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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6:50:40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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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역사3. 동아시아에서
3.1. 중국3.2. 한국
3.2.1. 삼국시대3.2.2. 고려시대3.2.3. 조선시대
3.2.3.1. 체계3.2.3.2. 관리
4. 유사 개념5.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5.1. 게임5.2. 소설/영화/드라마
6. 여담

1. 개요

, beacon (fire)

나라에 병란이나 사변이 있을 때 신호로 올리던 불. 눈에 잘 띄기 위해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한다. 낮의 연기를 따로 봉연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세계에서도 매우 오래된 장거리 통신수단으로 미국원주민이나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자주 사용하였다. 가장 오래된 봉화의 기록은 중국으로, 사기에서는 주나라포사를 단지 웃게 하고 싶단 이유로 봉화를 막 쓰다가 나라 멸망에 일조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서양에서도 쓰인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기존 봉화를 응용해서 알파벳을 보낼 수 있는 봉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훗날 ADFGV 암호의 시초가 되었다.

3. 동아시아에서

3.1. 중국

봉화 자체는 기원전부터 쓰였지만 상당히 단순한 수준이라서 무슨 일이 있으면 불을 밝혀 '무슨 일이 있다. 그러니 좀 와라' 하고 알리는 정도였다. 더 복잡해지고 체계화됨은 중국 후한 때부터로, 봉화를 올리는 봉화대가 변방에서 수도까지 릴레이로 소식을 전달하는 체계를 잡았다. 적의 규모나 현재 상황에 따라 다섯 가지 단계로 소식을 전했다.

이외에도 암묵적으로 2가지 상황을 알릴 수 있었다.

중국의 봉화소는 정보 전달소 외에도 둔전 관리와 국경 검문소 역할도 하였기에 행정 문서용 죽간도 만들어 사용했다.

법적으로 봉화대는 5~10리마다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얘기. 실제로는 제각각이어서 봉화대 간 거리가 1리도 안 되는 곳이 있었는가 하면 20리나 되는 곳도 있었다.

3.2. 한국

3.2.1. 삼국시대

한국에 봉화 제도가 도입된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봉화 관련 기록이 나와 그때부터 봉화의 체계가 존재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봉화로는 전북 장수군, 완주군 등지의 전북 동부지역에 분포하는 가야의 봉화대가 있다.[1] 이 전북 동부 지역 봉수대 유적에서 가야 토기가 출토되기도 했고, 고려 이후 수도가 중부 서해안 지방에 자리잡았는데 이 전북 동부지역은 고려나 조선이 봉수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경로였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봉수대가 아닌 가야의 봉수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대가야 봉수대는 경북 내륙 고령군이 중심지였던 대가야가 중국, 일본 등 외부와 교류하기 위해 필요했던 섬진강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역사스페셜: 제4의 제국 대가야, 백두대간을 넘다[2]

그 밖에도 완연한 봉수는 아니지만 경기도 북부에 밀집하여 분포하는 고구려아차산 보루군, 양주분지 보루군 등이나 김해 금관가야의 나전리 보루군 등의 소규모 성곽들이 참고된다. 유기적으로 운영되었을 보루들이 아마 봉화와 유사한 방식 등의 초보적인 봉화 시스템을 적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여러 산성이나 소형 보루들은 잠시 사용이 중단되었다가 고려 시대조선 시대에 들어서 봉화대로 재활용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정부차원에서 폐성이된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산성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3] 봉화대를 지을 때 경제적 효율 및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기존의 삼국시대 성곽을 활용하였다. 일례로 최근에 발굴된 대가야고령 봉화산성이 있다.

3.2.2. 고려시대

봉화가 체계적으로 정비되는 것은 고려 의종 때부터이며, 이후로 갈수록 봉수제도가 더 복잡하게 정비된다.

3.2.3. 조선시대

이후 이대로 죽 내려오다가, 세종대왕대에 와서 더 체계적으로 정비된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67375441.1.edit.jpg
조선시대의 봉수 제도

이때부터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대인 한양 목멱산 경봉수, 해안/국경 변방에 설치된 연변봉수,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의 체계가 잡혔다. 이 외에 기간선로상의 핵심 봉수부대인 직선봉수(직봉), 이를 보조하는 간선봉수(간봉), 직위/지역별 봉수대의 관장 책임을 가진 직위와 봉수대에 배치되는 봉수군의 수 등이 결정되었다. 중간에 사고로 봉화 신호가 끊기는 걸 막기 위해 직봉의 우회, 백업 목적의 간봉까지 더해져 600곳이 넘는 봉수대가 운영되었다.

이러한 봉화대는 19세기 말까지 운용되다가 1885년에 전신망이 설치되면서 훨씬 운용이 간편한 전보로 점차적으로 대체되어 1894년 갑오개혁때 폐지되었다.
3.2.3.1. 체계
이때에는 현재 우리가 흔히 보는 봉수대의 모습으로, 주로 불과 연기의 수로 정보를 전달했다.
평온한 상태에서도 불을 피운다. 봉수대가 적에게 점령당하여 불을 피우지 못할 상황을 가정한 것. 만약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을 평온한 상태로 설정한다면, 불이 피어오르지 않을 때 진짜로 평온해서 불을 안 피우는지, 아니면 봉수대가 적에게 점령당해서 못 피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오늘도 이 봉수대는 무탈하다는 뜻으로 불 하나를 피우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항상 신호를 보내어 신호가 끊겼을 때 문제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공학에서는 피동 안전(Passive security)이라고 부른다. 적이 봉수대를 차지하고 봉화를 하나만 피우면 어쩌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제만 해도 봉화를 여러 개 피우던 봉수대가 다음 날 하나만 피우는 것을 보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3.2.3.2. 관리
봉수대의 간격은 변방 지역에는 10~15리 이하, 내륙지역은 상대적으로 멀어 한양에서 먼 곳은 20~30리, 한양과 가까운 곳은 40~50리 간격이었다. 하지만 종종 70리 간격도 있었다고 한다. 봉수대에 일이 생겨 다음 봉수대로 뛰어가야 할 봉수군들은 아주 죽어났다.

이렇게 봉수대를 관리하는 봉수군은 주로 봉수대 근처 지역부민이 선발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봉화 전달이 제대로 안 되면 다음 봉수대까지 몇십 리 길을 뛰어가는 등 험악한 사태가 종종 발생하고, 봉수대가 보통 전망이 좋은 산꼭대기 같은 곳에 있기 때문에 평소에도 지형이 험악하고 기후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장시간 감시활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봉수대가 불을 크게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장작[4]이나 불쏘시개, 불씨 등을 현지까지 잘 운반해서 적재한 다음 항시 잘 관리하고 유지해야 한다. 봉수군이 되면 생업 따위는 포기하고 이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봉수대의 불이 꺼지면 죽었다. 이렇게 일이 힘들고 어려워서 칠반천역 중 하나였다고 한다.[5]

부산진에서 한양 목멱산까지 봉수 신호가 전달되는데 최소 2시간, 최대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중간에 많은 봉수대를 거치는 바람에 전체적인 시간은 늘어났지만, 이 정도는 효율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역참을 이용할 경우 약 사나흘이 소요되었고,[6] 걸어서 갈 경우 보름이 걸렸다.[7]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가로등이 있는 현대 도시들과 달리 과거에는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정말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우므로[8] 더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봉화는 밤이라도 날만 맑으면 즉각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므로 상당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봉화가 너무 오래 걸려서 1592년 4월 13일에 부산에서 첫 봉화가 올랐음에도 나흘 뒤인 4월 17일 신시(15~17시)에나 조정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역참을 이용해 급보를 전달한 것과 시간 차이가 없으니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다.

4. 유사 개념

대항해시대에 아프리카 희망봉에서는 매일 정오마다 대포를 쏘아서 그 소리나 연기로 항해사들이 크로노미터의 시간을 맞추도록 했다. 메리 포핀스에 보면 은퇴한 해군 제독이 아침 8시 정각마다 대포를 쏴대서 거리에 있는 집들 세간살이가 엉망진창이 되는 묘사가 있는데, 여기에서 비롯한 것. 영국 해군은 희망봉 외에도 많은 지역에서 대포로 시간을 알렸다.

파일:semaphore2.jpg
1793년 프랑스의 클로드 샤프(Claude Chappe)는 불을 피워야 한다는 봉화의 단점을 개선한 세마포어 통신(semaphore telegraph) 시스템을 개발했다. 움직일 수 있는 목제 신호기가 설치된 등대를 10~15 km 거리마다 세우고 신호기의 움직임에 알파벳을 배당하여 통신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으로, 나폴레옹 1세가 이를 채택한 후 전신기가 보급되는 1840년대까지 서유럽 전역에 널리 보급되어 통신망으로 활용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워털루 전투 결과를 이 시스템으로 미리 알아서 주가 조작을 했다던지,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백작이 복수를 위해 이 시스템 신호수를 매수하여 거짓 정보를 주식시장에 흘리는 묘사가 나온다.

5.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보통 영화게임에서 등장한다.

5.1. 게임

시야와 관련된 건물로 주로 등장한다.

5.2. 소설/영화/드라마

6. 여담



[1] 이러한 봉수대들의 존재는 소위 전북가야 또는 장수가야라고 하는 전북지역에 존재하였던 가야를 상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만 장수가야, 전북가야 등 표현은 비교적 지역사적인 관점의 견해라고 보는 편이다. 더 크게는 대가야에 소속된 지역으로 보거나 별도의 ㅇㅇ가야라고 보기는 다소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이러한 소위 전북가야라는 개념의 근거로 가야의 봉수유적들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봉수 유적들이 가야와 관련된 유물이 비교적 잘 출토되지 않는 편이다. 또 조선시대의 봉수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고해서 그것이 가야의 것이라는 반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전북가야와 가야의 봉수"라는 연결고리는 학술적으로 약점이 많은 개념이다.[2] 낙동강을 이용해서 바다로 나가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가야의 전성기 시절인 5~6세기에는 신라가 낙동강 동쪽을 전부 장악해 낙동강이 신라와 가야의 국경선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가야가 마음놓고 낙동강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3] 혹여 있을 반란군의 거점으로 활용되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해당 성곽을 완전히 폐기시키거나 별도로 관리하였다.[4] 나무장작을 쓰지만 그 외에 야생동물의 배설물 등을 주워다 쓰기도 했다.[5] 물론 그래서 봉수군이 되면 전답을 나라로부터 하사받는다.[6] 몽골 제국역참을 이용할 경우 하루에 약 350 km를 이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평탄한 초원지대를 달렸기에 가능한 수치이고 한국의 경우 고개와 산길이 많아 이 정도 속도를 내지는 못했다.[7] 하루에 약 40 km를 이동할 수 있었다.[8] 현대 한국인은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밀도, 가로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공조명의 홍수 속에 살고 있기에, 밤이 얼마나 어두운지 평생 모르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땅이 넓은 외국의 경우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진짜 밤을 경험해 볼 수 있는데, 도로에 가로등이 없기도 하고 밤에 불을 켜는 건물도 많지 않아 그믐달까지 겹칠 경우 손을 뻗었을 때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진다. 육군 훈련과정에서 이 정도의 어둠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훈련시키기도 한다.[9] 파괴되거나 해체되면 미니맵이 안 보이게 된다.[10] 진짜로 봉화를 올린건 아니고 봉화가 있는 산의 중턱정도에 불을 질러 진짜로 봉화가 올라간것처럼 꾸몄다. 어찌됐든 들키는 순간 기군망상으로 사형감인건 마찬가지다. 왕에게 들어갈 보고를 주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만큼 위험한 행위라 송상 내부에서도 우려가 나오기도 했고 임상옥도 송상이 이런 리스크가 큰 행위를 벌일 것이라는 것을 예측못했다.[11] 실제로는 휴스트라넬과 페르다이할을 소환하는 용도이다. 두 용은 동극과 서극에 있기 때문에 둘이 반드시 만나야 하더라도 둘은 그 상황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제국의 봉화를 통해 둘이 만나야 하는 상황을 알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