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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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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짓말은 한국의 문화" 주장2. 박근혜 탄핵 여성혐오설3. 저자들의 비전공 분야에 대한 미숙함4. 일부 저자의 중립성 결여5. 확증편향적 통계 인용6. 이승만의 반일성향 문제 회피7.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 서술 부재8. 황현필 한국사 강사의 비판

1. "거짓말은 한국의 문화" 주장

이영훈은 구체적인 수치를 들이대며 대한민국은 거짓말의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며 "2014년에만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1400명"이며 "일본에 비해 172배"이며 "인구수를 감안한 1인당 위증죄는 일본의 430배"이며 "허위 사실에 기초한 고소, 곧 무고 건수는 500배", "1인당으로 치면 일본의 1,250배"이며 "보험사기가 만연해 있"고 "2014년 자동차 보험, 생명보험, 손해보험, 의료보험 등 보험사기의 총액은 4조 5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어느 경제신문은 미국의 100배"[1]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자료에 대한 확대해석, 왜곡된 반응이다.

우선 양국의 사법 문화와 행정 체계가 달라 범죄 통계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선 일본은 경찰이 일차적인 수사권을 가지고 있어, 선별작업을 거친 후 고소· 고발을 접수한다.[2] 게다가 일본 검찰은 무죄로 나올시 불이익이 상당해서 유죄가 확실하지 않으면 기소자체를 안한다.[3] 되던 안되던 일단 기소를 들이박고 보는 성향이 강한 한국 검찰과 다른 사법 문화를 가진셈.[4]

이에 대해서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에서 분석한 평가. ##

2. 박근혜 탄핵 여성혐오설

<반일종족주의>는 거짓말한국의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재차 박근혜 탄핵은 한국인의 여성혐오로 인해 만들어진 거짓말 때문에 일어난 사기극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한국 정치의 대표적인 피해자가 박근혜라고 주장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거짓말에 쓰러지고 말았"고 "세월호가 침몰하는 그 시간에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미용 수슬을 했느니, 마약을 했으니, 애인과 밀회를 즐겼으니 등등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 온 나라에 가득하였"고 "여성 대통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한국인의 집단 심성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며 "최순실 사태가 터졌을 때 전국은 그야말로 거짓말의 광란"였고, "그 거짓말의 행진"은 "지금"(2019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5]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거짓말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여성 대통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한국인의 집단 심성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이영훈 외,『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3쪽

다음은 이영훈이 주장하는 여성혐오 사례이다.
얼마 전 광화문에 나갔더니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색 천막이 아직도 쳐 있는 가운데 "왜 안 구했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벌써 몇년입니까. 5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진상은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왜 안 구했나"라니요. 아직도 그 시간에 여성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애인과 밀회를 하거나 마약을 즐겼다는 겁니까. 그런데 아무도 그 거짓말의 천막에 항의하지 않습니다.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3쪽

"청와대에서 애인과 밀회했다"는 내용은 세월호 사고 당시 일본 산케이신문 기자의 보도를 시작으로 떠돌았던 박근혜-정윤회 밀회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영훈의 주장은 사실관계과 맞지 않는 내용들이다.

대통령(박근혜) 탄핵(전원재판부 2016헌나1, 2017. 3. 10.) 현재결정례를 보면 알겠지만 이영훈의 주장과 맞지 않는다. 이영훈이 주장한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습성 때문에 탄핵된 게 아니다. 그리고 반박하는 명제가 세월호 7시간 검찰 발표#, #와 맞지 않는 비판인데 이영훈은 이에 대한 반박을 하지 않고 있다.

3. 저자들의 비전공 분야에 대한 미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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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이 말하는 '종족'이라는 개념은 학술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개념으로, 저자들은 이를 사실상 '부족(tribe)'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한국과 일본 두 집단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모집단'을 상정해야하나 이 책에선 그러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사회학적[6], 인류학적으로도 모두 잘못된 개념이다. #, # 이것은 저자들이 경제사 전공으로만 서술하여 벌어진 문제점이다.[7]

또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의 주제에 대해서도 상경계 출신의 경제사 전공자들이 비전공 분야를 무리하게 건드렸다는 관련 단체 및 역사학자들의 지적이 존재한다. # #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275화 피해자를 지우는 '반일종족주의'(feat.타마) 276화 '반일종족주의'-위안부 문제(feat.타마)

4. 일부 저자의 중립성 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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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역사를 이용한 정치 선동 도서라는 비판도 있다. 2부는 대놓고 북한에 대한 정부의 태도나 친북 종북인사 척결을 언급하는 등 정치적인 주장과 개인 견해가 다수 섞여있다.[8][9] 나중에는 정치적인 문제를 좌파와 한국인들의 "반일" 현상과 엮어 망국론을 이야기 하는 등 중립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다. 즉 역사와 정치의 인과관계 메커니즘이 매우 부실하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등 또한 이들이 주장하는 소위 "반일" 정책을 폈으나[10], 이 책은 이러한 보수진영 대통령의 행태를 비판하지 않으며[11], 오히려 일본 문화 개방등의 결단을 내리며 일본에 대해 가장 열린 태도를 보여준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등의 정책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12][13]

5. 확증편향적 통계 인용

첫부분부터 한국은 '거짓말의 나라'로, 한국인은 '거짓말하는 국민'으로 단정지으며 출발한다. 통계에 입각한 사료비판을 주장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통계적 거짓말을 다수 동원하는 한편, 거기에 민족주의와 한국인의 태도를 매도하기 위한 자극적인 표현이 많아 독자가 주화입마에 빠지기 좋다. 첫장부터 위증과 무고죄가 일본보다 500배 이상 많으며 인간에 대한 신뢰성이 반일 민족주의가 막 시작된 1980년[14][15]보다 낮아졌음을 근거로 한국은 특유의 거짓말 문화가 만연한 사회이며 거짓된 반일 또한 이것의 연장선임을 어필하며 시작한다.

"한국은 거짓말의 나라"라고 주장하며 인용한 위증, 무고죄 500배 운운 부분에는 출처가 나와있지는 않지만 2016년 일본 언론 기사 日언론 "거짓말 만연한 한국, 숨쉬는 것처럼 한다"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도 이건 악의적인 통계 장난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팩트체크] "한국인은 숨 쉬듯 거짓말"…정말 그럴까? 팩트 체크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영훈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데 참고한 한국의 사기, 무고, 위증죄 기소 수와 일본의 사기, 무고, 위증죄 기소 수의 숫자 자체는 사실이지만, 애초에 국가별로 범죄 통계의 집계 기준, 각 죄목이 정하는 범죄 행위의 범위와 구성 요건, 사법 기관 내부의 기소 기준 등등이 다르므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해당 주장 반박 문단에 기소 여부로 한일간 통계가 완전히 갈림을 상술했다.

이는 통계가 지니는 함정을 무시해 버린 채 편의대로 자료를 사용한 것으로 경제학 원로들이 쓴 글이라면서 서문부터 이런 통계 장난으로 시작하고 있으니 그 뒤부터 나오는 통계들도 진위가 의심된다고 지적받고 있다.

6. 이승만의 반일성향 문제 회피

과거 한국을 현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과거 일본을 현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처럼 불공정한 것이다. 일본을 예로 들면 과거 페리 제독이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본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못했다.[16] 정치적으로 일본은 수많은 분국으로 쪼개져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으나 한국은 중앙정부의 일원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다.

물질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일본은 이렇다 할 도로나 건물, 위생시설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일본이 변하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한 뒤부터였다. 한국도 만일 한국이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도록 허용했다면 한국은 일본이 이룩한 것을 당연히 이루어냈을 것이다.

이승만 뉴욕타임즈 사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 1919. 5. 18. 출처: 이승만학당[17], 이승만기념관
일인들이 저의 죄를 회개해서 우리와 평화롭게 살자하며 친일하는 한인의 남녀들을 시켜서 다 한국에 충성하는 백성이 되도록 힘쓰게만 한다면 아무리 아프고 쓰린 것도 차차 잊어버리고 양국이 평화로이 지내기를 도모하기로 하고, 이 뜻을 공포해서 일인들도 다 알만치 만들어준 것인데, 그동안 지낸 경과를 보면 일인들은 여전히 한국을 병탄할 목적을 변치 않고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적으로 모든 행동과 선전하는 것을 볼 때 한국을 무시하고 한인들을 모욕하는 것이 전만 못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중략)...

여섯째로는 모든 친일분자들을 일본에 모아다 보호해놓고 이 분자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국권 요란을 선동하기를 마치 이전 이조 말년에 들을 모아다놓고 남의 국모암살하며 침략하던 악습을 행하고 있으니 일인들의 야심을 우리가 더 말할 것 없이 보고 앉은 것이다.

...(중략)...

이런 야심가진 침략자들에게 뒷문을 열어놓고는 우리가 자유를 보존하지 못할 것이오, 나라를 잃어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기왕 사십년 경험으로 다 알고[18] 있으니, 공산당과 친일반역분자는 다 분간해서 후환을 막아야만 될 것이다.
1954년 5월 13일 이승만 담화, 동아일보, 1954. 5. 14. #
지금 우리나라의 걱정은 공산당보다 더 음험한 것이 일본의 야심이다. 그러므로 일인을 걱정하여야 하며 일인이 선전술이 있어서 미국인이 그것을 들어 주고 일본을 부강하게 하고 타국을 거기다 따라가게 하자는 것이 동양의 문제다. 그러므로 어려운 것이고 또 한인 중에도 친일(親日)하는 자가 있어 일본에 의뢰하는 생각을 가진 분자가 적지 않다. 그러니 그러한 자를 잘 분간하여야 한다.
1954년 10월 7일 이승만, 인하공전 개교식에서 #

위의 소개에 적힌 "친일은 악(惡)이고 반일은 선(善)이며 이웃 나라 중 일본만 악의 종족으로 감각하는 종족주의. 이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 형성, 확산, 맹위의 전 과정을 국민에게 고발하고 그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한 바른 역사서!"라는 반일 종족주의란 책의 주제의식에 근거한다면 사실 한국 대통령 중에서 제일 심각하게 비판받아야만 하는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사실 이승만은 반일을 넘어 거의 혐일 수준으로 일본을 싫어했기 때문이다.[19]

반일종족주의를 비판하는 진보 진영에서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 부분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도 반일종족주의와 더 나아가 뉴라이트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폄하하면서 정작 가장 강경한 반일 민족주의자인 이승만을 찬양하는 일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강경함과 폭력성의 수준을 따져봐도 이승만은 한국의 대통령 중에서 반일 발언 및 대응이 제일 심하였으며[23]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므로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 형성, 확산, 맹위의 전 과정"에 매우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 챕터 이상을 할애하여 이승만 대통령 집권시기 이루어졌던 행보를 심도있게 다루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자의 명확한 의견 표명을 확인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승만 찬양만 도배되어 있다.[24]

이에 대해서 이영훈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지나치게 경직된 반일정책을 폈다'며 이승만이 강력한 반일정책을 실행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변론하였는데 미국은 일본이 공산품을 한국에 수출하고, 한국은 농·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요구를 했으나, 이승만은 그렇게 되면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였다고 한다.[25][26] 또한 독립한지 얼마 안 된 신생국으로써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반일정책을 펴야 했다고 답했다. #[27]

하지만 이승만의 독립운동, 이후 행적들과 발언들을 보면 국가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반일 정책을 펴야 했다는 것은 이영훈 본인의 변명에 가까운 것이다. 일본 내막기등을 저술하고, 대통령 집권이후 대 일본 정책들을 보면 단순한 집권자로서의 정책이 아니라 이승만 개인 스스로도 상당힌 강경한 반일 성향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미국에서도 이승만에 대해 명확하게 반일 성향이라고 정리했으며[28] 독도 평화선에 대한 대책만봐도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강경한 반일 정책들 일색이다. 이정도의 강경한 반일 정책들을 펼친 정치인에 대해 반일 성향을 정당화 한다면 반일에 대한 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영훈이 이승만의 반일정책에 대해 인정한 것 자체가 그의 학문적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고[29] 실제로도 이것 때문에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면 선택적으로 채택해서 써먹고 아니면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침묵한다.[30] 그의 사상적 가치의 중심은 이승만 재평가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민 저변적인 '오독'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기준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기원이자 최고권력자였던 이승만에 의해 반일 정책이 주도적으로 이뤄졌고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는 아이러니는 자신이 추구하는 두 가지 중요 가치를 한번에 묶어서 헝클어놓는 내용이기 때문에 도저히 양립할 수가 없는 모순이다.

7.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 서술 부재

공동 저자 중 한 명인 정안기는 '1부 08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누구인가?'파트에서 자발적 지원자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들을 단순 친일파로 생각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31] 문제는 해당 파트의 서술 방식이다.

처음에는 지원병 모집을 강제 동원과 호구 지책에 의한 지원으로 설명한 기존 한국사의 서술 방식을 단순하고 왜곡된 것이라 비판한다. 이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한 배경을 설명 -> 일제가 높은 지원율에 '자기도취'되었다는 서술과 함께 누적 약 80만 명에 달하는 지원자가 적혀있는 표를 제시 -> 자발적 지원자들의 지원 동기 및 수차례 지원이나 혈서까지 쓰는 열정적 지원 사례 제시 -> 특별지원자들의 참전 경험과 이를 통한 변화 -> 해방 이후 이들이 국군의 장교가 되는 등 대한민국에 기여한 점 서술 -> 지원자들을 단순 친일파로 보는 것의 부당함 역설이라는 순서로 내용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엄연히 존재했던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은 전혀 서술되지 않는다. 자발적 지원자의 수가 결코 적었던 것은 아니고 최종적으로 선발된 17,000여명은 대부분 자발적 지원자들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조선지원병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누적 지원자가 80만 명에 달한다는 일제의 통계는 과장된 것이며, 모집 과정에서 일선 관청과 경찰의 할당량 및 실적 채우기를 위해 수많은 당시 청년들이 강제적으로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 아닌 지원'을 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32]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의하면 정안기가 본 책에서 제시한 표의 41년도 지원자 약 145,000여명 중 자발적 지원자는 약 5만 명이며 그보다 많은 8만 명에 달하는 지원자는 '관청 종용'에 의한 것이다. 이외에도 모집 과정에서 일선 관청과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당대'의 일제 기관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정안기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자발적 지원자'들에 대한 내용이니 굳이 비자발적 지원자들에 대해 서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해당 파트의 구성 방식을 다시 살펴보자.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이 이를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강제동원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고 자발적 지원자의 사례만을 언급한 해당 내용을 읽으면 '80만 명이나 되는 조선 청년들 대다수가 열정적으로 일본군이 되려 했으며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은 전혀 없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정안기가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당 서적에 대한 친일 및 일제 정당화 논란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강제성에 대한 서술 부재와 독자들의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8. 황현필 한국사 강사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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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영훈 외,『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0~11쪽[2] 이에 대해서 일본 현지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변호사가 직접 칼럼 기고를 통해 언급했다. ##[3] 이때문에 일본 사회에선 검찰 기소=유죄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어서 오히려 재판의 의미가 축소되고 있다. 엔자이라는 말도 안되는 일본의 사법문화는 이렇게 태동한 것이다. 다시 언급하자면 일본의 사법제도는 사실상 규문주의에 해당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4] 한국 검찰도 99% 이상의 유죄율이라서 기소=유죄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다만 무죄로 나올 시 불이익은 적다.[5]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3쪽[6] 웃기게도 이 책의 주장을 옹호하는 사회학자 류석춘은 이런 틀린 개념을 지적도 안한다.[7] 다만 이것이 저자들이 민족이나 종족의 개념을 몰라서가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 그 자체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다 보니 아예 한국의 민족주의는 민족주의라고 인정하지도 않아서 종족주의라고 폄하한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이영훈 본인은 반일종족주의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된다며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서양의 민족주의는 백인 우월주의에 따른 식민지 정당성 주장과 인종차별,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으로 이어져 결국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불러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게 만들었으며 현대까지 그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가 이보다 나쁘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8] 참고로 뉴라이트 인사들의 대부분은 과거 1970~80년대 활동했던 NL을 비롯한 좌파 운동권 출신(뉴라이트의 대부인 안병직은 마오쩌둥 이념에 심취했으며, 이영훈은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에 몰두하며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죽자 가장 먼저 그의 빈소로 달려간 이력이 있었다.)으로 방향만 친중 또는 친북에서 친일, 친미로 바뀐 것일 뿐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것의 논리구조는 거의 유사하다.[9] 애초에 이들이 진짜 과거에도 탈민족주의 좌파였는지는 의문인 게 이들이 찬양하던 마오쩌둥도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과거 주사파였는데 이들은 북한에 대해 같은 민족이라고 나름 친근하고 옹호하고 동조하던 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이 정말로 탈민족주의자라면 한국의 민족주의 못지 않게 일본의 민족주의와 혐한에 대해서도 반발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동조하는 현상까지 보이는 것을 보면 그저 숭배 대상을 바꾼 걸로밖에 보이지가 않는다.[10] 그들이 얘기하는 식으로 따지면 현대 한국 역사상 반일이 가장 강경했던 시대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이었고 제일 반일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대통령은 이승만이었으나 정작 이 책의 저자들은 이승만을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11] 다만 김영삼 정부는 비판을 하기는 한다. 쇠말뚝 관련과,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건으로 말이다.[12] 심지어 김대중 집권기의 일본 총리인 오부치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을 통해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 "통절(痛切)한 반성과 사죄", "대북 햇볕정책 지지"를 밝혔고, 그 덕분에 김대중 집권기 한일 관계는 역대 가장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한일 우호 분위기는 양국이 공동개최한 2002년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링크[13] 김대중 시기 한일관계가 얼마나 좋았냐면, 혐한 성향이 강한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조차 김대중 문서에 대놓고 "일본인으로부터의 한국에의 호감도를 대폭 상승시켰다" "한일관계를 김영삼이 파괴했지만 수습은 김대중이 했다"고 노골적으로 칭찬할 정도.[14] 그러나 정작 이승만 집권기인 1952년에 이미 독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영유권 다툼이 벌어졌던 평화선 사건이나, 이승만 집권기에 강경한 반일 성향이 한국 사회에 가득했던 일을 감안한다면 반일 민족주의가 1980년에 막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다분히 근거가 없으며, 이는 뉴라이트 관련 인사들이 존경하는 이승만에게 반일 성향의 책임을 지우지 않기 위한 교묘한 거짓말이다. 한 예로 1954년 3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과 축구 경기를 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대표팀을 가리켜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는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168쪽[15] 아울러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의 한일국교정상화회담에 반대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시위를 벌이자,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강제로 진압했을 만큼 반일감정이 강렬했던 6.3 항쟁의 사례에 비춰봐도 반일 민족주의가 1980년에 시작되었다는 <반일 종족주의>의 지문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16] 참고로 이영훈은 한국인들이 최악의 국가인 조선을 미화하며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한국 교과서나 드라마에서도 조선의 내부모순이나 실책, 문제점은 다 나타나 있다. 오히려 본인이 존경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을 현 한국인들보다도 미화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승만도 조선에 대한 비판 또한 여러 번 했다.[17] 이승만학당은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중 한 명인 이영훈이 세웠다. 이승만학당의 홈페이지에서는 지금도 친일타령을 그만하자는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설령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이 전적으로 맞다고 가정해도, 그 내용은 위에 언급된 이승만학당에서 언급된 이승만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18] 1960년대부터 반일 종족주의가 성숙하여, 1980년대에 폭발하였다는 책의 주장과 모순된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언급이 1954년에 있기 때문이다.[19] 이와 정반대로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일본과 사이가 돈독했던 대통령은 뉴라이트 측에서 빨갱이 취급하는 김대중이다.[20] 이승만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 축구 대표팀은 한국 땅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경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원래 서울과 도쿄 두 곳에서 열리기로 한 예선전은 어쩔 수 없이 도쿄에서 두 번 모두 치러져야 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168쪽[21] 그리하여 1954년 3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과 축구 경기를 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대표팀을 가리켜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는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168쪽[22] 당시 언론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단교 조치에 대해 그것은 일본을 제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제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236쪽[23] 당장 일본 극우들이 가장 싫어하는 한국 대통령이 이승만이다. 어느 정도냐면 한국이 '반일 세뇌교육'을 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승만의 학살 은폐를 들 정도.[24] 이영훈은 이승만 팬사이트 '이승만학당'의 주필이다.[25] 다만 그런 식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 시절에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 종속되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한 예로 박정희 집권기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의 회고록에서도 박정희 시절,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 종속되었다는 비판을 기술했다. 그런데 이승만 시절에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면 나쁘고, 박정희 시절에 종속되면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 출처: 혁명과 우상 김형욱 회고록 5권/ 김경재 저/ 인물과사상사/ 2009년 7월[26] 이런 식의 이승만이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여 반일 정책을 펼친 것이라고 변론하는 것은 또다른 어폐가 있다. 이영훈은 이승만의 사례와 달리 현재 한일 무역분쟁에 대해 맹목적인 반일에 의한 결과물로만 판단하고 있지만 한일 무역분쟁의 근본적인 문제점중 하나는 한국의 차세대 산업중 하나인 반도체, 메모리 산업에 대한 아주 치명적인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이고 이는 한국에게 있어 일본의 경제종속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고 이에 한국이 당연히 일본에게 반감을 품을 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원인도 일본이 제공했는데 지금까지 한일간에 이루어져오던 산업간의 국제분업을 일본 정치권에서 정치적 사안을 이유로 개입해서 인위적인 제재 정책으로 헝클어놓은 것이다.[27] 그러나 같은 독립운동가라도 신익희 등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힘쓴 사례들도 있기 때문에 전혀 핑계가 될 수가 없다.[28] 아예 미국내에서 일부 관료는 한일 관계 개선은 이승만이 현장에서 사라진 후라고 평할 정도였다.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29] 다만 이영훈 본인은 2004년 9월 5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구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라고 해명했다가(https://news.joins.com/article/385601), 15년 후인 2019년에는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가 없고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고 자발적인 자영업자였다며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했던 주장을 정반대로 뒤집었고, 이에 대해 MBC 스트레이트 기자가 해명을 요구하자, "당신은 15년 전과 같으냐?"라고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사한 일이 있다. 이영훈이 이승만의 반일정책에 대해 인정을 했다고 해도 나중에 가서 위안부 문제처럼 그건 사실 반일이 아니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을 바꾸거나 할 가능성도 있다.[30] 뉴라이트 전체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팔아가며 자신들의 편향된 일본 미화를 시도하는 강성 이승만 지지자들 때문에 도리어 대중들에게 이승만의 외교 노선과 성향이 상당히 왜곡된 상태로, 아예 이승만 본인이 친일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지경이 되었다.[31] 정안기가 미디어 워치에 기고한 글로 본 책의 내용과 유사하므로 참고할 것.[32] 일본 경찰들이 청년들의 집을 찾아와서 일본군에 자원하라고 마구 닦달을 했으며, 거부하면 구타 같은 폭력도 서슴치 않았다. 한 예로 1943년 2월 26일 일본 내무성은 "응모자는 진심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지원하였다."라고 인정하였다. 또한 말이 지원병일 뿐, 경찰서를 비롯한 각 행정기관과 어용단체, 홍보기관 등이 총동원되어 지원을 강요하고, 또 직장별·지역별 지원경쟁을 부추김으로써, 해당자들은 지원하지 않고 배겨낼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출처: https://cafe.daum.net/historywar/2LjP/1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