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1:01

신해철/음악 활동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신해철
1. 개요2. 88~91: 데뷔초
2.1. 대마초 흡연2.2. '그대에게'에 얽힌 에피소드
3. 92~97: N.EX.T 활동4. 98~02: 솔로 활동 및 비트겐슈타인
4.1. 주다스 프리스트 역표절 사건4.2. 표절로 몰린 사건
5. 03~08, 09~14: N.EX.T 재결성6. 사망 직전의 활동
6.1. 싸이렌 음악원
7. 히트곡

1. 개요

가수 신해철의 음악활동을 담은 문서

2. 88~91: 데뷔초

파일:external/pds.egloos.com/b0016480_218297.jpg
그댄 웃으려 애를 쓰지만 하지만 왜 그렇게 슬퍼 보이나요 - 비를 맞은 천사처럼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난 포기하지 않아요 그대도 우리들의 만남에 후횐 없겠죠 -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흔들리는 사람들 한 밤의 재즈 카페, 하지만 내 노래는 누굴 위한 걸까 - 재즈 카페
Darling you're so cool to me, and I was a fool for you / 선물가게의 포장지처럼 예쁘게 꾸민 미소만으로 모두 반할 거라 생각해도 그건 단지 착각일 뿐이야 - 안녕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 나에게 쓰는 편지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무한궤도의 리드 보컬 & 기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집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발매한 후 무한궤도를 해체하고 솔로로 활동하게 된다. 솔로 활동 당시 그의 포지션은 믿기 힘들게도 아이돌. 하지만 놀랄 것도 아닌 것이 신해철 외에도 그 이후로 등장한 신승훈, 이승환, 윤상도 처음에는 아이돌 위치에 있을 정도로 소녀 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1] 이 문단 최상단에 보이는 신해철의 흑역사인 눈사람 인형을 든 금지짤을 보라. 대학가요제 당시 Fuck You 스크린샷도... 다만 Fuck you 스크린샷의 경우 의도적인 게 아니라 본의 아니게 기타 피크 때문에 손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파일:external/img.maniadb.com/121565_3_f.jpg

1집 자켓이다.

아이돌 시절 찍은 신발 광고를 고스트스테이션(혹은 고스트네이션) 게시판에 올리면 처절한 응징을 가하기도 했다. 그 광고를 개인은 흑역사 취급. 슬픈 표정 하지마. 타이거가 있으니까 SNL코리아 출연할 때 신발 광고 틀어주니까 "쫌~!!!" 하고 절규했다.

대학가요제가 끝나자 음반사 관계자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솔로 할 거지?" 하고 제안을 했으나, 밴드를 하고 싶던 신해철은 영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해서 맺어진 계약이 그룹으로 활동을 하고, 그룹이 해체되면 남은 계약 기간을 신해철이 솔로로 이행한다는 것. 결국 음반사가 내다본 대로 무한궤도는 얼마 못 가서 해체했고 신해철의 솔로 앨범이 나오게 되었다.(쟈켓)

솔로로 데뷔한 신해철은 당시 국내 최초로 영어 랩이 들어간 댄스 곡 "안녕"과 발라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등 히트곡을 여럿 내며 인기 가수로 자리 잡는다.

솔로 2집 Myself의 경우 전곡 작사 작곡 및 연주를 하며 뮤지션의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면서도 흥행에도 성공한 훌륭한 앨범을 만들어 낸다. 이 앨범은 한국 가요사 100대 명반에 선정되기도 했다.

참고로 신해철은 이 이후부터 넥스트 활동기까지 발라드 가수로 활동했던 시절을 흑역사 아닌 흑역사로 여기고 있는데, 대학가요제 대상 이후 신해철에게 영입 제의를 했던 소속사 대부분이 신해철의 솔로만을 고려했었기 때문이다. 록 음악과 밴드 활동에 적지 않은 애착[2][3]을 가지고 있었던 신해철은 수익금 배분 구조부터 하고픈 음악과 그에 대한 연예 활동까지 전반적으로 이들보다 상당히 낮은 조건에, 최소한 1집은 밴드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소속사였던 '대영기획'[4]과 장기 계약을 했었다. 원래 소속사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꺼렸었다. 신해철의 소속사였던 대영AV는 소속사 연예인들의 계약 문제나 수익 배분 구조에 대해 말이 많았다. 문제는 이게 대영AV가 망한 후에야 알려졌다는 것. 그런데 MBC 고스트네이션 방송 중 자신의 음악적 이야기를 하던 특집에서 상당히 아쉬운 말투로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전략)...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신해철이라는 불세출의 가수를 장기간 잡아둘 수 있었...(후략)..."[5]

어쨌든 이러한 솔로로 2장의 앨범을 낸 뒤, N.EX.T라는 불세출의 락 밴드를 결성하여 밴드 활동을 시작한다.

2.1. 대마초 흡연

1989년 무한궤도 시절[6]과 1993년[7]에 각각 2번의 대마초 흡연 경력이 있지만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사실 팬들도 오래된 일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엄연히 범법 행위다. 대마를 흡연한 동기에 대해서는 수필을 통해서 밝힌 적이 있었다.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니 필독.

신해철은 신검에서 4급 판정을 받았다. 사실 신해철은 1992년 4월 경부고속도로에서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어릴 적 한 번 탈구된 적 있던 어깨가 또 탈구되어 수 차례 재검을 받았었는데, 당시 몇몇 연예인들의 병역 회피가 논란이 되자 높으신 분들이 군대 가라고 하도 부추겨서 어쩔 수 없이 방위병으로 입대했다고 한다. 출처는 신해철 본인이 2000년대 초반 신해철닷컴에 올렸던 글.

그래서 군대를 방위(지금의 상근예비역에 해당하나 복무기간이 매우 짧다-공익과는 다르다.)로 갔는데 대마초를 흡연한 게 걸려서 징역을 산 후에 불명예 제대를 했다. 그렇지만 본인은 방송에서 "의가사 제대"라고 둘러 말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의가사 제대가 맞기는 맞다. 의가사 제대 사유가 흔히 알려진 생계곤란 외에도 복무 부적응 등 여러가지 항목이 있으며, 신해철의 경우 '의가사 전역'이라고 찍혀있다. 참고로 이병 전역인 공익과는 달리 당시의 방위는 상병 전역이었지만 신해철의 경우 중도에 전역하였으므로 일병 전역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사건 이후 재기의 의지를 다지며 쓴 곡이 넥스트 2집의 'The Dreamer'다. 팬들도 아끼고 사랑하는 곡 중 하나로, 라이브 때는 발라드 메들리의 핵을 담당한다.

훗날 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찬조 연설을 할 때, 한나라당에서 신해철을 대마초 관련으로 비판하니 바로 버로우타고 말았다. 그러다 한참 후 모 인터뷰에서 심경을 밝히기를 "야, 너희들 선거 캠프에 있는 애들이 대마초가 더 많거든?" 하고 깔 수는 없지 않냐며 정신승리했다. 다만, 실제 정치인들 중 마약전과가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2.2. '그대에게'에 얽힌 에피소드

'그대에게' 세대가 있다고 할 정도로 (중략) 그 세대에게는 하나의 찬가처럼 불렸던 곡이다.
SBS <한밤의 TV연예> 中 음악 평론가 임진모

1988년 MBC 강변가요제에 '아기천사' 멤버들에 끼어 출전했던 신해철은 최종 예선까지는 성공했지만, TV로 방송되는 본선 진출에는 실패하게 된다.[8]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살려 차분한 분위기의 곡이 아닌 도입부부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곡 '그대에게'를 준비하여 대학가요제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서강대 강의실에 '대학가요제 대상 받으러 간다'는 낙서를 신해철이 남겼다.

'그대에게'의 작곡 과정은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이불 뒤집어쓰고 동네 문방구에서 산 멜로디언을 훅훅 불어가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신해철은 당시 신디사이저피아노 같은 건반악기로 작곡을 해보고 싶었는데, 당시에 신디사이저가 없었던 신해철은 궁여지책으로 멜로디언을 구입했던 것.[9] 집에서는 신해철이 음악하는 것을 싫어했다. 싫어한다기보다 신해철의 노래 실력에 대한 신뢰가 제로였다. 나이 든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조영남이나 조용필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신해철은 하는 음악의 특성상 결코 가족들에게 인정받기 힘든 노래 실력이었다. '그대에게' 대학가요제 라이브만 봐도 당시 그의 노래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 부모님이 워낙 반대를 하니 그나마 신해철을 응원하던 고모가 반대를 할 때 하더라도 음악을 하는 건 보고 반대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어머님을 설득해 어머니와 고모 두 사람이 공연장에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공연을 본 이후 그나마 응원하던 고모도 반대로 돌아섰다고 라디오에서 밝힌 적이 있다. 또 피아노 학원과 학교 밴드 담당 선생님도 학부모를 불러서 음악적 재능이 없으니 공부나 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가요제에서 상까지 타니 집에서는 이제 무슨 수로 말릴꼬 하고 한숨을 쉬었다고...

이 곡은 특이하게 신디사이저가 4대나 들어간다.[11] 신해철은 비록 악기 연주는 나름대로 할 수 있고 악보도 볼 수 있었지만 따로 작곡이나 화성학 공부를 했던 것이 아니었던지라 작곡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상태였다고 한다. 멜로디언을 훅훅 불어가며 연습하다보니 우연히 도미솔로 치면 소리가 예쁘게 나온다는 걸 깨닫고 광희하면서 이걸로 작곡한 곡이 '그대에게'라고. 물론 저 도미솔은 중학교 수업시간에 배우는 다장조 으뜸화음이다...기타 코드는 알았지만 키보드의 화성 구조를 몰랐던 것이 과장됐을지도.[12]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노래로 신해철은 천재 인증을 했다. 물론 녹음이야 신디사이저로 되었다만.

또 신해철이 학교 내에 있는 밴드[13]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따로 나와 무한궤도라는 밴드를 만들게 된 데도 이유가 있다. 신해철이 보컬로 오디션을 보려 했으나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기타를 만지던 모습을 보고 동아리 선배가 바로 탈락시켰다고 한다. 본인 말에 따르면 오디션 때 기타를 치면서 담배를 피다가 중간에 기타줄 위에 담배 꽂는 퍼포먼스가 너무 멋있어서 따라했는데 건방지다고 퇴출되었다고.

그리고 무한궤도 당사자들도 딱히 엄청난 근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대학가요제 나가서 안 되면 그냥 밴드 해체하고 각자 이후는 알아서 하려고 했다고 한다. 애초에 신해철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평생 직업으로서의 뮤지션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추억 정도로 생각했고,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이후에 프로페셔널 뮤지션 활동을 계획하는 신해철과 마찰이 생겨서 당연히 해산. 멤버 중 한 명이 효성그룹 회장의 2세로 나꼼수에서 언급된 적 있는 조현문 전 부사장. 베이시스트 조형곤은 015B를 거쳐서 버클리 음악대학 유학 후 백석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장기간 재직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2020년경 급사하게 된다. 그리고 키보드를 담당한 김재홍은 치과의사로써 병원을 운영중이기도 하다.

다만 신해철 본인의 이야기로는 그래도 음악은 포기 안 했을 것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부활의 활동을 도우러 다니며 음향 세팅을 했고, 대학생 때부터 신디사이저 음향에 심취하는 등 엔지니어로서의 지식도 풍부해 설사 가수를 하지 않았더라도 관련 업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대에게' 곡의 구성도 어느 정도는 가요제 출전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이건 신해철이 '아기천사'라는 밴드로 강변가요제[14]에 나갔을 때 3차 예선에서 탈락한 이후 연구한 것이라고 한다. 무한궤도의 대학가요제 출연 순서가 거의 마지막이었는데, 이때쯤 되면 심사위원들이 지쳐서 건성으로 들을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곡 처음 부분을 강렬하고 화려하게 만들면 주목을 끌어서 심사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것. 때마침 당시 1988년서울 올림픽 시즌이었는데, 개, 폐막식 때 쓰던 조명 장비들이 일부 남아있었다. 한창 발라드붐이 일어서 1번부터 15번까지 죄다 발라드를 들고 나왔는데, 마지막에 '그대에게'를 터뜨려 당시 조명기사가 아싸리 하고 조명을 풀로 돌렸다고 한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도 큰 사고가 터질 뻔 했다. 들고 나간 신디사이저디스켓에 음원을 저장하는 방식이었다. 신해철이 당시 사용했던 아카이 X7000이라는 신디사이저[15]는 '퀵 디스크'라는 순차접근식 디스켓[16] 드라이브가 내장되어 있는데, 이 시스템은 되게 예민해서 까딱 잘못했다 하면 아주 ZOT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원래부터 이 디스켓 읽기가 잘 안 되거나 잘 깨져서 자주 말썽을 부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디스켓을 읽지 못했다. 그야말로 방송 사고가 터지기 직전. 그때 신해철은 성호를 긋고 주님의 기도사도신경을 광속으로 외우고 '20년 안에 성당 하나 지어드립죠'라고 하느님께 헬프를 요청하고 나서 디스켓을 꽂으니 제대로 읽혔다고 한다. 자칫 했으면 무대도 망치고 오늘의 신해철도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2008년 데뷔 20주년 때는 성당에 대한 일언반구 이야기도 없었다. 데뷔 22주년이 되는 2010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한참 후에 선물을 따로 준비했는데, 2004년 발매한 넥스트 5집 '개한민국'의 <예수 일병 구하기>라는 곡이 성당 대신 예수님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참고로 신해철은 사실상의 무신론자다.[17] 그때도 신해철은 성당에 잘 안 다녔다고 한다. 사실 일단은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았으니 신자이기는 한데, 성당에 거의 안 나가는 소위 '나이롱 신자'였다. 세례명아우구스티노.[18][19] 예수 일병 구하기를 들어보면 가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하나하나 돌려까고 있다.

그리고 이때 대학가요제의 심사위원이 바로 가왕 조용필이었다. 당시 조용필은 '그대에게'의 전주 "빠빠빠빠빰!"을 듣는 순간 놀라 바로 대상감으로 점찍었으며[20], 이후 신해철이 메이저 기획사에 자리잡는 데에도 여러 도움을 주었다.[21] 이 때문에 신해철은 조용필에 대해 여러모로 신세를 졌다 생각하고 있었으며, 전화도 바른 자세로 꼿꼿이 잡는다 이야기할 정도로 깍듯이 대한다. 조용필 역시 이런 신해철에 대해 "귀여운 후배다"라는 감상을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신해철의 장례식장에는 조용필의 화환이 맨 앞에 놓여있었다.

이 곡은 대학가요제 앨범에 실린 이후, 무한궤도 앨범과 1집 <슬픈표정하지 말아요>에는 실리지 못했는데, 소속사 측에서 자신들이 맡기 이전의 곡이었던 <그대에게> 가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리메이크를 거쳐 싣겠다는 신해철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솔로 2집 Myself에 리메이크되어 재록된다. 흔히 우리가 아는 그대에게는 이 버전 또는 후술할 For 문재인&안철수 버전. Myself에 리메이크되어 재록된 버전은 <응답하라 1988>의 오프닝 곡으로 쓰였으며, 응답하라 1988의 7회 <그대에게>는 아예 신해철 헌정 회차이기도 하다.

이후 넥스트 앨범에 리메이크되어 실린 적은 없지만 1997년 라이브 앨범에 라이브 리메이크에 한하여 수록되었다.

신해철은 넥스트의 해체 시점까지 이 곡을 꾸준히 라이브하였다.

넥스트 해체 이후 1999년 모노크롬 라이브 앨범에 라이브 음원이 수록되었다. 또한 2001년 비트겐슈타인 공연에서 종종 라이브했던 것으로 보이나 모노크롬 라이브 이후 라이브 음반이 발매되지 않아 이 시기의 라이브는 현재 들을 수 없다.

2002년 넥스트 재결성 이후 여러 공연에서 줄곧 <그대에게>를 부르며, 2003년경 대학가요제 라이브를 통해 리메이크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혔다.

그리고 2006년 <ReGame?>에서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리메이크된다. 히든싱어 3라운드의 그대에게가 대다수가 아는 그대에게와 진행이 조금 다른 이유.

이 이후의 그대에게는 1990년대 초의 상징곡, 신해철의 약속, 노무현을 위한 헌정곡의 위치까지 선 뒤 신해철의 사후 묘하게도 정치에 휩쓸리기도 하며 점점 괴상한 운명을 맞고 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한 달을 전후하여 급히 꾸려진 추모 무대에서 신해철이 <The Hero>와 함께 이 곡을 부르게 되는데, 그 곡과 함께 했던 멘트를 보면 신해철의 정치적 성향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대에게 문서 참조.

이렇게 불려졌던 그대에게는 2012년 노무현 대통령의 오랜 동반자이자 친구인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위한 곡으로 사용되게 되는데, 바로 <Reboot the Nation 1.0>이다. 전자음을 동원하였음에도 불구,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2006년 버전보다 완벽해졌으며, 7기 넥스트 라인업을 기획 중이었는지 이현섭의 보컬이 일부 들어가 있다.

<문재인+안철수>를 위한 헌정곡이라는 고인의 뜻과, 신해철법 제정을 위해 노력해줬던 국민의당을 기려 유가족이 안철수 후보의 유세곡으로 헌정하였으나, 조잡한 편곡으로 잠시 논란을 빚었으며, 문재인의 2012년 버전 사용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문재인은 생전의 신해철을 기리며, 신해철 3주기 때 추모식장에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의 이름으로 화환을 헌정하였다.

3. 92~97: N.EX.T 활동

파일:N.EX.T 로고.png파일:NEXT LOGO.jpg
3~4기 멤버
리더/보컬
신해철†
기타
김세황
베이스
김영석
드럼
이수용

상투 틀던 머리 위에 무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표를, 변하는 건 세상인가 사람인가, 너무 빨라 현기증만 나누나 - <Komerican Blues>
세상의 모든 좌절과 고통과 분노를 내게 다오, 영원히 마르지 않을 눈물을 알게하고 고독의 늪에서 헤매이게 하라. 그럼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게 하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 가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말하게 하라. - <껍질의 파괴>
이때가 신해철 음악 인생에서 최전성기였다. N.EX.T로서도 이때가 최전성기였다. 또한 당시 N.EX.T는 록 신 뿐만 아니라, 전체 가요계에서 최정상권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즉 정상에 서있을 때 밴드를 해체한 것.[22]

1990년대 대한민국 락의 대들보였던 N.EX.T의 보컬이 신해철이다. 사실상 신해철과 넥스트를 분리해서 논하는 것은 불가능.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욕적으로 넥스트의 활동을 기획하고 준비하였을 정도였으므로 자세한 사항은 N.EX.T 항목 참고.

4. 98~02: 솔로 활동 및 비트겐슈타인

신해철 3집 <Crom's Techno Works>

신해철 4집/Monocrom 정규앨범 <Monocrom>

라이브 앨범 <Homemade Cookies & 99 Crom Live>

비트겐슈타인 1집 <Theatre Wittgenstein Part 1: A Man's Life>

베스트 앨범 <The Best of Shin hae-Chul - Struggling>
해가 저물면, 둘이 나란히, 지친 몸을 서로에 기대어 그날의 일과, 주변 일들을, 얘기하다 편안히 잠들고 싶...어 - <일상으로의 초대>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 세상 돌아가는 꼴은 맘에 안 들지, 하지만 달리 내겐 할 일이 없다 가진 것은 남아도는 시간들 뿐 - <매미의 꿈>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말아요, 가끔씩 내게 기대도 난 무겁지 않아
기쁨과 슬픔, 그 모든 게 삶의 일부죠, 긴 세월이 지나가면 모두 다 흐릿해질 거예요 - <It's Alright>
Let the emotions flow like a stream, And we're going fly into the dream. i've got nothing, so i'm free. i haven't got anything, so i'm free. - <I've Got Nothing>
그 나이를 처먹도록 그거 하나 몰라,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원하는 게 뭐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23]
close your eyes to see the light, you need to be wise to stand the night
use your heart not your brain to get mind's sight, the time upon us is too short to fight, too dry like black and white
sail away, go with the light / fly away, go with the light - <Go With The Light>
어디 있든 무엇을 하든 이거 하나만은 절대 잊지 마. 우리가 꿈꿨던 세상은 결국 올 거란 걸. 우리가 욕했던 그들과 이미 닮아버린 것은 아니니, 만일 그렇다면 지금 돌아오면 돼 - <그들만의 세상>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기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 <민물장어의 꿈>
시기상 영국 체류 시절에 속하며 눈물을 흘리며[24] N.EX.T 해체 후 유학 길에 오른 후 솔로활동을 하였으며 유학을 다녀와서는 비트겐슈타인으로 3인조 밴드를 구성하여 활동하던 시절이다.

넥스트 이후 솔로 활동은 미디음악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투영할 수 있는, 테크노와 관련한 음악적 실험이 주를 이룬다. 특히 'Croms Techno Works'나 'Homemade Cookie' 앨범은 라이트한 팬들이 구입하기에는 약간 망설일 요소가 있는 실험 앨범이다.[25] 예를 들어, 총 다섯 개의 파트로 돼있는 '매미의 꿈'의 경우 같은 곡이 각각 스튜디오 믹싱 버전과 홈 믹싱 버전으로 실려있다. 그리고 '50년 후의 내 모습' 리메이크에 등장하는 신해철의 가성 역시 기존의 록밴드 시절에는 자주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다. 센가성이라는 용어가 돌기 시작하면서 신해철=센가성 이미지가 됐지만, 실제 신해철의 핵심이 되는 가성은 이런 식의 코러스 가성이다. 솔로나 밴드음반 뿐만 아니라 자신이 프로듀스한 여러 곡의 코러스를 했는데 엄정화의 데뷔곡인 '눈동자' 코러스도 신해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또한, '매미의 꿈 part2 A Long Cold Winter's Sleep'에 등장하는 소프라노 보컬은, 그냥 성악가 세션을 불러서 한 번에 녹음하면 쉬울 것을 일일이 신디사이저 건반 하나하나에 샘플러를 입력한 다음 '연주한' 것이다.

이때는 '일상으로의 초대’를 제외하면 대중적인 히트 넘버는 없다. 다만, 이 시기 발표된 '민물장어의 꿈'은 신해철 본인과 팬들 모두 좋아하는 숨은 히트곡이다. '민물장어의 꿈'은 신해철 본인의 라디오에서 가사 해설을 한 적도 있다. 훗날 신해철이 사망했을 때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26] 히든싱어 신해철 편에서 남궁연이 한 말에 따르면 민물장어의 꿈은 악상이 떠오르자 집에서 식탁 두 개를 놓고 그 위에 옷걸이를 올린 다음, 이불을 씌워서 간이 녹음실을 만들어 거의 즉석에서 만든 노래라고 한다.

솔로 3집의 경우 <일상으로의 초대>를 통해 한국에서 아주 짧은 프로모션을 진행했으며, 솔로 4집의 경우 영국에서의 공연 등을 통해 영국에 일부 선판매되었으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앨범의 작품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며 월드 투어를 준비하던 신해철은 자신의 음악이 아직 완전히 진일보하지 않았음과, 본토인 한국에서 멀쩡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대한민국 전국 투어로 투어의 범위를 줄이게 된다. 그리하여 나온 앨범이 바로 <Homemade Cookies & 99 Crom Live>. 다수의 미공개곡들과 오랜만의 한국 컴백이었던 모노크롬 전국 투어의 실황이 들어가있으며, 기존곡들의 대다수는 솔로 3집 <Crom's Techno Works>의 편곡대로 라이브되었다. 이 투어에서는 <무소유>를 제외한 Monocrom 앨범 전곡이 Go with the Light을 포함해 라이브되었으며, 아주 가끔은It's Alright이 신해철 라이브에서 최초로 라이브되었다.

또한 Homemade Cookies의 경우 <그들만의 세상>, <너 네가 뭔데>, <여름은 쉽게 가버렸다>, <일상으로의 초대 Acoustic Ver>[27]등이 공개되며 신해철이 기획하고 있던 미공개곡들이 등장한다. 이 시기 곡들에 새로이 붙인 가사와 리메이크는 사실상 (대중적 여부를 떠나) 신해철의 최고 창작으로 일컬어진다. 무엇보다 이 앨범의 최고 명곡은 <민물장어의 꿈>. 신해철 팬들 중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신해철의 장례식에서 신해철의 평소 요구에 따라 재생되었던 곡이다. 신해철 스스로를 평하는 듯한 동시에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이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가사가 일품이며, 신해철 스스로의 말대로 그의 사후에야 히트곡의 반열에 오르게 된 곡이기도 하다. 이 시기 <민물장어의 꿈>과 <일상으로의 초대(Acoustic Ver.)>를 피아니스트 임형빈(훗날의 Da Vin-K)과 함께 작업하며, 비트겐슈타인을 위한 초기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00~02년의 행적은 비트겐슈타인 항목을 참조할 것.

유학시절의 곡 중 라이브트랙으로 다수 선택되는 트랙들은 <일상으로의 초대>[28],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29], <Friends>[30], <민물장어의 꿈>[31] 드물게 <Into the Arena>[32]나 <오버액션 맨>[33] 정도다.

4.1. 주다스 프리스트 역표절 사건

이 시기에 유명한 표절 사건이 발생한다.

1999년 《모노크롬》으로 게리 무어, 주다스 프리스트, 씬 리지, 앙그라, 헬로윈, 잉베이 맘스틴, 앤썸 등의 음반을 맡았던 전설적인 프로듀서 크리스 상그리디와 함께 활동했었다. 사실상 신해철의 솔로 프로젝트나 다름없는데, 모노크롬은 엄연히 크롬(신해철)과 크리스 상그리디로 이루어진 밴드다. 공연도 같이 했다. 그런데 2년 후인 2001년, 상그리디가 프로듀서로서 낸 전설적인 헤비메탈 밴드 주다스 프리스트 'Demolition' 앨범의 'Metal Messiah'이라는 노래가 모노크롬 앨범에 실린 'Machine Messiah'를 표절한 사건이다.

이 일은 신해철 본인이 직접 문제를 제기하면서 팬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흔히 표절이라고 하면 특정 멜로디를 차용해오는 악보 개념의 표절을 떠올리게 되는데, 'Metal Messiah' 표절의 경우 신해철이 작업한 음원 자체를 그대로 가져다가 이어붙였다. 정확하게는 'Machine Messiah'와 함께 히든 트랙에 수록한 'Demo.69('69번째 데모'라는 뜻이라고 밝힘)'를 잘라붙였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나중에 돈 필요할 때 소송을 걸 수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장난스레 하는 등, 주다스 프리스트라는 메탈신에 대한 신해철의 애정도와 함께 애매하게 넘어가는 발언이 맞물려서, 주다스 프리스트의 팬들은 이 일을 크리스 상그리디가 신해철과 잠깐 작업했다가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실수'한 정도로 보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주다스 팬들만이 아니라 신해철 팬들조차 이 일을 '음원을 도둑 맞은 사건' 정도로 보고 그저 '한국 록 뮤지션의 음악을 메탈의 신이 훔친' 자랑스러운 일로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렇게 가벼운 사건이 아니다.

크리스 상그리디는 영국에서 후반 작업을 한 N.EX.T의 4집 'Lazenca - A Space Rock Opera' 앨범, 신해철이 영국으로 건너간 후 나온 'Crom's Techno Works' 앨범에서 각각 믹싱 엔지니어로 참여했다. '라젠카' 앨범의 녹음 기간부터 모노크롬 밴드 활동까지 합치면 무려 4년 이상을 신해철과 함께 한 것이다.

현진영에게 미디를 가르쳐 준 사람이 신해철이기도 하듯 신해철은 데뷔 때부터, 혼자서 음악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미디 작업에 대한 관심을 표현(사용)하고 앨범의 사운드를 결정하는 엔지니어링 작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현해왔다. 그런 그의 평소 성향과 비트겐슈타인 앨범을 발매하면서 직접 밝힌 앨범 메이킹 스토리에서 기타 사운드를 만드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언급한 것, 그리고 크리스 상그리디와 만난 시기를 참고할 때, 당시 거장이었던 크리스 상그리디는 신해철에게 있어서 단순한 전략적 파트너쉽 관계가 아니라 녹음 엔지니어링 전반을 지도해준 일종의 멘토라고 볼 수 있다. 'Homemade Cookies & 99 CROM LIVE' 앨범의, 몇 명 언급돼 있지 않는 Thanks to를 보면 가장 먼저 크리스 상그리디의 이름이 적혀있다. 즉 쉽게 말해 스승이 제자 뒤통수 친 격.

크리스 상그리디는 '라젠카' 앨범 믹싱 작업 당시 신해철에게 훗날 함께 일해볼 것을 가볍게 제안했지만 신해철은 농담으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라젠카' 앨범을 끝으로 N.EX.T가 해체하자 직접 내한해서 신해철에게 영국 유학을 권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해당 항목을 보면, 공동 작업이었기 때문에 크리스가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가져다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실제로 비중 있는 창작 작업을 하고 프로그래밍을 한 것은 신해철이다. 'Machine Massiah' 저작표기란에 공각기동대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사실도 적어놓을 만큼, 신해철은 자신이 한 부분과 아닌 부분을 정확히 적어놨다. 공동으로 표기가 된 것은 프로듀서 표기가 모노크롬(Monocrom)으로 되어있을 뿐, 크리스가 앨범에서 주로 작업한 부분은 기타와 베이스이다. 이것도 전부 영어로 적혀있다. 그러므로 베테랑 프로듀서이자 엔지니어로서 오랜 기간 뮤지션들과 작업해온 크리스가 'Machine Messiah'와 'Demo.69'가 공동 저작이므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표절 사건에 대한 신해철의 기본 방침은, 될 수 있으면 조용히 넘어가는 방향으로 굳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어릴 때부터 좋아한 주다스 프리스트에 대한 애정도 애정이지만, 크리스 상그리디가 자신의 멘토 중 한 사람이라는 점도 쉽사리 공개적으로 이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큰 이유일 것이다. 사건 자체는 스스로 문제 제기를 했고 팬들 사이에도 알려져있기 때문에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진지하기보다는 장난스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스트스테이션 2011년 8월 5일자 방송에서 한 주다스 프리스트 특집 말미에 이 사건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넘어갔다. 표절 여부에 대한 신해철의 입장은 여전히 '표절'로 명확하게 정하고 있는 듯하다.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신해철이 저작권 상담 후 "표절 저작권료는 묵히면 묵힐수록 금액이 늘어나기 때문에 당장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다음은 당시 신해철이 방송에서 언급한 해당 부분을 녹취한 것이다. 참고로 방송 내용은 거의 주다스 프리스트 위인전 수준으로 메탈갓에 대한 신해철의 애정이 엿보였다.
"(전략) 주다스 프리스트는 오리지널 멤버로 재결합해서 그 이후로도 전세계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리퍼 오웬스가 재적하던 시절, 어떻게든 몸부림을 치기 위해서 동양에서 온 신비한 아티스트의 곡을 무작정 베끼면서 멀티 테입까지 갖다 썼다든가..."
"하는 추문들은 그냥 묻어두기로 한다. 전설로 전설로 남아있는 것이 좋은 법..."
"왜냐하면 우리에겐 미래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You've Got Another Thing Comin'" (곡 소개)

신해철이 생각이 바뀌거나 급전이 필요해서 마음 먹고 소송에 들어갈 경우 All Things Must Pass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주다스 프리스트가 'Metal Messiah'로 벌어들인 수익의 대부분을 받아낼 수도 있었다. 이 이야기는 신해철 본인도 장난스럽게 언급한 적이 여러 번 있으나,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신해철이 사망함으로써 만약 소송을 걸게 된다면 유족들이 걸게 생겼다.

크리스 상그리디가 2018년 1월 7일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만일 이 소송이 성사된다면 피고 원고 본인이 양쪽 다 사망하여 신해철 유족 vs 상그리디 유족의 구도가 될 것이다.

4.2. 표절로 몰린 사건

반면 신해철이 억울하게 표절로 몰린 사건도 있었다. 딴지일보의 어떤 필자가 비슷하게 들리는 부분만을 짜깁기한 파일로 인신공격을 해 가며 표절이라 낙인을 찍었는데, 2002년에 이에 대해 신해철이 해당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반박한다.

이것이 해당 인터뷰이다.
몇 년전에 저에 대한 기사가 났을 때를 한번 생각을 해보자구요. 얘는 오늘도 런던 하늘 아래에서 흰 가루를 엄청 먹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자, 이게 음악하고 무슨 관계냐 말이죠.


카 : 표절과 관련된 기사였죠?
신 : 그 이야기죠. 심지어는 거기서 표절이라고 지목해 놓은 제 노래에 대한 근거가 지극히 희박했구요. 그런 것까지도 다 좋은데, 그 담에는 음악얘기는 밑도 끝도 없고 그냥 니가 밉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더라는 거죠. 마음속에 콤플렉스 덩어리로 가득한 대중들이 이유없이 음악인들한테 던지는 그 짱돌처럼 마녀사냥하고 뭇매질하는 데 딴지가 먹이를 던져주는 역할을 해서야 되겠느냐...


가령 그 표절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저는 딴지 정도 되었다면, 이 표절이 나오고 있는 시스템의 근본적인 의미부터 지목하고 정식으로 공격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매스컴에서 지목하는, 말하자면 표절의 최종 집행자들의 명단만 늘어놓고 대중들에게 그 사람들 인격의 저열함을 호소하는, 이거 말고는 아무런 대안이 없다....? 제가 기대하는 것보다는 수준이 좀 낮다는 얘기예요. 옐로우라고 하는 말장난이 정말로 옐로우가 될 기질이 보이면 가슴이 철렁하거든요.

5. 03~08, 09~14: N.EX.T 재결성

2002년 12월 신해철이 넥스트의 재결성을 공지하였으며, 12월 28일 재결성 공연을 시작으로 여러 소규모 락페스티벌과 전국투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멤버는 모두 바뀌어(기타: 안회태, 데빈 / 베이스: 쇼기 / 드럼: 쭈니 / 키보드: 다빈크 또는 객원 멤버) 넥스트보다는 비트겐슈타인+Dr.Core 911의 믹스에 가까웠다. 전국투어에서는 게스트로 이전 멤버인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 김유성 등이 일시적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2004년 춘천에서 열린 아름다운 음악 세상 콘서트

2003년 5월 즈음에 약간의 멤버 교체와 함께(기타: 데빈 / 베이스 : 쌩 / 드럼 : 쭈니 / 키보드 : 해리) 넥스트가 공식적으로 재결성되어 5집이 발매되었다. 자세한 활동은 N.EX.T 문서 참조.

2005년 12월 말 세종대 공연을 끝으로 재결성 넥스트의 멤버들이 데빈을 제외하고 모두 탈퇴하였다.

2006년 황금기 멤버들과 지현수를 영입하여 수록곡을 리메이크, 리마스터한 넥스트 5.5집이 발매되었다.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였다. 당시 국내에서 드문[34] 락밴드 + 오케스트라의 라이브를 보여주었으며 고평가를 받았으나 공식적인 음원 및 영상자료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35] 이후 서태지의 2008년 심포니 공연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06년 말 데빈이 넥스트를 탈퇴하였고, 데빈 팬들의 공연 보이콧 등이 이어지자 큰 충격을 받은 신해철이 사고를 당했다.[36] 얼마 후 김영석과 이수용이 넥스트를 탈퇴하며 전성기 멤버들과의 호흡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신해철 5집 <The Songs For The One>. 2007년 발매된 재즈 앨범(!!)이다. 가족들과 와인 따라놓고 들을 수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고. 이 시기 빅밴드 세바와 활동을 함께했다. 베이시스트 제이드, 드러머 윤테라를 영입하여 넥스트의 활동을 재시작했다.

2007년-2008년 양해에 걸쳐 20주년 행사를 크게 했다. 20주년 기념공연에서 오랜만에 희귀곡들을 연주하며 나름의 건재함을 보여주었고, 다수의 전직 넥스트-무한궤도 멤버들이 세션으로 함께하였다. 또한 팬들의 신해철에 대한 서프라이즈 파티에 신해철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008' 부분에 신해철의 20주년 기념 공연에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하는 멘트가 있다.

2008년 윤테라는 군입대로 인해 앨범 한 장 내지 못한 채 넥스트를 탈퇴해야만 했다. 동년 드러머 김단을 영입하여 넥스트 활동을 시작한다.


스트러글링 낸 지 6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트 앨범을 또 발표한다. <Shin Hae Chul 20th Anniversary: Remembrance>가 그것. 이 앨범에는 신곡 <Playboy의 최후>가 수록되어 있으며 넥스트 6집 <666 Trilogy>의 스타일을 예고하고 있다.

2008년, 넥스트 6집 666 Trilogy Part 1을 발매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넥스트의 마지막 정규앨범이 되었다.

'666 Part 2: 쥐들의 왕국[37]'에는 총 6곡이 들어간다고 했다. 2009년 봄경의 언급이었으나... 갑작스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로 충격을 받은 신해철은 대부분 지인들과의 연락두절과 함께 칩거를 시작했고, 넥스트는 잠정휴업에 들어갔다.

2009년 9월, 6집 Part 2가 녹음은 마친 상태이지만 홈페이지 게시판에 재미있는 거 안 올라온다고 삐쳐서 후속 작업을 그만뒀다.

그 전에는 파이브 스타 스토리 12권 나왔다고 놀고 10월에는 간기능 악화로 몸져 누우면서 자연스럽게 앨범 작업은 중지되었다. 이후 2009년 12월 연말에 열린 콘서트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오면서 2010년 1월에는 Part 2가 나온다는 공지를 하였으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2010년 클럽 공연들에서 <Insomnia>, <Welcome to the Jungle> 등의 Part 2/3에 수록될 몇몇 신곡을 공개하였다. 공식적인 녹음본은 당연히 공개되어있지 않다.

2010년 8월 29일 코리아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작업은 다 된 지 오래지만, 앨범에 노무현에게 바치는 노래가 있어서 그동안 사람들이 자기가 노무현으로 또 뜨려나보다라고 생각할 것 같다는 이유로 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다 잊어버린 후에 내야 될 것 같다는 발언도 했는데, 2012년 10월 12일 '노무현을 노래하다 Part5'라는 싱글을 냈다. 수록곡은 'Goodbye Mr.Trouble'로 신해철 혼자서 작사, 작곡, 편곡, 노래, 연주, 녹음까지 한 곡이다.

2012년 '나의 PS 파트너'라는 영화의 OST 작업에 참여하였다. <Show Me Your Panty>로 대표되는 OST는 특유의 느낌 때문에 영화 관람자들에게 꽤 사랑을 받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2012년 넥스트는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한다. 신해철 본인은 부정하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던 상태였다고...

문재인 후보의 선거 유세곡으로 그대에게를 편곡하여 'Reboot the Nation'이라는 신곡을 냈다.

2013년 EVE의 전 멤버들을 중심으로 한 넥스트 7기가 결성되어 대학가요제 Forever 전국투어에 참여하였다.

2014년 원년 멤버 정기송, 강석훈과 함께 솔로 6집의 Part 1을 낼 것을 공지했다. 제목은 <REBOOT MYSELF>

2014년 6월 20일에 있었던 신해철 6집 Part 1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서 '666 Part II - 쥐들의 왕국'은 전곡이 완성되었으나 발매가 되지 않은 비운의 앨범이라 밝히며 발매하지 않는 사유는 '왠지 내기가 싫더라고'라고 하였다고 한다. 공백기 동안 전 드러머였던 김단의 사건과 사이렌음악원의 중단 등의 이유로 발매가 불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었으나, 2014년 9월 팟캐스트 <창비라디오 진중권의 문화다방>에 출연해 실제로 파트2와 3가 완성되었고 믹싱과 보컬 일부만 덜 한 상태였다고 밝혔다.[38] '파트2와 3가 발매된 평행우주가 있다면 그 세계의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 것을 보아 정치적 이유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Reboot Myself>의 'Catch Me If You Can'이 파트2 작업의 결과 중 일부라는 언급이 있었고 해당 곡이 정치적인 이유로 KBS 방송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것을 보면, 파트2가 정치적인 이유로 불발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사실 신해철의 솔로 6집 <Reboot Myself>의 리허설 밴드를 보면 데빈을 포함한 넥스트 멤버들이라서, 단 하나의 약속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곡이 원래는 666 Part II의 후보곡이었던 것 같다... 즉, Reboot Myself에 실린 세 곡은 최대한 순화된 가사일 가능성이 높다.

훗날 지현수의 언급에 따르면 <666 Trilogy Part II - 쥐들의 왕국>은 완벽히 완성된 상태로 음원이 전부 존재하며, <Part III - 파멸의 발라드>는 구상단계에서 조금 더 나아간 수준이라고 한다. 신해철이 앨범을 내려고 할 때쯤 갑자기 넥스트를 대상으로 한 공연요청이 전부 사라졌고 외압을 직감한 신해철은 앨범 발매를 포기했다고 한다.

6. 사망 직전의 활동

2012년 시나위의 신대철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을 만든다는 소식과 함께 공연을 같이 진행하였으나, 그 이후로 소식이 없다. 당시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작업의 중간 결과물을 공개하기도 했었던 것으로 봐선 작업이 진행 중이었던 듯한데 어떻게 된 일인지가 좀 아쉬운 상황.

그리고 '666 Trilogy Part 1'이 발매된 지 6년 지난 2014년, N.EX.T의 원년 멤버[39] 중 한 사람인 정기송, 키보드 세션이었던 강석훈이 참여한 솔로 6집 앨범 Part I 'Reboot Myself'를 6월 23일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신해철 솔로 6집 Part 1 <Reboot Myself Part 1>. 2014년 6월 발매.

4달 후 신해철은 모 의료인만행에 의해 별세하게 되지만, 천만 다행히도 이 앨범의 수록곡은 라이브가 사실상 불가능한 A.D.D.A를 제외하고는 신해철 생전에 한 번씩 라이브되었다. 다만 영상이 남아있지 않다.

2014년 6월 17일 P.M.12:00 솔로 6집 앨범 Part I 'Reboot Myself' 중 선공개곡으로 'A.D.D.a(아따)'가 공개되었다. 내용은 1인 아카펠라곡. 심지어는 뮤직비디오까지 나왔다. 2014년 06월 20일 P.M. 08:00 신해철 솔로 6집 싱글 'Reboot Myself' 쇼케이스 공연에서 6월 26일 발매될 싱글의 수록곡 4곡 전부[40]를 공개하였으며 이 중 타이틀곡을 위한 투표도 진행하였다고 한다.[41] 또한 넥스트의 연말 앨범에 나올 수록곡 역시 미리 공개하였다고 한다. 6년동안 140여곡을 써두셨다 하고 3~4개월마다 한 장의 싱글을 내도록 하겠다 말했다는 공연 후기들이 있었다. 또한, 올해 안에 N.EX.T로도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라는 소속사의 발표가 있었다.

2014년 6월 26일 P.M. 12:00를 기점으로 온라인으로 음원이 공개되었으며 P.M. 3:00경으로 오프라인 매장으로 음반 주문이 시작되었다. 또한 8월에 있을 고양 락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참가를 결정하고 SNL코리아에 출연을 결정하였다. 다만 고양 락 페스티벌은 여러 논란 속에 개최되지 않았다.

2014년 7월 1일 컬투쇼에 초대손님으로 출연하여 넥스트가 가을에 EP를 발매하고 전국투어를 할 예정이라 밝히고, 또한 서태지이승환과의 합동공연 떡밥을 다시 조심스레 밝혔다. 하나 굉장한 것은 서태지와는 이미 과거부터 약속이 되어와 있었다는 것.

2014년 7월 절친한 지인이었던 신대철과 함께 바른음원협동조합을 시작하였다. 거침 없는 입담으로 고스트스테이션 때부터 문제 삼았던 멜론 등의 음원 서비스 가격 문제를 직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저는 유통사에 바라는 점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돈들 많이 버셨으니까"
"제 자살한 후배의 전화번호를
제 핸드폰에서 자동으로 지워지게 하는 어플을 만들어서
하나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4년 9월 18일 P.M. 12:00를 기점으로 넥스트 7집 곡인 'I Want It All (Demo 0.7)'을 선공개하였다. 이틀 뒤에 있을 공연에서 관객들의 목소리를 담아 곡을 완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9월 20일 공연에서 I Want It All이 오프닝곡으로 등장하였는데, 공지를 안 보고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6년만의 제대로 된 단독공연에 팬들은 그저 눈물바다. 이 날 공연에 선 멤버는 보컬 : 신해철 & 이현섭 / 기타 : 정기송 & 타미 김 / 베이스 : 제이드 & 김영석 / 드럼 : 이수용 / 키보드 : 김구호[42]로 알려져 있다.

공연에 다녀온 사람들에 의하면 (특히 97년까지의 곡들을 부를 때) 넥스트 해체 직전의 보컬 수준의 보컬이 나온다고 한다. 마침 김세황을 제외한 황금기 넥스트 멤버들이 또다시 모였으니 이후의 라이브를 기대해볼 수 있는 부분.

최초의 신곡이 포함된 솔로 커리어와 넥스트 커리어의 혼합기로서 넥스트의 신곡보다 신해철의 신곡이라 할 수 있는 <Catch Me If You Can> <Princess Maker> <Show me your S.E.X> 등이 라이브되었다. <Show Me Your S.E.X>는 무려 트위터로 신청곡을 받아서 나온 곡이다. 그 외에는 <길 위에서>를 신청한 모 팬이 있었으나 그 소원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킬링 포인트는 <단 하나의 약속>이 처음으로 라이브되었다는 것. 다만 AR을 깔 생각을 하지 않은 신해철 때문에 킬링파트라 할 수 있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의 "영원히" 부분이 라이브되지 않았다.

10월 11일 대한민국 라이브 페스티벌에도 동일한 진용으로 섰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중인격자+The Power", "날아라 병아리", "그대에게" 등 늘 써먹던 셋리스트이지만 어쨌든 공연을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그리고...

6.1. 싸이렌 음악원

2009년 12월 30일 자신의 이름으로 설립하는 음악학원인 싸이렌 음악원 홈페이지를 열고 원생을 받기 시작했다. 대문짝만하게 스파르타식 강경교육이라고 써놓았으니 고압적인 자세에 치를 떠는 사람들은 절대 가지 말기를 바란다. 박진영보다 더 악랄하고 치밀하게 비수를 꽂을 수 있는 몇 안되는 말빨의 신이 신해철이니... 게다가 음악 가르칠 때는 무섭도록 진지하니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 할 것이다. 개초보도 취미반 수강시 때리지 않는다고 하니 너무 쫄지는 말자.

원장이 3명인데 신해철, 나정윤, 김세황이다. 나정윤 & 김세황은 정확히는 부원장인데 어디에는 원장, 어디에는 부원장이라고 써놨다. 홈페이지 가서 보면 알겠지만 강사진이 이거 미친 거 아냐. 넥스트 베이스 제이드라거나 서태지 밴드 기타리스트 이라거나[43] 지현우 형 지현수라거나 스타킹에서 신의 한수를 보여준 김일병이라거나[44] 후학을 키우는 일을 한다면 입만 살았다는 소리는 휠씬 적게 들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드디어 이뤄졌다. 수강상담 전국 지점 번호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전국으로 뻗칠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확실해졌다.

수업의 세부구성은 신해철답게 치밀하고 체계적이기 그지 없다. 교육 기간은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재즈피아노가 1년 교육이고 시창, 청음 & 편곡 & 화성악은 1년 교육에 1주일에 한 번 1시간 30분 수업, 미디작편곡만 기본 과정 3개월, 전문가 과정 9개월에 주 1회 2시간 엔지니어가 가장 어려울 듯 싶은데 좀 짧지 않나 싸이렌 음악원 첫 등록생이 신해철닷컴에 남긴 글에 의하면 가격은 다음과 같다.
수강과목 회수 시간 가격 (1달 기준)
드럼 1주 1회 (개인/단체 택일) 개인 50분/단체 90분 개인 25만원/단체 15만원
기타 1주 개인 1회+단체 1회 개인 50분/단체 90분 40만원
베이스 1주 개인 1회+단체 1회 개인 50분/단체 90분 40만원
재즈피아노 1주 개인 1회+단체 1회 개인 50분/단체 90분 40만원
보컬 1주 개인 1회+단체 1회 개인 50분/단체 90분 50만원

입시반/프로반이 따로 나뉘어도 가격이 동일하다는 것이 장점. 수업 시간이야 강사 마음대로 바뀌는 것이니 그냥 참고의 의미로 보시면 되겠다. 아쉽게도 시창, 청음 & 편곡 & 화성학 & 미디 작/편곡은 관심이 없어서 물어보지 못했다

1주 1회에 1달 기준 40만원이면 싸다. 아주 많이 싸다. 강남에서 월 8회 하려면 기본료에 최소 + 50만원이다. 일반 성악과 나온 아줌마가 하는 학원도 월 5시간(주 1회, 1달 5회, 회당 1시간)에 80씩 받는데, 이 정도면 거의 반값. 듣보잡 강사 일반 레슨비도 20만원이다. 게다가 강의료 전면에 안 붙여놓고 무조건 상담으로 퉁치는 강남 뮤직스쿨 같은 곳까지 출동하면...

거기다가 강사진까지 사기 캐릭터만 골라놓은 드림팀이라는 건데[45], 차라리 그냥 이 멤버로 앨범을 내도 되겠다. 아니, 이 바닥 학원 시장을 아예 재편하겠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잘 나갔으며, 개업 이후 버클리 음악대학 입시 설명회를 개최할 정도로 강남 음악학원계에서는 그 파워가 막강했다.

하지만 지난 2011년 12월에 싸이렌 음악원이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무리한 사업 투자로 인한 부도라고 기사는 설명하고 있으나, 원장 본인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다.

전 직원이 2달치 임금 약 300만원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7. 히트곡

한국 가요계에서 록 가수로서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이룬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무한궤도-솔로-넥스트 시절까지 히트곡이 어마무지하게 많다. 한창 전성기 시절이었던 1990년대 ~ 2000년대 초반에는 서태지와 함께 시대의 아이콘 대접까지 받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한궤도(1988~1989)
솔로 시절 1차(1990~1991)
N.EX.T (1992~1997 / 2003~2014)솔로 2차, 비트겐슈타인(1998~2002)

[1] 참고로 그 사진은 본인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도 올린 적이 있다.[2]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을 당시 후에 팬레터가 굉장히 많이 왔는데, 한 편지에서 "해철 오빠 뒤에서 반주해 주시는 백밴드 오빠들..."이란 내용을 보고 분노해 그 편지를 찢어버렸다고 한다.[3] 늘 얘기해 왔던 거지만 라디오 방송 고스트네이션에서 전인권이 게스트로 출연했을 당시 밴드가 곧 자신의 가족이자 형제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했다.[4] '조용필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였다가 조용필의 매니저로 전업했던 '유재학'이란 사람이 차린 소속사. 몇 년 후 대영AV로 이름을 바꿨고, 2009년 도산. 망했을 당시 이름은 '포이보스'. 이 이름으로 아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5] 이는 비단 신해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된 N.EX.T, 015B, 윤종신, 전람회, 김동률 등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축을 손 안에 넣을 수 있었던 신의 한 수였다.[6] 이때 당시의 대마초 사건은 무한궤도의 해체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영향을 미쳤다.[7] 당시 무기한 방송금지를 당했으나, 1996년경 해제. 정작 본인은 출연 금지 처분을 당했을 때 어차피 안 나갈 건데 뭐 어떠냐는 생각으로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8] 이때 부른 곡은 신해철의 1집 타이틀곡인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9] 대학가요제 때 사용한 신디사이저는 작은아버지에게 100만 원을 빌려서 샀다고 한다. 이때 88 대학가요제 대상 상금이 100만원이었다.[10]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 활동에 굉장히 회의적었는데, 한 가수를 예로 들며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넌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한다. 음악 자체에 대해 굉장히 불만을 갖고 있었던 듯 한데 그 뒤 세월이 지나 성당에서 기타를 배웠다고.[11] 1988년 대학가요제 버전 기준. 영상이나 신해철이 썼던 에세이에 의하면 각각 Roland D-50(김재홍), 아카이 X7000(신해철), Roland 주노60, 야마하 DX7(둘 다 조현문).[12] 당대의 한국어 음악이론서들은 매우 적었고, 그나마도 나온 것들은 클래식과 실용음악의 이론서들이 철저히 나뉘어져 있었으며 번역서가 아니라면 시대상 서로가 서로를 배격하는 듯한 서술을 했다. 빼어난 천재가 아니라면 두 가지의 이론적 바탕을 합일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13] 참고로 서강대 그룹사운드의 이름은 '킨젝스'. 대학가요제에도 여러 번 출전했던 그룹이다.[14] 그때 강변가요제 대상은 이상은이었다.[15] 정확히는 샘플링 키보드.[16]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에서 정품 인증 장치만 추가해 그대로 사용한 포맷이기도 하다.[17] 다만 말년엔 이신론적 성향을 띈 적도 있다.[18] 한국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성인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표기한다. 아우구스티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탈리아어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것이다.[19] 신해철이 처음부터 속칭 나이롱 신자는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지라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에는 성당에 비교적 잘 출석했고, 한때나마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교 시절 버트런드 러셀이 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읽고 이후 결국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 그럼에도 어머니를 실망시키기는 싫었는지 성당의 교적만큼은 유지했다고 한다.[20] 이 곡 전까지는 졸고 있었는데 '그대에게'가 알람인 줄 알고 깨어났다는 후문이 있다.[21] 유재학이라는 기획자가 이끌던 대영AV와 계약 할 수 있었다. 이후 015B와 윤종신 등과 한솥밥을 먹게 된다.[22] 여담이지만, 넥스트가 마지막 고별무대를 가졌던 1997년 12월 31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비주얼 록 밴드 X JAPAN 역시 공식적으로 해체를 발표하고 도쿄돔에서 'THE LAST LIVE〜最後の夜(최후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고별무대를 가졌던 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1997년 12월 31일 저녁에 체조경기장에서 넥스트가 약 1만 여명의 팬들과 함께 고별무대를 가졌을 때 같은 시각, 한국과 시차 없는 가깝고도 먼 바다 건너 일본 도쿄돔에서는 X JAPAN이 5만 여명의 팬들과 함께 역시 고별무대를 가졌다는 의미이다. X JAPAN은 해체 후 5달 정도 지났을 무렵인 1998년 5월 2일 기타리스트 hide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더불어 해체의 원인이었던 사이비 종교에 세뇌된 보컬 토시의 긴 방황을 지나 2007년에 다시 재결성했다.[23] 맞춤법이 틀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노래의 제목이다.[24] 4집 이후 고별콘서트라고 불리는 마지막 전국투어의(위에 올라와 있는 영상)의 마지막 날. 그는 실제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25] 참고로 노댄스로 함께 했던 윤상의 경우도 비슷한 행보를 겪었는데 윤상은 애초에 글리치라든지 생소한 장르, 사운드에 대해서 좀 더 파고들려 유학을 떠난 것이었다. 그에 대한 성과로 앨범을 내놓고 공연을 했었는데, 전성기 시절의 윤상을 기억하는 팬들은 굉장히 당혹스러워했다고. 신해철의 앨범의 경우엔 그런 사례보단 덜 매니악했지만.[26] 본인도 "내가 사망하고 나서야 히트칠 곡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었던 곡.[27] 일명 '왕닭살 버전'으로 피아노와만 함께한 버전이다. 중간의 나레이션이 더 역겨워지며(신해철 오피셜이다) 곡의 분위기가 대단히 잔잔해진다. 모노크롬 투어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이후 비트겐슈타인 - 넥스트 5집 공연까지 이 괴상한 버전으로 라이브하다가, 5.5집 작업을 위한 지현수의 합류 이후 7년만에 원곡 느낌의 라이브로 되돌아간다.[28] 1999년 이후 쭉 어쿠스틱 버전이었다가, 2006년 이후 지현수의 합류로 원곡 버전으로 되돌아갔고, 2014년 신해철의 사후부터는 어쿠스틱 버전의 라이브 비율이 높아졌다.[29] 라이브에서는 2003년 넥스트 명의로 나온 길티기어 한국판 OST의 <Ditto>를 Inst로 사용함으로써,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강한 80년대 록 트랙 느낌의 곡이 된다.[30] 2000년 비트겐슈타인 앨범 수록 후, 2006년 넥스트 5.5집에 재수록되며 라이브 횟수가 많아졌다.[31] 주로 앵콜곡으로 선정된다.[32] 그 전설의 대~한민국! (짝짝 짝 짝짝). 라이브에서는 기타 사운드 위주로 편곡되어 연주된다. 2012년 이후에는 <Reboot the Nation>을 통해 <그대에게>와 매시업되었다.[33] 비트겐슈타인 1집의 히트곡 중 하나. 비트겐슈타인 해체 이후 라이브를 들을 확률이 매우 낮으나, 다른 비트겐슈타인 곡들보다는 라이브를 아주 가끔씩 들을 수 있는 편이다.[34] 국내 최초는 1999년 노이즈가든의 서울팝스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다.[35] 정확히는 공개하려 했으나 이러저러한 사유로 미뤄지더니 그냥 무산된 것.[36]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도 있고 교통사고를 낼 뻔 한 정도에서 그쳤다는 말도 있다.[37] EBS 스페이스 공감 넥스트 녹화장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한 제목이었다.[38] 이후 지현수의 발언에 의하면 Part2는 사실상 발매가 가능한 상태까지 완성되었었고 Part3의 경우 곡이 작곡되어있는 정도의 구상단계 상태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발언이 모두 맞다면, Part3는 넥스트 멤버가 아닌 신해철 본인의 개인작업 비율이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39] 흔히들 생각하는 '신해철, 김세황, 김영석, 이수용'의 4인 체제가 아닌, '신해철, 정기송, 이동규'의 3인 체제였던 1집 시절을 말한다. 신해철은 넥스트가 결성되었던 1992년 당시 인터뷰에서 "이 멤버로 평생 갈 겁니다"라고 한 바 있다. 문제는 그 멤버들이 2년만에 깨졌다는 거지만.[40] 01. A.D.D.a
02. Catch Me If You Can
03. Princess Maker
04. 단 하나의 약속(타이틀 곡)
[41] 당선작(?)이 된 것은 마지막 곡인 '단 하나의 약속'. 신해철이 14년동안 틈틈이 작업을 한 곡이라고 한다. 2014년 말 앨범을 발매할 N.EX.T의 새로운 멤버도 소개하였다고 한다. '넥스트 유나이티드'(가칭)라는 형식으로 20인 구성의 멤버로,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멤버를 바꾸는 식으로 운영할 것이라 언급. 지금까지 밝혀진 이번 넥스트 EP를 낼 멤버 라인업은 보컬- 신해철, 기타-정기송, 베이스-제이드, 키보드-강석훈, 세컨보컬 겸 상황에 따른 여러 가지 다양한 악기-이현섭, 드럼- 김성원(=신지).[42] 강석훈, 장기순, 홍성민, 신지는 라이브에 참여하지 않는다.[43] 그런데 이 양반은 2011년 현재 강사진에서 사라졌다. 서태지가 2011년경 9집을 완성했다가 전부 엎고, 2014년에 다시 만들어 발표한 것이 Quiet Night이라는 얘기가 있으니 9집 레코딩을 위해 떠났는데 얼마 뒤 학원이 망한 듯.[44] 제대한 후에 호주로 간다더니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45] 사실상 스카웃한 일부 천재들 + 육촌관계인 서태지의 밴드멤버들 + 넥스트 멤버들이다[46] 사실 5집은 제작 초기부터 사회비판적인 성격으로 레코딩될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소추되는 사건이 터지게 되고, 신해철은 이에 5집 앨범의 컨셉을 전면 수정해 사회비판적인 성격이 짙은 앨범으로 발매하게 된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355
, 2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355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