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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에르제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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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7ACB4><colcolor=#000000> 바토리 에르제베트
Báthory Erzsébet
파일:바토리 에르제베트.jpg
이름 바토리 에르제베트
(Báthory Erzsébet)
출생 1560년 8월 7일
동헝가리 왕국 니르바토르[1]
사망 1614년 8월 21일(향년 54세)
헝가리 왕국 체이테[2]
배우자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 (1575년 결혼/1604년 사망)
자녀 언너, 오르쇼여, 커털린, 언드라시, 팔, 미클로시, 죄르지, 페테르
아버지 바토리 죄르지 6세
어머니 바토리 언너
형제 이슈트반 외

1. 개요2. 생애
2.1. 명문 귀족의 딸2.2. 차흐티체 성의 악녀
2.2.1. 대오스만 장기전(1591 ~ 1606)2.2.2. 남편의 죽음2.2.3. 피의 목욕
2.3. 재판
2.3.1. 사망
3. 사후 의혹
3.1. 누명을 썼다는 주장3.2. 그렇더라도 남아있는 살인마 의혹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4.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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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귀족이자 처녀들의 피로 목욕하여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려고 한 희대의 살인마로 유명하다. 후대에 길이길이 기억될 엽기적인 행각으로 인해 블라드 체페슈, 질 드 레 등과 함께 흡혈귀의 원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세간에는 영어식 표기인 엘리자베스 바토리로 잘 알려져 있는데 헝가리인동아시아처럼 성이 이름 앞에 위치하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 근거한 올바른 표기는 바토리 에르제베트(Báthory Erzsébet)이다.

2. 생애

2.1. 명문 귀족의 딸

바토리 백작부인, 또는 바토리 부인이라고 알려진 이 인물은 1560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3] 명문가인 바토리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시절에 바토리 가문은 에르데이 공작이자 나중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으로 선출된 바토리 이슈트반(Báthory István)[4]의 치세 아래 동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위세를 떨쳤다. 에르제베트의 어머니 바토리 언너(Báthory Anna)가 바토리 이슈트반의 누나라, 에르제베트는 바토리 이슈트반의 조카라는 높은 위치였다.

젊은 시절에는 점잖고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졌으며 궁중의 예법을 배워 현모양처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에르제베트는 에체드(Ecsed) 성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571년 11세에 5살 연상인 나더슈디 가문의 장남 나더슈디 페렌츠(Nádasdy Ferenc) 백작과 약혼했다. 그 후 시어머니가 될 오르쇼여(Orsolya)로부터 무인의 아내가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미리 배우기 위해 시댁인 샤르바르(Sárvár) 성으로 보내졌다. 오르쇼여는 매우 엄하고 잔소리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 에르제베트에게 잔소리를 끊임없이 했다고 한다.

1575년 약혼자였던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과 결혼했는데, 이때 식장에는 하객 4500명이 참석하는 등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런데 에르제베트는 남편보다 신분이 더 높았다. 나더슈디가 장군이나 재상이 되는 귀족임에 비해 에르제베트는 공녀급 신분[5]이었다. 그 덕분에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후 에르제베트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1585년부터 1598년까지 자녀 5명을 낳았다.

2.2. 차흐티체 성의 악녀

그러나 남편은 주로 전쟁터에서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으므로 결혼 생활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남편은 1578년 헝가리 왕국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는 등 막중한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고, 에르제베트는 거대한 차흐티체(Čachtice) 성[6]의 여주인으로 남아 성과 주변 마을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2.2.1. 대오스만 장기전(1591 ~ 1606)

1591년부터 1606년에 이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에르제베트가 머무는 영지는 오스만 제국 군대의 침략에 노출되었는데, 이 때에 과부, 전쟁포로의 부인 그리고 강간을 당한 피해자 여성들을 대표해 사절을 주고받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2.2. 남편의 죽음

그러던 중 남편 '나더슈디 페렌츠' 백작이 1604년 49세 나이로 전사하여, 에르제베트는 44세에 차흐티체 성의 유일한 주인이 된다. 성주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에게 사사건건 간섭해대던 눈엣가시 시어머니 오르쇼여를 바로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 뒤 나이를 먹으며 피부가 점점 노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성격이 신경질적으로 변해간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녀가 에르제베트의 머리를 빗기다 실수로 머리를 좀 심하게 잡아당기자 화가 나서 시녀의 뺨을 때린 것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한다. 반지 낀 손에 긁힌 시녀의 얼굴에 흐른 피가 에르제베트에게 튀었고 나중에 핏자국을 닦았는데 피가 묻었던 자리가 평소보다 좀 더 하얗게 보여서, 이후 처녀의 생피가 자신의 노화를 막고 젊음을 되찾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희생자는 머리를 잡아당겼던 그 시녀였다.

2.2.3. 피의 목욕

시녀를 살해한 에르제베트는 근처 농민들의 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고 속여 성으로 데려온 뒤 피를 짜내기에 이르렀다. 성으로 들어온 처녀를 발가벗기고 강제로 철새장에 가두어 천장에 매단 다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장치해 두었다. 처녀가 깨어나서 몸을 움직이면 새장이 흔들려 자연히 가시에 찔리게 된다. 통증을 못 이겨 몸을 더 심하게 움직이면 다른 가시에 더 찔리게 되다가 결국 기력이 빠져 죽게 만들었고, 에르제베트는 그 밑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목욕을 했다.

처음에는 샤워하고 남은 시체는 신부를 불러 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체가 점점 많아지고 죽은 사람의 숫자도 많아지다보니 신부도 의심스러워서 장례를 거부하는 등 장례의식마저도 여의찮아지자 아무 데나 버렸다고 한다. 에르제베트가 쓴 일기를 토대로 사망자를 추산하면 사망자는 총 612명이라고.

이런 짓을 하다 보니 주변 마을에서 처녀의 씨가 말랐고, 성으로 들어간 여자아이들이 하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두려워진 주민들이 딸을 성으로 보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마차를 내보내 강제로 여자아이들을 납치해 들였고, 그래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피를 얻을 수 없자 귀족의 딸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친다. 귀족적 소양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성 안에 귀족 여학교를 설립하고 한 번에 25명씩 입학생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평민들은 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벌레보다야 낫지만 아끼는 말보다는 못한 존재였기 때문에 에르제베트가 마음껏 죽여도 별다른 후환이 없었지만, 귀족의 딸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치자 화를 초래하였다.

2.3. 재판

결국 에르제베트의 손에 붙잡힌 희생자들 중 한 명이 극적으로 탈출한 뒤 즉각 외부에 신고하면서 그 마각이 드러났고, 그 뒤 군대가 투입되어 에르제베트 일행 전원이 검거되었다. 에르제베트의 성을 수색하던 귀족 지휘관과 군인들은 그 참혹하고 잔인한 행각에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마을의 여자들이 에르제베트의 성에 가기만 하면 사라진다는 신고를 받고 죄르지 투르조라는 조사관이 에르제베트의 성에 가서 연쇄 살인의 단서를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연쇄살인범으로 기소되어 1611년 재판을 받았지만 본인은 귀족이라 출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범행에 적극 가담한 에르제베트의 집사 및 하녀들은 전원 사형에 처해진 반면,[7] 그 시대 법률로는 귀족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일종의 무기 금고형에 처해졌는데, 능히 사형의 대안이 될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식사를 넣어 주는 구멍 외에는 모든 것이 밀폐되고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탑 꼭대기의 독방에 갇혀 서서히,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형벌이었다.

2.3.1. 사망

그 안에서 지내다가 결국 감금된 지 4년만인 1614년 54세로 사망했다고 한다. 무덤은 자신이 살았던 성 부근의 교회에 있었으나, 그녀를 공동 묘지에 묻은 것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소란으로 인해 고향으로 이장되었다. 무덤의 현재 위치와 교회에 있을 당시 위치는 모두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녀의 악행이 어느 정도였는지 에르제베트가 체포된 이후 근 100년간 사람들은 바토리의 이름을 입에 담지도 않았고 그녀를 불러야 할 때면 '헝가리인 창녀(The Hungarian Whore)'라고 불렀다고 한다. #

3. 사후 의혹

3.1. 누명을 썼다는 주장

최근에는 에르제베트는 살인마가 아니었고 그녀의 정적들이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에르제베트를 마녀라고 모함을 했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고 있다. 더구나 종교개혁 이후로 바토리 가문은 대대로 칼뱅교를 믿었기 때문에 종교분쟁의 희생양 아니냐는 설도 있다.(참고) 실제로 종교 개혁 이전 이탈리아 반도의 발도파 공동체 여자들도 마녀라는 누명을 쓴 적이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살인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16세기 초부터 과부, 상속녀, 노파,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귀부인 등을 습격-모함하여 마녀로 몰아 죽인 일들이 매우 빈번했던 시기였기에 이 주장을 묵살할 수는 없다. 2008년작 영화 바토리가 이 주장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에르제베트를 마녀로 고발한 사람은 루터교회 목사였고, 조사관을 맡았던 루터파 제후는 이후 헝가리 궁정백에 올랐다고 한다.[8]

영지는 에르제베트의 자녀들이 물려받았다. 반역이 아닌 단순 연쇄살인이기 때문에 당사자만 처벌하고 끝이라는 것. 이 가문은 남자 계통은 2013년까지 이어졌다가 끊어졌고 수많은 여계 자손들이 아직도 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부분은 2015년 2월 1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기사 영상 1985년에 헝가리의 역사학자 너지 라슬로는 에르제베트가 연쇄살인마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첫째, 재판 기록에는 보통 구체적 죄명과 범행 내용이 정확히 명시되는데, 에르제베트의 재판 문서에는 오직 마녀이기 때문에 종신 구금형을 선고했다고만 기록되었다.

둘째, 당시 조사관들은 에르제베트가 일기장에 살해 명단을 적었다고 밝혔지만 이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에르제베트의 시녀들은 범죄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재판 전 화형당했다. 이는 모두 에르제베트의 결백을 증명할 증인을 없애려는 수작이라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에르제베트 사망 당시 헝가리 국왕 마티아스가 에르제베트에게 전쟁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분노하며 재산을 몰수하고자 없는 죄를 꾸며 뒤집어씌웠다고 주장했다.

만약 실제 재판내용과 라즐로가 주장한 재판 내용이 일치하면 희생양설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612명이나 죽었다면 그 규모가 전무후무한데, 재판 기록에 없다면 둘 중 하나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서 후대에서 안 믿겠다고 생각해서 은폐했거나 아예 진실이 아니거나.

3.2. 그렇더라도 남아있는 살인마 의혹

바토리 가문과 나더슈디 가문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헝가리의 귀족과 지배층으로 남았고, 헝가리의 상류층들에는 상당수 에르제베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그것을 감안하여 이런 주장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에르제베트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서 개신교는 싹 틔우지 못하고 말살되었다고 한다. 헝가리에서는 천주교인 수가 개신교인 수의 5배가 넘으며 특히 에르제베트의 악행이 주로 행해졌다는 슬로바키아에서는 개신교를 믿으면 나환자 취급을 받았다. 현재 슬로바키아의 개신교 인구가 9%라고 나오지만 20세기 이전에는 개신교도들은 천주교인들과 거의 교류할 일 없이 자기들끼리 따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나머지는 다 천주교이거나 공산통치 시절에 생겨난 무종교인들이다. 아직도 거기서는 개신교도라고 하면 왕따를 당한다.

일단 과학적으로 보면 당시의 기술로 욕조를 피로 채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피로 목욕을 하는 것 역시 의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행위다. 구시대적인 도구들로는 성인 1명의 신체에서 갖은 수단을 동원해 피를 완전히 짜내도 5리터 정도에 불과한데 욕조의 용적은 대개 300리터 정도이므로 욕조에 피를 채워 목욕을 하려면 한 번에 60명 정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피는 특별한 처치[9]를 하지 않으면 금방 굳어버리는데다 피비린내는 상상을 초월하며 대부분의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구역질을 유발한다. 당장 익히지 않은 돼지고기와 소고기의 냄새만 맡아 봐도 역겨운데 이것도 피냄새 때문에 그런 것이다.[10]

그러나 피 몇 방울로도 충분히 물 전체를 붉게 만들 수 있으므로 물에 희석한 상태에서 목욕을 하는 경우는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피로 목욕을 할 경우 죽은 이의 피에서 발생한 질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기에 매우 위험한 행위다.

바토리가 돈 많은 여자, 과부, 종교 갈등 때문에 왕과 귀족들의 희생양이고 억울한 피해자라는 의혹은 꾸준히 있어왔다.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라 재판 기록도 꽁꽁 숨겨 아예 무존재로 만들려 했던 것 같지만 역으로 그녀의 악명을 높이고 온갖 의혹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정말로 무고한 희생자라고 보기 애매한 점도 있다. 바토리가 결백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여러 정황에서도 확인되는데 일단 가족들은 바토리를 위해 탄원을 제출했지만 그녀의 목숨만 붙여달라고 했을 뿐 범행을 부인하지 않았다.

마티아스 국왕과 튀르조 등이 바토리의 재산을 노려서 누명을 씌웠다고 보기에도 의문스러운 게 바토리는 범행이 들통나 붇잡혔을 때 물주였던 남편 나더슈디 페렌츠를 잃어 돈에 쪼들렸고 그 많은 재산의 공식 주인도 아니었다. 남편의 사후 그 재산은 자녀들, 특히 아들의 소유였고 재산 목적으로 누명을 씌우려면 바토리의 자녀들을 노리거나 아예 나더슈디 일가 전체를 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바토리의 자식들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고 법적으로 튀르조 백작은 바토리를 어떻게 잡아도 그녀의 재산에서 이득을 취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바토리의 자녀들도 어머니의 범행을 부인하거나 누명 혹은 무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자녀들은 바토리를 두고 '감옥에 넣든 어쩌든 제발 법정에 나오지만 않게 해주면 우리도 그 조사를 계속하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너무 공개적인 처벌은 어머니한테나 우리한테나 모두 개망신이다' 같은 답을 했다고 한다. 이는 자식들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무엇을 하는지' 목격했으며 살인 행각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또한 '피를 손으로 퍼낼 수 있을 만큼 흥건한 바닥'이라는 증언을 비롯해 바토리가 하인들과 농민들 상대로 잔혹한 짓을 즐겼다는 것은 일관된 증언이기도 하다. 고문은 항상 바토리의 성 내에서 행해져 직접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없어도 야밤에 뭔가를 자주 파묻는 광경을 본 사람은 넘쳐났고, 이러한 고문 행각으로 바토리가 너무 줄초상을 내서 수많은 시신의 장례 처리를 맡게 된 사제가 화가 나서 더는 못해먹겠다는 욕 아닌 욕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직접적으로 막지 못하면서 더 자신감이 생기고 결국 부주의와 느슨한 처리로 꼬리가 잡혔다는 것 역시 연쇄살인범들이 흔히 보이는 패턴이다. 다만 수많은 증언이 쏟아지면서 실제 범행 정도가 과장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실제 법정에서 동조자들이 말한 희생자 수는 수십 명에 불과하다가 조사 중 추정 희생자가 100~200명 안팎, 점점 커지며 왕이 듣기로는 300명, 희생자 수를 적은 일기에는 650명이란 이야기도 있다. 따라서 숫자와 살해방법, 피목욕 등은 과장일 확률이 농후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11]

눈여겨 볼 것은 바토리가 어릴 때 어떤 발작을 일으켰다는 기록이다. 이것이 유전적인 영향이었는지 병이었는지는 몰라도, 서너 살경 극히 심하게 앓고 나서 그 후유증으로 이상 행동을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진실이야 어찌됐든 워낙 인류사에 찾아보기 힘든 자극적인 일화의 주인공이다 보니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4.2. 기타



[1] 현재 헝가리 북동부 루마니아 국경 도시로, 오랫동안 바토리 가문의 영지였던 곳이다. 현재도 바토리 가문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2]슬로바키아 차흐티체.[3] 우연의 일치겠지만, 블라드 3세와 그를 모티브로 한 드라큘라 백작의 고향이기도 하다. 뭐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오늘날의 헝가리 영토에서 태어난 헝가리인,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헝가리인의 친척뻘인 세케이인, 그리고 블라드 3세는 몸만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난 라틴계의 왈라키아인(루마니아인)이라는 세세한 차이점이 있긴 하다.[4] 폴란드어로는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 리투아니아어로는 스테포나스 바토라스(Steponas Batoras).[5]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나 에르데이 공국이나 다 선거군주제였기 때문에 세습지위는 아니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일개 지방귀족과는 비교를 불허한다.[6] 현재는 슬로바키아 트렌친주 소속이며 폐허만 남아 있다.[7] 다만 범행의 주동자는 아니라는 이유로 일반적인 사형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 일반적인 사형이란 게 참수형 아니면 교수형 후에 이뤄지는 화형이기는 하지만.[8] 칼뱅교와 루터교는 성만찬이나 성상에 대한 관점 등 여러 가지가 달랐기 때문에 생각보다 매우 적대적이었다. 아예 루터교가 칼뱅교의 성상 파괴 운동을 이슬람 놈들 같다고 디스했을 정도.[9] 피브린 제거, 헤파린이나 히루딘 첨가 등등.[10] 당연히 정육점에서 파는 일반적인 생고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고기들은 피와 잡내를 제거하는 공정을 거치고 나온 고기들이다.[11] 이 시기 현재 헝가리 지역 전체 인구가 110만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영지 한 곳에서 수백명 행방불명은 말이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마을이라고 할 만한 공동체 인구 자체가 세 자릿수를 넘는 경우 자체가 드문 마당에 저 정도로 사람을 집어삼키는 성이 있다면 그건 대공성이고 나발이고 그냥 마경이나 악마의 소굴 취급이다.[12] 이름은 카르밀라를 모티브로 했다.[13] 원래는 '여백작'이 맞겠으나, 한글에는 백작에 해당하는 여성 작위명이 없다는 점 때문인지 디아블로 2 레저렉션 공식 번역은 그냥 백작이 되었다.[14] 일시적이라고는 하지만 젊어지는 것 때문인지 사용자의 수명을 늘려주는 효과가 있고 실제로 사요는 17세기의 사람이지만 이 검주의 효과로 작중 배경인 19세기 중반까지 2백년을 넘게 살았다.[15] 노화를 두려워한 귀부인을 보다못한 대장장이가 그녀를 위해 바친 검주로 사용자의 수명을 늘리는게 목적이기 때문인지 종래의 검주와는 매우 다른 검주가 탄생하게 되었다.[16] 대신 바토리의 무자가 맨몸으로 검주 대적할수 있는게 전제 조건이지만 사요가 등장인물 중 손에 꼽는 강자인지라 아무 문제가 없었다.[17] 메이저 1집 BLUE BLOOD앨범 수록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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