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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05:41:23

박흥주

<colbgcolor=#000><colcolor=#fff> 前 대한민국 육군 대령
박흥주
朴興柱 | Park Heung-joo
파일:external/www.kma18.org/bagheungju100.jpg
육군사관학교 졸업 사진
출생 1939년 11월 15일
평안남도 평원군
사망 1980년 3월 6일 (향년 40세)
경기도 광주시
학력 서울고등학교 (졸업 / 10회)
가족 배우자 김묘춘
슬하 1남 2녀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2년 ~ 1980년
임관 육군사관학교 (18기)
최종 계급 대령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1. 개요2. 생애3. 후일담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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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군인. 육군 포병 대령으로서 1979년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으로 재직 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건박선호 등과 함께 연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2. 생애

평안남도 평원군 태생으로 6.25 전쟁 당시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당시 손꼽히는 명문고였던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원체 집안이 가난했던지라 등록금 걱정이 없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1] 육사 18기 졸업 후 1962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우수한 졸업 성적 덕에 6사단에 배치되자마자 관측장교 보직을 건너뛰고 바로 전포대장에 보임되었다.

전포대장 보직을 마치고 간 자리가 운명을 바꿨다. 6사단장의 전속부관[2]이 되었는데 당시 사단장이 다름아닌 김재규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박흥주는 김재규의 심복으로 분류되었다. 또 줄곧 주목받던 뛰어난 기량 덕분에 항상 동기생 중 최고 선두로 진급하는 그룹으로 분류되어 1978년 4월 임관 16년만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령 진급자로 선발되었다. 중령 시절 12사단 포병대대장 보직을 마치고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 대령 진급선발 후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중앙정보부장 비서실 수행비서관이 되었고 이 자리에서 12월 대령에 진급했다.

이처럼 그는 군사정권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장교였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의 최측근으로 인맥까지 갖췄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떵떵대며 살 수 있는 위치였다. 평범한 육군 대령이래도 가난한 군사정권 국가에선 당대 상류층으로 꼽혔고 군인 녹봉 외에 다른 주머니를 차 집에 온갖 가재를 갖춰놓고 살았다. 그런데 정작 육사 출신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였던 그는 군인 녹봉만으론 절대 잘 먹고 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일러주는 등 청렴함으로 인한 가난에 부끄러움을 갖지 않았기에 그의 집은 중구(현 성동구) 행당동 산동네의 허름한 반지하 판잣집이었다.[3] 그의 비리를 용납하지 않는 청렴함은 주변의 두터운 신망을 샀다. 전두환의 심복 중의 심복이던 장세동조차 박 대령의 사형 집행 후 "유족들에게 연금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가 한소리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중정부장 수행비서관 보직에서 일선 연대장으로 나가기를 희망했으나 김재규가 몇 달만 더 하라고 붙잡았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박 대령의 운명은 또다시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1979년 10.26 사건 때 김재규의 지시로 안가 경비원 이기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 차량 운전사 유성옥과 함께 식당에 있던 경호원 사살에 가담하였고[4] 박정희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김재규가 보안사에 체포되면서 박흥주 대령 본인도 결국 구속되었다. 그러나 박흥주는 체포 후 교도소 벽에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낙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거사 계획을 말했을 때 부하들이 군말없이 모두 따랐다는 점을 보면 김재규의 카리스마와 부하들의 신망은 대단했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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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박흥주의 선처를 눈물로 탄원하는 두 딸들의 모습
김재규는 박흥주, 박선호 등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선처를 바랐고 초등학생이었던 두 딸이 기자들 앞에서 "박흥주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라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울부짖으며 탄원했지만 공범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5]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스승인 김재규의 생일인 1980년 3월 6일[6] 경기도 시흥군 소재 33사단 유격훈련장에서 41세의 나이에 총살형[7]으로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 과정에서 M1 소총으로 흉부에 3발을 맞았는데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결국 머리에 권총을 쏴서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당시 사형장 출입기자 중 서울고등학교 동기생이 있었다. #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로 형 집행을 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역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었고 경기도 포천시 재림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비상계엄 하에서 현역 군인에 대한 재판은 단심제[8]이기 때문에 형의 집행도 관련자 중 가장 빨랐다. 그러나 관련 사건의 재판[9]이 아직 진행 중이었음에도 박흥주 대령만 사형을 우선 집행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파일:attachment/park_heung_ju.jpg
▲ 사형 집행 당시 모습 (가운데)

3. 후일담

10.26 사건 당시 변호를 맡았던 태윤기 변호사에게 김재규의 업적을 설명한 당사자였다.오마이뉴스 기사

사망 당시 아내와 국민학생이었던 두 , 생후 8개월이었던 아들을 두고 있었으며 아내에게 유서를 전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에게,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를 위해 할 말은 못하고 말았지만 세상이 다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게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의연하게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두 딸에게,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 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자라나는 동안 어머니와 친척 어른들의 지도를 받고 양육되겠지만 결국 너희 자신은 커서 독립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독립 정신을 굳게 가져야 한다. 조금 더 철이 들 무렵이나 어른이 된 후에도 공연히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죽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나가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10]

사형 집행 직전 박흥주가 남긴 유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조국 대한민국은 희망 있는 국가요 또한 그 국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대업은 조국통일이며 조국통일에 목적이 있는 한 우리 국민은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민족의 새로운 번영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번 시련도 온 국민이 수천 년에 걸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처리해온 위대한 민족혼을 발휘하여 서로 믿고 존중하며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단결하여 온 국민이 더욱 기쁜 마음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고락을 같이 하면서 이번 기회를 새로운 번영의 터전으로 삼아주길 빈다. 강한 성위요, 방패와 병기가 되신 주님께서 나를 키워주고 오늘 이 날 이 때까지 품어준 우리 대한민국 국군을 그 강한 오른팔로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서 간성으로서의 소금의 직분을 다할 것을 믿습니다.[11] 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을 떳떳하게 잘 길러서 나라에 봉사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염려해주시고 애써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박 대령의 유족들의 이후의 삶을 다룬 여러 기사에 따르면 사정이 딱하게 된 그의 가족들을 돕기 위해 서울고등학교 10회 동기생들이 십시일반 나서 가족을 지원했다고 한다. 또한 사건 당시 갓난쟁이였던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즈음 강남 8학군에서 좋은 교육을 시켜 주고 싶어 고민하던 차에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압구정동의 35평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다고 한다. 이걸 두고 청빈한 줄 알았더니 돈을 꿍쳐놨나 보다 뒷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위 내용 대부분의 출처는 월간조선 2000년 7월 기사에서 그의 부인인 김묘춘씨와의 대담 인터뷰다.

4. 매체에서


[1] 사실 박흥주를 비롯한 16~18기 전후로 입학한 사람들은 가정 형편 때문에 육사에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대학 입시에서 최상위권을 다툴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일반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육사에 진학한 것. 이들이 입학했을 시기는 이승만 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출세를 목적으로 진학했다고 보긴 어렵다. 육사 출신이란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엄청나게 강했으며 이는 전두환 등 선배 기수를 필두로 한 하나회 세력의 결집에 원인이 되기도 했다.[2] 전포대장 시절 보여준 뛰어난 브리핑으로 김재규의 눈에 띄었다. 지금도 전속부관은 장성들이 자신이 미리 눈여겨본 유능한 젊은 장교를 불러다가 앉히는 경우가 많다.[3] 박 대령을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도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중정 비서관이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행당동 달동네에 살았다."고 언급했다. #[4]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서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살해하였다.[5] 사건 당시 박정희, 차지철을 제외한 나머지 사망자 중 박선호가 살해한 정인형, 안재송을 제외한 김용섭, 김용태가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며 군법을 배제하더라도 계획적으로 다수를 살해하면 사형이 원칙이었던 시절이므로 사형을 면할 수는 없었다.[6] 다만 계엄사 법무처에서 작성한 '검찰정보보고'에서는 3월 6일이 아닌 3월 5일 10시 ~ 10시 35분으로 기입되어 있으며 이에 대해 느긋느긋한 서울일주라는 유튜버는 계엄사에서 작성한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 또는 계엄사에서 어떠한 이유로 하루 늦게 집행일을 알렸을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신군부 측에서 언론사에 보도지침으로 박 전 대령의 사형집행 소식을 3단이상 넘기지 말라 강제했다고 한다.영상[7] 현역 군인 신분을 가진 자(병, 부사관, 장교 및 후보생들)들의 사형은 총살형으로 집행된다. 주범인 김재규 등은 법적으로 민간인 신분이었으므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8] 당시 군법회의법 제525조(현행 군사법원법 제534조). 현재도 비상계엄 하에서의 군인은 단심제이지만, 1987년에 법이 개정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경우에 한하여 항소 및 상고가 가능하다. 비상계엄이 아닌 평시에는 민간과 같은 3심제이다. 1심 지역군사법원, 2심 서울고등법원, 3심 대법원으로 진행된다.[9] 그것도 대법원 전원 합의체[10] 남산(정보부)과 용산(육본)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선택을 잘못 한 게 원통한 듯 하다. 그래서 선택을 잘 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 게 아닌가 싶다.[11]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추정된다.[12] 여기에서 고증이 잘못되었다. 실제 박흥주 대령 사형 집행은 계급장 대신 수인번호가 달린 전투복에 전투화 차림으로 사형이 집행되는데 13화에서는 수인번호도 없는 군복에 고무링 착용을 안하고 운동화를 신은 채로 헌병(현 군사경찰)들이 엎드려 쏴로 집행하였다.[13] 실제로도 박흥주는 총살형 집행 당시 눈가리개를 착용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눈가리개를 씌우려는 병사를 호통쳐 물리치고 자신의 총살형 집행에 입회한 여러 사람들을 무심히 쳐다봤다고 한다.#, #[14] 실제로는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육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15] 그때 그 사람들에서도 윤여정이 나레이션으로 이 사실을 언급하는데, 언급 직후에 "대한민국 만세 좋아하시네. 으이그, 철딱서니 없기는."라고 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