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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 ||
라틴어 | Marcomanni | |
게르만어 | Markōmanniz | |
한국어 | 마르코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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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게르만어군 엘베 게르만인의 한 지파. 서기 2세기 로마 제국을 상대로 마르코만니 전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부족이다.
2. 기원
마르코만니(Marcomanni)는 게르만어 조어 'markō(경계)'와 'manniz(사람)'의 합성어인 'Markōmanniz(경계에 사는 자)'를 라틴어로 번역한 용어다. 그들은 갈리아 전쟁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서 싸웠던 수에비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를 따랐던 종족들 중 하나로 처음 소개되었다. 타키투스와 스트라본에 따르면, 마르코만니는 본래 수에비인이었으며, 엘베강에서 라인강변으로 이주한 큰 게르만 부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대 역사가 플로루스에 따르면, 대 드루수스가 기원전 9년 게르마니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라인 강변에 살던 텐크테리족과 샤티족을 격파한 뒤 마르코만니족을 물리친 후 그들의 전리품을 쌓아올렸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마르코만니인들은 초기에는 라인강에 가까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타키투스, 스트라본,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마르코만니인들은 보이족이 점령했던 넓은 지역, 특히 수에비족의 동맹자였던 콰디족이 살았던 바이오하에뭄(Baiohaemum)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헤르키니아 숲 안에 있다고 기술되었는데, 현대 보헤미아일 가능성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이로 볼 때, 처음에는 수에비 연합의 일부였던 그들은 서기 1세기 무렵에 켈트족 계통이었던 보이족을 무너뜨리고[1] 강대한 부족으로 부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역사
초기에는 엘베 강 유역에 살면서 수에비 연방의 일원이었던 그들은 라인강변에 살던 부족들이 게르마니아 전쟁으로 약화된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여 보헤미아 일대와 블타바 강, 베룬카 강, 그리고 다뉴브 강 사이에 이르는 광활한 영역을 지배했다. 마르코만니 족장 마로보두스는 보병 7만, 기병 4천에 달하는 군대를 로마군 수준으로 훈련시켰다. 하지만 과거 로마에 인질로 보내져서 고급 교육을 받고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각종 영예를 하사받고 돌아온 전적이 있던 그는 로마와 가급적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로마는 그가 지나치게 강력해졌다고 여기고 제압하고자 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을 받들어 마로보두스를 공격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군을 조성했다.이때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총독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보내기 위해 속주민들을 징발해 대규모 보조병 부대를 창설하여 라인강 전선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데시타이트인 바토와 브레우키인 바토를 지도자로 내세워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켰다. 아우구스투스는 급히 티베리우스에게 일리리아를 평정하라고 지시했고, 티베리우스는 마르보두스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8개 군단을 이끌고 일리리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로마령 게르마니아에 남겨진 제17군단, 제18군단, 그리고 제19군단의 3개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체루스키 족장 아르미니우스의 매복 공격으로 섬멸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 지휘관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의 머리를 마로보두스에게 보내 자신과 힘을 합쳐 로마에 대항하게 했다.
이후 마로보두스는 아르미니우스와 함께 로마군에 맞섰으나, 나중에 게르마니아의 패권을 놓고 체루스키족과 맞붙었다. 17년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 결과 마르코만니인들이 참패했고, 18년 카투알다의 정변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뒤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여 라벤나에서 여생을 보냈다. 카투알다 역시 몇년 후 비빌리우스가 이끄는 헤르문두스족에게 패배한 뒤 로마 제국에 망명하여 포룸 율리이(오늘닐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바르주 프레쥐스)에 거주했다. 뒤를 이어 마르코만니 족장이 된 바니우스는 대표적인 친로마파 족장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50년까지 통치하면서 비빌리우스가 이끄는 헤르문두스, 루기, 수에비 연합과 맞섰다. 바니우스 사후 조카 반니우스와 시돈이 계승했지만, 나중에 반니우스가 권좌에서 밀려나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타키투스는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 사이의 내전 중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를 서술하면서 수에비 족장 시도를 언급하는데, 마르코만니 족장 시돈과 동일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친로마적 행보를 이어가던 마르코만니는 도미티아누스 치세 때 로마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들은 콰디족과 함께 다키아 전쟁을 치르는 로마군을 위해 보조병을 보내라는 황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이는 로마 제국이 다키아를 석권할 경우 그 다음은 자기들 차례라는 위기의식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도미티아누스는 89년 마르코만니를 응징하고자 원정을 단행했으나, 도중에 사르마티아의 이아지게스족이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발칸 반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자 중단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일단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마르코만니와 콰디족을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로마의 속셈을 꿰뚫은 두 부족은 92년 이아지게스족과 동맹을 맺은 뒤 국경을 넘어 로마 제국의 영내로 쳐들어가 제21 라팍스 군단을 섬멸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선에 나가 이아지게스족을 격퇴했지만,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과의 전쟁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97년 상 게르마니아 총독 트라야누스가 두 종족을 격파하여 국경 너머로 밀어내면서 상황이 비로소 안정될 수 있었다. 그 후 136~137년 하드리아누스 치하의 로마군과 마르코만니인들간의 소규모 충돌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2세기 중반, 마르코만니는 스칸디나비아에서 흑해로 이주했던 고트족, 게피드족이 중앙 유럽으로 또다시 이주하면서 심각한 압력에 직면했다. 이에 그들은 콰디족 등 주변 부족들과 함께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거절했다. 자칫 섣불리 개입했다가 인력과 재정 손실을 입을 수도 있고, 로마의 지원을 받아 먼 게르만족을 흡수한 가까운 게르만족이 로마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마르코만니인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영토를 얻어야겠다고 여겼다. 그들의 시선은 라인강과 도나우 강 너머의 풍요로운 땅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땅은 최강대국인 로마 제국이 온전히 차지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침공했다간 부족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입맛을 다시며 로마 제국이 약해질 때를 노렸다.
그러던 162년, 동방의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던 아르메니아에 쳐들어가 단숨에 공략하고, 시리아에 주둔한 로마군을 궤멸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로마는 166년까지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러야 했고, 라인강과 도나우 강변에 주둔하던 정예병을 차출했다. 자연히 두 전선의 방어력은 약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군단은 안토니누스 역병을 함께 가지고 와버렸고, 이로 인해 로마 각지에 전염병이 창궐해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이에 170년 마르코만니 왕 발로마르가 콰디족, 이아지게스족, 랑고바르드족, 부리족, 반달족, 록솔라니족, 바스타르네족 등 여러 부족과 함께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갈리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 북부로 쳐들어가면서 마르코만니 전쟁이 발발했다.
수년에 걸쳐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전쟁을 치른 끝에, 로마 제국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지도하에 라이티아, 노리쿰, 판노니아 지역에서 마르코만니를 포함한 게르만인들을 몰아냈다. 결국 174년 마르코만니, 콰디, 그리고 그들의 동맹 부족들은 로마에 보조병을 바치고 복종하겠다고 맹세하며 평화 협약을 맺었다. 사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마르코만니족을 완전히 정복한 뒤 마르코만니아 속주를 새로 세울 생각을 품었지만, 시리아 총독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동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그 후 조용히 지내던 마르코만니는 177년 동맹 부족들과 함께 다시 로마의 영내를 침략하여 수비대를 격파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마르쿠스 황제는 178년 여름 재차 원정을 떠났다.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의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트렌친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179년과 180년 사이에 라우가링시오(현재 트렌친 근처)에서 콰디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콰디족은 대게르마니아로 도주한 뒤 재기를 노렸지만, 집정관 푸블리우스 타루티우스 파테르누스의 로마군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마르쿠스는 이 시점에서 마르코만니아, 사르마티아 속주를 신설할 계획을 실현하려 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키아, 모이시아, 라이티아, 판노니아, 달마티아, 갈리아 속주에 정복한 게르만인들과 포로들을 이주시켜 로마 주민으로 정착시키는 사업을 벌였다.
그러던 180년 3월 17일, 콰디족의 저항 세력을 분쇄하던 마르쿠스는 전염병에 걸려 자신이 성치한 병영기지 빈도보나(오늘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붕어했다. 후임 황제 콤모두스는 폼페이아누스 등 고위급 장군들의 간곡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마르코만니 및 콰디족과 "로마군에 보조군을 지급하고 곡물, 무기를 바치며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로마의 보호를 받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은 뒤 180년 초가을 로마로 돌아가 10월 22일 개선식을 거행했다. 186~187년 마르코만니와 로마간의 소규모 무력 충돌이 벌어졌지만, 로마군이 신속하게 진압하면서 잠잠해졌다.
254년, 마르코만니 족장 아탈루스는 콰디, 사르마티아 및 여러 게르만 부족과 함께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판노니아로 쳐들어갔다가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저지되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다른 게르만 족이 잇달아 침략하고, 특히 알레만니족이 전선을 돌파하여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그들과 전력을 다해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258년, 그는 아탈루스와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판도나우강 상류의 판노니아 일부를 마크로만니족에게 양도하는 대신, 마르코만니족은 로마 제국을 더 이상 침략하지 않고 다른 게르만 족을 대신 막아낸다는 것이었다.
갈리에누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코만니 족이 조약을 준수하겠다는 걸 약속하기 위해 인질로 보낸 아탈루스 왕의 공주 피파와 결혼했다. 당시 그에겐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황후가 있었고, 로마인들이 게르만족 공주가 로마 황후가 되는 걸 받아들일 리 만무한데도, 그는 기어이 결혼식을 강행했다. 이에 대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두 사람이 "서로 진정한 사랑을 나눈 연인"이었다고 기술했으며, 당대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이를 "수치스러운 사랑"이라고 혹평하며, 갈리에누스가 타락한 증거가 바로 이것이라고 비난했다. 로마 역사가들이 갈리에누스와 피파의 사랑을 비난한 건 야만족으로 여기던 마르코만니 족 공주를 부인으로 둔 것이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겠지만, 특히 다른 게르만 족을 막아주는 대가로 제국 영토의 일부를 양도한 걸 수치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수십년 후,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마르코만니인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세 때 심각한 군사적 패배를 당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를 위해 다른 게르만족과 맞붙었다가 참패했는지, 아니면 로마로 쳐들어갔다가 패배한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4세기 말의 마르코만니 여왕 프리티길은 동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겠다는 뜻을 품고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암브로시우스는 기독교 교리를 서신에 담아 전달했고, 프리티길의 남편에게 로마 교회와 동맹을 맺고 백성들을 로마에 복종시키도록 설득하라고 권고했다. 그녀는 암브로시우스의 조언에 따라 397년 로마 영역인 판노니아에 있는 빈 분지에 마르코만니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집단촌을 형성하게 했고, 로마군 내에 마르코만니족으로 구성된 보조군 부대가 결성되었다. 그녀는 밀라노로 가서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으려 했으나, 그녀가 도착했을 때 암브로시우스는 이미 사망했다.
이후 마르코만니인들은 기록상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5세기 역사가 제롬은 제국을 침략하는 민족들 중 '판노니아인'을 별도로 언급하는데, 이들이 프리티길과 함께 로마로 이주한 마르코만니족의 후예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북부에 자리잡았던 수에비 왕국을 세운 군대의 일부가 마르코만니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 이때 마르코만니족이 보이족을 상대로 평화적인 연합을 시도했는지 혹은 잔인한 학살을 시도했는지에 대해 연구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나,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결과 후자 쪽의 가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간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