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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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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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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1]

1. 개요2. 배경3. 전개
3.1. 3~4월 학원 민주화 열풍3.2.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에서 거리로3.3. 신군부의 북한 남침설 유포3.4. 서울역 회군
3.4.1. 평가
3.4.1.1. 옹호3.4.1.2. 비판
3.5. 언론 통제3.6. 5.17 내란3.7. 5월 18일, 그 이후
4. 관련 문서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1979년 대한민국 제4공화국 당시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사실상 붕괴한 후 이듬해 신군부에 의해 대한민국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5.17 내란 발발과 그 이후 5.18 민주화운동이 진압될 때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이는 유신체제 붕괴 이후 일시적으로 대한민국에 민주화의 희망이 찾아왔던 기간(1979년 10월 27일 ~ 1980년 5월 17일)을 의미한다.

서울의 봄이라는 용어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일시적으로 불었던 민주화의 바람을 가리키는 표현인 프라하의 봄에 빗댄 것이며 프라하의 봄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봄도 7개월을 가지 못 하고 잠깐의 순풍으로 끝났다.

당대 대한민국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을 통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민중과 재야 정치권, 언론계는 대한민국에 겨울공화국이 가고 민주주의라는 봄날의 햇살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고대했지만, 찾아온 것은 전두환신군부의 등장이었다.

2. 배경

1979년 10월 26일,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약 18년간 장기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하면서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통해 일단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되[2]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참고로 이 담화문은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 거의 모든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차례차례 현실화될 것으로 여겨졌다. 12월 8일에는 악명높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었다.

이후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을 것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당시 방학이 시작된 직후였던 터라 개학할 때까지 대학가의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개학을 맞이한 1980년 3월에야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일단 개학 후 3월 하순부터는 거의 매일같이 규탄 집회가 이어질 정도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3. 전개

3.1. 3~4월 학원 민주화 열풍

3월 개강과 함께 학생들은 다른 시위 구호와 함께 '어용 교수 퇴진'을 외쳤다. 어용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난 대학은 3월 말까지 모두 18개교였으며 참가자만 8천여 명에 달했다. 이에 김옥길 문교부 장관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이익을 위해 어용한 사람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교수들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당시 스스로 물러난 교수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학원 민주화의 바람은 4월 말까지 멈추지 않았다. 4월 18일 문교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학원 민주화 투쟁의 상황은 시위/농성이 진행 중인 학교 중 학원 민주화를 거부하는 총학장 퇴진 요구가 21개 대학, 어용 교수 퇴진 요구가 24개, 재단비리 척결 요구가 12개, 학교 시설 확장 요구가 11개, 학생회 인정 및 학내 언론자유 요구가 20개에 달했다. 투쟁 양상을 보면 총학장실 점거 농성 12곳, 교내 철야 농성 24곳, 가두시위 진출 시도 2곳, 총학장이 사퇴나 사의를 표명한 경우 14곳, 입시휴강 조치 19곳 등으로 나왔다.

4월 18일 김대중은 동국대에 방문해 연설에서 “군은 반드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계엄령을 더 연장할 이유가 없다.”면서 동시에 “우리가 성급하게 혼란을 일으키는 일에 말려들어 가면, 그런 일을 노리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절호의 구실을 주게 된다.”고 군부에 빌미를 주는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

4월 24일 서울 14개 대학 361명의 교수들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사학의 족벌체계 비판, 군사교육 개선책 모색, 재임용제도 철폐, 교수회의 기능 강화, 대학별 교수협의회 구성 등 대학교육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항들이었다. 그러나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교수들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교수들과 함께 해직되었으며 그 수만 87명에 달했다. 이 시기에 복직했던 교수들 역시 다시 강단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4월 26일 관훈클럽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은 "현 정국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우려가 된다.", "평화적으로 불행한 사태없이 민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90% 이상의 목표이다."고 했으며, 지난 정권의 공과 과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박정희 정권의 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잘한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민들이 "우리도 하면 된다. 하니까 되더라"는 자기가능성을 발견토록 한 것이다. 물론 우리 국민의 높은 능력과 본질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쨋든 이점은 지난 정권의 공이다. 앞으로 나올 정권도 이를 더욱 발전시킬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

3.2.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에서 거리로

학원 민주화 투쟁 와중인 4월 9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사건'이 일어났다. 유신정권 시기부터 당시 대학교 1~3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들어가 1년에 열흘간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3학년까지 병영집체훈련을 받으면 군 복무기간을 180일이나 줄여주었다. 박정희 사후 민주화 바람이 불자 학생들은 이 훈련에 반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병영집체훈련의 폐지를 요구하는 농성과 시위가 다음 입소 차례였던 서울대서강대 등 여러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5월 2일에는 서울대에선 개교 이래 최대 인원인 1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그 전날 총학생회 운영위원회가 병영집체훈련 반대 투쟁을 철회하는 대신 '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하기로 결정한 데에 대해 격렬한 찬반 토론을 벌였다. 학생들은 "더 큰 걸 얻기 위해 작은 걸 버리자"는 총학생회의 결정을 따랐다. 그날 서울대 비상학생총회는 신군부와 유신잔당의 수장으로 지목된 전두환과 신현확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식을 치르는 등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정치투쟁 노선은 다른 대학에서도 받아들여졌고, 다음 날인 3일에는 각 대학 총학생회가 대학 간 공식적인 연대방안을 모색한 뒤 9일에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전국 23대 대학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개최했다. 이들은 계엄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면서 관제언론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항간에 유포된 '대학생들의 5.15 총궐기설'이 신군부의 쿠데타 구실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당분간은 교내 시위만 계속 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원칙은 12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서도 재확인되었다.

그런데 총학생회장의 이와 같은 결정을 뒤집어엎게 만든 건 바로 '5.12 군부 쿠데타설 사건'이었다. 신군부의 공작이 개입된 것인지 쿠데타설은 꽤 그럴싸했고, 이를 믿은 총학생회장단은 그날 밤 농성장의 학생들에게 몸을 피하라는 연락까지 취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간 온건노선을 지향하던 총학생회의 주류측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와중에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미래통합당 국회의원은 "정부에서 안개 정국을 해결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실력 행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라며 5월 13일을 그 한계로 못박았다. 의도한 발언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학생회의 이 발언은 곧 전 대학으로 퍼졌고 예정된 날 연대생을 주축으로 한 서울시내 6개 대학생 2천 5백명이 캠퍼스를 벗어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야간에 가두시위를 벌였고 고려대 등 서울시내 7개 대학이 철야 농성에 들어가 투쟁은 학생과 신군부 간의 전면전으로 바뀌었다. 이때 학생들은 거리에서 최규하와 신현확, 전두환의 화형식을 벌이기도 했다.

3.3. 신군부의 북한 남침설 유포

이런 학생들의 시위를 신군부는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상황에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김대중김영삼을 만나 학생들의 자제를 부탁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학생 시위가 북한의 사주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북한 남침설 위협까지 유포시켰다. 이미 5월 12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북한군 특수 8군단이 행방불명되었다"며 북한의 침투 가능성을 제기해 휴전선 동태에 대해 보고했다.[3]

이에 김영삼을 비롯한 3김은 이러한 남침 위협설을 심각히 받아들였다. 김영삼은 5월 12일에 박권흠 대변인을 통해 신현확 총리로부터 '5.15~20 남침설'을 전해 들으며 사실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같은 날 신 총리에게 동일한 소식을 들은 김종필은 즉각 당직자에게 이 내용을 전달했다. 5월 12일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열어 “만약 여기서 소동이 일어나면 민주주의를 저해하려는 세력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게 된다”며 학생들의 침착한 대응을 호소했다.# 김대중은 또 5월 13일에 기자회견을 열어 만일에 있을지 모를 북한의 무력침공 야욕을 경계하며 "질서를 지키고 사회안정을 유지해 북한 측에 오판의 자료를 주지 않도록 하자"면서 질서를 지키고 혼란을 피하고자 하는 총학생회의 결의를 지지하여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여야 정치권이 5월 12일부로 국회소집에 합의한 이상 국회만 열리면 계엄 해제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밤 10시 30분에 괴한들에 의해 의문의 '휴전선 총격전'이 일어나 정국의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진상은 현재 밝혀지지 않았으나 존 위컴 장군은 다음 날 전두환과 만나 전두환의 남침 임박 가능성에 대해 부인한 바 있으며 전두환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강조하는 건 대통령 될 핑계라고도 일축했다.

3.4. 서울역 회군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0대 초반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상황을 너무 몰랐다.
심재철
5월 14일 새벽 4시 40분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 모인 서울 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는 학생 시위의 거리 진출 여부를 토론한 끝에 "우리의 평화적 교내시위는 이제 끝났다.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싸울 것이다"라고 결의했다. 이에 학원 자율화를 거듭 강조하던 문교부 장관 김옥길기자회견에서 교문 밖의 시위는 계엄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며 자제를 촉구했다.

이날 김대중 역시 전날 일어난 시위를 보고 학생들의 시위 자제를 호소하는 8장의 원고를 써서 신문에 냈으나 계엄당국에 의해 삭제되었고 결국 15일 아침에 또 기자회견을 했다. 오후 2시에 문익환 목사는 "모든 군인들은 무기를 놓고 병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는 해머를 놓고 공장을 떠나라. 모든 상인들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충단공원으로 모여라."라고 쓴 성명서를 제시해 김대중에게 서명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러한 내용에 반대하고 '계엄령 즉시해제', '전두환, 신현확 퇴진'으로 고쳐 성명을 다시 썼다.[4]

다시 학생운동 진영으로 돌아가자면 5월 14일에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 및 가두시위 시도에 맞서 신군부는 오전 8시 50분에 '소요 진압본부'를 세워 진압군 투입 지시를 내렸다. 이날 정오에 7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중심가에 구름처럼 모였고 지방 11개 대학 수만여 학생들도 같이 모였다. 이에 신민당 역시 국회의원 이기택 등 66명의 명의로 비상계엄 해제 건의안을 국회에 냈으며 다음날인 15일에 발표된 지식인 134명 역시 비상계엄 해제를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5월 15일 오후 3시경 서울역 인근에 서울시내 30개 대학교, 10만 명의 대학생이 모여 '계엄철폐'를 외치며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했다. 이에 진압군 병력 역시 시내 도처에 진주했는데 이 같은 대결 상황은 서울특별시뿐만 아니라 부산시, 대구시, 인천시, 광주시, 목포시, 청주시, 춘천시, 천안시 등 지방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역 광장 앞에 모인 학생들은 신군부와 최규하 과도정부에 대해 대규모 성토 대회를 열였다. 임시연단으로 세워진 버스 지붕 위에 올라 "서울역을 사수하자"고 외치고 시위대 역시 박수로 호응했다.

당시 인사들은 나중에 유명 정치인이 되었는데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5], 고려대 총학생회장 신계륜[6],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 대표 이해찬[7],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8],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이수성[9]이 그들이다. 사실 네임드가 아닌 일반 참여자들도 화려한데 대표적으로 경희대학교 법대 재학 중이었던 복학생 문재인[10]과 서울대 복학생 김부겸[11]도 있었다.

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모이자 이들을 통제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고 이들을 해산시킬 것인가, 군중을 이끌고 진군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농성을 할 것인가로 격론이 벌어졌다. 당시 서울 소재 대학교 총학생회장 16명이 서울대 마이크로버스와 서울역 대합실 양식당 그릴을 임시본부로 정하고 사후대책 논의를 했는데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충돌이 벌어질 경우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해 이날은 해산하고 다시 준비를 해 다음에 집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고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8시 30분에 버스 위에 올라 해산 결정을 발표했다. 당시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였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반발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9시 40분 경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려대학교가 해산하면서 그날 집회는 끝나고 말았다.

3.4.1. 평가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례라고 평가받는다.
3.4.1.1. 옹호
해산 결정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신군부의 무력 진압에 대한 우려에 대해 주장한다. 20년 전의 사례[12]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당시 군부를 누가 주도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해산하지 않고 군경과 본격 충돌할 경우 민주화는 고사하고 대규모 유혈사태가 광주가 아닌 서울에서 먼저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13] 일단 모인 시위대가 자칫 과격해진다면 계엄군에게 진압할 명분을 줄 수 있었다. 특히 하나회 소속 박준병이 이끌던 20사단은 포병연대까지 끌고 와서 여차하면 포격도 불사해 가며 진압하려고 폼을 잡은 상태였다.
3.4.1.2. 비판
해산 결정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광주와 달리 서울에서는 신군부가 학살극을 벌이지 못했으리라고 본다. 군부가 마음만 먹으면 외부와의 접촉 차단이 가능한 지방 도시인 광주와 다르게 서울은 수도라서 외국의 대사관이 산재해 있으며, 국내 및 해외 언론을 차단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신군부도 섣불리 무력 진압을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는 이 사건을 두고 '한국인이라는 동족의 이성을 믿은 과오'로 평가했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서울역 회군은 전두환의 군사쿠데타 세력이 장기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포기한 결정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7년 뒤로 늦춘 사건으로 평가된다.[14]

3.5. 언론 통제

'서울의 봄'의 실패를 재촉한 요인 중 하나는 계엄당국이 언론을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재홍의 증언에 의하면 5월 16일 당시 검열지침에는 학생들의 행위를 지지하거나 시위 중 '김일성은 오판 마라, 반공전선 이상 없다' 식의 구호, 시위 학생들이 교통 정리를 하거나 환경 미화를 했다는 내용은 즉각 삭제되었다.[15] 또 5월 14일에 일본 국회의원단이 덩샤오핑을 만나 북한의 남침은 불가능하다고 전한 기사나 북한의 남침 불가능을 밝힌 르몽드를 인용한 기사 등도 삭제 대상이었다.

3.6. 5.17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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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의 시위대가 해산된 지 불과 이틀 뒤인 5월 17일,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하여 사실상 정권을 완벽히 장악하고 야당 정치인들과 시위 주모자들을 체포해 학생들이 해산했음에도 유혈 사태를 벌였다.

3.7. 5월 18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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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신군부가 권력과 군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결국 조직적인 저항은 광주에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그리고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을 신군부가 보낸 계엄군이 광주학살로 제압하면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으며, 한국의 민주화는 6월 항쟁이 일어난 1987년까지 미뤄지게 됐다.

4. 관련 문서

5. 대중매체에서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서울의 봄 1부, 안개정국
▲ 서울의 봄 2부, 춘래불사춘
▲ "한강을 봉쇄하라!"

[1] 서울역 고가에도 시위대가 집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2] 제4공화국 헌법상 대통령 궐위 시 3개월 이내 후임자를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3] 한달 전인 4월경에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된 상황이었다. 보안사령관 자리까지 겸직하고 있었기에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 둘을 동시에 거머쥔 실질적 최고 권력자나 다름없는 상태였다.[4] 김대중은 후일 자서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이 때 신군부가 반대파를 잡아들이기 위한 구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성명서 초안에 그대로 서명을 했다면 자신을 비롯해 성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부 내란사범으로 몰려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고 회고했다. 나중에 김대중을 죽이기 위해 없는 죄도 만들어서 고문을 하고 사형을 선고했던 자들이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니까 이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5] MBC 기자 출신으로 5선 국회의원, 제20대 국회 전반기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초대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를 맡았다. 21대 총선에도 출마했으나 낙선했다.[6]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서울 성북구 을 지역구에서만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7]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고 제20대 국회까지 최다선 의원(7선) 및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지냈다.[8] 작가 출신으로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참여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JTBC 썰전의 고정패널로 출연했다.[9] 훗날 서울대학교 총장 자리까지 올랐다가 문민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중도 사퇴했다.[10] 당시 복학생협의회 활동을 하다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청량리경찰서로 연행됐다가 제22회 사법시험 2차 합격 뒤 경희대 측의 구조로 석방되었다. 합격한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에서도 영감님이라고 부르며 굽신거렸다고(...)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부산광역시에서 인권변호사로 일했고 참여정부 시절 민정수석,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역임한 뒤 1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17년부터 2022년까지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11] 당시 서울대 복학생 협의회 총무. 4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총선 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바뀐 후 처음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에서 민주당계 정당 출신으로 당선됐다. 홍의락 의원과 함께 유이한 대구 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으나 21대 총선에서는 낙선했다. 이후 2021년 5월 대한민국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12] 이쪽은 비록 성공은 했지만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그나마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고령이었기에 하야하는 선에서 성공이 가능했지 1970~80년대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13] 그리고 거의 10년 후 중국에서도 수도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었지만 계엄군의 학살로 처참하게 실패해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다.[14] 물론 1987년에 전두환이 저지른 짓들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민주화는 더 늦춰졌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최근까지 집권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다행히 6월 항쟁 후 1988년 민주화되었다.[15] 원 출처: <군부와 권력(김재홍 저.)> - 80년대 신군부와 6공의 민군관계. 나남. 1992. p160.[16] 방영 내내 1화인 운명의 총소리 10.26 1부부터 41화이자 최종화인 적과 동지까지 붉은색 계열로 제목이 쓰여져 있는데 12회인 서울의 봄 파트만 녹색으로 다르게 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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