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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3:06

성공회/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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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괄2. 상세
2.1. 헨리 8세 이전
2.1.1. 잉글랜드 교회의 정체성
2.1.1.1. 성공회의 전통적 견해2.1.1.2. 역사학적 견해
2.2. 헨리 8세의 종교개혁2.3. 헨리 8세 이후

1. 개괄

2. 상세

2.1. 헨리 8세 이전

AD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튼 섬을 침공하여 브리타니아 속주를 세운 이래로 브리튼 섬은 로마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로마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자연스레 브리타니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특히 로마가 410년 모든 군대를 철수시킨 후의 브리타니아는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가 완전히 깨지게 되고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기게 된다.[2] 이 때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브리튼섬 공략을 감행했다.[3][4] 그 결과,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섬의 (현재 스코틀랜드웨일즈 지역을 제외한) 중부와 남부에 자리잡게 되었고[5], 켈트족은 브리타니아 섬의 변방 산악지대로 밀려나게 되면서, 영국 역사의 주역은 켈트족에서 앵글로색슨족으로 바뀌게 된다.

597년 대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의 시기[6] 로마 태생인 캔터베리의 어거스틴이 주교로 서품되어 잉글랜드로 건너가 당시 켄트 왕국의 왕 애설버트(Æþelberht)[7]에게 잉글랜드 군주 중에 최초로 세례를 주었다.[8] 에텔버트의 왕비 베르타는 프랑크 왕국 계열의 네우스트리아 왕국[9]의 공주로 하리베르트 1세의 딸이며, 앞서 프랑크 왕국은 이미 대륙에서 5세기 클로비스 1세 시절 천주교로 개종했었고, 열렬한 기독교도로 알려진 브륀힐트 여왕의 조카였기 때문에[10] 대륙에서 시집 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인이었고 로마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켄트 지방에 안전하게 상륙하고, 포교할 수 있었다. 이를 보아 잉글랜드의 지배계층에 이미 기독교인이 상당수 세를 얻고 있었으며, 다른 지배층 또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개종에 거리감이 없었다는걸 보여준다. 앵글로색슨 침입(Anglo-Saxon invasion)과 에텔버트 왕의 세례 사이 시기와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를 떠나있었을 시기에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사회 전반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

천주교서유럽에 퍼지는 과정은 이러한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각지에서 기독교화된 로마인들이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성당을 세우고 그곳 유력자들을 주교로 삼아 이민족 침략자에게 맞서 재산을 기부하여 보호하였고, 각지의 교구에서 서유럽 교회의 중심지인 로마에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수위권을 인정한 것이 대략적인 서유럽 교회의 성립사이다. 한편 서로마 제국은 망했어도 도시 로마는 여전히 부유했기 때문에 각지에 자금을 지원해 주면서 영향력을 키워갔고, 서로마 권역을 벗어난 동방 시리아까지 로마 교회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2세기 헨리 2세는 교회 재산과 성직자 신분에 대한 이견으로 로마 교회와 대립하였다. 성직자의 범죄를 로마 교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교회 법원뿐만 아니라 세속 법원에서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던 것. 그러던 중에 왕의 기사들이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을 암살했고,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교회와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듣게 된다. 이후 일련의 사건에 대해 회개하고 교황에게 용서받는 과정 중에, 교회 재산 관리권과 같은 이권이 어느 정도 국왕에게 오는 등 실질적인 권한을 차지하게 되었다.

헨리 3세교황청으로부터 "십자군 전쟁에 쓸 군자금이 필요하니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더 걷으라"는 요청을 받는다. 로마 교회는 이런 무리한 과세 요청에 한 술 더 떠서,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거두었음에도 만족할 만한 모금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헨리 3세에게 예비 파문을 내린다.[11] 이를 고깝게 본 잉글랜드 성직자들은 오히려 국왕의 편을 들었다.[12]

14–15세기 백년전쟁 시절에는 천주교 교황청로마아비뇽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 시절 잉글랜드 왕국은 로마 교황 쪽으로 줄을 서서[13], 아비뇽 교황을 대놓고 무시하였으며, 대포로 위협하여 도리어 교황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잉글랜드 교회는 종교개혁적 예고라고 할 수 있는 존 위클리프를 이미 14세기에 배출하기도 했다. 위클리프는 그를 따르는 무리인 롤라드(Lollady)파와 함께 천주교회의 전통주의, 중세의 스콜라 철학, 그리고 성인, 성유물, 성해에 대한 공경을 성경에서 서술을 찾아볼 수 없고 성서상 기독교 교리와도 충돌하는 미신으로 보아 비판하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주장했고 이를 강조하려 성경영어로 번역했고[14] 성체성사의 실체변화(화체설)[15], 교황의 수위권 등 교회제도 등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었다. 이는 후대 얀 후스종교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1. 잉글랜드 교회의 정체성

2.1.1.1. 성공회의 전통적 견해
성공회의 공식 입장에 가깝다.[16] 콘스탄티누스기독교 공인 이전인 2세기부터 잉글랜드에는 이미 기독교가 전파되어 켈트 교회(Celtic Church)로 정착되어 있었고,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되어 기존 켈트 교회가 로마 가톨릭 휘하로 들어가게 된 후에도 독자성을 유지하다가, 먼 훗날 헨리 8세캐서린 왕비의 혼인무효 문제로 인해서 이 켈트 교회가 다시 분리된 것이 현대의 성공회라는 입장이다. 즉, 성공회는 스스로 초대교회 시기부터 잉글랜드 지역에 있었던 켈트 교회를 잇는다고 본다.

기독교는 1세기에 탄생하여 로마 제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빠르게 로마 제국에서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2세기 경에는 로마의 서쪽 끝 브리튼 섬까지 전파돠어 그곳에 살던 켈트인들 사이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17] 4세기에 들어서 상당한 발전을 보여, 314년의 아를 시노드(Synod of Arles)와 359년의 아리미눔 교회회의(Council of Ariminum)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특히 켈트 교회의 주교들이 314년 아를 시노드에 참가한 것은 천주교의 공식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으로서,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의 켈트인 기독교 신자들은 부활절 날짜를 독자적으로 계산하는 등,[18] 기존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이나 로마인 기독교 신자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성공회 신자들이 대륙 교회와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승되는 것에는 아리마태아의 요셉의 성배 전승이 있다. 예수 사후에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꿈에 나타난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배를 가지고 당시 로마 제국의 서쪽 끝이었던 브리타니아에 와서 성배를 숨겨두었다는 것.[19] 아서왕 이야기를 비롯한 켈트족의 전설들은 이 전승을 기반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전승에서 한발 더 들어가, 천주교가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내려오는 교회이고, 정교회사도 안드레아스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이듯이, 성공회도 아리마태아의 요셉으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라고 말한다.
2.1.1.2. 역사학적 견해
From the days of George Buchanan, supplying the initial propaganda for the makers of the Scottish Kirk, until a startlingly recent date, there was warrant for an anti-Roman, anti-episcopal and, in the nineteenth century, anti-establishment stance in the Columban or "Celtic" Church. ... The idea that there was a "Celtic Church" in something of a post-Reformation sense is still maddeningly ineradicable from the minds of students.
One of the common misconceptions is that there was a 'Roman Church' to which the 'Celtic' was notionally opposed. The pre-'Gregorian' Latin Church exhibited a rich variety of liturgies, and even organizational principles, as well as Easters.
스코틀랜드 국교회[20] 창설자들을 위한 초기 프로파간다를 제공하고자, George Buchanan의 시대부터 놀랍게도 최근까지, 반로마, 반주교제, 그리고 19세기에는 반국교 스탠스를 위한 보증이 콜룸바누스 혹은 "켈트" 교회에 있어왔다 … 켈트 교회가 종교 개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은 학생들 생각 속에서 여전히 미치도록 뿌리깊다.
'켈트' 교회가 '로마 교회'와 대립각을 세웠다는 것은 오개념이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21] 이전의 라틴 교회는 풍성하게 다양한 전례를 했으며, 심지어 조직의 원칙이나 부활절 날짜까지 다양했다.
-Patrick Wormald, "Bede and the ‘Church of the English,'" in The Times of Bede, ed. Stephen Baxter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6), p. 207.
Ask many people browsing through popular books on Celtic Christianity to describe the Celtic Church and several well-known ideas will probably emerge. They might stae, for instance, that the Celtic Church did not acknowledge papal authority and was less authoritarian and bureaucratic than the Roman Church because it was guided by holy abbots, rather than bishops. Depending on their interests, they might add that it allowd women more power than was customary at the time, it was environmentally friendly, it was continually influenced by native pananism, or that the Irish had a special link with the spiritual realm. Simply stated, most would agree that the Roman and Celtic Churches were inherently dissimilar and in confilict throughout the Middle Ages until the Roman Church conquered and suppressed the Celtic tradition.
켈트 그리스도교에 관한 대중 서적들을 읽는 다수 사람들에게 켈트 교회를 묘사해달라고 요청해보라. 그러면 각각의 잘 알려진 생각들이 아마도 출현할 것이다. 그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켈트 교회는 주교들보다는 거룩한 수도원장들에 의해 인도되었기에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로마 교회보다 덜 권위적이었고 덜 관료적이었다고 말이다. 그들의 흥미에 의존하며, 그들은 이렇게 덧붙일지도 모른다. 켈트 교회는 당시의 관습보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파워를 허용했다거나, 더 친환경적이었다거나, 계속적으로 토착 신앙에 영향 받았다거나, 아일랜드인들이 영적 영역에 더 잘 연결된다거나. 간단히 말해, 대다수는 로마와 켈트 교회가 본질적으로 다르며 로마의 정복 및 억압 때까지 다툼 속에 있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Ask most medievalists who specialize in the churches of the Celtic-speaking lands from the sixth through eighth centuries this same question and a remarkably different picture emerges. While there were powerful and influential aboots in the Irish Church, there were also important bishops. In addition, the churches in the British Kindoms―usually an area included in the term "Celtic Church"―were organized on an episcopal model closely resembling that used elsewhere in Europe. Those in Celtic-speaking regions acknowledged and respected the papacy as much as any area did at this time and the Irish and British were no more pro-women, pro-environment, or even spritual than the rest of the Church.
6~8세기 켈트어권 교회들에 전문화된 중세 연구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보라. 그러면 두드러지게 다른 그림이 출현한다. 아일랜드 교회에 파워풀하고 영향력 있는 수도원장들이 있는 동안, 또한 중요한 주교들이 있었다. 게다가, ―"켈트 교회"라는 용어에 보통 포함되는 지역인 ― 브리튼 왕국들의 교회들은 타 유럽에서 사용되는 것에 가깝도록 유사한 주교제 모델로 형성되었다. 켈트어권의 그들은 당시의 어떠한 지역만큼이나 교황직을 인식하고 존중했으며 아일랜드인들과 브리튼인들은 교회의 나머지보다 친여성적이고 친환경적이고 더 영적이지는 않았다.

Contrary to popular opinion, research suggests that the churches in the Celtic-speaking lands were not united in opposition to the "Roman" Church. The early medieval Church was very diverse. Liturgies, monastic rules, and other issue of interest to Christians were not monolithic, but varied regionally. Just as there are recognizable difference in the Catholic Church in America and France today, not all the traditions in Ireland, Meovingian Gaul, and Visigothic Spain were identical. There were, to use modern terms, "local theologies" or "micro-Christendoms."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Christians identified themselves as members of a Church seperate from and in opposition to Rome; it is simply a reflection of the diversity of local practices throughout Europe at this time.
대중적 의견과 반대로, 연구는 켈트어권 교회들이 로마 교회에 반대하며 결속한 건 아니라고 제안한다. 초기 중세 교회는 매우 다양했다. 전례, 수도원 규칙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흥미 있는 다른 논쟁들은 하나의 바위 덩어리 같은게 아니라 지역적으로 다양했다. 오늘날 미국프랑스의 천주교회에 인정되는 차이가 있듯, 아일랜드와 메로빙거 갈리아와 서고트 스페인의 전통 모두가 같은 건 아니었다. 현대 용어를 쓰자면, "지역 신학" 혹은 "초소형 그리스도교국"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로마에서 반대쪽으로 분리된 교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했다는 건 아니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당시 유럽 도처에 있던 지역 의식들 다양성의 반영이다.
Corning, Caitlin (2006). The Celtic and Roman Traditions: Conflict and Consensus in the Early Medieval Church. Palgrave Macmillan. ISBN 1-4039-7299-0.
주류 역사학계와 가톨릭의 입장에 가깝다. 브리튼 지방에 전통적인 켈트 교회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 켈트 교회는 대륙 교회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부활절 날짜의 차이 등은 켈트 교회의 독특한 전례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어도, 켈트 교회가 대륙 교회와 분리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주교들은 그의 수도 공동체들이 행하던 제례 의식의 형식 때문에, 특히 그가 대륙식 달력이 아닌 아일랜드식 달력에 따라 부활절을 지낸다는 사실 때문에 반감을 가졌다. 그러나 더 중요했던 것은 그의 수도원과 주교들 간의 관계였다. 갈리아의 수도원은 지역의 주교에게 철저히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전통에 따라 콜룸바누스는 수도원을 자신의 철저한 통제 하에 두었다. 그가 부르고뉴의 주교들에게 바랐던 것은 자신과 자신의 수도승들을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교의 권위에 고개를 숙이는 대신, 콜룸바누스는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 재위)에게 자신과 자신의 수도승들이 켈트적 전통을 간섭받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
-패트릭 기어리, 『메로빙거 세계』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브리튼 제도에 '가톨릭 교회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교단으로서의 켈트 교회가 존재했다'는 성공회의 전통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원인으로는, 종교개혁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지형이 개신교에 유리하게 흘러갔다는 설명[22]이 훨씬 객관성있고 합리적인 주장으로 인정받는다.
학자들은 각자의 문화적 편견을 부지불식간에 객관화하여 잉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승리는 불가피했고, 1550년대에 반전을 꾀한 메리 튜더의 시도는 역사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치려는, 실패하기 마련인 시도였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메리의 치세에 장기적으로 가톨릭교를 되살릴 토대가 놓였다는 주장, 잉글랜드가 훗날 개신교 국가가 된 것은 잉글랜드인의 종교적 DNA가 아니라 여왕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또한 잉글랜드 국왕과 교황의 갈등 사례만 하더라도,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중세 내내 있어온 교권과 속권의 갈등 문제이다. 이러한 갈등은 스페인이든 프랑스이든 신성 로마 제국이든 서유럽 국가가 흔히 겪는 일이었다. 이를 영국인종교개혁 기질로 연결시키는 것은 결과론적 오류이다. 14세기에 종교개혁적 원류로 평가받는 존 위클리프를 배출하기 전까지는 잉글랜드 교회가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의 교회들과 의미 있는 차이점을 보이지 않았다. 그 위클리프의 주장마저도 당시 잉글랜드 교회에서 주류가 아니었으며,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소수였다.
잉글랜드에서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교황의 최고 권위를 성서의 최고 권위로 대체해야 하고 성직자가 어떠한 세속적 권위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등 당대 교회를 놀랄 만큼 급진적으로 비판했다. 위클리프 추종자들은 대학들에서 쫓겨났으나 잉글랜드 각지에서 지하 이단 운동(‘롤러드파Lollards’)의 토대를 다졌다.
신교의 신화에 따르면 종교개혁가들은 마치 찬장 뒤에서 잊힌 채 썩어가던 물건을 찾아낸 것처럼 성서를 ‘발견’했다. 사실 중세 기독교는 성서를 열렬히 탐닉했고, 신학자들은 유용한 지식 일체를 망라하는 백과사전으로 여겼다. 종교개혁 이전에 평신도를 위해 성서를 토착어로 옮긴 번역본들이 없었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다만 중요한 예외인 잉글랜드에서는 15세기에 롤러드파가 교회 전통에 맞서 자기네 번역본으로 신자들에게 호소하자 화들짝 놀란 주교들이 그 번역본을 전면 금지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또한 헨리 8세엘리자베스 1세 부녀의 종교 정책에 민중의 반발도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헨리 8세의 경우는 대규모 봉기인 '은총의 순례'에 직면했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도 1569년에 천주교도들의 대규모 봉기를 맞이했다.

결국 성공회는 종교개혁 당시 잉글랜드 내의 천주교회가 로마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국교화하는 정치적인 상황 가운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다.

2.2. 헨리 8세의 종교개혁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교의를 개신교로 바꾼다기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 교회 조직의 수장을 국왕으로 바꾸고 교황과의 연결을 끊는다고 선언한 것에 가까웠다.[23]

중세에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든 카스티야 연합왕국에서든 잉글랜드 왕국에서든 프랑스 왕국에서든[24] 주교 서임에 속권의 의사가 개입하는 등, 주교는 '교황을 대표로 하는 가톨릭 주교단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졌다.[25]

물론 성직자들은 평신도인 왕이 재판할 수 없는 신분으로 이론상으로는 중세 시기 왕이 마음대로 재판할 권한이 없었고, 교회에 조직에 관한, 그리고 교회에서 주관하는 관혼상제는 성직자들이 왕에게 이견이 있을 경우 교황에게 항소할 수 있었는데, 로마 교회의 이 성직자 신분에 대한 재판 관할권, 잉글랜드 교회에 관한 처분을 잉글랜드 외 다른 조직에 대한 상소권을 반역으로 선언한 것. 이것이 곧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이다.

헨리 8세는 수장령과 이의 후속 법령인 반역법(Treasons Act)를 근거로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를 처형시켰다.[26]

잉글랜드에서도 종교개혁이 본격화되자, 도처에서 성직자를 중심으로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 성직자들의 반발에는 신앙보다는 경제적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성직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주요 이유는 정부의 개혁 정책으로 여러 교구들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대중들의 최초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Peter Cunich 교수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수도원 폐쇄 및 옛 전례의 변화[27]는 대중들에게 상당한 상실감을 남겼다. 이 영적 공허감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대체하기까지는 수십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1000년 가까이 믿어온 종교를 국왕의 이혼을 위해 하루아침에 바꾸라고 했으니, 당연히 반발이 극심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공회를 만든 헨리 8세의 원래 의도는 어디까지나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교회 조직을 만드는 것이지, 교의적 의미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아니었다. 실제 개혁을 움직인 성직자들도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려는 의도였기에 초기 성공회는 천주교적인 외적 요소들에 루터회장로회의 교리를 조금 첨가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헨리 8세가 100% 냉정한 정치적 동기로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킨 건 아니었으며, 스스로는 하느님의 의지에 진심으로 부합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동기에 대한 냉소주의는 어느 선을 넘으면 순진한 태도가 되기 십상이다. 자기 영토를 종교개혁으로 이끈 통치자들 모두가 순전히 냉철한 정치적 계산에 근거하여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해 종교 정책을 추진한 가장 노골적인 사례는 1530년대 초에 결혼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황의 권위에 반대할 이유를 찾아낸 헨리 8세이리라. 그러나 이런 헨리조차 자신이 신의 뜻에 부합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2.3. 헨리 8세 이후

헨리 8세 사망 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한동안 혼란을 겪게 된다.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외가와 더불어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머스 크랜머를 위시로 한 대륙의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시 헨리 8세 시절 가톨릭으로 거의 회귀한 잉글랜드 교회를 대륙에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된다. 이때부터 크랜머의 주도로 42개 신조, 공동기도문 등이 탄생함으로써 성공회 및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틀이 확실히 마련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하고 이혼의 원인이 된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인 메리 1세 시대가 열리면서 잉글랜드는 다시 가톨릭으로 회귀하게 된다.

메리 1세는 개신교에 대한 박해 때문에 전통적으로 '블러디 메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잘 알려져있다. 메리가 국교를 가톨릭으로 되돌린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른 것이었으며, 또한 펠리페 2세와의 부부동군연합은 스페인의 광신적 신앙에 잉글랜드를 무방비로 노출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영국 사학계를 지배한 휘그 사관(Whig History)에 기반해있다. 휘그 사관은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위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영국 역사를 바라보며 이의 원동력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 메리 1세에 대한 휘그 사관적 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의 기반이 된 휘그 사관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련의 비판으로 사실상 학계에서 퇴출되었으며,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인다. 메리가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보다 더 광신적이였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메리를 역사 앞의 반동으로 보는 시각은 근래의 사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메리의 숙청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자행된 한풀이'라고 보는 견해는 16-17세기 유럽 정치역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17세기까지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반란 세력과 국가 양쪽 모두에게 이용된 막강한 것이었고, 종교적 탄압은 정치에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메리 1세의 즉위 당시 아일랜드가톨릭, 잉글랜드런던은 성공회로 칼같이 나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메리 1세 즉위시 잉글랜드 인구는 여전히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인구는 가장 강성한 런던에서도 대략 3분의 1로 추정되며 식자층이든 도시인이든 프로테스탄트는 분명히 소수였다. 켄트 지역에서도 개신교의 위치는 잘해야 상당한 규모의 소수파(significant minority)였다. 아직 성공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헨리 8세가 매각한 수도원 토지를 구입한 귀족들은 성공회를 지지했지만, 인클로저 운동의 진행으로 땅을 잃고 수도원으로부터 구빈 등의 혜택을 받던 민중들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메리 1세 즉위 당시의 잉글랜드는 가톨릭 국가였다는게 현 학계의 중론이라는 점이다. 헨리 8세 말년에 벌어진 '은총의 순례' 같은 대규모 반란은 당시 전반적인 민심이 헨리 8세의 개혁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최근의 연구들은 중세 말 잉글랜드의 가톨릭교회가 필연적인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28]

그리고 블러디 메리론을 미는 쪽에서는 종교를 이유로 처형당한 숫자가 엘리자베스가 훨씬 적다면서 옹호하는데, 당대 잉글랜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가이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개신교 신자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Ronald Hutton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29] 즉 '공식적인' 이단혐의로 몇명이 처형받았는지, '공식적인' 종교 슬로건으로 몇 건의 반란이 일어났는지를 거론하며,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실질적으로 군주들의 신앙에 몇 명이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는지는 여러 논란이 있으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근거는 없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30]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즉위 초창기'에 국한되었던 일이다. 재위 10년쯤이 넘었을때, 가톨릭 세가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한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K. Kesserling, Northern Rebellion, 2007).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31]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 게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시기 추진된 종교개혁으로 인해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다. Peter Cunich는[32]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과 옛 전례에 대한 향수, 영적 공허감이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교리와 예정설 등으로 채워지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음을 지적한다. 잉글랜드의 개신교화는 대단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메리는 단명하고 엘리자베스는 장수한 것이 잉글랜드가 성공회 국가가 된 주요 요인이었던 것이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 초기에는 가톨릭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그녀 역시 잉글랜드 성공회 교도들의 소망과는 달리 가톨릭교회의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스페인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1558년 2차 수장령을 내려서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직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는 1570년까지 12년 넘게 가톨릭교회에서 파문을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신교 탄압 성향과 이단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주장하던 교황 바오로 4세 시기였다. 이것은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지만, 교황청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정책을 보고 잉글랜드 국교회가 언제든지 가톨릭으로 복귀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가톨릭 탄압은 형부였던 펠리페 2세의 잉글랜드 침략으로 유발되었다. 열성적인 성공회 교도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축출을 시도했고, '가톨릭교도는 매국노이며 외세의 앞잡이다'라는 식의 중상모략으로 가톨릭교도들을 공격했다.

1570년 교황은 엘리자베스 1세와 잉글랜드 왕국이 가톨릭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그녀를 파문한다. 스페인의 침공이 임박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이에 대응하여 헨리 8세 시절처럼 1584년 종교적인 일로 로마 교황청에 상소(上訴)하는 법을 폐지하고, 가톨릭교회의 사제를 반역자로 정죄하고 벌한다는 법을 제정하며 가톨릭 탄압 국면으로 전환했다.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는 청교도가 권력을 잡게 되어[33] 보수적인 장로회 문화로 주교제가 폐지되고 칼뱅주의에 영향받게 된다.

왕정 복고 이후로는 독립파 청교도[34]들이 숙청되고 찰스 2세~제임스 2세 시기 천주교 용인 정책으로 다시 기존 국교회 성향과와 개혁파 복음주의 성향 신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윌리엄 3세의 관용 조치로 영국 국교회 39개 신조에 위배되지 않는 이상 국교회를 제외한 다른 개신교 교파에 대해서 불이익을 폐지하게 된다.[35] 사실상 청교도들에 대한 조치였으나 이미 청교도들은 왕정 복고 시기 네덜란드나 신대륙으로 많이 이민을 가서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인 차별 정책은 19세기까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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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34년에 있었던 헨리 8세수장령이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국왕이 수장 자리에서 내려온 것은 헨리 8세의 차녀인 엘리자베스 1세 때의 일로, 1558년 2차 수장령이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국왕이 수장이었던 기간은 고작 24년 간이었고, 그 이후로 현재까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을 맡아왔다.[2]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 '아서왕 전설'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한다.[3] 브리튼섬을 침공하기 전 앵글로색슨족의 북유럽에서의 상황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4]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이 지은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 의하면 앵글로색슨족의 본격적인 침입은 449년에 시작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앵글로색슨 침입(Alglo-Saxon invasion)이라 부른다. 특히 언어학적으로는, 게르만족의 일부가 브리튼섬으로 넘어오면서 게르만어족 중 한 지류인 영어가 시작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5] 이때 형성된 잉글랜드 왕국은 현재까지도 브리튼 섬의 패권을 쥐고 있다.[6] 이전의 교황과 8세기까지 후임 교황들은 세속적으론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며, 황제에게 수위권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 전승에서 내려오듯 온전한 수위권 같은 것은 누리지 못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선 침략자들의 방어하고 협상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신경 쓸 겨를이 더 없었다. 그레고리오 1세 시절엔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한 라벤나 총독에게도 무시당할 정도.[7] 560-616년[8] 이는 잉글랜드의 기독교화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게르만족들이 브리튼섬으로 넘어와 켈트족을 몰아낼 때 그들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북구 신화(北歐神話:북유럽 신화(Norse mythology))였기 때문. 영국 역사학자들은 597년 애설버트 왕의 세례가 앵글로색슨족 복음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449년의 앵글로색슨 침입(Anglo-Saxon invasion) 이후 약 150년간 로마 교회의 영향력 밖에 있던 잉글랜드가 다시 로마 교회로 돌아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이 룬 문자를 버리고 로마 문자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고대 영문학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9] 프랑크 왕국메로빙거 왕조 시절에는 왕이 죽을 때마다 분할상속으로 영토가 나뉘었다가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합쳐지고를 반복했다. 네우스트리아는 파리와 프랑스 북부 지역이었다.[10] 서고트족 출신임에도 프랑크 계통 왕국에 시집 와서 아리우스파에서 천주교로 자발적으로 개종함.[11] 세금을 확실히 잘 걷으라는 협박의 의미가 컸었다.[12] 앞서 언급했듯이 전근대 서유럽에서는 의외로 세속 군주가 교황에게 엿을 먹이고 해당 국가의 성직자들이 군주 편을 드는 사례가 많다. 당장 아비뇽 유수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세는 교황이 세속 정치에 영향을 끼치던 시대이기도 하지만, 통신과 교통 수단의 미발달로 인해 의외로 천주교가 각국 주교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느낌으로 결합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통일된 미사경본이 나온 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서나 가능했다. 기존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의 세속 군주는 교황을 자기 아래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교회 권력을 이용했다면,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 자체를 로마에서 분리시켰다는 점에 있다.[13] 아비뇽 교황을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로 여겼다.[14] 마르틴 루터보다 200년 앞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한 것이지만, 번역의 수준은 라틴어영어로 단순히 직역한 정도였다. 이로부터 2세기 후에 번역된 킹 제임스 성경(KJV)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 견줄 정도로 영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15]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에선, 천주교 교회에서 교리로 주장하는 실체 변화(성변화)를 공식적으로 부인한다.[16] 교의적으로 성공회 신자가 이렇게 믿어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성공회가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옹호해온 견해라는 의미이다..[17] 켈트 교회의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2세기 경 로마 또는 골(Gaul)에서 파견된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8] 섬에 들어간 종교가 원류와 다르게 변형되는 것은 일본 불교카쿠레키리시탄,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무슬림 계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꽤 흔하게 관찰되는 문화 인류학적 현상이다.[19] 스톤헨지가 위치한 솔즈베리 지역 인근에 묻었다는 떡밥이 자주 등장한다.[20] 엄밀히 말하면 스코틀랜드 국교회는 성공회 관구가 아니고 장로회이다. 그러나 '켈트 교회'를 '반로마'의 효시로 보는 스탠스는 성공회도 공유한다.[21] 이 시기에 켄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가 있었다.[22] 예를 들어, 메리 1세 여왕은 단명한 반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장수했다거나, 예수회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암살 기도나 천주교 극단주의자였던 가이 포크스의 제임스 1세 시해 시도가 여론을 악화시키는 등[23] 헨리 8세가 성공회를 만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국왕이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신임 캔터베리 대주교로 하여금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로마 교황청은 헨리 8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화답한다.[24] 프랑수아 1세 시절 볼로냐 조약으로 9개 대주교 직위를 비롯한 주교, 수도원장, 수녀원장 직위 600여개 임명권은 프랑스 왕이 교황 대신 직접 행사하고, 수입도 프랑스 왕이 차지하기로 교황과 합의했다. 대신 교회 분열기 공의회에서 프랑스 측이 인정하지 않던 교리를 사후 추인하는 소소한 양보 정도로 답례[25]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스콜라학에서는 교권과 속권이 구분되었고, 이러한 구분에 의해 이런 이중적인 지위가 가능한 것이다.[26] 헨리 8세는 자신의 혼인무효를 승인하지 않는 교황을 두고 '로마의 주교일 뿐'이라며 국내 간섭을 거부한 것이지, 기존 기독교의 체계를 갈아엎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27] 가톨릭 전례를 상당부분 유지했다고 해도 대중 신심 행위의 상당부분이 폐지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헨리 8세 이후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짧지만 급진적인 개신교화 정책의 영향도 컸다.[28] J.J. Scarisbrick, Henry VIII (1997).[29] 와이어트 반란은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되었으나, 종교를 직접적인 명분으로 내걸지는 않았다.[30]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31] 이 여성의 집은 현재 '순교자의 집'으로 지정되어 있어, 요크에 갈 경우 방문이 가능하다.[32] Peter Cunich, "The Dissolutions and their Aftermath", in A Companion to Tudor Britain.[33] 이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한국과 미국 장로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조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생겨났다. 이 당시 청교도는 영국 국교회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성공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34] 청교도 중에서도 국교회에서 내부 개혁에 회의적 입장으로 다수인 장로파와 대립. 신학적으로 회중교회를 선호하기 때문에 회중파로도 불린다.[35] 당연히 39개 신조에 위배되는 천주교와 유니테리언은 제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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