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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성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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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천白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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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平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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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천文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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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中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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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산郭山
철산鐵山
용천龍川
순천順川
희천熙川
이산理山
벽동碧潼
운산雲山
박천博川
위원渭原
영원寧遠

현령(縣令, 종5품) 파견
용인龍仁
진위振威
영평永平
양천陽川
금포金浦
문의文義 영덕盈德
경산慶山
동래東萊
고성固城
거제巨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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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昌平
용담龍潭
임피臨陂
만경萬頃
금구金溝
능성綾城
신계新溪
옹진瓮津
문화文化
우봉牛峯
금성金城
울진蔚珍
흡곡歙谷
용강龍岡
삼화三和
함종咸從
영유永柔
증산甑山
삼등三登
순안順安
강서江西

현감(縣監, 종6품) 파견
지평砥平
포천抱川
적성積城
과천果川
금천衿川
교동喬桐
통진通津
교하交河
연천漣川
음죽陰竹
양성陽城
양지陽智
가평加平
죽산竹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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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堤川
덕산德山
평택平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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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懷仁
정산定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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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延豐
음성陰城
청안淸安
은진恩津
회덕懷德
진잠鎭岑
연산連山
이산尼山
대흥大興
부여扶餘
석성石城
비인庇仁
남포藍浦
진천鎭川
결성結城
보령保寧
해미海美
당진唐津
신창新昌
예산禮山
목천木川
전의全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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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永春
보은報恩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아산牙山
개령開寧
거창居昌
삼가三嘉
의령宜寧
하양河陽
용궁龍宮
봉화奉化
청하淸河
언양彦陽
칠원漆原
진해鎭海
하동河東
인동仁同
진보眞寶
문경聞慶
함창咸昌
지례知禮
안음安陰
고령高靈
현풍玄風
산음山陰
단성丹城
군위軍威
비안比安
의흥義興
신녕新寧
예안禮安
연일延日
장기長鬐
영산靈山
창녕昌寧
사천泗川
기장機張
웅천熊川
광양光陽
용안龍安
함열咸悅
부안扶安
함평咸平
강진康津
옥과玉果
고산高山
태인泰仁
옥구沃溝
남평南平
흥덕興德
정읍井邑
고창高敞
무장茂長
무안務安
구례求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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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長城
진원珍原
운봉雲峯
임실任實
장수長水
진안鎭安
무주茂朱
동복同福
화순和順
흥양興陽
해남海南
대정大靜
정의旌義
장련長連
송화松禾
장연長淵
강령康翎
은률殷栗
강음江陰
토산兔山
이천伊川
평강平康
금화金化
낭천狼川
홍천洪川
양구楊口
인제麟蹄
횡성橫城
안협安峽
홍원洪原
이성利城
길성吉城
명천明川
양덕陽德
맹산孟山
태천泰川
강동江東
은산殷山
대마對馬[4]
[1] 1470년(성종 1) 함경도에서 개칭, 1498년(연산군 4) 함경도로 개칭.
[2] 1470년(성종 1) 대도호부에서 승격, 1498년(연산군 4) 대도호부로 강등.
[3] 1470년(성종 1) 부에서 강등, 1498년(연산군 4) 부로 승격.
[4] 1592년 기점으로 속주로서의 지위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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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1f2023> 한성부(漢城府) 한성, 고양, 파주, 교하, 적성, 양주, 포천, 영평, 연천, 광주(廣州), 가평
인천부(仁川府) 인천, 부평, 강화, 교동, 금포, 통진, 양천, 시흥, 과천, 안산, 수원, 남양
충주부(忠州府) 충주, 제천, 청풍, 단양, 영춘, 음성, 진천, 괴산, 연풍, 청안, 여주, 이천(利川), 음죽, 용인, 양지, 죽산, 원주, 평창, 정선, 영월
홍주부(洪州府) 홍주, 결성, 예산, 덕산, 대흥, 서산, 해미, 태안, 청양, 정산, 아산, 온양, 신창, 당진, 면천, 보령, 남포, 서천, 비인, 한산, 임천, 홍산
공주부(公州府) 공주, 천안, 목천, 직산, 진위, 평택, 안성, 양성, 회덕, 진잠, 연기, 전의, 은진, 연산, 노성, 부여, 석성, 청주, 문의, 보은, 회인,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금산(錦山), 진산
전주부(全州府) 전주, 고산, 익산, 함열, 여산, 용안, 옥구, 임피, 김제, 금구, 만경, 정읍, 고부, 태인, 부안, 고창, 흥덕, 무장, 장성, 영광, 지도
남원부(南原府) 남원, 운봉, 장수, 무주, 진안, 용담, 임실, 순창, 담양, 창평, 곡성, 옥과, 구례, 순천(順天), 광양, 돌산
나주부(羅州府) 나주, 남평, 광주(光州), 능주, 화순, 동복, 낙안, 흥양,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영암, 함평, 무안, 진도, 완도
제주부(濟州府) 제주, 정의, 대정
진주부(晉州府) 진주, 산청, 단성, 함양, 안의, 하동, 거창, 사천, 곤양, 남해, 합천, 초계, 삼가, 고성(固城), 의령, 함안, 칠원, 창원, 진해, 웅천, 김해
동래부(東萊府) 동래, 기장, 양산, 거제, 울산, 언양, 경주, 연일, 장기, 흥해
대구부(大邱府) 대구, 현풍, 경산, 하양, 자인, 인동, 칠곡, 선산, 금산(金山), 지례, 개령, 성주, 고령, 청도, 영천(永川), 신녕, 의성, 비안, 군위, 의흥, 밀양, 창녕, 영산
안동부(安東府) 안동, 예안, 청송, 진보, 영양, 청하, 영천(榮川), 순흥, 풍기, 상주, 함창, 문경, 예천, 용궁, 영덕, 영해, 봉화
강릉부(江陵府) 강릉, 울진, 평해, 삼척, 양양, 고성(高城), 간성, 통천, 흡곡
춘천부(春川府) 춘천, 홍천, 낭천, 횡성, 양구, 인제, 철원, 금화, 금성, 평강, 회양, 양근, 지평
개성부(開城府) 개성, 풍덕, 장단, 삭녕, 마전, 이천(伊川), 안협, 금천, 토산, 평산, 수안, 신계, 곡산
해주부(海州府) 해주, 연안, 배천, 옹진, 강령, 장연, 송화, 풍천, 안악, 은률, 장련, 재령, 신천, 문화, 서흥, 봉산
평양부(平壤府) 평양, 삼화, 용강, 강서, 증산, 함종, 중화, 상원, 황주, 강동, 삼등, 성천, 양덕, 안주, 영유, 숙천, 순안, 순천(順川), 은산, 자산, 맹산, 영원, 개천, 덕천, 영변, 운산, 희천
의주부(義州府) 의주, 용천, 선천, 철산, 정주, 곽산, 박천, 가산, 태천, 구성, 삭주, 창성, 벽동
강계부(江界府) 강계, 후창, 자성, 초산, 위원, 장진
함흥부(咸興府) 함흥, 덕원, 정평, 영흥, 고원, 문천, 안변, 단천, 이원, 북청, 홍원
경성부(鏡城府) 경성, 부령, 길주, 명천,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갑산부(甲山府) 갑산, 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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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13도제(18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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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한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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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京畿
1등군 광주廣州 개성開城 강화江華 인천仁川
2등군 수원水原
3등군 여주驪州 양주楊州 장단長湍 통진通津
4등군 파주坡州 이천利川 부평富平 남양南陽 풍덕豊德 포천抱川 죽산竹山 양근楊根 안산安山 삭녕朔寧 안성安城 고양高陽 금포金浦 영평永平 마전麻田 교하交河 가평加平 용인龍仁 음죽陰竹 진위振威 양천陽川 시흥始興 지평砥平 적성積城 과천果川 연천漣川 양지陽智 양성陽城 교동喬桐
5등군 -
충청북도
忠淸北道
1등군 충주忠州 청주淸州
2등군 -
3등군 옥천沃川 진천鎭川
4등군 청풍淸風 괴산槐山 보은報恩 단양丹陽 제천堤川 회인懷仁 청안淸安 영춘永春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연풍延豐 음성陰城
5등군 -
충청남도
忠淸南道
1등군 공주公州
2등군 홍주洪州
3등군 한산韓山 서천舒川 면천沔川 서산瑞山 덕산德山 임천林川 홍산鴻山 은진恩津
4등군 태안泰安 온양溫陽 대흥大興 평택平澤 정산定山 청양靑陽 회덕懷德 진잠鎭岑 연산連山 노성魯城 부여扶餘 석성石城 비인庇仁 남포藍浦 결성結城 보령保寧 해미海美 당진唐津 신창新昌 예산禮山 전의全義 연기燕岐 아산牙山 직산稷山 천안天安 문의文義 목천木川
5등군 -
전라북도
全羅北道
1등군 전주全州 남원南原
2등군 고부古阜 김제金堤 태인泰仁
3등군 여산礪山 금산錦山 익산益山 임피臨陂 금구金溝 함열咸悅 부안扶安 무주茂朱 순창淳昌 임실任實 진안鎭安
4등군 진산珍山 만경萬頃 용안龍安 고산高山 옥구沃溝 정읍井邑 용담龍潭 운봉雲峯 장수長水 구례求禮
5등군 -
전라남도
全羅南道
1등군 광주光州 나주羅州 영암靈巖 영광靈光 순천順天 제주濟州
2등군 보성寶城 흥양興陽 장흥長興 함평咸平 강진康津 해남海南 무장茂長 담양潭陽
3등군 능주綾州 낙안樂安 무안務安 남평南平 진도珍島 흥덕興德 장성長城
4등군 창평昌平 광양光陽 동복同福 화순和順 고창高敞 옥과玉果 곡성谷城 완도莞島 지도智島 돌산突山
5등군 대정大靜 정의旌義
경상북도
慶尙北道
1등군 상주尙州 경주慶州
2등군 대구大丘 성주星州 의성義城 영천永川 안동安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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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군 청송靑松 인동仁同 영해寧海 순흥順興 칠곡漆谷 풍기豐基 영덕盈德 용궁龍宮 하양河陽 영천榮川 봉화奉化 청하淸河 진보眞寶 군위軍威 의흥義興 신녕新寧 예안禮安 연일延日 개령開寧 문경聞慶 지례知禮 함창咸昌 영양英陽 흥해興海 경산慶山 자인慈仁 비안比安 현풍玄風 고령高靈 장기長鬐
5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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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군 풍천豐川 신계新溪 장련長連 송화松禾 은률殷栗 토산兔山 옹진瓮津 강령康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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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군 성천成川 함종咸從 삼화三和 순천順川 상원祥原 영유永柔 강서江西 안주安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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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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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군 경성鏡城 경원慶源 온성穩城 부령富寧 명천明川 무산茂山
5등군 - }}}}}}}}}}}}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도호부
온성도호부
穩城都護府
파일:대동여지도 온성부.jpg
파일:1872년 온성지도.png
관아 소재지 함경도 온성부 성내(城內)
하위 행정구역 17리 1내
면적 면적 429.72㎢
인구 1만 3610명 2,616호[1]
마지막 온성부사 이교봉[2]

1. 개요2. 역사 및 상세3. 대중매체4. 관련 문서

[clearfix]
파일:일제강점기 1912년 함경북도 온성읍내 전경.jpg 파일:조선총독부 유리건판 - 온성 전경.jpg
온성도호부 읍내 전경 온성부 다온평야와 온성읍 전경[3]
파일:일제강점기 1912년 온성 황파진에서 바라본 입석.jpg 파일:일제강점기 1912년 함경북도 온성군 두만강과 합이합도천 전경.jpg
온성부 황파진에서 바라본 입석 전경 온성부 두만강과 합이합도천 전경

1. 개요

조선 시대 함경도 온성 지역을 관할하던 도호부. 1910년 경술국치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호부이자 조선의 최북단 관할 행정구역이다.[4]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군의 대부분 지역과 만주의 일부 지역(현 두만강 일부 지역)이 온성부의 관할이었다.[5]

2. 역사 및 상세

온성 도호부(穩城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진 절제사가 이를 겸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경원도 좌익 병마를 겸한다.

본래 고려의 땅이었는데, 중간에 야인(野人)이 또한 그 땅의 빈 것을 틈타 들어와 살면서, 이름을 다온평이라 하였다. 세종 22년에 비로소 군을 설치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경원 및 길주 이남에서 안변 이북까지의 각 고을의 민호를 옮겨 채웠다. 〈세종〉 23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켜 판관(判官)을 두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세종 24년에 진을 설치하여 절제사를 겸하게 하였다.

대천(大川)은 두만강이다. 사방 경계[四境]은 동남쪽으로 경원(慶源) 경관령(慶關嶺)에 이르기 43리, 서쪽으로 종성(鍾城) 지경에 이르기 53리, 남쪽으로 덕천보(德川堡)에 이르기 1백 35리, 북쪽으로 두만강에 이르기 2백 75보(步)이다.

호수가 8백 호요, 인구가 3천 6백 37명이었다. 군정은 갑사(甲士)가 25명이요, 정군(正軍)이 6백 86명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가장 춥다. 간전(墾田)이 2천 9백 70결이요, 【논은 겨우 9결이다. 】 토의(土宜)는 기장·피·조·팥·황두(黃豆)·삼[麻]이다. 토산(土産)은 꿀·다시마·사슴포[鹿脯]·문어·연어이요, 약재는 바곳[草烏頭]·오독도기[茹]·창포·느릅나무껍질[楡皮]·박새[藜蘆]·도라지·과감풀[龍膽]·탱알[紫莞]·더위지기[茵陳]·족두리풀뿌리[細辛]·단너삼[黃耆]·구리때뿌리[白芷]·끼절가리뿌리[升麻]·칡뿌리[葛根]·방풍(防風)·검화뿌리껍질[白鮮皮]·범부채[射干]이다. 염소(鹽所)가 6이요, 【모두 부의 남쪽 안화리(安和里)에 있다. 】 목장(牧場)이 1이니, 대초도(大草島)이다. 【부의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0리이요, 동서가 6리 30보(步), 남북이 8리 50보(步)이다. 국마(國馬) 71필을 방목(放牧)한다. 】

읍 벽성(邑壁城) 【둘레가 1만 척이며, 안에 샘이 15가 있고, 군창이 있다. 】 참(站)이 1이니, 무령(撫寧)이요, 요해처(要害處)가 5이니, 소동건동(小童巾洞)·고성동(古城洞)·다온동(多溫洞)·미전동(迷錢洞)·입암동(立巖洞)이요, 관방(關防)이 3이니, 낙토보(樂土堡)·시건보(時建堡)·미전보(迷錢堡)요, 연대(烟臺)가 15이니, 입암(立巖) 【동쪽으로 경원(慶源) 마유(馬乳)에 응하고, 북쪽으로 석봉(石峯)에 응한다. 】 ·석봉(石峯) 【동쪽으로 전강(錢江)에 응한다. 】 ·전강(錢江) 【서쪽으로 미전(迷錢)에 응한다. 】 ·미전(迷錢) 【서쪽으로 포항(浦項)에 응한다. 】 ·포항(浦項) 【서쪽으로 평봉화(坪烽火)에 응한다. 】 ·평봉화(坪烽火) 【서쪽으로 남산(南山)에 응한다. 】 ·남산(南山) 【서쪽으로 유원(綏遠)에 응한다. 】 ·유원(綏遠) 【서쪽으로 압강(壓江)에 응한다. 】 ·압강(壓江) 【서쪽으로 고성(古城)에 응한다. 】 ·고성(古城) 【남쪽으로 시건(時建)에 응한다. 】 ·시건(時建) 【서쪽으로 견탄(犬灘)에 응한다. 】 ·견탄(犬灘) 【남쪽으로 중봉(中峯)에 응한다. 】 ·중봉(中峯) 【남쪽으로 송봉(松峯)에 응한다. 】 ·송봉(松峯) 【남쪽으로 소동건(小童巾)에 응한다. 】 ·소동건(小童巾) 【남쪽으로 종성(鍾城) 보청포(甫靑浦)에 응한다. 】 이다.

토관(土官)은, 서반(西班)이 유원위(柔遠衛) 일령(一領) 사직(司直)이 1인, 【종5품. 】 부사직(副司直)이 1인, 【종6품. 】 사정(司正)이 2인, 【종7품. 】 부사정(副司正)이 2인 【종8품. 】 , 사용(司勇)이 3인 【종9품. 】 , 대장(隊長)이 2인 【종9품. 】 , 대부(隊副)가 2인 【종9품. 】 이며, 이령(二領) 사직(司直)이 1인, 【종5품. 】 부사직(副司直)이 1인, 【종6품. 】 사정(司正)이 1인, 【종7품. 】 부사정(副司正)이 1인, 【종8품. 】 사용(司勇)이 2인, 【종9품. 】 대장(隊長)이 1인, 【종9품. 】 대부(隊副)가 3인 【종9품. 】 이다.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6] 온성도호부

조선초기 세종4군 6진의 개척 과정에서 설치된 것이 그 시작이다. 당시 4군 6진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함경도 지역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여진족들과의 충돌이 많았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본래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부터는 발해가 이 일대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물론 실질적인 지배를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거란, 여진족 등이 이 일대의 땅들로 이주를 하였기 때문.) 그리고 그 이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때에는 이 지역 전부가 발해의 행정구역 중 하나였던 '동경용원부'의 관할구역 이었다.
한편 신라후백제, 태봉을 통일한, 한국 역사상 2번째 통일왕국인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이 지역까지 영향력 행사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여러번의 시도 끝에 고려후기였던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쌍성총관부를 혁파하고 북진하여 두만강 하류 지방까지 확보한 뒤 동북면으로 부르며 직접적인 통치를 하지는 못하였으나, 간접적인 통치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두만강이 굽이치는 이 일대 지역은 고구려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오랫동안 거란과 여진등 이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 풍습과 언어가 사실상 여진족에 가깝게 보여졌을 것이다. 특히 여진은 이 일대 지역을 다온평이라고 여진족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 까지 하였다. 그리고 강 바로 건너편에 여진족이 거주하였던 만큼, 여진족들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연산군시기 '여진족 귀순 문제'이다.
신수근이 야인 귀순 문제를 아뢰어 어세겸 등에게 의논하게 하다

승지 신수근(愼守勤)이 아뢰기를,

"올적합(兀狄哈)·이이후(伊伊厚)·소소고(巢巢古)와 야당지(也堂只)의 아들 등이 온성부 근처 가흘라(加訖羅) 지방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별종(別種)이요 니마차(尼亇車)의 족류가 아닙니다. 귀순하여 와서 살기를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이점(利坫)을 보내어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저들을 효유해서 드디어 종성(鐘城) 건너편 남경(南京)에 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가을 수확을 한 후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병조(兵曹)에서 이르기를,
‘그 사람들은 이미 본토를 배반하였으며 만일 강제로 돌려 보낸다면 반드시 포주(蒲州)로 돌아갈 것이요 그러면 다시 한 도적이 생기게 되는 것이어서 잘하는 계책이 아니니, 청하옵건대 그대로 거주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 후 올적합·아당개(阿堂介) 등이 또 니마차에서 종성 지방으로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원래 올량합(兀良哈)의 종족인데 니마차에게 잡혀 갔다가 지금 본토의 족류(族類)를 잊지 못하여 와서 살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병조에서 또 이르기를, ‘아당개 등이 올량합의 종족이라 하지만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없다. 올량합이 연이어 귀순하여 오면 이것을 어찌 다 가까운 곳에 거주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절도사에게 엄히 분부해서 환송을 독려하도록 계청(啓請)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이후와 아당개가 똑같은 올적합인데 그 종류를 누가 능히 분별하겠습니까. 만일 이이후에게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아당개 등을 핍박하여 쫓아낸다면 아당개 역시 어찌 한 적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나라의 남방에는 왜의 호구가 날마다 불어나서 이미 복심(腹心)의 우환이 되었는데, 이이후가 지금은 비록 귀순하였다 하더라도 그 종족이 점점 번성한다면 반드시 복심의 우환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재상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어세겸(魚世謙)·한치형(韓致亨)·이계동(李季仝)·여자신(呂自新) 등이 의논 드리기를,
"이이후 등이 가흘라(加訖羅)에 와서 거주하는 날에는 멀리 쫓아내지 못하고 남경 지방으로 이거할 때 추수한 후 본토로 돌아가라 허락하였는데, 조정에서 또 그만 쫓아내지 못하고 도리어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쫓아내면 이것은 조정의 명이 반복 무상한 것으로서, 원방 사람을 진정하고 감복시키는 도리가 아닌 듯하옵니다. 또 니마차가 아령개(阿令介)에게 보복하려 한다고 큰소리 치면서 지금 종성(鐘城) 건너편 올적합(兀狄哈) 부락에서 노략질하고 있는데, 그곳이 아령개가 거주하는 지역 안에 드는지, 이이후(伊伊厚) 등이 와서 사는 곳과 원근 및 이이후 등과 본종(本種) 올적합과의 통모(通謀) 내응하는 여부 등을 짐작할 수 없습니다. 이 몇 가지를 본도 절도사에게 유시를 내리어서, 성 밑 야인(野人)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아는 자를 찾아 물어 사실을 알아서 계문(啓聞)한 후에 다시 의논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극돈(李克墩)·이세좌(李世佐)·성현(成俔)·조익정(趙益貞)·홍응(洪應)은 의논드리기를,
"이이후 등을 본토로 돌려보내자는 의논은 과연 승정원에서 아뢴 바와 같습니다. 신 등의 처음 의논 역시 이와 같았습니다. 이 일을 가지고 좀 고쳐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곳에 오므로 올적합 등이 재차 우리 변방을 침범하니, 속히 본토로 돌아가서 말썽이 없어지게 하라.’ 하고, 절도사로 하여금 돌아가는 것을 독려토록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노공필(盧公弼)·허침(許琛)·이숙함(李叔瑊)은 의논드리기를,
"지금 승정원이 아뢴 것을 보면, 이이후가 올적합과 함께 서로 통하여 길을 인도하여 도적질하는 것은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이 기회를 타서 이이후 등을 몰아내어 변방에 가까이 못하게 하여 저들 오랑캐의 엿보는 우환을 끊어버리는 것이 실로 변경을 방비하는 좋은 계책이 되겠습니다. 다만 이이후 등이 처음에 가흘라 지방에 거주하려는 것을 조정에서 허락하고, 그후에 핍박하여 쫓아내는 것이 불가하다고 해서 남경에 옮겼으며, 조정 의논이 남경은 우리 국경에서 거리가 좀 멀다 하여 이미 거주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또 다시 핍박하여 쫓아낸다면 이것은 이적(夷狄)을 대하는 도리가 너그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들 오랑캐 역시 쫓겨난 원한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올적합 등이 올량합에서 도적질하는 것은 이이후 등으로 하여 오게 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예전 혐의로 하여 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관찰사로 하여금 절도사와 함께 이이후 등이 올적합 등과 같이 들어온 길, 이이후의 거주처와의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 이이후를 남경에 거주 하도록 허락하는 것의 이해 등을 성 밑 여러 추장에게 탐문해서 실정을 살펴 알아보게 하여 계문(啓聞)한 후에 다시 의논케 하소서."
하고, 윤효손(尹孝孫)·조숙기(曺淑沂)·이복선(李復善) 등은 의논드리기를,
"처음 이이후 등이 변장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귀순하여 도망왔는데 지금 만일 쫓겨 본토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우리를 죽일 것이다.’고 하며 구실을 삼았습니다. 지금 올적합 등이 재차 우리 변방 아래의 야인을 잡아 갔는데 이이후 등이 잡혔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응원하지 않을 것을 알겠습니까. 절도사를 시켜 이런 뜻으로 깨우쳐 설명하고 본토에 돌아가게 독려해서, 더욱 번성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세겸 등의 의논을 좇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이지란 등 여진족 출신의 개국공신의 생가가 온성지역에 존재하며, 여진족들 부락과의 무덤 또한 많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이후 6년이 흐른 1398년. 당시 까지만 해도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었던 공주[7]의 옛터에 경원부를 설치면서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되었다.[8] 당시 태조는 군사를 보내어 이 일대 여진족들을 모조리 토벌하게 하였으며, 덕분에 이 지역의 안정화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 외의 상황이 발생한다. 1410년, 당시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이 일대에 대규모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때 경원부는 이러한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에 대비할만한 군사와 방어시설이 부족하였으며[9] 이에 경원부를 당시 함길도 평야, 해안지대였던 경성부에 전 군사와 시설들을 후퇴시키고 물러나 버리며 그 이북지역을 자그마치 25년 동안 여진족에게 다시 내주게 되었다.
그렇게 여진족에게 점령당한 온성지역은 마침내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김종서의 주도하에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1440년. 당시 지금의 다온평[10]지역에 조선 건국 역사상 최초로 군을 설치하면서 지금의 온성으로 그 이름을 고치고, 경원을 비롯하여 길주를 기준으로 남방에 있었던 고을들과 안변의 북쪽에 있는 여러 고을들의 민호를 옮겨 이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441년에 온성군을 '온성도호부'로 승격시키고 토관을 설치한 후 이곳에 판관을 파견하였다

세종 23년인 1441년 설치되어 고종 32년인 1895년에 전국의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온성군(穩城郡)으로 변경되기 전까지 함경도 북부 지방의 행정과 군사상의 요지로 기능하였다. 그 이후에 이곳 온성부 위치에서 홍범도가 이끌던 독립군이 온성전투(穩城戰鬪)를 벌였고, 바로 북쪽인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가 이끌던 대한독립군이 큰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온성부 바로 서남쪽인 만주 화룡현 월신강변 삼둔자에서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전투를 벌이고 이를 승리하면서 봉오동 전투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이 근방 지역에 대한 위치, 전략적, 군사적 중요성은 고대부터 근세기까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도 이 근방지역은 북한중국, 러시아의 국경이 모두 만나는 지역인지라 그 중요성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하다. 후에 남북통일이 되면 옛 온성부 지역인 이곳은 통일한국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됨과 동시에 통일한국의 관광지로서의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3. 대중매체

4. 관련 문서


[1] 1851년에 편찬된 온성부의 읍지인 '온성부읍지등서성책(穩城府邑誌謄書成冊)'에 기록된 온성부에 관한 인구 수 통계를 바탕으로 작성. 당시 기준 남자는 6,828명, 여자는 6,782명[2] 1869년 10월 10일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한 마지막 온성부사.[3] 멀리 보이는 산들은 두만강 건너 지금의 만주에 위치한 산들이다.[4] 여기서 말하는 '관할 행정구역'은 1900년도 고종이 재위하던 시기의 간도 시찰원, 간도 관리사를 포함한 것으로, 간도 지역에 조선의 영유권을 행사하려고 하던 모든 시도들 까지 포함된 것이다. 간도가 조선의 관할 행정구역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간도지역에 관리사를 파견하는 등의 노력을 이어갔지만, 간도 지방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 즉 관아를 비롯한 경찰서, 군부대와 같은 집무시설을 마련하고 치안과 세금을 걷는 등의 실질적 통치는 하지 못하였기 때문. 이 때문에 간도는 조선의 관할 행정구역이 될 수 없었다.[5] 종성군, 경원군 등으로 본래 온성부에 속해있던 관할구역이 이동되거나 군, 부의 폐지 등의 이유로 크기가 변화된 경우를 포함하였기 때문에 '모든 지역'이 아닌, '대부분 지역'으로 표기. 또한 온성부 서쪽의 강안나루는 본래 강 건너편(현 중국영토) 인근까지 조선 온성부에서 관할하고 있었으나, 1919년 간도협약에 따라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당시 중국측에 강제로 넘겨졌다. 또한 과거 온성부에서 관할하던 온성섬 대부분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중국측에 그 대부분이 귀속되어져 있으며, 현재 이 지역은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온성섬 관광개발구'라는 이름으로 개발중이다.[6] 이시애의 난 이전까지만 해도 함경도는 함길도로 불렸다.[7] 함경도의 지명 중 하나로, '孔州' 라고 표기하였다.[8] 부를 설치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 대한 통치를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조가 고려의 '북진정책'처럼 옛 영토를 수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9] 이를 가지고 조선초기 국방력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는데, 이때는 태조가 경원부를 설치한지 불과 12년밖에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연히 개척하기 바쁜 와중에 방어시설과 군사를 더 보낼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었다.[10] 이곳은 훗날 온성부의 읍치가 들어서는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