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a3d00><colcolor=#FFFFFF> 관련 문서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생애 · 특징 · 작품목록 · 평가 · BW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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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징
바흐 음악의 특징을 정리한 영상 |
갈등, 우정, 절망, 기쁨, 그의 음악은 내가 "모든 것의 전부"라고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을정도로 포괄적이다. 셰익스피어도 비교가 안 된다.
존 엘리엇 가디너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바흐의 음악 속에 있는 것은 연주자나 청취자로서 우리가 들어가는 또 다른 세계라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가면을 쓰고 무수한 색깔의 환상의 세계로 내려간다."라고 말했다. 가디너도 바흐의 음악과 신앙에 대해 설득력 있는 지적을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들으면 어떻게 그것이 단순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가디너는 불가지론자지만, 바흐를 연주할 때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설득력 면에서 거부할 수 없다"고 그는 인정한다. "내 논리적인 마음이 '아니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내 영혼은 '이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하느님의 감각과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가진 사람으로부터만 올 수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 삶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바흐의 음악은 신앙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신앙을 초월한다.
― BBCCan any composer equal Bach?
존 엘리엇 가디너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바흐의 음악 속에 있는 것은 연주자나 청취자로서 우리가 들어가는 또 다른 세계라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가면을 쓰고 무수한 색깔의 환상의 세계로 내려간다."라고 말했다. 가디너도 바흐의 음악과 신앙에 대해 설득력 있는 지적을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들으면 어떻게 그것이 단순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가디너는 불가지론자지만, 바흐를 연주할 때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설득력 면에서 거부할 수 없다"고 그는 인정한다. "내 논리적인 마음이 '아니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내 영혼은 '이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하느님의 감각과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가진 사람으로부터만 올 수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 삶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바흐의 음악은 신앙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신앙을 초월한다.
― BBCCan any composer equal Bach?
모든 인간의 감정에 대해 동감을 잘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객관적으로 감정들을 그려낸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만 간섭하지는 않는 작곡가다. 인간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과학적이라 할 정도로 연구를 많이 했고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했다. 때로는 심각하면서도 톡톡 튀고 즐거운 것이 바흐의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바흐의 음악이 단지 클래식 음악 또는 바로크 시대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1]
― 요요마출처
― 요요마출처
바흐의 음악들의 특징을 정리한 문서.
그는 오페라를 제외한 당대의 거의 모든 음악의 영역에 손을 댔고, 거기에 작품 생활 초기부터 만년에 이르는 동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음악적 성과를 거둔 위대한 음악가다. 그야말로 희대의 천재.
바로크 음악을 총 집대성한 그의 음악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음악에 대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굳이 그의 음악에 대해서 음악사적인 해설을 해야 한다면 우선 바로크 음악의 종합이라는 측면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여러 음악 양식들을 ‘융합’한 인물로 헨델처럼 여러 양식을 ‘조화’시킨 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특징을 보인다. 동시대 독일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바흐 역시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가운데에서 성장했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미 당시 독일 궁정문화에 침투하고 있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새로운 음악 양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를 다만 한 시대 음악 양식의 종합이라는 면으로서만 조명하는 것은 단편적인 견해이다. 그의 음악적 용해와 융합의 과정에서 새로운 요소들이 싹터온 것을 후대의 음악사가들은 발견할수 있었다.
그는 엄청난 작품들을 남겼다. 성악곡에는 교회 칸타타, 세속 칸타타, 수난곡, 오라토리오, 미사, 마니피캇, 모테트, 가곡 등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칸타타이다. 초기의 칸타타는 북독일의 영향을 받은 모테트풍 스타일을 계승하고 있으나 나중에는 오페라풍의 아리아나 레치타티보가 등장하고, 라이프치히 시절 초기에는 코랄 칸타타가 많이 제작됐다. 대표적인 대규모 성악곡으로는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미사 b단조,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이 있다. 한편 기악곡에는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건반악기곡 등이 있는데 어느 분야에서든 바흐는 바로크 음악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들을 많이 남겼다. 관현악 모음곡 제2번,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오르간 소곡집 599~644, 클라비어(쳄발로)를 위한 프랑스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등이 각 분야에서 유명한 곡의 예로 꼽힌다. 그리고 말년의 ‘음악적 헌정’이나 안질로 장님이 된 탓에 완성시키지는 못한 ‘푸가의 기법’은 바흐의 대위법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작으로 대부분 악기를 지정하지 않은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일반적으로는 특수작품으로서 별개로 분류된다.
바흐 본인은 음악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는 기쁜 마음을 갖게 한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음악의 목적이다.” 그에게 음악은 하느님 영광의 찬미였다. 그래서 그에게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은 서로 대립하지 않았고, 하나의 목적을 위한 같은 바탕 위에 놓여 있었다. 200곡에 달하는 칸타타와 그의 수난곡들은 합창곡 작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2권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은 각각 24개의 장조와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구성되어 피아노곡의 구약 성서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에는 24개의 장단조가 모두 자유롭게 작곡되어지나 바로크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일부의 조성들만 완벽하게 인식되어 사용되어 졌는데 바흐는 두 번에 걸친 24개의 클라이비어 곡집으로 모든 조성들을 완벽하게 실험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러 작곡가가 평균율을 적용해 작품을 썼지만 바흐처럼 평균율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은 없다. 바흐는 1721년, 1741년 각각 2권의 평균율 곡집을 발표했는데, 이후 음악가들은 이 곡에 엄청난 찬사를 보낸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접한 후 작곡의 기초를 다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특히 쇼팽은 모든 곡을 외워서 칠 정도로 연습해 자신의 24개 ‘전주곡’을 바흐처럼 24개의 모든 조성으로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흐의 작품들은 기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로크 대위법의 정점에 선 작품들이며, 대위법 작법의 끝판왕 격인 푸가를 포함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장르 측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업적과 영향력을 남겼지만 특히 종교음악과 오르간 분야에서는 양으로 보나 수준으로 보나 따라올 사람이 없다.[2] 바로크 말기에 대 유행했던 오페라 세리아는 남기지 않았지만, 대신 오늘날 '세속 칸타타'로 불리는 대규모의 음악 드라마(Dramma per musica)를 여러 편 남기고 있다.[3] 바흐의 대위법은 자기 아들들을 비롯하여 이후의 모든 작곡가들에게 끊임없는 연구, 모방 또는 도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후기작품에 나타나는 대위법적인 경향도 바로 바흐와 헨델의 대위법을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바흐는 단순히 대위법이나 음악 수법의 정교함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작곡가가 절대 아니다. 기법적으로 훌륭하거나 기존에 없었던 독창적인 음악 어법을 창시한 작곡가는 바흐 말고도 상당히 많다. 다른 작곡가들이 필적할 수 없는 바흐 음악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깊이에 있다. 바흐 이전에도 이후에도 서양 음악 분야에서 수많은 음악가가 활약했지만 단순히 듣기 좋거나 화려한 수준을 넘어 바흐처럼 진정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음악을 창조한 작곡가는 정말 정말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바흐는 시대를 초월한 올타임(all-time) 마에스트로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바흐의 음악은 연주자나 감상자에게 상당한 노력과 연구를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바흐가 활동했던 바로크 시대는 작곡가의 개성보다 정형화된 음악 문법을 바탕으로 창작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바흐의 음악에 대해 수많은 해석과 연주법과 감상법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는 바흐의 음악에 내재된 깊이와 음악성을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에 대한 각자의 고민과 연구의 산물이다.[4] 오늘날 클래식 음악 종사자들에게 바흐의 음악은 매우 중요하고 매우 어려운 도전 과제이며 이런 분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는 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 작곡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거기에 따라서 분류할 수 가 있다. 그러므로 오르간 연주를 위해 고용되었던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에서 쓴 작품들의 대부분은 오르간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교회음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쾨텐에서 쓴 곡들의 대부분은 클라비어나 기악합주음악으로 교육용과 가정오락 또는 궁정오락을 위해 만들어졌다. 물론 오르간 곡이나 다른 건반악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완숙기의 작품들이 더러 라이프치히 시기에 작곡되긴 했지만, 칸타타와 그 밖의 교회음악이 제일 많이 쓰여진 시기는 라이프치히 초기였다. 바흐는 일차적으로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필사하거나 개작하는 방식을 통해 작품을 배워 나갔고 이러한 습관은 평생에 걸쳐 계속 유지되었다. 그의 곡 가운데는 토렐리, 비발디, 텔레만과 수많은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을 각색한 것이 많다. 이런 방식으로 바흐는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가장 탁월한 작곡가들의 사용 방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칼 필립 엠마뉴엘에 따르면 바흐는 건반악기가 없는 상태에서 작곡하고 난 다음 건반악기를 직접 연주해서 그 결과를 시험해보는 전형적인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작곡 단계는 주요 테마나 주제를 고안하는 것이었다. 바흐는 생각해 낸 주제를 이미 확립된 관습적인 장르, 형식, 화성구조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들어 냈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와 같이 텍스트가 있는 곡을 작곡할 경우에는 먼저 성악 선율을 쓰고 선율에 맞추어 가사의 강세와 의미를 적용시켰다. 바흐의 문헌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자신의 음악을 개선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악보를 사보하거나 성부를 연주하면서 조금씩 고친다든지, 아니면 곡을 다시 연주할 때 새롭게 교정하는 식이었다. 또한 흔히 기존의 자신의 작품에 새로운 사용법을 적용하고 새 가사를 붙이거나 신선한 내용으로 작업하기도 했다. 그의 칸타타 악장 중에는 이전의 칸타타와 기악 작품을 비롯하여 다른 음악을 개작한 것이 많다.
1.1. 오르간
바흐는 바이올린 주자 및 오르간 주자로서 교육을 받았으며, 오르간 음악이 먼저 작곡가로서의 그의 관심을 끌었다. 젊었을 때부터 바흐는 광대하고 다양한 오르간 음악에 익숙해 있었다. 북독일로는 북스테후데와 뵘, 중부와 남독일로는 파헬벨과 프로베르거가 있었고, 이탈리아의 프레스코발디와 프랑스 오르가니스트들의 오르간 음악도 꼽을 수 있다. 바흐는 어렸을 때 그 곳에 있는 오르간 주자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함부르크를 방문하였으며, 아른슈타트에 있는 동안에는 약 225마일 정도 떨어진 뤼베크까지 도보여행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는 음악을 혼합하고 뛰어넘어서 바흐는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양식을 개발하였다. 그의 양식은 매우 풍부한 상상력, 정통한 대위법 지식, 자신감 넘치는 대가적 기교화 광범위한 페달을 사용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바흐는 즉흥 연주가로써 명성이 자자했고 오르간을 새로 달거나 개축할 경우 시험하기 위해 자주 불려 다녔다.
교회 오르간 주자에 걸맞게 바흐는 루터교 예배에 사용되는 장르에 초점을 맞춰 오르간 음악을 작곡하였다. 우선 각각의 코랄에 앞서 연주되거나 때때로 회중이 노래할 때 반주로 사용된 코랄 세팅이 있다. 토카타, 판타지아, 프렐루드와 푸가는 예배의 어떤 지점에서 전주곡이나 간주곡으로서 특징적 역할을 담당하며 리사이틀에 적합하게 활용되기도 했다.
바흐의 초기 오르간 곡들로는 코랄 전주곡, 코랄에 기초를 둔 몇 곡의 변주곡(파르티타), 그리고 그 길이와 산만함 그리고 넘쳐흐르는 듯한 악상 등으로 북스테후데의 토카타를 연상시키는 몇 곡의 토카타와 판타지아가 있다. 그 후 바이마르 궁정에 있을 때 바흐는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쓴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평상시의 부지런함대로 그들의 총보를 옮겨 쓰고 또 그들의 작품을 편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비발디의 오르간 혹은 하프시코드 콘체르토 몇 곡을 편곡하였는데, 이 때 장식음악을 써넣기도 하고 때로는 대위법을 강화시키거나 내성부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코렐리나 레그렌치 주제에의한 푸가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바흐 자신의 양식에 주요한 변화가 생겨났다.
- 비발디 등의 이탈리아 작곡가들
비발디가 미친 영향은 바이마르에서 작곡된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 a단조> BWV543 같은 곡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예19.1a)의 프렐류드에서 협주곡 독주 음형과 닮은 바이올린 음형이 토카타 섹션과 교대로 등장한다. 짜임새와는 대조적으로 동형진행과 5도권 진행, 명료한 조성 구조와 새로운 조성에 기초하여 도입부의 재료가 되돌아오는데, 이 모든 내용은 비발디가 사용한 전형적인 진행과정을 상기시킨다. (예19.1b)에서 푸가 주제는 다시 한 번 교대로 등장하는 현의 음직임으로 완성되는 바이올린 같은 음형으로 움직이며, 반복음과 움직이는 선율 사이에서 매우 빠르게 왔가갔다 하는 특징을 보인다. 전형적으로 바흐의 푸가 형식은 협주곡의 빠른 악장과 매우 비슷하다. 푸가 주제는 관계조나 으뜸조로 되돌아오는 리토르넬로와 유사하게 기능한다. 위와 같은 음악적 진술사이에는 에피소드가 위치하는데, 에피소드는 독주 부분과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종종 더 가벼운 짜임새와 동형진행을 갖고 있거나 조가 변화되는 형태를 지닌다.
북스테후데는 독립적인 푸가뿐 아니라 자유로운 판타지아 부분과 푸가가 교대로 등장하는 프렐류드를 작곡하였다. 1700년 무렵 일부 작곡가들은 프렐류드 (또는 토카나, 판타지아)가 분이되어 있는 푸가를 시도하였고 이러한 관습은 바흐 음악의 표준이 되었다.
토카타 d단조(1708년 이전? BWV564)는 이러한 발전 과정의 중간 단계에 속한다. 아 곡은 단 하나의 푸가를 갖고 있는데 시작과 끝에 토카타 부분이 있고 푸가 안에 토카타 같은 음형이 새로 작곡되어 들어가 있다. 반면, 파사칼리아 c단조(1708년이전? , BWV582)는 이중 푸가(double fugue)의 확장된 전주곡 역할을 하는데, 이 때 푸가 주제들 중 하나가 파사칼리아 주제의 전반부와 동일하다. 2~3악장으로 된 규모의 전주곡들도 몇 곡 있다. 대 판타지아와 푸가 g단조(푸가: 바이마르, 판타지아:쾨텐, BWV542)의 전주곡은 대위법적인 간주곡이 포함된 풍부한 색채의 정열적으로 표현적인 판타지아 또는 토카타이다.
바흐의 푸가 주제의 다양한 유형들과 정교한 선율적 그리고 리듬적 윤곽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바흐의 말년에 쓴 거대한 전주곡 Eb장조와, 같은 조성으로 된 푸가(성 안나의 푸가, BWV552)가 1739년에 출판되었다. 이 2곡은 각기 <클라비어 연습곡집> (Clavier-Ubung: 직역하면 ‘건반연습’으로 바흐는 이것을 4개의 서로 다른 건반 악기 곡집의 표제로 사용하였다.) 제3부의 개시부와 종결부에 놓여있다. < 클라비어 즉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us라 부르는 것)의 찬미가에 바탕을 둔 일련의 코랄 전주곡이다. 바흐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상징하도록 마지막에 내림표(b) 3개를 가지는 조성으로 3중 푸가를 썼다. 이 푸가의 세 부분은 각기 독자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점차로 활기를 더해가는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주제는 다른 2개의 주제와 대위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많은 부분으로 구성되는 푸가(multisectional fugue)는 북스테후데와 그 밖의 바흐 이전의 대가들이 사용한 수법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흐는 그의 초기 작품인 토카타 E장조(BWV566)에서 이것을 사용하였다.
이탈리아 콘체르토의 여러 요소들이 도입되었음은 수많은 토카타와 푸가들, 특히 이 전주곡과 푸가 a단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전주곡에서는 바이올린풍의 음형이 일부는 콘체르토의 총주를 연상시키는 토카타풍의 여러 부분들과 번갈아 나온다. 푸가의 구조는 콘체르토 알레그로의 구조와 유사하다. 바이올린풍의 주제에 바탕을 둔 제시부 들은 총주처럼 으뜸조와 관계조들로 나타나고 여러 개의 에피소드는 독주부로서의 기능을 맡는다. 끝에 가서는 정교한 카텐차가 따른다.
- 트리오 소나타
전주곡이나 푸가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6곡의 트리오 소나타가 있다(BWV 525-530). 바흐의 전기작가 포르켈(J.N.Forkel)에 따르면 이 곡들은 바흐가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을 위해서 라이프치히에서 쓴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바흐가 어떻게 이탈리아의 합주용 트리오 소나타를 독주용 작품으로 고쳐놓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곡들은 3개의 독립된 성부들간의 대위법적 짜임으로 쓰여졌는데, 각 성부는 건반과 양손과 페달에 주어져있다. 악장의 순서(대개 빠름-느림-빠름)와 주제의 일반적인 성격은 그것들의 모델이 된 이탈리아 작품들의 영향을 보여준다.
- 코랄 전주곡
바흐가 바이마르와 쾨텐에 있던 처음 몇 년간 편집한 <오르간 소곡집-Orgelbuchein>은 짧은 코랄 전주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곡집의 편성체계와 의도는 바흐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몇몇 사항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원래 교회력의 전례에 필요한 코랄 선율 164곡을 편곡하려고 하였다. 실제로는 45곡밖에 완성시키지 못했으나 그 계획은 주어진 일의 가능성을 철저히 완수하려고 하는 바흐의 욕망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바흐가 원숙기에 들어서 쓴 악곡 중에는 하나의 커다란 통일 기획에 따라서 작곡된 것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완벽하게 순화되고 있는 조성, <클라비어 연습곡집>에 실려있는 한 주기의 교리문답 코랄, <골트베르크 변주곡집>의 체계적인 악곡배열, <음악의 헌정>에서의 단일주제의 철저한 전개, 또는 <푸가의 기법>에서 모든 유형의 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오르간 소곡집>을 교육용으로 계획 했다는 것 역시 바흐의 특징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표지에는 “초보 오르간 주자에게 하나의 코랄을 발전시키는 모든 종류의 방법과 또한 이들 코랄 들에서는 페달이 완전히 오블리가토(obbligato: 선택이 아닌 필수)로 취급되므로 페달 기법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안내해주는 오르간 소곡집 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만을 찬양하고 동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라고 번역될 수 있는 2행시가 첨부되어 있다. 평생을 통해서 겸허하고 근면한 학생이었던 바흐가 현명하고 친절한 교사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빌헬름 프리데만과 자신의 후처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서 그는 기법과 음악성을 동시에 가르치는 클라비어 소곡집들을 쓰기도 하고 여러 곡을 모으기도 했다. 2성 인벤션과 3성 신포니아는 <평균을 클라비어 곡집> 1권과 마찬가지로 교육용 음악작품들이다.
당대의 습관대로, 바흐가 코랄 전주곡집-교회음악-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쳤다든가 칸타타와 수난곡들의 악보 초두에 J.J(Jesu Juva-예수여, 도와주소서)라고 쓰고 끝머리에 SDG(Soli Deo Gloria-오직 하느님에게 영광 있으라)등의 글자를 써넣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빌헬름 프리데만을 위해 작곡한 건반악기 연습곡집이 I.N.J(in nominee Jesu-예수님 이름으로)라고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거나, 바흐가 통주저음의 목적을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허락된 영혼의 기쁨을 위하여 잘 어울리는 화성을 만들어 내는 것’ 이라고 정의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는 종교적 예술과 세속적 예술 사이의 원칙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2가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었다. 그는 때때로 종교적 가사나 세속적 가사에 또는 순수한 기악작품에 같은 음악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b단조 미사>에 나오는 오산나(Ossana)의 음악은 작센 지방의 선제후이며 폴란드의 왕인 아우구스투스 2세가 라이프치히를 공식 방문했을 때 그를 예우하는 세레나데에서 이미 사용된 것이었다.
<오르간 소곡집>에 실려있는 작품은 모두 코랄 전주곡으로서, 선율은 대개 소프라노에서 완전하고 계속 이어지는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형식으로 전체적으로 한번 들려진다. 선율을 캐논으로 다루는 것도 몇 곡 있으며, 그 중 세곡은 매우 정교한 장식음이 붙은 선율로 되어있다. 코랄 선율의 동기에서 나오지 않고 각각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독립된 동기로 만들어진 반주성부들도 매우 자주 사용된다. 몇몇 예들에 있어서는 회화적 혹은 상징적 동기들로 코랄 가사의 시각적 영상이나 기본이념을 인지시키려는 기법이 보이는데 이러한 전통은 바로크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쉿츠를 거쳐 이탈리아 마드리갈 리스트에까지 거슬로 올라간다.
Chorale Prelude: Durch Adams Fall, BWV 637
바흐의 가장 묘사적인 작품 중 하나는 코랄 <아담의 타락으로 모두가 더럽혀진 – Durch Adms Fall ist ganz verdrbt>을 편곡한 이 곡이다. 타락(Fall)이라는 개념이 협화음에서 시작하여 불협화화음으로 떨어지면서 (순진무구함에서 죄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페달에서 톱날처럼 하강하는 동기로 묘사되고 있다. 최상 성부에는 코랄 선율이 흐르고 있으나 베이스의 들쑥날쑥하게 하행하는 도약 진행은 마치 은총의 상태에서 추락하는 아담을 묘사하는 것 같다. 한편 알토성부에서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반음계적 선율은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뱀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아래로 비끄러지듯 흐르는 테너 역시 유혹에 이끌려 죄에 빠진 슬픔을 결합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회화적 혹은 상징적 암시는 성악 작품에서는 물론 오르간 코랄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표면적 장식을 위해 이러한 회화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며, 그는 언제나 악구의 내적인 음악적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만 이것을 이용하고 있다. 외면적 암시를 시적인 표현으로 바꾼 가장 뛰어난 예들 중의 하나는 <오르간 소곡집>에 나오는 코랄 전주곡인 <오 사람이여, 그대의 큰 죄를 슬퍼하라-O Mensch, bewein dein sünde gross>의 마지막 종지 부분으로, 여기에서는 길게늘여진 adagissimo가 코랄 가시의 끝 구절에 나오는 lange(긴)’라는 가사를 반영하고 있다.
3권의 오르간 코랄 곡집이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대에 편찬되었다. 6곡의<쉬블러코랄> (BWB 645-650)은 칸타타의 악장들을 편곡해 놓은 것이다. 바흐가 1747~1749년에 걸쳐서 수집, 개정한 18곡의 코랄들(BWV 651-668)은 그 이전에 작곡된 것들이다. 그 안에는 변주곡, 푸가, 판타지아, 트리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확장된 코랄전주곡 등 다양한 오르간 코랄 편곡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클라비어 연습곡집-Clavier-Ubung>(BWV 669-689) 제 3부의 교리문답 코랄은 짝을 이루게 되어 있는데. 긴 곡은 오르간 페달을 사용하고 짧은 곡(보통 푸카풍)은 두 손으로만 연주하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은 긴 교리문답과 짧은 교리문답을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보다 더 정확한 목적은 장래의 악보 구입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악기 여하에 따라서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바흐가 후기에 쓴 오르간 코랄은 모두 <오르간 소곡집>에 실려있는 곡들보다 웅대한 규모로 되어 있으며 성격에 있어 덜 직접적이고 덜 주관적으로, 그 이전 작품들이 세부들을 생생하게 표현적으로 처리했던 것과는 달리 보다 형식적인 상징주의 또는 악상의 순수한 음악적 전개를 중요시하고 있다.
Chorale Prelude: Wenn wir in höchsten Noten sein
바흐의 초기와 후기오르간 코랄 간의 차이점은 <우리가 매우 곤경에 놓여 있을 때-Wenn wir in höchsten Noten sein>를 편곡한 두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오르간 소곡집>에 실려있는 곡(BWV 641)을 살펴보면 코랄선율의 첫 4개 음에서 따온 것을 주요동기로 하는 반주 위로 선율이 다채로운 장식을 갖고 나타난다. 그러나 같은 곡을 후에 편곡(BWV 668과 668a)한 것에서 보면, 같은 선율이 <나 이제 당신의 왕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vor deinen Thron tret’ich hiermit>라는 제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바흐는 그 이전의 파헬벨의 코랄 전주곡풍으로 돌아간다. 선율에는 거의 장식이 없고 각 악구는 그 주요동기로 된 짧은 푸가토로 이루어진 아래 3성부에 의해 도입된다.
1.2.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어
바흐의 이 두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은 오르간용 음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인기 있던 모든 장르에 있어서의 걸작들을 포함하고 있다. 전주곡, 판타지아, 토카타뿐만 아니라 푸가와 푸가 양식으로 된 그 밖의 작품들, 그리고 무용 모음곡들과 변주곡 등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초기 소나타와 카프리치오, 여러 가지 다양한 소품들 (많은 교육용 작품들을 포함한),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수반한 콘체르토들도 있다. 물론 라이프치히 시대에 쓰여진 것들로 중요한 작품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이런 음악들의 대부분은 쾨텐에서 작곡되었다. 일반적으로 오르간 작품들처럼 독일의 지방적인 전통이나 전례에 묶여 있지 않았던 클라비어곡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특징들이 혼합되어 있는 코스모폴리탄, 즉 국제적인 특성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 클라비어 모음곡
모음곡에 ‘프랑스’ 그리고 ‘영국’ 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바흐가 아니며 또한 어떠한 묘사적 의미도 갖지 않는다. 두 작품 집에는 고도로 개인적 양식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양식의 특성이 혼합되어 있다. 독일 전통선상에서 각각의 모음곡에는 표준적인 4개의 춤곡 악장들(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지그), 사라반드와 지그 사이에 위치한 부가적인 짧은 악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모음곡들은 각각 전주곡으로 시작되며, 이러한 전주곡들 중에는 바흐가 이탈리아의 합주형식을 얼마나 훌륭하게 건반 악기 용으로 옮겨놓았는가를 보여주는 것도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제 3번 모음곡의 전주곡은 총주와 독주가 교대하는 콘체르토풍의 알레그로 악장이다. (콘체르토 형식을 한층 더 뚜렷하게 적용시킨 악곡은 <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2권에도 있는 < 이탈리아 양식에 의한 콘체르토- concerto in the Italian Style>라는 하프시코드 곡으로 총주와 독주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하여 2개의 건반을 이용하고 있다.
<영국 모음곡>의 무곡들은 프랑스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두블(double), 즉 한 악장의 장식적 반복의 예를 몇 개 포함하고 있다. <프랑스 모음곡>의 경우 제 2악장은 프랑스풍의 쿠랑트가 아니라 이탈리아풍의 코렌테(corrente)인 경우가 더 많다. 무곡의 대부분, 특히 파르티타의 무곡들은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어 바로크 형식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파르티타의 전주곡들은 프렐류디움(praeludium), 프레암불룸(praeambulum), 신포니아(3악장으로 되어있음), 판타지아, 서곡, 그리고 토카타 등의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바로크 후기 건반음악의 다양한 형식과 양식을 아우르고 있다.
제2권이 바흐의 일생을 통하여 여러 시기에 걸쳐 작곡된 많은 악곡들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제1권은 제2권에 비해 양식과 의도 면에서 보다 많은 통일성을 가진다. 그 당시로서는 아직 새로운 평균율 내지는 평균율에 가까운 조율로, 모든 조성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과 더불어 바흐는 제1권을 특별한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썼다. 대부분의 전주곡에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기술적 과제가 연주자에게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이 곡들은 후세대의 용어로 ‘연습곡(etude)’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2성 인벤션과 3성 신포니아뿐만 아니라 바흐의 소규모전주곡들(BWV933-943)의 교육적 목적은 단순히 기술적인 것에만 그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서로 다른 유형으로 된 건반악기 작품들을 전주곡들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1권의 2,7,21번 작품들은 토카타이며, 8번은 트리오 소나타의 그라베(trio-sonata Grave, 소나타의 느린 악장), 17번은 콘체르토 알레그로, 24번은 트리오 소나타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 짜임새, 형식 그리고 처리방법 등에서 놀랄 만큼 다양한 푸가는 단일 주제에 의한 집중적인 푸가 작법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총론을 이루고 있다. 전위, 카논 그리고 확장기법의 사용(제8번, d#단조), 다 카포 종지를 갖는 리체르카레(제1권, 제4번 c#단조)로 나타나있다. 제 2권에서 D장조 푸가(제5번)를 가장 단순한 소재들로 집중적으로 추상화된 음악구조를 이루는 최고의 예라고 한다면 f#단조의 전주곡과 푸가는 주제의 아름다움과 그 균형에 있어서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오르간 푸가에서처럼 바흐의 클라비어 푸가의 각 주제들은 명확하게 규정된 음악적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푸가 전체는 그러한 주제의 논리적 전개를 투영한다.
- 토카타
가장 뛰어난 토카타 중에 f# 단조와 c단조(1717년경, BWV910,911)로 된 곡들이 있다. 이 두 곡은 모두 즉흥 양식으로 된 자유롭고 빠른 경과구로 시작된 곡들이 있다. 이 두 곡은 모두 즉흥 양식으로 된 자유롭고 빠른 경과구로 시작된다. 토카타 f#단조는 푸가로 끝맺는데, 그 주제는 제2악장 주제를 리듬 면에서 변형시켜 놓은 것으로서 옛 변주곡 리체르카레를 상기시킨다. 토카타 c단조는 3화음을 바탕으로 하는 콘체르토풍의 주제를 바탕으로 한 바흐 특유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푸가 중 하나로 이어진다. d단조로 된 반음계적 판타지아와 푸가(쾨텐, 1720년경, 라이프치히에서 개작, 1730년경, BWV 903)는 이 형식에 있어 바흐의 가장 뛰어난 현이 있는 건반악기(stringed-keyboard)작품으로 g단조 오르간 판타지아와 푸가에 비견된다.
바흐는 건반악기음악의 또 다른 독특한 형식, ‘주제와 변주곡’의 대표작을 남겨 놓았다. 1741년 혹은 1742년에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4권으로 뉘른베르크 에서 출판된, 일반적인 <골트베르크 변주곡>으로 알려진 <서로 다른(30개의)변주곡들을 갖는 아리아>는 많은 바흐의 후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철저하게 구성된 기법으로 조직되어 있다.
주제는 균형을 이루고 있는 2개의 부분으로 된 사라반드로서, 주제의 기본 베이스와 화성 구조는 30개의 모든 변주곡들 안에 들어가 있다. 변주곡은 3곡씩 묶여져 있으며, 각 묶음의 마지막 곡은 카논으로서 첫 번째는 동음, 2번째는 2도, 이런 식으로 마지막은 9도차이를 갖고 있다. 마지막 30번째의 변주곡은 쿠오드리베트(quodlibet)로 주제의 베이스 위에서 2개의 대중적인 노래선율이 대위법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것 뒤에는 원래의 주제가 다 카포로 반복된다. 카논으로 되어있지 않은 변주는 인벤션, 푸게타, 프랑스 서곡, 장식적인 느린 아리아를 포함하는 많은 다양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2개의 건반을 위한 현란한 기교적인(bravura)곡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온다. 이러한 변주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분위기와 양식들은, 되풀이되는 베이스와 화성들 그리고 또한 악장들이 대칭적인 질서에 따라 배열됨으로써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전체는 장대한 규모의 구조로 되어 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통해 바흐가 보여준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 방법은 바흐의 다른 많은 작품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종종 <오르간 소곡집>의 코랄 프렐류드와 같이 짧은 시간에 똑같은 유형으로 된 몇개의 곡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평균율 클라비어>의 프렐류드와 푸가 경우에서 보듯이 장르와 기법, 아이디어가 갖는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체계적인 작곡 경향은 말년에 바흐의 범상치 않은 두 작품에서도 명백히 표현된다.
1.3. 음악의 헌정과 푸가의 기법
바흐의 후기작품들 중 두 곡<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BWV1079>과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1080>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부류를 이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바흐는 1747년에 포츠담을 방문했을 때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준 주제(예19.3)를 바탕으로 즉흥연주를 했는데, 앞의 곡은 바로 이 때의 주제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바흐는 라이프치히로 돌아와서는 즉흥곡을 정서하고 또 손질을 가해 완성된 작품을 왕에게 헌정하였다. 여기에는 건반악기를 위한 리체르카레 3성부 곡과 6성부 곡, 플루트(프리드리히 왕의악기), 바이올린 그리고 통주저음을 위한 4악장으로 된 트리오소나타 1곡이 10곡의 캐논과 함께 들어 있다.
1749~50년에 작곡되었고 바흐가 세상을 떠남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아있게 된 <푸가의 기법>은 한 양식으로 된 18곡의 카논과 푸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작품들은 모두 동일한 주제(예19.4) 혹은 그 주제를 변형시킨 것 중의 하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대체로 점점 더 복잡해지는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심원한 대위법의 기법들이 대가다운 솜씨로 쉽게 처리되고 있다. 바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미완성으로 남은 마지막 푸가에는 4개의 주제가 있는데, 이 중에는 바흐의 이름 철자법을 따라 지은 주제도 있다. "Bb-A-C-B" 주제는 Bb과 B에 해당하는 음을 각각 B와 H에 대응시키는 독일어 계명법을 적용하면 "B-A-C-H"가 된다.
1.4. 성악
1723년에 라이프치히는 인구 3만 명의 번창하는 상업도시로서 인쇄와 출판의 중심지이며 유서 깊은 대학교의 소재지로 주목을 끌고 있었다. 이 도시에는 좋은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가 있었다. 1720년에 문을 닫은 오페라 하우스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바흐의 선임자로 있던 쿠나우 에게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는데, 그는 오페라 하우스가 그의 뛰어난 가수들을 빼어가는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에는 대학교 부속 예배당 이외에도 5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는 바흐가 음악을 맡고 있던 성 토마스 교회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는 바흐가 음악을 맡고 있던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스 교회였다.성 토마스 교회에서 운영하던 학교는 역사가 깊은 학교로서 통학생과 기숙생 양쪽 모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학교는 55명의 소년과 청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는데, 이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은 그 보답으로 라이프치히의 4개 교회에서 예배 때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를 하고 그 밖의 음악에 관한 책임을 완수해야만 했다. 자연히 장학생은 일반 학업 성적뿐만 아니라 음악 성적을 고려하여 선발되었다. 칸토르로서 바흐는 학교의 서열상 3번째였다.
임명권은 시의회에 있었는데 교회와 학교 등을 관리하는 단체인 교회회의(con-sistory)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바흐는 시의회가 첫 번째로 선택한 사람은 아니었다. 교회회의는 보다 ‘현대적인(modern)’음악가를 원하고 있었다. 함부르크의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과 다름슈타트의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Christoph Graupner)가 임명제의를 받았었는데 텔레만은 함부르크에서 급료를 인상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 제의를 이용했으며 그라우프너는 고용주로부터 사임허가를 얻어내지 못했다. 바흐는 관례대로 시험을 치르고 건전한 신학적 태도로 시의회를 만족시킴으로써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며 1723년 5월에 그 자리에 취임하였다. 바흐의 직함은 ‘성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겸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이었다. 그의 임무는 하루 4시간의 수업[5]과 함께 교회의 각종 예배를 위한 음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모범적인 기독교적인 삶을 살 의무가 있었고 시장의 허가 없이는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학교건물의 한쪽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그의 서재는2학년 학생들의 교실과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공개적인 예배를 드릴 기회가 부족해 불편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모든 교회에서 매일 예배가 있었으며 축일에는 특별한 축하행사가 있었다. 성 니콜라스교회와 성토마스 교회에서는 일요일에는 상례적으로, 아침 7시에 시작되어 정오까지 계속되는 주일예배 이외에 짧은 예배가 3번 있었다. 주 예배에서는 성가대가 모테트, 루터파의 미사곡(키리에와 글로리아만 있는), 찬미가, 그리고 칸타타를 불렀다.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는 격주의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다. 칸토르는 칸타타를 연주할 차례가 된 교회에서 제1성가대를 지휘했고, 칸토르의 대리자는 다른 교회에서 보다 단순한 음악을 가지고 제 2성가대를 지휘하였다. 동시에 가장 실력이 낮은 가수들로 구성된 제2, 제4성가대는 또 다른 2곳의 교회에서 보다 평범한 수준의 음악을 담당하였다. 1730년 바흐가 시의회에 제출한 탄원서를을 보면 제1, 제2, 제3 성가대에서 최소로 필요로 하는 인원은 각각 12명의 가수(각 성부에 3명씩)등이었고 제 4성가대에서는 8명의 가수를 필요로 했다고 적고 있다.
- 교회 칸타타
교회 칸타타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루터교 예배에서 뚜렷이 그 진가를 드러냈다. 2개의 주 교회인 성 니콜라스와 성 토마스 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번갈아 가면서 1개의 모테트와 키리에, 코랄 그리고 한개의 칸타타가 포함된 주일예배가 열렸다. 바흐는 최고 수준의 가수가 포함된 첫 번째 성가대를 감독했으며, 이는 곧 그 교회에서 칸타타를 들을 수 있는 순서가 됐음을 의미하였다. 반면 부지휘자는 중요한 또 다른 교회에서 2번째 합창단을 지휘하였다. 3번째, 4번째 합창단은 경험이 부족한 가수로 구성되어 나머지 다른 두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적절히 제공해 주었다. 바흐가 시위원회에 보낸 1730년 메모에는 이상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지정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처음 세 합창단 각각에 딸린 12명이 다성음악을 노래하고 4번째 합창단 소속의 8명은 단지 단성성가만 노래하라고 적혀 있다. 칸타타에는 독창자와 2~3명의 작은 합창단(ripienist)[6]을 각 성부 (소프라노, 알토,테너,베이스)에 배치하라고 명하였다. 독창자들은 독창 진행을 노래하고 합창 진행 부분에서는 작은 합창단과 깉이 불렀다.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부분들을 보면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바흐는 다 합쳐 최소한 4명이나 8명의 가수만 갖고도 칸타타를 지도했음을 보여 준다. 칸타타를 반주했던 오케스트라에는 콘티누오 현악기, 2~3개의 오보에, 1~2개의 바순이 포함되어 있었고, 때때로 플루트로 편성이 확대되기도 하고 축제 같은 때에는 트럼펫과 팀파니가 추가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라이프치히의 교회는 매년 58곡의 칸타타를 필요로 하였고, 거기에 예수 수난 성금요일[7]에는 수난곡, 연3회의 축일의 저녁예배(Vespers)를 위한 마니피카트(Magnificat), 시의회의 취임식을 위한 매년 한 곡의 칸타타, 그리고 칸토르가 별도의 사례를 받는 장례식 모테트나 결혼식 칸타타 같은 행사음악 등이 추가되었다. 1723년과 1729년 사이에 바흐는 60개의 칸타타 각각에 대하여 1년에 최소한 3개에서 가능한 4개에 이르는 완전한 칸타타 연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1730년대와 1740년대 초기에 쓰여진 칸타타는 다섯번쨰 연곡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과 네 번째 연곡의 많은 부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략 그의 교회 칸타타 중 200개 정도가 보존되어 있다. 대부분은 라이프치히를 위해 새로 작곡되었지만 다른 것은 뮐하우젠과 바이마르에서 지내면서 만든 초기 작품들이다. 나아가 쾨텐과 라이프치히에서 바흐가 후원자 생일을 축하하거나 기타 축제 행사를 위해 작곡한 20개의 세속 칸타타가 남아있다. 이러한 세속 칸타타들은 전형적으로 단 한 번의 행사를 위해 연주되었기 때문에 (그림19.7)에서 보듯이 바흐는 종종 교회 칸타타로 세속 칸타타를 재사용하기도 하였다.
교회칸타타 혹은 하우프트무지크(주요 음악 Hauptmusilk)는 라이프치히에서의 루터파 전례의 중요한 요소였다. 가끔 주제는 예배순서에 있어 칸타타가 뒤따르게 되어 있는 복음서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었다. 바흐는 1714년 라이프치히를 방문했을 때 예배의 식순, 특히 음악이 나오는 순서를 칸타타 제61번의 표제 뒷장에 적어놓았다.(인용문 참조)
라이프치히에서의 예배순서-바흐의 요약, 1714
1)전주곡 연주
2)모테트(motetta)
3)키리에로된 전주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합주음악(concert-ed music)으로 연주된다
4)제대 앞에서의 인토네이션(영창)
5)사도 서간문 낭독[8]
6)탄원(the Litany)기도 노래
7)코랄에 의한 전주곡(과 코랄연주)
8)복음서 낭독
9)본작품(칸타타)의 전주곡(과 칸타타 연주)
10) 사도신경 노래(루터의 신경 찬송가)
11) 강론
12) 강론 후 평상시대로 찬미가 몇 절 노래
13) (성찬식)제정말씀
14)작품의 전주곡(과 그 연주)-(칸타타의 2번째 부분인 듯 싶음) 그 다음에는 전주와 코랄을 노래해는 것이 영성체가 끝날 때까지 교대로 계속된다.
1)전주곡 연주
2)모테트(motetta)
3)키리에로된 전주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합주음악(concert-ed music)으로 연주된다
4)제대 앞에서의 인토네이션(영창)
5)사도 서간문 낭독[8]
6)탄원(the Litany)기도 노래
7)코랄에 의한 전주곡(과 코랄연주)
8)복음서 낭독
9)본작품(칸타타)의 전주곡(과 칸타타 연주)
10) 사도신경 노래(루터의 신경 찬송가)
11) 강론
12) 강론 후 평상시대로 찬미가 몇 절 노래
13) (성찬식)제정말씀
14)작품의 전주곡(과 그 연주)-(칸타타의 2번째 부분인 듯 싶음) 그 다음에는 전주와 코랄을 노래해는 것이 영성체가 끝날 때까지 교대로 계속된다.
바이마르에서 작곡된 칸타타들 중에서 특히 1714년의 제61번 <오라, 이방인의 구세주여>는 면밀하게 연구해 볼 만하다.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Erdmann Neumeister)가 작사한 가사는 코랄 시구들과, 새로 만들어진 운문시와 성경에서 발췌한 산문들이 결합되어 있다. 개시악장은 코랄<Num,Komm, det Heiden Hei-land>의 가사와 선율에 기초하고 있는데, Bach는 이것을 이용하여 프랑스 서곡의 양식과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변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런 장르를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바흐는 이 당시 외국적인 여러 양식을 자신의 작품 안으로 동화시키는 데 몰두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이 곡이 교회력의 시작, 즉 ouverture인 대림절 첫번째 주일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속적 형식과 루터파 찬미가를 장식한 것의 병치는 젊은이다운 독창성으로 가득 차있어 예술작품으로서 가치를 완벽하게 인정받을 만하다. 구세주의 도래를 알리는, 행의 길이가 고르지 못한 하나의 절(stanza)인 첫 번째 레시터티브는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카바타(cavata)란 기법을 빌어온다. 이 기법은 어느 한 레시터티브의 마지막 시행 혹은 시행들에서 짧은 아리아 악절을 위한 가사를 끌어오는(cavare)것이다. 보다 형식을 갖춘 약강격(iambic)의 절로 된 첫 번째의 진정한 아리아는 시칠리아노(sicilano)로-민속무용에 바탕을 둔 또 하나의 오페라 장르- 이는 달 세뇨 반복, 즉 첫 번째 리토르넬로를 생략한 다 카포를 사용한다. 교회로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대목을 바흐는 목가적인 연가로 바꾸었다.
요한 묵시록 3장 20절에서 발췌한 산문가사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에 작곡한 그 다음의 레시터티브는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 앞뒤에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5성부 현악 합주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뒤따르는 아리아에서 노이마이스터는 그리스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여는 경배자의 감정을 토로하는 강약격(trochaic)의 시를 썼다. 이것은 다 카포를 갖는 통주저음 아리아라는 친숙한 매개체로 되어 있다. 마지막 악장은 코랄<Wie Schon leuchtet der Morgensten>의 후렴<Abgesang> 중의 마지막 절의 마지막 몇 행 “오소서, 그대 아름다운 면류관이시여”부분을 모테트풍으로 정교하게 다듬어놓았으며, 여기서 면류관은 성악성부들 위에 자리한 바이올린 군의 음형의 화환으로 암시되어진다.
그의 칸타타들 중에서 약 200곡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는 라이프치히를 위해 새로 작곡된 것들도 있고, 그 이전의 작품들을 다시 고쳐놓은 것들도 있다. 초기의 칸타타에서는 가사에 나타나는 감정과 이미지 변화에 대한 작곡가의 시적인 반응이 강렬한 극적 표현과 예측할 수 없으리만큼 다양한 형식의 음악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 있으며, 후기의 라이프치히 칸타타들은 감정 면에서 비교적 덜 주관적이고 구조적인 면에서는 규칙적이다. 그러나 바흐의 칸타타가 지니는 무한한 다양성과 풍부한 창의성, 기술적 완성도, 종교적 헌신 등은 일반적인 어떤 표현으로도 묘사가 힘들다. 이와 같은 광대한 음악적 보고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칸타타 제4번과 제80번》
바흐는 그의 칸타타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코랄 선율을 사용하였다. 칸타타 제4번인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 누우셨네-Christ lag in Todesbanden>는 그 이전의 곡을 개작해서 1724년에 라이프치히에서 불려지긴 했지만 옛 코랄 변주곡의 형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치히 시대에 쓰여진 칸타타의 가장 일반적인 골격은 1715년에 작곡되고 그 이후(1723) 개작된 제80번 < 내 주는 강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에서 사용된 것이다. D장조의 첫 합창은 코랄 첫 절의 가사와 선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웅대한 판타지아이다. 코랄의 선율선을 자유롭게 변형한 성악 선율선이 각 악구를 차례로 푸가풍으로 도입하면, 트럼펫의 이 악구의 장식 없는 연주가 클라이맥스로서 클라리노(clarion)음역에서 이어지며[9], 이 때 베이스 악기가 엄격한 카논으로 여기에 응답한다. 이런 식으로 선율은 각 악구 악구를 늘임으로써 223마디나 되는 거대한 음의 건축물이 된다. 다음 곡 역시 D장조로서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위한 2중창이다. 소프라노가 장식된 선율로 제2절 코랄 가사를 부를 때 베이스는 한층 더 장식적이긴 하지만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선율로 소프라노 가사에 적당한 주석이 되고 있는 별개의 가사를 부른다. 여기에 반주는 동음(unisono)으로 연주하는 현악기군의 끊임없는 결렬한 16분 음표 음형과 8분음표로 움직이는 통주저음성부가 맡고 있다. 짜임새는 4개의 독립된 대위법적 성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음역의 독주소프라노는 오보에에 의해 중복되고 더욱 장식된다. 이어서 베이스를 위한 레시터티브와 아리오소, 그리고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B단조)가 나오는데 둘 다 삽입된 시의 가사로 되어 있다. 코랄의 제 3절은 코랄 전주곡의 형식으로 작곡되고 그 선율은 유니즌 합창으로 나타나는데, 이 때 각 악구는 활기찬 박자의 리듬으로 오케스트라 전체에 의해 도입되며 반주된다. 그 뒤로 테너를 위한 레시터티브-아리오소와테너, 알토를 위한 조용히 진행되는 2중창(G장조)이 계속되고, 성악 성부를 중복하여 연주하는 악기들과 함께, 전체합창(회중들 또한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을 위한 꾸밈없는 4성부 합창으로 코랄의 마지막 절이 제4절이 불려지면서 칸타타는 끝을 맺는다.
이 곡처럼 확장된 코랄 판타지아로 시작하여 같은 코랄의 간단한 4성부 화성편곡으로 끝맺으며, 중간 곡들에서 코랄 선율 혹은 가사를 이용하거나 다르게 편곡한 칸타타들이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기에 많이 작곡되었다. 정신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그것들은 모두 교회 전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모든 칸타타를 하나로 묶는 통일적인 구도는 없다. 2개 이상의 코랄을 사용하며 칸타타가 많긴 하지만. 끝날 때에만 코랄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또 코랄 가사 또는 그것의 패러프레이즈를 사용하면서도 몇몇 절에는 새로운 음악을 붙인 것도 있으며 코랄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몇 곡 있다. 이시기에는 또한 독창 칸타타도 몇 곡 있는데 그 중에서도 소프라노를 위한 제 51번과 베이스를 위한 제82번이 특히 주목할 만 하다.
1724년 예수 강림절 첫 일요일을 위해 작곡된 Nun komm, der Heiden Heiland (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 BWV62는 바흐의 칸타타가 진닌 일부 전형적인 진행을 잘 보여주고 있다. 라이프치히를 위해 작곡한 2번째 연곡에 속해 있는 이 곡은 음악과 가사가 코랄에 기초하고 있는 코랄 칸타타이다. 이 칸타타 텍스트를 쓴 무명시인은 시작과 결말 부분의 합창을 위해 코랄의 처음과 마지막 연 (stanza)을 사용하였고, 시의 중간 연을 레치타비보와 아리아에 적합하게 패러프레이즈하였다. 그 뒤에 바흐는 도입부 합창을 코랄 선율에 기초해서 만들었으며 종결 부분의 연을 위해서는 코랄을 단순한 4성부로 화성화하여 작품을 마무리했다. 중간 부분은 독창을 위해 오페라 양식으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음악을 붙였고 몇 부분만 코랄 선율 자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 칸타타를 위해서 바흐와 대본 작가는 루터의 예수 강림절 코랄인 <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를 활용하였다.
우리가 바흐 코랄 작품을 보면 자주 알 수 있듯이, 합창 도입부에는 온갖 정교하고 독창적인 여러 장르가 섞여 있으며, 이 곡에는 협주곡과 코랄 모테트가 등장한다. 오케스트라는 비발디 협주곡이 그러했듯이 활기찬 리토르넬로로 시작하는 반면, 코랄은 (예19.5)와 같이 베이스에서 고정 선율로 기능하는 특징을 보인다. 반복하며 상행하는 음형은 구세주가 오심을 알리는 코랄 가사 문맥에 맞춰 환영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협주곡에서도 이 리토르넬로는 악장을 이루는 하나의 틀로 작용하여 마지막에 으뜸조로 완전히 반복되기 전 축소되거나 이조된 형태로 세 번이나 재등장한다. 한편 에피소드 대신 바흐는 합창 부분에 있는 4개의 코랄 악구를 소개하여 고정 선율 양식으로 음악을 붙였다. 호른으로 중복되고 있는 소프라노는 각각의 악구를 긴 음가로 부르고 다른 세 성부는 모방 대위법으로 움직인다. 그러는 동안 오케스트라는 리토르넬로에서 나온 동기를 계속해서 발전시킨다. 코랄에 기초하여 체계적 모방기법으로 움직이는 저음 성부에 이어 첫번째와 세번째 악구가 제시된다. (예19.6)은 첫번째 코랄 악구를 위해 그에 앞선 모방과 그 뒤를 이어 소프라노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모델을 혼합하고 구양식인 대위법과 고정 선율이 현대적인 이탈리아 양식과 섞여있는 것이 바로 바흐 음악의 특징적인 모습이며 이러한 특성으로 바흐는 익숙한 많은 음악 유형을 참조하여 깊이 있는 음악적 의미를 창조하였다.
4개의 독창 진행은 오페라 표현 방식으로 신앙적인 가사에 음악을 붙였다. 테너가 부르는 다카포 아리아는 육화(incarnation)(된 신비를 명상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라고 하듯 바흐는 뚜렷이 구분되는 4마디 악구로 섬세한 양식의 미뉴에트 스타일의 아리아를 만들었고, 춤을 통해 육체의 느낌을 깨우는 느낌이 떠오르게 된다. 그 다음 베이스가 부르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는 구세주를 악을 누른 영웅으로 칭송한다. 레치타티보는 단어 '달린다' (laufen) 부분에서 가사 그리기(word-painting)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리아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내내 옥타브로 연주하고 빠른 진행과 넓은 음역의 움직임, 도약하는 아르페지오를 강조하는 음형으로 영웅적이고 용감한 아리아를 만드는 오페라 관습을 따르고 있다. 소프라노와 알토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로 결합되어 탄생 장면을 보고 경외심을 갖는 모습을 표현하듯이 병행3도와 6도로 부드럽게 진행한다. 종결부의 코랄 운문은 영광송의 형태로 마친다.
- 세속 칸타타
바흐의 세속 칸타타는 대개 음악극(drama per musica)이라는 표제를 가지며 다양한 경우를 위해 작곡되었다. 같은 음악의 일부를 세속 칸타타와 교회 칸타타 양쪽에 사용한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컨대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중 11곡은 세속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잇으며, 이 곡들 중 6곡은 <갈림길의 헤라클레스- Hercules auf dem Scheidewege>(BWV 213)에 수록되어 있다. ‘음악극’ 으로 가장 뛰어난 것들 중에 <푀부스와 판> (BWV 201)과 1733년 아우구스투스 3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쓰여진 <다가오라, 물결치는 파도여-Schleicht spielendeWellen>(BWV206) 등이 있으며, 또한 <커피칸타타> (1734-35년경,BWV 211)와 익살스러운 <농민 칸타타>(1742 BWV212)는 바흐의 보다 가벼운 음악으로서의 유쾌한 실례가 되어주고 있다. 1730년대의 칸타타들 중 몇 곡에서 바흐는 새로운 갈랑(gallant) 양식을 시도하였다. 그는 성악 선율을 강조하는 한편 반주부를 정교하게 만들려는 자신의 성향을 누그러뜨렸으며, 새로운 오페라 양식의 또 다른 매너리즘에 몰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선행, 후행 악구들이 대칭적으로 분할되는 선율들을 만들어냈다.
- 모테트
바흐 시대에 라이프치히에서 모테트라는 말은 성서나 코랄 가사에 오블리가토의 기악성부를 가지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대위법 양식으로 쓰여진 합창곡을 의미하였다. 라이프치히의 교회들에서 부르던 모테트는 비교적 짧은 길이에 예배를 시작하는 음악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보통 그것들은 옛 작품들의 전통적인 목록에서 선택되었으며 칸토르가 새로운 모테트를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남아있는 바흐의 6곡의 모테트들(BWV225-230)은 추도예배, 장례식, 혹은 생일과 같은 이중 합창용이다. 성악 성부들은 항상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지만, 바흐 시대에는 이러한 곡들이- 예를 들어 모테트 양식으로 되어 있는 칸타타 제38번의 첫 합창처럼 –악기로 중복되었을 것이라는데 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테트 중에는 코랄 선율이 들어가는 것이 많이 있다. 5성부로 된 <나의 기쁨 예수-Jesu meine Freude>에서는 11개의 악장 중 6개가 코랄을 사용하고 있다.
5성부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대규모의 <마니피카트>(1723, 1728~31년경 개작, BWV 243)는 바흐의 작품 중 가장 선율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양식 면에서 그의 대부분의 교회음악과 비교해 보다 더 이탈리아적이다. 1734-35년 라이프치히에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오라토리오>(BWV 248)는 크리스마스와 주현절(삼왕예배의 축일)에 부를 수 있는 6곡의 칸타타를 모은 것이다. 성서이야기(누가복음 2장 1~21, 마태복음 제 2장 1~12)는 레시터티브로 불려지며, 적절한 아리아와 합창들이 다양한 에피소드에 대한 주석이나 반영으로 덧붙여진다. ‘오라토리오’라는 명칭은 보통의 칸타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체의 요소가 있음으로 해서 정당화되고 있다.
- 수난곡
교회음악가로서 바흐가 그 장점에 이른 작품성은 성 요한과 성 마태 복음서에 의한 수난곡이다. 구조 면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 두 작품들은 오라토리오 양식으로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를 작곡하는 북부 독일의 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바흐는 <요한수난곡>(1724, 후에 개정,BWV 245)은 요한복음서 18-19장, <마태오 수난곡> (1727, 1736년 개정)은 마태오 복음서 26~27장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 14곡의 코랄 이외에, 자신의 시구를 비롯하여 그 당시 널리 애창되던 브로케(B.H.Brockes)의 수난시대를 추가된 서정적인 곡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사용하였다. 1724년 라이프치히에서 성금요일에 초연되었던 이 곡은 후에 여러 번 수정되어 연주되었다.
1727년 성 금요일에 초기 형태로 초연되었던 2중 합창(double chorus), 독창, 2중 관현악 그리고 2개의 오르간을 위한 <마태오 수난곡>(BWV 244)은 서사적인 장대함을 지닌 극(drama)으로, 모든 음악 분야에 있어서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들 중 가장 고귀한 영감에 넘쳐있는 작품이다. 가사는 마태복음서의 제26장과 제27장에서 가져왔으며, 이것은 테너 독창의 레시터티브와 합창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곳곳에 아리오소 레시터티브가 앞에 붙어있는 수많은 아리아, 코랄, 2중창들이 삽입된다. <수난코랄>은 서로 다른 조성과 4종류의 각기 다른 4성부 화성으로 다섯 번 나타난다. 이 수난곡에 덧붙여진 레시터티브와 아리아의 가사를 쓴 작가는 헨리치(C.F.Henrici 1700-64, 필명, 피칸더(Picander))라는 라이프치히의 시인으로 이 밖에도 바흐의 수많은 칸타타에 기사를 썼다. <요한 수난곡>에서와 같이 합창은 때때로 사건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리스 연극의 합창과 같이 사건에 반응하거나 사건을 소개하는 발언하는 관객이기도 하다. 제1부의 처음과 마지막 합창은 방대한 코랄 판타지아로서, 첫 곡에서 코랄 선율은 소프라노 성부들로 이루어진 특별한 리피에노 성가대에게 주어진다.
<마태오 수난곡>은 루터파 개신교 음악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이 안에 있는 코랄, 콘체르타토 기법, 레시터티브, 아리오소, 그리고 다 카포 아리아들은 하나의 종교적 주제를 통괄하는 장엄함을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다. 코랄을 제외한 이 모든 요소들은 이 시대 오페라의 특성이기도 하다. <마태오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이 모두 극적이고 연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흐는 비록 한 교회의 오페라도 쓰지 않았지만 오페라의 어법, 형식, 그리고 그 정신은 수난곡들 안에 충분히 나타나 있다.
두 수난곡 모두 테너가 레치타티보로 성경 이야기를 언급하면 독창자들은 예수와 다른 인물 역을 연기하고 합창은 제자들과 군중을 비롯한 다른 집단의 가사를 노래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리스극에 나오는 합창의 역할처럼 합창이 사건을 진술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 끼어든 레치타티보, 아리오소, 아리아는 유사한 목적으로 작용하며 이야기를 반영하여 개별적인 숭배자와 의미를 관련시킨다. 이제는 비록 거대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연주되지만 연주 부분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바흐의 수난곡이 단지 4명의 독창과 4병의 작은 합창단을 위한 것으로 의도됐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가수는 자기들끼리 역할을 나누기도 하고 합창 진행 시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 B단조 미사
b단조 미사는 통일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747년과 1749년 사이에 바흐가 전에 작곡해 놓은 음악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었다. 키리에와 글로리아는 1733년에 폴란드의 왕이며 작센 지방의 선제후였던 프레데릭 아우구스트 2세에게, 그 교회의 명예직에 임명해달라는 청원서- 이 청원은 3년 후에야 겨우 받아들여졌다-와 함께 헌정된 것이다. 상투스는 1724년 크리스마스 때 초연되었다. 다른 악장들 중 일부는 칸타타의 합창부분들을 빌려오기도 했는데, 이 때 독일어 가사는 미사곡의 라틴말로 대체되었고 음악은 때때로 다시 작곡되었다. 이들 중 글로리아의 두 부분(section), <감사드립니다Gratias agimus>(이 음악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Dona nobis pacem>에도 반복 사용)와 <퀴 톨리스 Qui tollis>는 각각 칸타타 제29번(1731)과 칸타타 제46번(1723)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바흐가 크레도에 다른 이름을 붙인 ‘심볼룸 니체눔(Symbolum nicenum)’ 중 이미 작곡된 음악에서 가져온 부분들을 살펴보면 칸타타, 제 12번(1714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Crucifixus>, 칸타타 제 120번(1728-29)에서 “Et expecto”, 칸타타 제 171번(1729?)에서 “Patrem omnipotentem”, 1734년 세속 칸타타 제 215번에 재사용된 1732년의 분실된 칸타타에서 “Osanna”, 그리고 칸타타 제 11번(1735)에서 가져온 “Agnus Dei” 등이 있다. “Et resurrexit”는 어느 분실된 콘체르토 악장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새롭게 작곡된 부분들은 크레도의 첫 부분인 Et in unum Dominum”, “Et in spiritum”, 그리고 베네딕투스이다. 새로 작곡된 부분들 중에 크레도와 ‘Confiteor’는 옛 양식(stile antico)’으로 쓰여졌으며, 반면 “Et in unum Dominum”, “Et in spiritum” 그리고 베네딕투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 모두와 첨예하게 대조를 이루는 ‘근대적 양식(modern style)’으로 되어 있다. 라틴어 미사의 축소된 형식이 전례에 여전히 사용되고 있던 라이프치히에서 몇 개의 부분이 연주되었지만, 바흐는 이 작품 전곡이 연주되는 것을 듣지는 못했다.
2대의 오보에 다모레(oboe d'amore)와 베이스 독창을 위한 <Et in spiritum sanctum>은 수많은 바흐의 후기 작품들처럼 반복되는 악구들. 병행 3도, 그리고 느린 화성적 리듬과 같은 갈랑(gallant) 양식의 흔적을 보여준다. 더욱, 현대적인 특징은, 성악성부가 노래할 때 오블리가토 악기들에 대해서는 piano를, 노래하지 않을 때는 forte를 명시함으로써 기악 부분을 성악 성부에 종속시키는 데 많은 신경을 쓴 점이다. 이 아리아는 기악 리토르넬로와 정교한 성악 성부가 함께 같은 주제를 공유하는, 이례적으로 하나의 주제를 갖는 곡이다. 구조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A장조, E장조, 그리고 다시 A장조로 돌아가는 12마디의 리토르넬로로 된 세 부분의 생략되지 않은 악구이다. 때때로 어색한 가사 붙임은 그 음악이 원래는 다른 가사에 붙여졌던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반면 Confiteor(NAWM 91b)는 분명히 처음부터 이 가사에 붙여졌던 음악임에 틀림이 없다. 크레도의 시작 부분에서처럼 바흐는 여기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크레도 Ⅱ(Liber uduslid)로부터 적절한 대목을 전선율로(73마디에서 시작하는 테너에서 찾을 수 있음) 취하고 있다. 합창 성부들은 알라 브레베(allabreve)박자표 (C)와 푸가적 진행으로 특징지워지는 ‘옛 양식(stle antico)’ 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통주저음 반주는 준 오스티나토 베이스로 근대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Et expecto”라는 가사에서 바흐는 정선율을 쓰지 않고 극도의 반음계와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과도적인 아다지오를 썼는데. 이것은(빠른 템포로의 변화로 나타내어지는)부활로 인해 부정될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립니다-Et expecto resurrectionem mortuorum>(NAWM91C)라는 가사를 반복하며 뒤따르는 화려한 비바체와 알레그로는 합창<외쳐라, 그대 즐거운 음성이여Jauchzet, ihr erfreuten Stimmen>의 개작으로, 여기에서 칸타타 합창의 순수기악음악의 일부가 코랄풍의 푸가를 반주하도록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다.
새로운 상황을 위해 전에 작곡한 음악을 개작하는 바흐의 습관은 과중한 업무에의 독특한 적응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많은 생각과 창조적 에너지를 쏟아 부었었던 것을 다소 다른 모습의 음악으로 새롭게 들을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의 목표는 당면한 연주가 아니라 전통적인 가톨릭 미사(Mass)라는 매개체 안에서 보편적인 종교적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방식으로 바흐는 정선된 단명할 뻔했던 악장들에게 그것들이 충분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영속성을 부여하였다 만약 그가 이것을 후대까지 이르는 미사곡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불멸성에 대한 어떠한 환성도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아마도 팔레스트리나를 제외하고는 그의 전에 있던 어떤 작곡가도 바흐가 후세에 누렸던 것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5. 그 외
바흐는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6곡(쾨텐, 1720, BWV 1001-1006)과 <무반주첼로를 위한 모음곡> 6곡(쾨텐, 1720년경, BWV 1007-1012), 그리고 <무반주 플루트를 위한 파르티타>1곡(BWV1013)을 작곡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독립된 성부들의 상호작용을 대체적으로 윤곽을 지우거나 암시하는 중음주법 또는 단독의 선율선을 통해서 화성적, 대위법적 구조를 실제 들리는 것처럼 만드는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러한 기법은 르네상스의 류트작곡가 들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프랑스의 류트 작곡가들과 클라브생 작곡가들의 양식과도 관련이 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d단조>의 샤콘은 이러한 형식으로 된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합주 형식을 된 실내악으로서 중요한 바흐의 작품들로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쾨텐, 1717-23, BWV1014-1019), <바이올린 다 감바와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쾨텐 1720년경 BWV1027-1029), <플루트와 하프시코드를 의한 소나타>(주로 쾨텐, 1717-23, BWV 1030-1035)가 있다. 이 작품들 대부분은 교회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 의 순서로 된 4개의 악장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하프시코드의 왼손성부가 통주저음을 연주할 때 오른손 성부는 다른 악기의 선율과 대위법적으로 2중주를 이루는 돌입된 하나의 선율선을 연주하도록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 이러한 곡들 대부분은 트리오 소나타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양식과 독일 양식의 배합은 쾨텐에서 작곡되어 1721년 브란테부르크 후작에게 헌정된 바흐의 6곡의 콘체르토(BWV 1046-1051)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첫 번째 곡을 제외한 모든 곡에서 바흐는 이탈리아 콘체르토에 흔히는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 구조를 사용하였으며, 3화음으로 된 주제, 쉼 없이 몰고 가는 리듬, 그리고 알레그로 악장의 리토르넬로 형식도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독주와 총주의 주제적 통합으로 심화하고<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 제5번의 긴 카덴차와 같은 기법들로 형식을 확장하며, 같은 콘체르토의 다 카포 형식으로 된 것처럼 정교하게 발전된 푸가를 도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수많은 독특한 특성을 그것들에 각인시켜 놓았다. <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의 제 3번과 제6번은 특정한 독주악기들이 없는 리피에노 콘체르토(ripieno concerto)이고, 그 밖의 곡들은 현악과 통주저음으로 된 악기군에 대해 다양한 조합의 독주악기들이 사용되고 있는 콘체르토 그로소이다.
바흐는 또한 독주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그리고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한곡의 콘체르토)2곡을 썼으며, 하프시코드를 위한 콘체르토를 쓴(혹은 편곡한)최초의 작곡가 중 한 사람 이었다. 그는 독주 하프시코드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를 7곡. 2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3곡, 3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2곡, 그리고 4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을 1곡 작곡했는데 이 마지막 곡은 비발디의 <4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를 편곡한 것이다. 사실, 모두는 아니더라도 하프시코드 콘체르토의 대부분은 바흐 자신이나 다른 작곡가들에 의한 바이올린 곡을 편곡한 것이다. 게다가 바흐는 그의 실내음악과 관현악 작품들 중 몇 개 의 악장들을 라이프치히 시대에 칸타타용으로 편곡하였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E장조>(BWV1006)의 전주곡은 칸타타 제 29번의 신포니아로서 대교모의 관현악 편곡이 되어 있다.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 제3번의 1악장은 관현악에 2개의 호른과 3개의 오보에가 덧붙여져서 칸타타 제174번의 신포니아가 되었다. 또한 독주 클라비어 콘체르토의 악장은 적어도 5개 이상 칸타타에서 발견된다. 칸타타 제 110번의 첫 번째 합창은 <관현악 모음곡 D장조>(BWV1069)의 제1악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대부분의 다른 관현악 음악은 바흐가 라이프치히 콜레기움 무지쿰 (Collegium musicum)을 감독했을 당시인 1730년대 작곡되었다. 이 음악 닽체는 거의 다 대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8세기 초엽 이러한 기관들은 종종 공공 음악회를 개최했는데, 이름 아래 그림에서 보는 야외음악회와 유사한 형태였다. 라이프치히의 콜레기움은 1704년 텔레만이 설립한 이후 위와 같이 연주해왔다. 바흐는 분명 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d단조 협주곡을 위의 음악회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작곡하였다. 또한 바흐는 처음으로 1개 혹은 그 이상의 하프시코드와 관현악을 위한 협조곡을 작곡하거나 편곡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건반악기에 앉아 연주하면서 협주곡을 지도하였다. 4대의 하프시코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4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비발디 협주곡을 편곡한 것이다. 4개의 서곡(Overtures), 다시 말해 관현악 모음곡(쾨텐과 라이프치히, BWV 1066-1069)에는 바흐의 가장 원기왕성하고 매력적인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편성에 트럼펫과 팀파니가 덧붙여진 모음곡 제3번과 제4번이(라이프치히, 1729-31)옥외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G선상의 아리아>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제3번 모음곡의 느린 악장을 편곡해 놓은 것이다.
[1]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집을 다시 녹음해 발표하면서 한 말이다.[2] 바흐 이후 한정으로 종교분야는 아예 독보적이고 오르간 분야에서는 그나마 양적인 측면에서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세자르 프랑크나 샤를-마리 위도르(Charles-Marie Widor), 알렉상드르 길망 등을 위시한 프랑스 오르간 악파들이 다수의 오르간곡을 남겼다.[3] 다른 독일 주들과 마찬가지로 라이프치히 시에서도 오페라 극장을 건립하긴 하였으나 흥행에는 크게 실패해, 바흐가 라이프치히가 오기 전인 1720년 문을 닫았다.[4] 굳이 비유를 들자면 희곡 분야의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역시 당대의 유행에 충실한 문법으로 연극 대본을 창작했지만 그 작품들의 깊이와 시사성이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널리 읽히고 널리 상연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연극으로 상연될 때마다 연출자와 배우의 성향에 따라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해석들이 표출되는데, 바흐의 음악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말 제각각의 해석으로 연주된다.[5] 음악은 물론 라틴어도 가르쳐야 했다.[6] 이탈리어의 '리피에노'에서 유래한 용어로, 가득 찼다는 뜻[7] 부활절 이틀 전의 금요일[8] 사도 바울의 서신서[9] 현재 이 칸타타의 트럼펫 성부들은 바흐 사후에 그의 아들 프리데만이 붙인 것으로 믿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