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10 07:58:12

리처드 1세의 제 3차 십자군 원정 나무위키 서술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1. 아크레 정복, 1191년
1.1. 포로 학살, 1191년
1.1.1. 카이사레아 전투1.1.2. 아르수프 전투1.1.3. 팔락 알딘의 대상단 약탈1.1.4. 교착 상태1.1.5. 예루살렘? 이집트?1.1.6. 야파 전투
1.1.6.1. 주의점
1.1.7. 문서 오류1.1.8. 평화 협정

[clearfix]

1. 아크레 정복, 1191년

1191년 6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아크레를 포위하고 리처드의 함대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키프로스에서 황제 참칭자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붙잡고 군을 정비한 후 아크레로 향하던 리처드 1세는 도중에 갤리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왕은 피터 데 바레스라라는 선원을 불러 저 배의 정체를 알아오라 일렀고, 잠시 후 자신들이 프랑스 왕의 배라고 밝혀왔다.

유유히 지나던 그 배는 리처드가 탄 함선 옆을 지나다가 갑자기 활과 다트를 쏴대며 공격해왔다. 리처드는 즉시 반격을 지시했고 곧 양측이 바다 위에서 활을 주고받는 교전을 펼쳤다. 그러던 중 왕이 대뜸 휴식을 취하겠다며 양손의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버렸다. 지휘관들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리처드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제군은 이 배를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고이 보내주겠다는 건가! 부끄러운 줄 알라! 그토록 많은 승리를 거두고 이제 와서 게으름뱅이가 되어 겁쟁이처럼 무너지겠다는 건가! 적이 한 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휴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대 제군은 똑똑히 들어라! 이 적들을 도망치게 한다면 모두 교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Itinerary of King Richard)》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치열하게 싸웠다. 프랑크군이 갤리선에 도선, 갤리선에 탄 병력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아군의 피해도 막심해지자 그제서야 리처드 1세는 직접 일어나 칼을 들고 충각 전술을 지시했다. 결국 이 전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의 첫 번째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후 아크레에 도착하자마자 토착 열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다. 한동안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결국 7월 14일 십자군이 치열한 접전 끝에 아크레 성을 점령하는 것을 지켜본 후 병이 나았다.

여담으로 공성전에서 열병[1]으로 쓰러져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누워있던 침대채로 전선에 이동하여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 쇠뇌를 발사해서 성 위의 적병을 죽여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1.1. 포로 학살, 1191년

한편 아크레를 점령함으로써 리처드는 무슬림 병사 2700명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 포로의 처우에 대해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다. 원래는 성십자가와 포로의 몸값, 그리스도교 포로 1500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기한은 한 달로 정했다.

그런데 살라딘은 몸값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기한이 지나도록 저 협의를 지키지 못 했다.[2] 대신 살라딘은 일단 포로들의 몸값의 일부분만 지불하고 차액은 나중에 지불하겠다며 재협상을 했는데, 리처드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준다는 확약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중요한 기독교 포로들의 명단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살라딘이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다시 재협상에 들어가자 그가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결국 1191년 8월 20일에 포로들을 학살했다.

이 학살은 아크레에서 몇 km 떨어진 언덕에서 일부러 살라딘의 군대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모든 참상을 지켜보던 이슬람 군대는 이곳으로 돌격해왔으나 십자군은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3]

하틴 전투가 끝난 이후 포로로 잡힌 성전기사단구호기사단의 기사 230명이 살라딘의 명령으로 학살당했다.[4][5]

1.1.1. 카이사레아 전투

8월 22일부터 25일까지 리처드는 온갖 고생 끝에 부대를 아크레 외곽에 집결시켰고 곧 행군이 시작되었다. 리처드는 병사들을 위해 행군 속도를 낮췄다가 사흘째가 되어서야 18km로 높였다. 왼쪽에서는 사라센 군대가 그들과 나란히 남하하고 있었다. 살라딘은 걸핏하면 경무장을 한 궁수 부대를 보내어 십자군을 괴롭혔다. 그로 인한 압박감을 덜기 위해 리처드는 보병들을 교대로 위험한 왼쪽과 안전한 오른쪽으로 배치했다.

한동안 사라센군은 육박전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화살을 소나기처럼 쏘아대는 것에 만족했다. 화살은 너무 먼 거리에서 날아와 위력은 없었지만, 십자군의 갑옷과 흉갑에 빽빽이 꽂혀 병사들을 마치 고슴도치처럼 보이게 했다. 살라딘의 서기관 바하 알 딘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프랑크족 보병들은 몸에 한 대에서 열 대까지 화살이 꽂혀 있는데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대열을 이탈하지 않고 행군했다. [중략] 이들의 놀라운 인내심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안락을 요구하지도,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은 채 지독한 피로를 이겨내고 있었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

한낮의 기온은 무려 40도까지 치솟아 무기를 들고 사슬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길에는 가시덤불과 잡풀이 무성하고, 독사와 독거미도 요주의 대상이었다. 군사들은 열기로 여러 번 정신을 잃었다. 운이 좋으면 배로 옮겨져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면 쓰러진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야 했다. 다들 참을 수 없는 온갖 불쾌감을 호소했다. 말과 인간의 배설물이 뒤섞여 풍기는 악취는 도저히 형언할 길이 없었고, 밤마다 끊이지 않는 소음은 참기 힘들었다. 부상을 입은 자들과 뱀에 물린 자들의 신음뿐만이 아니라 독거미와 해충을 물리치기 위해 흔들어대는 수천 개의 냄비, 솥, 방패, 투구 소리 때문이었다. 후위를 맡은 군인들의 처지가 가장 심각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은 앞의 주력 부대가 뭉개고 지나간 푸석푸석한 모래와 진흙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는 새벽에 출발하여 정오까지만 행군하고, 하루 행군하면 다음 날은 쉬게 하는 식으로 부하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다.

1191년 8월 30일, 리처드가 이끄는 프랑크군과 살라딘의 정찰대가 맞붙었다. 살라딘이 곳곳에 매복시켜놓은 병력들이 끈질기게 포위해 공격했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썰면서 길을 뚫었다. 그런데 카이사레아 근처에서 당시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살라딘의 투르크군의 매복에 당했다.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과 그의 프랑스군의 진군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그리고 그들의 느림보 행군 때문에 끔찍한 재앙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중략) 군대가 좁은 길목에 다다랐고 그 길목을 따라 군수품 마차가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길의 비좁음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을 눈치챈 투르크군은 대번에 짐마차를 덮쳐 부주의한 병사와 군마들을 쓰러뜨리고 짐의 대부분을 약탈한 다음, 저항하는 병사들이 있으면 사정없이 죽여가며 물가로 내몰았다. 양측은 그렇게 목숨까지 던지며 씩씩하게 싸웠다. 이런 와중에 한 투르크군 병사가 에버라드라고 하는 사람-솔즈베리 주교의 부하 중 한 사람의 팔을 베자,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을 부여잡고는 투르크군과 격투를 벌여 그 모든 적군으로부터 용감하게 자신을 방어했다.

그것을 본 리처드는 당장 구조에 나섰다. 그러고는 벼락 같은 고함을 치며 투르크군에게로 달려들어 좌우에서 그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투르크군은 우물쭈물할 틈도 없이 옛날 필리스티아 사람들[6]마카베오[7]의 얼굴을 보고 사방천지로 도망친 것처럼 리처드 왕의 얼굴을 보자 혼비백산, 머리 없는 투르크군의 시체 몇 구를 우리 손에 남겨놓고 산꼭대기까지 줄행랑쳤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리처드가 증오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기사 기욤 드 바흐는 이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리처드는 그와의 화해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전날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카이사리아까지 남은 5km를 행군하자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1.1.2. 아르수프 전투

카이사레아 전투 직후인 9월 5일,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조약을 맺자고 사신을 보낸다. 하지만 조약 내용이 살라딘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살라딘이 이끄는 사라센군의 전면 철수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랑크족에게 반환"이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양측은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고 장소는 인근의 아르수프 근처의 숲이었다. 제안을 한 리처드도 살라딘이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아주 가까이에서 십자군 기사들을 쏘지 않는 한, 화살은 십자군 기사의 두꺼운 갑주를 관통할 수 없었기에 살라딘은 그들의 말을 쏘는 쪽을 택했다. 이런 전술에 맞서 리처드는 우선 2만 명의 십자군을 동원하여 그중 12개의 기병대를 뽑았고 보병을 5개로 재편성시켰다. 경기병(輕騎兵)이 살라딘의 기마 궁수들을 저지하게 하고, 제 2 방어선에는 방패를 든 보병 부대를 재편성하여 밀집 대형으로 배치한 뒤 적들이 말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물론 방패벽 뒤에는 말들이 대열을 갖춘 채 돌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전위와 후위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보병들은 밀집 대형으로 해변가를 따라 움직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통제하기 쉬운 성전기사단구호기사단을 십자군 사이 중간중간 배치하며 갑작스런 기습에 의한 붕괴를 막으려 했다.

이 선택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술이었다. 그리고 전술이 성공하려면 아주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타이밍 포착 능력과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허를 찌르는 능력도 필요했다. 한 명의 전사가 탁월한 작전 능력과 우수한 병참 능력까지 모두 갖추기는 힘들다. 그러나 리처드는 이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오후 3시에 3만여 명의 투르크군이 달려들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살라딘의 기병들은 원거리에서 화살을 쏘거나 투창다트를 던지는 식으로 지속적인 공격을 가했으나 리처드 1세의 십자군은 꿈쩍하지 않는데, 일부 병사는 10발이 넘는 화살을 맞았음에도 진형에서 탈출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리처드는 오로지 밀집 대형만 유지한 채 전진하도록 했고 이후 전투 양상은 공격하는 투르크군과 수비하며 조금씩 전진하는 프랑크군의 전투로 전개되었다.

십자군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살라딘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 십자군의 기병 부대는 다른 부대와의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말을 뒷걸음질 시키면서 싸웠다. 그 때문에 구호기사단은 엄청난 위기 상황을 맞았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단장은 부하들을 내버려둔 채 말을 달려 리처드를 찾았다. "왕이시여, 우리는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소. 반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명예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거요." 리처드는 다시 이 청을 거절했다. "참으시오. 아무도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소."

목격자에 의하면, 극한의 열기와 눈을 어지럽히는 아지랑이 사이로 부상자의 비명소리, 귀를 찢을 듯한 북소리와 징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지독한 혼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구호기사단은 여려 차례 전령을 보냈지만 리처드는 계속 조금만 더 버티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구호기사단이 거의 붕괴되어갈 때쯤, 기사단의 단장과 불드윈 커루라는 기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 조지(제오르지오)를 위하여!"를 외치며 달려나갔다.[8]

그러자 그 뒤를 다른 기사들이 따라 나갔는데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리처드는 기병대 전체에게 돌격을 지시했다. 리처드는 사라센군이 공세종말점에 이를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순간적인 전황의 변화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지원이 없었다면 섣부른 돌격을 한 구호기사단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을 것이다. 이를 본 살라딘의 기록관, 바하 앗 딘(Baha ad-Din ibn Shaddad)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들 기사들이 보병 부대 중간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들이 창을 부여잡고 마치 한 사람이 소리치는 것처럼 전쟁 구호를 복창하자 보병 부대가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 사이를 뚫듯이 질주해나와 단번에 사방으로 돌진해가며, 일부는 우익으로 일부는 좌익으로 또 일부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군을 초토화시켰다. 나는 중앙군이 공격 받는 것을 보고서 좌익으로 대피하려 했으나 그쪽은 이미 중앙보다 먼저 무너진 뒤였고, 심지어 우익의 상황은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The Rare and Excellent History of Saladin)[9]

리처드의 지휘 아래 십자군은 좌, 중, 우 3갈래로 완벽하게 나뉘며 살라딘 진형을 향하여 돌격해갔다. 또한 이 타이밍에 리처드는 일부 지원 병력을 구호기사단으로 보내고, 본인은 가장 앞서 칼을 뽑고 나아가 살라딘의 병력을 썰기 시작하고 가까이에 있던 앙주와 푸아투 기마병이 그를 지원했다.

대다수의 사라센 기마 궁수들은 목표물을 좀 더 정확하게 겨냥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 바닥에 엎드려 있느라 돌격하는 기사들에 말발굽에 짓밟히고, 그 뒤를 따라온 십자군 보병들의 손에 종말을 맞았다. 이렇게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살라딘이 고대한 승리가 패배로 변해버린 것이다. 공황에 빠진 사라센 병사들은 우왕좌왕하기만 했고 죽지 않으려고 나무에 기어 올라간 자도 있었다.

리처드는 이때 본격적인 무쌍난무를 펼쳤는데 그의 활약은 기록으로만 보아도 인간이 아닌 느낌을 들게 만든다.
아군이 혼란에 빠진 것을 알자 리처드 왕은 말에 박차를 가해 속도 한 번 늦추지 않고 날듯이 구호 기사단까지 도착해 원조 부대로 데리고 간 부하들을 그곳에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투르크군을 밀치고 나아가 담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서 적들은 양옆으로 픽픽 쓰러져갔다. 그렇게 그는 홀로 맹렬하게 투르크군을 밀어붙이며 적을 쓰러트렸고 그의 칼 끝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쪽을 공격하든 그는 자신을 위한 공간을 널찍이 확보한 가운데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가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듯 적병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며 가증스런 종족을 분쇄해나가자, 자기 동료들의 죽어가는 모습에 놀란 적병들은 전보다 더 넓은 공간을 그에게 만들어주었다.

(중략)

위풍당당한 키프로스 말 위에 앉아있던 리처드 왕은 자신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가 투르크 군을 만나는 족족 요절을 냈다. 적군들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면 투구들도 함께 쨍그랑거렸고, 한 번씩 내려칠 때마다 그의 칼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이날 그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투르크 군은 곧 불가항력적인 그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군에게 무조건 길을 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사납고 비범한 왕은 사방에서 아랍인의 머리를 베었다. 아무도 그의 칼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돌아서서 칼을 휘두를 때마다 널따란 길이 났다. 그는 연신 검을 휘두르면서 아랍인들을 베어 나갔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낫을 든 농부가 곡식을 베는 것과 같았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이후 3번의 전투가 더 치러졌고 살라딘이 적극적으로 지휘하면서 군을 이끌었으나 전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십자군이 700여 명의 병력 피해를 입은 반면 투르크군은 최대 7000여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편력기에는 참패 이후 살라딘이 총공세를 한 번 더 펼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리처드는 단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적들을 향해 달려가 적을 그들의 본거지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프랑크군이) 막사 준비에 전념이 없던 틈을 타 투르크 대군이 우리 군의 후위를 덮쳐왔다. 왕은 격투 소리를 듣고 병사들에게 전투 명령을 내리며 그대로 말에 올라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하느님성모께서 우리를 보우하사"를 큰 소리로 외치며 투르크 군에게도 돌진해 갔다. 그는 이 구호를 두세 번 연달아 외쳤고 나머지 병사들도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급히 그의 뒤를 따라 적에게로 돌진해 사라센 군을 그들의 본거지인 아르수프 숲까지 밀어붙였다. 그후 왕은 막사로 돌아왔고, 격렬한 전투에 지친 병사들은 밤새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병사들과 그곳에 가보니 32명의 아미르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여기에서 리처드 1세의 전투 기록 중 일기토가 드문 이유를 알 수 있다. 아미르는 유럽으로 따지면 영주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리처드 1세는 일기토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을 영주들마저 그냥 학살하고 지나간 것이다. 이쯤 되면 일기토를 신청한 사람의 용감함을 칭찬할 게 아니라 어리석음을 비웃어야 할 판. 팔레스티나는 살라딘의 영향권이었으므로 7000명의 일반 병사 피해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32명의 아미르가 더 큰 타격이었다. 이 당시 아미르들은 봉건 영주로서 자신의 병력의 지휘관을 겸했기에 지휘 체계에 큰 타격이 있고, 후계 구도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영주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귀환하겠다고 하는 병력이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설령 술탄이라 해도 무시하기 힘든 요구이다.

적이 후퇴하자 리처드는 더 이상의 반격이 없도록 세 차례 더 돌격을 지시했다. 그는 여전히 냉철했다. 전투가 벌어진 평원 끝에는 숲이 있었는데, 기병대에게 적을 쫓아 그곳까지 들어가지는 말 것을 지시했다. 그는 사라센이 거짓으로 후퇴하는 작전을 즐겨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승을 거둔 환희의 순간에도 냉철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패배로 심하게 낙담한 살라딘은 한동안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의 부관 중 한 사람은 "리처드는 무적"이라 말했고, 사라센들은 그를 "멜렉 리처드(Melek RIchard)"라 부르게 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하루를 쉰 십자군은 9월 9일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다음 날 정오쯤에는 야파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크레에서 이곳까지의 행군은 대단한 위업이었다. 이 야생마 같은 다국적 부대가 처음으로 한 사람의 지휘자 밑에서 하나로 모여 움직인 것이다. 리처드는 부대를 다독여 하나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중세 군대에서 보기 드문 중앙 통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리처드는 곧 아스칼론으로 남하했다. 이스라엘 판관 삼손이 팔리스티아 사람 서른 명을 때려 죽인 곳으로 당대에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이 앙주 제국의 지배자는 병사들 사이에서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아스칼론의 성채 복구에 나섰다.

1.1.3. 팔락 알딘의 대상단 약탈

살라딘은 전쟁의 풍향을 바꾸기 위해 이집트에서 사파딘의 이복동생인 팔락 알딘이 최근에 모집해온 제 2군이 풍부한 교역품을 가지고 지원토록 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대규모 상단이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신속하게 공격 준비를 했다.

1192년 6월 21일 밤 리처드는 500명의 기사와 1000명의 최정예 보병을 거느리고 출발했다. 살라딘도 대상단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파견했다. 23일 리처드의 부대가 알하시에 접근하고 있을 때, 팔락 알딘은 예루살렘까지 최단 코스로 가기로 하고 23킬로미터 떨어진 텔알쿠위알리피아에 진지를 세웠다. 대상단이 공격권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 리처드는 도저히 이 행운을 믿을 수 없어서 처음에는 함정이 아닌지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대상단이 잠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해가 뜨기 직전, 짐을 실은 낙타를 끌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려던 사라센인들은 질풍 같은 공격을 당했다. 이슬람의 호송대와 지원군은 인원이 워낙 많아 세 무리로 나누어 숙영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십자군의 공격이 더 쉬웠다. 하나의 부대는 포위되어 학살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혼란 속에서 사막으로 달아났다.

다시 한번 리처드는 격전의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며 적들을 베어 넘겼다. 학살된 사라센의 숫자는 엄청났다. 기습당한 사라센인들은 제대로 싸움도 해보지 못 하고 공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라센의 시체는 약 1300구 가량이었지만 실제 사망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사막을 기어가다가 죽은 부상자가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포로는 500명 가량이었다. 리처드는 4700마리의 낙타, 수천 마리의 당나귀와 노새를 비롯하여 거기 실려 있던 금은, 무기, 의약품, 향료, 의복, 텐트, 로프 등을 모조리 가로챘다.

살라딘의 천막에 있던 바하 알딘은 이렇게 전한다. "술탄께서 이처럼 비탄에 빠진 적은 없었다!"

1.1.4. 교착 상태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아크레 남쪽 60km 지점,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지역까지 내려온 기독교 연합군[10]은 이해 11월 말까지 리처드의 지시 아래 야파의 진지 구축 작업과 일부 요새를 복구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드 프레오라는 기사와 단둘이 매 사냥을 떠났다가 사라센 군의 기습에 포로로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 프레오가 그를 아랍어로 왕이라는 뜻인 "말리크"라고 칭하는 모습을 본 아랍 병사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아르수프 전투의 승리와 야파의 점령으로 십자군의 눈앞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곧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뻐했지만 리처드의 생각은 달랐다.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도시였다. 그나마 해안가 도시들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가능해서 버텨낼 수 있었지만 내륙 도시인 예루살렘을 이런 방법으로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총 병력은 대략 20만 정도로 추산된다. 때문에 총 병력이 35,000명 정도였던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말이다.

문제는 1차 십자군 때의 이슬람 세력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셀주크 투르크나 파티마 왕조나 아바스 왕조나 맛이 가서 술탄이고 칼리프고 그저 이름뿐이었고, 동네 마을 하나까지 영주를 자처하며 서로 자기네끼리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이슬람 영주가 십자군과 동맹 맺고 옆 동네 이슬람 영주를 공격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한 번은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이 다른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과 싸운 일조차 있었다.[11]

때문에 1차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도, 트리폴리를 점령할 때도 다른 이슬람 영주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 뿐이라서 하나하나 십자군에게 각개 격파를 당했다. 만약 모든 이슬람이 일치단결해서 공격했다면 십자군 국가의 수립은커녕 기껏해야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영토 일부를 수복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막상 안티오키아 공방전만 해도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대영주인 리드완은 안티오크가 공격 받은 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고 먼 모술의 대영주인 카르부카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걸 본 카르부카는 안티오크를 먹어치우려다가 가뜩이나 분열된 아미르들을 더욱 분열시켜 박살이 나고 모술까지 잃어버린다. 각설하고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건국된 예루살렘 왕국도 이같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때로는 이슬람 영주들과 동맹 맺고, 때로는 싸우면서 90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3차 십자군 당시는 1-2차 십자군 때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살라딘이라는 위대한 왕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었다.[12] 이제 100년 전처럼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체스판 너머에 상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해도 뒷일이 어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리처드와 십자군 병사들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나면 물밀듯이 몰려올 이슬람군에 예루살렘을 도로 내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개월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리처드는 생각한 듯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마찬가지로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공성전 때는 어느 영주도 십자군의 뒤를 치지 않았지만,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인다면 살라딘이 후방을 공격해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대신 살라딘과의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면 살라딘이 조약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후술할 리처드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과의 혼담도 이때 나온 일이었다. 허나 살라딘 역시 예루살렘을 호락호락 내줄 생각은 없었다.

1191년 11월 마침 살라딘은 당시 영주들의 반발로 일시적으로 휘하 병력을 해산한 상태였다.[13] 이 기회를 틈타 리처드는 일단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으나 예루살렘까지 하루 거리를 남겨두고 군대를 되돌린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위력 시위였던 듯하다.

한편, 1192년 봄까지 협상을 했지만 쉽게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리처드는 전략을 바꾼다. 먼저 아스칼론, 가자, 다룸을 점령해 살라딘의 영지인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을 정리한 다음 1192년 6월 예루살렘으로 재진격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처드는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와중에도 살라딘과 끊임없이 회담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군사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아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이슬람 영주들은 살라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건 수백 년간의 충성의 결과가 아니라, 살라딘의 그동안 쌓은 군사적 업적과 부유한 이집트의 영주란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리처드가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살라딘은 실각할 수밖에 없고 다시 한번 이슬람 세력은 분열할 수 있다. 설사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더라도 이집트를 공격하면 최소한 살라딘을 압박해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1.1.5. 예루살렘? 이집트?

군사 하층부에 속한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저자에 따르면,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격에 대해 물 공급이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했다. 살라딘이 우물에 독을 풀었으므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릴레이식으로 운반해온 물을 말에게 먹여야 한다, 게다가 기병대의 반은 물을 공급 받고 있을 때 반만이 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성전 대신에 이집트 원정을 제의했다.

이에 십자군은 투표를 하자고 했다. 300명의 대배심원이 선정되었고, 그중에서 열 두명이 선발된 후 거기서 다시 세 명이 뽑혔다. 이 세 명의 결정을 최종 결정으로 정하자는 데 다들 동의했다. 세 명 모두 이집트 원정을 선택했다. 프랑스군은 최종 결정에 따르기도 약속해놓고도 즉각 약속을 깨뜨렸다. 예루살렘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부르고뉴 공은 프랑스인은 아무도 이집트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선언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이집트 원정에 대해 설명했다. 나일강 원정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순례자들'의 목적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층부의 설명은 다르다. 잉글랜드 왕실의 성직자는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를 원했지만 부르고뉴 공이 프랑스 왕을 생각해서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단언한다. 티레의 기욤의 연속물도 부르고뉴 공을 비난했다. 잉글랜드 왕이 이대로 예루살렘을 정복하면 도중에 귀국한 프랑스 왕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기에 공격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13세기에 루이 9세의 최측근도 부르고뉴 공이 리처드가 예루살렘 공성전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짤막하게 비난했다. 코제샬의 랄프는 부르고뉴 공, 성전 기사단의 단원들과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왕을 위해서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을 막았던 것을 비난했지만 결론적으로 리처드에게 책임이 있었음을 암시했고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예루살렘 앞에서 십자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베이트누바에서 해안 지역인 아크레까지 물러났다. 살라딘의 첩자들은 리처드가 아크레로 물러난 뒤 체면을 세우기 위해 베이루트 공성전에 나설지도 모르며, 그 다음에는 잉글랜드로 배를 띄울 것이라고 전했다. 살라딘은 여전히 최대의 숙적을 상대로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어디로 나아갈지를 정했다. 아무도 그의 다음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 했다.

1.1.6. 야파 전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LionHeartFarewell.jpg
야파 전투
야파에서 아크레까지 엿새 만에 해로로 항해하는 동안 아무런 저항도 만나지 못한 리처드는 사라센인들이 전쟁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야파에는 수많은 병자 및 부상자와 빈약한 수비대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그는 알레포와 모슬에서 사라센의 대규모 보충 부대가 도착하여 살라딘이 '긴급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까지 알지 못했다.

1192년 7월 27일, 살라딘과 6만 2천여 명의 사라센 군은 야파 요새를 침공한다. 수비대는 리처드가 그곳에 없음을 애통해하면서 리처드에게 전령을 보냈다.
아아, 잉글랜드 왕이시여, 우리 군주이자 수호자여, 그대는 무엇 때문에 아크레로 가셨나요?

수비대는 이 전투에서 고대 로마식의 거북 대형을 짜서 맹렬하게 저항하는데, 그 맹렬한 저항은 무슬림의 역사가들마저 감동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망고넬에서 발사되는 무거운 돌덩어리가 마침내 그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십자군은 모두 성채 안으로 물러나고 그들의 투혼은 이틀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번 것이다. 마침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십자군들이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이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투항할 수 없겠냐고 하자 살라딘은 그들의 항복을 접수하면서도 그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14]
요새로 퇴각하고 도시를 포기하라. 지금 무슬림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후 무슬림 군대가 야파 시내로 몰려와 닥치는 대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수비대 생존자들은 모두 성채에 틀어박혔다. 살라딘은 부대를 수습하여 야파 방위를 위해 성채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려 했지만 전리품에 취한 무슬림 군대는 살라딘의 통제를 무시하고 날뛰었다. 결국 살라딘의 우려가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새로 선출된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십자군 편의 협상자가 되어 살라딘에게 다음 날인 8월 1일 오후 3시까지 전투 중단을 제의했다. 그때까지 아크레에서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고, 정전을 허락한 살라딘에게 큰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리처드가 그 시간 안에 올 수 없다고 확신한 살라딘은 이 제안에 동의했다.[15]

한편 아크레에 있던 리처드 1세는 수비대의 필사적인 구원 요청을 7월 28일에 받았다. 목격자에 의하면 "모두의 생사가 오직 그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슬픔에 겨워 자신의 옷까지 쥐어뜯는' 전령들의 통곡에 크게 분노, "하느님이 살아 계심에 그분의 도움으로 내 할 일을 하고야 말리라."라고 외치며 군대를 소집하여 야파로 향했다.

우선 리처드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예루살렘 왕 앙리 1세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템플기사단 및 구호기사단과 함게 내륙을 통해 남쪽으로 갔다. 해로로 출발한 리처드는 상륙 작전을 펼 기습 부대를 선발했다. 하지만 행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아크레에서 출발한 함대는 카르멜산에서 불어오는 역풍을 맞아 항해 속도가 느려졌고, 작은 돌풍으로 일부 함선은 대열에서 이탈해 버렸다. 그는 8월 1일 새벽까지도 갑판을 초조하게 서성댔고 7척의 배를 이끌고 야파에 도착했다.

살라딘의 병사들은 토요일 아침, 리처드의 갤리선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살라딘은 리처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해안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항복한 십자군 수비대에게 성채를 넘겨받아 야파 방어에 쓰려고 했다. 리처드가 도착한 줄 모르던 수비대는 순순히 성채를 넘기려 했다. 그때 살라딘의 부하들 중에서도 인정이 넘치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인 주르디크가 십자군을 지금 보내줬다가 분노한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들을 도륙할 것이니 십자군들을 위해 안전한 퇴로를 마련해주자고 주장함으로 성채를 넘겨받는 일이 늦어졌다.

하지만 무슬림 병사들은 십자군을 위한 퇴로를 마련해주는 일에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일을 대충 했고 이 때문에 수비대원 49명과 그네들의 49명, 말 49필만이 성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은 해안가로 접근한 리처드의 범선 35척과 갤리선 15척을 발견했다.

마음이 바뀐 수비 대원들은 다시 성벽에 틀어박히고 바하 앗 딘에게 자신들의 항복을 철회한다는 매우 정중한 문구를 보낸 다음에 무슬림 병사들을 급습해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열이 뻗칠 대로 뻗친 투르크군과 살라딘은 야파 시내로 몰려가서 수비대를 다시 성채로 몰아넣고 성벽을 맹폭하기 시작했고 곧 성내에 진입까지 성공한다. 성내는 약탈을 시작한 무슬림 병사들과 성내에 위치한 공성 탑에 모여서 죽음을 기다리는 소수의 병사들만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헌데 간신히 나타났던 리처드의 범선은 이상하게 접근을 안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무슬림의 함성 소리와 휘날리는 살라딘의 깃발 때문에 구조 요청을 듣지 못 했고, 앙리의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토의하고 있었던 것. 기다리던 자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겠지만, 이는 리처드가 매우 신중하고 냉정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절체절명의 순간, 수비대가 다시 항복을 구걸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사제 한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리처드의 범선까지 헤엄쳐갔다. 잉글랜드군이 그를 구조하여 갑판에 올리자 그는 리처드에게 부르짖었다.
숭고한 왕이시여. 우리 병사들은 지금 전하의 구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저 도살자들의 칼날에 쓰러져가고 있나이다. 마치 도살을 기다리는 양들처럼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습니다. 수비대는 전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 없는 한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에 리처드가 노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당치도 않다!

리처드는 구조 요청을 듣자마자 전속력으로 야파 요새로 돌진한다. 리처드는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아무런 갑주도 차지 않은 채 허벅지까지 잠기는 바다로 뛰어들더니 물을 헤치며 육지로 올라섰다. 보병 부대와 함께 육지로 상륙한 기사는 80명 가량이었다. 그들은 제노바 궁수들의 지원을 받아 기슭에 거점을 확보하고 신속하게 기슭을 올라가 도시로 향했다. 그 다음 리처드는 성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살라딘의 서기관 바하 알딘은 다들 혼란에 빠져서 헛것이 보이는 통에 "십자군이 전진하는 동안 붉은색의 소용돌이가 일었다."라고 전한다.

리처드는 석궁과 함께 자신의 유명한 덴마크식 도끼를 휘둘러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던 무슬림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왕은 마을 밖으로 달아나는 적을 뒤쫓으면서 강풍이 배를 뒤흔들듯이 그들을 후려쳤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함락이 거의 확실시되어 방심하고 있던 무슬림 병사들은 난데없는 기습에 혼비백산하여 순식간에 와해되어 야파 해안을 잉글랜드군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리처드는 수많은 무슬림군 사이를 뚫고 지나가 소수의 수비대가 위치한 성전기사단 건물 내부로 도달하는 데 성공하고 뒤이어 도착한 십자군이 성벽 사수에도 성공하며 “지원군이 도착했다.”라는 신호인 잉글랜드 깃발을 꽂게 된다.
왕은 성전기사단 건물의 계단 위쪽으로 혼자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성벽 위에는 수비대 구조를 알리는 영국 기가 펄럭였다.
스탠리 레인 풀, `살라딘`
그 꼴을 보고 있던 살라딘은 당연히 분노를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살라딘은 헐떡거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대체 그들이 어떤 작전을 세웠길래! 우리의 보병과 기병이 훨씬 우세하지 않은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418쪽

살라딘이 질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이때 리처드군은 단 3필의 말로 공격을 감행해서 저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완수해냈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는 가톨릭과 이슬람 양쪽의 모든 역사가들에게 똑같이 입증된 사실이다. 무슨 허무맹랑한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무용담이 실제로 벌어진 것도 모자라 무용담 속 패배하는 악역이 됐으니 살라딘의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심지어 이 당시 살라딘 옆에서 야파 요새가 단 1명의 무력으로 허무하게 빼앗기는 걸 지켜보았던 어느 역사가는 리처드를 두고 "저 자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단정짓기까지 했다. 이전부터 리처드의 적들은 리처드를 '악마'라고 불렀는데, 아마 이때를 기점으로 리처드의 적들이 공통적으로 '무시무시한 악마'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살라딘은 6만 2천이라는 대군을 데리고 와서 요새를 점령할 뻔했지만 지지부진해지던 와중 리처드라는 희대의 괴물의 분전으로 인하여 야파 요새를 다시 빼앗기고 만다.

야파에서의 첫 번째 교전이 끝난 후, 살라딘이 보낸 의전관 아부 바크르에게 리처드는 웃으며 비꼬기까지 했다.
"당신들의 그 전능한 술탄은 어째서 내 모습만 보고 도망치신 거요? 맙소사. 나는 갑옷은 고사하고 싸울 준비도 없이 선박용 슬리퍼만 신고 있었는데 말이오? 도대체 살라딘은 왜 도망을 갔던 것이오?"

이렇게 양편 모두 격전을 치른 뒤 잠시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평화 협성이 재개되었다. 문제는 아스칼론이었다. 살라딘은 그곳을 돌려주지 않으면 화평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리처드는 그곳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리처드는 앙리 1세의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협상을 질질 끌었다. 앙리가 도착하자 십자군은 이제 2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적지 않은 숫자였지만 살라딘이 전력을 다해 야파를 공격한다면 안심할 수 없었다. 불리함을 타개하기 위해 리처드는 야파의 성벽을 최대한 빨리 수리하게 했다. 리처드와 앙리 왕도 사흘 밤낮으로 성벽에서 일했다.

하지만 야파에서 제대로 한 방 먹은 살라딘의 첫 움직임은 전면전이 아니었다. 리처드와 그의 부하들이 성 밖에서 숙영하다는 소식을 들은 살라딘은 8월 5일 새벽에 리처드가 점령한 야파를 향해 7천의 병력을 동원,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이때 야파에서의 십자군의 병력은 기사 54명, 기마 기사 15명, 보병 2천 명에 불과했으며 무너진 성벽을 마저 보수하지 못해서 그곳에 목책을 치고 진을 치며 방어를 할 정도로 열세였다.

그런데 새벽의 제때, 리처드가 잠에서 깨어났다. 판관기 16장 3절에서 가자인들의 기습 직전에 갑자기 삼손이 한밤중에 일어나 성문을 빗장째 뽑았듯이, 리처드는 부하들에게 공격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습 공격이 들통나자 분노한 살라딘은 즉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전면전을 지시했다. 당연히 잘 자고 있던 십자군의 진영은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자기 말을 제대로 찾은 기사가 열 명뿐이었다. 하지만 곧 보병대는 대오를 갖추었고, 전투에 앞서 리처드가 연설을 하자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말을 타고 병사들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리처드는 소리 높여 외쳤다.
"굳세게 버텨라. 두려움이나 비겁함 따위로 나약해진 종족들에게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라. 진짜 남자라면 용기 있게 영광을 쟁취하거나 영광스럽게 죽어라!"

이에 십자군의 사기가 매우 드높아지자 사라센군은 공격을 망설였다. 바하 알딘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들은 마치 투견처럼 으르렁거렸다. 기꺼이 죽기까지 싸우겠다는 태도였다. 우리 부대는 그들이 두려웠고, 그들의 무모함에 얼이 빠졌다.

살라딘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격분했다. 그는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용기를 복돋우려고 했다. 하지만 사라센군이 망설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리처드가 아주 탁월하게 군사를 배치했던 것이다. 맨 앞줄에는 방패로 몸을 가리고 무릎을 꿇은 병사들이 단창 자루를 땅에 세운 채 창날을 위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 밀집 대형의 팔랑크스[16] 뒤로는 궁수들이 있었다. 궁수들은 무릎을 꿇은 병사들의 머리 위로 활을 잡고 있었다. 한 쌍으로 조를 이룬 궁수들은, 한 사람이 화살을 먹이고 한 사람이 화살을 쏘는 식으로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댈 수 있었다. 십자군은 수적으로는 크게 열세였지만 이 수비진으로 사라센 기병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리처드는 적의 공격이 약해질 때마다 보병의 엄호를 받던 기사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마침내 리처드는 쇠뇌병들을 앞쪽으로 내보내 사라센 기병대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퍼붓도록 했다. 그러자 창병들은 쇠뇌병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들이 앉아 있는 사이로 길을 내주었고, 이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한 결과 마침내 전투는 적의 궤멸로 막을 내렸다. 퇴각의 순간 리처드는 15명의 말 탄 기사와 함께 돌격해 그 비할 데 없는 용맹함으로 사라센군을 덮치며 좌우로 칼을 휘둘러 그들의 머리를 쪼개고 사지를 절단냈다.

투르크군이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후퇴하자 리처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5명의 기마 기사와 함께 추격, 적을 썰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처드는 사라센군을 향해 자신과 일대일 결투를 할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자신의 부하들이 아무도 나서지 못 하자 살라딘은 분노에 차서 몸을 떨었다.

격전을 치르는 중에 리처드가 탄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리처드는 낙마를 하며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때 위에서 언급했던 살라딘이 그에게 말 2필을 보내준다.
그렇게 한창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는 중에 아마 리처드의 말이 쓰러져 죽었던 모양이다. 별안간 투르크 군 한 명이 말 2필을 이끌고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것은 왕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살라딘이 "그토록 용감한 용사가 땅바닥에서 싸워서는 안 될 일"이라며, 날쌘 아랍 말 2필을 보내준 것이었다. 리처드도 똑같은 기백으로 그 말들을 받아들여 싸움을 계속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말을 선물 받은 리처드는 그 답례로 투르크군을 공격하고, 이런 정신 없는 난전 중에 살라딘의 투르크군은 후미로 침투해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리처드가 말머리를 돌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를 뒤따르던 기사 15명과 함께 적들을 저지했다.

결국 살라딘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전투로 십자군 측은 단 두 명만이 사망[17]했던 반면에, 살라딘군은 7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0+2마리의 말을 잃었다. 참고로 바하 앗 딘은 이날 패배 원인을 살라딘이 너무 관용을 베풀어줘서라고 분석했다.
1.1.6.1. 주의점
다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리처드가 아무리 당대에 있어 사탄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고는 하더라도 성을 혼자서 점령할 수는 없다. 유튜브 같은 매체에서 너무 간략하게 소개하다 보니 "단신으로 성을 점령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고 또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소개되었듯이 전투가 일어나는 중이었고, 80+@명이면 적들은 저게 80명인지 8만 명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리처드가 앞에서 다 썰며 밀고 들어오면 무슬림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게 되고, 공포는 전염되기 마련이다. 방어가 굳건한 성을 리처드 혼자 돌격해서 점령한 게 결코 아니다.

전근대 시대에 소수의 정예병으로 압도적 다수를 물리친 전투 대부분은 이와 비슷한 진행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용맹한 정예병이라고 해도 백 명 내외의 병력이 수만 명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수만 명의 대군 사이로 소수의 정예병이 돌격해 들어오면 당장 그 소수의 정예병과 맞부딪혀 싸우게 되는 인원은 전체 병력 중 극히 일부로 역시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고, 이 일부 병력이 수백 명~잘해야 천여 명 수준이라면 이 국면에 한해서는 소수의 정예병이 압도적 우세를 보이며 기세를 올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 때문에 소수 정예병과 충돌한 병력이 붕괴하여 도주하고, 이 모습을 본 주변의 다른 병사들도 함께 패닉에 빠져 도주할 경우 대군 전체의 전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수십, 수백 배에 이르는 대군이면 패닉에 빠져 도주하지 않고 단순히 자리를 지켜 전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소수 적군의 공격을 간단히 격퇴하고 역으로 압살할 수 있다. 하지만 전후 맥락이 모두 정리된 자료를 읽어볼 수 있는 후세의 역사책 독자가 아니라 당장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당대 전투에 참가한 병사 입장에서는 이처럼 전략적인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만한 정보 자체를 얻을 수가 없으니 주변의 전우들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하면 당연히 '아이고, 이번 전투는 우리가 졌나 보다'하고 따라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것.

성 위나 언덕에서 대국 전체를 보고 있는 지휘부라면 그나마 전황 전반을 파악하기 쉽겠지만 전근대 전장에서는 지휘부의 전장 파악 능력 자체도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족했고, 설령 전황을 파악한다고 해도 통신 기술의 한계상 부대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단 역시 극히 제한적이니 전열의 붕괴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전근대 전장에서 개인의 용맹성이나 용맹한 지휘관이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당시 군사 기술의 한계상 지휘부가 전 군에 대한 지휘 통제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점에 기인한 바가 크다.

전근대 군사 제도와 근현대 군사 제도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인 국민개병제의 도입 기반으로 흔히 '총기의 발달과 같은 무기 기술의 진보'를 꼽는 경우가 많지만 '인쇄 기술과 공교육의 도입 등으로 인한 대중의 지식, 교양 수준의 향상' 역시 국민개병제의 성립에 만만찮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전근대 전장에서도 대규모 징집병을 동원하여 병력 우위를 확보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지만, 이런 징집병은 순간적이고 사소한 상황 변화에도 당황하여 패닉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신뢰할 수 없는 병력'이었기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소수의 정예 병력이 전장의 주역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달만 훈련받으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충분히 상대를 살상할 수 있는 총기를 한 자루씩 쥐어주고, 당장 눈앞에 적이 달려들 때 우르르 도망치다 서로 밟혀 죽는 것보다는 제 자리를 지키고 침착하게 응사하는 쪽이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만 가르칠 수 있다면(덤으로 국민국가 개념의 도입으로 스스로 싸워야 할 이유를 부여해주면 더 좋다) 대규모의 징집병 역시 충분히 신뢰 가능하고 강력한 군사적 자원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천 년간 전장의 주인공이던 정예 병력의 상징인 기병이 도태되고 대규모 징집군이 전장의 패권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물론 20세기 이후, 총기로 무장한 보병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신개념 무기인 전차가 등장하면서 전장의 주도권 일부가 '다수의 대단위 보병 부대'에서 '기갑 부대 등 소수의 중무장 병력'으로 넘어온 것은 사실이다.

다만 소수 정예군이 잘 싸워 적에게 공포심을 심겨주어 대군을 돈좌시킬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쉬울 뿐이지, 실제로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수 측의 상당수가 앞의 상황 파악을 못해서 공포감을 가지게 된다면, 소수 측은 상황 파악이 되기에 더욱 정신적인 문제를 겪을 수 있다. 어지간히 훈련된 전문가도 1:2를 꺼리고, 1:3 이상이 되면 배겨내지 못 한다. 하물며 80명으로 수 백은 물론, 수 천도 될 수 있는 적에게 꼬라박으라는데, 정예라 쳐도 80명 쪽에서 모랄빵이 나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국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지휘관의 능력이고, 이것을 해낸 지휘관은 불세출의 명장, 최소 맹장이 된다.

1.1.7. 문서 오류

이 문서의 리처드 1세의 3차 십자군 활약담은 리처드 1세 편력기을 기반으로 한다. 이 사료는 영미권 학계에서 리처드 1세에 대한 과장과 아첨이 심한 사료로 지목되어 십자군의 전술과 활동 추이를 제외하고 애당초 신뢰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1.1.8. 평화 협정

살라딘은 야파 전투의 패배로 리처드와 십자군을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리처드 입장에서는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령 침공으로 인해 한시라도 빨리 유럽에 돌아가고 싶었다. 리처드는 이벨린의 발리앙을 살라딘에게 보내서 "예루살렘을 포기하겠다. 그럼에도 만약 강화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나와 십자군은 여기에 영원히 머무르는 수밖에 없다."라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통첩을 보냈다.

살라딘도 계속 리처드와 십자군이 이곳에 머무는 것이 대단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비록 이슬람 세력을 통합했지만 수백 년간 군웅할거나 다름없던 이슬람 세력은 아직 단단히 통합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고, 이미 54세인 자신이 죽은 뒤 후계자들이 영주들의 병력을 계속 동원해 십자군과 싸우는 것이 새롭게 일으킨 왕조에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살라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18]

이로써 리처드는 살라딘과의 강화 회담을 진행하고 1192년 9월 2일 3년 8개월간의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19] 십자군은 아스칼론을 되돌려주고 이슬람 세력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했다. 대신 살라딘 역시 해안가 기독교 도시들을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들의 안전을 약속했다. 또한 살라딘은 유럽에서 온 십자군들의 성지 순례를 쾌히 인정했으며, 성묘 교회에서 마지막 미사를 보는 것도 승낙했고, 양쪽 다 무사히 포로들을 반환했다.

리처드는 다른 십자군 병사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도중에도 끝내 성지에 들어가지 않았다.[20] 리처드는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이슬람과의 충돌에 대비해 순례자들을 4무리로 나누고 그 지휘자들에게 어떤 도발 행위에도 대응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살라딘 또한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도발 행위를 엄금했으며,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과 그의 부하들이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 윈윈이라서 조약을 맺었는데 재전을 치른다면 기껏 조약을 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충돌 없이 순례는 끝났다.

이 조약은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26년간이나 지켜지게 된다. 리처드는 10월 9일 아크레에서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리처드가 떠나고 5개월 뒤에 살라딘은 병으로 숨을 거둔다.

리처드 지휘하의 십자군은 이슬람 군대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교환비를 보일 뿐만 아니라 2차 십자군을 괴멸시킨 주요 전법인 유인 전술이나 기만 전술이 거의 통하지 않아 살라딘의 고민이 컸고,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오는 리처드를 막기에는 병력이 집결하는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그의 십자군이 매우 위협적이고 강력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결국 리처드 역시 프랑스군의 영국령 침공이나 존의 반란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 중이었고, 그러다가 영국의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니 더 이상 전쟁을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협상으로 마무리하는 게 양측으로서는 윈윈이었던 셈이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에서 귀향길에 살라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리처드의 부하들이 조금만 더 성지에 머물렀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거라고 아쉬워하자, 리처드는 "만약 우리가 계속 남아있었다면 살라딘은 결코 눈을 감지 못 했을 것이다"라고 멋지게 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리처드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이라고 말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말한 적도 있다.
[1] 일사병이나 열사병이라는 설도 있다.[2]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3]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포로 학살이 맞지만, 이유 없는 학살조차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던 중세의 전쟁에서 합의가 지켜지지 않아 처형했다는 것은 당시의 전쟁 양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살라딘도 리처드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슬람 쪽도 포로 학살을 흔하게 행했으니까.[4]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제라르 드 리드포드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을 면하고 풀려났다가 아크레 공성전에서 죽는다.[5] 보병의 수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는지 기록이 없는데, 병력 구성상 말을 탄 기사가 230명이나 포로로 잡혔으면 말 없는 보병은 그 10배 이상 잡혔다고 봐야 한다. 이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투르크 용병은 모두 죽였고 나머지 병사들은 다 노예로 팔렸으니 리처드가 학살한 3천 명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 측에서 이를 두고 조금도 비난하지 않은 이유는, 이교도 포로를 학살하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전혀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6] 옛날 팔레스타인 서남부에 살며 이스라엘 민족과 끊임없이 충돌했던 민족. 성경골리앗이 필리스티아 사람이다.[7] 기원전 167년,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종교적 박해에 대항해 일어난 마카베오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유다"이고, 쇠망치라는 뜻의 마카베오는 그의 별명이다.[8] 성 조지는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이었다. 원래 중세 유럽 국가의 군대는 전투 직전에 자기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성인의 이름을 외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잉글랜드 군대는 자기 나라의 수호성인인 성 조지의 이름을 전투 직전에 구호로 외쳤고 그래서 백년전쟁을 다룬 영화인《더 킹: 헨리 5세》를 보면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 군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성 조지와 국왕 폐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비슷한 사례로 프랑스 군대는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성 드니의 이름이 들어간 "몽주아 생드니!"를 전투 직전에 구호로 외쳤고, 스페인 군대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성 야곱의 이름이 들어간 "산티아고!"를 전투 직전에 구호로 외쳤다.[9] 바하 앗딘이 쓴 살라딘의 일대기. 원 제목은 "al-Nawādir al-Sultaniyya wa'l-Maḥāsin al-Yūsufiyya"로 직역하면 "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Sultany Anecdotes and Josephly Virtues)".[10] 십자군 원정을 온 병력들 + 기존에 예루살렘 지역 일대에 위치한 기독교 병력들.[11] 후에 이 일을 들은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보두앵 2세는 이들을 불러서 혼내고 이후는 적어도 십자군끼리 싸우는 일은 없었다. 1108년 10월의 일로 알레포 영주 라드완, 안티오크의 탄크레디와 모술 영주 자왈리, 에데사의 조슬랭 간의 전투였다. 전투 자체는 라드완과 탄크레디 연합이 승리했지만, 가뜩이나 1차 십자군 대다수가 유럽에 귀환해서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보두앵 2세는 십자군끼리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에 격노했다. 어쨌든 보두앵 2세의 중재로 탄크레디와 조슬랭은 화해했다. 이렇듯 이 시절 이슬람 세력은 일치단결해 십자군과 맞서는 건 고사하고 자기들끼리 영토 싸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12] 엄밀히 말하면 살라딘도 누르 앗 딘이 어느 정도 통합해놓은 걸 물려받은 점도 있었지만, 이를 유지하고 아이유브 왕조가 끝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라 해도 살라딘의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3] 이슬람도 봉건 시대였으므로 술탄인 살라딘의 명령에 영주들이 병력을 끌고 와 참전하는 식이었는데, 살라딘이 너무 오랜 기간 소집하자 병력의 유지비를 부담했던 영주들은 해산을 요구한 것이었다.[14] 애초에 군대가 저런 짓들을 하면 상층부 입장에서는 병사들의 통제가 안 되고 군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닌데, 설령 살라딘이 명한다고 하더라도 증오범죄를 막을 수 없으리라 여긴 것으로 보인다.[15] 인명 손실 없이 성채를 점령하게 될 것이라서 동의한 듯하다.[16] 고대 그리스의 방진.[17] 다만 부상자는 다수 발생했다.[18] 실제로 살라딘은 다섯 아들들에게 영지를 각각 나누어주었고 실질적인 후계자는 알 아지프로 삼아 영주들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게 했지만, 살라딘 사후에 아들들간에 권력 투쟁으로 전투까지 벌어져 알 아지스가 알 아지프를 추방하고 후계자가 되었다. 이 혼란은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이 1198년 알 아지스의 사후(병사)에 술탄이 되면서 마무리되었다. 만약 이때 십자군까지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었다면 대단히 골치 아팠을 것이다.[19] 이때 리처드는 "3년 조약이 끝나면 와서 예루살렘을 되찾겠소."라는 편지를 보냈고 살라딘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기왕 빼앗긴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리처드 그대에게 기꺼이 잃겠노라."라고 답장을 보냈다는 것은 유명하다.[20] 언젠가 자기 손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 싶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