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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20:12:20

분청사기

분장회청사기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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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음각어문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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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덤벙무늬 사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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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구름 용무늬 항아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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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상감연모단당초문병[3]
이런식의 인화기법이 들어간 분청사기는 인화 분청사기라 불린다.

1. 개요2. 분청사기의 오해
2.1. 분청사기 막사발론?
3. 한국만의 것?4. 분청사기 고미술품 목록
4.1. 국가 지정 문화재4.2. 일반 동산 문화재4.3. 해외 소재 문화재
5. 외부 링크6. 같이보기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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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粉靑沙器
분장회청사기(粉裝灰靑沙器)의 준말로 회색이나 회흑색의 태토 위에 백토로 표면을 마무리한 도자기. 분청자, 분청자기라고도 한다. 고려청자조선백자 사이에 존재했다. 당대에는 분청사기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회흑색 태토(회청)에 백토로 마무리한(분장) 사기라는 뜻에서 분장회청사기라 명명했다. 청자의 청색에서 백자의 백색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위치한 과도기적인 양식으로도 볼 수 있다. 청자와 백자에서 주로 느껴지는 매트함, 우아함과는 다른, 다양한 텍스쳐와 질감의 친숙함이 돋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13세기 경 청자에서 모티브를 얻어 변모, 발전한 자기조선 태종 때부터 약 200여년간 유행했으며, 특히 세종~세조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16세기 전반부터 점차 쇠퇴했다. 백토를 다양한 방법으로 분장을 하여 무늬를 그렸다. 초기에는 꽃이나 나비 등의 모양을 도장처럼 찍어서 무늬를 만드는 인화기법, 상감을 넣어서 문양을 빚는 상감기법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후기엔 크고 굵은 귀얄이라는 붓으로 백토 분장을 하는 귀얄기법, 백토 물에 담갔다 꺼낸 분장기법, 백토 물에 담갔단 꺼낸 뒤 무늬를 그리고 무늬 이외 배경을 긁어내는 박지기법, 귀얄기법을 사용한 후 철사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기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무늬를 만들었다.

초기엔 관공서와 민간 양쪽에서 분청사기를 만들었으나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시 일대에 관요가 설립되고, 관요에서 백자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분청사기는 생산량이 점점 줄어들고 쇠퇴한다. 관요가 백자에 집중하고 민간 제조을 막자, 민간에서 보성 덤벙이라는 고유 기법을 개발해내기도 했다. 당대의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었던 셈. 현재도 분청사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에 비해 유명세가 덜 한 편이다. 그러나 전자와는 다른 소박하고 순박한 형태, 친숙함, 나아가 텍스쳐와 문양으로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기에 과거와 달리 한 가지 도자양식으로 인정받는다.

경상남도 김해시김해분청도자박물관이, 광주광역시 북구에 분청사기박물관이, 전라남도 고흥군고흥분청문화박물관이 있다. 이 곳은 모두 이름난 도요지가 있던 곳이다.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도 여말선초 대표적인 유적이다.

도자기에 대하여 관련글. 참고하자.

한국사 과학 探 - 자연을 담은 도자, 분청사기 / YTN DMB

2. 분청사기의 오해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시기에 발생한 양식이다. 즉 과도기적인 양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분청사기가 이에 비해 저급기술이며 따라서 도태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곤 한다.

그러나 그 과도기가 잠깐은 아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약 200년간 유행하였으며 민간유통되는 것에서 나아가 진상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분청사기 몇몇은 일본에서도 국보취급을 받을 정도.
또한 제작기법도 다른데,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에서 나아가 면상감 등을 발달시키거나, 백자에서 나타나는 철화기법도 나타나곤 한다. 한편 분청 특유의 제작기법도 여럿 생성된다.

2.1. 분청사기 막사발론?

분청사기가 정작 본고장인 조선에서는 단순한 막사발이었으며, 일본에서 그 미적 가치를 발굴하였다는 잘못된 주장.

과거 일본으로 넘어간 조선의 분청사기중 몇몇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분청사기는 주로 민간용으로 쓰였다는 인식이 있다. 이에서 착안해 일본측에서 '분청사기는 조선에선 단순한 막사발로 취급받았지만, 옛 일본인들이 그 특유의 미적 감각을 발굴하여 가치를 만들어내었다'라는 주장을 하곤 한다. 이것이 소위 '분청사기 막사발론'인 셈.

즉 작품으로 대우받는 이유가 일본인 자신들의 안목이 좋아서라는 뜻. 심지어 이런 주장이 일본 미학에 영향을 받은 국내 지식인들에 의해 유입되며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조선의 개밥그릇이나 막사발도 일본에선 국보 취급'이라는 상대적 우월감인데, 결과적으론 자기비하이자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다. 이에 따르면 과거 조선인들은 자기 것의 미학도 모르다가 남이 알려줘서야 겨우 알 수 있었던 인간들이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위 내용을 요약하자면 국보로 지정된 작품들은 막사발이 아니라 제기였고, 제기는 조선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이른바 '일본의 미적 재조명'이란 타국에서 중요시하게 다뤄지던 도자품을 가져와서는 형태와 모습만 보고 깎아내리고 오해한 행동인 셈이다. 거기다 인화 분청사기에 상당수에는 제작된 지역과 관사명이 적혀있는데 이는 관청과 왕실에서 사용될 용도임을 증명한다.

한편 분청 특유의 담백하고 투박한 형태를 우연의 산물로 여기고, 일본을 거쳐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되었다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제기들이 가진 형태와 질감은 가마 내부 온도, 재의 노출도, 유약이 흘러내리는 형태가 '우연하게' 짜맞춰지며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당대의 도예가가 의도한 결과라는 것이다.[4]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제기로 중요하게 쓰였던 것이다. 이처럼 분청이 일본에서 국보가 된 이유는 우연한 결과물을 특별한 안목으로 발굴한 것이 아니라, 제작자가 의도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엿본 것에 불과하다.

3. 한국만의 것?

분청사기는 중국이나 일본에선 거의 만들어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만 발달한 도자기라고 알려져있곤 한다. 실제 영문 명칭도 Buncheong이라는 고유명사를 지니고 있어 하나의 기법으로 분류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슷한 연대에서 동아시아쪽에 유행하던 방식이 조선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베트남, 중국에서 발견되는 백토 분장등이 그 예.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북방의 도자기를 도입해 그 기술을 흡수하고 조선식 분청사기를 제작하기 위해 인력과 재원을 투자했다. 위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이런 분청사기 관요에서 제작한 자기들은 궁궐에 진상되기도 했다.[5]

그러나 이는 분청사기와 같은 것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갖고 있는 문화가 아니라는 뜻이지, 중국의 모방품일 뿐이라거나, 고유의 문화적 요소나 독창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조선의 분청사기에는 엄현히 문화교류의 결과물로서 백자가 유행하기 이전에 존재한 조선 특유의 미의식과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기법이 두드러지는 도자기이다. 그리고 조선의 분청사기 또한 일본으로 전해져 미시마(三島焼) 도자기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4. 분청사기 고미술품 목록

4.1. 국가 지정 문화재

4.1.1. 국보

4.1.2. 보물

4.2. 일반 동산 문화재

4.3. 해외 소재 문화재

5. 외부 링크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한국의 도자사
토기 | 도기 | 자기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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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오마이뉴스[2] (출처:한글 위키백과) 1991년에 국보 259호로 지정되었다.[3] 출처[4] 도자를 차내고 가마에 굽는다는 건 가마 안에 넣고 난 뒤에 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만드는 것일 뿐이다. 통제가 안 되면 도자공업일 리가 없다. 이걸 단순히 실력, 기술과 상관없는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말이 안 된다.[5] 조선 15세기 중국 북방 자기 문화의 유입과 분청사기에 미친 영향-김윤정(美術史學硏究 第312號 2021. 12 pp. 5-33)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