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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taiji and Boys 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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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65ab><colcolor=#929293> 아티스트 | 서태지와 아이들 |
유형 | 정규앨범 |
발매일 | 1993년 6월 21일 |
장르 | 댄스, 팝, 랩 메탈 |
곡 수 | 8곡 |
러닝타임 | 30:53 |
스튜디오 | 테크노 태지 스튜디오 |
발매사 | 스포트라이트 |
기획사 | 반도음반 |
프로듀서 | 서태지 |
타이틀곡 | 하여가(何如歌) |
||<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191919><tablebordercolor=#4d3a93><width=80> ||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1998년 37위 ||
1998년 37위 ||
<keepall> 100BEAT 선정 90년대 베스트 앨범 100 28위 |
[clearfix]
1. 개요
1993년 6월 21일에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2번째 앨범. 대표곡은 하여가, 너에게 등등. 기존의 음악에 레이브나 국악 등을 접목시킨 특징이 있다. 하여가의 힙합 음악에 국악을 접목시킨 음악과 수시아의 158 BPM의 빠른 멜로디는 2000년대 초 테크노 열풍에 한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대 대한민국 대중가요 음반들 중 최초로 더블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며 22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했다. 단일 앨범 판매순위는 김건모의 3집 잘못된 만남, 신승훈의 5집 다음으로 3위에 올라 있다.2. 컴백과 반응
엄청난 성공을 거둔 1집 활동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방송가의 관행을 깨고 돌연 잠적을 했다. 2집을 준비하기 위한 휴식기였지만 당시엔 활동종료 - 휴식 및 다음 음반 제작 - 컴백의 패턴이 생소한 것이어서 해체설, 사망설 등 다양한 루머가 돌았고 활동중지가 오히려 대중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2집 컴백 무대를 당시 제일 잘나가던 예능 프로였던 특종! TV 연예에서 했다. 컴백 몇 주 전부터 광고를 엄청나게 했고, 예능 정보 프로에서도 계속 떡밥을 뿌렸으니, 당시 청소년들은 진짜 어떤 노래를 들고 나올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발매 당일 학교 담을 넘어 사오는 애들도 있었고, 조퇴를 하는 애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지경이니 동네 레코드점[1]에선 당연스레 매진이었고 큰 레코드점에선 번호표까지 나눠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연히 당시 기성 언론에서는 마케팅의 천재라는 부정적인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2]
컴백 당시 양현석과 이주노의 레게머리나[3] 너에게 활동 당시 앞머리에 빨간색 브릿지를 넣은 서태지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언론에서도 방송사에서도 많이 시끄러웠다. 결국 그룹은 '너에게' 활동 도중 방송정지크리를 먹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음반은 잘 팔려나갔고 곡도 인기가 많았다.당시 방송정지 처분에 대한 멤버들의 인터뷰자료
하여가는 처음에는 많이들 이상한 노래라고 갸우뚱했지만,[4] 하여가가 나온 날 학교 앞 노래방은 만실.[5] 노래방에서는 서태지의 곡이 추가될 때마다 입구에다 <서태지 "너에게"> 이런 식으로 노래 들어온 걸 광고했고, 그 때마다 노래방까지 뛰어가지 않으면 쓸쓸히 발을 돌려야 될 정도였다.
당시 노래방 시스템의 대세는 시간제가 아닌 코인제였는데, 수시아같은 경우는 4분이 넘는 전체 음악 중에 노래를 부르는 부분은 몇 마디 되지 않아서 서태지 전곡을 완창할 경우 할까 말까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많았었다.
3. 성적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 ▶ |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 ▶ | 김건모 핑계 (1994년) |
서울가요대상 대상 | ||||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 → |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 → | 김건모 핑계 (1994년) |
4. 수록곡
트랙 | 곡명 | 작사 | 작곡 | 편곡 | 재생 시간 |
01 | Yo! Taiji | 서태지 | 0:51 | ||
02 | 하여가(何如歌) | 5:14 | |||
03 | 우리들만의 추억 | 3:52 | |||
04 | 죽음의 늪 | 3:28 | |||
05 | 너에게 | 4:36 | |||
06 | 수시아(誰是我) | 4:05 | |||
07 | 마지막 축제 | 4:38 | |||
08 | 우리들만의 추억 (Inst.) | 3:52 |
4.1. Yo! Taiji
- 이 음악이 끝난 뒤 바로 하여가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시너지 효과를 보였다. 심지어 뮤직비디오나 옛날 방송 영상을 봐도 Yo! Taiji가 나온 뒤 바로 하여가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4.2. 하여가(何如歌)
- 2집의 타이틀 곡.
- 하여가의 기타 솔로가 테스타먼트의 유명곡인 First Strike is Deadly의 기타 애드립 파트와 일치하는데, 이는 서태지의 작곡이 아니라 당시 기타를 쳐준 이태섭의 애드립 파트이며, 이로 인해 PC통신을 통해 표절 논란이 일기도 했다.그런데, 일본의 헤비메탈 전문지 'burn!'에 실렸다는 테스타먼트 인터뷰에 따르면 그 부분은 스칸디나비아 민요를 아르페지오로 편곡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원곡인 스칸디나비아 민요는 들어본 사람은 한국에 거의 없다고 봐도 되고, 테스타먼트의 일본 잡지 인터뷰를 읽은 이태섭이 '저작권 문제없겠네.' 라고 생각하고 차용했다는 것을 '웹진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즉, 법적으로는 문제없으나 이태섭은 너무 안이하게 따라한 것이고, 서태지는 관리 책임이 있다. 인터뷰 전문
- 서태지와 아이들은 1집 활동 당시부터 매주 새로운 리믹스 버전을 방송에 선보이던 것으로 유명했다. 반면 하여가 리믹스는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 문서의 올드 버전에도 "딱 한번 발매 한참 후에 보여주었다. 그리고 서태지는 이후 방송, 콘서트, 음반 어디에서도 리믹스는 하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2집 활동부터 방송무대를 많이 갖지 않은 것에서 오인된 듯.[7] 하여가의 경우 해당 간주 부분을 완전히 들어낸 방송용 버전을 따로 제작했으며[8], 10월 즈음 힙합버전으로 완전히 컨버전한 하여가로 활동했다. 당시 가요톱텐에서 4주간 1위를 할 때 이 버전으로 나왔다. [9] 단지 이 당시 방송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듯하다. 현재 인터넷에서는 '젊음의 행진' 출연분과 '93 내일은 늦으리' 공연무대[10]를 찾아볼 수 있다. 힙합 버전과 TV Edit 버전은 2007년에 발매 된 서태지 15주년 기념 앨범에 수록된다.
- 서태지는 3집, 4집 때도 계속 리믹스 버전을 알음알음 내보였는데 심지어 컴백홈이나 필승도 메이저 편곡 외에 방송용 마이너 체인지 버전이 따로 있을 정도.
- 하여가의 경우 뮤직비디오도 2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이 영상은 하도 가요프로에 출연을 안 하니까 MBC에서 따로 제작한 것. 물론 굿바이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버전[11]도 MBC 미디어텍의 손을 거친 것이긴 하다.[12]
- 2집 활동 이후 3집 컴백쇼 "새로운 도전"에서 라이브된 것이 아이들 라이브의 마지막이며, 6년 만에 태지의 화에서 양현석과 함께 라이브하게 되었다. 그 이후 8집 뫼비우스에서 데스메탈 버전 리메이크로 라이브. 그 후 25주년 콘서트에서 TV Edit 버전으로 라이브 되었다.
하여가 |
예예예예예 야야야야야 예이예이예이 야이야 |
4.3. 우리들만의 추억
- 우리들만의 추억과 너에게는 팬들에게 바치는 노래 중 하나다. 우리들만의 추억은 펌프 잇 업에 수록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현역 당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 새로운 도전, 다른 하늘이 열리고까지 서태지와 아이들 공연에서 계속해서 쓰인 레퍼토리였으며, "아이들"까지의 추억을 아우르기 때문에 서태지 솔로 커리어에서는 라이브 되지 않다가, 25주년 공연에서 정확히 22년 만에 방탄소년단과 함께 공연하였다. 참고로 이 부분은 유일하게 촬영이 허가된 부분이라 유튜브에 직캠이 많다.
우리들만의 추억 |
한결같은 너희들의 정성이 |
4.4. 죽음의 늪
- 마약 중독자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이다. 팝과 락의 절묘한 조화와 교훈적이면서 어두운 가사, 그리고 장조와 단조를 넘나드는 구성이 독특함을 준다. 단순한 비트와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마치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 앨범을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로도 서태지가 마이클 잭슨의 팬인 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직접 밝히기도 했다.[13][14]
- 1994년에 문화 평론가 강헌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직접 밝혔다. 당시 강헌이 창간한 계간 문화 잡지 <리뷰> 창간호에 실린 인터뷰인데, 몇 안 되는 방대한 인터뷰이니 관심이 있다면 도서관 등에서 찾아보길 바란다.
강헌: 그리고 화제가 된 곡이 마약문제를 암시하는 `죽음의 늪` 으로 이 화두는 3집에서 '제킬박사와 하이드'로 발전한다. 밝음을 얘기할 때 보다 분열적인 상황을 다룰 때 당신의 솜씨가 더욱 발휘되는 것 같은데?
서태지: 마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노래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청소년에게 있어 마약 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이 곡의 편곡 패턴은 스매싱 펌킨스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이클 잭슨, 특히 Dangerous앨범의 스타일에 영향 받은 것이다.
출처서태지: 마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노래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청소년에게 있어 마약 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이 곡의 편곡 패턴은 스매싱 펌킨스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이클 잭슨, 특히 Dangerous앨범의 스타일에 영향 받은 것이다.
- 참고로 문화평론가 이동연 교수는 1995년 2월에 서태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곡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 교수의 저서인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P233에 나온다.[15]
이동연: 그런데 왜 '악마숭배 파통'이 나온 것인지 저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이런 가사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렇게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인데, 그 얘기는 뒤에 가서 더 얘기를 해 보죠. 그리고 '죽음의 늪'은 마치 추리영화나 공포영화의 배경 음악처럼 아주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줍니다. 마치 약물중독에 시달린 사람처럼 화자가 자신마저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와 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 곡이 갖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서태지: 요즘 마약이나 약물중독에 청소년들이 많이 빠져 있잖아요. 그 전에 시나위 활동할 때도 주위로부터 약물에 대한 유혹이 있었는데 저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부했죠. 그런 생각이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약물중독에 대한 경고를 비교적 강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서태지: 요즘 마약이나 약물중독에 청소년들이 많이 빠져 있잖아요. 그 전에 시나위 활동할 때도 주위로부터 약물에 대한 유혹이 있었는데 저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부했죠. 그런 생각이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약물중독에 대한 경고를 비교적 강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앞부분의 바이올린 인트로는 이후 8집 버뮤다 트라이앵글 뮤직비디오에 다시 활용된다.
- 2집 활동 이후 다른 하늘이 열리고에서 공연되었으며 한동안 공연되지 않다가 7집 전국투어인 제로투어에서 9년 만에 새 버전이 풀렸다. 그리고 8집 때는 서태지심포니 공연에서, 9집 때는 전국투어에서 공연되는 등 각 앨범의 공연 레퍼토리에 적어도 한 번씩은 들어가는 중.
죽음의 늪 |
시커먼 먹구름이 날 가린다 곧 비가 내리겠지 |
4.5. 너에게
- 너에게 뮤직비디오.
- 하여가의 후속곡인 너에게는 당시만 해도 팬서비스용 트랙 정도로 인식되었으나, 이후 서태지 솔로활동에 두고두고 쓰인다. 솔로 2집 히든트랙에 뉴메탈버전으로 수록되었으며, 6집, 8집 활동 당시에는 이 뉴메탈 버전을 선보였다. 7집 제로투어나, 9집 컴백쇼,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는 다시 원래의 발라드 풍 버전으로 공연하였다. 2004년 제로투어 콘서트 당시 밴드 버전이긴 하지만 원곡의 분위기와 톤을 그대로 가져간 버전으로 불렀는데, 원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찾아서 들어볼 것을 추천. 9집의 클럽 콘서트들에서는 두 버전을 섞었다. "너를 싫어해서가 아니야~"한 뒤 브라스 연주에 감동을 받을 찰나 그 감동을 산산이 부서지게 만드는 락버전의 기타리프로 락버전 시작.
- 서태지가 무가지 <BOUNCE>[16]에서 인터뷰할 때 히든트랙용으로 이전 곡을 둘러봤는데 너에게가 가장 적당했다고 말했다. 가사가 원본 버전과 살짝 다르다.
- 너에게는 '다른 하늘이 열리고' 콘서트에서 1집의 <이제는>과 믹스 되었는데, 의외로 잘 어울린다. 또한 성시경이 리메이크해서 부르기도 했다. 앨범 버전과는 달리 TV활동 및 뮤직비디오는 아카펠라가 가미된 리믹스 버전이 사용되었다. 아직 음원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너에게 |
음..니가..아무리 지금 날 좋아한다 그래도.. |
4.6. 수시아(誰是我)
-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빠른 BPM의 노래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시아 항목 참고.
- 2집 공연 이후 다른 하늘이 열리고에서 라이브하였고, 그 뒤로 현재까지 단 한번도 라이브되지 않았다. 다만 일겅 클공 당시 베이스 강준형이 솔로로 연주한 바는 있다.
수시아 (誰是我) |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닮을 순 없네 |
4.7. 마지막 축제
-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을 때 어떤 청취자가 '마지막 축제'의 첫 부분도 타이토의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 버블보블 메인 BGM과 비슷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고 한다. 실제 '보글보글' 게임의 사운드가 BPM만 조금 더 빠를 뿐 언제나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접어 두고서 부분이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당시 DJ가 '확인해 보면 이 노래가 게임보다 더 먼저 발표되었을 것'이라며 실드를 쳐 주려고 했으나 서태지가 '게임이 먼저 출시되었다'며 쿨하게 인정했다고 한다.
- 다만 당시에는 그냥 우스갯소리 정도로 회자되었다. 오락실에 가 본 사람이면 다 아는 게임의 배경 음악이었기 때문에 당시 안티들도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갔다.[17] TV활동 및 라이브 버전이 따로 있으나 음원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 드라마 응답하라 1994 5회에서 조윤진이 음악방송 방청 장면 삽입곡으로 등장했다. 설정상 조윤진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광팬이다.
- 새로운 도전, 다른 하늘이 열리고까지 라이브되었으며 이후 오랫동안 라이브되지 않다가, 2014 가요대전 때 20년만에 재즈풍 편곡으로 라이브하였으며[18], 2015년 Quiet Night 전국투어에서 뮤지컬이 삽입된 풀 버전으로 공개됐다. 이후 25주년 콘서트에서 피아노 간주만 깔린채 불렀다.
- 2024년,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 소속 보이그룹 TWS가 이 곡의 시놉시스를 착안해 노래를 발표했다.
마지막 축제 |
언제나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접어 두고서 |
4.8. 우리들만의 추억 (Inst.)
- 앨범의 아웃트로 격의 연주곡. 3번 트랙 우리들만의 추억의 MR이다. 다만 완전한 MR은 아닌게 후렴구는 나온다.
우리들만의 추억 (Inst.) |
소리쳐 주던 예쁘게 웃었던 |
5. 트랙 리스트
5.1. CD 버전
트랙 | 제목 |
1 | Yo! Taiji |
2 | 하여가 |
3 | 우리들만의 추억 |
4 | 죽음의 늪 |
5 | 너에게 |
6 | 수시아 (誰是我) |
7 | 마지막 축제 |
8 | 우리들만의 추억 (Inst.) |
재발매판 추가곡 | |
9 | Opening (The Taiji Boys) ('93마지막 축제) |
10 | 마지막 축제 ('93마지막 축제) |
11 | 수시아 (誰是我) ('93 마지막 축제) |
12 | 우리들만의 추억 Part 1 ('93마지막 축제) |
13 | 우리들만의 추억 Part 2 ('93마지막 축제) |
14 | 93' 하여가 Remix (Hiphop Ver.) |
15 | 죽음의늪 (‘04 Zero Live) |
16 | 93' 하여가 (TV Edit.) |
5.2. Tape 버전
트랙 | 제목 |
Side A | |
1 | Yo! Taiji |
2 | 하여가 |
3 | 우리들만의 추억 |
4 | 죽음의 늪 |
5 | 우리들만의 추억 (Inst.) |
Side B | |
1 | 너에게 |
2 | 수시아 (誰是我) |
3 | 마지막 축제 |
6. 제작진
프로듀서: 서태지작사 & 작곡 & 편곡: 서태지
레코딩.믹싱 스튜디오: Techno Taiji Studio
사진: 유재학
디자인: Ivy 프로덕션
7. Special Thanks To
침묵의 지난 200여 일은 최선의 과정을 담아내기 위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되어 우리를 지켜 주었던 팬 여러분의 사랑과 정성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이 앨범을 바칩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되어 우리를 지켜 주었던 팬 여러분의 사랑과 정성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이 앨범을 바칩니다.
8. 여담
- 소속사를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들이 직접 돈 내고 차린 "요요기획"으로 옮기면서 셀프프로듀스 방식을 채택했다. 사실 정규 1집만 타 기획사 소속으로써 발매하였고[19], 1집 발매 후 나온 리믹스 앨범이자 라이브 콘서트 앨범인 "테크노믹스 & 라이브"부터는 모두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자체의 자가 프로듀스로 바뀌었다. 물론 음반 배급사는 데뷔 때부터 해체 때까지 배급을 맡았던 반도음반.
- 2010년 음악웹진 100BEAT가 선정한 1990년대 100대 명반에서 28위에 랭크되었다.
- 2013년 응답하라 1994가 방영되면서 하여가는 오프닝 곡으로 나왔으며, 너에게가 OST 리메이크 곡으로 실렸고 성시경이 노래를 불렀다.[20] 서태지가 이례적으로 자필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 이 당시에 나름 일본 활동을 했다. 일본에서 열린 음악 행사에 출연한 자료가 유튜브에 발견된다.
- 이후 일본의 소니 안티노스 레이블과 정식 계약을 맺고, 1집과 2집 주요 곡을 합친 일본반과 3집이 발매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서태지를 접한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 블로그 글은 2018년 시점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을 듣고 느꼈던 바를 회상하는 글인데, 대담한 악곡의 접근법이 지금 들어도 신선하다(あまりにも大胆に攻めた楽曲アプローチは今聴いてもかなり新鮮です。), 현재의 케이팝의 문을 열여 젖혔다(現在につながるK-POPの扉をこじ開けたんじゃないかという気もします。)라는 감상을 남긴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블로거는 '비영어권 음반의 중요한 록 앨범 101장'이란 주제로 시리즈 글을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이었다.
そして今回のラストを飾るのは韓国です。アーティストは、ソテジ&ザ・ボーイズ、ハングル読みだとソテジ・ワ・アイドゥルです。
그리고 이번에 (연재)의 라스트를 장식하는 것은 한국입니다. 아티스트는 서태지 & 보이즈, 한글로 읽으면 서태지와 아이들입니다.
韓国でのロック史は1960年代から始まっていたとは聞きます。さらに言えば韓国のポップ・ミュージックのオールタイムでも、80年代のバンドが上位に入ったりもします。ただ、僕もそれらの情報を頼りに聞いてはみたものの、なんか日本におけるニュー・ミュージックみたいというか、その域にまでもいかない感じで、まだ80年代までなら「ロックはまだ難しいかな」と思える瞬間も決して少なくなかったです。
한국의 록 역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덧붙이자면 한국 대중음악 전성기에서도 80년대 밴드가 상위권에 들었다고 합니다. 다만 저런 정보를 접한 제가 느끼기에도, 뭔가 일본의 뉴 뮤직 같은 경지까지는 아니라는 느낌이라, 80년대라면, '록은 아직 어려운 것이었나'라고 생각한 순간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そんな韓国がポップ・ミュージックの立場を一気に逆転させる契機が90sの前半に訪れます。それがソテジ・ワ・アイドゥルでした。彼らは90sの初頭に、当時アメリカでかなり人気に火がつきつつあったR&Bやヒップホップのサウンドを韓国のポップ・ソングに大胆に取り入れ、結果的にそれが韓国のポップ・ミュージックそのものを大きく変えてしまうことになります。
그런 한국이 팝 음악의 입장을 단숨에 역전시킨 계기가 90년대 전반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90년대 초에 당시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에 불이 붙었던 R&B나 힙합의 사운드를 한국의 대중음악에 대담히 도입해 결과적으로 그것이 한국 대중음악 그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とりわけ、93年に発表されたこのセカンド・アルバムからのシングル「ハヨガ」の存在は極めて大きなものでした。
그중에서도 93년에 발표된 2집 앨범의 싱글 '하여가'의 존재는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これ、この当時、友達から聞かされた時、衝撃受けましたね。 だって、この当時、日本でレッチリとかフェイス・ノー・モアって本当に限られた人しか聞いてなかった時代に、韓国では、ハードロックをサンプリングしたミクスチャー・ヒップホップが200万枚を超えるヒットになってたんだから。日本でのドラゴン・アッシュのブームの5年も前にですよ。これは驚きましたね。オケヒットの連打だけが、あの当時の日本のビーイング系みたいで、メロディもどことこなく[21]韓国っぽくはあったんだけど、あまりにも大胆に攻めた楽曲アプローチは今聴いてもかなり新鮮です。
당시 친구로부터 이 앨범을 접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든가 페이스 노 모어 등은 정말로 한정된 사람들만 들었던 시절인데, 한국에서는 하드록을 샘플링한 믹스츄어 힙합이 200만 장 넘게 히트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드래곤 애쉬 붐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Orchestra hit(오케스트라 효과를 내는 사운드 이펙트)의 연타만이 당시 일본의 '빙 계열' 같으며, 멜로디도 어딘지 모르게 한국 느낌이 있었습니다만, 너무나도 대담하게 치고 나오는 악곡의 접근은 지금 들어도 신선합니다.
実際、韓国ではこれ以降、アイドルがアメリカの最新型のR&Bやヒップホップを意識したポップスを歌うことがお家芸となりました。そう考えると、ソテジのこれこそが、現在につながるK-POPの扉をこじ開けたんじゃないかという気もします。
실제. 한국에서는 이후 아이돌이 미국의 최신형 R&B나 힙합을 의식한 대중음악을 부르는 일이 자신의 장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태지야말로 현재로 이어지는 케이팝의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연재)의 라스트를 장식하는 것은 한국입니다. 아티스트는 서태지 & 보이즈, 한글로 읽으면 서태지와 아이들입니다.
韓国でのロック史は1960年代から始まっていたとは聞きます。さらに言えば韓国のポップ・ミュージックのオールタイムでも、80年代のバンドが上位に入ったりもします。ただ、僕もそれらの情報を頼りに聞いてはみたものの、なんか日本におけるニュー・ミュージックみたいというか、その域にまでもいかない感じで、まだ80年代までなら「ロックはまだ難しいかな」と思える瞬間も決して少なくなかったです。
한국의 록 역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덧붙이자면 한국 대중음악 전성기에서도 80년대 밴드가 상위권에 들었다고 합니다. 다만 저런 정보를 접한 제가 느끼기에도, 뭔가 일본의 뉴 뮤직 같은 경지까지는 아니라는 느낌이라, 80년대라면, '록은 아직 어려운 것이었나'라고 생각한 순간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そんな韓国がポップ・ミュージックの立場を一気に逆転させる契機が90sの前半に訪れます。それがソテジ・ワ・アイドゥルでした。彼らは90sの初頭に、当時アメリカでかなり人気に火がつきつつあったR&Bやヒップホップのサウンドを韓国のポップ・ソングに大胆に取り入れ、結果的にそれが韓国のポップ・ミュージックそのものを大きく変えてしまうことになります。
그런 한국이 팝 음악의 입장을 단숨에 역전시킨 계기가 90년대 전반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90년대 초에 당시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에 불이 붙었던 R&B나 힙합의 사운드를 한국의 대중음악에 대담히 도입해 결과적으로 그것이 한국 대중음악 그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とりわけ、93年に発表されたこのセカンド・アルバムからのシングル「ハヨガ」の存在は極めて大きなものでした。
그중에서도 93년에 발표된 2집 앨범의 싱글 '하여가'의 존재는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これ、この当時、友達から聞かされた時、衝撃受けましたね。 だって、この当時、日本でレッチリとかフェイス・ノー・モアって本当に限られた人しか聞いてなかった時代に、韓国では、ハードロックをサンプリングしたミクスチャー・ヒップホップが200万枚を超えるヒットになってたんだから。日本でのドラゴン・アッシュのブームの5年も前にですよ。これは驚きましたね。オケヒットの連打だけが、あの当時の日本のビーイング系みたいで、メロディもどことこなく[21]韓国っぽくはあったんだけど、あまりにも大胆に攻めた楽曲アプローチは今聴いてもかなり新鮮です。
당시 친구로부터 이 앨범을 접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든가 페이스 노 모어 등은 정말로 한정된 사람들만 들었던 시절인데, 한국에서는 하드록을 샘플링한 믹스츄어 힙합이 200만 장 넘게 히트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드래곤 애쉬 붐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Orchestra hit(오케스트라 효과를 내는 사운드 이펙트)의 연타만이 당시 일본의 '빙 계열' 같으며, 멜로디도 어딘지 모르게 한국 느낌이 있었습니다만, 너무나도 대담하게 치고 나오는 악곡의 접근은 지금 들어도 신선합니다.
実際、韓国ではこれ以降、アイドルがアメリカの最新型のR&Bやヒップホップを意識したポップスを歌うことがお家芸となりました。そう考えると、ソテジのこれこそが、現在につながるK-POPの扉をこじ開けたんじゃないかという気もします。
실제. 한국에서는 이후 아이돌이 미국의 최신형 R&B나 힙합을 의식한 대중음악을 부르는 일이 자신의 장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태지야말로 현재로 이어지는 케이팝의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나 싶습니다.
それもそのはず、メンバーの一人だったヤン・ヒョンソクは96年の解散以降にプロデューサーに転向し、YGエンターテイメントを立ち上げます。そこでBIG BANGや2NE1などを成功させ、K-POPブームを牽引したわけですからね。既にその種子はこの時点で蒔かれていたのです。
그도 그럴 것이, 멤버였던 양현석은 96년 해체 이후 프로듀서로 전향해 YG엔터테인먼트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빅뱅과 2NE1 등을 성공시켜 케이팝 붐을 견인했습니다. 이미 그 씨앗은 이 시점에서 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1] 당시엔 레코드점이 동네에 하나씩은 있었다.[2] 오히려 이런 점이야말로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이 당대는 물론 후대 아이돌 그룹에게도 영원한 넘사벽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데뷔한지 1년 된 아이돌 그룹이 기획사를 직접 차려서 앨범 프로듀싱부터 작사, 작곡, 편곡, 안무는 물론 컨셉과 활동 방침, 홍보 전략까지 모조리 자기네가 다 해먹고 그렇게 낸 앨범으로 가요계 역사에 남을 수준의 대히트를 기록한다고 생각해보자...[3] 양현석은 1993년 12월 마지막 축제 공연 당시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하기도 했다. 이주노는 1집 활동 당시 귀를 뚫은 적이 있어 경고처분을 받은 적이 있는데 2집 콘서트에서 또 귀를 뚫은 것 때문에 의상상 방송 정지.[4] 반도음반 관계자 입장에서 하여가는 '난 알아요'보다 더 알아듣기 힘든 랩 속도에 뜬금없어 보이는 태평소 소리, 곡 후반부에 빨라지는 BPM으로 마무리되는 구성 등으로 인해 이전 앨범 타이틀곡보다 더 이해하기 난해했던 터라 당시에 관계자들은 2집은 망할 것이란 우려를 하고 있었다.[5] 참고로 이 시절에는 미성년자의 노래방 출입은 주간에도 보호자를 동반해야 가능했다.[6] 1996년부터 지금의 SBS 가요대전으로 분리되어 실시된다.[7] 당시 방송PD가 철저히 '갑'이던 상황에서 가수는 주중 가요프로에 콜업 되면 무조건 나가다시피 해야 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런 선례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이는 1집 당시 기획사가 너무 돌려먹어서(?) 서태지로 하여금 모종의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후 전용 기획사인 요요기획을 차리고 유대영의 영기획과 결별한다.[8] 일종의 Radio Edit 버전 같은 의미도 있었을 듯. 하여가 원곡은 전체 플레이타임이 5분을 훌쩍 넘긴다.[9] 김수희의 애모 때문에 1주가 모자라 골든컵은 받지 못했다.[10] 1절은 기존 버전, 2절은 힙합 버전으로 불렀다.[11] MBC 특종TV연예에서 컴백용으로 방송되었다.[12] 당시 MBC PD였던 고재형씨가 서태지와 친분이 있었으며, 실제로 고씨는 93년 콘서트 실황의 촬영감독을 맡기도 했다.[13] 비트 자체는 Dangerous 앨범의 In the Closet과 유사하다.[14] 조용필 또한 마이클 잭슨 스타일의 비트를 자신의 곡에 도입한 적이 있는데 그 곡이 바로 조용필 7집에 수록된 '어제 오늘 그리고'이다. 비트와 코드 진행이 Billie Jean의 그것과 유사하다.[15] 도서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16] YG에서 한때 발간하던 힙합 매거진으로 약 2년 정도 내다 접었다.[17] 이는 두 곡의 멜로디 진행이 달랐기 때문이다. '언제나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접어 두고서' 다음 부분부터는 매우 다르게 전개된다. 또한 엇박자를 넣고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버블보블과는 달리 '마지막 축제'는 두고서 부분에서 서 부분에 액센트를 주어 마디와 마디가 딱 끊어지는 느낌을 준다.[18] 이때 가요대전 엔딩무대로 서태지+출연진 전원의 무대로 구성되었는데, sbs가 중간에 방송 송출을 끊고, 현장에선 노래 위에 광고가 나가는 아주 큰 방송사고를 저질렀었다.[19] 멤버 본인들의 증언으론 소속사 측에서 잡아먹을 정도로 굴려먹었다고 한다. 단독콘서트 스케쥴도 잡혔는데, 연습시간조차 부족했을 정도로 굴려먹었다고 한다. 레어한 활동사진같은 걸 찾아보면 놀이공원에서 행사 뛴 것도 나온다. 그야말로 방송 끝나면 행사한번 돌고 그 뒤로 라디오 출연하고 등등. 첫 단독 콘서트는 영 맘에 들지 않는 결과물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대로는 다음 앨범도 제대로 못나오고 쓰여질 만큼 쓰여지고 버려지겠다 싶어서 소속사를 나오고 보조스탭도 로드매니저였던 최진열을 제외하고 죄다 갈아치웠다.[20]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 중에서 최초로 리메이크된 곡이기도 하다.[21] 오타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