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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0 16:36:01

우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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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의 역대 군주
?대 우해왕
왕호 우해왕(于海王)
불명
우해(于海)?
생몰 기간 ? ~ ?
재위 기간 ? ~ ?[1]

1. 개요2. 행적3. 가족관계4. 여담

1. 개요

설화로 전해지는 우산국 국왕.

울릉도 설화에 따르면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요, 신체도 건장하여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라고 전해진다.

2. 행적

울릉도 설화에 따르면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던 때가 우해왕이 다스리던 때인데 우산국은 작은 나라였지만 바다에서는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 힘이 세었다라고 설화에서는 전해졌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산국 인근 해역에서는 대마도에서 온 왜구가 자주 나타났고, 어느 날 우해왕은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수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대마도수장을 항복시키고 앞으로 다시는 우산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이후 대마도를 떠나 올 때 우해왕은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대마도수장의 셋째 딸인 풍미녀를 데려와 왕후로 삼았다고 한다.

우해왕이 풍미녀를 왕후로 맞은 후 우해왕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멀리하였고 사치를 좋아하는 풍미녀를 위해 신라에서 몰래 노략질을 해오는 일도 있었고 부당한 일이라고 항의한 신하를 목을 배거나 바다에 수장시키면서 신하들과 백성들은 우해왕이 무서워 한 마디도 못했고 풍미녀는 더욱 사치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라가 망하겠구나!, 풍왕후는 마녀야, 우해왕이 달라졌어라는 소문이 온 우산국에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신라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우해왕은 그런 소문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신하를 수장시켰고 이를 본 신하들은 되도록 왕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결국 풍미녀가 왕후가 된 지 몇 해 후 우산국은 신라에 망하고 말았다. 라고 울릉도 설화에서 전해지고 있다.

3. 가족관계

본인 : 우해왕
아내 : 풍미녀
장남 : 하발
그 외 자식들 : 현우 외 6명

4. 여담


[1] 512년에 이사부에게 항복했지만 신라의 직할령에는 편입되지 않고 존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돼서 정확한 마지막 재위는 불명이다.[2] 출처: 한국기인전/ 이석호 지음/ 명문당/ 2010년 0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