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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프록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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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131230><tablebgcolor=#131230>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두산 베어스
역대 외국인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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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프록터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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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 등번호 56번
후안 리베라
(2001)
<colbgcolor=#c4ced4,#2a343a><colcolor=#132448,#b6c7ec> 스캇 프록터
(2004)
태니언 스터츠
(2004~2006)
뉴욕 양키스 등번호 57번
앨릭스 그래먼
(2004)
스캇 프록터
(2004)
비달 누뇨 3세
(2014)
뉴욕 양키스 등번호 43번
호르헤 데파울라
(2004)
스캇 프록터
(2005~2007)
대럴 래스너
(2008)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45번
브레이디 클라크
(2007)
스캇 프록터
(2007~2008)
브렌트 리치
(2009)
{{{#ffffff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36번}}}
분 로건
(2009)
스캇 프록터
(2010)
마이크 마이너
(2011~2014)
{{{#ffffff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43번}}}
카일 판스워스
(2010)
스캇 프록터
(2011)
훌리오 테헤란
(2011)
뉴욕 양키스 등번호 41번
제프 마르케스
(2011)
스캇 프록터
(2011)
이가라시 료타
(2012)
두산 베어스 등번호 30번
페르난도
(2011.5.5.~2011)
프록터
(2012)
올슨
(2013~2013.7.15.)
}}} ||
}}} ||
파일:스캇프록터.jpg
스캇 프록터
Scott Proctor
본명 스콧 크리스토퍼 프록터
Scott Christopher Proctor
출생 1977년 1월 2일 ([age(1977-01-02)]세)
플로리다 주 스튜어트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경영학 / 학사)
신체 185cm, 88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5년 드래프트 17라운드 (전체 469번, NYM)
1998년 드래프트 5라운드 (전체 156번, LAD)
소속팀 뉴욕 양키스 (2004~200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7~2008)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2010~2011)
뉴욕 양키스 (2011)
두산 베어스 (2012)

1. 개요2. 선수 경력
2.1. 메이저 리그 시절2.2. KBO 리그 시절2.3. 마이너리그 복귀와 은퇴
3. 피칭 스타일4. 기타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미국의 前 야구 선수. 중간 계투로 주로 활약했으며 2012년 한 해동안 두산 베어스의 외국인 투수로 뛰었다.

뉴욕 양키스 시절 조 토레의 남자라는 좋지만 씁쓸한 별명이 붙어있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KBO 리그에 온 모든 외국인 투수들 가운데도 최상위급 커리어를 가진 외국인 투수로 평가받는다.

2. 선수 경력

2.1. 메이저 리그 시절

"이봐, 자넨 아직 돈도 넉넉히 벌지 못했다고. 우리를 도와주는 건 좋지만 커리어가 망가지고 있잖아."[1]
"그럴 순 없어요. 감독님이 필요한다면 언제든지 등판할겁니다."
- 양키스 단장 브라이언 캐시먼과 프록터의 대화, 2011년 인터뷰 中
"감독의 등판 지시를 거부하는 선수는 절대로 없습니다."[2]
- 브라이언 캐시먼, 조 토레의 구원투수 혹사를 비난하며
"조 토레는 프록터를 사랑합니다. 너무 사랑해서 할 수만 있다면 시즌 162경기에 모두 투입하겠죠. 7회에 접전일때도 올라오고, 3연투를 해도 올라오고, 8회에 12대 0으로 팀이 앞서 있을때도 올라오죠. 폴 콴트릴, 톰 고든, 스티브 카세이, 크리스 해먼드 등 모두 조 토레의 남자가 되는 순간 2년 안에 부상으로 나가 떨어진 거 알죠? 프록터씨, 아직 당신 오른팔이 불구가 아닐 때 즐겨 쓰길 바래요."
- 2007년 당시 83경기 102.1이닝을 던진 프록터의 혹사에 경악을 한 미국의 야구 블로거[3]
파일:양키스프록터.jpg
뉴욕 양키스 시절

프록터는 1995년 17라운드로 뉴욕 메츠에 지명되었으나 계약하지 않고 ACC(Atlantic College Conference) 소속 플로리다 주립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1998년 5라운드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한다. 더블A까지 주로 선발로 활약한 프록터는 2003년 7월 31일 양키스의 로빈 벤추라 트레이드에서 버바 크로스비와 함께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고, 이적 후 불펜으로 전환해 2004년 처음 빅리그 무대를 밟았다. 두 시즌간 추격조로 주로 나서며 총 70이닝 가까이 던진 프록터는, 2006년 포텐셜을 터뜨리며 마리아노 리베라[4]를 제외하면 꿈도 희망도 없던 처참한 양키스 불펜진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문제는 정말 프록터 말고 괜찮은 불펜 투수가 없다보니, 조 토레 양키스 감독이 프록터를 미친듯이 굴렸다. 4월 한달간 9경기 16이닝이라는 페이스로 공을 던진 프록터는 5월들어서는 멀티이닝을 줄였지만 그만큼 등판 간격이 좁아지며 결국 두 달간 34이닝을 던져 시즌 100이닝 페이스를 벌써부터 보였고, 결국 5월 말부터 퍼지기 시작해 6월 월간 ERA가 5점대를 마킹할 정도로 페이스가 처졌다. 그러나 양키스에는 페이스가 처진 프록터보다 좋은 불펜이 마땅히 없어서(…) 토레는 계속해서 프록터를 굴렸고,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페이스가 다소 돌아오자 8월에는 한 달간 17경기 22이닝으로 양키스가 한 달간 치른 경기의 절반 이상에 등판해 경기당 평균 1이닝 이상을 책임지게 되었다. 9월들어 그나마 조금 관리를 받았지만, 이미 프록터의 혹사 지수는 정도를 넘어선 상황. 결국 2006년 프록터는 83경기 102.1이닝 6승 4패 26홀드(AL 1위) ERA 3,52로, 순수 불펜이 한 시즌 100이닝을 돌파[5]하는 미친 기록을 남겼다.미국판 살려조 or 킬라인 여기에 포스트시즌에 던진 4이닝은 덤.

이러한 불펜 사정은 이듬해인 2007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아서 LOOGY였던 마이크 마이어스를 제외하면 2점대 ERA가 전무했고, 그 마리아노 리베라조차 ERA가 3점대를 찍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프록터는 이 시즌에도 노예처럼 굴려지다가 2007년 7월 31일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맞춰 윌슨 베테미트와의 1대1 트레이드를 통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건너갔다.

하지만 다저스 역시 선발진의 무게감이 부족하다 보니 불펜들을 다수 기용해야 했고, 프록터는 다저스에서도 2달동안 30이닝 넘게 던졌다. 그나마 양키스 시절보다는 불펜진이 풍족해서 관리를 조금 받았지만. 아무튼 2007년에도 80경기 넘게 던지고 80이닝을 넘겼으며 ERA는 3점대로 불펜의 마당쇠로 나름 잘 던지긴 했으나, 세부 지표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프록터는 2006년 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이미 과하게 던지고 있었다. 2004년부터 프록터는 메이저와 마이너를 포함해 매 시즌 각각 67-87.1-102.1-86.1로, 4년간 343이닝, 연 평균 약 86이닝을 던지고 있었는데, 그나마 이것도 비교적 적게 던진 2004년을 포함해서 그렇지 2005년부터 3년간은 연 평균 92이닝을 던졌으니 경기 수가 많은 메이저리그임을 감안해도 이건 명백한 혹사다. 그나마 2006년까지는 프록터가 어떻게든 버텼지만, 누적된 혹사 여파는 2007년 모든 세부지표가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본격적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삼진은 줄고 볼넷은 늘었는데 이닝 소화는 줄어들고 피홈런은 그대로였는데, 이때문에 ERA는 0.1 오르고 마는 정도에 그쳤지만 전년도에 3.96이던 FIP가 5.30까지 치솟았다. 프록터의 구위는 분명한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년 사이 1마일 가깝게 떨어졌다.(2006년 94.4mph → 2007년 93.5mph)
파일:LA프록터.jpg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그리고 운명의 장난인지, 2008년 조 토레 감독이 다저스에 부임하며 프록터를 따라왔다(…). 하지만 망가질대로 망가진 프록터의 구위는 이제 평균 구속이 93마일을 넘지 못할 정도로 떨어졌고, 결국 패전조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다가 6월 말 마이너로 강등되었다. 9월 확장엔트리때 다시 메이저로 콜업되었지만 인상적인 모습은 보이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났다. 이후 2009년 시즌을 앞두고 플로리다 말린스와 계약했지만 입단 직후 부상이 발견되어 검진한 결과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되며 2009년 한 해를 통째로 날렸다.
파일:ATL프록터.jpg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시절

2010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했지만 트리플A에서도 6점대 ERA를 찍을 정도로 망했으며 메이저 리그에서도 5.2이닝을 던지는데 그쳤다. 시즌 후 마이너 계약으로 애틀랜타와 재계약해 커리어를 이어간 프록터는 2011년 트리플A에서의 좋은 성적으로 다시 한 번 빅리그 무대를 밟았지만,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경기 홈런과 장타를 맞으면서 화끈한 불쇼를 보여줬다. 이때 프록터에게 붙은 별명이 패배보증수표, 경기 종결자, 개락터 등등. 혹사로 커리어가 망가진 선수에게 어찌보면 가혹한 처사이기도 했다. 와중에 7월 26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경기에서는 연장 17회부터 19회까지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19회말 타석에 들어서 심판의 퇴근 본능 덕에 끝내기 땅볼 타점을 기록했다(…). 동영상 링크 그 와중 프록터의 깨알같은 몸개그

부진을 이어가던 프록터는 결국 8월 10일 애틀랜타에서 방출되었고, 3일 후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며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프록터의 양키스 입단 후 성적은 8경기 11이닝 11실점 ERA 9.00(…). 무엇보다도 2011 MLB 와일드카드 레이스의 대미를 장식했는데, 에반 롱고리아에게 탬파베이의 와일드카드 진출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맞은 투수다(…). 이 때문에 두산 베어스 계약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은 잠실에 가서 야유를 보내겠다며 벼르기도.

2.2. KBO 리그 시절

파일:49456202.2.jpg

결국 시즌 종료 후 양키스에서 방출된 프록터는 마땅한 팀을 구하지 못해 해외 리그로 눈을 돌렸고, 더스틴 니퍼트의 활약으로 재미를 봤던 한국의 두산 베어스가 계약금 5만달러, 연봉 25만달러에 마무리 투수로 한국 무대를 밟게 되었다.[6]

4월 8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정규시즌 넥센 히어로즈와의 개막 시리즈 2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11:13으로 앞서던 9회초에 올라와서 2아웃까지 잡은 후 장기영에게 볼넷을 내주고 김민우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이택근을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해 무실점으로 막고 자신의 한국 무대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이날 프록터의 기록은 1이닝 22투구수 1피안타 1볼넷 무실점 세이브.

4월 18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팀이 3:4로 이기던 9회초에 등판. 선두 타자 박석민을 1루수 최준석의 실책으로 출루시킨 뒤 1사 2루에서 손주인에게 좌익수 앞 안타를 맞았지만 김현수의 훌륭한 홈 송구와 포수 최재훈의 블로킹으로 대주자 강명구가 아웃되었고 계속 되는 2사 2루의 위기에서 2루 레이저 송구로 2루 주자 손주인을 견제사로 잡아내 이닝을 종료하여 세이브를 따냈다. 보다시피 대단히 아슬아슬하게 세이브를 올렸지만 그와 별개로 파울플라이를 잡기위해 덕아웃방향으로 매우 열심히 뛰어간다던가 1루수 최준석의 실책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던가 굉장한 파이팅과 의지를 보여줘서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이 날 프록터의 기록은 1이닝 25투구수 1피안타 무실점.

4월 24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팀이 2:1로 이기던 9회말에 등판해서 1이닝 21투구수 1볼넷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고, 세이브를 하나 더 추가해서 시즌 3세이브를 달성했다. 제구가 불안하다는 단점이 보이긴 했지만 구위로 찍어 눌러서 어떻게든 세이브를 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4월 29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팀이 3:4로 이기던 9회초에 등판. 선두 타자 대타 김상훈에게 볼넷을 내주고 신종길에게 안타를 맞으며 멸망하나 싶었지만 대주자 윤완주가 3루에서 아웃되면서 한숨을 돌렸다. 다음 타자 이용규에게 2루수 땅볼 진루타를 허용하고 안치홍 타석 때 포일이 나와서 2사 3루의 위기에 몰렸지만 안치홍을 투수 땅볼로 잡아내어 1이닝을 18투구수 1피안타 1볼넷으로 꾸역꾸역 막고 시즌 6세이브째를 챙기며 세이브 단독 1위에 올랐다.

4월의 투구 내용을 뜯어보면 매 경기마다 주자를 한 두명 출루 시키고 실투도 종종 나오는등 불안한 모습이 보였지만 위기상황마다 두산의 수비진이 기를 쓰고 수비를 성공하여 어쨌든 블론세이브 한번 없이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두산 팬들조차 뽀록터라고 부르면서 언젠가 불지를 것 같다며 불안해 하였다. 하지만 내용이야 어쨌든 2012년 4월 동안 평균자책점 1.29에 6세이브 기록. 당시 마무리투수 중 기록상으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였다.

5월 15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3회초까지 스코어 6:0으로 지던 팀이 6:11로 역전하는 바람에 등판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대졸 1년차 신인 투수 윤명준 9회초에 올라와 ⅓이닝 2실점을 하여 스코어 8:11, 1사 2루를 만들자 세이브 상황이 완성되어 윤명준의 뒤를 이어 등판했다. 최진행의 타구를 잡은 이원석이 송구 실책을 저지르면서 1사 1, 3루가 되어 위기에 몰렸지만 이날 실책 2개를 저지르며 경기를 지배했던 이대수를 유격수 병살타로 잡아내고 경기를 끝내고 시즌 11세이브를 달성했다. 이 날 프록터는 ⅔이닝 9투구수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다.

6월 12일, 결국 일이 터졌다. 사직에서 펼쳐진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연장 11회초 고영민의 홈런으로 3:2로 리드한 11회말에 마무리로 나섰으나 황재균에 내야안타, 1사후 정보명에게 중전안타를 얻어맞고 시즌 첫 블론세이브를 기록했고, 12회말 계속되는 제구력 난조속에 2사 후 조성환에게 밀리런어내기 볼넷을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시즌 첫 패이자 한국 첫 패.

하지만 이틀 뒤, 다시 만난 롯데를 2개의 삼진 포함, 3자범퇴로 막아내며 세이브를 여유있게 추가했다. 이날 경기 기준 시즌 16세이브로 단독 1위이다.[7]

그런데 19세이브를 하고 있던 6월 22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팀이 스코어 2:4로 앞선 9회말에 등판해 고동진이대수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장작을 쌓더니 양성우와 한상훈에게 연속으로 스트레이트 볼넷을 작렬하며 2개로 밀어내기로 1점을 내주고 말았다. 게다가 장성호의 1루수 땅볼 타구를 1루수 최재훈이 홈에 악송구를 하면서 3루주자 이대수가 홈을 밟아 스코어 4:4가 되면서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고 말았다. 다음 타자인 김태균좌익수 땅볼을 쳐서 3루주자 양성우가 홈에서 아웃되면서 1사 만루가 되었는데, 결국 최진행에게 끝내기 우익수 앞 안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프록터의 이날 기록은 ⅓이닝 34투구수 3피안타 2볼넷 3실점 3자책점.[8]

그래도 이틀 뒤인 6월 24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전에서 팀이 스코어 8:7로 아슬아슬하게 앞선 10회말 무사 1루에서 변진수를 구원해 등판, 고동진을 쓰리번트 삼진으로 잡아내고, 대타 이대수를 병살타로 처리, 시즌 20세이브로 자신이 건재함을 알렸다. 프록터의 이날 기록은 1이닝 8투구수 1탈삼진 무실점 세이브.

그런데 6월 28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팀이 스코어 4:2로 앞선 9회말에 등판하여 2아웃까지 잘 잡아놓고 유한준, 서건창, 김민성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1실점하더니, 2사 1, 3루에서 보크를 작렬하여 3루주자가 홈인, 동점을 만들고 시즌 세 번째 블론세이브를 시전하였다. 그나마 2사 2루의 위기에서 지석훈을 삼진으로 잡아내 이닝을 마쳤고 팀은 연장 10회초에 2점을 내어 스코어 6:4로 승리하였다. 프록터가 블론세이브를 저질렀지만 승리 투수 요건은 갖췄는데, 기록원들은 10회말에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은 임태훈에게 승리를 기록했다. 이 날 프록터의 기록은 1이닝 25투구수 1탈삼진 2실점 2자책점 블론세이브.

7월 3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팀이 스코어 5:4로 앞선 9회말 등판하였는데,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대타 나지완에게 실투성 볼이 위로 솟구쳤는데, 이를 빈볼로 오해한 나지완이[9] 화를 내며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났다. 이 때 나지완에게 비하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오해를 받았으나(나지완이 'Yellow Pig'라며 인종차별 발언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본인이 'Yell it me NIP'이라고 말하며 오해를 풀었다.[10] (NIP은 더스틴 니퍼트의 애칭) 이후 조영훈에게 안타를 맞았으나, 차일목을 삼진으로 잡으며 경기 마무리, 팀은 5:4로 승리했고 프록터는 1이닝 23투구수 1피안타 1볼넷 2탈삼진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챙겼다. 하지만 이 일은 오히려 김현수, 나지완과 함께 논쟁거리를 만들게 되었다.

17일 경기에서 4:0으로 앞서고 있었으나 홍상삼이 남긴 주자 2명인 상황에서 올라왔으나 깔끔하게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본인은 1삼진 무실점 세이브를 거두었다.(시즌 22세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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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록터 본인이 시즌 중 직접 제작해 두산 선수단 전원에게 선물했던 티셔츠

8월 29일 LG전에서 컨디션 점검 차 등판했다.

9월 2일 SK 전에서는 4:3으로 앞서 있던 세이브 상황에서 더스틴 니퍼트를 구원해서 등판했지만, 그만 블론세이브를 저지르고 말았지만 팀이 9회 초에 2점을 내면서 6:4로 승리해서 구원승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이날 삼성의 오승환이 세이브를 추가하여 구원 공동 1위 자리를 허용했다.

9월 5일 한화 전에서는 6:5로 앞서 있던 세이브 상황에서 9회말에 김태균으로부터 끝내기 안타를 얻어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올 시즌 한화에게만 벌써 2패. 그리고 이날 삼성의 오승환이 세이브를 추가하면서 기어이 구원 단독 1위를 오승환에게 내주고 말았다.

9월 7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11회초 서건창에게 안타를 맞은 후 견제 동작을 취하려다 보크를 범해 2루 진루를 허용하였다. 이후 3루를 훔치려는 서건창을 잡으려 했으나, 송구가 빗나가 공이 뒤로 빠지며 그대로 득점 허용. 온갖 실책을 저지르며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팀이 시리즈 전적 2패로 지던 10월 11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3차전 스코어 7:2로 앞선 9회말에 6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볼넷과 내야안타를 허용하며 위기를 맞았지만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이날 프록터는 1이닝 19투구수 1피안타 1볼넷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10월 12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4차전 스코어 3:3인 10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6번째 투수로 등판했는데, 2구째 공이 원바운드 폭투가 되었고, 이에 2루주자 박준서가 3루로 달리자 양의지가 박준서를 아웃시키려고 3루로 송구했으나 송구 에러가 나오면서 박준서가 홈에 들어오는 바람에 스코어 3:4로 경기가 끝나고 말았다.

프록터는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1이닝 1피안타 1볼넷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탈락했다. 어째 팀 패배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지만, 프록터를 비판하는 팬은 거의 없는 편이다. 보통은 공수에서 열심히 삽질한 양의지[11]나 지나치게 프록터를 아끼고 소극적인 투수운용을 보여준 김진욱 감독이 까였다.

시즌 종료 후 12월 26일, 두산은 김승회가 빠져나간 선발진을 보강한다는 이유로 프록터와의 재계약을 포기했다. 선수 보유권도 풀어 KBO 내 다른 구단에서도 뛸 수 있게 되었지만 NC와 LG를 제외하고는 용병 협상이 마무리된 데다 NC는 새 용병을 뽑기로 방침을 확정한 상태라 사실상 갈 곳이 없었고 결국 미국으로 유턴을 선택하며 KBO 리그와의 인연은 한 시즌으로 끝났다.

그래도 2012 시즌 두산의 뒷문을 단단히 지켜낸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 외국인 마무리투수라는 색다른 점도 국내 야구팬들에게 관심을 샀고, 인성이나 실력으로나 한 시즌밖에 프록터를 볼 수 밖에 없었서 당시 아쉬워 했던 두산 팬이 상당했었다. 특히나 프록터 이후 2016시즌 마이클 보우덴이 나타나기 전까지, 니퍼트의 외인 파트너 투수가 하나같이 부진한 모습을 보인 탓에 프록터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더 많아지기도 했다. 여러모로 잊지 못할 한국에서의 한 시즌.

2.3. 마이너리그 복귀와 은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지만 시범경기에서 13이닝을 던지는 동안 ERA 4.15로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3월말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ERA 8.59로 부진하며 4월 말 방출,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3. 피칭 스타일

90마일 중반대의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이 주 무기였으며, 변화구로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구사했다. 다만 패스트볼에 비해 변화구는 위력적이지는 않았으며, 커맨드도 딱히 좋지 않아 볼질도 자주 했다. 커리어 하이였던 2006년 BB/9이 2.9인데, 그 외에는 3 밑으로 내려가본적이 없고 보통 4를 넘곤 했다. 그래도 묵직한 패스트볼을 기반으로 빅리그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혹사의 여파로 구위가 망가지자 장점이 없는 투수가 되었고 결국 빅리그에서 밀려났다. 그래도 2011년 패스트볼 구속 자체는 다시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를 바탕으로 두산 베어스에서는 훌륭한 마무리 투수로 활약할 수 있었다.

4. 기타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NYY 26 25 2 1 0 2 0.667 5.40 29 5 14 21 18 15 1.720
2005 29 44⅔ 1 0 0 0 1.000 6.04 46 10 23 36 32 30 1.410
2006 83 102⅓ 6 4 1 26 0.600 3.52 89 12 41 89 41 40 1.192
2007 52 54⅓ 2 5 0 11 0.286 3.81 53 8 35 37 27 23 1.50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7 LAD 31 32 3 0 0 7 1.000 3.38 25 4 19 27 14 12 1.250
2008 41 38⅔ 2 0 0 2 1.000 6.05 41 7 25 46 30 26 1.68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0 ATL 6 5⅔ 0 0 0 0 0.000 6.35 4 1 5 6 4 4 1.412
2011 39 29⅓ 2 3 0 4 0.400 6.44 31 5 24 18 21 21 1.70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1 NYY 8 11 0 3 0 0 0.000 9.00 19 6 13 11 13 11 2.81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2 두산 57 55⅓ 4 4 35
(2위)
0 0.500 1.79 43 0 22 46 15 11 1.157
<colbgcolor=#ffff88> MLB 통산
(7시즌)
307 343 18 16 1 52 0.529 4.78 337 58 199 291 200 182 1.469
KBO 통산
(1시즌)
57 55⅓ 4 4 35 0 0.500 1.79 43 0 22 46 15 11 1.157

6. 관련 문서


[1] 참고로 프록터는 주로 연봉조정이나 마이너 계약으로 커리어를 이어갔기 때문에 메이저리그에서 7시즌을 뛰고도 통산 438만 달러 정도를 버는데 그쳤다.(Spotrac 기준) MLB 연봉만 따지면 사실상 최저연봉보다 조금 넘게 받고 뛴 셈이고, KBO 시절을 합치더라도 500만달러를 안팎으로 추정되는 정도다. 연봉 115만 달러를 딱 한 번 받은 걸 빼면 100만 달러도 받아본 적이 없다.[2] 같은 인터뷰[3] 출처[4] 마리아노 리베라도 1996년 주전 마무리투수였던 존 웨틀랜드의 셋업맨으로 뛸 때 단 한 번의 선발등판도 없이 정규시즌 100이닝을 넘겼고 2001년 월드 시리즈 직전까지도 마리아노 리베라에게 포스트시즌 멀티이닝을 수 차례 지시하여 관리책임문제가 제기되는 등 조 토레 감독은 특유의 인화력으로 90년대 중후반 양키 다이너스티를 구축한 공로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투수 혹사 측면에서의 그림자가 존재하는 감독이다.[5] 참고로 2006년 프록터 이후 MLB에서 순수 불펜으로 한 시즌 100이닝을 넘긴 투수는 단 한 명도 없다. 팀 불펜진을 구실로 삼은 토레의 혹사가 얼마나 정도를 넘어섰는지 알 수 있는 부분.[6] 그만큼 당시 두산 불펜진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09년의 KILL라인 선수들 모두 김경문의 혹사 여파로 작살나면서 불펜 뎁스가 심각하게 옅어졌고, 그나마도 김승회는 5선발 땜빵을 돌아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페르난도 니에베를 불펜으로 돌려야했다.[7] 양의지의 역전 2점홈런이 없었다면 김사율이 15세이브로 공동1위로 올라올 수도 있었다.[8] 특히나 이날경기는 선발투수가 김선우 vs 박찬호로 MLB 완봉기록 있는 한인투수들의 선발매치여서 기대를 모았고 당시 두산은 박찬호에게 2번이나 승리투수를 헌납했었고 김선우는 승운이 없었던 상황에서 김선우가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고 박찬호가 두산전 첫 패를 기록할수 있는 상황에서 블론세이브를 범했다. 보통 불펜들이 승리를 날려도 멋쩍은 웃음만 짓던 김선우가 덕아웃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이 잡혔다.[9] 일전에 큰 타구를 치고 셀러브레이션을 한 적이 있어서 그에 대한 보복구로 생각했다고 한다.[10] 애초에 경기중에 덕아웃에 있어 들리지도 않을 니퍼트에게 말한것도 오해사기에 충분했다.[11] 사실 마지막 폭투 상황만 봐도 그정도 원바운드 볼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거였는데 양의지의 블로킹이 다소 불안해서 공이 생각보다 더 튀었다. 이어진 박준서의 3루 진루는 과감했지만 송구만 제대로 가면 아웃 타이밍이었는데 거기서 악송구를 범한 것 역시 양의지였다. 당연히 경기 종료 후 두산 팬들에게 양의지는 미친 듯이 까였다. 양의지가 공수 양면에서 완벽한 선수가 된 2020년대에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12]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경영학 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