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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주의는 신앙에 기초해서, 곧 지성적인 근거보다는 감성적인 근거에 기초해서 무언가를 믿는 것을 일컫습니다. 신앙주의자인 저는 신의 존재나 영혼 불멸을 증명할 수 있는 논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보다는 무신론자 쪽에서 펼치는 논증들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신앙주의는 진정으로 증거를 거스르는 돈키호테식 감성적 믿음에 해당합니다. 만일 당신이 형이상학적 믿음에 대해 강한 감성적 근거를 갖고 있다면, 그리고 그 근거가 과학이나 논리적 추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충분한 만족을 줄 경우, 당신은 신앙의 도약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마틴 가드너(Martin Gardener), 1996
마틴 가드너(Martin Gardener), 1996
1. 설명
信仰主義 / fideism궁극의 진리나 절대자에 대한 통찰과 이해, 지고의 종교적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성 이외의 감정적 위안이나 신앙적 확신을 강조하는 입장. A.Sabatier 및 E.Menegoz가 제안하였다.
이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은 특히 두 가지로, 하나는 궁극성, 절대성, 진리와 같은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이 아닌 다른 무언가이다. 즉 신앙주의는 "절대적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에 대해 "이성으로는 안 된다" 고 화답하는 종교적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성격상 유신론의 다양한 변증론(辯證論) 중 한 바리에이션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쓰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변증론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변증론은 여전히 이성이나 논리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호교(護敎)를 하는 것이지만, 신앙주의는 아예 이성이나 논리의 영역 자체를 벗어나겠다고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기존의 변증론이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한 논리적, 경험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면, 신앙주의는 그러한 형태를 갖추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신 존재증명을 논증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는 결론에 도달한다.[1]
신앙주의는 두 가지 갈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매우 완고한 형태의 신앙주의로, "절대적 진리에 이르기 위해, 오직 신앙만이 필요하다" 고 보는 입장이다. 즉 절대적 진리를 얻는 주제에 국한시킬 때 일체의 이성이나 논리는 불필요하며 전적으로 개인의 신심이나 감정적인 측면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상당히 온건한 형태의 신앙주의로, "절대적 진리에 이르기 위해, 신앙이 중심이 되지만 이성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고 보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이성을 신앙에 대한 일종의 촉진제로 이해하거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계기로 간주하는 등 유화적으로 바라본다.
상기 내용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듯이, 완고한 것이든 온건한 것이든 간에 신앙주의는 "절대적 진리" 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므로, 애초에 절대적 진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철학 사조나 무신론적 흐름에 대해서는 일체 무의미하다. 그와 함께, 처음부터 절대적 진리를 다루지 않는다는 성격을 함께 갖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와는 상당히 상보적인 관계라서, 지식인 계층의 유신론자들이 즐겨 채택하기도 한다.
신앙주의를 채택한 논자들이 즐겨 활용하는 표현은 대략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의 언급에서 이러한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면 그 사람은 신앙주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이성과 합리는 절대자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이되, 절대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종교적 진리의 영역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절한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 종교인들이 종교를 갖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이성과 합리를 통한 일반적 지식에 더하여 특별한 "통찰" 을 하기 때문이다.
- 신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이성적 사유의 프레임으로 설명될 수 없는 "비약적 도약"(quantum leap)이 필요하다.
- 누구라도 절대적 진리에 대한 구도의 길을 걷는다면 그 최후에는 결국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 이성이나 논리적 추론에 의해 반박되거나 위협받을 수 있는 상태의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
- 다수의 권위 있는 과학 논문들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상태의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
2. 구분
흔히 "그것이 내게 위안이 되므로 믿는다" 식의 신앙으로 일컬어지는 Credo quia Consolans 개념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넓게 보아 이것 역시 신앙주의의 한 부류인데, 이성적인 이유보다는 감성적인 이유를 주로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신앙주의와는 달리, 어떤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갈망까지 찾기는 쉽지 않다.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가 천명했던 또 다른 개념, "그것이 말이 되지 않기에 믿는다" 즉 Credo quia Absurdum 개념 역시 거론해 볼 수 있다. 기존의 인식 및 상식과 반대되고, 모든 경험적, 논리적 증거를 거스르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는 이 짧은 라틴어 문구는, 그러나 신앙주의의 한 종류라기보다는 신학적 논의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관련하여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이가 죽었다니,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인가!" 라는 전후 문맥 속에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와 신앙주의는 좋은 대비가 될 수 있다. 양쪽 모두 궁극적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신앙과 믿음의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일하다. 이것은 양자 간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신앙주의와 달리, 반지성주의는 애초에 이성과 합리의 가치 자체를 전적으로 거부하며,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거의 악의 한 종류로 취급한다. 대조적으로, 신앙주의는 궁극적 진리가 아닌 주제에 대해서라면 이성과 합리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신앙주의는 반지성주의와 서로 사뭇 다른 개념이다.
3. 사례
파스칼의 내기로 유명한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이 자신의 저작에서 신앙주의적인 주장을 한 사례가 있다.독일의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요한 게오르크 하만(J.G.Hamann)이 신앙주의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그는 당대에 유행하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개인 내적인 신앙의 확신을 통해서만 종교가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함께 철학과 신학 양쪽에 공헌한 인물로 꼽히는 쇠렌 키르케고르는 매우 엄격하게 신앙주의를 따랐던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신앙을 향한 이성의 거대한 도약" 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즉, 이성의 영역에서 아무리 애를 써 봐야 신앙으로 이동해갈 수 없고, 이성을 초월하는 다른 무엇인가의 도움을 받아서, 내지는 이성을 극복하는 용기를 통해서 신앙의 영역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1세대 심리학자로 유명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자신의 저서 《믿으려는 의지》(Will to Believe)에서 신앙주의적 도약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동료 학자들에게 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으며, 일례로 1907년에는 미시건 대학교의 한 교수가 제임스를 비판하는 《의심하려는 의지》(Will to Doubt)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역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석에서나 강의 중에서는 언뜻언뜻 신앙주의의 차원에서 종교의 가치를 평가했다는 후학들의 후문이 전해지고 있다.
현대 들어 가장 흥미로운 신앙주의의 사례는 바로 항목 상단에도 언급된 마틴 가드너(Martin Gardener)일 것이다. 그의 이력은 마이클 패러데이의 이력만큼이나 매우 독특하다. 그는 한편으로는 과학적 회의주의자로서 CSICOP 회원이며, 소위 귀신들린 집(haunted house)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하고, 교양지 《사이언스 픽션 매거진》에 정기적으로 수학 퍼즐을 연재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와 동시에 유신론자다.(…) 이 때문에 가드너 본인 및 그를 여러 모로 칭찬해 마지않는 동료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 등이 상당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드너의 신관(神觀)은 일반적인 제도권 개신교와는 약간 결이 다른 것으로 보이며, 셔머의 언급을 인용하면, Credo quia consolans 개념의 한 종류에 가깝다고 구분할 수 있다.
칼뱅주의 계통의 유신론자이자 분석철학자인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는 칼뱅주의 장로회 변증학에 신앙주의를 이끌고 들어간 인물로 꼽히며, 이로 인해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과 같은 칼뱅주의 변증학에서도 그에 대한 일련의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한때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 계통의 무신론자였다가 개신교인으로 전향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이어령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의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그 제목에서부터 신앙주의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비판
4.1. 종교적 비판
신앙주의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가톨릭에서는 신의 존재나 절대적 진리에 대한 설명들이 이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 이러한 관점의 뿌리는 저 토마스 아퀴나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표현도 존재한다. 결국 1870년에 소집된 가톨릭의 무류적인 세계 보편 공의회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앙주의를 이단 교설로 단죄하였다.이성과 절대적 진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은 의외로 복잡 미묘하다. 일반 신자들이 무조건적인 반지성주의를 외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을 논외로 한다면, 적어도 신학자들의 관점은 신앙주의에 대해 그렇게 큰 찬사를 보내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개신교 저술가 마이클 호튼(M.S.Horton)은 "무분별한 비약" 을 운운하며 믿음을 터무니없는 주장과 동일선상에 놓으려는 시도를 비판했으며, 신학자 그린 2세(W.B.Green Jr.)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논문에서 "신앙은 이성을 기초로 하는 증거에 동의하는 확신까지 포함한다" 고 주장하였다. 다른 신학자 벤저민 워필드(B.B.Warfield) 역시 "바른 이성" 의 가치를 강조한 바 있다.
"...믿음은 터무니없는 생각과 동의어가 아닐뿐더러, 무분별한 비약이 이루어지는 비이성적, 비역사적, 비지식적 영역이나 단순 의지적 행동에 속하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이성과 역사에 속하는 엄정한 질문에서 신앙을 분리하기보다는 신앙이 다른 모든 것의 시련을 견뎌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다. 실제로 부활을 초석으로 삼는 성경적 신앙을 논증해야 할 논증의 부담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 M.S.Horton, p.143
- M.S.Horton, p.143
더불어 Credo quia Consolans 개념에 대해서도 그것이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될 여지가 남아 있다. 즉 "내게 위로가 되기에 믿는다"는 말대로라면, 자신의 신앙생활이 자신에게 만족감이나 위로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거리낌없이 그것을 버릴 용의가 있음을 내포하게 된다. 이는 계시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인간 중심적이고 편의적인 종교로 격하하는 것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닌, "인간의 필요에 의해 존재가 요청된 자"(Gott als ein Postulat der Vernunft) 로 설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무신론 진영에서 흔하게 나오는 레퍼토리와도 매우 유사하다.
신앙주의는 이성과 절대적 진리 간의 문제 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한계가 있다. 현실 생활에서 이성이 관여하는 부분과 충돌하는 경우도 문제가 된다. 가령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종교에서 신앙주의자는 동성애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할 것인지 분명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종교적인 이성이나 사회보수주의적인 이성을 따랐을 때 동성애를 반대해야하지만[2], 신앙주의를 따르자면 동성애자들도 종교의 경전을 뛰어넘어 신앙을 가질 수 있으므로 동성애를 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몇 진보적인 기독교 교단에서는 무조건적인 정죄보다 관용과 사랑("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을 우위로 보아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식으로 해결하지만, 전쟁이나 낙태처럼 타인에 대한 가치 판단이 개입하는 쟁점에서는 어느 쪽이든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한다.
또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끼리 신앙에 대한 의견 충돌이 발생할 때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도 지적거리다. 예컨대 삼위일체론에서 예수는 신성만을 가졌는가, 인성만을 가졌는가, 혹은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공통된 교리의 전제에서 시작된 이성적인 논증의 산물이다. 즉, 신앙에서 이성을 제거하면 이단에 대처할 수가 없어진다. 보편교회를 지향하고 중앙집권적인 구조를 가진 가톨릭이 신앙주의에 부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며
게다가 이러한 문제점은 어느 종교적 진영에서만 나타나는 문제점이 아니다. 흔히들 진보 종교계에서 이성을 중시하기에 이런 일이 드물고 보수 종교계에서 나타나기 쉽겠다고 호도할 수 있겠으나, 자유주의 신학에 속하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신앙을 절대의존감정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으며, 기독교계의 이단 및 사이비 종파들에서 보수 신학계의 이성(정통 조직신학)을 배격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통해서 자신들의 교도권을 넓히려고 시도하는 등 이성과 신앙의 관계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고 쉽게 이렇다고 딱잘라서 말하기 어렵다.
4.2. 비종교적 비판
신앙주의는 합리주의와 상극이다. 이 때문에 무신론이나 신(新)합리주의 및 과학주의 계통의 무신론자들이 굉장히 싫어하는 논증이기도 하다. 사실 신앙주의는 유신론이 과거와 달리 무신론에 대해 적극적으로 신 존재증명 같은 문제에 대해 이성과 논리의 차원으로 도전하는 것을 자제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대개의 경우 무신론자들이 유신론자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하고 그 역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앙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이성의 잣대를 회피했을 때 직면하게 되는 패러디 종교에 대한 판단의 문제로,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과 같은 가상의 이야기는 실제로 신앙주의의 맹점을 잘 공격할 수 있다.인지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신앙을 향한 이성의 도약" 이라는 신앙주의적 표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일갈을 날린 바 있는데, 즉 이성의 힘만으로 문제의 해결이 가능한 평소 같았어도 이성을 뛰어넘는 도약 같은 것을 운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즉 이를 다시 부연하면, 평소에는 이성이 워낙 효과적이라 신앙은 거의 묻혀 있다가, 그 신앙이 이성에 의해 위협받는 순간 뒤늦게 억지로 이끌고 들어온 개념이 "이성을 뛰어넘는 도약" 이 된다는 것이다. 데닛에 따르면 "신앙을 향한 이성의 도약" 이라는 입장은 사실 신앙의 가치가 이성에 의해 위협당하는 순간에만 유효한 것이며, 실제로는 이성과 신앙이 크게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때에는 신앙에 아무런 가치가 부여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걸 은폐하려 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편 Credo quia Consolans 역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는데, 어쩌면 가장 온건한 비판자일 마이클 셔머는 심리학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설명을 좋아하는 행태를 보이며, 이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추켜세웠던 마틴 가드너에게 가해지는 비판을 의식했을 그는 이에 덧붙여서 "...이러한 만족감을 찾고자 하는 욕구는 과학적 회의주의자라 해도 다를 바가 아니다" 라고도 해명했다.
현대논리학의 거장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W.Russell) 경은 아마도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 하나일 것인데, 그는 기존의 자신의 비종교적 성향에 덧붙여서 다음과 같은 강경한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이는 실제로 반기독교 관련 커뮤니티 등에서 흔히 떠돌곤 하는 유명 어록이기도 하다.
"사람을 안이하게 만들어 주는 꾸며 낸 이야기의 도움 없이는 삶의 위험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연약하고 상당히 비열한 면이 숨어 있다. 그의 어떤 부분은 거의 필연적으로 그것이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며, 그것을 믿는 이유는 단지 편안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이런 생각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다. 게다가 희미하게나마 스스로의 의견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논박당하면 굉장히 화를 내게 된다."
- 버트런드 러셀
- 버트런드 러셀
그 외에도 반신론적인 반박도 가능한데, "내게 위안이 되므로 믿는다" 는 발상은 단순히 행복한 노예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신앙주의 자체가 그나마 조금 더 유화적인 종교적 입장이라고는 하나,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반신론과는 여전히 극단적으로 상충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자유사상의 관점에서 보아도 신앙주의는 특정 도그마를 의심 없이 신봉하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능하다.
[1] 실제로 상당수 신학자들은 신 존재증명 자체가 신학의 차원에서, 그리고 신앙의 차원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2] 보수진영이나 종교진영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히 혐오스러워서나 성경에 나와서나 문화적 전통을 따라서가 아니라 동성애는 제3자의 도움 없이는 부부끼리 출산을 할 수 없으므로 저출산 풍조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는 사회적인 우려도 함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