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대전 淝水之戰 | ||
시기 | 383년 11월 | |
장소 |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화이난의 회하강(淮河) 지류 | |
원인 | 부견의 천하통일을 위한 남정(南征). | |
교전국 | 전진(秦) | 동진(晉) |
군주 | 부견 | 사마요 |
지휘관 | 부견 부융† 모용위 부방 주서 → 장천석 → 주융 석월 담옹 장자 양성† 왕영† 왕현 | 사석 사현 사염 환이 유뇌지 대희 도은 단현 |
병력 | 호왈 1,000,000여 명 | 약 180,000+@[1] 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동진의 대승, 전진의 분열. | |
영향 | 오호십육국시대의 존속과 남북조시대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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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동진과 전진이 비수(淝水)에서 맞붙은 전투로, 압도적인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동진이 기적같은 승리를 거머쥔 전투이다. 전진이 승리했다면 중국의 분열기가 빠르게 끝날 수도 있었으나, 이 패배의 여파로 전진이 멸망하게 되고 강북은 다시금 혼란기로 빠져들었으며, 동진 역시 이 승리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내분 끝에 멸망하는 등 5호16국시대의 혼란상이 오래 지속되는 결과를 낳았다.덧붙여 전투가 벌어졌던 비수(淝水)[2]는 삼국시대 오나라와 위나라가 수차례 맞붙었던 합비 일대이다.
2. 배경
파일:전진-동진.png |
전진(분홍색)의 최대 영역(376) |
부견은 중원 재통일을 위해 남아도는 국력을 총동원해서 대군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말 그대로 부하도, 아들도, 동생도, 아내도, 어머니도, 주요 신하들도, 심지어 부견이 존경하던 스님 도안도 다 반대했다. 바로 그 왕맹도 죽으면서
"우리 나라에 있는 한족은 아직 동진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 동진은 현재 위아래가 일치단결되어 있으니 괜히 집적대지 말고 모용선비족 출신으로 계속 폐하께 아첨이나 하는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부터 신경쓰시고 기회되면 제거해버리십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승려 도안이 동진과의 전쟁을 반대하자 부견이 한 말이 있다.
"이 원정은 영토 확장과 인구 탈취의 목적이 아니다. (중략) 영가의 난 이래, 강남(중국)에 떠돌고 있는 사대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하여 인재를 등용하기 위함이며, 무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다."
이 대화에서 부견이 이상적인 통치를 추구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존재 기간 내내 황제가 귀족들 눈치나 보며 한 순간도 막장이 아닌 적이 없었던 동진의 상황을 생각하면[4] 많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일단 전진에 남아 있는 한족들이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걸 더 싫어했다는 의미로 생각하자. 사실 좀 냉정히 생각해보면 황제들만 정상이 아니었지, 부견의 통일 이전 화북을 향한 공세적인 북벌을 펼쳐서 화북 왕조들을 당황하게 한 환온의 사례나 후대에 하북을 빼고는 거의 평정한 유유의 사례를 보면, 툭하면 분열되고 정치적인 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오호 왕조들에 비해 동진의 역량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급격한 통일 작업 덕분에 전진 내부에 있는 이민족들이 완전히 동화된 상태도 아니어서 수틀리면 언제든 다시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더하자면 동진이 막장스럽게 굴러가기는 했을지언정 한족 왕조의 정통성 우위라는 건 당시 생각보다 꽤나 컸다. 당장 저 위에 나오는 강족의 영수였던 요장의 아버지 요익중이 자녀들에게 자주 한 말이
"자고 이래로 융적이 중원의 주인이 된 적이 없으니 너네는 진에 귀부하고 딴 맘 먹지 말아라."
였다. 뭐 당장 부견의 할아버지 부홍도 후조랑 틀어지고 나서 바로 동진으로 귀부해 버린 일도 있었으니.... 왕맹이 동진을 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나 전진의 조정, 그리고 부견 휘하 측근들이 반대한 것도 동진의 정통성에 대한 인식들의 연장선상이기도 했을 것이다.그래도 부견은 왕맹이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은 왕맹의 유언을 잘 지켰다. 하지만 부견은 결국 최악의 패배를 낳고 말 비수대전을 감행하고 말았다. 이는 부견이라는 인물 자체가 순수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화북 지역의 통일을 이룬 다음 남쪽까지 아우르는 걸 꿈꾼 것은 스스로를 선대의 진시황이나 한고제처럼 '통일중화제국의 황제'라는 연장선상에 놓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저족의 리더가 아니라 한족과 이민족을 아우르는 중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기에 한족과 이민족 가릴 것 없이 인재를 기용하고, 한족의 통치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내부 통일체제 구축이라는 선결과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진을 강행했던 것이다.
3. 전개
부견이 왕맹 사후 7년째 되던 해, 갑자기 전쟁을 하려 들자 비서감 주융이 찬성했다. 상서좌복야 권익, 태자좌위솔 석월, 양평공 부융, 황태자 부굉, 승려 도안, 장부인, 중산공 부선 등 주위에서 죄다 들고 일어나 반대했는데도 부견은 뭐에 씌였는지 주변에 떼를 쓰더니 위에 언급한 관군장군 겸 하남윤 모용수가 "그럼 하죠."라고 맞장구 좀 쳐주자마자 맹장 장자가 이끄는 선봉 250,000명에 자신이 이끄는 군대까지 모두 870,000명, 여기에 기타 병력까지 합쳐 호왈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구성해 동진 침략을 감행했다.[5]이렇게 된 이유는 부견이 자기 생전에 중국 통일을 한 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통일 작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졌고, 남은 국가는 동진뿐인지라 조금만 더 하면 목표 달성이기는 했다. 물론 자기 발 밑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였다.[6] 아마 자기가 덕을 베풀어서 사람들이 감복했으므로 끝이라 보고, 난세에는 조금만 틈을 보이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무시한 모양이다.[7] 실제로 부견이 전사한 후에도 일족이 계속 부견의 의지를 받들어 저항했으며, 나중에 배반하는 모용수나 요장 같은 이들도 양심에 찔렸는지 패전 후에도 즉시 부견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다. 왕맹의 유언을 7년 동안 잘 지켜놓고 갑자기 이를 어겨가며 침공을 강행한 것도, 7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천하통일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을 결정하고 나서 부견 본인은 수양(수춘)쪽으로 진격했고, 모용수는 한수를 타고 형주쪽을, 요장은 장강을 타고 형주를 공격했다. 이것은 동진의 수도 건강이 있는 강동과 동진의 중심지이던 형주 일대 중 하나라도 뚫리면 그대로 동진을 멸망시킬 수 있는 포진이었다. 당장 비수대전이 있기 백년전 오멸망전 당시에도 이렇게 오나라가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망했고 2백년 후 남진이 이렇게 망하였으니 동진이 당대 최고의 위기 상황은 맞았던 것이다.
부견이 직접 공격한 수양(수춘)이 함락되고, 평로장군 서원희 등이 사로잡혔다. 수양성을 구원하러 온 동진군의 호빈은 회수 서쪽으로 물러나 협석을 지켰지만 이내 포위당해 전진군은 승승장구했다. 한편 북쪽에서 부견이 질량 낙하급 인해전술을 시전하니 동진에서도 막긴 해야겠는데, 이 당시 동진은 명장 환온 사후 중요한 영토인 익주와 양양을 잃는 등 전진군에 연이어 패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파벌 다툼으로 정세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단 형주쪽을 공격하던 모용수를 막기 위해서 거기장군 환충에게 병력을 동원하게 하고 본대를 막기 위해 수도인 건강이 있었던 강동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을 긁어모아보니 80,000명 가량이었다.
절대 우세인 가운데 전진은 대국의 아량을 보인답시고 항복한 한족 출신에 양양태수였던 주서를 동진군에 보내 항복을 권고했는데, 항복은 했을지언정 마음은 동진에 가있었던 그는 바로 전진군의 전략을 몽땅 누설해버렸고, 선봉을 꺾어서 전진군의 사기를 꺾어버리라고 조언해주었다.
동진군은 그걸 기반으로 필승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실로 왕맹이 우려한 그대로였다. 게다가 80,000명은 말이 80,000명이지 수도권 방위를 위해서 동원한거라 상당히 정예병이었다.
일례로 광릉상 유뇌지(劉牢之)가 이끌던 5,000명의 동진 북부군이 낙간[8] 에서, 전진군 장수 양성과 맞붙었는데 양성이 크게 패배해서 양성을 포함한 15,000명이 죽고 전진의 익양태수 왕영이 사로잡혔다. 그걸 들은 부견과 부융도
"동진의 군사는 약하다더니 누가 그런 말을 했나?"
라고 두려워할 정도였다.(낙간 전투)그럼에도 부견은 천하통일이라는 욕심도 있었고, 이미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던 걸 뿌리치고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호왈 100만이라는 군사를 끌고 나왔던 터라 정치적인 이유로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결국 부견은 여전히 80,000명에 비하면 훨씬 많던 전진군의 수와 강남 왕조에 비하면 언제나 정예였던 군대를 믿고 결전을 벌여서 이기겠다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4. 결말
수양성(수춘)은 후한 말에 원술이 여러 지역의 군웅들에게 몰매를 맞고 파멸했듯이, 강동 등 그 일대를 전부 장악하고 있지 않으면 수비가 심하게 힘든 성이었다.결국 부견이 직접 수양성 밖에 나와서 비수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최종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부견은 군대를 강 일대에 틈을 안 두고 배치시켜서 동진군이 비수를 못 건너게 했다.
이에 동진군은 군대를 잠깐 물려주면 우리가 그쪽으로 진군할테니 한 판 제대로 싸워보자고 제안을 했다. 공격한 측이 수도 많은데 계속 지구전으로 나가는 것은 보급 문제나 사기 문제에 있어서 좋은 일은 아니었고, 애초에 한판 승부로 가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 부견은 동진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반쯤 건너왔을 때 철기대를 돌격시켜서 동진군을 격퇴하겠다는 전통적인 전술을 사용하려고 했다.
문제는 부견이 안 그래도 사기가 바닥을 기던 전진의 군사들을 제대로 생각못했다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낙간에서 진 것과 수도 더 많은데 기세에서 밀려 공격자가 지구전을 하던 태세였는데, 제대로 된 싸움도 없이 군대를 물려주자 이거 동진이 이긴거 아냐?라는 의심이 생겼다.
거기에 전진군이 동진군과의 결전을 위해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X맨인 주서가 전진군 후미에서
"진군(秦軍)이 패했다!"
라고 외치면서 도망쳤고, 전략적인 목표를 위해 후퇴하던 전진군은 진짜로 패배해서 후퇴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모랄빵이 나버리고 말았다.차라리 병력이 적었다면 부견이나 다른 장수들이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부견은 너무 많은 병력을 데리고 전장에 왔다. 동진군이 강을 반쯤 건넌 상황에서, 한 줌도 안되는 전진군의 장군들이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많은 병력을 통제해서 진정시키며 동진군과 싸우도록 만들기에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결국 전진군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동진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해야 했지만 모랄빵이 터진 선봉대가 동진이 선봉으로 앞세운 정예 병력을 제대로 못막고, 역으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전진군은 처음에는 주서의 거짓말로 인해 전투에서 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동진군이 전진군을 밀어내면서 진짜로 패배하기 시작했고, 강을 다 건넌 동진군의 기병들이 우왕좌왕하던 전진군을 공격해왔다. 결국 전진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다.
비수에서 부견이 깨지는 동안, 모용수는 형주에서 막혀 못오고 있었고, 부견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후퇴했다.
파촉에서 시작해 장강을 타고 형주를 공략하기로 했던 요장은 비수대전이 끝날 때까지, 형주로 못오고 있다가 부견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안가서 배신해버렸다.
결국 전진이 각지에서 끌어모은 병력들은 거의 전부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전진이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군대는 모용수가 수습한 대략 30,000명 정도라는 참담한 성과를 내면서 비수대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뱀이 갑자기 발악하는 개구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튼 꼴[9]라 써 놨다.]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몹시 절묘한 비유이다. 여기에 비수대전에서의 패배 하나로 나라 자체가 막장 테크를 탄 걸 감안하면 이건 머리를 틀었다가 너무 심하게 틀어서 목이 꺾여 죽은 꼴이었다.
어떻게 보면 관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호왈백만이라는 엄청난 숫자 자체가 오히려 전진의 패배 원인 중 일부라고 볼 여지도 있다. 비수대전의 패배 원인을 간단히 요약하면 '모랄빵 전염으로 인한 전군 붕괴'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편제상으로 호왈 100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했다는 것은 곧 전쟁 경험이 없는 백성들을 대규모로 징병했다는 뜻이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투 경험이 없는 징집병들은 쉽게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며 모랄빵에 대단히 취약하다. 차라리 수십만이라도 비교적 정예병으로 편성되었다면 동진에 대한 전력 우위는 유지하면서도 일시적인 혼란이 곧바로 전군 붕괴로 이어지는 참사는 피했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당장 전진이 상대했던 사마씨의 진나라가 이런식으로 10~20만 수준의 병력을 동원해 천하를 통일하고, 남쪽으로 파천한 후에도 북조군대를 상대로 제법 훌륭한 전과들을 거두었으니 이런 정예 위주의 병력이 그 시대에도 더 효율적이고 강력했음은 명확했던 것이다.
이후 중국의 군대는 시대가 지날수록 효율적으로 군사를 편제하고 통솔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고대의 인신지배에서 중세의 토지를 통한 지배로 변모하고 이를 토대로 점차 국가의 근본 구조가 근세의 재정국가로 변모되는 과정에서 모병제로 병력들을 꾸려가게 되는 흐름 때문에 가용 규모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당나라만 해도 고당전쟁 당시 황제인 이세민의 친정군이 10만 정도로, 무식하게 머리수로 닥돌하지 않고 오히려 병사의 수를 줄이며 정예병 양성에 노력을 기울인 방식 덕분에 당나라는 전진과 수나라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보유하고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후대의 통일왕조인 원, 명, 청도 마찬가지였다.
4.1. 비수대전 '전진 100만 대군' 회의론
비수대전에 참여한 전진군의 병력수는 논란이 있다. 이 전투에 참여했다고 명시된 병력의 규모 기록은 오로지 《진서》라는 사료 하나에만 의존하고 있고, 부견이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동원했다고 쳐도 그걸 세 방향으로 나누어서 진공한만큼 비수에 있었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료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한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2005년에 타계한 Michael C. Rogers이다. 《진서》는 기본적으로 당태종 이세민 시기에 그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Rogers는 비수대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당시 편찬을 담당한 당나라 관리들이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말리기 위해 부견의 군세와 그 패전의 비참함을 과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A. 그라프는 Rogers의 주장이 너무 나갔다고 보고, <부견 재기>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부견의 패전이 거대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하여간 비수대전의 이른바 호왈백만 대군이라는 것은 사실 서구 학자들이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상식선에서 충분히 상고할 수 있는 일이다. 애초에 이런 장부상 병력들은 정확하진 않다. 의외로 군대 규모가 큰 경우, 장부상 병력을 다 채우지 못한 사례가 많다. 중국 전근대 경제력의 황금기라고 평가받는 송나라 시기에 전시에 가용할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이 서류상으로는 100만 명이 넘었으나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복무중 상비군은 50만 명이 넘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워낙 송나라 정부가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감당해야하는 재정 부담 규모가 압도적이라 실제 전선에 보내는 병력은 이보다 소수의 정예만 꾸려서 보냈으며[10], 몽골 제국도 리즈 시절 때 장부상으로는 대략 160만 명의 대군이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그보다 적었고, 아는 게 좀 있는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후한 말기 적벽대전 때도 호왈 80만 명의 대병력을 보낼 것이라는 편지를 조조에게 받고 난 후, 손권이 80만 병력을 어찌 막을수 있을지 중신들에게 조언을 구할 때 "소위 80만 대군은 조조의 허장성세 뻥튀기고 실제 병력은 18만+@이니, 50,000명의 병력을 준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발언을 주유가 했다. 당시에도 뻥튀기 논란이 있었던 것인데, 어쨌거나 이때 조조가 언급한 80만이라는 걸 사실이라고 본다고 해도 100만보다 적다. 애초에 18만이라는 대군조차 오로지 전투병력만 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봤을때[11], 장강이라는 본인들에게 익숙한 천연 방어선을 방패로 삼은 적벽대전 당시 동오의 병력도 무조건 조조에게 압살당할 차이라고 하기는 힘들었을 수도 있다. 이건 이로부터 160여년 후 전진과 동진 간의 이 전투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상고해보면, 위진남북조 초기인 삼국시대 상황만 해도 이런데 오호십육국시대라는 희대의 혼란기를 거치고 이제 막 북중국을 통일한 전진이 백만대군을 실제 전선에 동원할 행정력을 비롯한 국가적 역량이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심지어 툭하면 호왈백만을 불러댔던 다른 시기의 중화제국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당장 역사학자들은 인류역사 상 이런 호왈백만 말고 실제 백만 단위로 군대가 본격적으로 전선에 동원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20세기인 제1차 세계 대전 무렵부터[12] 라고 본다.
5. 영향
전진은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이 한 방으로 멸망했다. 닥닥 긁어모아 보낸 병력을 일시에 깡그리 말아먹었으니[13] 힘의 공백이 생긴 건 당연했고, 복속되었던 기존의 이민족 세력들이 대거 들고 일어나 기껏 통일되었던 전진의 광활한 영토를 갈갈이 찢어놓기 시작했다. 차라리 동진을 공격할 때 소수 병력만 보내 패배했다면 반란이 일어나도 막을 힘이 있었겠지만, 이때의 전진은 그럴 힘이 전혀 없었다.비수대전 이후 중국의 형세[14] |
그야말로 내우외환을 넘어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부견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려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이들을 제압할 힘이라곤 없었고, 특히 서연이 자리잡은 화음이 수도 장안의 코앞이었던 관계로 본진을 수비할 병력마저 모자라 대다수의 지방은 포기하고 장안으로 집결시키기에 급급한 상태였다. 결국 전진은 비수대전에서의 대패 이후 불과 1년 만에 장안 정도를 빼면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국으로 전락해버렸다.
385년 서연(西燕)은 끝내 장안까지 도달했고 지리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부견은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전황은 악화되어만 갔다. 결국 부견은 장안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과거에 신하이던 요장은 옥새를 요구했으나 부견은 요장을 마구 꾸짖으며 거절했고, 요장은 그를 신평의 한 절에 감금했다가 후에 교살했다. 그리고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뭔가 찬양과 비하를 섞은 듯하다.
부견의 핏줄은 대부분 도륙났지만 그나마 부견의 서자인 부비가 뒤를 이어 전진은 겨우 버텼다. 그러나 그도 1년 만에 후진에게 패배하고 죽었으며 일족인 부등, 부등의 아들 부숭이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394년 부숭이 걸복부의 서진군에게 잡혀 죽으면서 전진은 아예 멸망했다.
당시 동진의 재상이었던 사안은 승전보가 올 무렵 100만 대군을 맞아 불안해하는 조정과 병졸들을 안심시키려고 지휘 천막 안에서 태연히 바둑을 뒀다. 열종 효무제 사마요[15]가 보낸 사신이 전황은 어떤지 묻자 역시 바둑이나 한 판 두자며 사신을 바둑판에 앉혔다. 한참 바둑을 두고 있다가, 승전 보고서가 도착하자 눈으로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한쪽으로 치우고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사신이 보고서에 뭐라고 써있었냐 묻자 담담하게
"우리 애송이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구려."
라고만 말했다.[16] 그래도 기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해서 바둑돌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가 그만 원치 않는 자리에 잘못 두었는데, 이를 본 사신이
"나쁜 수로군요."
라고 지적하자 사안은
"이 정도에 동요하다니 늙어서 주책이군요."
라며 허허 웃었다. 사신이 돌아가고 나서야 막사에서 기뻐하며 날뛰었고, 문턱에 나막신이 부딪혀 굽이 박살나는데도 모를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동진은 군사를 보내 전진을 공격했다. 384년에 응양장군 유뇌지가 환성, 상용태수 곽보가 위흥, 상용, 신성 등 세 군을 함락시켰다. 또한 양전기가 성고를 점령하고 전진의 양주자사 반맹을 격파했다. 경릉태수 조통이 양양을 공격해 전진의 형주자사 도귀를 달아나게 했고, 전진의 낙주자사 장오호는 풍양을 점령한 후 동진에 투항했으며, 사현 및 환석건과 함께 북벌을 단행해 전진의 서주자사 조천을 팽성에서 쫓아내고 점령했다.
9월에는 사현이 팽성의 내사 유뇌지를 시켜 전진의 연주자사 장숭을 공격해 견성을 점령하고 하남의 성보들을 모두 귀순시켰으며, 음릉태수 고소가 전진의 청주자사 부랑을 공격해 항복시켰다. 기세가 오른 동진은 전진을 공격해 연주, 청주, 사주, 예주 등을 평정했다. 그러나 이후 동진은 비수대전의 승리의 주역이던 북부군의 쿠데타로 나라의 기반이 무너졌고, 북부군 사령관 유뇌지의 부하였던 유유(劉裕)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이후로도 206년 동안 계속되었고, 나중에 수나라 고조 문황제 양견이 남북조를 통일한 589년에서야 끝나나 싶더니 다시 혼란기인 수당교체기가 왔다가 당나라가 들어서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6. 같이보기
[1] 형주를 지키던 거기장군 환충의 서부군 10만에 정로장군 사석이 이끌던 8만, 그리고 북부군까지 포함[2] 본래 '水' 자는 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현대어의 '강'의 의미로도 쓰였다. 우리가 쓰는 '강'(江)이라는 한자는 원래 장강만을 뜻하는 고유명사였던 것이 의미 확장을 거친 것이다. 역시 강물을 뜻하는 '하'(河) 역시 본래는 황허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으며, 보편적인 의미의 강물은 다 '수'(水)라고 불렀다. 한국에도 과거에 강의 명칭을 이렇게 썼다. 패수, 살수, 한수, 아리수 등이 그 예이다.[3] 동진이 성한을 멸망시킨 지 수십 년 만에, 성한을 정벌한 환온이 죽은 직후 바로 북조에 빼앗겼다.[4] 서진과 동진 전부 합쳐도 제대로 된 황제가 명제, 효무제 잘 쳐줘도 무제, 회제, 성제. 이게 끝이다. 성제와 목제는 능력이 있었으나 요절(게다가 목제는 부검 결과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했고, 강제, 애제는 무능했으며, 폐제와 공제는 능력 자체는 있었으나.....[5] 더 놀라운 것은 동시에 서역으로도 호왈 100,000명의 원정군을 보냈다![6]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서 보듯이 현대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원래 사람 심리가 한 번 좋은 것만 보기 시작하면 적신호가 얼마든지 들어와도 다 무시하거나 반박하게 되어 있으니.[7] 다만 비수대전 직전 부견의 통치력은 안정적인 상태로 국내에 특별히 활동적인 저항세력이 없었고, 대규모 병력 동원도 무리없이 가능했음을 생각해 볼 때 만약 동진 원정에 성공했다면 국내의 불안정 문제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쉽게 수습되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대규모 대외원정의 성공은 황제(부견)의 권위와 위상을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즉 동진 원정에서 부견의 실수는 '유해무득의 멍청한 짓을 했다'기 보다는 '이기면 크게 따지만 졌을 때 안정판이 없는 도박판에서 성급히 올인을 외쳤다'가 져서 싹 날린 것에 더 가깝다. 뭐 올인을 외치고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본인이야 자기가 절대 지지 않을 판이라고 생각했겠지만.[8] 수양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회수와 낙구(洛口)를 사이에 두고 목책을 세워 동쪽에서 오는 동진군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낙간이 뚫리면 비수가 나오고, 비수를 건너야 비로소 수양성에 이를 수 있다.[9] 이때 머리를 튼 뱀이 몸통을 먹은 것처럼 그려놨다. 그 아래에는 (비유가 이상하지만) "'여하간 이랬대요[10] 애초에 북송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북송에선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극빈층을 구휼하는 제도로써 군대가 사용되었기에 서류상 병력, 상비군 규모만 컸지 이걸 실제 총전력으로 보기엔 좀 힘들긴 하다.[11] 당장 적벽대전 때보다 거의 1400년 후의 일인 이자성의 대군조차 호왈 백만대군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이자성의 군대 중에서 진짜로 전쟁터에 나와 싸우는 전투병들은 전체 인원의 10분의 1인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보급이나 무기 수리 및 치료와 정탐 같은 잡일들을 맡은 비전투원이었다. 또한 소위 전투원이라는 10만명도 실은 어중이떠중이에 가까운 것이어서 청의 정예인 팔기군을 상대해서는 반나절만에 토붕와해 되어 버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즉 그냥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서 아무 인력이나 집어넣고선 대충 10만이니 100만이니 부풀렸던게 이른바 이자성 백만대군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자성은 근본이 농민유적군이라 사례가 극단적이라고는 해도 호왈을 마구 불러댔던 전근대 동아시아 군대가 모두 정예한 전투병력으로만 구성되었다고 보기엔 어렵다는 한 일례는 될 수 있을 것이다.[12] 사실 19세기 후반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이미 양쪽 다 합쳐서 백만을 훨씬 넘는 실제 전선 병력이 동원되는 것에서부터 이미 전조가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로부터 50여년 후 1차대전에선 협상국, 동맹국 진영 주요 각국마다 동원병력이 백만 단위로 나오게 된다.[13] 물론 이른바 호왈 100만 대군이 모조리 몰살당한 것은 아니고, 대다수는 살아서 전진 땅으로 도망쳤지만, 어차피 군사력이란 건 징집하고 편성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14] 파란색은 선비 걸복부의 서진, 분홍색은 저족 여씨의 후량, 후량 남쪽의 무색인 곳은 선비 모용부의 토욕혼, 녹색은 강족 요씨의 후진, 후진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서연, 서연 동쪽은 선비 모용부의 후연, 후연 북쪽은 선비 탁발부의 북위, 북위 북쪽은 튀르크계 고차(퇼레스), 남쪽의 노란색은 한족 사마씨의 동진이다.[15] 동진의 제13대 황제[16] 당시 사안의 아들 사염과 조카 사현이 장군으로서 이 전투에 나섰기에 이들을 '우리 애송이들'이라 부른 것이었다. 또한 이 당시 동진의 군대를 이끈 사석은 사안의 동생이자 사현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