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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뮤 전쟁

에뮤전쟁에서 넘어옴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에뮤 전쟁
Emu War
호주군의 에뮤 구제 작전
파일:Deceased_emu_during_Emu_War.jpg
▲ 호주군 병사가 포획된 에뮤를 들고 있는 모습
일시 1932년 11월 2일 ~ 1932년 12월 10일
장소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전역)
유형 해수구제(유해조수구제)
작전 주체 호주 육군 왕립호주포병대 제7중포병연대
결과 해수구제 작전 실패
트럭 1대 파손
탄약 1만 발 이상 낭비
영향 에뮤 개체수의 증가세 지속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농지 황폐화
파일:5300b45c54764ba9beaf814e38a90edf.jpg
기관총을 장비하는 호주군 (위)
에뮤 전쟁 당시 농경지를 침범한 에뮤떼. (아래)

1. 개요2. 전개3. 사건 이후4. 대중매체5. 유사 사례
5.1. 토끼5.2. 여우5.3. 고양이5.4. 낙타5.5. 새5.6. 잉어5.7. 사탕수수두꺼비5.8. 야생마
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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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뮤 전쟁(Emu War)이란 1932년, 호주 서부의 에뮤 개체수가 급증함에 따라 호주군이 실시했던 해수구제 작전의 별칭이다.

이 작전에서 호주군은 대량의 에뮤를 살처분했지만, 야생에서 증식하는 개체수에 비해 구제효과가 미미했던데다 민간의 여론도 좋지 않아 철수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호주 정부는 에뮤에 대한 인간의 패배를 인정했다. 이 때문에 실제 전쟁은 아니었음에도 '살상무기를 장비한 인간이 동물과 싸워 졌다'는 입소문으로 후세에 길이 남게 되었으며, 호주 야생 생태계의 강인함과 대자연의 규모를 각인시킨 사건으로 매체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다만, 수만 마리의 빠르게 달리고 경계심 많은 에뮤를 잡기에는 예산과 인력, 탄환, 기간 모두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라 구제하지 못한 것이지, 한국에서 알려진 것 마냥 "에뮤가 괴물같은 새라 현대무기로도 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2. 전개

당시 작전 기록 영상.
에뮤들을 '적(enemy)'이라 지칭하는 것이 특징이다.
에뮤 전쟁 포토그래피 영상(한국어 자막 지원)

1932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호주로 되돌아온 퇴역군인들 중 대다수는 배운 기술이 없었기에 농부로서의 삶을 꾸렸다. 문제는 이들이 서부 지역의 벌판에 농경지를 넓히기 시작하면서 토착조류 에뮤와 갈등이 생긴 것이었다. 농부들은 작은 야생동물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둘렀지만, 에뮤들은 그런 울타리 따위는 거대한 몸뚱이로 들이받아 가뿐히 부수고 들어와 농경지를 휩쓸었다. 게다가 그 해 9월은 특히나 기록적인 가뭄이 들어서 에뮤들 또한 먹이 부족에 시달린 끝에 동진하여 농부들의 밀밭을 헤집어놓기 일쑤였다. 물론 이런 녀석들이 한두 마리였다면 밭을 망가뜨리는 멧돼지나 다름없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겠지만, 문제는 본격적으로 출몰하기 시작한 에뮤들의 머릿수가 2만 마리가 넘었다는 것이다.

농부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거대한 에뮤 군단[1]을 목도하고 곧바로 전의를 상실하여 관공서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에뮤의 수는 지방 관공서 정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숫자를 넘어섰다. 그러자 1차 대전 참전 경력이 있던 농부들이 기관총은 사람을 잘 잡으니까 에뮤도 잘 잡으리라 생각해서 군대에 파병을 요청했고, 그리하여 당시 호주 국방장관 조지 피어스(George Pearce 1870-1952)는 사격훈련도 할 겸 대민봉사를 위해 루이스 경기관총 2정과 탄약 1만여 발을 지참한 병력을 파병하도록 허가했다. 이에 왕립호주포병대(Royal Australian Artillery)의 제7중포병연대(7th Heavy Artillery)에 소속된 귀네드 퍼브스 윈-오브리 메리디스(Gwynydd Purves Wynne-Aubrey Meredith, 1887 ~ 1975) 소령의 지휘 하에 맥머레이(S. McMurray) 하사와 기관총 사수 오할로란(J. O'Halloran)이 파견되었다. 부대는 10월 말 출정했으나 10월 31일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일정을 미루었고, 1932년 11월 2일부터 11월 9일까지 약 일주일 동안 호주 서부를 돌아다니며 에뮤와 인간 사이의 대전쟁을 시작하였다.
파일:1548852636.jpg
…each pack seems to have its own leader now—a big black-plumed bird which stands fully six feet high and keeps watch while his mates carry out their work of destruction and warns them of our approach.
에뮤 무리에 우두머리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검은 깃털이 달린 1.8미터 크기의 큰 새가 동료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망을 보며 우리의 접근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작전 4일차 보고 중

요즘에야 새 때문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게 웃긴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식량 사정이 지금처럼 좋지 못하기도 했고, 더군다나 이미 가뭄이 닥친 덕분에 식량난이 발생한 참이었기에 에뮤와의 전쟁은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될 만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영연방 문화 특유의 블랙 유머로 '에뮤 대전쟁(Great Emu War)'이라는 명칭까지 등장했다.[2]

처음에 군인들은 기관총이 있으니까 큼지막한 새 만 마리 따위야 바람 앞의 촛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기관총을 사람끼리 전쟁하듯 원거리에서 사격해보니 시속 60km에 달하는 속도로 달리는 에뮤를 맞추는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물론 에뮤도 동물이니 머리에 총알을 맞으면 즉사하고 다리에 총알을 맞으면 도망치지 못하고 잡히겠지만 저격총도 아니고 기관총으로 가늘고 작은 에뮤의 머리와 빠르게 뜀박질하는 다리를 먼 거리에서 맞추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나마 맞추기 쉬운 몸통을 노려봤자 빽빽하게 삼중 깃털을 두른 커다란 몸뚱아리는 맷집도 생각보다 튼튼해서 쉽게 죽지 않았다. 또한 사격이 시작되면 기관총 소리에 놀란 에뮤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팔방 도망치는 바람에 기관총의 장점인 연사력을 제대로 살릴 수도 없었다.

이에 호주군은 방법을 바꾸어 트럭에 루이스 경기관총을 설치한 테크니컬을 만들어 기동사격으로 에뮤들을 섬멸하기로 했다. 당시 기준으로 강력한 무기였던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기갑 장비를 대동한 호주군은 에뮤 군단을 상대로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전쟁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기 마련. 루이스 경기관총을 설치한 트럭은 기세 좋게 출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용맹한 에뮤 한 마리의 육탄 돌격에 파괴되고 만다. 사실 단순히 핸들이 고장난 정도긴 했지만.

이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에뮤 군단은 게릴라 작전을 펼치며 호주군을 농락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에뮤 군단이 소규모로 갈라져 곳곳의 농작물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무리 중 가장 키가 큰 에뮤가 지휘관 역할을 하여 호주군을 감시하고 경계했고[3] 에뮤 한 무리가 인간에게 공격을 받으면 다른 무리가 다른 곳의 활짝 열린 밀밭을 유린하여 농작물을 뜯어먹었다. 이런 과정이 지겹게 반복되자 호주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렇게 호주군은 지참한 탄약 1만 발을 거의 다 썼으나 죽인 에뮤의 수는 적게는 수십에서 많이 쳐줘야 수백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동물보호 단체 또한 이 전쟁에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었으며, 결국 11월 8일 의회가 전쟁의 지속에 대해 난색을 표하였고 다음 날인 11월 9일 작전이 중단되었다. 당시 지휘관은 전차보다도 상대하기 힘든 적이라고 술회했다. 이후 호주 농부들의 지원 요청을 받은 국방부가 12일 병력을 증원하여 작전을 재개했고, 호주 서부에서 한 달간 약 500마리의 에뮤가 사살되었다. 12월 10일, 지휘관 메리디스가 마지막으로 철수하면서 에뮤 전쟁은 끝났다. 그는 "에뮤 986여 마리를 사살했고 수천 마리가 부상을 입었으며 곧 죽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이 내용은 엄밀히 검증되지는 않았다. 다만 호주 정부는 그 뒤로 다시는 에뮤 소탕을 위해 군대를 보내지 않았고, 사건 이후 농부들의 지원 요청은 거절되었다.

3. 사건 이후

말이 전쟁이지, 이 작전의 목표는 에뮤를 몰살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농경지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호주군이 윤리나 자연과의 공존, 비용 등등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작정하고 사단급 병력을 투입했다면 에뮤들을 몰살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즉, 전쟁이라기보단 조금의 무력이 동원 된 대민 지원 작전에 가깝다. 하지만, 엄연히 군대와 기관총까지 투입하고도[4][5] 적군이 아닌 야생 동물 무리조차 몰아내지 못했단 사실은 충격적이었고, 에뮤들이 워낙 잘 맞서 싸운 덕분에 두고두고 회자된다. 어쨌든 농부들은 1934년, 1943년, 1948년에 에뮤를 소탕하기 위해서 정부에 군 지원을 다시 요청했으나, 전부 정부에 의해 기각당했다.

사실 에뮤 전쟁 이후로 호주인들이 에뮤한테 일방적으로 당한 것만은 아닌데 이미 에뮤 전쟁 이전인 19세기 중반 이전에 태즈메이니아와 킹 섬, 캥거루 섬에 살았던 에뮤의 아종이 유럽인들의 정착 이후에 멸종된 적이 있기도 했고, 본토의 에뮤 역시 1934년에 정부가 농부들에게 직접 에뮤 소탕에 필요한 탄환을 지급하면서 공식적으로 57,000마리 이상을 소탕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가 현상금 제도를 도입하면서 1935년에서 1960년까지 사냥당한 에뮤 개체수는 284,000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파일:external/media-cdn.tripadvisor.com/imag2972-largejpg.jpg

현재 야생 에뮤들은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며 사람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에뮤가 가축화되어서 이들을 스테이크로 구워먹기도 한다. 독특한 외형 때문에 관광자원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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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뮤 전쟁을 간단히 요약한 만화. 인터넷, 특히 4chan에선 동물과의 전쟁에서 호주인들이 항상 호구가 된다고 깐다.

5. 유사 사례

유사 사례라고 하지만 사실 호주인이 동물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점만 어느 정도 비슷할 뿐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볼 수 있는데, 본토 동물인 에뮤와는 달리 이하 다른 동물들은 외래종들이 생태계를 교란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뮤 전쟁은 어느 정도 여지를 두고 싸운 거라서 패배한 거지만 이하 사례들은 아예 정부 차원에서 작정하고 박멸시키려 하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다. 따라서 에뮤보다 훨씬 심각하고 진지하게 거론되는 문제다.

5.1. 토끼

호주군은 과거에도 동물과의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다. 대상은 토끼. 1850년대 영국 식민지 시절 사냥용으로 들여온 유럽토끼(Oryctolagus cuniculus)들의 개체수가 무한 증식하여 초지가 황폐화하여 정작 키우는 소와 양이 뜯어먹을 풀이 없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자 시행한 것. 에뮤는 다 자라면 천적이 거의 없고 수명도 토끼의 몇 배는 되지만, 이상증식을 한 것도 아니었고 토착종이 살던 구역에 인간이 진입하여 충돌이 벌어진 것이라 생태계에 문제가 갈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토끼는 유럽에서 도래한 외래종으로 도입되었을 때부터 호주의 식물생태계를 파괴했다. 호주는 토끼 2백만 마리 이상을 죽이고 많은 수를 포로로(?) 사로잡았지만, 이때 호주에서 생물재해를 일으키던 토끼들은 이미 억 단위로 늘어나고 있었다. 결국 호주는 토끼와의 전쟁에서도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호주군 병사들의 증언들이 꽤나 섬짓하다. 토끼 수만 마리가 일시에 자신들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자[14] 볼트액션 소총 리-엔필드로 무장한 호주군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몇 마리가 달려들어서 다리를 미친 듯이 물어뜯어댔다고 하며 어느 중년의 호주군 하사는 회색 털을 가진 굴토끼들을 보고 마치 독일군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하였다. 호주군은 토끼들을 어떻게든 써먹어보려고 죽인 토끼들의 고기를 발라내서 먹고 쓰다 군량으로도 만들고, 가죽도 벗겨서 헐값에 수출도 하고, 그마저도 결국 지쳐서 그냥 시체를 파묻고 태우는 등 별별 짓을 하는데도 빌어먹을 귀 달린 털뭉치들의 숫자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1950년대에 토끼전염병인 점액종증을 도입하여 수를 줄이는 시도까지 했으나, 이마저도 살아남은 소수의 토끼들에 면역이 생기며 실패했다. 첫해에는 99%의 치사율을 보이며 토끼 절멸을 달성하나 했으나, 토끼는 면역을 갖추고 바이러스는 숙주를 덜 죽이고 그만큼 더 퍼지는 방향으로 상호진화되면서[15] 1년 만에 치사율이 24%까지 추락, 여기에 살아남은 토끼들의 놀라운 번식력으로 개체수가 순식간에 회복되어 바이러스를 이용한 토끼 절멸계획은 실패했다.

현지에서는 워낙 임팩트 있던 사건인지라 [16], 1950년대 배경 호주 영화에서 종종 다뤄지기도 한다. 앤 터너의 실리아가 이 1950년대 토끼 절멸계획과 매카시즘을 연계한 포크 호러 영화. 점액종증을 활용한 소탕도 언급된다.

실제로 에뮤는 호주 입장에서는 그냥 귀찮은 놈 수준이었지만[17] 토끼는 토끼 역병이라 불릴 정도로 심각해 국가적 차원으로 세균전 시도까지 할 정도로 진지하게 임했다. 하지만 에뮤와는 달리 억단위로 죽어나갔는데도[18] 아직도 호주의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게다가 에뮤들은 그나마 호주 서부에서만 깔짝거리지 토끼는 호주 전 지역에서 활개쳐서 더 큰 문제.

5.2. 여우

상술한 토끼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토끼의 천적인 붉은여우를 호주에 들여왔지만 여우들이 달리기 속도가 빨라서 잡기 어려운 토끼보다 호주의 토착 유대류들을 더 많이 사냥하면서 결국 여우들의 수만 증가하고 있다.

5.3. 고양이

멸종된 포유류의 3분의 2정도가 길고양이의 영향이며, 매일 600만 마리, 매년 2억 마리 정도의 파충류와 조류, 포유류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한다. 호주는 길고양이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5.4. 낙타

이후 2020년에는 2019-2020 호주 산불과 맞물려서 낙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MBC 뉴스 영상). 낙타 또한 토끼와 마찬가지로 사육용으로 들여왔다가 야생으로 퍼졌는데, 호주에는 사실상 낙타의 천적이 없으므로 개체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하지만 이 전쟁 역시 기간은 겨우 닷새였고, 100만 마리 중 1만 마리를 사살하는 정도에 그쳐서 이번에도 사실상 호주의 참패. 사실 낙타도 토끼 못지않게 호주에서 꽤 말썽인 동물인데다, 조상들이 들여온 동물이라는 점도 똑같고 개체수가 급격하게 불어난 점도 똑같다.[19]

5.5.

급기야 2021년부터는 큰유황앵무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MBN 기사, 스브스뉴스 영상) 집 나간 애완용 앵무새가 야생 앵무새에게 사람 말을 가르치기도 하고, 부리로 뚫을 수 있는 건 다 뚫기도 한다.(호주의 골칫거리 똑똑한 앵무새)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앵무새는 낙타나 토끼보다도 더 골칫거리인 동물인데, 안 그래도 호주의 동물인데 인간이 가축화한 탓에 개체수가 급격하게 불어난 점부터 문제이지만, 지능이 다른 새들에 비해 높다 보니 깽판을 치는 수준이 낙타와 토끼와는 차원부터가 다르다. 그냥 똑똑한 닭둘기라고 해야 하는 수준. 이 정도면 가망도 없는 전쟁을 반복해야 하는 호주의 운명이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이 외에도 일명 "bin chicken"이라 불리는 호주흰따오기도 쓰레기통을 뒤지고 하수구에서 먹이를 찾는 등 워낙 지저분해서 골치를 앓는다. 하지만 이건 인간이 먼저 호주흰따오기의 서식지를 파괴해서 얻은 자업자득.

또,이전의 일이지만 검은머리갈색찌르레기도 유입된 이후 매우 흔해져 골칫거리다.

5.6. 잉어

월척급 잉어떼 입질에 물속 초토화…호주 ‘토끼의 악몽’ 되풀이

머레이 강의 홍수로 범람원이 늘어 잉어가 바선생마냥 번식하게 되어 호주어류의 90%를 차지했다. 수초를 모조리 먹고 강바닥을 파헤쳐 달표면처럼 하천 바닥이 엉망진창이 되었으며, 정부에서도 바이러스를 풀어 잉어를 퇴치할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였다.

5.7. 사탕수수두꺼비

가장 치명적인 경우 중 하나. 원래 해충을 잡으려고 들여왔는데 이 두꺼비들이 알부터 성체까지 맹독을 가지고 있어 호주 고유 야생동물들이 이 두꺼비를 잡아먹었다가 중독사하는 경우가 폭증해 문제가 되고 있다.[20] 정작 잡으려던 사탕수수 딱정벌레는 두꺼비와 생활 환경이 눈꼽만큼도 겹치지 않아 구제 효과는 0이었다.

이 때문에 호주 동물들에게도 어떻게든 두꺼비를 극복하기 위한 변화가 많이 일어났는데, 가령 물고기나 유대류들은 두꺼비 독성을 맛보면 회피하는 식으로 행동이 바뀌었으며, 조류는 내장이나 혀처럼 독이 적은 부분만 파먹고 버리는 식으로, 뱀들은 아예 평균 머리 크기가 줄어드는 경향성을 보이기도 했다.

5.8. 야생마

호주의 야생마는 관광용이나 말고기용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그럼에도 너무 많아지다보니 다른 초식 동물이 먹는 식물마저 모조리 뜯어먹기 마련이라 헬기를 타고 총으로 쏴죽이는 방식으로 개체수를 조절했다. 하지만 동물보호단체가 반대하고 있는 상태. 이후엔 차량을 타고 조절했지만 2023년 10월 말 다시 개체수가 불어나자 환경보호단체의 요청도 있기에 다시 헬기를 타고 조절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6. 외부 링크



[1] 실제로 당시 신문에서는 에뮤 군단이라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당시 에뮤와 맞서 싸운 농부들과 군인들은 이 표현이 웃기거나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 사실 호주는 현대에도 동물원 코끼리가 탈주한 얘기가 일간지 1면에 실릴 정도로 동물과 연관된 사건이 자주 벌어진다.[3] 이는 무리생활을 하는 조류들의 전형적인 특징인데, 기러기나 닭, 친척인 타조도 이렇게 보초를 서는 리더격이 되는 놈이 있다.[4] "고작 기관총 투입한 거 가지고 호들갑이냐?"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당시는 1차대전-2차대전의 전간기였기에 상당히 중요한 무기였으며, 지금처럼 분대 단위에 지급되던 물건도 아니었다.(참호 돌파를 위해 대대적인 경기관총이 보급되기 전에는 대대 단위로 몇 정씩 주는 정도.) 기관총은 저항하는 수많은 식민지인들을 떼몰살 시키면서 식민지 지배력을 높혀준 1등 공신이었고, 1차 대전에서도 똑같이 유럽인들을 잡아죽이면서 서부전선이 참호전으로 고정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근데 호주군은 그 기관총을 들고도 졌다.[5] 다만 호주군이 동원한 전력 자체가 애초부터 유효한 성과를 기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당대로써는 전쟁사를 바꿨다고까지 하는 최강의 무기인 기관총까지 투입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루이스 경기관총은 당시 대중이 생각하는 수랭 탄띠식 기관총이 아니라 공랭 탄창식 기관총이어서 지속 사격 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지급한 탄약 1만 여 발 또한 에뮤의 숫자를 눈에 띌만큼 줄이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에뮤 소탕을 정말 제대로 진행할 생각이었다면 사냥 경험이 있는 병사들 최소한 대대 이상 단위로 차출하여 말을 타고 에뮤를 쫓도록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당시 호주군 지휘부의 판단을 굳이 변호하자면 에뮤를 사살하여 개체수 자체를 줄이는 것은 전혀 중요시하지 않고, 그보다는 기관총으로 소란을 일으키면서 돌아다니면 에뮤들이 겁에 질려서 인간 거주 구역 바깥으로 도망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작전을 실행했었을 것이라는 해석 정도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에뮤들은 개체 수 몇몇이 줄어든다고 겁을 먹기는커녕 죽는 상황을 처음부터 회피하는 습성을 터득해버렸기에 작전이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 것.[6] 조선인과 몽골인으로 구성된 개척단으로, 솔로몬국과 마사이인이 추가로 왔다.[7] 1부 주인공의 영향으로 조선인들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이 되어 있었다. 3대 400~500kg은 쳐야 어디가서 선비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갑옷을 패용한 것은 배를 걷어 차이는 걸 막기 위함으로 어쩔 수 없이 패용했다고.[8] 에뮤 상대로 드롭킥, 헤드락, 파워 밤 등을 날려댄다.[9] 에뮤 고기는 맛이 좋아서, 식육동물로서 를 대체할 수 있기에 수백년 후의 먼 미래에 환경문제축산업이 받을 비난을 줄이기 위해, 농촌의 밭 가는 황소 값을 내리기 위해서이다.[10] 금육 정책 때문에 물고기와 새고기만 허용된 일본에서 소고기맛이 나는 에뮤는 거의 황금이나 매한가지였다.[11] 원역사에도 에뮤는 상술되있듯 더 발전된 기관총도 버텨냈다. 하물며 아직 걸음마 뗀 아기나 다름없는 조총화살로는 거의 금강불괴 같아서 기존의 갑옷에 에뮤 깃털을 덧댄 형태의 갑옷이 발명됬다.[12] 인간이 먹는 쌀에 맛이 들려버려서 이라면 환장하는 상태가 되었다. 언급을 보면 조선 같은 곳이였으면 온갖 맹수가 난립해 적응 못할 산악지형도 고작 반달가슴곰 정도가 상당히 적응한 상태라 산을 타고 넘어와 마을을 쓸어버리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다고 한다.[13] 흔히 판타지에서 보이는 마나를 다루는 사람들, 본작의 초인들은 건물정도는 우습게 때려부수고 최상위권은 아예 핵폭발도 버텨내는 괴물들이다.[14] 실제로 토끼, 생쥐 같은 소형 초식동물들은 숫자로 유리하다 싶으면 덤벼들기를 서슴지 않는다. 포식자가 자신들이 있는 곳에 왔음은 활동반경이 겹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보다는 겁을 줘서 쫓아내 다시는 올 엄두조차 못 내게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죽어도 숫자가 압도적이니 상관없고.[15] 실제로 바이러스나 세균은 치사율이 너무 높으면 숙주가 빨리 사망해 번식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낮은 치사율의 병원균일수록 더 퍼지기에 유리하다. 심지어 개발이나 타 지역의 병원균을 들여오는 등 치사율 높은 병원균을 도입해도 자고 일어나면 변이가 완료되는 어마무시한 변이 속도 때문에 빠르게 소기 목적(절멸)을 달성하지 않으면 병원균의 치사율이 낮아지기 때문에 효과를 달성하기 어려워진다.[16] 당시 뉴스에 따르면 개인이 키우는 토끼도 제약과 압수가 일어나 토끼를 키우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항의하는 소동도 있었다고 한다. 후술할 실리아에서 주 갈등 소재기도 하다.[17] 물론 직접 당한 농부들 입장에선 지옥이었겠지만 국가 전체로 보면...[18] 앞에 말한 200만은 세균전 이전이고 세균전 때에는 무려 토끼 수억 마리가 죽어나갔다.[19] 위 토끼 구제 작전에서도 언급했지만 낙타들이 물을 미친듯이 마셔대는 바람에 악어들의 저항에도 물이 말라 악어들도 말라죽는 참사가 벌어졌다.[20] 특히 오스트레일리아민물악어는 독 내성이 부족해 많은 수가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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