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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nitely Maybe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 1994.8.29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 1995.10.2 | Be Here Now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 1997.8.21 | The Masterplan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1f2023;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 1998.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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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영국의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2. 오아시스의 전신, 《The Rain》
오아시스는 더 레인이란 밴드에서 출발하였다.[1]보컬에 크리스 휴턴, 기타에 폴 본헤드 아서스, 베이스에 폴 귁시 맥기건, 드럼에 토니 맥캐롤이 창립멤버이다. 1991년 기타리스트였던 본헤드가 당시 보컬이었던 크리스 휴턴 대신 자신의 학교 친구였던 리암 갤러거를 밴드의 보컬로 영입하고, 리암의 제안으로 밴드의 이름을 오아시스로 바꾸게 되었다.[2] 이렇게 오아시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3. 데뷔 전(1991년 - 1993년)
3.1. 노엘의 밴드 가입
한편 리암이 밴드에 가입하기 전부터 노엘 갤러거는 인스파이럴 카페츠에서 로드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3] 그러던 중 오아시스는 1991년 8월 맨체스터의 보드워크라는 클럽에서 첫 공연을 가지게 되는데, 그 당시 투어에 동행 중이었던 노엘 갤러거는 리암이 밴드에서 공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형이 평소에 작곡을 하고, 기타를 치는 걸 알고 있던 리암은 노엘에게 밴드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지만, 노엘은 매니저 일을 계속 하겠다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3.2. 크리에이션 레코드사와의 계약
이렇게 맴버가 꾸려지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만 1991~3년 사이에는 사실상 동네 펍이나 술집 등에서 가끔식 노래하면서 근근히 생활하는 무명밴드였다.[7][8]
이렇게 점점 연습을 하며 실력을 키워가던 1993년 5월의 어느날, 같이 녹음실을 쓰던 밴드 시스터 러버스(Sister Lovers)가 글로코스로 공연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시스터 러버스의 데비가 오아시스에게 같이 공연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고, 오아시스는 시스터 러버스를 따라 처음으로 타지 공연을 하게 된다. 문제는 계획에 없던 동행이었던 터라 오아시스에게 배정된 공연시간이 없었다. 뭐 당시에는 초청밴드 형식으로 공연 중간중간에 다른 밴드들이 올라와 공연하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연히 공연관계자는 오아시스가 공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스터 러버스가 '오아시스가 공연 안하면 우리도 안해' 라고 배째자는 식으로 나온 덕분에 결국 공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아시스가 공연을 하던 그 자리엔 데비의 전 남친, 바로 당시 최고의 인디 레이블이었던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앨런 맥기가 있었다. 어디 전 여친의 공연도 볼 겸 여동생과 함께 놀러 왔다가 오아시스 공연을 보게 되었고 공연이 끝난 그날 밤에 바로 오아시스와 계약하게 된다. 앨런 맥기가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말하길, 첫 번째 곡을 들었을 땐 한 곡 더 들어보고 생각해보려 했으나, 두 번째 곡을 들었을땐 '계약 해야겠다.' 세 번째 곡[9]을 듣고 나서는 '진짜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후 U2의 레코드사였던 마더 레코드에서 크리에이션보다 더 나은 계약 조건과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오아시스는 당시 앨런 맥기가 자신들을 굳게 믿고 있으며, 자신들을 정말로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푼돈에 크리에이션과 계약했다고 한다.
처음 계약 당시 노엘은 써놓은 곡이 얼마 없음에도 불구하고 곡이 무척 많은 척을 했고, 크리에이션 측은 그 악명높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loveless를 발매하느라 재정난에 허덕였음에도 돈이 무척 많은 척을 했다.
몇몇 사람들이 오아시스가 그 공연장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린 끝에 공연을 따냈다던가, 사람들을 협박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무근이다.[10] 아무튼, 이후 오아시스의 싱글과 정규 앨범이 대성공을 거두어, 레이블도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정규 3집 발매 이후 밴드는 Big Brother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했고, 결국 크리에이션 레코드는 문을 닫는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이렇게 오아시스는 크리에이션 레코드 아래에서 열심히 데뷔앨범 준비를 하게 된다.
1993년 8월 11일, 오아시스는 영국 최고의 음악 라디오인 BBC RADIO 1의 전파를 타게 된다. 그 이유는 새로 취임한 매튜 메디스 PD가 경쾌하고 낙관적인 영국음악, 즉 브릿팝 음악들을 소개하게 되었는데, 이때 오아시스도 운 좋게 전파를 타게 된 것.
1993년 12월, 그들은 첫번째 싱글인 Bring It On Down을 녹음하러 리버풀에 있는 녹음실에 방문한다. 그렇게 파이팅 넘치게 녹음을 시작했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한다. 다름 아닌 그 당시 드러머였던 토니 맥캐롤이 제대로 박자를 맞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녹음이 중단된 상황에서 본헤드와 토니가 즉흥적으로 잼을 했고, 노엘은 거기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었다. 이후 밥을 먹고나서 다시 Bring It On Down의 녹음을 재개하려고 했는데, 당시 오아시스의 작업을 도와주던 리얼 피플의 멤버가 노엘이 흥얼거린 새로운 멜로디를 곡으로 써볼 것을 제안했고, 멤버들이 밥먹고 정리하는 동안 혼자서 구석에 박혀 뭔갈 휘갈기며 새로운 곡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곡이 오아시스의 명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Supersonic[11]이었다. 이후 곧바로 녹음을 진행했고, 그 데모 버전이 그대로 앨범으로 쓰였다.[12]
1994년 3월 18일, Live The Word라는 쇼에 출연해 곧 발매될 곡 Supersonic을 불렀다. 오아시스의 TV 데뷔이다. 리암이 데뷔 극초반기에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초창기 (1993년 - 1994년)
4.1. 혜성 같은 등장
그리고 1994년 4월 11일, 첫 싱글 Supersonic을 발매하고, 오아시스는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슈퍼소닉은 UK차트 31위까지 들어가며, 록밴드의 첫 싱글이란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순위에 들어간다. 이후 이 기록은 오아시스의 싱글중 가장 낮은 순위지만, 꾸준하게 팔려 현재 오아시스의 싱글중 13번째로 많이 판 싱글이 되고, 이후 오아시스 다큐멘터리의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6월 13일엔 그다음 싱글인 Shakermaker를 발매하고 싱글 차트에서 11위에 오르게 된다, 이 싱글은 코카콜라 광고곡을 표절한 곡이었고 이로 인해 오아시스는 호주달러 50만 달러, 한화 약 5억을 물게 된다.
6월 26일, 이렇게 연달아 싱글차트에서 선방하고 있던 오아시스는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에 참가해 약 40분 동안 공연을 한다.[14] 이 때 이미 발매한 두 싱글과 Live Forever 등 아직 발매하지 않은 1집에 수록될 곡들도 불렀다.
이전 싱글이었던 Supersonic과 shakermaker이 각각 싱글차트 31위, 11위에 오르는 등, 꾸준히 좋은 차트 성적을 기록한 오아시스는 8월 8일,Live Forever를 발매한다. 이후 영국차트에서 2주 연속으로 차트 TOP 10에 오르는 등 상당한 인기를 얻는다.
이 곡은 노엘 갤러거가 롤링 스톤즈의 Shine A Light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했으며, 오아시스의 곡들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의 명곡으로 뽑히는 곡이다. 대중성이나 킬러트랙이라면 대부분 2집 시절의 Wonderwall이나 Don't Look Back In Anger을 뽑지만, 이 곡의 아름답고 낙관적인 가사와 멜로디 때문에 대부분의 잡지나 평론가들은 이 곡을 당연하다는 듯이 최고로 뽑는다. 싱글로 4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4.2. 《Definitely Maybe》
Definitely Maybe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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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sonic>, <Shakermaker>, <Live Forever>는 각각 31위, 11위, 10위를 기록하는 등 싱글차트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던 오아시스는 1994년 8월 29일, 드디어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를 발매하게 된다. 이 앨범은 발매 직후 신드롬을 일으키며 단숨에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일주일 만에 8만 6000장을 팔아치우며 당시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15]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미국에서도 초반엔 빌보드 200에서 랭크되지 못했으나 1995년 낮은 순위에서 시작해 58위까지 기록했다. 그 후에도 롱런해 미국에서 1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앨범에 대한 평단의 평은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최고다. 올뮤직, Q, 롤링 스톤에서는 만점을 받았으며, NME에서도 9/10의 평가를 받는 등 명불허전 90년대 최고의 락 앨범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한 오아시스의 정규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와 함께 오아시스 최고 걸작이자 90년대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손꼽히며, 락 음악 역사상 최고의 데뷔앨범을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앨범이다.
판매량 또한 우수하다. Definitely Maybe는 1994년 영국 앨범 차트 통산 판매량 순위에서 21위에 오르며 현재까지 영국에서 210만, 미국에선 100만, 전 세계적으로 15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첫 앨범 Definitely Maybe 발매 이후, 오아시스는 10월 10일에 1집 8번 트랙이자 통산 다섯 번째 싱글인 Cigarettes & Alcohol을 발표하게 된다. 가사에 술과 담배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곡인데도 불구하고 싱글차트 7위를 기록한다. 이 곡이 히트하게 되면서 오아시스는 명실상부하게 인기 밴드로 떠올랐다. 티렉스의 Get It On의 기타 리프를 따온 걸로도 유명한 곡. 실제로 1집 작업때 본헤드가 이거 표절 아니냐고 태클을 걸었지만, 노엘은 "우리가 티렉스를 유명하게 해줬잖아?"라며 신경쓰지 않았다.
이렇듯 신인 밴드로선 최고의 한 해였지만 밴드 내부 사정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쉴 틈없는 라이브 공연과 녹음 스케줄, 방탕한 생활은 밴드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1994년 9월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 필로폰에 취한 리암이 미국 관중들에게 무례한 발언을 하고 노엘에게 탬버린을 던지는 일이 벌어졌다.[16] 이 사건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노엘은 잠시 밴드를 그만두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가 겨우 마음을 추스린 후 그해 10월에 밴드로 돌아온다.[17]
12월 18일에는 1집에 수록되지 않은 스탠더 얼론 싱글 Whatever를 발매하였다.[18] 영국 싱글 차트에서 무려 3위로 진입하였으며 차트에서 총 50주동안 머물렀다. 이는 오아시스 모든 싱글들 중 최장 기록이다. 오아시스 특유의 낙관주의가 잘 나타나는 곡으로,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곡이며 한국에서는 삼성생명의 CF곡으로 쓰여 더 큰 유명해졌다. 총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5. 전성기 (1995년 - 1997년)
5.1. 블러와의 브릿팝 전쟁
오아시스는 이듬 해인 1995년 2월에 열린 1995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신인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싱글상(Live Forever)’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최고의 신인상'만을 수상한다. 이유는 당시 브릿팝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던 Parklife를 발매한 블러가 ‘최고의 신인상’외에 나머지 3개의 상을 수상하고, 최고의 뮤직비디오상까지 받아 브릿어워드 4관왕을 차지하며 말 그대로 상들을 싹쓸이했다. 블러의 프론트맨인 데이먼 알반은 우승소감으로 "이 상은 오아시스랑 같이 탔어야 했었어요."라는 훈훈한 미담을 남기고, 이 후 데이먼은 이 말을 한 걸 평생 후회하게 된다.[19]그 뒤로 각종 미디어에서는 계속 블러와 오아시스를 엮기 시작한다. 사실 두 그룹은 결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브릿어워즈에서의 발언 이후 서로를 음악적 라이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 먼 훗날 블러의 다큐멘터리에서 알렉스가 말하길 "우리가 뭘하던 언제나 오아시스의 이름이 나왔다"라고 회상했다.
[20]
1995년 4월 24일, 정규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7번째 트랙이자, 첫 선공개 싱글 Some Might Say를 선보이게 된다, 이 곡을 통해 오아시스는 처음으로 차트 1위를 경험해본다.Lock the Box에서 노엘은 이 곡이 자신들에게는 비틀스의 We Can Work It Out과 같은 곡이라면서, '오아시스를 정의하는 곡(defines what Oasis is)'이라고 했다. 이 무렵 드러머 토니 맥캐롤은 노엘과의 불화 끝에 밴드에서 퇴출된다. 이후 오아시스의 드러머는 앨런 화이트가 담당한다.
그 이후 두 번째 싱글인 Roll With It을 통해 브릿팝 전쟁이 본격화 되었다. 블러의 싱글 'Country House'과 오아시스의 싱글 'Roll With It'이 같은 날 발매된 것. 블러가 이미 예정 됐던 자신들의 싱글 발매일을 오아시스와 싱글 발매일과 같은 날로 바꾸었고, 오아시스는 이에 격분한다.[21] 음악잡지 NME를 비롯한 여러 매체들은 본격적으로 브릿팝 전쟁을 들먹이며 이러한 사건을 보도 하였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블러와 오아시스에게 쏠리게 된다.
두 싱글 발매 일주일 후, 싱글차트에서는 Country House가 27만 4천장을 팔아 1위, Roll With It이 21만 6천장을 팔아 2위에 랭크 되어 결국 블러의 승리로 끝났다. 여담으로 Roll With It은 현재까지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중이다.
이에 분노한 노엘은 데이먼 알반에게 에이즈에 걸려 뒈져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을 한다.
이렇게 2연패를 하게 된 오아시스는 브릿팝 전쟁에서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 이후 95년 9월 11일, 블러의 4집인 The Great Escape가 발매 되고, 역시나 호평을 받으며 UK차트에 2주간 1위를 차지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때 즈음 귁시가 신경쇠약으로 잠시 탈퇴했다.[22] 이렇게 불리한 상황이 계속 일어나고, 복수의 칼을 갈며 오아시스는 3주 뒤,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발매 하게 되는데...
5.2.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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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b18904><tablebgcolor=#fff,#191919><width=90><#b18904> ||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2012년 378위 || | NME 선정 500대 명반 67위 |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
로큰롤 명예의 전당 선정 200대 앨범 12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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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 2일 발매된 오아시스의 2집 정규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브릿팝의 절정을 보여준 전설적인 앨범이며' 발매 첫주에만 무려 36만장 이상이 판매되고 영국에서 무려 10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 현재까지 영국 내에서만 49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해 90년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자 역대 영국 앨범 판매량 순위에서 5위에 오른다.[23]
이렇게 전설적인 앨범인만큼 평론가들에게도 엄청난 호평을 받았는데, 올뮤직, 롤링스톤, Q, 뮤직하운드, 버진, 스푸트닉에서 10점 만점을 받았으며, 90년대 최고의 락 앨범을 뽑을 때 너바나의 Nevermind,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 와 같이 빠지지 않는 명반으로 손꼽힌다.
미국에선 초반에는 80위에도 들지 못하다가 롱런해 1996년 결국 4위까지 랭크 되었다. 또한 미국 내에서만 4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2018년까지 영국 490만 장. 전세계에서 2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오아시스의 가장 유명한 곡들인 Wo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 등이 모두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갤러거 형제는 당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24]라는 별명을 얻으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이 앨범을 계기로 브릿팝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하게 되면서, 오아시스의 독주가 시작된다.[25]
당시 '영국에서는 거지도 오아시스 노래는 부를 줄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0월 30일에 앨범의 세번째 트랙이자, 세 번째 싱글인 Wonderwall이 발매되었다. UK차트 2위를 기록했다. 이후 명실상부 오아시스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으며, 싱글로만 270만 장을 넘게 팔아 오아시스 싱글 종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심지어 영국 초등교과서에도 수록되었으며, 영국 제 2의 국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또 런던올림픽 폐막식 당시 비디아이가 이 노래를 불렀다.
1996년 2월 19일 발매된 2집의 네번째 트랙이자 네 번째 싱글 Don't Look Back In Anger는 오아시스에게 두 번째로 차트 1위를 안겨주었다. 국내에서도 Whatever와 더불어 가장 인기가 많은 곡. BPI 더블 플래티넘으로 13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중이며, 이는 오아시스 싱글 중 두번째로 많은 판매량이다. 기존의 싱글과는 달리 노엘이 보컬을 맡았는데, 이후 노엘 갤러거의 인기가 급상승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곡이기도 하다.
이후 1996년 5월 13일 Champagne Supernova가 발매된다. 어쿠스틱 기타와 파도 소리로 시작하여 폭발하는 듯한 기타 솔로로 마무리 되는 대곡이자 그들의 낙관주의, 당시의 시대정신을 함축한 곡으로서 미국에서 빌보드 모던 락 차트 1위, 메인 스트림 Top 40 차트 10위를 기록하며 미국에서 50만 장 이상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다. 영국에선 싱글로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40만장 이상이 팔려, 총 90만 장 이상의 세일즈를 기록하고 있다.
이 곡에는 폴 웰러가 리드 기타와 백보컬로 참가했다. 또 평론가들로부터 리암의 보컬 능력이 가장 빛나는 곡으로 뽑히기도 했다. 초기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본헤드는 이 노래를 듣고 노엘에게 "이 노래 진짜로 네가 쓴거야?"라며 울었다고 한다.
오아시스는 이듬 해 1996년 열린 1996 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싱글상[26]', '최고의 비디오[27]'에 후보 노미네이트되어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비디오상'을 받아 3관왕에 오른다.[28]
그리고 수상 소감은 큰 이슈를 불러 오는데, 앨범상 수상 당시 먼저 올라가서 감사하다고 대충 말한 리암이 뒤따라 올라온 노엘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게 블러의 Parklife의 한 부분.
All the people
So many people
And they all go hand in hand
Hand in hand through their Shitelife
So many people
And they all go hand in hand
Hand in hand through their Shitelife
원래 가사는 Parklife인데, Shitelife
전 세계를 강타한 오아시스 신드롬은 96년 중반에 절정에 이르렀다. 메인 로드, 얼스코트 등의 대형 콘서트장을 매진시킨 오아시스는 96년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넵워스(Knebworth)에서 공연을 열었다. 하루에 12만 5천 명씩 양일간 약 25만 관객을 끌어모아 당시 영국 역대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29]
참고로 285만 명이 공연 예매를 시도하였는데 퍼센트로 환산할 경우 당시 영국 인구의 5%가 예매를 시도한 것. 그 당시 어마무시했던 오아시스의 인기를 체감하게 해 준다.[30]
이후 2010년에 나온 오아시스의 베스트 앨범인 <time files... 1994 - 2009> 에선 넵워스 공연 사진을 앨범 커버로 사용했고, 2021년 9월 23일, 넵워스 공연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공개되었다.
6. 과도기 (1997년 - 1999년)
6.1. 점점 커지는 3집을 향한 관심
오아시스는 비틀즈 이후 최고의 밴드라 칭송 받으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나, 밴드의 내부사정은 전혀 달랐다. 8월 23일 오아시스는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MTV Unplugged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리암이 목상태가 좋지 않다며 공연을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노엘이 리암 대신에 공연을 했으며, 이 공연은 호평을 받았다.[31] 또 오아시스가 미국 투어를 할 때도 리암은 여자친구 때문에 투어에 동행하지 않았다.밴드는 미국 공연을 위해 떠났는데 노엘과 리암의 싸움 끝에 결국 노엘이 분노하며 밴드를 떠났고, 이로 인해 언론에게 엄청난 질타를 받았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 녹음에 참가한 이들은 오직 돈 때문에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노엘은 리암이 형편없는 보컬이라고 생각했고, 리암은 노엘의 곡을 싫어했다. 나도 코카인을 심하게 복용했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녹음 또한 정말 형편없었으며 노엘에게 녹음을 그만두자고 했다고 했다. 그러나 노엘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래서 계속 갔다. 엄청난 양의 마약에, 큰 싸움에, 분위기도 나빴고 녹음은 최악이었다
당시 오아시스의 프로듀서였던 오웬 모리스
당시 오아시스의 프로듀서였던 오웬 모리스
10월 7일, 그들은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3집녹음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녹음 분위기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리암과 노엘사이의 갈등은 점점 커져갔고, 당시 녹음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마약과 술에 쩔어있는 상태로 녹음을 진행했다.
녹음실 밖에서의 오아시스 또한 점점 망가져가고 있었다. 리암은 거침없는 행동과 언변 탓에 늘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의 주 타겟이었으며, Q어워드에서 상을 받은 후 믹 재거의 머리에 담배재를 터는 등 갖가지 사건사고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심지어 코카인 소지죄로 훈방조치 된 적도 있었다. 이는 단순히 오아시스의 밴드 멤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밴드의 사진기자였던 질은 언론의 주요 표적이 되었고, 기자들은 그의 아파트 위층에 상주하며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하나 둘 오아시스를 떠나갔다.
점점 집요해지는 언론들을 피해 그들은 시골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하였다. 비록 언론의 관심은 줄었지만 녹음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2007년 인터뷰에서 오웬 모리스는 "첫 주에 우리 중 누군가가 마리화나 1온스를 구하려고 했는데 못구해서 대신 코카인 1온스를 얻었다"[32]라고 발언을 했을만큼, 녹음실의 상황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당시 녹음실 상황은 정말 아수라장이었다. 녹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술과 마약에 취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기에 형제 간의 갈등 역시 극에 달했다.[33] 오웬이 새 결과물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 노엘은 닥치라고 일갈하며 묵살했다.
그렇게 1997년 4월, 막장이었던 3집의 녹음은 끝을 맺었다.
1997년 7월 7일, 3집의 리드싱글로 선공개된 D'You Know What I Mean?이 UK차트 1위를 차지하며, 오아시스의 싱글중 some might say, dont look back in anger에 이어 세 번째로 차트 1위를 기록한 싱글이 되었다. 발표 첫날 162,000장이 팔렸고 마지막 주에는 총 370,000장을 팔아치웠다. 영국에서 745,000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플래티넘을 수여받는 등의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오아시스의 싱글 중 두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이기도 하다. 기존의 오아시스답지 않은 실험적이고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호불호가 갈렸지만 3집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는 더욱 더 커져갔다.
오아시스 신드롬은 같은 해인 1997년 3집 앨범 Be Here Now가 발매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이에 앞서 차트 1위를 차지한 싱글 D'You Know What I Mean? 덕분에 이 앨범은 오아시스의 앨범 중 가장 큰 기대를 받았던 작품이었고 언론의 관심도 그만큼 컸다. 그러한 기대감은 BBC1이 앨범 발매 전날 《Right Here, Right Now》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사람들은 3집에 대한 엄청난 기대를 보였고, 결국, 1997년 8월 21일, Definitely Maybe,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를 이은 오아시스의 정규 3집, Be Here Now가 발매되게 된다.
6.2. 《Be Here Now》와 브릿팝의 멸망
Be Here Now는 발매된 지 하루만에 42만 4천장이 팔리고 일주일 동안 76만장이 팔렸으며 2주도 지나기 전에 100만장을 넘겼다. 한 동안 가장 빨리 팔린 앨범으로 유명했었다. 영국내에서 5주 동안 판매량 1위를 차지했으며, 3집 앨범은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팔린[34][35] 앨범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고 영국에서 2주째는 100만 장 돌파, 미국에선 첫 주에 2위를 기록하며 15만 장을 파는데 다만 오아시스 자신들이 기대했던 40만 장은 기록하지 못했고 현재까지 미국에서 100만 장을 팔았다.
하지만 동시에 당시 오아시스 신드롬의 종말을 의미하는 신호탄이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오아시스 찬양 일색이던 언론까지 밴드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평단과 대중의 차디찬 혹평을 듣게 되었다. 사실 평론가들은 나오자 마자 이 앨범을 칭찬했다, 평론가 존 해리스의 말에 따르자면, "그 정도로 엄청난 양의 열광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은 30년 전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발매된 이후 처음이었다"고 발언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러한 열광적인 평가에 의문을 표했고, 이후 Be Here Now 투어가 끝날 무렵에는 평균 이하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 비평가들 또한 첫 두앨범에 비해서 약하다고 평가를 바꾸었다.
이 앨범은 사람들로 부터 브릿팝의 종말이란 평을 듣게 되었으며,
이러한 혹평에도 불구, Be Here Now는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900만장이상 판매되었다.
Be Here Now 발매이후, 그들은 97년, 98년동안 월드투어를 진행하게 된다. 투어가 끝나갈 무렵, 음반의 반응은 극찬에서 평균 이하의 반응으로 바뀌었고, 많은 비평가들은 처음 두 음반에 비해 약했다고 재평가했다.
이렇게, 90년대 중반, 영국을 강타했던 브릿팝의 시대는 결국 저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재앙과도 같았던 Be Here Now 투어를 마친 후 언론의 혹독한 비평 속에 그들은 서로를 멀리하며 98, 99년을 별다른 활동없이 보냈다.[36] 또한 노엘 갤러거는 수많은 곡들을 B 사이드로 잘라버린 점에 대해서도 비판을 들었다. 실제로 팬들은 노엘이 곡 선정을 신중히 하고 B 사이드 곡들을 남발하지만 않았더라면 오아시스 신드롬이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곤 한다.
6.2.1. 《The Masterplan》
1998년 11월 2일, 싱글들에 같이 팔리는 곡인 B 사이드곡들을 모은 The Masterplan이 발매됐다. 전성기 시절 오아시스의 마지막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Be Here Now가 전작에서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발매된 이 앨범은 오히려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Be Here Now를 싫어했던 노엘 갤러거는 Be Here Now보다 이 음반이 더 훌륭했다 회술했으며, 이후 발매된 베스트 앨범 Stop The Clocks에서는 Talk Tonight, The Masterplan, Acquiesce, Half the World Away 4개 곡이 수록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곡들이 모여있다. 노엘 본인은 이 앨범이 세 번째 앨범이었어야 했다고 주장할 정도.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2집과 비슷하며, 그 당시 노엘의 감정을 엿볼수 있는 앨범으로서, 오아시스 팬이라면 꼭 한번 사서 들어보길 바란다. 이 앨범은 원래 싱글을 비싸게 사야지만 B 사이드를 살 수 있는 다른 나라에서 판매될 예정이었으나 영국에서도 팔게된다.
영국에서 60만 장, 전세계에서 200만 장이 팔린다.
7. 침체기 (2000년 - 2004년)
7.1. 본헤드와 귁시의 탈퇴
과도기를 거친 오아시스에게 한가지 뜬금없는 소식이 전해져 온다. 바로 오아시스의 전 드러머, 토니 맥캐롤의 소송이다. 초기 계약에 포함되어있던 조항을 근거로 들이대며 자신에게 미지급된 보상을 지급하라면서 오아시스에게 소송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토니가 승소하고, 55만 파운드를 일시불로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소송은 토니에게 오히려 손해였는데, Definitely Maybe로 받게 될 모든 불로소득을 포기하게 된 것.4집 녹음은 4월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순조롭게 흘러가는듯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8월 원년멤버였던 리듬 기타리스트 '본헤드'가 탈퇴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당시에는 그의 탈퇴 이유에 대해 노엘이 "아더스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에 탈퇴한 것"이라고 언급하였지만, 실제로 알려진 바로는, 마약에 쩔어가던 노엘이 언제 한번 마약 때문에 앓아 눕고는, 마약을 끊게되고, 멤버들에게 제발 망나니짓 좀 그만두라면서 녹음 기간에는 "음주 및 마약금지" 명령을 내렸는데, 아더스가 이를 위반해 노엘과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고, 이후 본헤드가 탈퇴하였다. 오아시스 팬들은 며칠 후 베이시스트 폴 "귁시" 맥기건의 탈퇴 발표 소식을 접하며 더 큰 충격에 빠지게 됐다.[37] 앨범 발매 전 본헤드와 귁시가 탈퇴했기 때문에 저작권법 문제가 엮이게 되었다. 때문에 노엘이 그들이 연주했던 기타와 베이스 파트를 대부분 재녹음했다. 실제로 앨범 속지에도 갤러거 형제와 드러머 앨런 화이트만이 참여했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공석이 된 기타리스트 자리에는 헤비 스트레오의 겜 아처가 새로 들어오게 된다.[38]
2000년 2월 7일, 4집의 첫 싱글곡인 Go Let It Out을 출시하게 된다, 밴드에 합류한 후 아처가 처음 맡은 역할은 바로 이 곡의 뮤직비디오 촬영이었다.[39] 그 즈음 밴드에 들어와 잠시 연습을 하던 데이빗 포츠는 어차피 금방 잘릴 것 같았고 베이스를 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발을 뺐다. 그리고 그 뒤에 라이드와 허리케인 넘버원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였던 앤디 벨을 새 베이시스트로 영입했고 1주일 후 이를 공식 발표했다.[40]
7.2.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2000년 2월 28일, 오아시스의 4집인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는 UK차트 1위를 기록하고, 발매당시 Q에서 이 앨범에 대해 호평을 했고, 2000년 최고의 음반 50위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평단의 반응은 미적지근했고, 빌보드에선 24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순식간에 차트에서 사라졌다.
바뀐 밴드의 로고[41] 만큼이나, 이전의 세 앨범과는 확연하게 스타일이 달라졌다. 우선 이전까지의 오아시스가 정통 로큰롤을 추구했던 밴드였다면 4집의 오아시스는 일렉트로니카와 사이키델릭 락이 혼재된 음악을 했다. 게다가 두번째로 싱글컷된 곡인 Who Feels Love? 에 인도의 전통 악기인 시타르를 도입하여 연주하는가 하면 기존의 오아시스 스타일의 곡이라면 Go Let It Out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오아시스의 앨범치고는 곡에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팬들에게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그도 그럴게, The Masterplan의 반응만 봐도, 그 당시 대중들은 오아시스에게 밝고, 신나는 브릿팝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달라진 색채 때문에 이 앨범에 대해서는 혹평하는 면이 많았던 앨범이다.
왜나하면 이 앨범을 작사할 당시에 노엘 갤러거가 마약, 특히 코카인으로 인해 외로움과 편집증, 신경쇠약 등 각종 후유증에 시달릴 무렵이었기 때문에 노엘의 가장 내밀하고 어두운 구석이 반영된 곡이다. 실제로 노엘은 1, 2집 시절에 엄청나게 마약을 한 후유증으로 공황장애에 시달려 마약을 그만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Gas Panic의 가사에서 느낄수 있다. 또한 리암은 결혼해 가정을 꾸리면서 여러모로 전에 비해 차분해지지만 결국 노엘과 리암 두 사람 모두 이혼을 겪게 된다. 여기에 프로듀서도 오웬 모리스에서 U2, 마돈나, 뷔욕, 매시브 어택과 작업해온 마크 '스파이크' 스텐트로 바뀌며 대대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등, 21세기를 맞았던 오아시스의 시작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영국 60만, 전세계 300만 장이 팔렸다.
2000년 7월 21일, 그들은 구 웹블리 경기장에서 라이브를 진행했다. 1일차때는 여러모로 레전드라 불릴만한 라이브를 보여주었지만
문제는 둘째 날이었다. 둘째 날 공연이 전 유럽에 라이브로 방송되었는데 하필 그 전날 리암이 스파이스 걸스의 멤버와 밤새 술 마시며 놀다가[42] 한숨도 못 잔 상태에서 공연을 하였다. 결국 리암은 전 유럽에 생중계되었던 이틀째 공연에서 완전히 맛이 간 상태로 임했으며[43], 노엘은 공연 내내 리암을 죽일 듯이 쳐다보면서 열이 뻗쳐 있었다.어땠는지 한 번 직접 감상해보자.
2000년 11월 13일, Familiar to Millions라는, 영국의 웸블리 경기장에서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고 영국 5위에 오른다. 라이브 앨범이나 베스트 앨범같은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갤러거 형제가 이 앨범을 낸 이유는, 둘째날 공연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원래 이 정도로 라이브를 잘한다." 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였다.
당시 오아시스가 공연했던 이 웸블리 구장은 지금은 사라진 구장으로, 현재는 뉴 웸블리 구장이 지어진 상태인데, 웸블리 구장은 현재까지도 영국에서 가장 신성한 구장으로 여겨진다. 당시 오아시스는 이 구 웸블리 구장에서 공연하는 역사상 마지막 영국 밴드였기 때문에 그 상징성 또한 컸다. 그렇게 오아시스는 2000년을
새천년을 마무리한뒤, 2001년 한해동안, 오아시스는 새 앨범 작업과, 월드투어에 집중했다. 1월에는 남미에서 여러번 페스티벌을 진행하고 왔으며, 5월에선 북미, 6월에는 닐영의 투어를 도와주었으며, 7월에는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많은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0월에는 영국 맨채스터, 글래스코에서 지난 10년간, 라이브활동을 기념하는 라이브를 진행했다. 이때 6회 전부 매진되는 저력을 보여주며, 아직 오아시스는 죽지 않았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노엘과 리암, 두 형제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던 2000년을 지난 이후라 그런지, 당시 갤러거 형제의 사이는 무척이나 좋았다. 5월의 북미투어의 이름이 The Tour of Brotherly Love, 번역하면 형제애 투어였을만큼 당시 오아시스 멤버들의 사이는 이렇게 좋을 적이 없었을정도로 굉장히 돈독하였다.
7.3. 《Heathen Chemistry》
2002년 발매한 5집 Heathen Chemistry도 영국 1위를 차지하고 빌보드 23위에 오른다. Stop Crying Your Heart Out, little by little, songbird 등의 싱글은 호평을 받았지만 앨범의 평가는 계속 하향세를 보였다. 5집은 영국에서 100만 장, 전세계 700만 장이 팔렸다. 이 앨범이 발매되고 6집 작업에 막 들어갔을 때 드러머 앨런 화이트가 탈퇴하게 되며, 그 후의 드러머 자리는 잭 스타키와 크리스 섀록이 객원 드러머들로서 대신하게 된다.[44]
8. 황혼기 (2005년 - 2009년)
8.1. 제2의 전성기, 그러나 허무한 해체
그 후 계속 내리막 길을 가고 있던 오아시스는 2005년 발매한 6집 Don't Believe the Truth부터는 노엘의 슬럼프가 끝나고, 오랜 기간 끝에 밴드 멤버들의 음악이 마침내 조화를 이루게 되면서 1, 2집 같은 로큰롤 트랙들이 수록되며 전작들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12위에 오르고 영국에서는 90만 장을 기록하며 오아시스 후반 앨범 치고는 상당히 높은 800만 장을 기록한다.
오아시스 제 2의 전성기를 시작하는 앨범이며, 이 앨범 덕분에 오아시스는 "한 때 잘나갔지만 이제는 그저 그런 밴드"라는 이미지를 벗게 되었다. 이 앨범은 노엘 혼자가 아닌 오아시스의 모든 멤버가 작곡에 참여 했는데 오프닝 트랙마저 노엘이 쓴 곡이 아니다. 로고 역시 바뀐 로고에서 기존의 로고로 돌아오게 된다. 또 이 앨범에는 노엘과 리암의 듀엣곡 Let There Be Love가 수록되어있다.[45]
2006년은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발매한 7집 Dig Out Your Soul에 이르러서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평을 받았다. Be Here Now 이후로 오랜만에 미국 시장에서 5위라는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고, 전세계적으로 25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7집은 4집과 마찬가지로 사이키델릭한 느낌과 일렉트로니카, 엠비언트 등 사운드를 추가해 기존에 오아시스 느낌이 아닌 실험적인 느낌에 앨범이 됐는데, 너무 어두워서 오아시스 같지 않다고 혹평 받았던 4집과는 달리 7집은 평론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판매량은 4집이나 5집보다도 적지만 2000년대 후반 음반시장 규모 자체가 매우 작아진 걸 고려하면 상당한 판매량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소식도 잠시... 형제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결국 2009년 8월 28일 노엘 갤러거가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그것도 공연 직전에(...) 이후 나머지 밴드 멤버는 비디 아이라는 이름의 새 밴드를 시작하고, 노엘은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체 이후 2010년 Time Flies... 1994-2009라는 또 따른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다.
2010년 브릿 어워드에서 오아시스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앨범으로 30년동안 발매된 앨범중 최고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본헤드는 2012년 Vinny Peculiar와 함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Parlour Flames를 시작하였다. 본헤드는 트위터 계정이나 사진 등을 통해 리암, 겜, 앤디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후 2014년 Phoneys And The Freaks 등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해체 선언 이후로 영국 도박사들이 이들이 5년 이내로 재결합한다는 쪽에 서로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014년 비디아이가 두 개의 앨범을 낸 끝에 미적지근한 대중들의 반응과 음악적 방향성 상실, 리암 본인의 의지 상실 등이 겹쳐 해체됐다. 2017년 6월부터 리암도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9. 해체, 그 이후의 이야기
9.1. 정규 앨범 리마스터
2014년에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가 20주년 기념으로 리마스터링 재발매되었다. 다양한 사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말 오랜만에 '오아시스'의 이름으로 발매되는 앨범이다. 그들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었던 Dig Out Your Soul 이후 6년만에이후 BHN도 재발매되었다. 미공개곡 if we shadow, untitled 등이 포함되어 있다.
9.2. 오아시스 다큐멘터리 슈퍼소닉
영화 '에이미'를 만든 측에서 2016년 10월 2일 영국에서 오아시스 다큐멘터리를 개봉했다.# 제목은 오아시스의 첫 싱글 제목을 그대로 따온 Supersonic.[46] 한국에서는 2016년 11월 24일 개봉했다. 번역은 데드풀을 번역했던 황석희. 또한, 최근에 한 층 더 다듬어진 자막으로 한국에서 영화가 재개봉 되었는데, 2017년 11월 2일부터 4일까지 메가박스 코엑스에서만 청소년관람 불가 버전으로 상영되었다.갤러거 형제의 어린 시절부터 오아시스의 최전성기인 1996년 넵워스 공연까지의 이야기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앨범으로 치면 싱글 1집 Supersonic에서 정규 2집 Morning Glory까지가 되겠다. 오아시스의 명곡들은 물론, 인터뷰와 주요 사건사고도 다룬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데 리암의 트윗에 따르면 자신은 슈퍼소닉에 대한 수익을 일절 받지 못했다고 밝혀
9.3. 2021년, 넵워스 라이브 25주년
2021년 3월, 리암과 노엘이 같이 영화사를 차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여러 정론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리암이 트위터에 언급하면서 한국 팬들에게도 알려졌고 대부분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 해체 이후 10년 넘게 상종도 안하던 두 형제가 같이 회사를 차렸다는 건 굉장한 충격이었는데, 영국의 기업정보 시스템을 통해 이것이 사실이었다는게 밝혀졌다! 회사의 이름은 Kosmic Kyte Ltd. 2021년 2월 24일에 설립되었다고 나와있고, 기업의 설명에는 감독의 신분으로 리암과 노엘의 풀네임이 정확하게 적혀있다. 아마 이들이 발표할 작품은 1996년 넵워스 공연에 대한 영화일 것으로 예상된다.7월 14일, 리암과 오아시스 SNS에 Oasis Knebworth 1996의 개봉이 발표되었다, 9월 23일 전세계에 개봉된다고 한다. 이후 노엘의 SNS도 이 게시물을 공유했다. 여담으로 노엘 갤러거는 방송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며 “리암은 X나 멋진 옷을 입고 멋지게 무대 위를 걸어다녔다. 멋진 영화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팬들은 둘의 관계가 완화된 것에 대해 환호하는 중.
2021년 9월 2일 Live Forever의 라이브 클립이 공개됨과 동시에 스트리밍 사이트에 선공개되었다. 음원 및 라이브 DVD/BD는 11월 19일 발매 예정.
9월 21일과 10월 19일 마찬가지로 각각 Champagne Supernova와 Some Might Say의 라이브 클립이 공개되고 스트리밍 사이트에 음원이 공개 되었다. 이후 11월 16일 Wonderwall의 라이브 클립이 공개되었다.
아쉽게도 이번 Oasis Knebworth 1996은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는다. 때문에 많은 국내팬들 역시 아쉬워했다.
그러나 11월 20, 21일, SBS MTV에서 자막으로 Oasis Knebworth 1996을 방영해주었다.
수많은 팬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냅워스 이후 3년이 지난 2024년까지도 재결성은 커녕 개인 활동들만 활발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10. 재결합
2024년 8월 26일(영국 기준), 오아시스 X(구 트위터) 공식계정과 노엘, 리암의 계정이 "27.08.24. 8am"이라는 똑같은 짤을 올렸다.그리고 다음날 8월 27일 오전 8시(한국 기준 오후 4시), 두 형제가 2025년부터 오아시스로서 같이 투어를 돌 것으로 발표하면서 재결합이 확정되었다.
10.1. 2025년 내한공연
2025년 10월 21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예정되어있다.[1] 비틀즈의 곡인 <Rain>에서 따왔다고 한다.[2] 이 이름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데, 당시 갤러거 형제의 침실에 붙어 있던 인디 록 밴드 인스파이럴 카페츠(유명한 매드체스터 밴드로 노엘이 로디(락밴드의 지방공연 매니저)로 일했던 밴드라고 한다. 포스터에는 개최지 중 하나였던 스윈든의 오아시스 레저 센터가 기재되어 있었다고.)의 투어 포스터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갤러거 형제의 우상 비틀즈가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던 클럽의 이름이 오아시스여서 그 곳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갤러거 형제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오아시스라는 이름은 가게 이름 같은 곳에 매우 흔하게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확히 어디에서 따왔는지는 기억이 안난다고. 다만 사막에 혼자 있는 오아시스처럼 자신들도 홀로 서 있어서 오아시스라고 지었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었기에 어디서 따왔다기보단 뜻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을 수도 있다.[3] 원래 보컬을 하고 싶어 오디션을 봤다가 떨어졌다고 한다.[4] 사실 이건 잘못 알려진 소문이라고 한다. 2009년 5월 Q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노엘은 "그건 잘못 알려진 소문이다. 물론 초창기에는 내가 일부러 그런 식으로 인터뷰하기는 했었다" 라고 말한바 있다.[5] 리암이 말하기를 네 발로 기어 들어오며 노엘이 밴드에 가입할 때 거의 리암에게 빌다시피 했다고 한다.[6] 사실 이전까지 노엘은 다른 밴드에서 기타리프를 조율하는 등의 잡일을 했다고. 이 시기엔 수입이 괜찮았는지 리암이 같이 밴드를 하자고 제안을 했으나 거절했다고. 그러나 해고당한 후 갈 곳 없어지자 리암한테 빌고 빌어서 밴드에 가입했다고 한다.[7] 어느 정도였냐면, 밴드의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소닉에서 "잡지에는 우리 이야기 따위 한 줄도 실리지 않았어. 심지어 구리단 말까지!" 라고 언급하는 걸 보면 정말 우리나라 학교 동아리 수준의 밴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8] 당시를 회상하며 갤러거 형제의 어머니 페기 갤러거가 말하길, 매일같이 밴드 관련으로 취직이 됐네 안 됐네 가지고 다투기도 하면서도 속으로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9] 해당하는 곡은 I Am the Walrus 커버였다.## 사실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곡이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무래도 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는 앨런 맥기의 기억 어딘가에 착오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10] 크리에이션 레코드 소속 밴드인 18 wheeler의 앨런 호크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그런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11] 다만 이때 기본적인 기타리프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12] 이후 Definitely Maybe 10주년 다큐에서 노엘은 "그 버전은 존X 훌륭해, 그러니... 천재적인 작품에 뭐하러 또 손을 대겠어"라고 발언하였다.[13] 실제로 공연에서 즉홍적으로 이렇게 가사를 바꿔서 불렀다.[14] 데뷔한지 두달 조금 지난 락밴드가 최고의 락 페스티벌이라 불리는 글라스톤베리에 참가한것은 상당히 대단한 일이다.[15] 이 기록은 2006년 악틱 몽키스의 1집에 의해 깨진다.[16] 오아시스 멤버 전원이 공연 전에 코카인인줄 알고 빨았던 것이 알고보니 필로폰이었고, 다들 똑같이 맛이 가있던 상태였다.[17] 이 때 노엘이 만든 노래가 바로 그 <Talk Tonight>이다.[18] 노엘이 이 곡은 1집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판단하여 넣지 않았다.[19] [20] Supersonic의 미국버전 뮤비와 Cigarettes & Alcohol의 뮤비를 짜집기한 영상이다. 이유는 원래 촬영하기로 한 날에 리암이 안와서 그랬다고 한다.[21] 그러나 블러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은 2009년 블러의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아직도 누가 우리의 싱글 발매일을 다른 사람의 싱글 발매일과 겹치게 한 건지 몰라요." 라고 밝혔다. 블러 멤버들의 의사보다는 소속사와 NME의 입김이 있었다고 하며 '장단맞춰주기' 정도로 생각했던 블러의 리더 데이먼 알반이 승인하면서 벌어진 일이다.[22] 물론 몇 주 뒤 돌아온다.[23]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일주일 판매량이 The Great Escape의 한 달 판매량보다 높다.[24] 그 덕분에 블러는 중산층 날라리 밴드라 불리며 서민들에게 미움을 사는 일이 빈번했다. 원래 영국자체가 산업화 시대부터 계급층을 나눠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처럼 단순히 돈을 많이 번다가 아니라 정말로 계층마다 갈등이 거의 우리나라 지역감정 수준이다. 거기다 서민층을 대표하는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노엘 겔러거(특히 노엘은 공개적으로 노동당과 토니 블레어를 지지한 것으로 유명하다)의 지지를 받아냄으로써 이런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다만 블러의 프론트맨인 데이먼 알반도 노동당을 지지했으며 위에서 말한 parklife와 같이 중산층, 즉 미들클래스를 비꼬는 곡도 많이 발매했음에도 미움받은 거 보면 당시 브릿팝을 가지고 장난치던 언론들의 탓도 큰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브릿팝 문서 참조[25] 브릿팝 전쟁 이후로 블러는 브릿팝에서 벗어나 인디적인 사운드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Blur(음반)[26] Wonderwall[27] Wonderwall[28] 1996년 브릿어워드 기자 회견에서 한 기자가 브릿어워드를 싹쓸이한 기분에 대해서 노엘에게 묻자, 6개 정돈 받아야 하는데 3개밖에 받지 못했다고 말 한 바있다[29] 후에 이 기록은 로비 윌리엄스에게 깨지고 만다. 3일간 37만 5천 명으로 로비 역시 넵워스에서 공연했다.[30] 게다가 그 당시에는 온라인 예매가 없었음으로. 오프라인으로만 거진 300만명이 예매를 시도한 것[31] 공연당시 리암은 공연장 2층에서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공연을 지켜보면서 노엘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야유를 보냈다.[32] 코카인은 마리화나보다 훨씬 심각한 마약류로서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운데, 마리화나가 없어 코카인을 할 정도면 당시 그들 주변에 얼마나 코카인이 넘쳐났는지 알 수 있다.[33] 리암은 노엘의 노래가 형편없다며 부르기 싫어했고, 노엘은 리암이 녹음을 할 때 스튜디오에 절대 오지 않았다고 한다.[34] 하루에 42만, 일주일 동안 76만. 현재는 Adele의 25의 80만에 의해 깨졌다. 다만 아델도 하루 42만의 기록은 깨지 못했다.[35] 2집이 일주일에 35만장을 팔았다.[36] 특히 1999년의 공연 영상, 자료는 많지 않다.[37] 사실 귁시는 원래부터 멘탈이 약해서, 2집 발매 직전에도 일시적으로 밴드를 탈퇴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다 친구의 탈퇴가 그에게 도화선이 된 것이다.[38] 본헤드가 노엘과의 불화에 탈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때 내가, 젠장! 쟤네들 이제 해체하겠구나! 진짜 팬이었는데! 라고 생각했지. 그냥 빈말이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 오아시스는 로큰롤을 다시 살려낸 장본인들이었거든." 라고 언급하였다고 한다.[39] 여담으로 공석이었던 베이시스트는 노엘이 대신 했다.[40] 벨은 그 전까지 한 번도 베이스를 쳐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에 10시간 이상 베이스 연주법을 배웠다.[41] 여담으로 4, 5집의 로고는 겜 아처가 만들었다.[42] 리암이 말하길 그 다음날 공연일정이 있는 줄 몰랐다고(...)[43] 노래를 부르다 말고 이상한 소리를 한다든지, 평소 음이탈이 나지 않는 곳에서 음이탈이 난다 든지, 끝음 처리가 매우 불안하다든지 그야말로 최악의 라이브 그 자체였다.[44] 리암은 노엘하고 앨런이 싸워서, 노엘은 중요한 회의 때 앨런이 오지 않아 리암이 앨런에게 화를 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으나, 추후 앨런이 개인 인스타 댓글로 밝히길 리암과의 불화는 없었다고 한다.[45] 2005년 11월 싱글로 발매되었다.[46] 실업수당이나 받으며 살던 워킹 클래스의 맨체스터 청년들이 밴드를 결성해 넵워스에 서기까지 모든 것들이 마치 초음속처럼 너무 빨리 진행됐기 때문에 영화 제목이 Supersonic(초음속)이라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