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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c1d1f><colcolor=#fff> YG엔터테인먼트 설립자 및 총괄 프로듀서 양현석 梁鉉錫[1]玄錫으로 등재되어 있다.]|Yang Hyun-suk | |
출생 | 1970년 1월 9일[2][3] ([age(1970-01-09)]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남원 양씨[4] |
신체 | 180cm[5]|70kg|A형 |
가족 | 아버지 양재훈[6], 어머니 한춘자[7] 형 양홍석[8], 남동생 양민석 |
배우자 이은주(2010년 결혼) 딸 양유진(2010년 8월 5일생) 아들 양승현(2012년 4월 27일생) | |
학력 | 서울교동초등학교 (졸업) 중동중학교 (졸업) 광명공업고등학교 (졸업) |
종교 | 무종교[9] |
병역 | 육군 일병 의병 전역[10] (1991. 03. 07. ~ 1991. 11. 16.) |
소속사 | YG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
그룹 경력 | 서태지와 아이들 (1992. 03. 14. ~ 1996. 01. 31.) |
데뷔 | 1992년 3월 14일 서태지와 아이들 정규 1집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서태지와 아이들 1집#s-| ]](데뷔일로부터 [dday(1992-03-14)]일, [age(1992-03-14)]주년) |
별명 | YG[11], 양싸[12], 양군[13], 춘삼이[14], 터미네이터[15], 틀니돼지[16] |
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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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2. 활동
중학생 시절부터 허비 행콕과 마이클 잭슨에 영향을 받아 댄서가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 댄서가 되겠다던 꿈은 잠시 접어두고 가지고 있던 건축 자격증을 이용해 한 지도 제작 회사에 취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 춤을 추던 친구들이 TV에 나오는 모습을 본 이후,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이태원의 댄스 팀 '스파크'에 합류하게 된다.그러나 댄서 시절, 형편이 어려워 단칸방에서 세들어 살기도 하는 등 힘든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당시의 춤꾼들은 이주노, 박남정, 박철우 등이 대표적이었으나, 양현석은 상대적으로 저들보다 좀 어린 나이인데 반해 해외의 춤 영상을 많이 구해서 보고, 매번 이태원 문나이트 클럽에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춤을 선보여서 선배들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17] 이때 양현석 밑에 있던 후배들이 나중에 이주노가 데뷔시키는 영턱스클럽과 양현석의 흑역사인 킵식스의 멤버들이 된다.
한편 박남정은 양현석이 뜨기 전에 가수로 데뷔한 상태였다. 이때 친구였던 이주노의 소개로 양현석을 자신의 백댄서로 쓰며 양현석이 연예계에 데뷔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양현석은 이주노와 함께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박남정과 프렌즈'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2.1.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1991년 문나이트 클럽에서 서태지와 전속 밴드와 댄서로 만났는데, 양현석에게서 춤을 배우고자 했던 서태지에게서 한 달에 150만 원씩 3개월, 총 450만 원으로 당대 직장인들의 몇 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적지 않은 댄스 강습료를 받아놓고[18] 군입대를 하여 말 그대로 먹튀가 되는가 했더니 의병 전역 이후 잊지 않고 서태지에게 연락을 하여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19]이런 부분에서 악당스럽게 말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양현석은 서태지를 엄청 아끼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자신은 물론 YG엔터테인먼트가 타 아티스트에 대한 디스곡을 안 내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서태지의 편에 서서 디스곡을 낸 적이 있었다. 첫 번째로 발표한 디스곡은 자신의 솔로 앨범에 수록된 '무시'라는 곡이며, 두 번째는 페리의 솔로 앨범에 수록된 'Oh, No!'라는 곡으로 총 두 차례에 걸쳐서 서태지를 지켜주었다. 전자인 '무시'의 경우는 시나위의 신대철을 디스한 곡이라 전해지는데, 시나위의 곡 '은퇴선언'에 대항하는 곡이었다는 소문이 있다.[20] 또한 "Oh, No!"의 경우는 가사 내용에서도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들어가는데다가 YG엔터테인먼트의 소개글에서도 "컴배콤"을 발매한 이재수를 겨냥한 곡이라고 못을 박아놨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재수를 디스한 곡이 확실하다.
하지만 의외로 서태지에게 섭섭한 것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팀명이 있다. 이에 대해선 때에 따라서 본인도 표현이 분분하다. 소문에 의하면 사실 실제 팀명은 "태지보이스(TAIJIBOYS)"였으나 앨범명을 한글로 등록할 때 음반 배포 쪽 스탭이 멋대로 한국어로 번역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되었다고 한다. 앙현석은 힐링캠프에 출연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회상했다. 실제 1.5집과 3집 라이브 앨범에서의 앨범 자켓에는 그룹명이 "태지보이스"라고 되어있는데 이 잔재로 보인다. 양현석 본인도 "태지보이스"라는 그룹명에서는 거부감이 없었는데, 앨범이 나오고 나니깐 "아이들"이 되어있어서 기분이 나빴다고 회상했다. #
사실 서태지를 상당히 아꼈던 만큼 진짜 섭섭한 부분은 서태지 특유의 사망설이 터졌는데도 아무것도 모른 채 연락 두절을 하고 앨범 작업만 하던 외골수 같은 성격을 봐야 한다. 콕 집어 섭섭하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힐링캠프 두 번째 출연 때 서태지와 양현석의 불화설에 대한 질문이 있을 때 "내가 서태지 걸음걸이만 봐도 몸 상태를 알 수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불화설을 부정하긴 했으나[21] 얼굴을 못 봤으면 못 본 만큼의 시간차가 느껴진다고 얘기하였다.[22]
아무튼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 이후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데뷔 이후 MBC 인간시대에서 그의 집을 찾아가서 살펴본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단칸방에서 소박하게 사는 모습이 공개되자 팬들이 돈 벌어서 어디다 썼냐고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양현석은 그게 안 좋은 집이라는 생각은 안 해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집을 공개했다고 밝혔다.[23]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래퍼와 댄서를 맡았다. 실력은 랩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당시 대한민국 시대상 훌륭하다고 평가받았다.[24]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탁월한 실력의 래퍼가 많아지면서 래퍼로서의 위상은 많이 내려간 상태이다. 대신 춤 실력에 있어서는 당대나 지금이나 역대 최고라 불린다. 특히 몸 관절을 놀라울 정도로 꺾어서 고난도 동작을 만드는 능력은 그의 주특기다. 전성기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의 무대를 보면 서태지가 전체적인 보컬의 비중을 가져가고 양현석과 이주노는 고난도 춤 실력을 선보이는 구도가 잦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처음에는 댄스로 시작했지만, 이후 락을 기반으로 한 밴드 음악도 시도하며 자연스레 그의 음악적 성향도 일부분 바뀌었다. 하지만 서태지처럼 기타를 비롯한 다양한 악기를 모두 다루지는 못한다. 대신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가끔씩 드럼도 쳐서 악기 중에서 드럼을 잘 다룰 줄 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4집 "필승" 뮤직비디오를 보면 양현석이 드럼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드럼 실력이 출중한 것은 아니고 양현석이 드럼을 배운 것은 3집 활동 중반기에 습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1월, 콘서트 '다른 하늘이 열리고'에서 'Farewell to love" 무대를 위해 드럼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해당 곡은 시나위의 곡이며, 서태지와 아이들 최고의 히트곡 중에 하나인 "환상 속의 그대"에서 잠깐 흘러 나온다. 서태지의 회고로는 원래 드럼 초짜였지만 특유의 춤 실력을 응용해서 빨리 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박선주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댄서로서는 특히 힙합 댄스가 주력인데 그 실력이 가히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서태지 중심의 그룹인 것은 사실이지만 양현석 역시 이 분야에서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2.2. 솔로 활동
1998년, 당시 '양군기획'이었던 YG의 자금난이 이어지자 양현석이 직접 정규 1집을 발매하여 솔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솔로 앨범은 양현석 본인 스스로도 흑역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단순히 흑역사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앨범 자체가 퀄리티는 뛰어난 편에 속하고 당시 인기도 꽤 많았으며, 서태지 팬들의 영향력으로 흥행한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앨범 판매와 가요 차트 성적도 10위권 이내에 들어갔었다. 양현석 본인은 흑역사라고 언급하기는 하지만, 앨범 자체는 꽤 고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솔로 앨범 구성을 보면 프로듀서 PERRY 덕분에 퀄리티는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급하게 준비한 티가 역력했다.[25] 훗날 양현석의 회고에 의하면, YG 설립 초기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솔로 1집을 낸 거라고 하였다.
과거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력이 있었기에 상업적인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뮤직뱅크 최고 순위 10위 안에는 들었으며, MBC 음악캠프에서는 1위도 한 적이 있다. 앨범 판매량도 22만장 정도로 나쁜 성적은 아니었으며, 앨범 발매 의도가 자금 확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훌륭한 평을 듣기도 한다. 같은 해에 나왔던 서태지 5집이 11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낸 것에 비하면 다소 적은 수치지만, 이주노 솔로 1집에 비하면,[26] 확실히 인기는 더 많았다.[27] 이 솔로 앨범으로 기초 자금을 확보한 양현석은 앨범 활동 직후 데뷔한 원타임을 제대로 지원하며 지누션 1.5집에 이어 YG FAMILY 활동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회사 식구들을 끌어모아 YG FAMILY 활동으로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적을 냈다.
솔로 활동 이후 본인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본인은 그 때부터 자신이 가수보다는 제작자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YG FAMILY의 단독공연 및 페리의 라이브 무대에서는 무대에 직접 올라서 관객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기도 했다.[28]
과거에는 박진영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댄서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지 나이가 나이인지라 2000년대 이후로는 몸이 굳어서 그런지 예전의 춤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마지막 솔로 활동 이후로 10년 넘게 무대에 나서지 못한 점도 춤 실력 하락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연배인 박진영은 꾸준한 자기 관리와 연습으로 아직도 녹슬지 않은 수준급의 춤 실력을 보여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양현석의 춤 실력 하락을 가장 눈에 띄게 보여준 사건은 "이문세의 오아시스" 출연이다. 그는 해당 토크쇼에 출연하여 자신이 아직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후배 가수인 SE7EN에게[29] 밀리지 않는 춤 실력을 지녔다고 발언했다. 그는 오랜만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직접 선 보였지만, 당시 이문세가 "이젠 세븐에게 밀리겠네요"라고 말해 굴욕을 당했다. 당시 영상을 본 대중은 그의 떨어진 춤 실력을 보며 한탄했다. 특히 전성기 시절 유연한 동작이 트레이드 마크인 양현석이 뻣뻣하게 춤을 추는 장면은 대중을 폭소하게 했다. 해당 링크를 보면 세월 앞에 무너진 양현석의 춤 실력을 볼 수 있다. #
2.3. 음악 프로듀서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된 후, 음악 프로듀서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96년, 지금의 YG엔터테인먼트의 모체인 "현기획"을 설립하여 킵식스를 데뷔시키며 본격적으로 음악 프로듀서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킵식스의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되고, 다음해인 1997년, "M.F기획"을 설립하고 지누션을 데뷔시켜 대박을 치게된다. 이후 1998년, 본인의 애칭을 본뜬 "양군기획"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이후 1TYM을 데뷔시키고 또 한 번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30] 2001년에 사명을 YG엔터테인먼트로 변경한 이후 지금까지 쭉 제작자의 길을 걷고 있다. YG엔터테인먼트의 회사 경영 및 배우 매니지먼트는 동생인 양민석 대표가 주로 지휘하고, 양현석은 프로듀서로서 YG엔터테인먼트의 주 사업인 신인 제작 및 음악 분야를 총괄하는 쪽으로 형제간 역할 분담을 한다. 현재 YG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는 양민석과 황보경 공동 대표이사 체제이지만 실제 경영자는 양현석으로 등재되어 있다.[31]2000년대 중반부터 급격한 성장을 이룩한 YG엔터테인먼트가 처음부터 대형 기획사는 아니었다.[32] 특히 초창기의 YG는 매우 어려웠다. 야심차게 데뷔시킨 킵식스가 실패하며 회사가 휘청거렸으며, 자금이 없어서 1998년에는 양현석 본인이 직접 '악마의 연기'를 타이틀로 한 정규 1집을 내고 활동하기도 하였다.[33]
1996년 킵식스의 실패를 딛고, 1997년 지누션과 1998년 원타임 등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양현석은 이후 2001년, 사명을 'YG엔터테인먼트'을 변경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특히 원타임의 성공은 차후 YG엔터테인먼트에 엄청난 재산이 되게된다. 원타임의 리더였던 'TEDDY'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부상했으며, 훗날 원타임이 해체한 이후, 테디는 래퍼에서 프로듀서로 전향하여 YG엔터테인먼트의 엄청난 성공 신화를 써내려간다.[34]
킵식스의 실패 이후,[35] 존폐 위기까지 갔었던 YG가 살아난 이유는 양현석의 솔로 앨범의 흥행 영향이 크기도 했지만, 사실 DR뮤직의 관계자의 도움도 컸다. 양현석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DR뮤직 관계자가 도움으로 YG는 간신히 회사의 수명을 연장했다. 양현석은 어려웠던 시절 도와준 이때의 경험을 잊지 않고 2012년 해당 소속사의 걸그룹인 라니아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다. 자세한 내용은 라니아 항목을 참조. 이런 영향 때문에 라니아의 멤버는 양현석에게 호의적인 발언을 여러번 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YG 소속 가수들의 음반에 작사, 작곡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YG엔터테인먼트의 초창기 시절인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중반까지의 양현석은 YG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의 앨범에 열심히 작사/작곡과 피쳐링으로 참여하고, YG FAMILY 단체 앨범에 솔로곡을 수록하는 등 제작자이자 가수로서 대중들에게 전면으로 나섰었다. BIGBANG과 2NE1의 대히트 이후에는 작사/작곡에는 완전히 손을 때고 전체적인 앨범 제작에만 참여한다.
한편 그를 비판하는 세력은 그가 유능한 특정 인물 덕분에 운 좋게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뮤지션으로서는 서태지를 만나서 성공했고, 제작자로서는 초기에는 PERRY, 나중엔 TEDDY와 KUSH라는 작곡가 덕분에 겨우겨우 버티다가 우연히 BIGBANG이 터져줘서 운으로 부자가 됐다고 비판하는 세력은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대체적으로 2010년 이후 YG 소속 아티스트의 팬들[36] 혹은 악성 안티팬일 의견으로 추정된다.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전의 서태지는 그룹을 결성할 생각은 없었고 양현석에게 춤만 배우려고 했지만, 서태지가 작곡한 음악을 듣고 먼저 그룹을 만들 것을 제안했던 이가 양현석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데뷔했을 때 일부 평론가가 좋지 못한 평을 내린 것을 감안하면 양현석의 곡을 고르는 선구안과 트렌드를 보는 눈은 탁월한 편이라 평가된다. 또한 각 가수가 자신의 색을 표현할 수 있게 돕는 능력도 뛰어나다. 자신의 주관을 강하게 투입시키는 이수만과 박진영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서포팅형 기획자라고 다수의 전문가는 평가한다.
해외진출 면에서도 다른 기획사와는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2011년에는 에이벡스와 합작으로 일본 전용 레이블인 YGEX를 설립해 YG 소속 가수들의 음반을 내고 있다. 아키모토 야스시와 더불어 에이벡스에 전용 레이블을 세운 몇 안 되는 프로듀서로, YG의 브랜드파워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앨범의 발매 주기는 팬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2000년대 후반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BIGBANG이 메가 히트곡 '붉은 노을'을 발매하고 수 년간 국내 활동에서 공백기를 가지는 동안 빅뱅의 팬클럽 VIP가 이러한 YG의 성의없는 운영에 크게 분노했다. 지나친 공백기는 빅뱅의 후배 그룹인 WINNER와 iKON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 때문에 해당 그룹들의 팬덤은 양현석의 방만한 운영에 분노하는 경우가 크다.[37] 2000년 이후로 지난 몇 년간 YG가 보인 행보를 토대로 추정하면 YG 소속 가수의 공백기는 대체로 1년 6개월이다.[38] 음악 활동의 공백기가 여타 가수에 비해 길며 국내 방송도 많이 출연하지 않는다. 양현석 본인은 음원차트를 휩쓸 만큼의 좋은 노래가 마련 되지 않으면 내보내지 않는 자신의 철학 때문에 공백기가 길어진다고 해명했다.[39] 이러한 양현석의 철학 때문에 과거 BIGBANG과 2NE1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공백기를 가졌고, WINNER는 2년, 그리고 iKON은 데뷔까지 1년이 걸렸다.
'양현석은 가수 뽑을 때 얼굴을 안 본다'가 정설처럼 퍼져 있다. 하지만 힐링캠프에서 '예쁘고 잘생긴 사람보다 멋있는 사람이 좋다'고 밝혔다. 외모보다 끼와 카리스마를 훨씬 많이 보는 것으로 추정된다. 덧붙여서 2NE1도 얼굴이 예쁘지는 않지만 멋있기 때문에 좋다고 말했다. 제작자로서 연예인을 보는 것 말고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작고 귀여운 여성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는 얼굴도 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BLACKPINK, TREASURE가 있다.
공백기나 매니징 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연예인을 발굴하는 안목은 엄청나다고 평가받는다. 당장 서태지를 알아 보았으며 그의 사업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TEDDY'와 'BIGBANG',[40] 그리고 싸이까지, 양현석이 함께한 연예인은 대부분은 일반적인 히트의 범주를 넘어선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소속 가수 외에도 양현석이 호의적으로 평가한 인물이 향후 좋은 성적을 거둔 경우가 많다. K팝스타에 출연했던 유주와 김세정을 높게 평가했으며,[41][42] Mnet의 오디션 프로 방송인 '슈퍼스타 K'에서 서인국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이에 그에게 적대적인 와이지 팬덤은 '캐스팅만 하는 게 좋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YG엔터테인먼트 설립 이후 수년이 지난 지금, 다수의 전문가들은 YG 특유의 매니징 방식을 주목하고 있다. 양현석은 자신의 소속사를 운영할 때 업계의 라이벌인 다른 두 사람인 이수만, 박진영과 비교되는데, 그의 스타일은 완전방목형이다.[43] 소속 가수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크게 사생활적인 관여를 하지는 않으며, 귀를 열고 가수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 자신의 입장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향을 찾아서 최대한 도와주는 스타일이다. # 한 마디로 소속 아티스트들이 스스로 음악적인 성장을 이루어내기 위해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SM이나 JYP처럼 전문 트레이너들을 고용해서 소속 아티스트들을 교육하거나 하는 것 역시 전무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있어서는 양현석 본인도 자학삼아 "우리 소속사에서는 그냥 살아남아야한다는 개념으로 붙어있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실제 당시 YG 소속 되어 있던 아티스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가 "터치도 안하지만, 교육이나 트레이닝 역시 별 거 안하고 그냥 방치해둔다."였다고 한다. 실제 G-DRAGON이 BIGBANG 히트 후로 YG에서 다른 소속사들과 마찬가지로 트레이너나 강사를 초빙하여 교육을 시키는 시스템을 시도하자 "나 때는 저런 거 없었는데"라고 침울해했다고 한다.
한편 소속사 가수가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할만한 사고를 친다면 불같이 화를 낸다고 한다. G-DRAGON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조사를 받았을 때, 평소에 G-DRAGON에게 다른 사건사고가 있었을 때는 모두 감싸줬지만 이 사건 만큼은 엄청나게 화를 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하지만 가수들의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 교육을 시킨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게 G-DRAGON, 박봄, T.O.P까지 똑같이 마약 문제로 큰 물의를 일으키자 양현석이 논하는 '교육'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 의문 부호를 가지는 대중이 늘고 있다. 일각에서 양현석이 가수를 매니징할 때 음악 활동의 자율성과 사생활의 자율성 사이에서 정도를 찾는 일을 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음악을 만들 때 가수 개개인의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최대한 간섭을 하지 않지만 도덕적, 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행동을 할 때도 간섭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아티스트의 사생활적인 관여를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WINNER는 자차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며, 형제 그룹인 iKON은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해야 한다고 한다. 이후 BLACKPINK의 로제가 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바로는, 계약서에 "술, 클럽, 담배, 운전, 성형, 연애금지"의 6대 금지 사항이 있다고 한다.[44] 그러나 결국 2019년, YG의 매니징 방식의 잘못된 부분이 모여 연쇄 논란을 다시 일으켰고,[45] 이후 매니징 방식을 개편하여 TREASURE부터는 엄격한 관리를 시작하였다. TREASURE 멤버들이 개인 SNS가 없는 것부터 알 수 있는 점이다. 또한 최근들어 회사 내부적으로 분위기도 상당히 밝아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즘들어 연습생들의 나이가 점점 어려지는 만큼 내부적으로 트레이닝 방법 개선에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BABYMONSTER의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YG도 전문적인 트레이너를 고용하여 체계적으로 연습생을 기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46]
2019년 6월 14일, 버닝썬 게이트 및 소속 아티스트들의 연이은 논란으로 인해 YG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직책에서 사퇴했다. 여전히 최대 주주이므로 회사에 대한 영향력은 줄지 않았지만, YG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한 공식석상 및 매스컴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영원히 사라진 점에서는 의의가 있었다.[47]
2023년 7월, B.I 마약 수사 무마 혐의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YG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직에 복귀했으며,[48] 소속사 자체 콘텐츠에 꾸준히 얼굴을 내비치며 대외적으로 복귀를 알리는 중이다.[49]
2023년 3월부터 BABYMONSTER의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 "Last Evaluation"에 출연하고 있다. 물론 대중들은 양현석을 반기지 않고 있지만 회차가 거듭될 수록 BABYMONSTER를 발굴해낸 제작자의 면모는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BABYMONSTER의 데뷔곡 BATTER UP이 혹평 받으며, 현재는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과는 별개로 정작 음악적 안목은 굉장히 처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이는 이전부터 나오던 이야기로, YG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의 다수의 히트곡들 중 양현석에 의해 한번 까였다가 겨우 발매된 곡들이 상당히 많다.[50] 또한 과도하게 뽕끼있는 음악만을 고집한다는 평도 받아왔다.
2023년부터 자사 소속 아티스트 TREASURE와 BABYMONSTER의 작업물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데, 특유의 촌스럽고 올드한 느낌과 일명 뽕짝 비트로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51] 특히 직접 편곡에 참여할 경우, 대부분의 곡에 분위기를 망치는 90년대 식 사이렌 소리를 가미하며 존재감을 톡톡히 드러내고 있다.[52]
2024년 1월, 상술한 프로듀싱에 대한 혹평을 인지했는지 직접 영상에 얼굴을 비춰 신인 프로듀서 50인을 채용해 인하우스 프로듀서진을 새로 보강했다고 밝혔다.[53]
YG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 그중에서도 특히 TREASURE의 음악적 부재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지받는 설 중 하나는 뛰어난 탑 라이너의 부재이다. 과거부터 YG엔터테인먼트 소속 보이그룹에는 한 명 이상의 탑 라이너가 소속되어 멜로디 라인을 주도했는데, 그게 테디 / 송백경 (원타임), G-DRAGON (BIGBANG), 강승윤 / 남태현 (WINNER), B.I (iKON) 이었다. 그러나 TREASURE 내에는 두각을 나타내는 탑 라이너가 전무하고,[54] 이에 따라 미숙한 YG PRODUCERS가 멜로디 라인을 작업하니 시대에 뒤떨어진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55]
또한 YG엔터테인먼트 복귀 이후 소속 아티스트들의 앨범 발매 일정을 직접 발표 및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56] 이에 대한 반응은 본인 얼굴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복귀를 홍보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과 소속 아티스트들의 소식을 빠르게 알 수 있어 괜찮다는 반응으로 양분된다.[57]
사업가와 음악 프로듀서로서 부정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상술한 제작자로서 능력은 여전히 고평가 받는 중인데, 특히 2024년에 HYBE 소속 아티스트들의 실력 논란이 연이어 터지게 되며 실시간으로 재평가되는 중이다. # 이 덕분에 과거 논란들로 더렵혀진 본인의 명예도 어느정도 회복했으며,[58] 특히 4대 기획사 중 그 입지가 가장 위태로웠던 YG엔터테인먼트가 다시 인정받는 계기나 되었다.[59]
3. 음반 목록
<rowcolor=#fff> 날짜 | 음반 | 앨범명 | 타이틀곡 |
<rowcolor=#fff> 1998년 | |||
04.06 | 정규 1집 | Yang Hyun Suk | 악마의 연기 |
3.1. 참여 음반
- 서태지와 아이들
- 널 지우려해 (작사)
- 이 밤이 깊어가지만 (작사)
- 지누션
- Gasoline (작사/작곡)
- 킵식스
- 나를 용서해 (작사/작곡)
- 어떻게 (작사/작곡)
- 웨딩드레스 (작사/작곡)
- 잊지는 않을게 (작사/작곡)
- 양현석
- 악마의 연기 (작사/작곡)
- 날 버리지마 (작사)
- 아무도 안 믿어 (작사)
- 무시 (작사)
- 한번만이라도 (작사)
- 약한자가 패배하는 세상 (작사)
- Lights Camera Action (작사)
- 잊혀질때까지는 널 사랑할게 (작사)
- 원타임
- Ready or Not Yo! (작사)
- SWi.T
- I'll be there (작사)
- Let me be the one (작사)
- 나 변했나봐 (작사)
- 이정현
- 따 (작사)
- SE7EN
- 열정 (작사)
- 난 알아요 (작사)
- 문신 (작사)
- 렉시
- Get up (작사)
- Rush (작사)
- 하늘위로 (작사)
- Hey Everybody (작사)
- 거미
- Work it now (작사)
- Clap your hands (작사)
- BIGBANG
- Remember (작사)
- 없는 번호 (작사)
- 태양
- 죄인 (작사)
- 八men鳥
- Goosebumps[62] (작사)
- TREASURE
- MOVE (T5) (편곡)
- BONA BONA (편곡)
- B.O.M.B (KABOOM Ver. ) (편곡)
- KING KONG (편곡)
- BABYMONSTER
- BATTER UP (작사 / 작곡)
- SHEESH (작곡 / 편곡)
4. 특징
YG의 음악은 곧 YG의 오리지널리티입니다. 바이오그래피 |
4.1. 음악인
젊은 시절에는 한국 가요계의 전설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로서, 이후 중년이 되어서는 대한민국 굴지의 연예 기획사 중 하나인 YG엔터테인먼트를 이끌게 되었다.이렇게 긴 시간에 걸쳐서 2020년대인 현재에도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여러모로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역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하나라고 평해진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소속 가수들의 잦은 불법행위와 2019년에 드러나기 시작한 일련의 사건으로 한때 YG엔터테인먼트 대표직을 사임하였으며, 사회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았었다.
이후 4년이 지난 2023년,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기타 혐의들에 대해 무혐의 처분받으며 자신을 둘러싼 리스크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다시 YG엔터테인먼트의 총괄 프로듀서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검찰이 항소와 혐의 추가로 인해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며 계획에 차질이 생긴 상황이며, 현재 3심을 준비 중에 있다.
4.2. 사생활
2009년 이재진의 여동생이자 SWi.T, 무가당의 멤버였던 이은주와 결혼하였다.[63] 연애 기간이 9년을 넘었다니, 연습생 때부터 교제한 것으로 추정된다.[64] 이재진이 한 잡지 인터뷰에서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여동생과 양현석이 사귀는 걸 알았고, 양현석이 병문안을 자주 와서 부모님께 많은 위안이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재진과 양현석의 별명은 '춘삼이'라는 점은 대중에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해당 별명은 얼굴에 점이 있어 생긴 별명이다. 또한 이재진은 데뷔 전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이었다고 한다. 본인은 힐링캠프 출연 때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이가 어려서 좋아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4.3. 경제력
2012년 강남스타일의 세계구급 열풍으로 YG엔터테인먼트의 주가가 급등하더니 2012년 9월 24일 계속된 주가 상승으로 양현석의 지분 가치는 3,000억 원을 넘어 마침내 이수만 회장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현재는 거품이 꺼져 많이 내려간 상태로, 최근 중국의 사드 보복 우려로 엔터주가 떨어져서 2016년 8월 9일자로 양현석이 약 1,200억 원, 이수만이 약 1,300억 원이다.# 이후 버닝썬 게이트, B.I 사태 등을 겪으며 한때 업계 1위였던 YG엔터테인먼트의 시가총액은 2019년 8,000억원대에서 4,000억원대로 절반 가까이 쪼그라든 만큼 양현석의 지분도 가치가 폭락했다.홍대거리에 빌딩을 여러 채 가지고 있으며, 과거 여러 클럽의 대주주였기도 했다.[65] 또한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를 소유하고 있다. 처남인 이재진이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양현석의 카드 한도는 3억 원이라고 한다.
5. 논란 및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양현석/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여담
- YG엔터테인먼트의 수장으로 음악적인 감각과 원석을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 본래 양현석은 YG엔터테인먼트 공식 홈페이지에 제일 끝자락에 숨어 있어서[66]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그룹 이름인 'YG'가 대표 양현석의 애칭인 '양군'의 약자인 것도 모르는 외국인이 수두룩 했었으나, SBS의 K팝스타의 심사위원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 특유의 존재감을 강하게 어필했고, 2013년부터는 공식 홈페이지의 아티스트 페이지의 제일 앞자락에 자신의 소개가 옮겨지면서 해외 팬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외국인들이 부르는 애칭은 'YG papa'.[67] 이 덕분에 YG엔터테인먼트에서 유튜브에 올린 가수들의 비하인드 영상에는 "YG papa eng sub plz"와 같은 영어 자막 달아달라는 요청섞인 댓글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 댄서 시절부터 오랜 양현석의 별명은 양군. 서태지 역시 공식적인 자리에서 양현석을 칭할 때 양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본인의 싸인도 양군이라고 적어줄 정도로 그의 제2의 이름처럼 되었다. 본인이 이끌고 있는 기획사의 이름 역시 이 "양군 (Yang Goon)"에서 따온 것이다. 2000년대까지는 팬들에게 공지사항을 올리는 YG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 'From. YG' 게시판에서도 항상 마지막에는 양군이라는 끝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팬클럽 이름도 '양군후원회'였다.[68]
- 기획사 수장으로서 방송이나 공식 석상에 설 때 거의 항상 빵모자를 쓰고 있어서 빵모자가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으며, '모자가 본체다.' 같은 드립과 함께 탈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위의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는 머리숱이 많고 흰머리도 없다. 머리 관리할 시간이 없어서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서태지도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때 늘 모자를 쓰는 코디 때문에 앞머리 빼고 대머리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 연예계 활동 및 소속사 사장 일 등으로 그나마 나아지긴 했으나, 사실 낯가림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본인은 연예계 자체에 큰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69]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도 본인이 처음부터 하려던 것도 아니었고, 원래 서태지에게 멤버만 소개해 줄 셈이었는데[70] 정작 서태지는 양현석이 소개해 준 멤버들이 맘에 들지 않았고, 결국 서태지가 양현석보고 "직접 해라"라고 권유하여 팀에 들어간 거라고 한다. 참고로 이주노를 소개해줄 때애도 양현석도 이주노도 둘 다 서태지보다 나이가 많아 양현석이 괜찮겠냐고 묻자 서태지는 쿨하게 괜찮다고 했다고 한다.
이런 성격에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MC들이 낯가림이 심했는데, 활동은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엔 "그냥 음악하는 게 즐거웠고, 무대 위에선 사람들의 시선 신경 안 쓰고 그냥 춤만 췄다. 춤추는 게 즐거웠으니 무아지경으로 춤만 췄다"고 했다. 사실 4집 때는 서태지도 힘들었으나, 양현석도 본인도 톱스타였던 때가 가장 스스로가 지쳐있던 때였다고 했다.
- 이주노의 빚 1억 6,500만원을 대신 갚아주기도 했다. 덕분에 이주노는 구속에서 풀려났는데 돈을 아예 준 건 아니고 형식상 차용증을 써주었지만 이주노의 수입이 별로인 데다가 자식은 셋이나 될 예정이였어서 사실상 돌려받을 수가 없다.[71] 세월호 때는 5억을 기부하고도 묻혔는데 이번에는 3분의 1도 안되는 액수이고 차용증까지 썼는데도 대중들에게 오히려 더 강한 인상을 준 듯하다.
- 1997년 데뷔한 지누션 1집 앨범은 양현석과 듀스의 이현도가 공동 프로듀싱한 앨범이는 점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타이틀 곡 'GASOLINE'은 양현석이 작사, 작곡, 편곡을 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런데 곡의 진행이 YG 프로듀서 PERRY의 작곡 스타일이라 과연 양현석이 만든것인지 의심하는 반응이 많다. 실제로 이 곡 이후로 양현석은 작곡을 한 적이 없다.[72][73]
- 엄청난 춤 실력의 소유자. 한국 1세대 힙합댄서였으며, 애초에 서태지와 아이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위와 같은 춤실력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엔 올드스쿨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었고, 한 때 한국 댄서들의 집결지로 통했던 이태원 문나이트를 주름 잡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인지 YG에서 활동했던 댄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양현석과 일했던 댄서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본인이 댄서 출신이다 보니 더 잘 챙겨주거나 하는 편이었던 모양이다.
- 디시인사이드 양현석 마이너 갤러리도 있는데, YG 소속가수를 가리지 않고 양현석의 삽질 및 소속가수 처우에 대한 비판이 많이 올라온다.
- YG 가수들에게는 꼭 하는 성대모사의 피해자 1인이다. YG 출신치고 성대모사를 안한 사람들이 없으며 특히 빅뱅은 이 부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BLACKPINK도 양현석 성대모사에 능하다.
- 의외로 키가 크고 비율이 좋은 편이다. 경찰 조사나 재판에 참여한 사진을 보면 수트핏도 상당히 잘 받는다.
-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업로드할 때 해시태그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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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원 양씨 문양공파 인터넷족보에는[2] 음력 1969년 12월 2일[3] 남원 양씨 문양공파 인터넷 족보에는 1970년 12월 20일생으로 오기되어 있다.[4] 문양공파-주부공파 30세 석(錫) 항렬. 성종 때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양성지의 17대손이다.[5] 포털 프로필 기준.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팀 내 최장신.[6] 梁在勛. 전라북도 남원에서 1937년 2월 26일에 태어나 2017년 5월 20일 노환으로 사망했다.[7] 韓春子. 청주 한씨 한흥철(韓興喆)의 딸로, 1942년 1월 20일생이다.[8] 梁弘錫. 1963년 6월 16일생이다.[9] 이에 따라 2000년대 초반에는 프로필 종교 란에 1집 수록곡 제목 〈아무도 안 믿어〉 드립을 치기도 했다. 다만, 형과 남동생을 포함하여 가족 전체는 불교 신자로 보인다. #[10] 1991년 3월 7일 입대하였으나, 심장 질환으로 인해 동년 11월 16일에 의병 전역했다. #[11] 본인을 대표하는 별명 내지 예명. 후술된 "양군"이라는 별명을 영문 이니셜로 표기한 것이다.[12] 본래 "양현석 사장님"의 줄임말이나, 2010년대 후반 여러 논란으로 "양현석 싸이코"라는 의미로도 쓰이게 되었다.[13] 이경규가 지어준 별명이자, 서태지가 양현석을 부르던 애칭이었다. #[14] 이재진의 별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 양현석의 별명이었으며, 후에 이재진의 턱 점이 양현석과 비슷해 붙여지게 된 것이다.[15] 과거 뉴스 인터뷰에 해당 별명이 언급되어 있었다. #[16] 과거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제작된 카드 시리즈에 적힌 별명. 여담으로 서태지 카드 내 적힌 별명은 "소돼지" 였다고 한다. #[17] 여담으로 이태원 댄서들 중 그를 추종하는 댄서 후배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아는 형님이나 여러 프로그램에서 이상민이 양현석을 최고로 뽑는다.[18] 다만 이는 양현석이 힐링캠프에서 밝힌 내용이고, 후에 서태지가 해피투게더에 나왔을 때는 한 달에 50만 원씩, 석 달에 150만 원이라고 말했다. 즉 서태지는 "총액 150만 원"에 3개월로, 양현석은 "매월 150만 원"에 3개월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사람의 기억에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에 진위는 불명. 어쨌든 양현석은 당시 록밴드 출신이었던 서태지에게는 관심이 없어서 떨궈낼 생각으로 일부러 높은 가격을 불렀다고 증언했다.[19] 이 때문에 이문세의 오아시스에 출연한 양현석은 자신이 서태지보다 2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태지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밝혔다.[20] 양현석 본인이 분명하게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21] 서태지는 원래 휴대폰도 지갑도 안 들고 다니는 인간이라고 얘기했다. MC들이 "그게 가능해?"라고 묻자 양현석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라며 서태지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22] 서태지가 8집 Atomos 컴백 후 김종서와 함께 서태지의 자택에 놀러갔는데, 본인은 간만의 서태지의 컴백이기도 해서 음악 얘기나 업계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정작 서태지는 김종서와 "어느 슈퍼의 야채가 가격이 싸고 할인을 많이 하더라"라는 살림 얘기 삼매경에 혼자만 붕 뜬 것 같았다는 회상을 하기도 했다.[23] 그리고 이 집은 1994년 12월 12일 천상병 기념관이 되었다. # 천상병이 시를 쓰던 방을 재현한 곳이 양현석의 방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졌다. #[24] 랩 실력이 나쁘진 않은데 혀짧은 발음을 자주 해서 서태지가 데뷔 당시 많이 놀리기도 했다.[25] 솔로 1집 타이틀곡인 "악마의 연기" 뮤직비디오를 보면, 연예인 보다는 일반인에 가까운 양현석의 몸을 볼 수 있다. 해당 앨범에는 서태지가 "아무도 안 믿어"의 곡을 써준 것에 대해 보답곡으로 "잊혀질 때까지는 널 사랑할게"의 곡이 들어갔다.[26] 대략 4만장 정도 팔았다.[27] 공교롭게도 두 앨범 모두 삼성뮤직/오렌지 브랜드에서 발매되었다.[28] 방송 공연에서는 전혀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29] 세븐은 2000년대 당시 초중반 남자 솔로 가수 중 최고의 춤 실력을 보유한 실력자다.[30] '양군'은 서태지가 양현석을 부를 때 쓰던 애칭으로, 실제로 서태지가 2000년 9월에 국내 활동을 재개하며 이듬해까지 진행했던 '태지의 화' 투어의 영상을 보면 '하여가'와 '컴백홈' 무대를 위해 게스트로 출연한 양현석에게 양군이라고 부르는 걸 확인할 수 있다.[31] 어찌보면 여러 기업들이 가족끼리 경영권을 차지하려 법적 분쟁을 하는 와중에 형제끼리 역할을 나누어 긴 시간 동안 이어나가는 것을 보니, 형제 관계가 좋은 것으로 보인다.[32] 3대 기획사란 명칭 자체가 전통의 강호였던 SM엔터테인먼트를 2007년 들어 BIGBANG의 YG엔터테인먼트와 원더걸스의 JYP엔터테인먼트가 맹추격하면서 생긴 이름이었다.[33] 자세한 내용은 솔로 활동 문단 참고.[34] 사실 테디 이전에 YG의 대표 프로듀서 PERRY가 있었다. 지금도 YG의 대표적인 프로듀서라고 하면 페리와 테디를 동시에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35] 이후 밝힌 바로는, 실패한 이유에 대해 "너무 앞서 갔다"면서도 "유익한 실패였다"고 말했다.[36] 대체로 응원하는 그룹의 지나친 공백기로 양현석의 안티팬이 된 이들이 많다.[37] 특히 iKON은 2016년과 2017에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 당시 양현석과 아이콘의 팬클럽 iKONIC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또한 WINNER의 경우에도 데뷔한 이후 국내에서 괴물 신인이라 불릴만큼 대성하였으나,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보석함에 수납하여 INNER CIRCLE과의 관계도 최악으로 벌어졌다.[38] 대체로 1년 6개월이지만 2023년 기준으로 젝스키스는 무려 공백기만 2년이다.[39] YG 소속 가수가 긴 공백기를 끝내고 발매한 앨범이 대체로 엄청난 성적을 거둔 경우가 많기에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이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과감하게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음악 작업에 들어가 컴백할 때는 시대를 풍미한 파격적인 음악을 들고 나온 서태지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지금으로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공백기는 1년 미만으로 짧지만 당시에는 서태지 사망설까지 나올 정도였다. 물론 서태지의 공백기가 긴 것은 서태지가 음반 전반을 총괄하는 원맨 밴드 성격이기에 이해가 되지만 기획사가 아티스트에세 몇 년간의 공백기를 갖게 하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YG도 그룹에서 한 명만이 프로듀싱하는 원맨그룹 방식이다.[40] 특히 K-POP 역사상 단일 파급력이 가장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는 G-DRAGON은 양현석 인생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41] 하지만 그 와중에 안예은이 부른 홍연을 듣고서는 공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이 공감되지 않으면 대중도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쳐 관련 영상에서 비판받는 중이다. 참고로 홍연의 경우에는 안예은의 자작곡 중에서는 가장 잘 된 케이스로, 무려 드라마 OST로 발탁되고, 유희열에게도 호평을 받은 노래였다. 이런 성향은 이전에도 몇 번 방송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앨범 발매에 대한 기준이 무엇이냐는 인터뷰 질문에 "나도 대중의 한사람인데 나부터 감동을 시켜야 한다. 소속 아티스트가 새 곡을 써와도 날 감동시키지 못하면 앨범을 못 내게 한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소속 가수들 앨범이 늦게 나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성향일지도 모른다.[42] 그러나 안예은의 홍연이 큰 호응을 얻었던 것은 맞으나 엄밀히 말하면 드라마 OST 이후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일 뿐 가수 본인의 인기가 대중적인 수준까지 올라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장 홍연말고 그녀의 디스코그래피 중 사람들에 알려진 곡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43] 박진영은 연습생의 노래/춤 교육 뿐 아니라 학업과 인격 형성 등 연습생 과정을 한 인간 개인을 키우는 과정처럼 여기고 모든 부분에서 소속서 차원에서의 교육을 시킨다. 성적이 떨어지면 연습을 중지시키는 JYP의 시스템은 이미 방송에서 여러차례 언급되어 널리 알려진 사실.[44] 다만 담배의 경우 남자 아이돌은 제외로 보이며, 연애의 경우는 연습생이기 때문에 금지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운전과 자차는 신인이기 때문에 금지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송민호와 강승윤이 자차를 끌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후 지수가 말하기를 "회사와 이야기만 되면 다 된다"고 한다.[45] 그 전부터 G-DRAGON과 T.O.P, SE7EN, 박봄 등도 문제가 있었다.[46] 사실 B.I의 경우 방치로 인한 일탈보다는 트레이닝 방식부터 매니징 방식까지 전범위에 걸쳐서 YG의 잘못된 방식이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비아이의 경우 연습생 시절부터 양현석이 제 2의 지드래곤이라며 데뷔조 멤버들의 곡 작업은 물론 안무 창작 및 수업, 멤버들 트레이닝, 무대 기획 등 모든 일을 전적으로 혼자 맡아왔으며, 데뷔 후에도 무대 기획을 뺀 나머지 일들을 혼자서 맡아왔으니 정신병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비아이의 사건을 계기로 YG가 그 동안의 매니징 방식을 개선하게 되었다.[47] 이후 해외 원정도박 및 불법 환치기 논란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받으며, 방송 복귀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48] 다만, Last Evaluation에 비춰지는 모습에 따르면 회사 자체는 꾸준히 출근해왔던 것으로 보인다.[49] 이후 2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으며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으로 보이며, 현재 3심 준비 중에 있다.[50] BIGBANG의 GIRLFRIEND, BAD BOY, BAE BAE 등. iKON의 사랑을 했다도 마찬가지.[51] 일명 질 낮은 신스도 한 몫 한다.[52] 그 대표적인 예가 BATTER UP과 BONA BONA, MOVE, B.O.M.B (KABOOM ver.) 등.[53] 다만, 2024년 상반기가 다 지나갈 때까지 발매된 음반 중 신인 프로듀서의 참여는 전무했다.[54] 최현석, 준규, 아사히, 舊 방예담 등이 프로듀싱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이들 모두 대표곡과 히트곡은 전무하다. 여담으로 DARARI에서 방예담은 메인 프로듀서가 아니었으며, 방예담의 곡이라는 것은 단순 소속사의 언플이었다.[55] 당장 BABYMONSTER의 SHEESH만 해도 멜로디 라인을 수십번 다시 작업한 것이 알려지며, 해당 설이 가장 유력해보인다.[56] 사실상 예전 YG LIFE의 실사화라 칭해진다.[57] 여담으로 해당 영상들이 사실상 예전 양현석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의 역할은 담당하게 되며, 댓글창은 팬들의 본인의 가수에 대한 수많은 요청 사항들로 도배되어 있다.[58]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K-POP 팬들 사이의 말이며, 일반 대중들에게는 아직 법정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여전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압도적이다.[59] 그와 별개로 주가는 여전히 하한가를 맞는 중이며, 이에 따른 시가총액 또한 나날이 증발 중이다.[60] 양현석의 솔로곡.[61] 페리가 한국어 작사가 서툴렀는지, 페리의 솔로 앨범의 모든 한국어 가사는 양현석이 썼다.[62] 일본 프로듀스 101 경연곡.[63] 젝스키스 데뷔 전 이재진과 김재덕이 아직 가수 지망생이던 동네 댄서일 때, 양현석은 둘의 춤 실력이 출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둘과 조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재진과 김재덕은 당시 아주 약간의 자만심을 품고 양현석 앞에서 춤을 췄고 이걸 본 양현석은 "니들 아직 10년은 더 춰야겠다."라고 크게 혹평했다고 한다.[64] 양현석이 이은주를 처음 본 것은 젝스키스가 출연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라고 한다. 이재진의 부산 집이 나올 때 이은주가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놀라운 것은 이재진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데뷔했기 때문에 당시 이은주의 나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였다(...)[65] 지금은 논란으로 다 처분했을 수도 있다.[66] 홈페이지를 새로 리뉴얼하면서 부터이다. 다른 소속 가수들 앨범에 열심히 피쳐링해주고 YG FAMILY 2집이 나왔던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맨 앞자락에 있었다. 다음부터가 지누션, 원타임, 페리, 마스타 우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67] 의역하자면 "와이지 삼촌"[68] 공식 홈페이지에도 "YG"로 등재되어 있었다.[69] 정말 순수하게 그냥 춤추는 게 좋았다고 했다.[70] 서태지가 리더이기도 해서 웬만하면 서태지보다 나이가 어린 멤버로 결성할 예정이었다고 한다.[71] 하지만 이주노의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이 시기에 사기와 성추행 사건이 연달아 이어져서 셋째가 될 뻔 했던 아이는 유산되었다. 이주노는 자신의 아이까지 자기 손으로 잃게 만든 것이다.[72] 작사가로는 2000년대 중반까지 SE7EN, 지누션, 1TYM, SWi.T, 렉시 등 여러 가수들의 앨범에 참여했다. BIGBANG과 2NE1의 대성공 이후에는 작사, 작곡 쪽에는 완전히 손을 땐 상황.[73] 그러던 중 2023년을 기점으로 작곡과 편곡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가는 굉장히 좋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