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사용국. 1946년에 Mk.1을 도입한 이후 1966년까지 운용했다. 이후 대부분의 센추리온들은 치장물자로 전환되었고, 영국군 주력 전차들은 치프틴 전차로 대체되었다.
보빙턴 전차 박물관에서도 보관 및 전시중인데, 20mm 장착형 Mk.1(정확히는 2차 대전 말에 제작된 프로토타입), 6.25 전쟁 당시 투입된 Mk.3, 반으로 절단되어 내부를 드러낸 채로 전시중인 Mk.3[1], Mk.13[2], 그리고 Mk.12 및 각종 파생형과 센추리온 기반 시제차들을 보유하고 있다.참조
216대를 도입하였다. 이후 레오파르트 1로 대체되면서 퇴역한 뒤에 현재는 박물관에서 소유 중이다. 지금은 덴마크군의 레오파르트1 또한 전량 레오파르트 2로 대체되면서 덴마크군은 더 이상 105mm 포탄을 보유할 필요가 없어졌고 군에 남은 105mm 재고 포탄은 영상처럼 연중 행사 때 소진된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으로부터 1대의 센추리온 Mk 3을 받았으며, 이후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숏 1대와 센추리온 Mk 10 2대를 추가로 받았고, 1988년 앙골라군으로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의 올리판트를 받아 쿠빙카의 시험장에서 각종 테스트에 사용했다.
인도군도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 중국에게 패배한 후, 뒤늦게 국방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군대의 기계화에 나서면서 센추리온을 도입해 운용했고 이후 여러 차례 실전에 투입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당시 파키스탄군이 미국제 M48 패튼으로 무장을 해서 이 두 전차가 여러번 싸운 경력이 있다.
첫번째 싸움은 카슈미르의 영유권을 두고 벌어진 1965년의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인데, 이 때 양측의 수백대의 전차가 자무-카슈미르 전역에서 맞붙어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전차전'이 발생했다. 파키스탄은 90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48 패튼 뿐만 아니라 이미 구식이 되어 버린 M4A1E6 전차를 앞세워 공세에 나섰고, 여기에 맞선 인도군의 20파운더 포 탑재 3세대 센추리온과 105mm L7 전차포 탑재 7세대 센추리온 전차는[3] M4 셔먼 전차, AMX-13 경전차와 팀을 이루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군 전차를 쓸어버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 단 한대의 파키스탄군 소속 M4A1E6에게 단시간에 3대가 격파된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4] M48에 비해 센추리온은 기동력의 열세에 있었지만, 장갑 관통력, 명중률, 그리고 방호력에서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었다. 또한 센추리온의 승리에 파키스탄 전차병의 열악한 훈련 수준 역시 큰 몫을 했다. 인도군은 영국의 도움을 받아 인도 곳곳에 기갑학교를 세워 착실하게 훈련을 한 반면에, 파키스탄군은 가장 기초적인 훈련 정도만 마친 상태였다.
그 다음의 싸움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 때 인도군은 T-55도 여럿 운용했기 때문에, 몇년 전에 서아시아의 어느 작은 나라의 군대가 센추리온과 M48을 함께 쓰면서 T-55를 털어먹은 반면, 이쪽은 센추리온과 T-55가 서로 편먹고 M48를 때려잡는 기묘한 광경을 연출했다. 원래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소련이 인도 무기 시장을 독점하는 것으로 바뀌어 발생한 해프닝. 원래 미국과 영국은 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기위해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게 군사 지원을 해주고 있었는데, 지난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싸우라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자 중립을 선언하고 양측 모두에게 무기 공급을 중단해 버렸다. 결국 자국 내 산업 기반이 열악한 두 국가는 탄약 부족에 시달리다가 휴전을 할 수 밖에 없었고,[5] 이후 영미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 인도는 HAL HF-24 마루트 전투기 개발 사업에서 인도의 핵개발로 인한 영국의 제재와 엔진 기술 도입선 차단 등과 더불어 더이상 서방과는 협력할 수 없겠다고 판단, 그동안 은근슬쩍 손을 내밀고 있던 소련의 무기만을 구매하기 시작한다. 덤으로 파키스탄은 중국과 친밀해지고, 그 결과 서방, 파키스탄, 중국 VS 소련, 인도의 세력 구도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전쟁 자체는 그 동안 군사력을 계속 키워놨던 인도군이 수적, 지리적 우세[6]를 이용해 파키스탄군을 압살해 버렸다. 그리고 인도군 센추리온은 이 때도 파키스탄군 M48 상대로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였주었다.
이미 센추리온은 인도군에 처음 인도될 때부터 최신형 전차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인도군이 곧 영국의 빅커스 MBT를 도입하여 면허생산에 들어가고, 대량 생산한 빅커스 전차에도 만족하지 못해서 1978년부터는 소련의 T-72 전차까지 구매함에 따라,[7] 센추리온은 1980년대 중반까지 서서히 퇴역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 인도군 기갑전력의 중추를 맡을 것으로 기대했던 아준 전차가 세계 무기 개발사의 전설이 되면서 인도군은 신뢰성 있는 전차를 확보하지 못해 2010년대까지 고통받게 되었다.[8]
무슨 장비가 됐건 쓸모있으면 쓸모없어질 때까지 굴리는데다가 온갖 개조를 자행하는 이스라엘군답게 "숏(שוט/ Sho't)"이라는 제식명으로 마르고 닳도록 사용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시기 이스라엘의 후견국은 영국이었는데, 경제난에 시달리던 영국은 센추리온의 후계가 될 신형 전차 공동개발을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재고 센추리온 전차 매각처를 찾고 있었고, 이스라엘이 사실상 센추리온의 후계 전차인 치프틴 개발계획에도 참가하면서 그 보증 격으로 센추리온 100여 대를 구입한 것이 도입의 시작이다.
중고 M4 셔먼을 M-50으로 개조해 사용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주력전차 운용 및 작전 개념도 없이 이 신형 주력전차 센추리온의 매력에 빠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센추리온을 밀어넣었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된다. 센추리온이 화력이나 방호력 면에서 괜찮은 전차였으나, 기동 계통에선 제한이 많기 때문에 이를 주의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군부는 이를 무시했으며, 더불어 당시 막 이스라엘에 도입이 시작된 센추리온에 대한 집중 훈련 경험조차 없는 미숙련 전차병들을 동원해 전장에 밀어넣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센추리온의 데뷔전은 참담했다.
이후 이스라엘군은 전략을 바꿔 센추리온을 기동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방어전 등의 전장에서 써먹었다. 3차 중동전 이후엔 대대적인 개조에 돌입, 엔진을 M60용인 AVDS-1790-2A로 갈아엎고 트랜스미션까지 미국제 Allison CD850-6로 바꾸고 조준기도 바꾸고 2세대 전차 수준의 주포 안정기까지 탑재했다. 더불어 센추리온 전차 승무원 훈련 과정을 대폭 강화했으며, 센추리온의 배치 기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실전 경험이 쌓인 승무원들이 다수 양성됐다. 그 결과 더 이상 센추리온이라고 부르긴 좀 뭐한 기존의 물건을 뛰어넘은 강력한 전차가 탄생했으며, 이러한 마개조와 승무원 숙련도 덕에 4차 중동전 당시에도 좋은 활약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개조를 했음에도 현가 장치 등의 문제로 기동력에선 문제가 남아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기동전에서는 센추리온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4차 중동전 시점에선 문제가 되던 기동력을 상당폭 보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센추리온을 거의 거점 수비용으로 돌리고 기동부대용으로는 M48 패튼이나 M60 전차, 개조한 슈퍼 셔먼을 더 선호했다.
그러나 현수장치 문제로 센추리온을 기동력이 필요하지 않은 전장 위주로 투입했다는 위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국내에도 출간된 아비그도르 카할라니의 "골란 고원의 영웅들"에서는 현무암질 바위 투성이인 골란 고원에서도 기동이 가능할 정도로 현수장치가 튼튼한 센추리온을 골란 고원에, 항속거리가 긴 패튼 시리즈를 시나이 방면에 배치했다고 나온다.[10] 물론 군수보급상의 통일을 위해 전선별로 장비를 통일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시나이 방면 기동예비였다가 전쟁 발발 며칠 전 골란 고원 방면으로 전환된 이스라엘 7기갑여단은 원래 패튼으로 무장했지만 시나이로 배치되고 나서는 센추리온으로 차종을 전환한다. 그리고 4차 중동전 개전 후 골란 고원 방어전투를 수행함은 물론 다마스커스로의 공세 이전에도 필두에서 참가했다. 아이셔먼을 장비한 동원사단인 라너와 펠레드 사단은 원래 시나이로 갈 예정이었지만 시나이 방면보다 골란 고원의 전황이 훨씬 급박했기 때문에 북부로 전환된 것이다.[11]
이는 센추리온의 무게로 인해 전략적 기동성이 패튼 계열보다 부족해서 최대한 전차 수송차로 전장 까지 운송해 운용했던 것이 약간 왜곡된 듯 하다. 영국은 현가장치와 엔진, 변속기의 내구성 만큼은 2차 대전기에도 최고였기 때문에 현가장치의 내구성이 패튼보다 크게 떨어질리 없는데, 애초에 전차라는건 정비 소요가 많기 때문에 최대한 자력주행을 피해야한다. 자력주행을 상정한 소련제나 경량형 2세대 전차도 그럴진데 특히 무거운 전차 일수록 신뢰성과 무관하게 전차 수송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후 슬랫아머를 두르고 반응장갑을 덕지덕지 붙인 개조모델 "벤구리온"으로 80년대까지 현역에서 운용했으며, 위의 사진처럼 포탑을 떼고 보병 탑승공간을 마련한 병력수송장갑차 버전 및 전투공병전차 버전은 현재까지 계속 쓰고 있다. 그래도 타고난 저속 때문에 T-54 및 T-55를 바탕으로 개조한 아흐자리트에 비해서는 사용 빈도가 낮다고 한다.
이러한 센추리온의 마개조 작업은 그대로 이스라엘의 전차 제작 노하우가 되었고, 그 때문에 메르카바 전차의 제작은 이런 개조 센추리온이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센추리온의 우수한 맷집은 적어도 승무원들에게는 상당한 믿음을 샀다. 실제로 4차 중동전쟁 당시 M48 패튼은 AT-3 새거 미사일 등에 피격시 포탑 유압계통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인화해서 전차가 불덩어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승무원들도 불타죽어서 이스라엘 전차 승무원 스스로가 소사체 운반차(Movil Gviyot Charukhot)라는 끔찍한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는데 반해 센추리온들은 대부분 최소 1회 이상 피탄되었음에도 단기 수리를 거쳐 전선에 돌아올 수 있었고, 승무원 사상율도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이스라엘군이 센추리온을 거점수비용으로 선호한 데에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
센추리온의 명전차 이미지에는 이런 이스라엘제 마개조 전차들의 활약도 일조했다. 다만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의 활약이나 50년대에 NATO 소속의 여러 나라에서 반(半)표준 전차로 쓰였던 점, NATO 외에도 여러 국가들에게 수출돼 널리 채용된 점, 센추리온을 사용하던 비서구권 국가들이 빅커스 MBT나 치프틴 같은 영국제 2세대 MBT를 채택했다는 점[12] 등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에서의 활약만으로 센추리온이 고평가받는다는 생각은 억측에 가깝다.
12대의 Mk3를 영국에서, 홍콩 주둔 영국군과 호주로부터 Mk5와 Mk5/1 도합 8대를 구입하였고, 구난전차 사양 1대도 영국에서 구입했다. 1968년에 퇴역해서 전차 7대와 주력전차 1대를 호주에 판매했고, 나머지 차량 중 2대가 박물관에 보존되었고, 다른 2대는 와이우루 군사 캠프에서 사격 시험 표적으로 소모되었다.
처음에 Mk 3 274대와 구난전차 9대, 교량전차 4대를 도입했고 이후에도 업그레이드와 추가 주문을 해서 Mk 5와 Mk 10, Mk 11도 운용했다. 1969년~1970년 기준으로 77대가 주독 캐나다군, 나머지가 캐나다에 주둔하여 총 374대를 보유했다. 이후 레오파르트 C1으로 대체되었고, 일부 차량들은 이스라엘로 판매되었다.
[1] 본래 Mk.2로 생산된 차량이었으나 Mk.3, Mk.5로 차례대로 개량되어 Mk.5 사양으로 사용되다가 비축물자로 돌려졌다. 이후 1980년대에 Mk.3 사양으로 복원되었고, 실내 공개를 위해 반으로 절단된 전시물이 되었다.[2] 본래 Mk.8으로 생산된 차량이었으나, 업건과 장갑 강화를 거쳐 Mk.10 사양으로 개량된 후, 최종적으로 Mk.13으로 또 개량되었다. 해당 차량이 영국군에서 마지막으로 발포한 센추리온 전차였다고 한다.[3] 당시 인도군 센추리온 200여대 중에서 센추리온 Mk 3와 센추리온 Mk 7의 비율은 반반 정도였다.[4] 인도측은 파키스탄 전차를 471대 파괴했다고 주장하고 파키스탄측은 인도 전차를 500대파괴했다고 주장했지만, 중립적 관점으로 봤을 때 파키스탄측 전차 피해는 200~300대, 인도측 전차 피해는 150~190대 정도로 보인다 (서로 자신의 피해는 축소하고 상대의 피해는 과장하였으므로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음). 다만 양측 모두 전쟁에 참여한 전차의 절반 정도는 구닥다리 M4 셔먼 전차였으므로, 전차 피해의 상당수는 M4 전차이었을 것이다.[5] 사실 탄약 재고가 바닥을 드러내던 파키스탄과는 달리 인도는 탄약 재고가 충분했다. 다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총리에게 탄약이 부족하다고 보고해버린 국방장관 때문에 인도 역시 휴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6] 지도를 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는 따로 떨어져 있는데, 양쪽 국경에서 모두 싸움이 벌어져 파키스탄 입장에서 최악의 양면 전쟁이었던 데다가 동파키스탄에는 독립 게릴라가 판치고 있었다.[7] 빅커스의 후계로 아준 전차를 자체 개발하기로 하고, 아준이 나오기까지 공백을 메우기 위해 T-72를 구매하였다. 그래서 심지어 도입 후 10~15년 후 받아야 하는 T-72의 창정비 계획도 잡아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곧 나온다는 아준은 2000년대까지 소식이 없었다.[8] 심지어 개발 기간이 질질 끌리는 아준 전차를 기다리다 못해 자체적으로 T-72 전차를 T-72M1으로 개량하기로 했는데, 이 마저도 인도내 전차 공장의 절망스러운 작업 속도로 인해 고통받았다.[9]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때 인도군으로부터 노획한 차량이다.[10] 센추리온의 홀스트만식 현수장치는 M48/60의 토션바에 비해 더 쉽게 파괴될 수 있지만, 그만큼 야전에서 긴급수리 및 교체 역시 비교적 용이하다. 이 점이 센추리온을 골란 고원에 집중 배치한 중대한 요인 중 하나이다.[11]이집트군은 시나이 반도 실지회복(정확히는 시나이 반도 전역이 아니라 수에즈 운하 동쪽지역을 확보하여 제 3차 중동전 이후 폐쇄된 수에즈 운하의 통행을 재개하여 돈줄을 확보하는 것이다. 감정적/정치적이었던 지난 날들과 달리 제 4차 중동전에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 전역 수복 및 이스라엘 괴멸같은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목표 대신 돈줄인 수에즈 운하 재개를 목표로 운하 동쪽지역을 확보하자 강력한 방공망 및 대전차 방어망을 구축하고 굳히기에 들어갔다. 시리아가 깨지는 바람에 이 목표를 벗어나 예정에도 없던 2차 공세를 벌였다가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열세에 처했으나 종전 때까지 운하 동쪽지역 일부를 끝까지 확보함으로써 전후 협상을 통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운하기준 동쪽 30Km까지)을 돌려받아 운하 통행을 재개 했고 그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까지 체결하면서 시나이 반도의 나머지 지역도 모두 회복한다)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자 방공우산을 초월한 진격을 자제했다. 그러다가 골란 고원에서 진격이 돈좌되고 역습 위협에 노출된 시리아의 요구 때문에 방공우산 구역 밖으로 진격했다가 이스라엘 공군에게 기갑부대가 박살나고 아리엘 샤론의 기갑부대에게 수에즈 운하 역도하를 허용하게 된다. 이렇게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한 방씩 주고받은 이 상황에서 4차 중동전이 종전된다. 반면 골란 고원의 전황은 시나이 반도 방면보다 훨씬 급박(지도만 봐도 이집트군은 이스라엘 본토를 공격하려면 시나이 반도를 거쳐 수백킬로미터를 북상해야 하지만 시리아군이 골란 고원을 탈환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역이다)했다. 골란 고원을 감제하는 헤르모니트 고지가 개전과 동시에 시리아군에게 털리고, 시리아군 기갑부대의 강력한 공세 앞에 기갑여단 하나가 박살나고 여단장도 전사하며 골란 고원이 돌파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겨우 틀어막은 것.[12] 만약 진짜로 센추리온이 문제가 많고 이스라엘 마개조로 좋아진 전차였으면, 오리지널 센추리온을 사용하던 국가들의 차기 전차 사업에서 영국 회사들이 센추리온으로 쌓인 이미지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고, 해당 국가들에서는 당연히 치프틴, 빅커스 MBT에 관심도 안 보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