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958년 1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 유동(現 광주광역시 북구 유동) 37번지에서 아버지 심용섭(沈庸燮, 1915. 12. 23 ~ 1968. 1. 26)[1]과 어머니 해주 최씨 최유덕(崔有德, 1922. 1. 18 ~ 2014. 8. 9)[2]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 되던 1968년 1월 26일 별세하셨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7남매를 키웠다고 한다.가난한 형편임에도 공부를 잘해 1973년 광주제일고등학교(51회)에 진학했고, 1년의 재수[3] 끝에 197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1. 민주화 운동
광주일고 시절부터 유신반대 시위를 이끌었던 심재철은 서울대 입학 후 운동권이 되었으며 78학번 후배인 유시민과 함께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다.1980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되었고, 당시 '서울의 봄' 정국에서 신군부에 맞서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학생운동 세력의 대표인물로 떠올랐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는 서울대, 고려대 등 전국 18개 대학에서 온 학생 10만 명이 모여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하였는데, 심재철은 이때 대학 총학생회장단 대표를 맡았다. 해가 저물면서 시위대는 철야농성을 하느냐, 아니면 자진해산을 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은 철야농성을 주장했지만, 심재철은 서울대 학생처장 이수성의 권유에 따라 자진해산을 주장했고, 결국 10만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다.
'서울역 회군'을 보고 자신감을 얻은 신군부가 5.17 내란을 결행하면서 심재철은 지명수배되었고, 6월 30일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후 수경사 33헌병단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2.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24인의 피의자 중 대부분은 5월 17일에 연행되었다. 나머지는 6월 15일 이석표 체포, 6월 16일 이신범 체포, 6월17일 전국에 심재철 지명수배령이 내려지고 6월 18일 설훈, 송기원 체포, 며칠 후 이해찬, 조성우 체포, 6월 30일 심재철이 체포되었다.1988년 5공 청문회에 출석한 심재철 자신이 검찰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거짓 자백을 했으며 한통련 사건과 관련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것은 검찰측 증인으로 나온 간첩의 증언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4] 실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중 대부분이 이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책을 써 자신들이 고문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했다. [5]
심재철이 수배 중이었던 6월 17일 이미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의 학생운동 총책인 이해찬의 조종을 받아 심재철이 전국의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했다고 발표하였으며 심재철은 체포된 후 이미 발표된 내용에 꿰맞춰서 고문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거짓 진술에 의한 조작에 꿰맞춰지기 위해 심재철은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받던 다른 피의자들과 달리 치안본부 특수대에 끌려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청와대 경비를 맡고 있던 33 헌병단 군인들(최하가 무술 유단자로 구성된)에게 고문을 받았으며, 내란음모사건 피의자 중 가장 혹독하게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6][7]
최근에는 진보진영에서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심재철이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기 전에는 아무도 심재철을 배신자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복학 이후 복학생협의회에 참여했고 1988년 5공 청문회 당시에도 야당 측 증인으로 증언했다. 심재철은 1995년에도 5.18 단체들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5.18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당시 5.18 단체와 교류했다. 결론적으로 1980년의 행적으로 심재철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
2019년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TV 방송에 출연하여 서울의 봄 당시를 이야기 했는데, 심재철이 당시의 진술서 전문을 공개하며 본인 뿐만 아닌 당시 사건에 연루된 여러 인물들이 민주화 인사들을 실토하여 목에 칼을 겨눈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유시민은 누구도 심재철의 당시 신군부의 합동수사본부의 조사 진술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임이 분명했기에)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는데, 배신자 프레임을 받아 많이 억울한 것 같다고 말했고, 심 의원과 서울대 77학번 동기인 유기홍 전 민주당 의원은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나도 합수부로 끌려갔지만, 당시 비공개 지도부 '무림'의 일원이었던 내 신분은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유시민은 모든 일을 밖으로 드러나 있던 공개 지도부로 돌리고 비공개 지도부를 성공적으로 지켜냈다"며 심 의원을 비판했다. #
앞서 서술한 것처럼 서울의 봄 직후 신군부 합동수사본부가 자행했던 고문을 동반한 수사는 김대중과 야당 주요 정적들을 내란 음모 혐의로 몰아 제거하며, 본인들의 불법적인 정권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1.2.1. 전문가의 평가
5.18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권위자인 김영택 박사의 저서인 '5월 18일, 광주 -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에서 김영택 박사는 서울역 회군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신군부의 정권 탈취 음모를 피한 것으로 서술하기도 했고 심재철을 전혀 배신자로 서술하지 않았다.진보 성향의 한인섭 교수도 심재철에게 잘못이 없다고 설명했다.
[유시민, 심재철, 1980]
전두환이 권력장악의 완성수순으로 5.17. 비상계엄 확대하고, 예비검속하여 재야, 정치, 학생들을 엄청 잡아갔고, 어마어마한 고문과 장기불법구금을 자행했다. 그때 조서도 작성하고, 자술서도 쓰게 한다. 말이 자술서이지, 강제타술서와 실질적으로 같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민주화된 뒤에, 그때 자술서는 뭐라 썼든 법정증거로 배척된다. 고문과 강압에 의해 쓴 것이므로.
그런데, 그때 그 자술서에 뭘 담았느냐, 혹 동료를 고자질한 게 아니냐고 뜬금없이 논란되고, 옆에서 불불이는 사람도 있다. 정리한다.
1. 그 자술서는 강제타술서임. 자발성 전혀 없음.
2. 어떻게 썼든 당시 학생, 정치, 재야운동의 동향은 전두환 군부의 정보망에 이미 다 들어 있었음.
3. 그 자술서대로 사건윤곽 잡은 게 아니고, 첨부터 군부가 짠 프레임에 억지 끼워 맞추는 것이었음. 유. 심이 뭐라 주장하든 상관없음. 신군부집권에 가장 유리한 프레임대로.
4. 민주화 이후 재심과정에서, 1980 서울의봄, 5.17, 5.18과 관련된 모든 구속.유죄건은 무죄판결로 바뀌었음. 그때 고문정권은 내란죄로 단죄된 것이고.
5. 그러니 거기서 뭘 썼든, 그런 것 갖고 상대 흠집내기나 비난할 게 전혀 못됨.
마지막으로 남는 건, 그때 한 글자도 쓰지 않고 버텨야지, 동료 이름은 절대 쓰지 말아야지... 그래야 투사이고, 민주화운동가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그런 아쉬움의 찌꺼기 같은 것... 그런데 그건 사람이 아니라 감각 없는 좀비인간. 기계인간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둘 다 극도의 폭력과 위축감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고 본다. 몇십 년 뒤의 정치노선 갖고, 소급해서 그때 누가 잘못했니 하는 비난자료로 쓰지 말 일이고.
나는 독재시대 재판자료, 변론자료 많이 정리하고 책도 내고 했다. 자술서도 자주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자술서에 타인에게 불리한 내용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 사람도 별수 없네, 이렇게 독해하지 않는다. 그 분이 얼마나 고초에 시달렸으면, 안 쓰고 견딜 수 없었구나. 이 고문한 나쁜 놈들... 이렇게 판독하면서, 그때 그의 고통을 같이 느껴보려 애쓴다. 자술서의 내용은 고문의 심각성을 재는 바로미터다. 유, 심의 강제타술서에 뭔가 마뜩잖은 몇 줄을 찾아낸다 해도, 그건 고초/고문의 정황증거이지, 그들이 밀고자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술서 다 공개해서 대중에게 판단 받으라는 말도 한다. 30년 전의 타술서를, 당시의 공포스런 수사환경도 잘 모르면서, 사건 맥락도 모르면서, 정치공격용으로만 악용될 그 자료를 호기심의 먹이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에 반해 강제로 쓴 글로 당시 피해를 봤는데, 다시 30년 뒤 반양심분자로 공격하기 위해 그자료를 공개하라고? 이중의 참혹함이요, 안 될 말이다.
난 1980년 때 대학 4학년이었고, 대학신문 기자였으므로, 유/심의 활동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었다. 둘 다 훌륭했고, 멋있었고, 닥쳐올 고난의 불안 속에서도 각오하고 임한 학생리더였다. 1980.5.17 이전의 그들의 행적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후 수사.법정에서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 고초에 대해 함께하지 못했음에 미안하고, 그리고 이후의 정치행적은 각자 판단받을 대목이다.
요컨대, 1980년 정보부, 보안사에서 쓴 강제타술서는 개개인의 인간됨 여부를 평가할 자료 자체가 될 수도 없는 것이고, 타술서를 강제한 군부집단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인권유린자였는지 확인하는 자료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한인섭, 유시민, 심재철, 1980 #
전두환이 권력장악의 완성수순으로 5.17. 비상계엄 확대하고, 예비검속하여 재야, 정치, 학생들을 엄청 잡아갔고, 어마어마한 고문과 장기불법구금을 자행했다. 그때 조서도 작성하고, 자술서도 쓰게 한다. 말이 자술서이지, 강제타술서와 실질적으로 같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민주화된 뒤에, 그때 자술서는 뭐라 썼든 법정증거로 배척된다. 고문과 강압에 의해 쓴 것이므로.
그런데, 그때 그 자술서에 뭘 담았느냐, 혹 동료를 고자질한 게 아니냐고 뜬금없이 논란되고, 옆에서 불불이는 사람도 있다. 정리한다.
1. 그 자술서는 강제타술서임. 자발성 전혀 없음.
2. 어떻게 썼든 당시 학생, 정치, 재야운동의 동향은 전두환 군부의 정보망에 이미 다 들어 있었음.
3. 그 자술서대로 사건윤곽 잡은 게 아니고, 첨부터 군부가 짠 프레임에 억지 끼워 맞추는 것이었음. 유. 심이 뭐라 주장하든 상관없음. 신군부집권에 가장 유리한 프레임대로.
4. 민주화 이후 재심과정에서, 1980 서울의봄, 5.17, 5.18과 관련된 모든 구속.유죄건은 무죄판결로 바뀌었음. 그때 고문정권은 내란죄로 단죄된 것이고.
5. 그러니 거기서 뭘 썼든, 그런 것 갖고 상대 흠집내기나 비난할 게 전혀 못됨.
마지막으로 남는 건, 그때 한 글자도 쓰지 않고 버텨야지, 동료 이름은 절대 쓰지 말아야지... 그래야 투사이고, 민주화운동가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그런 아쉬움의 찌꺼기 같은 것... 그런데 그건 사람이 아니라 감각 없는 좀비인간. 기계인간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둘 다 극도의 폭력과 위축감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고 본다. 몇십 년 뒤의 정치노선 갖고, 소급해서 그때 누가 잘못했니 하는 비난자료로 쓰지 말 일이고.
나는 독재시대 재판자료, 변론자료 많이 정리하고 책도 내고 했다. 자술서도 자주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자술서에 타인에게 불리한 내용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 사람도 별수 없네, 이렇게 독해하지 않는다. 그 분이 얼마나 고초에 시달렸으면, 안 쓰고 견딜 수 없었구나. 이 고문한 나쁜 놈들... 이렇게 판독하면서, 그때 그의 고통을 같이 느껴보려 애쓴다. 자술서의 내용은 고문의 심각성을 재는 바로미터다. 유, 심의 강제타술서에 뭔가 마뜩잖은 몇 줄을 찾아낸다 해도, 그건 고초/고문의 정황증거이지, 그들이 밀고자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술서 다 공개해서 대중에게 판단 받으라는 말도 한다. 30년 전의 타술서를, 당시의 공포스런 수사환경도 잘 모르면서, 사건 맥락도 모르면서, 정치공격용으로만 악용될 그 자료를 호기심의 먹이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에 반해 강제로 쓴 글로 당시 피해를 봤는데, 다시 30년 뒤 반양심분자로 공격하기 위해 그자료를 공개하라고? 이중의 참혹함이요, 안 될 말이다.
난 1980년 때 대학 4학년이었고, 대학신문 기자였으므로, 유/심의 활동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었다. 둘 다 훌륭했고, 멋있었고, 닥쳐올 고난의 불안 속에서도 각오하고 임한 학생리더였다. 1980.5.17 이전의 그들의 행적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후 수사.법정에서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 고초에 대해 함께하지 못했음에 미안하고, 그리고 이후의 정치행적은 각자 판단받을 대목이다.
요컨대, 1980년 정보부, 보안사에서 쓴 강제타술서는 개개인의 인간됨 여부를 평가할 자료 자체가 될 수도 없는 것이고, 타술서를 강제한 군부집단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인권유린자였는지 확인하는 자료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한인섭, 유시민, 심재철, 1980 #
심재철의 '자백' 자체는 고문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비난 받야할 이유가 전혀 없기도 했고, 실제 전문가들에게 비난 받지도 않았다.
1.3.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심재철이 군사정권 당시 독재와 싸운다는 미명하에 서울대 학내에서 프락치로 의심되는 자교 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생[8] 등 4명을 붙잡아 가두고 폭행했다는 피해자의 발언이 있었다. 당시 프락치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실형을 받았으나, 심재철은 당시 4학년으로서 기자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명목으로 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이는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경향신문.1984.10.5.11면
그러나 월간조선의 2006년 2월 기사를 보면 폭행 가해자들의 진술에서 유시민 이외에 심재철의 이름도 함께 나오는 것이 확인된다.
심 의원이 해당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2006년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 후보의 청문회 당시 프락치로 몰려 고문을 당했던 전기동이 기자회견에서 한 주장 때문이다. 전기동은 "나를 프락치로 몰았던 사람이 장관이 되면 안 된다"며, 1인 시위를 하여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에서 이 사건에 주목했다.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전기동을 유시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신청하였는데, 거부 당하자 대신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시민에게 폭행당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라"고 하자, 전기동은 "유시민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럼 누가 폭행했냐"고 묻자 "현직 한나라당 의원이자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 의원이 폭행에 가담했다."고 발언했다.
당시 전기동의 주장은 "나는 프락치가 아님에도 여러 사람이 나에게 폭행을 가했고, 유시민은 폭행이 일어날 때 마다 자리를 피했다가 끝나고 나타나는 등,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나를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폭행 가담자들에게 나를 돌려 보내라고 지시하였다."고 하였다.
만약 당사자의 주장대로 심재철이 정말 폭행에 가담했다면 직접 폭행하지 않고 지시만 한 유시민도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던 것에 비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사실 기자회견을 연 이유는 유시민의 보건복지부장관 낙마를 위한 것이였으니. 거기서 뜬금 없이 심재철도 가담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이 기대했던 것과는 돌발적 발언 때문에 기자회견은 황급히 끝나버렸다.[9] 애초 전기동은 이후 입을 꾹 닫았고, 피해자가 거기서 허위증언을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허위주장을 했다간 나중에 위증 혐의로 잡혀갈 수도 있을테니까..
심 의원 측은 황당한 허위사실 주장이고, 해프닝에 불과하니 법적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2. 교육 및 언론활동
이후 1985년 교사에 임용되어 동대문여자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지내다가 MBC에 입사하였다. MBC방송국 보도국 기자를 지냈으며 1988년 방송사 최초 MBC노조를 만들어 초대 전임자를 지냈고 1992년 MBC방송민주화 투쟁 중 업무방해·노동쟁의조정법, 징역8월·집유2년 (1993.1.20)을 선고받는다.[10]당시의 상황은 이미 군부 독재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결정적으로 집행유예는 말 그대로 집행을 안 한다는 뜻이니 미결수로 구치소에 수감된 시기를 옥고를 치른 것으로 한 셈이다.
△ 1988년 5공 청문회에 출석한 모습 |
기자 시절 영상
3. 정치 활동
1995년 12월에 신한국당 부대변인, 안양시 동안구 갑구 지구당 위원장울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11]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양 동안 갑에 출마했으나 가수 출신인 새정치국민회의 최희준에 밀려 낙선했다.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때 안양 동안구에 출마, 새천년민주당 이석현을 밀어내고 당선되었다. 한나라당 제3정조 위원장, 대외협력 위원장, 국무총리 후보자(이한동, 장상) 인사청문위원, 공적자금특위위원, 정책위 부의장 등을 지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안양시 동안구 을에서 재선되어 전략기획 위원장, 홍보기획 본부장, 원내수석 부대표를 지냈고,[17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선 고지에 올라 국회 윤리위 · 예결위 위원장, 경기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국회의원 모습 |
- 건국절 주장: 건국절을 주장했다. 그 이유로 "국가가 성립하려면 영토와 국민과 주권, 그리고 전 세계적인 인정, 유엔의 인정 이 같은 4가지 요건이 결합해야만 한다"며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였을 뿐"이라면서 당시는 "엄연히 일제 치하, 국토를 빼앗기고 주권이 없는 상태였지 않은가"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건국절 제정은 "대한민국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국민 투표라는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세운 바로 근대국가라는 생일을 올바르게 세우자는 그런 취지"라는 말도 덧붙였다#.
-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특위’(불법 사찰 국정조사)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4개월 동안 단 1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고 방치하면서 월 600만 원씩 1년간 받았다고 한겨레신문이 2013년 8월에 보도했다. 민간인사찰특위는 6개월 정도의 활동시한을 정한 다른 특위와 달리 ‘본회의 의결 때까지 활동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정치 공세가 반복되면서 단 한 번도 열리지 못했던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당시 심 위원장은 "저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확실히 지켰고 18대와 19대 국회에서 모두 세비 반납 운동을 주도해왔다"며 당시 특위로 받았던 활동비 전액을 국회 사무처로 반납했다.#
- 이후 MBC <PD수첩>이 '광우병' 방송을 내보내면서 자신의 발언을 비방할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보도해 명예가 훼손됐다며 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언론사의 보도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해 승소한 경우는 거의 없다.#
- 2016년 박주선과 함께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부의장 모습 |
- 이날 심재철 의원은 "대의민주주의의 심장인 국회에서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소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특히 "국회는 이념과 정쟁의 장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국민 주권과 기본권 보장을 위한 구체적 발걸음을 70년 간 해왔다"며 "20대 국회는 다양성에 기반한 더 적극적이고,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이뤄지는 민주주의 장으로 거듭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2017년 11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을 내란죄로 형사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기사 이에 대해 여당 지지층은 "문 대통령에 대해 정녕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되지, '해야 한다'고만 주장하고 정작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슨 생각인 거냐"는 비판을 던졌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향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짓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일부 보수층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른 자유한국당 의원보다 심재철이 조금이나마 낫지 않냐는 의견이다. 일단 본인이 DJ, 노무현 정부 시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의원 중 한 명이었다.
- 최근 문재인 퇴진 집회(태극기 집회)에 참여하였다.
-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피해자)로 인정돼 정부 보상금이 지급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주장해왔던 심재철 의원이 정작 자신이 5·18피해자로 인정돼 3,500만원의 보상금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표리부동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광주시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포함해 5·18 피해자에 대한 보상 과정에서 신청서를 내지 않은 관련자를 포함시키는 일괄보상은 이뤄진 적이 없다"고 설명했고,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의 서류를 모두 확인했는데 신청서에 본인들의 도장이나 서명이 다 돼 있다면서 신청서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1998년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심의위원회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24인에 대해 일괄보상을 실시했기 때문에 심재철 의원이 직접 5.18 피해자 보상 신청을 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참고로 심 의원 말고도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이 이 명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유는 가짜 유공자가 있다는 주장이다. # ##[15]
-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된 이후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3.1.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원내대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선출 |
2019년 12월 9일 열린 자유한국당 원내 대표 경선에서 결선 투표 결과 106표 중 52표를 획득하며 나경원의 뒤를 이어 자유한국당의 4대 원내대표 자리에 올랐다.# 국회부의장까지 지냈던 5선 의원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원내대표가 됐는데, 2004년 17대 국회 초반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 이후 보수정당 최다선 원내대표라고 한다. 보통 5선 정도면 당 대표급이며[18] 국회의장 경선에 나가도 태클 안 걸리는 의원선수[19]다.
문희상 의장 여당 같이 찍은 모습 |
부임하자마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및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패스트트랙 정국을 맞이했는데 기껏 원내대표로서 처음 가져온 협상안이 의원 총회에서 부결되는 굴욕[20]을 당하고 황교안 대표와 함께 강경 투쟁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을 필두로한 4+1 협의체가 이미 과반을 확보한 상황이라 표 대결로는 이를 막기 힘들었으며 2016년 민주당이 진행해 호평을 받았던 필리버스터도 시도했지만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임시국회 기간을 짧게 쪼개는 방식으로 대응한데다가 4+1 협의체 의원들이 오히려 그 기회에 찬성 토론에 나서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20년 2월 18일, 자유한국당이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 및 보수 시민단체와 미래통합당으로 신설 합당하게됐는데 그 과정에서 지도부는 자유한국당 지도부를 유지하기로 하면서 미래통합당에서도 초대 원내대표를 맡게 됐다.
하지만 4월 15일 열린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초선 비례대표 출신인 이재정 후보에게 무려 12%p 차이로 완패하면서 졸지에 원내대표직을 20대 국회가 끝나는 5월 29일, 취임 6달만에 내려놔야 하는 상황이 되어 결국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일단 당장의 원내대표 사퇴를 거부하고 당대표였던 황교안 대표가 총선 패배를 책임지고, 사퇴하면서 당대표 권한대행 직을 맡게 되었다.#
선거 참패 수습을 위해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려했지만 조경태 최고위원 등 당내 반발과 김종인 전 위원장의 거부로 무산되었고 결국 5월 8일 선출된 후임 원내대표에게 공을 넘겼다.#
3.2. 21대 총선 낙선 이후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오세훈 캠프에서 지원 유세를 했다.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예비후보로 나섰으나 결국 김은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퇴했고#, 김은혜는 경선에서 유승민을 꺾고 본선에 진출했지만 결국 낙선했다.[21]
2022년 12월에는 안양시 동안구 을 지역을 떠나 인근지역인 의왕시·과천시 지역구로 옮겨 당협위원장으로 공모했지만 최기식 검사에게 밀려 탈락하였다.
2024년 22대 총선을 앞둔 2023년 12월 다시 안양시 동안구 을로 돌아와 공천을 신청한 뒤 2024년 3월 1일 경선을 거쳐 윤기찬 변호사를 꺾고 공천을 받게 되었지만 본선에서 또 다시 현역인 이재정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행정동 전체를 통들어서 범계동, 갈산동 두 곳에서만 이기고 나머지는 모두 이재정 의원에게 패했다. 출구조사에서만 봐도 무려 20%p 차이로 밀리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지만# 그래도 출구조사 격차를 줄이는데 성공했는지 오히려 4년 전보다 4.4%를 더 득표하며 나름대로 체면치레는 했다. 심재철 본인을 포함해 안양에서 또 국힘이 전멸하며 안양시가 민주당의 텃밭이 되었음만 다시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6년 15대 총선부터 동일 지역구에서만 8회 연속으로 공천되는 기록을 세웠다.
2024년 6월 21일, 국민의힘 경기도당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010년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 경기도당 위원장을 역임하고 다시 한번 경기도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 일명 심용섭(沈鎔燮).[2] 최영(崔泳)의 딸이다.[3]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9050700028284816[4] 출처: 김영진, 충정 작전과 광주항쟁(上) P126, 「동광출판사」[5] 2000년 10월 이문영, 한승헌, 이해동, 송기원, 설훈 책머리에서 (문이당,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진실, 2002) 中 "1980년에 취조받았을 때 무죄한 김대중 씨를 내란의 괴수로,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내란자로 허위자백한 것입니다. 혹독한 고문에 의한 것이지만 비록 죽더라도 안 한 것을 안 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약함입니다."[6] 김종완, 군화발에 짓밟힌 민주화의 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7] 김상현, 내가 겪은 80년, 그리고 광주 p219,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진실, 문이당 2002[8] 당시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서울대학교의 부속 기관이었다. 서울대로부터 독립한 것은 1982년 2월 15일부터이다.[9] 나중에 월간조선은 폭행 가해자들의 진술서를 확보했는데, 거기서 심재철 이름이 2번이 등장하긴 한다.[10] 개인 홈페이지 참고.[11] 당시 민주당계에서는 민주정의당의 후신이었던 신한국당에 입당한 것을 배신이라며 비난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한 이후 김영삼이 당을 장악했고, 문민정부 출범 이후 민정계는 외곽으로 밀려나다 YS에 협조적이던 신민주계를 제외하면 일부는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는 등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개편될 때는 민주정의당의 색채는 꽤 빠진 뒤였다.[17대] 총선에는 한나라당이 경기도에서 거의 궤멸을 당한 선거되도,과반수 넘는 득표율로 살아남았다.[13] 첨언하자면 상대적으로 등뼈나 머리뼈에서 멀리 떨어진 부위는 아무리 광우병 걸린 소의 것이라도 위험성이 낮긴 하다. 그러나 도축장 위생관리나 유통과정에서 위험부위와 섞일 수 있으므로 '절대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다.[14] 게다가 부정문이 아니기 때문에 문법상 '절대'가 올 수 없다.[15] 1998년 광주시에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신청’을 한 뒤 심사를 거쳐 ‘연행·구금’ 분야 피해자로 인정됐다고 한다.[16] 동시에 이종걸, 이석현, 심재철로 구성되었던 안양 3대장 시대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이석현이랑 이종걸은 당내 후보를 정하는데서 떨어졌지만, 심재철은 후보 확정은 되었다는 것이다.[17] 비슷한 케이스로는 경기도 북부지역인 의정부시 인데 갑 지역인 문희상 의원이 6선, 을 지역인 홍문종 의원이 4선 총 안양시(안양시는 이석현 6선+이종걸, 심재철 5선=16선) 못지 않게 10선을 자랑하는데, 이번 21대 총선에서 문희상 의원은 국회의장 끝으로 불출마 및 정계 은퇴 선언했고, 홍문종 의원은 임기 도중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극우정당인 우리공화당을 거쳐, 친박신당을 창당해 지역구가 아닌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나 낙선해 의정부시도 안양시와 마찬가지로 유력거물 다선의원에서 정치신인 초선의원으로 물갈이 되었다.[18] 추미애가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낼 당시 의원선수가 5선이다. 그 이전에 문희상이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을 지낼 당시 선수도 5선이었으며, 김한길이 민주당 대표를 지낼 당시 선수는 4선. 황우여, 김무성이 새누리당 대표를 지낼 때도 5선이었다. 예외적으로 문재인은 초선 시절, 안철수와 이재명은 초·재선 시절, 박근혜도 재선 시절에 당 대표를 지냈지만 이들은 대권주자였다.[19] 19대 국회 하반기 새누리당 국회의장 경선 당시, 후보자였던 정의화, 황우여 의원 둘 다 5선 의원이었다.[20] 여담이지만 전임 나경원 원내대표도 임기 초반 같은 일을 겪었다.[21] 참고로 그 김은혜를 꺾고 도지사에 당선된 김동연은 후술할 국가 재정정보 무단 유출 논란으로 심재철과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