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섀시 번호 불명 - 프로토타입 차량4.2. 섀시 번호 41100 - 쿠페 나폴레옹4.3. 섀시 번호 41111 - 에스더 로드스터/쿠페 드 빌 바인더4.4. 섀시 번호 41121 - 카브리올레 바인베거4.5. 섀시 번호 41131 - 파크 워드 리무진4.6. 섀시 번호 41141 - 켈너 카4.7. 섀시 번호 41150 - 보야지 세단
부가티에서 1926년부터 1933년까지 단 7대만 제작된 럭셔리 대형 승용차이다. 부가티의 설립자인 에토레 부가티가 디자인한 비운의 명작. 프로토타입이었던 한 대는 1931년 사고로 인해 폐차되었다. 현재는 여섯 대만 세상에 존재한다. 이 중 두 대는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프랑스의 국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승용차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위의 장 부가티와 함께 찍은 사진만 봐도 엄청나게 큰 차라는 걸 알 수 있다. 거대한 엔진 때문인지 휠베이스만 해도 자그마치 4.3m이고, 전장은 6.4m이다. 무게는 3,175 kg. 모든 르와이얄은 각각 다른 디자인과 바디 형상을 하고 있다. 부가티가 생산한 차량 중 몇 안 되는 2열이 존재하는 차량이다. 일부 모델을 제외하면 운전석이 존재하는 1열의 지붕이 없는 브로엄 바디 형태를 하고 있다. 카브리올레 바인베거는 컨버터블, 파크 워드 리무진은 리무진, 켈너 카는 하드탑 쿠페의 형태를 띄고 있다. 에스더 로드스터는 원래 컨버터블이었으나 쿠페 드 빌 바인더로 리빌트되며 브로엄 세단 형태로 바뀌었다.
1928년에토레 부가티는 "금년에 스페인의 알폰소 국왕은 주문한 루아얄을 인도받게 될 것[3]"이라고 주장했지만 알폰소 13세는 결국 차를 받지 못한 채 퇴위했다. 그리고 알바니아의 조구 1세가 차량을 구매하려고 했는데 정작 에토레 부가티 본인이 조구 1세에 대해 "그 사람의 식탁 예절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하다![4]"고 까며 판매를 거부했다[5][6].
원래는 스물다섯 대를 제작해서 갑부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럭셔리한 차로 어필해서 판매하려 했지만, 하필 1929년세계 대공황과 판매 시기가 겹쳐 갑부들조차도 이 차를 살 상황이 아니었고, 부가티도 일곱 대 중에서 세 대밖에 판매하지 못했다. 비싼 가격도 이 차량의 비운에 한몫을 했는데, 그 당시 기본 옵션의 루아얄이 미화 30,000달러 정도였으며 현재 가치로 대략 $451,958.08 이다[7]. 이는 당시 롤스로이스나 벤틀리의 플래그십 모델의 두 배를 넘는 천문학적인 가격이었다. 기본 가격이 미화 40만 달러가 넘는 현재의 롤스로이스나 미화 300만 달러가 넘는 부가티 시론의 가격과 비교하면 저렴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의 자동차들은 완성차가 아니었으며, 엔진과 파워트레인, 섀시만 만들어 판매하는 형태였고 나머지는 공장에 추가금을 지불하거나 코치빌더에게 의뢰해 완성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대중차의 경우는 완성차들이 첫발을 떼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가격인 것이 맞다. 또한 단순히 인플레이션만으로 당시와 현재의 모든 화폐 가치를 곧이곧대로 환산하는 것도 무리가 있는데다가[8] 대공황 무렵이기까지 했으니 실제 체감 가격은 실로 살인적이었을 것이다[9].
부가티는 르와이얄 전용 엔진을 여러 개 만들어 두고 있었는데, 결국 팔지 못하자 악성재고로 남은 엔진을 약간 손봐 열차에 장착하는 용도로 납품해 큰 적자는 겨우 면할 수 있었다. 1920 - 30년대 물건인데도 무려 300마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엔진이었기에, 열차에 장착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고. 첫 생산된 29년식 모델은 배기량 15000cc였고 이후 모델부터는 12700cc로 생산하였다.
슈럼프 형제는 프랑스 뮐루즈Mulhouse에 있는 제분소를 개조해 나폴레옹 쿠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자동차를 보관해 두었으나, 이들이 경영난을 겪어 컬렉션을 매각하자 1981년 프랑스 측에서 이 차고를 통째로 사들인 후 이름도 국립 자동차 박물관 Musée National de l'Automobile으로 바꿔 민간에 공개했으며, 현재 나폴레옹 쿠페는 파크 워드 리무진을 포함한 슈럼프 형제의 자동차 컬렉션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리빌드 되기 전에는 에스더 로드스터, 리빌드 된 후에는 쿠페 드 빌 바인더로 알려져 있는 차량이다.
1932년4월에 프랑스의 의류 회사 회장이였던 아르망 에스더에게 판매되었다. 리빌드되기 전 청록색 로드스터일 때 모습을 보면 헤드램프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르망 에스더는 어두워지면 절대 운전을 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개인용으로 쓸 때 밤에는 몰고 나갈 일이 없다고 하여 옵션에 넣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장 부가티도 평소부터 헤드램프가 자동차의 디자인을 해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헤드램프를 빼달라는 주문을 받자 매우 기뻐하며 차를 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뒤편에 접이식 좌석이 있어서 4명까지 탈 수 있다. 뒷좌석에도 접이식 방풍유리가 있다.
#41111 Coupé de ville Binder
이후에 프랑스의 정치인 페테노르트가 이 차를 구매하였다. 에스더 로드스터는 코치빌더인 헨리 바인더Henry Binder에 의해 쿠페 드 빌 스타일로 리빌드되어 4인승이 되고 전에는 없던 헤드램프도 끼워넣었으며 푸른색과 흰색으로 리페인팅되었다. 이 시점에서부터 41111은 쿠페 드 빌 바인더라고 불리게 되었다.
쿠페 드 빌 바인더가 2차 세계대전 때 카롤 2세에게 팔렸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치로부터의 추적을 피해 파리의 하수도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1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4년에 일시적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더들리 C. 윌슨에게 인도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1961년에 미국애틀랜타의 은행가인 빌스 B. 레인에게 인도되었고 1964년리노에 있는 The Harrah Collection 박물관에서 45,000달러라는 엄청난 거금을 내고 구입해 갔다.
1986년 미국의 자동차 수집가 겸 건설업자이면서 미 공군 소장인 윌리엄 리온에게 판매되었다. 그는 1996년 바렛-잭슨 경매회사에 판매 제안을 보냈고 바렛-잭슨 사에서는 11만 달러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가 제안했던 최저 입찰 가격은 15만 달러였다.
1999년, 쿠페 드 빌 바인더는 새 부가티 브랜드의 모기업이 된 폭스바겐 AG에 20만달러로 판매되었다. 가끔씩 페블 비치 콩쿠르 델레강스, 굿우드 FOS 등에 모습을 비추지만 현재 몰샤임의 부가티 본사에서 부가티의 브랜드 홍보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쟁 전 독일에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이탈리아, 일본을 거쳐서 이동시키다가 주인인 요제프 폭스와 함께 1937년뉴욕에 정착했다. 그 이후, 한파 때문에 차 엔진에 이상이 생기게 되면서 폭스는 차를 매각했다.
찰스 체인[14]은 1946년 뉴욕에 있는 고철 처리장에 있던 카브리올레 바인베거를 발견하고 400달러에 차를 샀다. 요제프 폭스에 의해 차량의 소유권은 후일에 찰스 체인에게 이전되었다.[15]
#41121 Cabriolet Weinberger(After rebuilt)
찰스 체인은 맨 처음으로 카브리올레 바인베거를 시동이 걸리도록 수리하고 도로에서도 잘 달릴 수 있도록 개조하였다. 그리고 1947년 이후 그는 순정 부품인 싱글 카뷰레이터를 장착하는 대신에 새로운 4-배럴 카뷰레이터를 장착하고 코끼리 조각상을 달았으며 원래 블랙 + 옐로우 색상으로 도색되어 있던 차체에 베이지색 페인트로 재도색한 후 짙은 녹색의 컨버터블 지붕을 다는 등의 개조를 하며 거의 1000만 달러를 썼다.
1957년 카브리올레 바인베거가 도로에서 달린 지 10년이란 시간이 지나, 체인은 이 차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에 있는 헨리 포드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1] 영어로는 '로얄' 이지만 프랑스어로는 '루아얄\[\ʁwa.jal\]\' 이다.[2] 렘브란트 부가티는 솜씨 좋은 조각가였고, 대단한 동물 애호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동물원의 수많은 동물들이 사료 부족으로 사망하자 그는 절망하여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 "This year King Alfonso of Spain will receive his Royale."[4] "The man's table manners are beyond belief!"[5] Kimes, Beverly Rae, ed. (1990). "Bugatti". The Classic Car. Des Plaines, IL US: Classic Car Club of America. pp. 627–640. ISBN 0-9627868-0-2. LCCN 90084421.[6] 사실 썰이 하나 더 있는데, 식사 예절은 핑계고 조구 1세가 가난한 나라에다가 듣보잡 가문의 왕이라서 이미지가 깎일까 봐 판매를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7] 한화로 약 5억 709만 6,965원[8] 일단 당시 물가를 현재 화폐가치로 적용하더라도 구매력은 지금보다 확실히 적었을것이다. 무엇보다 똑같이 화폐가치를 적용한다 하더라도 1인당 소득이나 개인이 축적한 재산도 지금과는 현격하게 차이가있다.[9] 이 무렵 벤틀리에서 생산한 희대의 역작 벤틀리 8리터(Bentley 8-Litre)가 당시 £1,850, 즉 현재 돈으로 11만 7800 파운드(한화 약 1억 8348만원)로 부가티 타입 41에 비하면 1/3도 안되는 헐값이었음에도 너무 비싸서 거의 팔리지 않았다.[10] 1931년식 기준[11] 길이 약 1.4m, 높이 약 1m의 거대한 엔진이다. 심지어 성능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앞서 말했듯이 르와이얄 생산이 끝나고 남은 엔진을 처리하기 위해 프랑스 국철에 납품할 열차를 만들었는데 평균 116km/h, 최고 196km/h로 달리는 고속열차가 탄생했다고 한다.[12] 이들은 1962년에 쉰 대의 부가티를 구매하고 이후 미국의 존 셰익스피어라는 콜렉터에게서 파크 워드 리무진을 포함해 서른 대의 부가티를 더 구매한 적이 있다.[13] 파리의 하수도는 전근대에 만들어졌기에 구획이 큰 곳은 사람이 편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정비용 복도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를 숨길 정도로 넓은 구획도 존재했기 때문이다.[14] 후일에 제네럴 모터스의 기업 공학부의 부총재가 되는 사람[15] 체인은 이후 1940~1950년대의 클래식카 콜렉션을 모았다.[16] 이 당시 페라리 신차와 맞먹는 가격이였다.[17] 베를린은 프랑스어로 세단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