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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03:46:54

박성호(축구선수)

박성호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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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하나 시티즌 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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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파일:AT4U9387.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박성호
朴成鎬 | Park Sung-ho
출생 1982년 7월 27일 ([age(1982-07-27)]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90cm, 85kg
포지션 스트라이커
학력 만수중 - 부평고
프로 입단 2001년 안양 LG 치타스
소속 구단 안양 LG 치타스 (2001~2003)
경찰 축구단(2004~2005 / 군 복무)
부산 아이파크 (2006~2007)
대전 시티즌 (2008~2011)
→ {{{-1 베갈타 센다이 (2010 /
임대^^)}}}
포항 스틸러스 (2012~2013)
요코하마 FC (2014)
포항 스틸러스 (2015)
울산 현대 (2016)
성남 FC (2017)
가족 아내, 슬하 2남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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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신 스트라이커. 신장 190cm 네덜란드의 축구 스타 뤼트 판니스텔로이에서 따온 박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선수 시절 후반기에는 유난히 후반기 때 폼이 좋은 모습을 보여줘 가을 전어라는 별명 역시 갖고 있다.

2. 클럽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인천광역시 출신으로 만수중학교, 부평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2. 안양 LG 치타스

2001년 드래프트에서 안양의 고교 연고지 우선지명 선수로 입단하였지만 5년 동안 R리그만 전전하며 1군 7경기 출장에 그쳤다.

2.3. 경찰 축구단

2004년 경찰 축구단에 입대해 R리그에서 29경기 10득점 등 2군에서 가능성을 증명했다.

2.4. 부산 아이파크

전역 후 2006년 부산으로 전격 이적했고 이안 포터필드, 안드레 에글리 감독과 김판곤 감독 대행 체제에서 팀 내에 마땅한 타켓형 스트라이커 자원이 없어[1] 주전으로 자주 출장하였지만, 극악에 달하는 골결정력과 중앙에 붙어있질 못하고 사이드로 처지는 플레이 때문에 부산팬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여기에 볼경합시 팔꿈치로 상대 수비수를 가격하는 경우가 많아, 애써잡은 기회를 공격자 파울로 끊어먹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당시 국내축구 갤러리에서는 당시 박성호 선수와 비슷하게 키가 크지만 전체적인 플레이가 시망인 공격수 손정탁[2], 황연석을 한데 묶어, 타워팰리스, 트리플 타워, 손정탁 클럽 등의 조어를 만들어냈다. '박니'라는 별명도 본래 까려고 만들어진 별명이었다.[3]

결국 27경기 출장하여 1833분동안 2골 1도움이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세웠다.[4]

2007년 신임감독 앤디 에글리[5]가 부임하면서 뽀뽀와 소말리아를 내쳤고, 부산의 공격루트는 어떻게 하던 박성호를 거쳐가야만 했었다.

부산빠들이 절망에 빠진 사이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시즌 첫골을 터뜨렸다. 그 후 4월 7일에는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려 부산의 시즌 첫승을 안기더니, 5월 5일 어린이날 對 인천전에는 데뷔 7년만에 멀티골을 기록하였다.이 기세를 이어갔으면 좋겠지만, 박성호선수는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팀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결국 5골 2도움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가능성을 보여줬고 26살에 군필이라서 기대를 받기 시작하였다.

2.5. 대전 시티즌

2007시즌 종료 후 이여성, 송근수와 함께 트레이드로 대전으로 이적했다. 3대2 트레이드로, 트레이드 대상은 정성훈, 김창수.

장신임에도 발재간이 좋고 활동량이 탁월한 박성호는 김호 감독 아래서 만개한 기량을 뽐냈다. 2008, 2009시즌 각각 7골과 9골을 넣으며 대전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했다.

2010시즌 중반에는 J1리그 베갈타 센다이에 완전 이적 옵션이 포함된 6개월 임대를 다녀왔다. 물론 완전 이적은 성사되지 못했고 2011시즌 대전으로 돌아왔다.

2011시즌 승부조작 사건으로 뒤숭숭해 왕선재, 신진원, 유상철 등 여러 감독이 거쳐가는 대전의 공격을 홀로 이끌다시피하며 8골을 기록하는 등 전성기의 기량을 보여줬다.

2.6. 포항 스틸러스 1기

2011시즌을 앞두고 이슬기, 김동희와 1대2 트레이드로 포항의 유니폼을 입었다.

2012년 4월까지 포항 팬들의 평가는 바닥을 달리고 있었다. 일단 박성호의 움직임이 선수시절 황선홍 감독을 빼다박아서 '황선홍 감독이 박성호의 어느 점을 높이 사서' 영입했는지는 잘 알겠는데, 한가지 문제라면 끔찍한 골 결정력. 하물며 황선홍이야 약관의 나이에 한일전에서 골을 넣으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박성호는 벌써 나이 서른을 훌쩍 넘어 터질 포텐도 없다고 본다면(...)

또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의욕적으로 영입한 용병 돼지지쿠가 축구 센스는 빼어나지만 활동량이 심각하게 달려서 타겟 박성호와 전술적으로 엇박자를 내는 점 또한 골치거리다.

그런데 이러던 박성호가 8월 들어서 돌변했다.

25라운드 성남 홈경기에서 무려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3-1 완승을 이끌었다.모 성남팬은 박성호한테 골 먹으니 자살하고 싶더라라는 후문을 남겼다 그리고 전북전은 건너뛰고 3-4로 승리한 전남 원정 경기에서 마지막 네번째 득점을 기록했다.

이후 10월까지 7골 8도움을 기록, 놀랍게도 강팀인 전북.울산을 상대로도 득점을 기록하며 결국 포텐은 터졌다. 하지만 이미 정규시즌이 끝나가는 마당이라 포항팬들은 마냥 기뻐하기도 뭣한 미묘한 상태.

인터뷰에 따르면 황선홍 감독은(그리고 팬들도 당연하게) 포스트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전술을 주문했으나, 정작 선수 본인은 그런 플레이를 해 본 경험이 적어 팀 전술에 맞추는데 힘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플레이를 보면 큰 키에도 불구하고 슛팅력과 볼 트래핑이 나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을 살리는 플레이에는 익숙지 않았고 계속해서 측면으로 빠지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6] 본인이 그런 플레이를 못한다고 직접적으로 말을 한적이 없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조차도 측면으로 빠지지 말고 타겟 플레이 하라고 소리를 칠 정도였다. 사실 대전 시절엔 포스트 플레이를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미들진이 밀리는 바람에 내려가서 지원을 해야할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포항은 완전히 정반대로 미들진은 잘해주는데 마땅한 타겟이 없어서 속을 태우던 상황이니,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데 더욱 애를 먹었을 듯 하다.

2012년 10월 20일 FA컵 결승전에서 경남을 상대로 0:0 팽팽히 맞붙은 연장전 후반 14분, 신진호가 찬 프리킥을 백 헤딩으로 골을 기록하며 포항팬들에게 데꿀멍우승컵과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동시에 선사했다.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21020164405796.jpg

SBS 지상파로 중계된 이 경기를 지켜본 축구 팬들의 평가는 드라마를 썼다.

119분 혈투 끝에 터뜨린 결승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낱 미미한 선수로 끝나나 싶었다가 나이 서른줄에 갑자기 포텐을 터뜨리고, 여러 차례 부진한 모습을 보여 OME를 외치던 팬들에게 아챔 진출권이란 속죄 선물을 안기고, 부진할 때도 자신을 꿋꿋이 밀어준 감독에게 생애 첫 우승컵을 안기며 보은까지 했으니. 이때 받은 까방권이 워낙 강력해서 2013 시즌 들어 부진하는데도 까는 사람이 별로 없다.아니면 존재감이 없어졌거나

그리고 2013 시즌 후반...그 까방권이 다 사라질 즈음이 되자 다시 또 골사냥에 나서고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전어가을 남자. 2013 하반기 상위스플릿에서 전북전 멀티골과 인천, 수원전 2연속 극장골(...)로 베기옥 못지 않은 박벨바로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2013 FA컵 준결승전, 포항과 제주는 한골을 뺏기면 한골을 넣는 난타전을 벌였다. 전반 1분 제주 선제골, 전반 9분 포항 동점골, 후반 3분 포항 역전골, 후반 10분 제주 동점골(...) 피차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그리고 후반 15분 박성호가 재차 역전 결승골을 넣으면서 제주는 무너졌고 결국 4:2로 포항이 승리한다. 당연히 FA컵 결승전은 가을 FA 버프를 받은 박성호와 케빈의 대결로[7] 관심을 모았다. 또 한번 결승골의 전설을 쓰지는 못했지만 2년 연속 포항이 FA컵을 차지하면서 가을DNA를 확실히 인증했다. 하긴 9월 10월 단 2개월만에 그것도 중요한 고비마다 6골을 몰아쳤으니 언론이던 팬이던 관심을 가질 수밖에(...)

그리고 골을 못 넣어서 그렇지 사실 골을 제외한 팀플레이에서 나머지 역할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다. 일단 장신공격수라서 세트플레이에선 상대 수비가 어떻게든 박성호를 마크해야 하는데, 이렇게 박성호가 탱킹(...)하는 동안 고무열을 비롯한 2선 공격수들이 세컨볼을 따거나, 빈 공간으로 침투하여 공격을 풀어내기 때문. 더욱이 아무리 포항이 미드필더부터 세밀한 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간다 해도 그 날 경기상황에 따라서는 뻥축구를 구사해야 될 때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선 충분히 제 몫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2013 시즌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 울산과 경기에서는 교체명단에 들었다. 울산은 강력한 압박과 존디펜스로 포항의 패스 길목을 효율적으로 끊어먹으면서 포항은 경기가 말려들어갔고, 황선홍 감독은 후반 8분 박성호를 교체 투입한다. 이전까지 울산의 높은 수비벽에 막혔던 전진 패스가 박성호의 머리에 계속 걸리면서 그제서야 공격의 활로가 뚫리기 시작, 마땅히 투입할 공격수가 없어서 카운터를 포기하고 수비 숫자를 늘이는 우주방어 모드로 돌입한 울산 진영을 원사이드 게임이나 마찬가지로 공략한다. 추가시간까지 45분 가까운 시간을 끊임없이 문전을 두들기는 포항이나 이를 모조리 막아내는 울산이나 강팀의 클래스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 명장면. 사실 후반 포항의 포풍공격은 막아내는 상대가 막다 지쳐 유체이탈을 했다거나, 아무리 몰아붙여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울산 수비진의 통곡의 벽 앞에서 포항 공격진이 질려서 멘붕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었다.

그렇게 후반 95분 김재성이 문전으로 길게 띄운 프리킥이 양팀 선수들이 밀어넣고 걷어내는 혼전을 벌이는 와중에 김태수가 걷어올린 공이 박성호 발끝에 걸렸고, 몸을 날려가며 문전으로 밀어넣은 공을 김원일이 강하게 슈팅, 마침내 포항은 울산을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이 결승골은 공식 기록으로 박성호 도움이다. 이렇게 1982년생 박성호는 뒤늦은 나이에 만개하며 K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감격을 누렸다.

파일:external/upload.inven.co.kr/i1557487311.jpg
새하얗게 불태워 버렸어

기뻐하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마치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우승 메달을 받는 모습은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더욱이 이 날 우승컵을 들어올린 노장 3인방 박성호, 노병준[8], 김은중[9]의 경우 축구 인생에 굴곡도 많았고 우승과 인연없이 머잖아 은퇴를 앞두고 있던 선수들이라는 점에서 2013시즌 포항에서 들어올린 우승 트로피는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다.

2.7. 요코하마 FC

그러나 시즌 후 포항 스틸러스와 재계약하지 못했고 2014년 J2리그 요코하마 FC로 이적하였다. 계약기간은 1년이며 계약 조건에 대해서는 상호 합의 하에 밝히지 않았다. #

2.8. 포항 스틸러스 2기

그렇게 잊혀지나 했지만 2015년 1월 21일, 뜬금없이 포항 컴백이 확정됐다. 역시 전어 복귀 이후 풀타임을 뛸 체력이 안돼서 지속적으로 교체 투입되고 있다. 경기가 안풀릴 때마다 박성호만 계속 집어넣는다고 욕을 먹지만 그래도 포항에서 이정도로 꾸준한 장신 타켓형 공격수가 없는지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2015년 6월 24일 FA컵 16강 전에서 전북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또 한번 FA컵의 사나이임을 인증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포항은 8강에서 서울에게 패해 탈락했다.

그러나 이후 리그에서는 그냥 폭망. 26경기 출전 3득점이라는 처참한 스탯과 풀타임 소화가 안 되는 체력, 예전에는 골을 못 넣어도 탱킹과 공격 연계에 도움이라도 되었는데 이제는 단순한 헤딩도 제대로 못 따고 수비수들과 몸싸움에 밀리 정도로 완전히 폼이 죽어버렸다. 결국 후반기에는 황선홍 감독 마저 박성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정도로 전력 외의 선수가 되었고, 15시즌 이후 FA로 시장에 나왔으나 포항은 재계약을 포기했고, 1월 중순까지 데려가겠다는 팀이 나오지 않아 무직 상태였다.

2.9. 울산 현대

그러다가 3년 전 자신이 패배를 안겨준 울산 현대로 이적했는데 안 그래도 대표 장신 공격수들이었던 김신욱양동현의 이적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던 울산 팬덤의 반응은 대체 뭔 약을 했길래 김신욱 거르고 박성호를 데려온거냐?[10]일 정도로 썩 좋지 못한 편. 결국 실제로도 별 활약 없이 시즌 종료 후 계약을 해지했고 이후 한동안 근황이 알려지지 않아 은퇴설까지 나돌 정도였으나 2017년 2월 성남 FC에 입단하며 선수 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

2.10. 성남 FC

2017년 2월 성남 FC에 입단하였다.

2017년 5월7일 K리그 챌린지 대 수원FC 전에서 헤딩골로 득점을기록하였다.

시즌 후 팀을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3. 대회 기록

4. 여담

5. 관련 문서



[1] 공격진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 스피드의 이승현, 기술의 뽀뽀, 힘과 장신의 소말리아 삼각편대가 만들어져서 득점 루트에 박성호가 필요없었다.[2] 2005년 후반 수원 이적후 다른 의미로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주어 현재 K리그팬들에게 레전설취급을 받고 있다. 그 전에도 똑같았지만...[3] 당시 박성호 선수가 닮고 싶은 선수로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꼽았는데, 최고의 득점감각을 보여주던 니스텔로이와 비교하여 박성호를 까는 의미로 썼다![4] 611분마다 공격포인트를 하나씩 올린 격이다. 반대로 경기마다 파울개수는 1.8개에 달하여 최고의 센터백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사실 이름만 가려놓으면 딱 센터백 스탯이다.[5] 부산 팬들에겐 금지어에 가까운 존재이다. 별명이 사기꾼[6] 묘하게 전세훈 작가의 만화 슈팅에 등장하는 나동태와 비슷하다.[7] 이때 전북의 주포 이동국은 부상으로 장기 결장중이었다[8] 중계 화면에 하늘을 가리키며 '아버지!'를 부르는 장면이 잡혔다. 노병준의 부친은 2012년 여름 폐암으로 작고했다.[9] 대전 팬들이라면 김은중,최은성 두 선수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데, 박성호,김은중 두 대전 출신 선수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광경을 보며 어느 정도 위안을 받았을 듯. 그리고 그 다음 시즌 최은성도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은퇴했다.[10] 당시 김신욱 빈자리 박성호로 채운다라는 기사가 나와 '김빈박채'라는 별명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