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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8 10:41:08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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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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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소련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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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공국
Eestimaa hertsogkond(에스토니아어)
Hertigdömet Estland(스웨덴어)
Herzogtum Estland(독일어)
파일:스웨덴 제국 국기.svg 파일:에스토니아 공국 문장.png
국기[1] 문장
<nopad> 파일:Sw_BalticProv_en.png
에스토니아 공국의 판도
1561년 ~ 1721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튜튼 기사단  러시아 제국
위치 에스토니아 북부
수도 레발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스웨덴 국왕
공용어 스웨덴어, 독일어, 에스토니아어
종족 스웨덴인, 발트 독일인, 에스토니아인
종교 스웨덴 교회(루터교회)

1. 개요2. 상세3. 사회 개혁

1. 개요

1561년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의 명령을 받은 스웨덴계 핀란드인 귀족 클라스 크리스터손 호른(Klas Kristersson Horn 1517~1566)이 레발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북부[2]를 점령한 후 신설되었으며, 대북방전쟁을 종결시킨 1721년의 뉘스타드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러시아 점령 이후 발트 독일인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에스토니아인은 이 시기를 "Vana hea Rootsi aeg" 이른바 "행복했던 스웨덴 시절"[3]이라고 칭했으나 막상 스웨덴도 에스토니아 통치는 발트 독일인에게 위임했고, 초기에는 농노의 부담이 늘어나는 등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칼 11세가 발트 독일인과 교회의 권력을 견제하면서 토지 사유를 제한하고 귀족 영지를 국유화하는 정책을 실시했으며 사법제도를 개정하며 이때부터 농노들이 지주를 합법적으로 고소할 수 있게 되었고, 농노들의 군복무를 허용해서 에스토니아인이 출세할 수 있게 되는 길을 열게 되며, 처우가 나아지기는 했다.

2. 상세

적어도 중세 이후 에스토니아에 정착한 스웨덴인이 있었으며 핀란드 십자군 이후 스웨덴은 에스토니아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에스토니아에는 튜튼 기사단의 지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진주하여 독일인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나, 튜튼 기사단이 쇠퇴하고 스웨덴도 칼마르 연합에서 탈퇴하여 주권을 되찾으면서 에스토니아에 대한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미래의 요한 3세로 즉위하는 핀란드 공작 요한은 에스토니아를 점령하려 했지만 부왕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제지로 실패했다. 대신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고 1561년, 에스토니아 북부의 발트 독일인 귀족들이 스웨덴에 보호를 요청하자 요한의 이복형인 에리크 14세스웨덴계 핀란드인 귀족 클라스 크리스터손 호른(Klas Kristersson Horn 1517~1566)을 보내 에스토니아 북부를 점령했고, 그 대가로 발트 독일인 귀족들의 특권과 관습을 보장해주었다. 리보니아 전쟁은 1583년 플루사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스웨덴은 기존에 얻은 영토에 더해 나르바까지 획득하였다.

이전에는 현재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전체를 지칭했던 리보니아라는 명칭은 이제 폴란드-리투아니아령 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를 지칭하게 되었고, 에스토니아는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었다. 에스토니아라는 용어가 에스토니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가 되어서였다.

스웨덴은 플루사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에스토니아 행정 개편을 시작했다. 리보니아에서 발트 독일인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달리 스웨덴은 에스토니아에서 발트 독일인들의 특권을 존중했다. 이들은 3년 마다 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총회(Landtag)와 행정 기관인 행정관 협회(Landratscollegium)에 참여할 권리를 얻었으며 스웨덴 국왕이 파견한 총독이 현지 발트 독일인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에스토니아를 통치했다. 에리크 14세, 요한 3세 형제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영토들을 귀족들에게 내어주었고 16세기 말까지 에스토니아 토지의 대부분은 발트 독일인 귀족들의 사유지였다. 바사 왕조는 발트 독일인들의 현지 권력을 억제하려 시도했으나 칼 9세,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크리스티나 여왕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칼 10세 구스타브까지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충성심을 얻기 위해 큰 제한을 가하지는 않았다.

일련의 전쟁이 끝나자 칼 11세는 발트 독일인 귀족들을 대상으로 불시 시찰을 단행하여 종교 생활과 학문의 자유 등을 검열했다. 주교나 감독관 같은 고위 성직자들이 에스토니아인 농민들을 대상으로 종교를 검열했고 이교도가톨릭의 잔재를 청산하러 다녔다. 절대 왕정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칼 11세는 본토인 스웨덴핀란드, 외지인 스코네, 옘틀란드,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와의 연계를 강화하려 했고, 1680년 스웨덴 의회로 하여금 대축소(Svenska reduktioner)를 단행하도록 하여 귀족들의 사유지를 급격하게 감소시켰다.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힌 리보니아와 달리 에스토니아에서는 귀족들의 사유지 회수가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영주들은 더이상 농노를 때릴 수 없게 되었고 에스토니아인 농민들은 영주를 고소하거나, 심지어는 국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도 있었다. 토지가 없는 농민을 멋대로 팔거나, 쫓아내는 것도 금지되었고 농민의 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왕실 직할령의 에스토니아인 농민들의 지위가 본토인 스웨덴인, 스웨덴계 핀란드인 혹은 핀인 자유 농민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귀족 사유지의 농민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받았다. 칼 11세는 본토에 없는 농노제발트해 연안 지대의 특유한 제도이기 때문에 대축소를 단행하면서 에스토니아의 왕실 직할령에서는 농노제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칼 11세의 개혁은 에스토니아에서 오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무엇보다 1697년, 칼 11세가 사망하고 칼 12세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북방전쟁이 벌어졌고, 폴타바 전투 이전에 이미 나르바도르파트루스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폴타바 전투 패전 이후 레발리가가 함락되었으며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역 귀족들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에, 귀족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고 항복을 받아냈다.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에스토니아는 공식적으로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3. 사회 개혁

스웨덴에스토니아 사회에 미친 영향으로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세운 타르투 대학교, 루터교회의 강화, 에스토니아어 성경 번역, 도르파트 법원 설립 등이 있다. 농노제 폐지는 대북방전쟁과 러시아 점령으로 없던 일이 되었다.
[1] 별도의 국기 없이 스웨덴 제국의 국기를 사용했다.[2] 현재의 하리우주, 래네비루주, 이다비루주 일대. 1629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이후 에스토니아 전역이 스웨덴 지배를 받았으나 에스토니아 남부는 리보니아에 속했다.[3] 비슷하게 라트비아에서도 "좋은 스웨덴 시대(Labie zviedru laiki)"라는 표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