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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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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시대2. 우산국 성립3. 신라의 우산국 정벌4. 후삼국시대5. 고려시대6. 조선시대
6.1. 공도 정책의 시행6.2. 안용복의 도항과 쟁계6.3. 울릉도 개척과 그 이후
7. 일제강점기 울릉도(鬱陵島)8. 대한민국9. 관련 항목

1. 선사시대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락 기원전 4세기 경부터 기원전 1세기 경까지 고인돌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이 즈음 군장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에는 위나라 장군 왕기가 옥저로 도망친 고구려 동천왕을 추적하다가 어떤 노인에게서 '바다 동쪽에 섬이 하나 있다'는 소문을 듣는데, 이것이 역사상 울릉도의 첫 등장으로 추정된다.

나리분지의 나리마을에는 청동기시대(BC 1000~300년)와 철기시대 전기(BC 300~1년) 고인돌 형태의 흔적(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이 남아있다.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의 고일홍이 2022년에 발표한 재고#에 의하면, 울릉도에서 그물추 등 신석기 시대 정착인의 흔적은 발견되지만 청동기 시대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에는 최대 계절적 점유로 그쳤다가, 철기 시대에 들어서 동해 교역망이 구축될 무렵에 제대로 된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2. 우산국 성립

이후 어느 시점 울릉도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독자적인 정치체가 자리잡는다. 구전되는 설화에 따르면 우산국의 우해왕은[1] 대마도(!)까지 쳐들어가서 담판을 지었을 정도라지만 검증하기 어렵다.

상술한 고일홍의 재고에 의하면 6세기 이전의 울릉도에는 딱히 이렇다 할만한 유적이나 유물이 없는데, 기록상으로 우산국이 존재했음은 확실하기 때문에 우산국 사회는 한반도 본토와 많이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농경 사회는 아니었으며 우산국 경제는 어업 및 해양무역으로 지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신라의 우산국 정벌

파일:신라의 우산국 정벌.jpg

512년신라 지증왕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입에서 연기가 나는 나무 사자상을 보여주며 따르지 않으면 사자를 풀어 놓겠다는 야바위를 써서 우산국을 정벌한 사건은 상당히 유명하다. 신라-우산국 전투 참고.

위 전투에서 비록 우산국이 신라에 항복하였지만, 신라 직할령으로 편입되진 않았고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 정도로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를 통해 한반도 본토에서 불교를 비롯한 선진 문물을 도입하였는데, 울릉도 곳곳의 여러 고분을 통해 당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1957년1963년 두 번에 걸친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신라 복속 이전 우산국 시절이 아니라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즉, 그 이전부터 역사가 시작되긴 했지만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 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통일신라 이후부터라는 것. 하지만 이 당시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고분들은 일본인 도굴꾼들에게 대거 약탈당하는 바람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어 상당수가 미지에 싸여 있다. 또한 고려 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제주도탐라국이라고 하는 일종의 왕국으로 유지되었던 만큼, 우산국에도 도성과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우산국의 궁궐터는 발견되지 않고있다.

4. 후삼국시대

이후 한반도 본토는 9세기신라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후삼국시대의 난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우릉도(芋陵島)라 불리던 울릉도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2], 바다 건너에서 한반도의 상황을 적당히 지켜보다가 대세가 고려에 있다고 생각해 930년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땅콩라는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면서 복속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건은 백길과 토두에게 관직을 내렸다. 다만 이때도 울릉도가 워낙 육지에서 떨어져 있다 보니 몇차례 관리를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우산국으로 기록된 적이 있으나 고려의 외왕내제 천하관(복속국으로는 탐라, 우산, 여진동번, 여진서번, 철리국 등)에 따른 조공국으로 설정한 명칭이었다.

5. 고려시대

고려 때까지 느슨한 조공 관계가 계속되었고, '고려에 복종하는 고려 본토 바깥의 작은 나라'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1004년에 우산국 사람들이 일본까지 표류해서 양식을 주고 돌려보낸 사건이 있었는데 이게 일본 기록에서 최초로 울릉도를 언급한 사례다. 여기서도 우산국을 고려의 속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1018년, 1019년여진족 해적의 공격을 몇 차례 받았고 약탈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웬 뜬금없이 여진족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려 초기엔 지금의 함경도가 여진족 땅이었고, 지도를 보면 함경도에서 내려오면 울릉도가 그렇게 멀지는 않다. 참고로 1019년 여진족 해적들은 쓰시마 섬, 일본 본토 일부까지 약탈할 정도였으니[3] 중간에 끼인 우산국은 말할 것도 없다.

1022년 결국 못 견디고 고려 본토로 도망쳐온 우산국 백성들을 예주[4]에 정착하게 했다.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이 때 망했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나중에 빈 섬이 되는 걸 봐선 이 때 사실상 망했다고 봐야 할 듯.
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男女幷八十六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수우피·생저·면자·검박목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는 15구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ㅡ 《태종실록
于山島鬱陵島一云武陵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及業掌空 南峯梢卑 風日清明則峯頭樹木 及山根沙渚 歴歴可見 風便則二日可到 一説于山鬱陵本一島 地方百里
우산도와 울릉도또는 무릉(武陵) 또는 우릉(羽陵) 두 섬이 이 현(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허공에 있는데, 남쪽의 봉우리는 약간 낮다.
바람이 불고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고,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하나의 섬이고 지방은 백 리에 걸쳤다 한다.
ㅡ 《신증동국여지승람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는 읍(邑)을 설치할 만하니, 그 물산(物産)의 풍부함과 재용(財用)의 넉넉함은, 저목(楮木)·저상(苧桑)·대죽(大竹)·해죽(海竹)·어교목(魚膠木)·동백목(冬栢木)·백자목(栢子木)·이목(梨木)·시목(柹木)과, 아골(鴉鶻)·흑색 산구(黑色 山鳩)·해의(海衣)·복어(鰒魚)·문어(文魚)·해달(海獺) 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禾穀)의 생산이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된다. 동·서·남·북이 상거(相距)가 각각 50여 리(里)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으며 (하략)
ㅡ 《세조실록
우산도(지금의 울릉도)는 고려 중기까지 독립 왕국이었다.

1032년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서 고려 조정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직 토착 세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 전까지는 나라처럼 우산'국'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행정구역처럼 우릉'성'으로 나온다. 이 행정구역의 변화를 여진 해적 피해로 인한 위상 약화로 보기도 한다. 혹은 이전의 백길과 토두와는 달리 이름이 굉장히 길고 이상한데 어쩌면 차후에 여진 해적이 일부 눌러앉으면서 언어와 종족 구성의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후 1141년 울릉도(蔚陵島)에 사람을 보내 과핵(菓核)과 나뭇잎 중 이상한 것을 취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1157년 울릉도에 김유립을 보내 조사하게 하는데 거의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아있는 무인도처럼 묘사한다. 최우여몽전쟁 때 사민정책을 벌여 울릉도 개척을 시도했다가 풍랑 때문에 실패했다.

1259년 고려와 몽골 전쟁 막바지 즈음, 울진현령 박순(朴淳)이 가족, 노비, 재물을 싣고 울릉도(鬱陵島)로 가려는 것을 백성들이 알아채고 박순을 잡아서 막았다. 배에 실은 재물들은 뱃사람들이 그대로 가지고 울릉도로 튀었다.

울릉도에는 이러한 사민정책 이외에도 국가의 통제를 피해 자발적으로 들어가 산 사람이 있었고, 고려사절요를 보면 충목왕 시절인 1346년 3월에 우릉도(芋陵島 울릉도) 사람이 조정을 찾아왔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를 보면 그때까지도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초 편찬된 '고려사'에도 울릉도에 촌락 터가 7곳 있었다고 한다.

6. 조선시대

6.1. 공도 정책의 시행

조선왜구의 출몰에 맞서 섬의 주민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 정책을 시행한다. 이에 따라 1403년 조선 태종은 강원도의 무릉도(武陵島) 거주민에게 모두 육지로 나오도록 명하였고, 이에 쓰시마에서는 무릉도에 사람을 보내어 다스리게 해달라고 징징요청하였으나 조선 조정의 대답은 당연히 거절한다는 내용.

그럼에도 군역을 피해 무릉도에 들어가 산 사람들이 다수 남아 있었기에 태종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1416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무릉도에 보냈지만, 무릉도 주민 86명 가운데 김인우를 따라온 것은 고작 3명에 불과했다. 이에 열받은 태종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울릉도 주민을 끌어낼 것을 논의하게 했는데,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황희가 홀로 쇄출에 찬성하는 바람에 결국 진행되었다. 이게 1417년.

그 뒤로도 조선 조정에서는 무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공도 상태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의 독도로 추정되는 우산도(于山島)가 발견되어 일부 이름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몰래 울릉도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모두 정착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연장선에서 1614년에는 쓰시마 번주가, 1615년에는 일본 선박이 각기 이소타케시마(磯竹島)다케시마(竹島) 안내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다.

파일:독도%20역사%20-%20팔도%20총도.jpg
이 지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인데, 한반도의 주요 산, 하천, 섬들을 최소한으로 그린 것이다. 독도(우산도)와 울릉도가 그려져있다. 담당자가 실수했는지 반대로 그렸다. 하지만 이후에는 제대로 그렸다. 측량 기술도 부족 했지만 무엇 보다 종이 면적도 부족해서 남쪽 섬들도 최대한 육지에 붙어 있게 그렸다.

6.2. 안용복의 도항과 쟁계

하지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625년부터 1691년까지 66년 동안 오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가문에게 매년 번갈아 도해면허가 발급되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업을 일삼았고, 마침내 1692년에는 조선인 어민과 충돌하여 아무런 소득 없이 귀환하였다.

이들은 이듬해인 1693년에도 같은 일이 발생하자 안용복 등을 일본으로 잡아갔고, 이들을 조선에 송환하는 과정에서 쓰시마 번주 소오 요시쓰구(宗義倫)는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를 보내 "다케시마에 조선 배가 드나들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상의 영토 요구에 대해 남인의 온건대응론이 대세를 차지한 조선 조정은 "우리나라인 울릉도라도 못 가게 하는데, 하물며 다른 섬이야 당연하다"는 답서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즉 '다케시마는 어디 붙은 섬인지 모르겠지만, 다케시마가 어찌되었든 울릉도는 우리 영토'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이 부분에 대해 다시 마사시게가 파견되어 답서에서 울릉도 언급을 빼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이미 1694년 갑술환국이 벌어진 조선 조정은 강경대응론으로 선회하여 오히려 전에 보낸 답서를 취소하고 "울릉도와 다케시마는 한 섬을 두 이름으로 부른 것이니, 일본 사람들이 오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답서를 새로 보냈지만 마사시게는 그 뒤로도 10개월을 버티며 답서의 수정을 요구했다.[5]

그러던 중 1695년 요시쓰구가 죽고 소오 요시미치(宗義方)가 새로이 쓰시마 번주가 된 가운데, 마사시게는 본국에서 자신을 소환하자 한동안 조선 조정과 논쟁을 벌이다 마침내 열폭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해 12월 돗토리번에 다케시마와 마츠시마(독도)의 일을 문의했던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는 이듬해인 1696년 1월 소오 요시미치가 입근한 자리에서 "다케시마는 조선에 가까워 조선 영토로 볼 수 있으므로, 일본인의 도해를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조선에 알리도록 했다.

한편 안용복은 이러한 정황에 힘입어 사람들을 규합하여 울릉도와 자산도(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을 꾸짖어 내쫓고,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11명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호키(伯耆)에서 번주와 만나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는 엄중 처벌하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하여간 이러한 일본 측의 도해 금지 결정이 조선 측에 통보된 뒤에도, 조선 조정의 답신 여부와 그 내용을 두고 한동안 이어지던 이 문제는 1698년 조선 조정의 답신이 쓰시마 번을 통해 에도 막부로 전달되고, 다시 1699년 쓰시마 번의 답신이 조선 조정으로 전해지면서 완전히 종료되었다.

또 여담이지만 18세기 후반, 서양 선박들이 동해를 탐사를 하기 시작을 하면서, 지도에 울릉도다줄레(Dagelet)로 지도에 적었다.

6.3. 울릉도 개척과 그 이후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지던 조선의 공도 정책은 1881년에 일본인이 울릉도에 몰래 들어와 벌목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이에 고종일본 정부에 이를 항의하는 한편,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해 울릉도에 파견하면서 조만간 울릉도에 행정구역을 설치하려는 뜻을 드러냈다. 그리고 1882년 이규원 일행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돌아오자, 임오군란이 수습된 직후 울릉도 개척 방안을 공표해 김석규(金錫奎)를 도장(島長)으로 임명하고 5년간 면세 조치를 실시하였다. 개척을 본격화하기 직전인 1882년 시점에 울릉도는 한국인 116명과 일본인 79명이 나라의 허락 없이 몰래 숨어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883년에는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6]로 임명하면서 울릉도 개척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이로써 근 4세기 만에 다시 울릉도에 사람이 살게 되었으며, 이러한 적극적인 울릉도 이주 정책과 토지 개간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지속적인 항의를 통해 울릉도에 불법 침입해 벌목을 자행하던 일본인 254명을 그해 9월 모두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이후 갑신정변으로 김옥균 등이 축출된 뒤에는 울릉도민 서경수(徐敬秀)를 월송만호(越松萬戶)에 임명하고 월송만호가 도장을 겸임하도록 해서 개척사업을 이어나갔지만, 서경수는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파일:울릉_1900년.png
황색 : 울도군(鬱島郡)
1. 북면(北面)
2. 남면(南面)
갑오개혁이 실시된 1894년 12월에는 다시 도장을 설치하고, 이듬해 8월에는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격상시켜 배계주(裵季周)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더불어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다시 일본인의 벌목이 자행되었다. 이에 대한제국1899년 내부관원 우용정(禹用鼎)을 시켜 다시 울릉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함과 더불어 1900년 울릉도 관제개정안을 발표하여 도감을 감무(監務)로 개칭하기로 하였으나, 도중에 개정안을 바꾸어 울릉도에 정식으로 군(郡)을 설치하고 군수(郡守)를 두며, 강원도 관할에 둔다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공표하였다. 이 당시 군의 명칭은 울도군이었다. 하위 행정구역으로 남면(현 울릉읍 및 서면 남양리, 남서리)과 북면(현 북면 및 서면 태하리)의 2개 면을 두었다가, 1906년 남양리, 남서리, 태하리를 분리하여 서면을 신설했다. 군청 소재지는 태하였다가 1903년 지금의 도동으로 옮겨갔다.

러일전쟁 때는 울릉도 역사상 드물게 주변국들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울릉도를 일본 해군의 병참기지로 활용하여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의 승인은 없이, 일본이 자의적으로 울릉도를 사용했었다. 그리고 근해에 침몰한 러시아 제국 해군방호순양함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은 군자금으로 실린 막대한 금괴로 유명세를 떨친 적이 있다. #

1906년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7]

7. 일제강점기 울릉도(鬱陵島)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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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시치노키리.svg
울릉도
鬱陵島
Utsuryo Island
}}}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도청 소재지 경상북도 울릉도 남면 도동
(現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상위 행정구역 경상북도
하위 행정구역 3
면적 73.34 ㎢
파일:조선지형도_울릉도.jpg
1916년에 조선총독부는 오만분의 일 축척을 이용하여 지도를 그렸다.

1915년 5월 1일울도군이 울릉도(鬱陵島)로 개편되었으며, 군수(郡守)가 도사(島司)로, 군청이 도청으로 개칭되었다.[8]

여기서 도(島)는 조선총독부가 육지에서 거리가 먼 한반도의 도서지역에 설치한 조선의 행정구역으로 제주도[9]와 울릉도 단 두 곳에만 설치했으며 위상은 기존의 , 과 동급이었다. 두 도(島)는 설치된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존재하다가 해방 후 폐지되었는데, 한 군으로 관리하기 넓으며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지역색이 강하여 전라남도와 행정적으로 분리해 줄 필요성이 있었던 제주도는 1946년 미군정에 의해 북제주군, 남제주군 2개 군으로 분할되며 제주도(濟州道)로 분리되었지만 규모가 작았던 울릉도는 정부수립 직후까지 존속하다가 1949년 지방자치법 시행과 동시에 도(島)제가 폐지되면서 울릉군으로 개칭하였다.

8. 대한민국

파일:울릉_1979년.png
황색 : 울릉군(鬱陵郡)
1. 북면(北面)
2. 서면(西面)
3. 울릉읍(鬱陵邑)
광복과 함께 38선 이남에 속하게 되었고, 대한민국령이 되었다. 1949년 울릉도에서 울릉군으로 다시 개칭되었고, 도사 직책도 군수로 환원되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이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일명 이승만 라인이라고도 불리는 평화선을 선포하였는데, 울릉도독도 등이 대한민국의 영역에 속해있음을 밝힌 바 있다.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되었다.[10]

1988년 5월에 동을 리로 바꾸며 현재 명칭이 생겼다. 2000년 울릉읍 도동리에서 독도리를 분리해 신설하였다.


[1] 기운 세고 힘 세서 대마도 왕은 우해왕을 보자 만만치 않은 상대로 여겼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호구 취급했는지 대마도 출신 왜구들이 우산국을 털곤 했다.[2] 신라에 복속되어 있던 우산국이 국체를 유지하고 있다가 이때 다시 떨어져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호족화한 것은 분명.[3] 여진족 해적은 고려인이 알려준 이름을 따라 일본에서 도이(刀伊)라고 불렸고 위 사건은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라고 불린다. 도이는 되놈할 때 그 되-도이를 말하는 듯 하다.[4] 禮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5] 시위의 일환으로 조선 정부에서 공급하는 음식과 의복을 거부하는 바람에 돌아갈 때는 거지꼴이었다.[6] 1869년 설립된 일본의 홋카이도개척사(開拓使)를 참조한 것이다.[7] 당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행정 관행상 직선 거리나 행정구역 간의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리의 효율성이 더 중시된 측면이 있다. 경상북도는 울릉도를 제외하면 전혀 섬이 없지만 경상남도는 남해안의 수많은 섬들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도서지역' 관리 경험이 있는 경남으로 행정구역을 편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1914년 1월 포항-울릉 간 정기명령선이 취역하기 전까지 울릉에서 조선 본토로 가는 정기선은 부산-울릉 간 기선 뿐이었고,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의 범선이나 기선을 이용해야 했다.[8] 일본국회도서관 사이트에 게재된 1915(대정 4)년 4월 30일자 일본제국 관보, 1915(대정 4)년 5월 1일자 일본제국 관보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에 게재된 조선총독부 관보 제 호
[9] 부군면 통폐합으로 전라남도 제주군, 정의군, 대정군을 제주군으로 통합[10] 읍 승격 7년 전인 1970년에 제정된 '주민등록번호 지역코드 6자리 부여 기준 현재와는 다르며, (주민등록법 관련 별표 서식 참조)'에 따르면 울릉군 남읍으로 되어 있는데, 오기로 보인다.

9.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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