlo Vittorio Varetti)를 비롯한 몇 명의 구단주를 거치며 고전하였으며, 이후 다시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25-26 시즌이 되어서였다.

참고 영상 자료




5탄 - 1996/97 시즌
유벤투스의 100년 역사를 소개하는 5부작 다큐멘터리 비디오 (1997)

4. 세리에 A 개편 및 국내 강자로의 부상, 첫 전성기

1929년 세리에 A가 프로화 되면서 라운드로빈 토너먼트 형태로 개편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제노아 CFC가 9회 우승, FC 프로 베르첼리 1892가 7회 우승으로 양강을 이루고 있었고, 유벤투스 2회, AC 밀란 3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회 등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강호들은 그다지 강한 면모를 보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초창기에 비틀대던 유벤투스가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엑소르피아트를 이끌고 있는 아녤리 가문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이다. 1923년 피아트 그룹 창립자의 조반니 아녤리의 아들인 에도아르도 아녤리가 구단주로 취임하여 모기업의 돈을 클럽에 투자하면서 유벤투스는 강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리그 개편 후 첫 우승은 인테르가 차지하였으나, 그 다음 시즌부터 유벤투스는 리그 5연패를 달성하며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당시 유벤투스 선수들은 1934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월드컵에도 다수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우승을 거두면서 이탈리아가 세계 축구계에서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 하프백 루이스 몬티, 아웃사이드 레프트 라이문도 오르시는 1934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전경기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 5연패 당시 주전들의 은퇴 이후에 유벤투스는 침체기를 겪게 된다. 유벤투스의 수뇌부도 바보들은 아니어서 주전들의 노쇠화를 예견했기에 나름 대비책을 세워놓았지만 각종 이유들이 안 좋은쪽으로 풀리는 바람에 스쿼드의 질이 떨어져버렸다. 먼저 회장 에도아르도 아녤리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장 큰 이유였다. 회장의 사망 이후에 유벤투스는 긴축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팀의 핵심 공격수 조반니 페라리암브로지아나 인테르에 팔아야 했다. 그나마 유벤투스에는 시즌 득점왕을 포함한 세리에 A의 최연소 득점 기록들을 갈아치워서 유벤투스와 이탈리아 대표팀의 미래를 이끌 재목으로 평가받았던 신예 공격수 펠리체 보렐[3]이 있었지만 보렐마저 5연패 마지막 시즌부터 유리몸 신세가 되어버리면서 유벤투스에서 A급 공격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수비진은 그나마 사정이 나아서 비르지니오 로세타의 공백은 알프레도 포니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의 공백은 피에트로 라바가 성공적으로 메워줬지만 하프백 루이스 몬티와 루이지 베르톨리니,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의 공백 역시 메우지 못했다. 이렇게 유벤투스는 선배들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해 세리에 A의 우승권 전력에서 멀어졌다.

유벤투스의 5연패 이후 몇 차례 볼로냐 FC와 인테르가 우승을 주고받다가 토리노 FC가 리그 5연패를 차지하며 그란데 토리노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1949년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추락하는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1968년 자국에서 개최된 유로 우승 이전까지의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 축구계는 침체기를 맞게 된다. 이후 세리에 A는 유벤투스-밀란-인테르의 트로이카 체제로 굳어져 1950년 이후로는 거의 이 세 클럽이 우승을 나누어 먹듯 했다.[4]

5. 보니페르티 시대 - 유럽 최고의 구단으로의 성장, 두번째 전성기

파일:boniperti.jpg

당시 유럽 축구는 요한 크루이프프란츠 베켄바워 등이 이끈 토탈 풋볼이라는 거대한 전술적 흐름으로 이탈리아 전통의 카테나치오는 경쟁력이 없어지고 사장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탈리아 클럽은 유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과를 못 내고 있었다.

''''''
파일:AFC 아약스 로고(1928~1991, 레드&화이트).svg 아약스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31~1977).svg 유벤투스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녹아웃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 1라운드 파일: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로고(1972~1993).svg 마르세유 3:1 0:1 (원정) 3:0 (홈)
파일:PFC CSKA 소피아 로고(1968~1985).svg CSKA 소피아 6:1 3:1 (원정) 3:0 (홈) 2라운드 파일:1. FC 마그데부르크 로고.svg 마그데부르크 2:0 1:0 (홈) 1:0 (원정)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79~1996).svg 바이에른 뮌헨 5:2 4:0 (홈) 1:2 (원정) 준준결승 파일:우이페슈트 FC 로고(1972~1991).svg 우이페슈트 도저 2:2
(원정 다득점)
0:0 (홈) 2:2 (원정)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1941~1997).svg 레알 마드리드 3:1 2:1 (홈) 1:0 (원정) 준결승 파일:더비 카운티 로고.svg 더비 카운티 3:1 3:1 (홈) 0:0 (원정)
5승 0무 1패 (14득점 4실점) 합계 성적 4승 3무 1패 (10득점 4실점)
◀ 1971-72 결승 ▶ 1973-74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72-73 유러피언컵 결승
1973년 5월 30일 수요일 20:30 (CEST)
'''
스타디온 츠르베나 즈베즈다 (베오그라드)
주심: 밀리보예 구굴로비치 (유고슬라비아)
관중: 89,484명
파일:AFC 아약스 로고(1928~1991, 레드&화이트).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31~1977).svg
아약스 유벤투스
1 0
<rowcolor=#000,#fff> 5' 요니 렙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
-
◀ 1972 유러피언컵 결승전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1974 유러피언컵 결승전


하지만 1970년대부터 유벤투스는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를 회장으로 선임하고 체스트미르 비츠팔레크 감독[5]이 지휘 아래 2번의 스쿠데토를 획득하였고, 유러피언컵에서 마침내 첫번째 유러피언컵 결승 진출을 달성하였으나 AFC 아약스에 패하며 우승은 실패하였다. 그래도 점차 밀란-인테르와의 우승 횟수 격차를 벌려 나가기 시작하면서,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부임한 1976-77 시즌 UEFA컵을 차지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시작, 유럽 수준의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구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회장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조반니 트라파토니는 토털 풋볼의 혁신성과 고전적인 카테나치오를 융합하는 장기적인 전술적 프로젝트와 이에 따라 대대적인 유망주 발굴과 유망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카테나치오와 토탈 풋볼의 혼합 전술이 바로 조나 미스타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주세페 푸리노, 로베르토 베테가, 파올로 로시 등 유스 출신 플레이어들을 발굴했고, 타 팀으로부터 가에타노 시레아, 안토니오 카브리니,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프랑코 카우시오 등 플레이어들을 영입하면서 탈바꿈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발굴한 유망주들은 국가대표팀에서 볼로코-유베라는 별명을 가지고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이탈리아 우승 주역이 되었다. 결승전 선발의 8명이 유벤투스 선수였으니 이 프로젝트가 이탈리아 전반에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발롱도르 및 리그 득점왕 3연속 수상에 빛나는 미드필더 미셸 플라티니가 입단하면서 1980-81 시즌을 기점으로 유벤투스는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우뚝서게 된다.

''''''
파일:함부르크 SV 로고.svg 함부르크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2~1989).svg 유벤투스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녹아웃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파일:BFC 디나모 베를린 로고.svg 디나모 베를린 3:1 1:1 (원정) 2:0 (홈) 1라운드 파일:흐비도우레 IF 로고.svg 흐비도우레 7:4 4:1 (원정) 3:3 (홈)
파일:올림피아코스 FC 로고(1980~1985).svg 올림피아코스 5:0 1:0 (홈) 4:0 (원정) 2라운드 파일:스탕다르 리에주 로고(1980~2013).svg 스탕다르 리에주 3:1 1:1 (홈) 2:0 (원정)
파일:FC 디나모 키이우 로고(1970~1988).svg 디나모 키예프 4:2 3:0 (홈) 1:2 (원정) 준준결승 파일:아스톤 빌라 FC 로고(1973~1987).svg 아스톤 빌라 5:2 2:1 (원정) 3:1 (홈)
파일:레알 소시에다드 로고(1982~1997).svg 레알 소시에다드 3:2 1:1 (원정) 2:1 (홈) 준결승 파일:비제프 우치 로고.svg 비제프 우치 4:2 2:0 (홈) 2:2 (원정)
5승 2무 1패 (15득점 5실점) 합계 성적 5승 3무 0패 (19득점 9실점)
◀ 1981-82 결승 ▶ 1983-84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82-83 유러피언컵 결승
1983년 5월 25일 수요일 21:15 (EEST)
'''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 (아테네)
주심: 니콜라에 라이네아 (루마니아)
관중: 73,500명
파일:함부르크 SV 로고(투명 배경).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2~1989, 하얀 배경).svg
함부르크 유벤투스
1 0
<rowcolor=#000,#fff> 9' 펠릭스 마가트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
-
◀ 1982 유러피언컵 결승전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1984 유러피언컵 결승전


1980-81, 1981-82 시즌에 스쿠데토를 연달아 들어올린것에 이어 1982-83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을 달성하였고, 1983-84 시즌에는 UEFA 컵위너스컵에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2~1989).svg 유벤투스 파일:리버풀 FC 라이버 버드 로고(골드).svg 리버풀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녹아웃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파일:일베스 로고.svg 일베스 6:1 4:0 (원정) 2:1 (홈) 1라운드 파일:레흐 포즈난 로고(1957~1994).svg 레흐 포즈난 5:0 1:0 (원정) 4:0 (홈)
파일: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로고.svg 그라스호퍼 6:2 2:0 (홈) 4:2 (원정) 2라운드 파일:SL 벤피카 로고(1930~1999).svg 벤피카 3:2 3:1 (홈) 0:1 (원정)
파일:AC 스파르타 프라하 로고(1979~1990).svg 스파르타 프라하 3:1 3:0 (홈) 0:1 (원정) 준준결승 파일:FK 아우스트리아 빈 로고(1977~1995).svg 아우스트리아 빈 5:2 1:1 (원정) 4:1 (홈)
파일:FC 지롱댕 드 보르도 로고(1980~1990).svg 보르도 3:2 3:0 (홈) 0:2 (원정) 준결승 파일:파나티나이코스 FC 로고(1959~1985).svg 파나티나이코스 5:0 4:0 (홈) 1:0 (원정)
6승 0무 2패 (18득점 6실점) 합계 성적 6승 1무 1패 (18득점 4실점)
◀ 1983-84 결승 ▶ 1985-86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84-85 유러피언컵 결승
1985년 5월 29일 수요일 20:15 (CEST)
'''
헤이젤 스타디움 (브뤼셀)
주심: 안드레 다이나 (스위스)
관중: 58,000명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2~1989, 하얀 배경).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리버풀 FC 라이버 버드 로고(골드, 빨간 배경).svg
유벤투스 리버풀
1 0
<rowcolor=#000,#fff> 58'(PK) 미셸 플라티니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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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 유러피언컵 결승전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1986 유러피언컵 결승전


1984-85 시즌 유러피언컵 타이틀까지 획득하면서, UEFA가 개최하는 모든 유럽 대항전 대회를 최초로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해 1988년 UEFA에서는 UEFA 플라크라는 기념패를 수여하였다.

파일:attachment/유벤투스 FC/Plaque.jpg
1988년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대항전 조추첨 행사에서 UEFA 4대 회장인 자크 조르주(왼쪽)가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에게 UEFA 플라크를 수여하는 장면.

단 하나 안타까운 점은 유러피언 컵 우승 당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6] 리버풀의 훌리건들이 일으킨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가 UEFA로부터 5년간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음으로써 이후 세리에 A의 위상이 급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 이는 세리에 A 전체로 보면 호재였으나 유벤투스 입장에서는 악재가 되었는데, 정점을 찍은 트라파토니 감독이 사임한 이후 유벤투스는 연이어 우승에 실패하였고, 그 사이 급성장한 밀란이 리그 및 유럽을 제패한 기세는 다시 모셔온 트라파토니 감독도 막을 수 없었다. 트라파토니가 유벤투스로 복귀한 첫시즌에 리그는 AC 밀란에게 밀려서 준우승,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파르마 AC에게 패하여 준우승을 거두었고, 이후 2시즌 동안 AC 밀란이 3연패를 성공하고 있었을 때, 트라파토니는 리그 4위, 준우승이라는 다소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과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준결승 탈락, 2라운드 탈락이라는 부진을 겪어야 했다. 그와중에 1992-93 시즌 UEFA컵에서 트라파토니의 유벤투스는 SL 벤피카, 파리 생제르맹 FC,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연달아 꺾고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하는데에 성공하였다.

파일:attachment/유벤투스 FC/Heysel.jpg

6. 리피 시대 - 세계 최강의 구단, 세번째 전성기

파일:Champions League 1996.jpg

''''''
파일:AFC 아약스 로고.svg 아약스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 유벤투스
대진 결과 조별 리그 대진 결과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1941~1997).svg 레알 마드리드 1:0 (홈) 경기일 1 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 도르트문트 3:1 (원정)
파일:페렌츠바로시 TC 로고(1995~1999).svg 페렌츠바로시 5:1 (원정) 경기일 2 파일: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로고(1991~1998).svg 스테아우아 3:0 (원정)
파일: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로고.svg 그라스호퍼 3:0 (원정) 경기일 3 파일:레인저스 FC 로고(1991~2020).svg 레인저스 4:1 (홈)
파일: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로고.svg 그라스호퍼 0:0 (홈) 경기일 4 파일:레인저스 FC 로고(1991~2020).svg 레인저스 4:0 (원정)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1941~1997).svg 레알 마드리드 2:0 (원정) 경기일 5 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 도르트문트 1:2 (원정)
파일:페렌츠바로시 TC 로고(1995~1999).svg 페렌츠바로시 4:0 (홈) 경기일 6 파일: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로고(1991~1998).svg 스테아우아 0:0 (홈)
D조 1위 (5승 1무 0패 승점 16점) 조별 리그 순위 C조 1위 (4승 1무 1패 승점 13점)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녹아웃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 도르트문트 3:0 2:0 (원정) 1:0 (홈) 준준결승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1941~1997).svg 레알 마드리드 2:1 0:1 (원정) 2:0 (홈)
파일:파나티나이코스 FC 로고.svg 파나티나이코스 3:1 0:1 (홈) 3:0 (원정) 준결승 파일:FC 낭트 로고(1988~1997).svg 낭트 4:3 2:0 (원정) 2:3 (홈)
8승 1무 1패 (31득점 2실점) 합계 성적 6승 1무 3패 (21득점 6실점)
◀ 1994-95 결승 ▶ 1996-97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95-96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1996년 5월 22일 수요일 20:30 (CEST)
'''
스타디오 올림피코 (로마)
주심: 마누엘 디아스 베가 (스페인)
관중: 70,000명
파일:AFC 아약스 로고_red.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
아약스 유벤투스
1 1
<rowcolor=#000,#fff> 41' 야리 리트마넨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13' 파브리치오 라바넬리
-
◀ 1995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1997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승부차기
아약스 <colcolor=#000,#ddd> 2 : 4 유벤투스
선축
(GK: 에드윈 반 데 사르)
후축
(GK: 안젤로 페루치)
에드가 다비즈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1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치로 페라라
야리 리트마넨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2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잔루카 페소토
아르놀트 숄텐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3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미켈레 파도바노
소니 실로이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4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블라디미르 유고비치


''''''
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 도르트문트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 유벤투스
대진 결과 조별 리그 대진 결과
파일:비제프 우치 로고.svg 비제프 우치 2:1 (홈) 경기일 1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1973~1998).svg 맨 유나이티드 1:0 (홈)
파일: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로고(1991~1998).svg 스테아우아 3:0 (원정) 경기일 2 파일:페네르바흐체 SK 로고.svg 페네르바흐체 1:0 (원정)
파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로고(1980~2016).svg 아틀레티코 1:0 (원정) 경기일 3 파일:SK 라피트 빈 로고(1968~1998).svg 라피트 빈 1:1 (원정)
파일: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로고(1980~2016).svg 아틀레티코 1:2 (홈) 경기일 4 파일:SK 라피트 빈 로고(1968~1998).svg 라피트 빈 5:0 (홈)
파일:비제프 우치 로고.svg 비제프 우치 2:2 (원정) 경기일 5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1973~1998).svg 맨 유나이티드 1:0 (원정)
파일: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로고(1991~1998).svg 스테아우아 5:3 (홈) 경기일 6 파일:페네르바흐체 SK 로고.svg 페네르바흐체 2:0 (홈)
B조 2위 (4승 1무 1패 승점 13점) 조별 리그 순위 C조 1위 (5승 1무 0패 승점 16점)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녹아웃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파일:AJ 오세르 로고(1992~1997).svg 오세르 4:1 3:1 (홈) 1:0 (원정) 준준결승 파일:로센보르그 BK 로고(1990~2007).svg 로센보르그 3:1 1:1 (원정) 3:0 (홈)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1973~1998).svg 맨 유나이티드 2:0 1:0 (홈) 1:0 (원정) 준결승 파일:AFC 아약스 로고.svg 아약스 2:0 2:1 (원정) 4:1 (홈)
8승 1무 1패 (20득점 9실점) 합계 성적 8승 2무 0패 (21득점 4실점)
◀ 1995-96 결승 ▶ 1997-98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96-97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1997년 5월 28일 수요일 20:30 (CEST)
'''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 (뮌헨)
주심: 샨도르 풀 (헝가리)
관중: 59,000명
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
도르트문트 유벤투스
3 1
<rowcolor=#000,#fff> 29', 34' 카를하인츠 리들레 (A. 29' 폴 램버트, 34' 안드레아스 묄러)
71' 라르스 리켄 (A. 안드레아스 묄러)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65'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A. 알렌 복시치)
-
◀ 1996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1998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 유벤투스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1997~2001).svg 레알 마드리드
대진 결과 조별 리그 대진 결과
파일:페예노르트 로테르담 로고(1997~2008).svg 페예노르트 5:1 (홈) 경기일 1 파일:로센보르그 BK 로고(1990~2007).svg 로센보르그 4:1 (홈)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1973~1998).svg 맨 유나이티드 2:3 (원정) 경기일 2 파일:FC 포르투 로고(1995~2002).svg 포르투 2:0 (원정)
파일:FC 코시체 로고.svg 코시체 1:0 (원정) 경기일 3 파일:올림피아코스 FC 로고(1995~2001).svg 올림피아코스 5:1 (홈)
파일:FC 코시체 로고.svg 코시체 3:2 (홈) 경기일 4 파일:올림피아코스 FC 로고(1995~2001).svg 올림피아코스 0:0 (원정)
파일:페예노르트 로테르담 로고(1997~2008).svg 페예노르트 0:2 (원정) 경기일 5 파일:로센보르그 BK 로고(1990~2007).svg 로센보르그 0:2 (원정)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1973~1998).svg 맨 유나이티드 1:0 (홈) 경기일 6 파일:FC 포르투 로고(1995~2002).svg 포르투 4:0 (홈)
B조 2위 (4승 0무 2패 승점 12점) 조별 리그 순위 D조 1위 (4승 1무 1패 승점 13점)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녹아웃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파일:FC 디나모 키이우 로고(1995~2010).svg 디나모 키이우 5:2 1:1 (홈) 4:1 (원정) 준준결승 파일:바이어 04 레버쿠젠 로고.svg 레버쿠젠 4:1 1:1 (원정) 3:0 (홈)
파일:AS 모나코 FC 로고(1962~2002).svg 모나코 6:4 4:1 (홈) 2:3 (원정) 준결승 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 도르트문트 2:0 2:0 (홈) 0:0 (원정)
6승 2무 2패 (23득점 14실점) 합계 성적 6승 3무 1패 (21득점 5실점)
◀ 1996-97 결승 ▶ 1998-99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97-98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1998년 5월 20일 수요일 20:45 (CEST)
'''
암스테르담 아레나 (암스테르담)
주심: 헬무트 크루크 (독일)
관중: 48,500명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1997~2001).svg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0 1
<rowcolor=#000,#fff>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66'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
◀ 1997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1999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이러한 침체기를 이겨내고 다시 한 번 유벤투스에 전성기를 가져온 감독이 마르첼로 리피이다. 리피 감독이 부임한 1994-95 시즌 9년만에 스쿠데토를 되찾아온 것을 비롯, 4년의 기간 동안 유벤투스는 스쿠데토 3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3회 연속 진출하여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차지하였고, 이는 플라티니 시절을 뛰어넘는 클럽 최고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1999년 UEFA 클럽 랭킹을 보면 2위의 약 1.3배 포인트를 획득했는데, 이 정도로 압도적인 1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나 당시 AS 로마 감독이었던 즈데넥 제만의 의혹 제기로 인해 약 7년 반에 걸친 조사 및 법정 싸움을 겪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유벤투스 금지약물 복용 의혹 문서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거듭되는 유럽 대항전 및 월드컵으로 인한 체력 부족, 에이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무릎 부상 및 위 사건의 여파로 인해 1998-99 시즌을 7위로 부진하게 마친 유벤투스는 리피 감독을 카를로 안첼로티로 교체하고 기존의 델피에로, 필리포 인자기, 지네딘 지단, 에드가 다비즈, 안토니오 콘테, 알레시오 타키나르디, 치로 페라라, 파올로 몬테로, 잔루카 페소토, 마크 율리아노 등에 에드윈 반 데 사르, 잔루카 잠브로타 등을 보강, 완벽에 가까운 팀을 완성하며 7공주 중 일약 우승 후보로 도약하였다. 그러나 1999-2000 시즌은 마지막 경기를 AC 페루자에게 내주며 SS 라치오에 역전 우승을 허용하였고, 2000-01 시즌은 전성기의 프란체스코 토티를 내세운 AS 로마가 내내 선두를 지켜 리그 우승도 실패,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충격을 맞는다. 당시 지단은 2006년 월드컵 결승 예고편을 선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다비즈의 금지약물 검출 및 출장 정지로 인해 팀 전술 수정이 불가피해진 유벤투스는 다시 리피로 사령탑을 교체, 지단과 인자기, 반 데 사르 등을 팔고 SS 라치오에서 파벨 네드베드, 마르셀로 살라스파르마 AC에서 잔루이지 부폰릴리앙 튀랑 등을 영입하는 역대급 이적시장 행보를 보인 끝에 탄탄한 팀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다시 우승을 차지하였다.

''''''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 유벤투스 파일:AC 밀란 로고.svg 밀란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예선 라운드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 3차 예선 파일:FC 슬로반 리베레츠 로고.svg 슬로반 리베레츠 2:2
(원정 다득점)
1:0 (홈) 1:2 (원정)
대진 결과 1차 조별 리그 대진 결과
파일:페예노르트 로테르담 로고(1997~2008).svg 페예노르트 1:1 (원정) 경기일 1 파일:RC 랑스 로고(2001~2014).svg 랑스 2:1 (홈)
파일:FC 디나모 키이우 로고(1995~2010).svg 디나모 키이우 5:0 (홈) 경기일 2 파일: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로고.svg 데포르티보 4:0 (원정)
파일: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뉴캐슬 2:0 (홈) 경기일 3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2002~2017).svg 바이에른 뮌헨 2:1 (홈)
파일: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뉴캐슬 0:1 (원정) 경기일 4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2002~2017).svg 바이에른 뮌헨 2:1 (원정)
파일:페예노르트 로테르담 로고(1997~2008).svg 페예노르트 2:0 (홈) 경기일 5 파일:RC 랑스 로고(2001~2014).svg 랑스 1:2 (원정)
파일:FC 디나모 키이우 로고(1995~2010).svg 디나모 키이우 2:1 (홈) 경기일 6 파일: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로고.svg 데포르티보 1:2 (홈)
E조 1위 (4승 1무 1패 승점 13점) 조별 리그 순위 G조 1위 (4승 0무 2패 승점 12점)
대진 결과 2차 조별 리그 대진 결과
파일: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로고.svg 데포르티보 2:2 (원정) 경기일 1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svg 레알 마드리드 1:0 (홈)
파일:FC 바젤 로고.svg 바젤 4:0 (홈) 경기일 2 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 도르트문트 1:0 (원정)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맨 유나이티드 1:2 (원정) 경기일 3 파일:FC 로코모티프 모스크바 로고.svg 로코모티프 모스크바 1:0 (홈)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맨 유나이티드 0:3 (홈) 경기일 4 파일:FC 로코모티프 모스크바 로고.svg 로코모티프 모스크바 1:0 (원정)
파일: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로고.svg 데포르티보 3:2 (홈) 경기일 5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svg 레알 마드리드 1:3 (원정)
파일:FC 바젤 로고.svg 바젤 1:2 (원정) 경기일 6 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 도르트문트 0:1 (홈)
D조 2위 (2승 1무 3패 승점 7점) 조별 리그 순위 C조 1위 (4승 0무 2패 승점 12점)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녹아웃 대진 합계 1차전 2차전
파일:FC 바르셀로나 로고.svg 바르셀로나 3:2 1:1 (홈) 2:1 (원정) 준준결승 파일:AFC 아약스 로고.svg 아약스 3:2 0:0 (원정) 3:2 (홈)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svg 레알 마드리드 4:3 1:2 (원정) 3:1 (홈) 준결승 파일: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로고(1999~2007).svg 인테르 1:1
(원정 다득점)
0:0 (홈) 1:1 (원정)
8승 3무 5패 (30득점 19실점) 합계 성적 10승 2무 5패 (23득점 15실점)
◀ 2001-02 결승 ▶ 2003-04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2002-03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2003년 5월 28일 수요일 19:45 (BST)
'''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
주심: 마르쿠스 메르크 (독일)
관중: 62,315명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9~2004).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AC 밀란 로고.svg
유벤투스 밀란
0 0
<rowcolor=#000,#fff>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
Player of the Match: 파올로 말디니
◀ 2002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200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승부차기
유벤투스 <colcolor=#000,#ddd> 2 : 3 밀란
선축
(GK: 잔루이지 부폰)
후축
(GK: 지다)
다비드 트레제게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1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세르지뉴
알레산드로 비린델리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2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클라렌스 세도르프
마르셀로 살레야타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3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카카 칼라제
파올로 몬테로 파일:승부차기 실패 아이콘.svg 4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알레산드로 네스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5 파일:승부차기 성공 아이콘.svg 안드리 셰브첸코


리피는 그 뒤로도 2002-03 시즌 리그 우승과 네드베드의 눈물로 유명한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2003-04 시즌 리그에서 3위에 그쳤고 챔피언스리그는 16강에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1,2차전 모두 1-0 패배를 당하며 실망스러운 시즌을 치렀다. 코파 이탈리아마저 결승에서 SS 라치오를 상대로 1차전 2-0 패배, 2차전 2-2 무승부로 준우승에 그쳐 유벤투스는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리피는 시즌 종료 후 공석이 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7. 카펠로 시대, 세계 최고의 전력을 갖춘 팀, 그러나..

리피의 빈 자리는 AS 로마 감독이었던 파비오 카펠로가 이어받아 이탈리아 대표팀 주장 파비오 칸나바로,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에메르송, 그리고 유로 2004에서의 활약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린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까지 영입하며 다시 유럽을 제패하기 위해 팀을 더욱 강화했다.

파일:attachment/유벤투스 FC/ibra-squad.jpg

이브라히모비치가 구상한 드림팀. 당시 호나우두 대신 다비드 트레제게, 파올로 말디니 자리엔 막 성장하기 시작한 유망주 조르조 키엘리니가 있었을 뿐,[7] 나머지 멤버들은 그대로인 말 그대로 드림팀이었다.[8]

7.1. 2004-05 시즌

2004-05 시즌 유벤투스는 리그에서 67득점 27실점으로 최다득점, 최소실점을 기록하며 AC 밀란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1위를 차지했다. 34라운드까지 승점 동률이었으나 35라운드 산 시로에서 열린 밀란과의 결정적인 승부에서 다비드 트레제게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면서 유리한 고지에 올랐고 결국 37라운드에서 28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코파 이탈리아와 챔피언스 리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코파 이탈리아는 16강에서 리그 최하위 아탈란타 BC에 덜미를 잡혔고, 챔피언스리그는 조별리그 1위 통과 후[9]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1차전 1-0 패배에도 불구하고 2차전에서 연장전 끝에 2-0으로 뒤집으며 승리했으나 8강에서 1985년 헤이젤 참사 우승 이후 20년 만에 상대한 리버풀 FC에 1차전 원정에서 1-2 패배, 2차전 홈경기에서 0-0 무승부에 그쳐 탈락했다.

7.2. 2005-06 시즌

2005-06 시즌에는 조르조 키엘리니파트릭 비에이라를 영입했다.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인테르에 1-0 패배를 당하며 시작했다. 그러나 세리에 A에서는 개막 9연승 이후 10라운드에서 AC 밀란에 3-1 패배를 당했으나 이후 28경기에서 단 한 경기도 패배하지 않으면서 2위 AC 밀란을 승점 3점차로 따돌리고 리그 2연패 및 29번째 스쿠데토를 이루었다. 다만 코파이탈리아에서는 8강에서 AS 로마에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8강에서 탈락하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챔피언스리그에서 조별리그 1위[10]로 마친 데 이어 16강에서 독일의 SV 베르더 브레멘을 상대로 원정 1차전에서 3-2 역전패, 2차전 홈경기에서 2-1 극적인 역전승[11]을 거둬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해 가까스로 승리한 뒤 8강에서 아스날 FC를 상대했다. 전 아스날 주장이었던 비에이라의 친정팀 아스날과의 맞대결로 주목받았으나 유벤투스는 비에이라의 자리를 대체한 세스크 파브레가스에게 중원을 압도당하면서 1차전 원정경기에서 2-0 완패를 당했고 2차전 홈경기에서 0-0 무승부에 그치며 다시 한 번 8강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카펠로 체제에서 이룬 리그 2연패는 칼초폴리 사태로 인해 무효화되었다. 2004-05 시즌은 리그 우승 박탈 및 우승 없음 처리되었고, 2005-06 시즌은 우승 박탈과 강등 조치 및 스쿠데토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게 돌아갔다.

8. 칼치오폴리와 그 이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칼치오폴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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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세리에 B에서 보낸 2006-07 시즌

칼치오폴리 스캔들로 유벤투스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세리에 B로 강등당했고 2004-05 시즌 우승은 공석, 2005-06 시즌 우승은 인테르에게 넘어갔고, 감독 포함 구성원의 상당수가 이적을 했다. 그러면서 세리에 A 유일의 개근팀 타이틀은 인테르만 가지게 됐다. 베스트 11 중에 6명이 떠났는데 사이좋게 두 명씩 빅클럽으로 갔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파트리크 비에라는 인테르로, 릴리앙 튀랑잠브로타는 바르셀로나로, 파비오 칸나바로에메르송파비오 카펠로 감독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로 향했다. 팀에 남은 선수는 델 피에로, 네드베드, 부폰, 트레제게, 제비나, 카모라네시, 키엘리니, 비린델리 정도...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고 디디에 데샹이 감독을 맡았다.

당초 1차 판정에서 유벤투스는 세리에 C 강등에다 무려 승점 30점을 감점당했다. 2차 판정에서 승점 감점이 17점으로 줄어들었으나 세리에 C 대신 세리에 B에서 시즌을 맞이했다.

리그 개막이 늦은 가운데 열린 코파 이탈리아에서 유베는 어색하게 예선부터 치러야 했고 같은 세리에 B의 SSC 나폴리를 상대로 3:3 무승부를 기록한 뒤 승부차기에서 패배해 탈락했다.

심지어 2006년 9월 9일에 열린 세리에 B 데뷔전에서는 리미니 FC 1912 원정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1:1 무승부에 그치는 수모를 겪는다. 물론 그 다음 경기에서 비첸차 칼초를 상대로 홈에서 2:1 승리를 거두면서 첫 승에 성공했고 이 경기부터 8연승에 16득점 1실점을 올리며 체급차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는데 연승 행진은 SSC 나폴리 원정 1:1 무승부로 끝난다. 2006 FIFA 월드컵 야신상에 빛나는 부폰은 733분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12] 그리고 승점 감점 포인트는 17점에서 9점으로 줄어들며 재승격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2007년 1월 14일 AC 만토바를 상대로 리그 첫 패배를 당했다.

2007년 5월 19일 39R 아레초 원정에서 5:1 대승을 거두면서 유벤투스는 잔여 세 경기를 남기고 1년 만에 세리에 A 재승격에 성공했다. 40R 만토바를 상대로 홈에서 2:0 승리를 거두면서 세리에 B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랐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20골로 세리에 B 득점왕에 올랐다.

참고로 강등되었던 클럽을 다시 1부 리그로 끌어올린 디디에 데샹 감독은 승격 직후 PL처럼 자신에게 전권을 주길 바랬으나 이것이 거부당하자, 그대로 사임을 하고 유벤투스를 떠났다.

8.2. 2007-08 시즌

데샹의 후임으로는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즈데넥 그리게라, 조르제 안드라데, 크리스티안 몰리나로, 하산 살리하미지치, 티아고 멘데스, 세르히오 알미론, 빈첸초 이아퀸타 등을 영입하며 의욕적인 전력 보강을 했다.

유벤투스는 세리에 A 복귀 첫 시즌을 3위로 마치며 유벤투스의 실질적인 시즌 목표인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라니에리의 유벤투스는 2007-08 시즌 리그에서 인테르, 밀란, 로마 등의 강팀들과의 대결에서 각각 1승 1무를 기록하며 유벤투스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다만 코파이탈리아에서는 8강에서 인테르를 만나 1차전 원정에서 2-2 무승부를 거두고도 2차전 홈경기에서 2-3 역전패를 당하며 시즌을 무관으로 마치게 되었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21골을 득점하면서 세리에 B에 이어 세리에 A까지 득점왕을 거머쥐었다. 사실 시즌 내내 다비드 트레제게가 득점 1위를 질주했으나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20골로 득점랭킹 2위로 마치게 되었다.

8.3. 2008-09 시즌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슬로바키아의 아르트메디아 페트르잘카[13]를 꺾고 3년만에 복귀한 챔피언스리그 본선 복귀에 성공했다. 라리가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와 UEFA컵 우승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한 조가 되는[14] 힘겨운 조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홈어웨이 2승을 거두면서 조1위로 통과해 성공적인 복귀를 알렸다.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는 첼시 FC를 만나 1차전 원정 0-1 패배 후 2차전 홈에서 2-2로 비기며 탈락했다. 하지만 시즌 중 보여준 잦은 실책과 비난 여론에 의해 결국 시즌 종료까지 2경기나 남은 상황에서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되었다. 이는 팀의 대들보 중 하나였던 트레제게와 팀 내 최고로 각광받던 유망주인 조빈코를 잘 기용하지 않는 용병술이 팬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거기에 더불어 만족스럽지 못한 리그 성적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15] 여담으로 이해 영입된 유벤투스 최악의 먹튀 아마우리가 전반기에는 기대치에 걸맞게 그나마 사람다운 경기력을 펼쳤다.

치로 페라라가 잔여 2경기 동안 임시감독을 맡아 전승을 거두며 유벤투스는 AC 밀란을 제치고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9. 페짜델 시절[16]

9.1. 악몽의 2009-10 시즌

세리에 A의 전통적인 강호 유벤투스지만, 이 시즌은 영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직전시즌 라니에리 감독이 시즌 종료를 2경기 남기고 경질된 후 잔여 경기 감독을 맡았던 치로 페라라 감독이 유임되었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디에구와 펠리페 멜루, 파비오 그로소를 영입했고 칼치오 폴리 때 떠났던 파비오 칸나바로도 복귀했다.

초반에는 나쁘지 않았다. 개막 후 리그 4전 전승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인테르의 강력한 대항마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팔레르모에 첫패를 당하고 11라운드 나폴리에게 2:3 대역전패, 14라운드 칼리아리 원정은 2:0 완패를 기록했다. 15라운드 인테르와의 홈경기에서 마르키시오의 결승골로 승리해보지만 곧바로 승격팀 바리 원정에서 3:1 참패를 당했고 2009년의 마지막 경기인 17라운드 원정호구 카타니아와의 홈경기조차 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지롱댕 보르도의 돌풍(5승 1무로 유벤투스도 2:0,1:1로 물리쳤다.)과 바이에른전 패배(4:1 대패,1:1 무승부)로 예상을 뒤엎고 3위로 밀려나서(그나마 이스라엘의 마카비 하이파를 상대로 2경기 모두 1-0으로 이긴 게 전부다.) 챔스 조별 예선 탈락했다. 마지막 뮌헨과의 단두대매치 홈경기에서 비기기만 했어도 16강에 가는 상황이었으나 전반 트레제게의 선제골 이후 후반전 4골을 얻어맞고 유로파로 가게 되었다.

2010년이 된 후 파르마 원정에서 승리했으나 AC 밀란에 안방에서 3대0 참패, 키에보 원정 패배, AS 로마와의 홈경기에서 2대1 역전패로 3연패에 리그 8패째 기록했고 6위까지 추락했다. 결국 페라라 감독은 경질되었다.

새로 알베르토 차케로니 감독이 부임되었지만, 차케로니 감독의 능력을 충분히 봐온 수많은 유베 팬들은 좌절했다.(…) 그래도 디에구나 트레제게 등이 나름 선전하여 리그에서는 5위로 겨우겨우 올라왔지만 아니나 다를까, 유로파 리그 16강전에서도 1차전에서 기껏 3:1로 이겨놓고도 프리미어 리그 중위권인 풀럼 FC 원정에서 4:1 대패를 당하면서 4:5로 골득실에 밀려 탈락해버렸다. 펠리페 멜루, 지에구, 아마우리, 트레제게, 시소코, 키엘리니, 부폰 그리고 델피에로 같이 충분히 좋은 선수들이 아무리 있어봤자 감독이 안 좋으면 팀도 안 좋아지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결국 이번 시즌은 그야말로 망할 만큼 망해서 이번 시즌은 7위로 전락. 윗동네에서도 비슷한 팀이 7위로 전락한 것과 어째 많이 비슷한 성적이다. 일단 유로파 리그는 나갔지만…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팀치고는 굉장한 굴욕이다. 그리고 골득실도 유베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이너스 1...

이렇게까지 유벤투스가 기운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첫 번째 이유로는 시즌 전 이적 시장에서 영입한 선수들의 문제이다. 실제 2009년 최고로 부진한 스트라이커는 아마우리였고, 큰 마음먹고 사온 지에구는 아마우리 등이 전혀 호응을 해주질 않아 혼자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17][18] 펠리페 멜루는 기대치 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부폰, 조르조 키엘리니를 포함하여 수비진들의 줄부상에… 더군다나 차케로니 감독조차 자신은 "임시 땜빵"이라는 것을 알아서 재계약이고 뭐고 없으니…의욕도 없었고, 그야말로 경기장이 불타고 계란이 날아오는 시즌이었다.

결국 자케로니 감독과의 재계약은 본인이 예상한대로 그런거 없고 차기 감독으로 삼프도리아를 챔스에 진출시킨 삼프도리아 감독인 델 네리, 그리고 삼프도리아의 단장 쥐세페 마로타를 영입하고 유벤투스의 회장 또한 안드레아 아녤리로 바뀌기로 결정된다.

9.2. 끊이지 않는 부진의 2010-11 시즌

보드진이 물갈이되면서 대대적으로 개편에 들어간 유벤투스…유베의 상징이었던 트레제게와 카모라네시까지 팔아버리면서 대 개편에 들어간다. 마르코 모타, 시모네 페페, 레오나르도 보누치, 파비오 콸리아렐라, 밀로스 크라시치, 알베르토 아퀼라니, 호르헤 마르티네즈, 마르코 스토라리 등을 영입하며 알찬 이적시장을 보낸다. 다만 애초에 기대했던 에딘 제코가 이적자금 문제에서 난항을 겪으면서 무산이 되며 별로 바라지 않았던 콸리아렐라를 영입하며 아쉬움을 남긴다. 한편 델 네리 감독 체제로 바뀌면서 4-3-1-2에서 다시금 4-4-2로 바뀌면서 지에구의 포메이션 문제가 겹쳐지며 결국 헐값에 팔아 버린다.

전반기 시즌 시작후 부상의 악몽 속에서도 콸리아렐라와 크라시치의 선전으로 전반기를 4위로 마치며 우승까지 넘볼 기대를 만든다. 하지만 후반기 시즌 시작 파르마와의 경기에서 시작 3분 만에 콸리아렐라의 십자인대가 끊어지며 시즌 아웃을 당하고 펠리페 멜루가 퇴장을 당하면서 1-4로 패하며 좋지 않은 출발을 하였다. 더군다나 비노보(유벤투스 트레이닝센터)의 저주로 부폰 키엘리니 등 공격수 수비수 할 것 없이 주전 들이 줄부상 당하면서 최악의 후반기를 맞게된다.(수비수 후보가 없어서 유소년팀에서 18살이던 쇠렌센이라는 선수를 쓰기에까지 이른다.) 게다가 아마우리는 1년 가까이 골을 못 넣으며 희대의 기록을 세우고 한때 이탈리아 최고 풀백 유망주였던 마르코 모따는 헬 게이트를 열어버리며 수비진에 구멍을 만들어 버린다. 이로 인해 공격진에 구멍이 생긴 유벤투스는 급하게 루카 토니, 알레산드로 마트리를 영입하였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해가는가 하더니 결국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다시금 7위를 차지하며 명문 구단의 자존심을 구기고 만다. 팔레르모가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 오르는 바람에 이번에는 2011-12 유로파 리그 출전권조차 획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로파 리그에서도 조별리그 6무라는 희대의 기록을 세우며 탈락.

10. 콘테 시대 - 제왕의 귀환

파일:welcome home juventus stadium.jpg
유벤투스가 연속 두 시즌 7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는 것을 본 유벤투스의 새 회장 안드레아 아녤리는 팀 내에서 승부욕이 사라진 것이 문제라고 판단, 유벤투스 선수 시절부터 승부욕 넘치는 플레이를 펼쳤던 안토니오 콘테를 델 네리 감독의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대해 페라라 감독의 실패를 지켜본 팬들은 대형 클럽 감독 경험이 없었던 콘테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콘테 감독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며 2011-12 시즌 무패우승, 2013-14 시즌 사상 최다승점 우승 등 탁월한 성적으로 팀의 3연속 우승을 이끌며 유벤투스를 다시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되살리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클럽 대항전에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는 숙제를 남긴 채 3시즌 만에 구단과의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하였다.

11. 알레그리 시대 - 리그 8연패, 역사그리

파일:W8NDERFUL.jpg
#HI5TORY, #LE6END, #MY7H, #W8NDERFUL[19]

콘테 후임으로는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가 선임되었는데, 당초에는 과거 AC 밀란 재임 시 안드레아 피를로와의 갈등과 콘테 감독과의 태도 차이[20]로 우려를 표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부임 직후 급격한 포메이션 변경을 자제하며 과거 콘테의 성공을 이어받았으며, 잇단 중앙 수비수의 부상으로 인해 4백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피를로를 강제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무리 없이 전술을 변경하여 비난 의견들을 잠재웠다. 특히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과거 콘테가 보였던 전술적 답답함이 알레그리에 의해 해결되자[21] 감독 교체에 대한 팬들의 평가는 "신의 한 수"라 반전되었다.

5년간의 재임 기간 중 매 시즌 리그 우승, 5대 리그 최초 4연속 더블로 이탈리아 내 절대강자 위치를 확고히 했고, 2014-15 및 2016-17 시즌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등의 성과를 거두며 유럽 무대에서의 위상도 회복했다. 비록 결승에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1:3, 1:4로 무너져 아쉬움을 남겼으나 팬들은 "결승까지 간 것만도 알레그리 덕"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2018-19 시즌 리그 우승에도 불구하고 경기력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고, 구단에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하며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기대했으나 AFC 아약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패해 탈락한 것이 결정적 원인으로 시즌 종료 후 감독을 사임했다.

12. 사리 시대


2019-20 시즌은 리그 우승으로 세리에 A 9연패에는 성공하였지만, 최근 우승 성적중 가장 안좋은 성적(최다 패, 최다 실점)이었다. 코파 이탈리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와 같은 컵대회에서는 각각 SSC 나폴리, SS 라치오에게 결승에서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결정적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5-16시즌 이후 5시즌만에 16강에 그치며 알레그리에서 마우리치오 사리로 축구 스타일 변화를 꾀했지만 기존의 단단한 수비축구도, 감독교체를 통해 지향했던 공격적인 축구도 아닌 어정쩡한 색채로 과도기였다고는 하지만 팀 스타일 변화 및 팀 성적 모두 실패한 시즌으로 남았고 결국 사리의 경질로 이어졌다.

13. 피를로 시대


리그 10연패는 실패했고 같은 시즌에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 9연패 우승을 기록했다. 바이에른은 2021-22 시즌도 리그 1위를 달리면서 사상 첫 4대리그 10연패 우승 기록을 거둘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유벤투스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다.

14. 알레그리 2기


현재 알레그리 1기와는 다르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게다가 세금 문제로 인해 강제 강등될수도 있다는 문제도 생기고 있다. 결국 2023년 1월, 분식회계 의혹으로 이탈리아축구연맹(FIGC)으로부터 승점 15점 삭감이라는 중징계를 받게 되면서 우승은 물론 챔스 진출도 멀어지는 시즌을 맞이하고 말았다.

허나 22/23 시즌 4월 23일 승점 삭감은 면했다고 하며 리그 3위에 위치하고 있다.

2023년 5월, 다시 한번 승점 10점이 삭감되면서 리그 7위로 떨어졌다.

23/24시즌 전반기 막판부터 리그 연승을 달리면서 리그 1위 인테르와 승점 2점차로 2위를 유지했지만 엠폴리전 무승부 이후로 리그에서 2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이후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거두었지만, 부진한 성적과 기자들을 향한 폭언을 이유로 경질당했다.

15. 모타 시대

16.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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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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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 현재
31대
비츠팔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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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파롤라
파일:UEFA EURO ITA.png

33대
트라파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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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마르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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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대
조프
파일:UEFA EURO ITA.png

36대
마이프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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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대
트라파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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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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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안첼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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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
리피
파일:UEFA EURO ITA.png

41대
카펠로
파일:UEFA EURO ITA.png

42대
데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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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대(대행)
코라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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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대
라니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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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대
페라라
파일:UEFA EURO ITA.png
-
45대
자케로니
파일:UEFA EURO ITA.png
-
46대
델네리
파일:UEFA EURO ITA.png
-
47대
콘테
파일:UEFA EURO ITA.png

-
48대
알레그리
파일:UEFA EURO ITA.png

49대
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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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
피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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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알레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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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대행)
몬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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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대
모타
(모타 체제)
파일:UEFA EURO ITA.png
-
◀ 유벤투스 FC 역대 감독(초대~30대)
: 챔스 우승 : 유로파 우승 : 리그 우승 : 코파 우승
}}}}}}}}} ||

17. 역대 회장

아녤리가 인물 중 유벤투스 회장을 역임한 인물들과 혈연 관계는 아래와 같다.
가장 오랜 기간 회장을 역임한 인물은 선수로서도 전설적인 인물인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로, 1971년부터 1990년까지 재임하였다.

현재 명예 회장에는 조반니 아녤리,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프란초 그란데 스테벤스(Franzo Grande Stevens) 세 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스테벤스는 조반니 아녤리 시절부터 피아트 그룹의 법률 고문을 맡아 온 거물 변호사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회장직을 맡은 바 있다.

18. 역대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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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울트라스 응원단 부적절 응원 징계 사례

21세기 들어 크게 이슈화 된 부적절한 응원 사례 모음



[1] 현재 유벤투스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2]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3] 보렐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세리에 A 최연소 득점왕 기록 보유자이고 데뷔초 2시즌 만에 5회의 해트 트릭을 기록할 정도였다. 여담으로 세리에 A 최다 해트 트릭 기록 보유자 필리포 인차기의 기록이 10회고 17시즌을 리그에서 보냈다.[4] 1949-50 시즌부터 2021-22 시즌까지 유벤투스, AC 밀란, 인테르가 각각 29회, 16회, 14회 우승한 반면 그 밖의 팀들은 1~2회 우승에 그쳤고 이를 모두 합쳐도 13회에 불과하다. 2022-23 시즌에서야 나폴리가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5] 참고로 비츠팔레크는 닥공 전술로 유명한 즈데넥 제만 감독의 삼촌이다.[6] 이 때문에 많은 유벤투스 팬들은 이때 참사를 일으킨 리버풀을 매우 싫어한다.[7] 2005-06 시즌 당시 주전 구성은 왼쪽에 참브로타, 오른쪽에 조나단 제비나였으나 제비나가 부상을 당했다. 참브로타가 양쪽 모두 번갈아가며 뛰던 가운데 키엘리니는 2005-06 시즌 U-21임에도 불구하고 리그/유럽 대항전 포함 23경기에 출전하여 팀에서 왼쪽 풀백으로 가장 많이 출장하였다.[8] 이브라히모비치가 인테르, FC 바르셀로나, AC 밀란, 파리 생제르맹 FC를 거쳐 8년 후 꼽은 베스트 11에서도 이 멤버 중 6명이 포함되어 있다.[9] FC 바이에른 뮌헨, AFC 아약스, 마카비 텔아비브를 상대로 5승 1무를 거뒀는데 카펠로스럽게 6경기에서 모두 1골씩 득점했다. 5연승한 뒤 텔아비브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해 전승에는 실패했다.[10] 바이에른 뮌헨, 클뤼프 브뤼허 KV, SK 라피드 빈과 한 조가 되어 5승 1패를 기록했다.[11] 전반 13분에 요앙 미쿠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뒤 후반 20분 트레제게의 동점골이 나왔고 후반 43분 에메르손의 극적인 역전골로 16강 탈락을 면했다.[12] 그 와중에 부폰은 UC 알비놀레페와의 경기에서 커리어 첫 레드카드를 받기도 했다.[13] 2005-06 시즌 셀틱 FC을 꺾고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올라 포르투를 제치고 조 3위를 기록했던 클럽이다.[14] 나머지 한 팀은 바테 보리소프.[15] 당시 세리에 A에서 유벤투스의 성적은 3위로 칼치오폴리 이후 강등 및 승강의 과정을 거치면서 팀의 선수진이 많이 약화된 것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다만 그 전까지 리그 정상에서 놀던 팀이기에 팬들의 기대치가 높았고, 경질 당시 유벤투스는 9경기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16] 이 당시 감독이었던 치로 페라라, 알베르토 차케로니, 루이지 델 네리에서 한 글자씩 따온 단어이며 유베의 암흑기를 상징한다. 차케로니의 경우 자케로니로 주로 읽힌 관계로 '차' 대신 '짜'로 용어가 굳어졌다. 사실 아주 예전부터 국내 세리에 A 팬들에게 짜짜로니란 별명이 붙여진터라 이게 더 자연스러웠다.[17] 디에구는 브레멘 때의 활약상만 보아도 스루 패스를 찔러 넣는 것을 잘 한다. 하지만 유베에서 필요한 것은 타겟 맨들에게 크로스를 잘 올려야 하는 공미이다. 같이 월 패스를 주고받을 섀도 스트라이커(브레멘 때의 피사로처럼)가 있어야 플레이가 빛을 보는데, 아마우리를 포함한 타겟 맨 3명이 그렇게 해줄 수도 없다. 디에구 혼자 이래 저래 뛰어 다니면서 크로스를 힘겹게 올리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짝이 없다. 정말로 호흡이 맞는 짝이 유벤투스에 없었다.[18] 비록 볼을 끄는 단점이 있지만 그 막장이었던 팀에서 7골 12어시를 했으니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팀의 퀄리티는 확 올라갔지만 수준 높은 2선 자원만 없는 12년 이후부터 팬들이 다시 그리워하는 선수이다.[19] 유벤투스 공식 페이지에서 각 시즌별로 사용한 해시태그[20] 콘테의 경우 경기 후 선수들의 셀레브레이션에 함께 참여하는 등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는 리더십을 보인 반면, 알레그리는 "셀레브레이션은 선수들의 무대"라고 선을 긋고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자 마자 또는 울리기 전에도 라커룸으로 칼퇴근하는 차이를 보였다.[21] 특히 2017-18 16강 토트넘 전2018-19 16강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전은 감독의 전술적 역량으로 거둔 승리라는 극찬을 받았다.[22] 2010년 비센테 델 보스케가 월드컵 우승을 하면서 이 기록을 달성한 두 번째 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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