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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어(헝가리)

마리어 1세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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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앙주 왕조 3대 국왕
마리어
Mária
파일:Maria_I_Litho_2.jpg
출생 1371년
헝가리 왕국 비셰그라드
사망 1395년 5월 17일 (향년 23~24세)
헝가리 왕국 부더
재위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1382년 9월 10일 ~ 1385년 12월(1차 재위)
1386년 2월 24일 ~ 1395년 5월 17일(2차 재위)
배우자 지기스문트
(1385년 결혼)
아버지 러요시 1세
어머니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타
형제자매 커털린, 야드비가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앙주 왕조 3대 여왕. 훗날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으로 즉위하는 합스부르크 가문마리아 테레지아와 구별하기 위해 '마리어 1세'라고 칭해지기도 한다.[1]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었던 카로이 2세에게 밀려났다가 모후 엘리자베타가 카로이 2세를 암살한 덕분에 복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로이 2세의 아들 라슬로(라디슬라오)의 추종자들에게 모후와 함께 사로잡혀 고초를 겪다가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후 지기스문트와 결혼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했고, 1395년 5월 17일 만삭인 상태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2. 생애

1371년경 헝가리 왕국 비셰그라드에서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와 보스니아의 반(Ban)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의 딸이자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조카인 쿠야비아의 마리아의 딸인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타[2] 사이에서 태어났다. 누이로 커털린, 야드비가가 있었다. 유년 시절 너지바러드의 주교인 데멘디 라슬로(Déméndi László)와 퀴퀼뢰(Küküllő) 대주교인 야노시의 교육을 받았다. 1373년 6월 1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만난 러요시 1세는 카를 4세의 아들 지기스문트와 딸 마리어를 약혼시키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의 약혼식은 1379년에 거행되었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승인을 받았다.

러요시 1세는 아들을 끝내 얻지 못했기에 자기가 죽으면 딸이 왕위에 오르기를 희망했다. 1374년, 그는 폴란드 귀족들을 모아놓고 딸이 폴란드 왕위를 상속하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1378년 장녀 커털린이 죽자, 1379년 다시 폴란드 귀족들을 모아놓고 마리어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공인받았다. 1382년, 건강이 악화된 러요시 1세는 고위 성직자들과 영주들을 조욤(Zólyom, 현재 슬로바키아 즈볼렌)에 소집한 뒤 딸 마리어와 마리어의 약혼자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그 후 러요시 1세는 1382년 9월 10일 너지솜버트에서 사망했고,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마리어는 1382년 9월 17일 에스테르곰의 대주교 데메테르에 의해 성 이슈트반 왕관을 씌워지고 헝가리의 새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모후 엘리자베타가 당시 11살이었던 그녀를 대신해 행정부를 관리했다. 엘리자베타는 결정을 내릴 때 궁정백을 맡고 있던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여왕의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며 이슈트반 5세의 딸 마리어의 외증손인 카를로 3세가 헝가리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카를로 3세는 1380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러요시 1세에게 자신을 지원하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기에 마리어의 등극에 섣불리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한편, 폴란드 귀족들은 1382년 11월 25일 라돔스코에서 열린 회의에서 러요시 1세의 딸을 왕으로 모시는 것에 다시 한 번 동의를 표했지만 여왕과 그녀의 남편이 폴란드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여기에 그니에즈노(Gniezno) 대주교 보잔타(Bodzanta)와 날레치 가문은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분가 출신인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베타는 마리어가 헝가리를 떠나 폴란드로 갔다가는 헝가리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에, 작은딸 야드비가를 폴란드의 여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1384년 10월 16일, 야드비가는 크라쿠프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1383년 봄, 브라나(Vrana)의 지도자 팔리스나의 야노시는 마리어와 엘리자베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크로아티아의 반(Ban)인 라코비치 이슈트반이 곧바로 진압군을 이끌고 브라나를 포위했고, 야노시는 보스니아로 도주했다. 브라나 수비대는 11월 4일 항복했다. 이후 엘리자베타는 딸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 샤를 6세의 동생이며 지난날 마리어의 언니 커털린과 약혼한 적이 있는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마리어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러요시 1세가 생전에 정한 대로 지기스문트와 여왕을 결혼시켜야 한다고 여겼던 헝가리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고위 성직자들은 프랑스인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이단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 왕자와 자국 여왕의 결혼에 반대했다. 헝가리에 체류하고 있던 지기스문트는 엘리자베타에게 자신이 마리어의 약혼자임을 상기시키며 결혼을 진행하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자 1385년 초에 헝가리를 떠났다.

1385년 5월 프랑스 대표단이 헝가리를 방문한 후, 마리어는 프랑스 왕자 루이와 약혼했다. 또한 엘리자베타는 루이 왕자와 마리어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슈트반 미클로시를 반역자로 몰아붙이며 해임했으며, 주민들에게 결혼을 반대하는 인사 및 그들의 친척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이에 팔 호르바티(Pál Horváti) 주교를 비롯한 반 엘리자베타 세력은 1385년 8월 카를로 3세에게 헝가리로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지기스문트는 사촌인 모라비아의 요프스트(Jobst)와 프로코프(Prokop)와 함께 헝가리 북부로 쳐들어가서 포조니를 점령하며 헝가리 정부를 압박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청에 따라 달마티아의 센(Senj)에 상륙한 뒤 자그레브로 진군했다. 이에 당황한 엘리자베타는 지기스문트를 부더로 초청한 뒤 그해 10월 마리어와 지기스문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공동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실권도 얻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지기스문트는 부더를 떠나버렸고, 카를로 3세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더로 행진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카를로에게 귀순하자, 엘리자베타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1385년 12월 초 딸 마리어와 함께 그를 마중한 뒤 함께 부더에 들어갔다.

이후 마리어는 카를로가 자신을 죽일 것을 우려해 12월 중순에 퇴위했고, 카를로는 처음에는 총독이라는 칭호를 칭했지만 의회에서 왕으로 등극해줄 것을 요청하자 1385년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카로이 2세'로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관이자 역사가인 로렌초 데 모나시스(Lorenzo de Monacis)에 따르면, 카로이 2세의 즉위식이 거행되던 날에 마리어는 어머니와 함께 러요시 1세의 석관을 붙들고 통곡했다고 한다.

카로이 2세는 마리어와 엘리자베타를 감금하지 않고 두 사람이 부더의 왕궁에서 살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어떻게든 딸이 왕위를 되찾아야 한다고 여기고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와 함께 카로이 2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왕이 마시는 음료수를 담은 컵을 가지고 다니는 시종 포르가치 벌라주(Forgách Balázs)에게 왕을 죽여주면 기메스(Gimes, 현재 슬로바키아 옐레넥)를 주겠다고 설득했다. 벌라주는 이에 눈이 돌아가서 엘리자베타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1386년 2월 7일, 카로이 2세는 엘리자베타의 요청에 따라 부더 궁정을 방문했다. 이후 엘리자베타와 카로이 2세가 대화를 나누던 중, 벌라주가 둔기로 왕의 머리를 가격해 중상을 입혔다. 카로이는 비셰그라드로 실려간 뒤 2월 24일에 사망했다. 마리어는 곧바로 복위했고, 엘리자베타는 전국에 "마리어 여왕께서 신성한 왕관을 되찾았다"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얼마 후, 팔 호르바티를 비롯한 반 엘리자베타 세력이 카로이 2세의 아들 라슬로[3]를 새 왕으로 받들겠다고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386년 4월, 지기스문트와 그의 이복형이자 독일왕 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엘리자베타와 마리어는 두 사람과 만나서 협상한 끝에 그해 5월 초 마리어가 지기스문트의 아내임을 공인하고 지기스문트는 바그 강 서쪽의 땅을 접수한 뒤 모라비아의 요프스트와 프로코프에게 넘기기로 했다. 지기스문트가 협상 결과에 만족하여 보헤미아로 돌아간 뒤, 엘리자베타는 라슬로를 지지하는 헝가리 남부 지역을 찾아가서 딸을 여왕으로 받들어달라고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1386년 7월 15일, 엘리자베타, 마리어 모녀는 가라이 미클로시와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자코보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르자니에 이르렀을 때, 호바트 야노시와 그의 가신들이 습격했다. 마리어 모녀의 수행원들과 가라이 미클로시는 항전했지만 모조리 제압되었다. 이후 포르가치 벌라주와 가라이 미클로시는 참수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여왕의 마차에 던져졌다. 마리어 모녀는 자그레브 주교령의 곰네크(Gomnec) 요새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아드리아 해 연안의 노비그라드(Novigrad) 성으로 끌려갔다. 이후 반란자들은 라코비치 이슈트반을 라슬로 왕의 궁정백으로 선출하고 지기스문트를 섭정으로 삼기로 했다. 지기스문트는 이 소식을 접한 뒤 군대를 끌어모아 1387년 1월에 슬라보니아를 침공했지만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얼마 후, 호바트 야노시는 엘리자베타를 끌어낸 뒤 마리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다.

이렇듯 헝가리가 혼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 폴란드군이 쳐들어와서 루테니아 왕국을 공략했다. 지기스문트는 1387년 3월 31일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을 칭했고, 그의 지지자 중 한 사람인 크르크의 이반은 조반니 바르바리고(Giovanni Barbarigo)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의 도움으로 노비그라드 성을 포위했다. 1387년 6월 4일, 그들은 노비그라드 성을 함락시키고 마리어를 해방시켰다. 마리어는 바르바리고에게 감사를 표하고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600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7월 4일 자그레브에서 지기스문트와 합류한 그녀는 공동 통치자로 남았지만 정치에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다만 1394년 7월에 생포한 호바트 야노시를 살려주려는 남편을 설득해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에 처하게 했다.

1395년 5월 17일, 지기스문트의 아이를 임신중이던 마리어는 부더 숲에서 사냥을 즐기던 중 말이 발을 헛디딛는 바람에 낙마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아기를 유산한 뒤 곧 숨을 거두었고, 유해는 너지바러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폴란드 여왕이자 그녀의 여동생인 야드비가는 자신이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지기스문트를 단독 군주로 받들었다.


[1] '마리아'와 '마리어'는 같은 이름을 각각 다른 언어(독일어, 헝가리어)로 읽은 것이다.[2] 보스니아어 발음은 '엘리자베타', 헝가리어 발음은 '에르제베트'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3] 헝가리어 발음은 '라슬로', 이탈리아어 발음은 '라디슬라오'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