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동기
1982년 MBC에서 방영한 당시 한국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 관한 방송. 초반에 다뤄진 게임은 세가의 레이싱 게임 터보와 갤러그이다.
경향신문이 취재한 1983년의 오락실 풍경. 갤러그가 늘어서있는 모습에서 당시 갤러그의 선풍적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저 기판은 모두 세운상가를 주축으로 유포된 불법 클론 기판들이다. 기사 내용은 당시 학부모들의 전형적인 시각처럼, 오락실을 유해하게 보는 논조였다.[1]
초창기에는 핀볼 게임기나 아타리에서 개발한 퐁 등의 게임이 다른 아날로그 싱글로케이션 게임과 함께 서비스되면서 시작했다. 외국어를 잘 모르는 오락실 주인 아저씨들이 게임 원제와 전혀 상관없이 게임 제목을 오락실 기계에 써붙이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몇몇 게임들이 원작과 다른 타이틀로 알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7년에 아타리 브레이크아웃(벽돌깨기) 게임이 들어오면서 오락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1978년에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도입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국적으로 오락실이 급격하게 늘기 시작하여 이미 1980년이 되면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의 경우는 종로, 명동, 서면, 남포동 같은 번화가 뿐만 아니라 학교 주변이나 주택가에도 오락실이 들어서게 되었고, 전주시에도 오락실이 급증했을 정도가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서울 기준으로는 1975년 이후로 에너지 절약 문제 및 청소년 생활지도 문제로 인하여 오락실 신규 개업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영업중인 오락실의 90~95% 이상이 무허가 오락실이었으며 이 시기에 사용된 기판들은 상당수가 세운상가나 청계상가 등지에서 만든 복제 기판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이때에는 타 업종의 업소가 떠나고 난 자리에 들어오기도 하였는데, 삼천리연탄 대리점 떠난 자리에 들어가서 삼천리오락실, 삼성전자 대리점 떠난 자리에 들어가서 삼성오락실 등이 있었다. (1982~1983년 서울 관악구 난곡동) 이는, 원주인(또는 대리점을 내줬던 본사)이 간판을 제대로 철거하지 않아 생긴 해프닝이었다.
이후 전대미문의 히트를 기록한 갤러그를 비롯하여 너구리, 버블보블, 아타리 테트리스, 하이퍼 올림픽, 원더보이, 1942, 더블 드래곤등의 게임이 차츰차츰 늘어나면서 오락실의 최고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전성기
일본과 라이프 사이클은 동일하면서도 플레이 요금이 당시 물가와 비교해봐도 매우 쌌기에[2], 대전 격투 게임 등의 오락실 플레이 빈도가 매우 높아[3] 개중엔 고수도 많이 생겨났고, PC통신 등등의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서 배틀 팀(클랜, 길드같은 개념)이 생기고 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에 '일본하고 붙으면 당연히 우리가 이긴다.' 같은 생각을 많이들 했고 실제로도 그런 결과를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나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3TB의 걸친 시기, 철권 시리즈에서는 철권 TT부터 시작하여 앞서갔다.버추어 파이터 시리즈는 신의욱(aka 꼬마아키라)으로 대표되던 괴수들이 일본을 '가지고 논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 수준 차이가 심했는데 실제 플레이 영상을 뒤져보면 참 안쓰러워질 정도로 당하는 장면도 있었다. 특히 대회 이후에 신의욱은 인터뷰에서 일본의 플레이어 수준에 대해 일본 최고수=한국에 널려있는 동네 고수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대회 이전에도 인터뷰로 일본 플레이어의 수준은 낮다고 언급했지만 정작 본 영상에서 편집으로 삭제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던 세계대회에서 신의욱이 우승, 조학동(aka 이게라우)씨가 준우승을 석권하고 나서 일본에서 오락실 투어를 하게 된다. 결과는 일방적인 참혹한 도장깨기였고, 이런 결과를 본 세가는 두 번 다시 세계대회를 열지 않았으며 한국 선수들을 초청하지도 않았다.[4]
자세한 내용은 버추어 파이터 3 문서
의 맥시멈 배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한국의 아케이드 게임은 기본적으로 최고 난이도로만 맞춰져서 유저들은 결국 실력이 높아지지 않고선 즐기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한국인 특유의 승부욕과 집중력으로 생긴 폐해 아닌 폐해이기도 하다. 또한 상단서술대로 가격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코인러시를 통해 계속 도전하기에도 좋은 환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한국을 격투게임 최강국 중 하나로 만들었고, 현재 현역 최고수들도 대다수 오락실의 전성기를 체험한 90년대에 아이들였던 유저들이다. 즐기기보단 이기기 위해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물론 일본이라고 고수들이 죄다 순수하게 즐기는 인간만 있는건 절대로 아니지만. 이후에 안 그래도 입문이 어렵던 격투 게임 장르는 건드려보기도 힘들 정도로 진입장벽이 올라가서 유입이 극단적으로 줄어버린 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이야기.
철권 시리즈의 경우 철권 TT 시절의 장익수로 대표되던 시기가 유명하다. 전설이 된 것은 장익수와 석동민[5]가 일본에 초청받아 벌인 대전. 석동민은 화랑 등으로 부캐릭터를 고를 때 약 8패 가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최강이라고 불리웠던 장익수는 일본 원정에서 단 1패도 하지 않는 괴력을 보여주었는데, 일본 최고수 클래스와의 100전이 넘는 대전에서 모두 승리한 것이다. 이 일로 일본 철권계는 버추어 파이터 시절처럼 대충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세계 대회에서도 한국이 1~3위를 모조리 석권하면서 절대적으로 앞서나갔다. 이 이후 격차는 다소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한국이 앞서 있는 편. 이후에도 쿠단스, Nin, 홀맨, 무릎, 잡다캐릭 등 괴수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세계 대회 또한 한국이 석권했다.
3. 대중화
1997년 외환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락실 시대의 전성기로 봐도 무방하다. 한스밴드 말마따나 그 시대의 아빠들을 포함한 30~50대 남성의 오타쿠, 백수, 회사원, 전문직 종사자 등도 오락실의 큰 손이었다. 이들의 연령적인 특성 상 직장인 및 사업가인 경우가 많아서 재력이 빵빵하기도 했고.[6]대전액션 게임의 뒤를 이어 오락실 업계를 점령한 장르는 리듬 게임이었다. 일본 코나미에서 출시한 비트매니아와 댄스 댄스 레볼루션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에 편승해서 펌프 잇 업, EZ2DJ이 등장하면서 국산 리듬게임 시장을 구축했다.
특히 댄스 댄스 레볼루션과 펌프 잇 업과 같은 댄스 리듬게임들은 다이어트 열풍에 힘입어서 '게임을 하면서 운동도 한다'라는 컨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리듬게임은 간단한 게임 방식과 독창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수록곡 등으로 기존에 오락실 게임을 즐기지 않던 이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오락실 역시 기존의 퇴폐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나 리듬게임을 중심으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장소라는 긍정적 인식을 얻게 된다.
이 시절에는 특히 DDR방이나 펌프방처럼 리듬게임 기체만을 수십대 들여놓은 리듬게임 전용 오락실이 생기기도 하였다.[7]
하지만 리듬게임은 2002년 무렵부터 대중들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걸어갔다. 난이도는 한없이 높아졌고, 수록곡도 점점 리듬게임 매니아들에게만 지지를 받는 난해한 곡이 늘어났다. 리듬게임이 특정 매니아들만의 리그가 된 이후 오락실 업계는 새로운 주력 장르를 찾아야 했지만 대전 액션게임과 리듬게임의 뒤를 이어 오락실을 이끌어갈 장르는 탄생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통신망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 게임, 온라인 게임이 발흥한 시기였다. 컴퓨터 성능의 발달로 인해 가정용 컴퓨터를 통해서도 전혀 손색없는 그래픽과 게임성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네트워크를 통해 타인과 동시에 게임을 즐긴다는 큰 메리트가 있었다.
게이머들은 오락실 대신 집이나 PC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또한 이 무렵 발표된 일본산 가정용 게임기들은 그래픽이라는 면에서 오락실 게임과의 격차를 급격히 줄여가며 오락실의 메리트를 무력화시켰다.
4. 침체기
달도 차면 기울다는 말도 있듯이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의 오락실 업계는 침체에 빠지기 시작했다.2000년만해도 25,341개였던 오락실은 2001년 13,540개로 절반이나 줄었으며[8], 2002년에는 7,404개로 거기서 또 반쪽이 났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4.1. 기판 가격에 비해 낮은 수익으로 발생한 적자
- 대형 게임기가 아닌 이상 게임 요금은 1판에 100원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터라 80년대나 다를 바 없는 요금 체계로 수익을 올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요금을 올리려고 해도 동종의 업주가 가격을 유지하는 등 치킨런을 해 버리면 가격을 올리니만 못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2010년대 후반에 와서야 1판에 300원, 혹은 500원이 일반적인 가격대가 되긴 했지만 이건 시내 등지고, 드물게 100원인 곳도 여전히 잔존해 있다.
- 게임 요금은 그대로인데, 아케이드 게임기들은 점점 비싸져만 갔다. 화려하고 깨끗한 품질의 화면과 사운드를 제공하는 만큼, 기판의 가격은 매우 비쌀 수 밖에 없다. 리듬 게임은 그렇다 쳐도, 철권 6가 1500만원씩이나 하는 고가였다. 중저가형 게임기는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개발이 주춤해졌다. 예를 들어 그나마 개발 비용이 적은 슈팅 게임의 경우 초보자는 엄두도 못낼만큼 질려서 손도 대지를 못하는 문제까지 생기게 되는 등 장르 자체가 침체기에 빠졌다.
4.2. PC방의 등장
청소년 유해시설이라는 눈총을 받아 지하나 뒷골목의 어둡고 불결한 장소에 주로 위치한 동네 오락실보다 PC방은 비교적 양지에 있고, 이전의 오락실들이 영세하여 인테리어나 서비스 시설 면에서 뒤처졌던 것에 비해 새롭게 개업한 PC방들은 훨씬 안락한 시설을 갖추었다. 예를 들어서 의자만 해도 오락실은 금속[9]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의자로 그나마 등받이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나 PC방에는 느긋하게 기댈 수 있는 편한 의자가 대부분이다.[10]PC방의 주요 사업 도구인 컴퓨터는 가격도 저렴하고 게임 가격도 싼 데다 단순히 설치만 하면 되기 때문에 유지비가 적었지만 오락실의 사업 도구인 오락기는 덩치가 크고 유지비, 기판 가격이 비싸며 매출이 보장된 것이 아닌데 사용가격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결정적으로 1980년대부터 오락실의 주 이용층은 초등학생~고등학생의 청소년들이었는데, 컴퓨터의 발전에 힘입어 PC방이 크게 보급되면서 이 청소년들의 관심게임들도 종래의 KOF나 철권 등 아케이드 게임에서 PC로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들로 넘어가버렸다. 1990년대 말까지만해도 PC방의 주력 컨텐츠는 스타크래프트같은 인기 멀티플레이 게임과 리니지를 위시한 MMO였던 만큼 전략시뮬 특유의 난도와 성인타겟 RPG에 대한 기호를 타서 PC방 자체가 10대 후반이나 20~30대의 비교적 고연령층의 공간이었는데, 바람의 나라[11]를 필두로 1999년의 포트리스2, 2001년의 서바이벌 프로젝트, 2002년의 라그나로크와 카운터 스트라이크 1.5, 2003년의 테일즈위버, 카르마 온라인[12], 메이플스토리 등 저연령대에게도 충분히 어필이 가능한 온라인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며 미성년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PC방의 풍경을 이루게 된다.
자연히 아케이드 게임은 청소년들의 관심순위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물리적으로도 불량한 형들이 서식하기 좋은 으슥한 느낌에, 기껏해야 맞은편이나 옆자리 사람, 혹은 뒤에서 기다리거나 구경하는 사람과만 소통할 수 있는 환경보다는 하나의 방에 따닥따닥 붙어 앉아 같이 파티하듯 즐길 수 있는 PC방의 환경이 더 선호되었다. 무리지어 행동하길 좋아하고 또 아직 순수한 까닭에 '오늘 어디가서 뭐하고 놀지'를 공리주의적으로 결정하는 습성이 있는 청소년기 남학생들에게 둘, 많아야 네다섯만 동시에 즐기고 나머지는 구경하며 기다려야만 하는 오락실보다 열명 가까이도 동시에 놀 수 있는 PC방이 훨씬 '공정하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느껴졌을테니 오락실은 점점 외면받고 소수로 행동하길 좋아하는 불량학생들의 온거지가 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오락기 한판에 100원인데 반해, PC방은 한 시간에 800~1000원[13]이니 지갑에 여유가 없는 학생들이 오락실 내지 문방구 앞 오락기에서 멀어지게 되고, 주이용자들이 손을 떼니 손님이 미어터져도 손해인 오락기주인들 입장에서는 치명타로 작용했다.
4.3. 스마트폰 게임의 대중화
위의 PC방이 2000년대 1차 충격을 줘서 사양산업을 만들었다면, 2010년대에는 확인사살로 안드로이드와 iOS를 위시해 수많은 스마트폰(태블릿)에서 매우 다양하고 퀄리티 있는 게임들이 나왔고, 공간도, 자세의 제약도 없는지라 라이트 유저들은 이미 폰 게임이 대중화된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종종 보였던 문방구 앞에 초등학생들을 노린 저가형 오락기들조차 최근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2020년대 이후 모바일게임 시장이 캐릭터팔이와 과금유도로 떡칠된 양산형 게임들로 시장 자체가 비정상적인 구조를 가지면서 모바일 게임 유저 중 게임성과 조작감을 중요시 하는 유저층 일부가 모바일로 이식된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하는 일도 생기고 있다. 일종의 수렴진화라고 말할 수 있을 듯.
4.4. 불법 복제 기판
한국의 아케이드 업계는 불법 복제 기판으로 시작하였고 끝까지 이 늪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처음 오락실이라는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부터 고정해온 금액을 쉽게 올릴수 없었고 이 금액은 불법복제 기판으로 서비스한다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요금을 유지하려면 불법기판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돼서 망할 수밖에 없는 사양산업이 되었다.우리나라의 대전 격투 게임 역사에서 스파2 이후 KOF 94를 시작으로 한 KOF 올드 시리즈와 철권 TT의 천하 통일은 사실상 불법복제기판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케이드 시스템의 전체적인 보안까지 강화되어 불법복제판도 구하기 어렵게 되자 복제기판으로 잘 벌어 먹고살던 영세 오락실 업주들 태반이 이 시기에 장사를 접어버렸다. 물론 나오면 뚫리는 게 일이었던 SNK의 MVS 같은 시스템들은 여전히 불법 복제판이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말기에 가면 아예 합본형 기판까지 돌고있었다.) 이것으로 연명하던 업주들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가동된 아케이드의 90% 이상이 복제기판이다. 그나마 그중 10%를 차지하는 정식 기판은 국내에서 만든 타이틀이거나 기판과 캐비넷이 하나라 기판만으로는 의미가 없어 반드시 전용 캐비넷이 필요한 슈팅을 포함한 체감게임이다. 일반 타이틀 중 국내에 정식 유통된 기판은 5프로도 차지하지 못한다.[14]
결국 이를 계기로 마지막 플레이모어가 있던 시절까지도 국내에서는 아케이드를 공식 리테일한다는 시장은 조성하지 못한채로 아케이드 시장이 사라져갔다.[15]
- 아케이드 게임을 불법복제 해킹판으로 개조
1960~90년대에는 인기있는 아케이드 게임들만 불법복제 해킹판으로 많이 제작된 적이 있었다. 2000~10년도에는 거의 인기있는 네오지오 아케이드 게임만 불법복제 해킹판으로 많이 제작된 적이 있었다. 2012년 이후로는 거의 사라졌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어서 정발이 안된 아케이드 게임도 불법복제 해킹판이 제작 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어느 정도 유저층이 존재는 하나 정발업체에서 지를 정도는 아니라서 결국 라이센스 위반 내지는 불법복제 물건이 퍼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한국발 데이터 유출의 문제까지 낳게 되었다. 정발 업체가 대인배가 되지 않는 이상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라는 말도 있었지만 결국 2013년부터 beatmania IIDX, 팝픈뮤직을 필두로 차례차례 정발되고 있어 이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 - 게임기 게임을 시간제 및 코인제 아케이드 게임으로 개조
주로 1980~1999년까지 이루어졌으며, 1999~2012년 이후에는 일부 사업가들만 불법 개조를 했다. 주로 대전격투게임(PS2의 철권 5, KOF)들과 일부 축구게임(발을 이용해서 드리블을 하면서 골대에 슛을 넣으면 1점을 얻는 1:1대전 형태의 게임 등)과 기타 게임기 게임들이 그 대상이었다.
2000년도에 철권 3 플레이스테이션판, 2005년도에는 일부 KOF XI 플레이스테이션 2판, 2008년도에는 많은 철권 6 엑스박스360판이 아케이드 게임 코인제 버전으로 불법 개조가 된 적이 있었다. - 아케이드 게임을 시간제 해킹판 게임으로 개조
대표적인 사례로 1996년 KOF 96이 있다. 이후 SNK는 KOF 97이후 시리즈 후속작에서 아케이드 게임 이식 시에만 컴퓨터 게임 캐릭터 대전 스테이지를 6스테이지나 줄이는 방법을 채용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 개발자들의 시간제 해킹판 불법개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방법으로 게임 엔딩보고 게임 오버로 끝나는 시간을 30분~2시간 이하 정도 줄이는 방법과 1994년 이후에는 게임 제한시간을 20초~99초로 설정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대책방법을 계속 도입하고 있다. - 아케이드 게임의 변종 불법복제 해킹판 제작
1986년에 유통된 버블보블이 대표적이다. 1992년에 유통된 스트리트 파이터 2 대쉬의 경우 스트리트 파이터 2 터보를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96년에는 KOF 96, 1997년에는 KOF 97, 99년에는 KOF 99, 2002년에는 KOF 2002 등이 보스 해킹판으로 개조가 된 적이 있었고 96은 기가 절반 무한버전도 있었고 2002는 기가 완전 무한인 해킹판도 존재했었다. 2012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 1993년도 이후에는 새로운 확장팩 게임을 만들거나 2000년 이후에는 아케이드 게임 통신 확장팩 사업을 5년~10년 정도 진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응했다.
4.5. 인터넷 다운로드
오락실에 있는 게임들은 MAME 등 에뮬레이터의 발전을 통해 어지간하면 인터넷 사이트에 거의 퍼져있다. 체감형 게임 정도만 예외긴 하나, 이런 게임들도 인터넷에 올라와있다. 오락실 게임을 인터넷에서 계속 다운로드를 받는 게 늘어났기 때문에 굳이 돈쓰고 발품파는 오락실의 입지도는 계속 해서 줄어들고 있다.게다가 띄엄띄엄 있는 오락실들도 고전 게임은 월광보합 같은 1,000~2,000 게임 합본 에뮬레이터 기기로 돌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굳이 해당 게임만 탑재되어 있는 희귀한 오락실 가서 돈 주고 할 필요를 못 느낀다.
4.6. 게임기 보급
패미컴이 대히트를 쳤던 요인 중 하나가 '오락실 게임을 가정에서도 즐긴다'였고 당시 인기 게임이었던 동키콩을 가정에서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큰 메리트였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오락실이 양아치 집합소라는 인식도 있었기에 가정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더욱 건전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80년대 당시에는 게임기의 성능이 아케이드 게임보다 뒤쳐졌기 때문에 다운이식이 될 수밖에 없었고 오락실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5세대 게임기가 발매되면서 게임기의 성능이 아케이드 게임의 성능과 맞먹게 되면서 완벽이식 작품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오락실의 쇠퇴로 이어졌다.인터넷으로 다운로드받을 수 없는 일부 오락실 게임은 플레이스테이션이나 XBOX로 이식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스트리트 파이터 4나 철권 TT 2. 이렇기 때문에 굳이 오락실을 안가도 되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이 시기 아케이드 게임 업계의 선두주자인 일본에서도 온라인 게임의 등장과 가정용 게임기의 성능 향상 등으로 인해 오락실은 침체에 빠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 아케이드 업계가 내놓은 대책이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아케이드 게임기였다. 게임센터에 통신망을 연결, 게임기에 네트워크 기능을 도입해서 다양한 부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아이디어는 이제까지의 오락실에는 없던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다만, 아직까지도 오락실로 가는 유저가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이 게임기로 진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라든지, 단순 추억을 위해서 가는 경우가 해당된다. 예시 중 하나가 이니셜D 아케이드 스테이지 시리즈로 4 베이스인 익스트림 스테이지 이후 아케이드 부서에서 나올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못박아 버렸기에 어쩔수 없이 오락실로 간다고 한다. 완간 미드나이트 MAXIMUM TUNE 시리즈도 같은 사항. 스팀으로 나오면 좋겠다고 성토하지만 과연 세가, 남코가 그걸 신경 써줄지 의문이다. 마이마이 시리즈[16], 사운드 볼텍스 시리즈[17], 유비트 시리즈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루브 코스터는 닌텐도 스위치와 스팀, 태고의 달인은 닌텐도 스위치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출시했기에 논외에 해당한다. 세가의 이니셜D The Arcade PC 버전이 불법으로 풀리긴 했지만, 하지 말라는 안내문을 올렸으니 가정용으로 풀리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
4.7. 네트워크 인프라 패러다임
세가, 코나미, 타이토 등 일본의 대형 게임회사들은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네트워크 기반을 쌓아올리며 준비 작업을 했다. 그 결과 2003년 즈음에는 하나둘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작품을 내놓으면서 활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 이르러서는 세가를 다시 한번 오락실의 제왕으로 올려 놓은 작품인 삼국지대전, 오락실에서 아이돌을 키운다는 컨셉의 특이한 작품 남코의 아이돌 마스터 등 네트워크가 없다면 구현이 힘들었을 히트작이 쏟아져 나와 오락실이 다시 한 번 번영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한다. 덤으로 이 덕분에 오락실에서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다양한 장르의 게임들(전략 시뮬, 육성 시뮬, FPS, MMORPG, 심지어 최근엔 AOS 장르의 게임도)이 등장했다.하지만 이러한 게임들은 가격이 무지하게 높아서, 비싼 것은 1억 원이 다다르는 것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런 것의 경우 최소 4대 이상으로 들여놓는게 기본인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도 이런 게임들을 들여 놓을 공간이나 자금이 여의치 않았던 조그마한 동네 오락실들은 하나둘씩 퇴출되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한국에서는 오락실 기계에 통신망을 연결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고 그런 것을 시도할 만큼 규모가 큰 아케이드 게임 회사도 없었기 때문에 네트워크는 도입되지 않았다. 펌프 개발사 안다미로가 아크쉐이드라는 건슈팅 게임을 통해 오락실 네트워크 서비스를 시도했다. 아크쉐이드는 한게임에서 서비스되던 온라인 버전과 아케이드 버전 사이에 연동까지 되는 최첨단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두 버전 모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서비스를 종료했다.
4.8. 고인물의 텃세 심화
한때 오락실의 주요 인기 장르였던 대전 격투 게임에서는 초심자, 라이트 유저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가정용 게임이 점차 보급되면서 게임을 하기 위해 오락실에 나와야 할 필요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그나마 오락실에 남은 이들은 소위 "마니아" 계층이 다수이다 보니 자연스레 저난이도의 게임은 회전률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게임사들은 게임의 회전율을 높여서 오락실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 서서히 게임의 난이도를 어렵게 만드는 방향을 택했고,[18] 그 결과 라이트 유저들이 하기조차 힘든 게임을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라이트 게이머들이 오락실에 발길을 끊는 결과를 초래했고 오락실의 쇠퇴로 이어졌다. 거기에 한국은 특성상 대부분의 게임이 일본에서 수입되는 작품들이었고 한국산 게임은 거의 없었던 것도, 이런 일본의 분위기가 반영된 신작 라인업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다.일본에서는 정반대로 특유의 하이스코어 문화가 쇠퇴를 조금이나마 지연시키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선 오래 전 게임 여명기때부터「어뮤즈먼트 라이프」라는 잡지가 1983년 4월호에서부터「이 달의 하이스코어 고지판(今月のハイスコア告知板(全国版))」이란 코너에서 일본 전국의 5대 도시 내에 있는 5개 업소를 대상으로 스코어 집계를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19] 고유의 하이스코어 문화가 이뤄지고 있었으며, 이 문화는 가정용 게임기 보급과 함께 점차 쇠퇴하던 오락실 업계에서 "하이스코어에 도전한다."는 명목으로 계속해서 오락실의 수요를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하이스코어 문화를 토대로 탄생한 스코어러들의 부심과 텃세[20]가 심해졌다. 이들이 부리는 행패 때문에 상기한 게임의 매니악화와 겹쳐 오락실에 오는 손님도 점차 줄어들었으며, 하이스코어 문화 역시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이런 이들의 텃세로 인해 신규 유입이 줄어들며 점차적으로 쇠퇴하다 2015년경 월간 아르카디아가 부정기 간행이란 명목으로 폐간되면서 하이스코어 문화는 존립위기[21]를 맞이했다. 그나마 월간 아르카디아로부터 하이스코어 집계에 관한 모든 사항을 인수인계받은 일본 하이스코어 협회[22]가 2016년에 출범하면서 아르카디아 집계를 계승하여 2020년대까지 지속되었지만, 이 역시 오락실 업계가 뭔가 살려보기 위해 하는 것이라기보단 아르카디아의 비정기 간행화(실질적 폐간) 이후 스코어러들의 수요로 집계가 재개된 것에 가까우며 하이스코어 집계의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하이스코어 집계를 지탱하는 주 수요층인 스코어러들은 대부분이 1980~90년대부터 하이스코어 활동을 해온 아재들이 대다수인데다 심지어 주요 스코어러들도 아재들이 대다수[23]라는 점도 향후 하이스코어 문화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는 요소다.[24]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엔 하이스코어 문화가 아예 없었기에[25] 일본에 비해선 문제가 덜했다는 시각도 있으나, 한국 오락실 또한 전성기 시절 신의욱, 장익수와 같은 고수들은 존재했으며 대전 격투 게임에서 수많은 유명 플레이어들을 배출했고 일부 몰지각한 유저들의 체어샷, 리얼철권으로 대표되는 폭력 문제를 앓았다.
5. 바다이야기 사태
점점 쇠퇴해가는 오락실 시장에서 업주들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이때 다수의 업주들은 청소년 게임장으로는 더이상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바다이야기와 황금성을 위시한 성인용 도박 게임장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이러한 게임기들은 높은 중독성, 그리고 현금 환전[26]이라는 유혹으로 인해 다수의 중독자들을 낳았고 이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경찰을 중심으로 성인 게임장에 대한 단속이 시작되었다.바다이야기 사태가 단순히 게임 업계 내부의 사건을 넘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은 정치권이 이 사건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여권의 유력 인사 중 한 명이 바다이야기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정치권은 바다이야기 문제로 시끄러워졌다. 이에 전담팀까지 만드는 장기 수사에 돌입하였다. 그 결과 정치권 유력 인사의 개입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바다이야기의 허가 과정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게임기 상품권의 현금 환전에 대한 문제로 인해 펌프의 개발사 안다미로도 이 때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인 오락실 업계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는데, 특히 청소년 오락실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성인 오락실로 업종 변경을 했던 업주들은 이 때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바다이야기 게임기에 네트워크를 통해 당첨 내용을 조작하는 등의 기능이 탑재되어 있던 것 때문에 오락실 게임기에 네트워크를 지원하기가 까다로워졌다. 이 때문에 삼국지대전을 수입하고 보급하려던 세가 코리아가 매우 난감해져 버렸다.
이후 오락실 업계는 소수의 매니아들을 중심으로 다시 흘러갔다. 일단 더이상은 많은 수의 유저들이 오락실을 그리 출입하지 않게 된 대신, 동네 오락실을 가던 과거 유저들이 동네 오락실이 없어지게 되자 시간을 들여 그 나름대로의 영업 노하우를 가지고 살아남은 유명한 규모가 있는 오락실을 찾아내 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오락실들 중, 관리를 잘하여 타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입소문을 타게된 오락실들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어 전국 각지에서 방문을 하기 시작해 과거보다 매출이 늘어나는 가게도 나왔다. 이에 더 해서 과거에 오락실을 다녔던 게이머들이 성인이 되어 직접 매장을 차리기도 하고, 심지어 게이머들이 직접 부품을 공수해와서 오래된 기기를 유지보수하기도 한다.
6. 재편 및 중흥기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한국 오락실 업계는 재편기를 맞아, 새롭게 문을 여는 오락실이 생겨났다. 이는 오락실 장르의 침체와 아케이드 게임 회사들의 몰락, 그리고 바다이야기 사태 등의 악재가 연달아 겹치면서 청소년 오락실이 너무 많이 망했고, 그러다보니 얼마 되지도 않는 오락실 게이머들의 수요보다도 오락실의 수가 턱없이 모자른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2008년 발매된 DJMAX TECHNIKA와 유비트 등의 신작 게임이 기존에 오락실 게임을 즐기지 않던 유저들의 발길을 오락실로 돌리고, 철권 시리즈 역시 MBC GAME의 철권 방송 등을 통해 부흥기를 맞으면서 청소년 오락실 업계의 상황은 2000년대 초중반보다는 매우 나아졌다.오락실이 하나둘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오락실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옛 게임(ex 건슈팅)들은 중고가가 오르기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된 게임들은 대개 폐기되었으며, 재활용이 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업주들이 사업을 변경하거나 접거나 했었고 그로 인해 공급이 부족해졌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동네 오락실들이 사실 상 아예 씨가 마르다 보니, 1크레딧=100원이라는 공식이 스리슬쩍 무너지고 200원~300원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 것, 그리고 최신 체감형 아케이드 기기들의 가격이 1크레딧=500원으로 어느 정도 가격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평균 수준이 정해지게 된 것을 유저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 등이 꽤 큰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원래는 이것도 비정상적으로 싼 것이다.
PC방처럼 공공장소에서 쓰는 코인PC를 들여 놓은 오락실도 몇 곳 있다.
2010년대 중반 시점에서의 오락실은 한판 500원대의 리듬게임, 레이싱게임, 건슈팅게임 등의 체감형 게임들과 노래방을 주축으로 돌아갔다. 이전 세대의 스틱 게임기들은 거의 대부분 철권 중심으로, 그 외의 장르들은 대전액션게임 포함 구색만 맞춰둔 게 대부분이다.[27] 일단 MAME같은 고전 게임 에뮬레이터들이 너무 활성화 되어버렸고 어느정도 추가 금액만 지불하면 패드나 스틱으로 환경도 아케이드와 비슷하게 구현 할 수 있기 때문에,사실 상 MAME로 플레이가 불가능하거나 혼자 즐기는 것은 영 재미가 따라주지 않는 타입의 게임들 외에는 많은 게임들이 사라져 버렸다. 오락실의 황금기를 이끈 스틱 게임기의 시대를 겪은 이들에겐 꽤 씁쓸한 부분. 그리고 KAC 2012의 사운드 볼텍스 부스 부문, KAC 2013의 유비트 소서와 리플렉 비트 콜레트 부문에서 한국인이 우승을 차지하고 2014년 6월 20일 기준으로 e-amusement 연결된 점포들중 beatmania IIDX의 단위인정 개전취득자 숫자가 4번째로 많은 오락실에 노량진 어뮤즈타운이 랭크인되는 등[28]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문제는 대학 주변 오락실의 경우 동전노래방이 생겨나면서[29] 수익이 많이 떨어졌고 굳이 대학 주변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동전노래방이 근처에 생겼을 경우 경쟁에서 밀린다고 한다. 이는 플라스틱 부스로 나온 동전 노래방을 가동하는 오락실에 비해 일반 노래방처럼 석고보드등으로 분리한 동전 노래방이 영업하면서 노래하는 환경이 밀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2016년 들어서 인형 뽑기 등 크레인 게임만 들어가는 속칭 뽑기방의 신설이 전국적으로 가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여러 컨텐츠를 동시에 운영하는 일반적인 오락실의 수익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뽑기방은 대부분 직원 없이 CCTV와 원격 조정 만으로 저비용에 저면적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오락실은 없는 도시에도 뽑기방은 있을 정도며 동전노래방보다도 더욱 많이 퍼지는 중이다. 다만 인형 뽑기나 동전 노래방의 확대가 오락실에게 꼭 부정적이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려운게 매장 크기가 넉넉하여 여유가 있을 경우 뽑기나 오래방과 오락실을 겸하여 신설되는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
한때 NESiCAxLive의 로케테스트가 진행되어서 한국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환경의 최신 아케이드 게임을 한 캐비닛에서 즐기고 있을 수가 있었으나 사실상 불발되고 한국에서의 NESiCA 네트워크는 소수입하된 그루브 코스터 아케이드를 위한 네트워크 용도로만 간신히 유지된다.
국산을 제외한 리듬게임은 BEMANI 시리즈일변도로 나가고 있으며 非BEMANI 게임의 입하는 태고의 달인 시리즈정도만 제외하면 입고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루브 코스터나 maimai 시리즈가 희귀입하로만 존재할 뿐이다.[30] 그나마 10여년 전 암흑기에 비하면 BEMANI 최신기종을 예전보다 접할 기회가 넓어졌다.
현재 국산 아케이드 게임은 펌프 잇 업 시리즈와 EZ2AC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고사한 상태며 오락실의 주요 콘텐츠가 거의 다 일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게임웹진 기사
그 외 일본 청소년 아케이드게임기 시장에서 나름대로 인기를 얻고 있는 아케이드 TCG나 네트워크형 체감게임들의 입하는 한국 내에서의 수요가 얼마나 있을지도 의문이고 상술한대로 최소 4~8대는 들여놔야 하는 것들에 기체비가 비싼 것들이라 요원한 상황이다.[31]
그외에 틈새시장격으로 중국에서 제작된 소위 월광보합(영어로 Pandora's Box)이라 불리는 에뮬통이 입하되기 시작했는데, 원칙적으로는 에뮬레이션을 이용했다는점에서 불법이지만, 그나마라도 버블보블,스트라이커즈 1945 시리즈,아타리 테트리스처럼 대중적인 게임 빼면 열악했던 아케이드 레트로게임의 선택권이 늘어나고 있다. 그마저도 매니아들은 에뮬통 특유의 렉[32]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2017년부터 오락실의 부활에 대해 긍정적으로 분석한 기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기사들대로라면 오락실 문화가 부활할 가능성도 보인다. 특히 태고의 달인, 드럼매니아, 기타프릭스, 펌프 잇 업 등의 체감형 리듬게임이나, 완간 미드나이트, 이니셜D 등의 체감형 시뮬레이션 게임은 현실과도 같은 느낌을 선사하므로 부활한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부활할 가능성이 높고, 구형의 스틱과 버튼으로 이뤄진 동키콩, 너구리, 버블보블 등의 게임들은 추억팔이로도 쓸수 있을 것이다.[33] 실제로도 에뮬통으로나마 홈케이드를 구현한 부부 게이머들이 이러한 고전 게임들을 아이들에게 시키는 광경도 보인다. #1 #2
7.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따른 세계적인 침체기
2020년부터 유행한 코로나19의 여파는 오락실도 피해가지 못했다. 비록 노래방, PC방처럼 행정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34] 원체 업계의 입지가 작았던지라 충격은 다른 업계에 못지 않게 받고 있는데. 특히 행정명령을 받지않기 때문에 자영업 지원에서 빠져있는데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게 현실이고, 이 때문에 입지가 좋은 오락실마저 폐업을 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대형 게임센터들이 문을 닫고 코나미를 비롯한 게임 제작사들도 자사 아케이드 시리즈의 가정용 버전 수를 늘리고 아케이드의 역사 그 자체인 세가도 게임센터 사업을 접는 등 기존 아케이드 게임의 게임기, PC 발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사실상 코로나 이전에도 호흡기만 달고 연명하는 수준이었던 오락실 업계에 대대적인 사망 선고가 떨어졌고, 이 시기를 버티지 못하고 폐업한 오락실도 수두룩하다.
8. 코로나 이후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는 등 세계가 일상을 되찾는 시점에서 오락실도 코로나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회복해가고 있는 실정이다.세계의 아케이드 게임 업체의 경우 코로나의 후유증으로 인해 기존 게임 라인업을 줄이고 잘나가는 인기작 중심으로 라인업을 구성하거나, 특정 오락실 체인 독점으로 신작을 출시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인기작 중심으로 라인업을 구성한 사례로는 비마니 시리즈가 대표적인데, 2019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총 9개의 게임 모두를 최대한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지만, 2022년에는 시리즈 중 인기작인 beatmania IIDX, 사운드 볼텍스, DDR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른 작품들도 리플렉을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인기작에 비하면 업데이트 볼륨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오락실 체인 독점의 경우 주로 일본 프랜차이즈인 ROUND1에서 독점작을 많이 받고 있다. 비마니 시리즈의 경우 DANCE aROUND를 ROUND1 독점으로 출시했으며, 펌프 잇 업으로 유명한 안다미로도 크로노 서클을 ROUND1 독점으로 출시했다. 다만 이런 체인 독점의 경우 특정 작품을 독점한 체인점이 해외로 진출하지 않는 이상 타국에 있는 사람들은 그 게임을 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대표적으로 ROUND1의 경우 미국을 제외한 해외에는 진출하지 않았으므로 한국에서 ROUND1 독점 게임을 하고 싶다면 일본으로 가거나 이들이 대한민국에 정식 진출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 이 모든 것도 결국 리듬게임에 한정된 일이다. 격투게임, 슈팅게임 등은 PC와 스팀 등의 ESD의 발달로 오락실에서 빠져나온 지 오래고, 번화가에 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오락실도 코로나 시기를 넘지 못하고 폐업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오락실 하면 자동으로 레트로를 떠올릴 만큼, 추억 속에만 남은 죽은 장소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일례로 대중 매체에 오락실이 등장할 경우, 오락실의 전성기였던 1980~2000년대의 레트로를 추억하는 내용이 나오거나 뽑기방 같은 형식의 오락실이 나오는 정도가 전부다.
2022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청소년 오락실은 450여 개 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폐업하는 오락실이 늘고 있다. 대형마트 내부에서 소규모로 운영되던 오락실마저 사실상 완전히 뿌리 뽑혔고 번화가가 아닌 이상 오락실을 찾기가 힘들어진 상황이다.
오락실 몰락에 큰 역할을 했었던 PC방조차도 코로나 이후로 번화가의 메이저한 PC방 이외에는 급격히 몰락하고 폐업하고 있는 추세니 코로나가 없었다고 가정해도 어쩔 수 없는 세대 교체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1] 업주들도 오락실이라는 단어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의식했는지 '컴퓨터 지능개발실', '지능계발' 이름의 간판이 많았다. 물론 간판뿐이고 실제로 지능개발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2] 매우 오랜 기간 동안 한 판에 100원 정도로 정착되어 있었다. 이것도 예전에는 50원이었다.[3] 예를들어 당시 한국과 일본의 오락실 문화 차이에 대한 증언 중 하나로 "한번 붙어보고 자기보다 고수다 싶으면 일본인들은 물러나서 구경하고, 한국인들은 이길때까지 도전한다."는 말이 있었다. 한번 도전하는데 드는 요금이 10배 차이니 그럴만도 하다.[4] 당시 대회를 시작하기전 한국 유저들은 신의욱, 조학동의 우승다툼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으며 더구나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서로 '결승에서 만나자.'고 공언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사살.[5] "요시오빠" 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졌다.[6] 물론 이건 개인간 차가 아주 크다. 백수부터 사업가까지 아빠들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7] 2010년대 이후 비슷한것으로 사당 모펀 같은걸 생각해 보면 된다.[8] 관련 기사[9] 특유의 동그란 의자.[10] 사실 이는 시간에 비례해 요금을 받기 때문에 한명이 오래 있어도 손해가 없는 PC방과는 달리 오락실은 1회 플레이 단위로 요금을 받았기 때문에 손님이 쓸데없이 오래 있는 것은 방해됐으므로 발전의 방향이 달라졌던 것이 이유일 것이다.[11] 바람의 나라는 1996년에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인터페이스가 개선되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건 1998년 초중반이며, 특정레벨 도달 전까지 무료로 서비스하는 정책, 게임잡지에 일정시간 이용쿠폰을 동봉하는 정책 등으로 2000년 전후의 저연령 아이들에게도 크게 어필한다.[12] 출시는 2002년 12월 18일.[13] 물론 초창기의 PC방 요금(1998년 기준)은 1500~2000원으로 꽤 비싼 편이었으나, PC방이 전국적으로 확장되면서 1000원대로 차츰 낮아지기 시작했다. PC방이 몰리는 신도시 상업지구의 경우 PC방끼리 가격경쟁이 붙어서 시간당 500원을 받는 가게를 찾는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시 대도시보다 지대가 싸고 주로 미성년 학생을 둔 가구가 밀집한 위성신도시들에는 자연히 이들을 목표로 하는 PC방 창업도 성행해서, 새 PC방이 분기나 반기에 하나씩 생기다보니 점주들끼리 담합하기도 쉽지가 않아 가격경쟁이 심했다. PC방끼리 치킨게임을 하는 경우 소위 유료게임에 대한 추가지불도 받지 않는 곳도 종종 등장했다.[14] 애초에 국내에 기판을 정식으로 리테일한 게임회사는 없었다. 5프로의 정식 기판도 개인업자를 통해 흘러들어온 물건들이다. 일반적으로 아케이드 게임의 정식유통은 리테일러로부터 구입하는 것으로 성립하는데 국내는 리테일 대상 외였다.[15] 우리가 오락실에서 흔하게 보는 크라운 캐비넷마저도 세가의 초기 시티캐비넷 사이드 셋업타입을 중국에서 복제한 것을 다시 국내에서 복제한 복제에 복제를 거듭한 기체이다. 그도 그럴게 당시 일본내 블래스트 시티 설치가 한대당 60만 엔정도였다.[16] 마이마이 뿐만 아니라 게키츄마이 전반에 해당된다.[17] 아케이드 프로그램 기반의 공식 PC버전이 나왔다.[18] 특히 슈팅 게임이 이런 현상이 가장 심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슈팅 게임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19] 이 집계는 일부 도시내의 특정 오락실의 하이스코어만 대상으로 한 집계이기에 온전한 전국 단위의 집계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일본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집계는 「마이크로컴퓨터 BASIC 매거진」 1984년 1월호에 수록된 부록지인 「마이크로컴퓨터 슈퍼 스프트 매거진」에 집계 내역이 실린 게 최초다.[20] 이른바 패턴 숨기기로 대표되는데, 고생해서 딴 전일이 갈릴 것을 우려한 스코어러들에 의해서 스코어를 불리는 방법과 진행 패턴 등의 공략 정보가 은폐되기도 했다. 자기는 기껏 고생해서 발견하고 전일을 땄는데, 아케이드 게임 특성상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만든 패턴을 알기만 하면 손쉽게 시도할 수 있다보니 이런 "노력 도둑질"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통 자기가 아는 사람들한테만 공유하고 어지간하면 공개하지 않는식으로 은폐하였다. 오죽하면 "패턴 공개를 막기 위해 오락실에서 자기가 게임할 때 천막을 덮어 다른 사람이 구경하지 못하도록 했다"라는 진위여부 불명의 루머가 사실인 마냥 돌아다닌 적도 있다. 우메하라가 이러한 스코어러들을 비판했다는 스레가 세워지자 패턴 은폐로 대표되는 스코어러들의 행태에 질린 사람들이 몰려와서 스코어러들을 비난한 바 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하이스코어 문화에 있어서도 절대로 도움이 안 되는 행위이며, 2000년대 초중반대를 전후로 하이스코어 문화가 점차적으로 쇠퇴해버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21] 아무리 높은 고득점을 내본들 이걸 집계해서 발표해주는 단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22] 이 조직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건 월간 아르카디아의 집계를 계승했다는 정통성이 있기 때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런 정통성이 없었다면 잘쳐줘봐야 과거에 나카노 류조가 운영하던 집계사이트 규모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하협 자체가 게메스트, 아르카디아에서 남긴 유산으로 먹고 사는 조직이다.[23] 당장 유세미만 해도 2021년 기준 40대 중후반이고 유세미보다 나이가 많은 나이토, 오사다 선인도 2022년 기준 50을 코앞에 두고 있다. Clover-TAC도 2004년 시점에서 23세였으니 2022년 기준 40대 초반대며, WTN도 2022년 기준이으로 50 중후반대로 거진 60을 바라보고 있다. # @) DBS는 40이 되자마자 아예 하이스코어러 활동에서 은퇴했다. 주요 스코어러들조차도 늙어가고 있는 판국에 다른 스코어러들은 말할것도 없다.[24] 2010년대 이후 오락실로 출시되는 신작 타이틀의 숫자조차 눈에 띄게 줄어든 판국에 일본 하이스코어 협회는 오락실에서 가동하는 신작 타이틀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서 집계할 생각은 하지 못할망정 exA-Arcadia를 차별하는 한심한 작태나 보이고 있다.[25] 2010년대 들어서 자체 하이스코어 집계를 하는 점포가 생기기는 했으나, 많은 한계로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26] 게임장 내에서는 상품권만 지급하지만, 상품권을 바로 옆에 있는 환전소에서 현금으로 바꿔주는 식으로 단속을 피했다.[27] 2D 대전액션이라면 KOF 시리즈 네오지오기판작, 슈팅은 사이쿄 계열, 퍼즐은 아타리 테트리스나 퍼즐버블 무인판. 액션은 메탈슬러그 시리즈, 버블보블 시리즈, 스포츠는 테크모 월드컵 98 등.[28] 저 집계표에서 개전취득자수 상위에 랭크된 일본외 점포는 어뮤즈가 유일했다.[29] 대부분의 동전노래방의 영업 인가는 노래연습장업이 아닌 청소년게임제공업으로 취급한다.[30] 츄니즘은 입하되지 않는것이 아니라 입하되는것이 불가능했었다. 마이마이시리즈나 그루브 코스터 시리즈는 해외판이 정발되었으나, 츄니즘은 세가에서 내수용으로만 출시했으며, 네트워크가 필수로 요구되는 특성상 직수입도 불가능했다. 이 문제는 해외판인 츄니즘 슈퍼스타가 나오면서 해소되었다.[31] 아케이드 TCG만해도 스마트폰이 활성화된 한국의 경우 모바일 게임 플랫폼의 비슷한 (소셜) TCG게임들이 이쪽의 대체제로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는 점도 있다.[32] 대체로 CPU 클럭수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일부 최적화가 덜된 게임들은 내장 CPU가 소화하지 못해서 느려진다.[33] 당장 동키콩이 1981년에 출시되었다.[34] 이마저도 2021년에는 행정명령을 받아 새벽 영업을 제한받은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