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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득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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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dd1e1f>
응우옌 왕조 제4대 황제
뜨득 황제
嗣德帝 | Tự Đức
파일:뜨득황제.jpg
출생 1829년 9월 22일
월남 응우옌 왕조 후에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사망 1883년 7월 19일 (향년 53세)
대남 응우옌 왕조 후에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능묘 겸릉(謙陵)
재위기간 제4대 황제
1847년 11월 5일 ~ 1883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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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dd1e1f> 성씨 응우옌(Nguyễn, 阮/완)
푹홍념(Phúc Hồng Nhậm, 福洪任/복홍임)
→ 푹티(Phúc Thì, 福時/복시)
부모 부황 헌조 장황제
모후 의천장황후
형제자매 35남 29녀 중 차남
배우자 여천영황후 외
자녀 양자 3남
신장 153cm
묘호 성조(成祖) → 익종(翼宗)
시호 계천형운지성달효체건돈인겸공명략예문영황제
(繼天亨運至誠達孝體健敦仁謙恭明略睿文英皇帝)
연호 뜨득(Tự Đức, 嗣德/사덕, 1847년 ~ 1883년)
}}}}}}}}}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초기2.2. 프랑스의 1차 개입 (1858년~1867년)2.3. 프랑스의 2차 개입 (1873년~1874년)2.4. 1880년대 이전 월청관계2.5. 프랑스의 3차 개입과 청-불 갈등으로 비화2.6. 죽음2.7. 성격 및 평가
3. 여담4. 둘러보기

1. 개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대남 응우옌 왕조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익종(翼宗). 시호는 계천형운지성달효체건돈인겸공명약예문영황제(繼天亨運至誠達孝體健敦仁謙恭明略睿文英皇帝). 즉위 전 이름은 응우옌푹홍념(阮福洪任)이었으나, 즉위 한 후에는 응우옌푹티(阮福時)로 고쳤다. 헌조(憲祖. 티에우찌)의 아들이다. 원래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지만, 형인 안풍공 응우옌푹홍바오(阮福洪保)를 제치고 황제가 되었다. 연호는 뜨득(嗣德).

뜨득은 쇄국정치를 펼쳤으며 유교를 진흥하고, 서구 가톨릭 유입에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 이와는 별개로 쯔놈으로 쓰인 역사책 대남국사연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2. 생애

2.1. 즉위 초기

뜨득은 1829년 9월 22일에 태어났다. 1847년, 부왕 티에우찌 황제가 사망하자, 뜨득은 그 뒤를 이어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18세라는 비교적 젊은 뜨득은 초기에 자롱, 민망, 티에우찌 3대 선왕을 섬긴 원로 보정대신(輔政大臣)[1] 쯔엉당꿰(Trương Đăng Quế, 張登桂)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즉위 초부터 뜨득은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다. 제위를 부정하게 찬탈했다는 음모론과 함께, 형인 안풍공 홍바오(1825-1854)의 세력과 싸워야 했다. 홍바오는 1851년과 1854년 두 차례에 걸쳐 반란을 모의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옥중에서 자살했다. 홍바오가 가톨릭 선교사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은 뜨득이 반가톨릭 정서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1854년부터 1864년에 걸쳐 레주이풍(Lê Duy Phụng, 黎維奉, 본명 따반풍, Tạ Văn Phụng)이라는 북부 유력자가 서산(西山)운동으로 멸망한 레(黎)왕조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레주이풍 역시 가톨릭 신자였고, 비록 성사되진 않았지만 꾸준히 프랑스와 결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861년 비교적 큰 폭동을 일으킨 이후 레주이풍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는 응우옌 왕조가 국토를 완전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2.2. 프랑스의 1차 개입 (1858년~1867년)

1858년, 가톨릭 신자가 늘어나자 외국인 선교사와 신도들을 처형하는 등 박해를 가하였는데, 이를 구실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다낭(Tourane)을 침공했다. 일차적으로 다낭 입성에는 성공했지만, 점령군은 성 내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전략을 바꿔 보급선을 끊을 목적으로 남부의 자딘성(현재 호찌민시, 사이공)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결국 대남 조정은 1862년 6월 5일 프랑스, 스페인과 제1차 사이공 조약(임술화약, 壬戌和約)을 맺는다[2]. 이로써 대남은 남동부 3성(자딘 Gia Định, 딘뜨엉 Định Tường(미토), 비엔호아 Biên Hòa)를 할양하고, 4백만 멕시코 달러의 배상금을 물었으며, 천주교 활동을 허용해야 했다. 1863년 뜨득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판타인잔(Phan Thanh Giản, 潘清簡), 팜푸트(Phạm Phú Thứ, 范富庶), 응우이칵단(Ngụy Khắc Đản, 魏克憻)를 앞세운 사절단을 프랑스에 파견했다[3]. 이들은 프랑스,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순방하고, 심지어 나폴레옹 3세를 직접 접견하기까지 했지만, 반환 요청은 최종적으로 거절당했다. 파리 정부는 반환에 동의했지만 코친차이나 총독 라그랑디에르(Pierre-Paul La Grandière)가 격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1867년에 프랑스는 남서부 3성(빈롱 Vĩnh Long, 안장 An Giang, 하띠엔 Hà Tiên)마저 점령하고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를 선포했다.

한편, 당시 대남 북부에는 태평천국의 잔당이 윈난을 넘어 청월국경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기존 잔당의 수장이었던 오곤의 사후, 이들 세력은 흑기군, 황기군, 백기군으로 나뉘었는데, 뜨득은 호앙께비엠(Hoàng Kế Viêm) 장군을 파견해 진압을 시도했다. 호앙께비엠은 유영복의 흑기군을 회유, 포섭하고 청 장군 풍자재의 도움을 받아 황기군과 백기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2.3. 프랑스의 2차 개입 (1873년~1874년)

1872년-1873년 뒤퓌(Jean Dupuis)가 홍강을 통해 무기와 소금을 밀거래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한편으로 코친차이나에게 협상을 요청하고, 응우옌찌프엉(Nguyễn Tri Phương)을 전권대신으로 하노이에 파견했다. 이에 코친차이나에서 프랑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가 파견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응우옌찌프엉을 포로로 잡고[4] 하노이 성을 점령한 뒤 홍강 부근에서 영토 확장을 꾀했다. 대남 조정은 가르니에와 협상하기 위해 쩐딘뚝(Trần Đình Túc, 陳廷肅)과 응우옌쫑헙(Nguyễn Trọng Hợp, 阮仲合)을 추가로 파견하지만, 그는 흑기군과 충돌한 끝에 꺼우저이(종이 다리, Cầu Giấy)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당황한 뜨득 조정은 예부상서 응우옌반뜨엉과 형부상서 레뚜언(Lê Tuấn, 黎峻)을 전권대신으로 파견해 프랑스와 조약 교섭을 시작하고, 1874년 3월 15일 제2차 사이공 조약(갑술화약, 甲戌和約)을 맺는다.[5] 이 조약의 제2조는 프랑스가 "안남 국왕의 주권과 모든 세력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한다고 명시했지만, 동시에 외교정책에서 프랑스와 보조를 맞추도록 하고 뜨득 황제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를 약속하는 내용을 모두 담고 있었다.[6] 조약의 해석을 둘러싼 이견은 청, 대남, 프랑스 사이에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켰다.

대내적으로도 갑술화약은 문제를 촉발했다. 응에띤과 하띤을 비롯한 중/북부 지방에서 쩐꽝깐(Trần Quang Cán, 陳光浣)이 수천명 규모의 유생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이 봉기는 반가톨릭, 반프랑스 표어를 표방했는지라, 코친차이나 당국은 이를 우려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코친차이나는 뜨득에게 강경 진압을 요청했고, 뜨득은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생들의 관점에서 이는 조정이 프랑스와 결탁하여 자국민을 탄압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응우옌 왕조가 척화파 문신층과도 멀어지는 계기가 된다.

2.4. 1880년대 이전 월청관계

1870년까지 청은 대남에서 프랑스의 활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청은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염군의 난 등으로 대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남부 통상로도 불안정해 대남의 조공도 뜸해진 상황이었다. 1870년에 톈진 사건으로 반기독교 폭동이 발생하면서 청-불 관계에 긴장되자, 청은 대남과 협력하여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정보 수집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후일 광서순무를 역임할 서정욱(徐廷旭)을 대남 북부에 파견했고, 1871년 2월에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대남이 이미 프랑스에 코친차이나 6성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한다.[7]

대남은 1876년에는 부이반지(Bùi Văn Dị, 裴文禩)가, 1880년에는 응우옌투엇(Nguyễn Thuật, 阮述)을 정사(正使)로 하는 조공 사절단을 청에 보냈다. 프랑스는 갑술화약이 조공관계를 종결시켰다고 생각했기에, 이 사절단을 대남의 기만 행위이자 조약 위반으로 여겼다. 한편, 1880년부터 청도 대남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875년 프랑스가 갑술화약 체결 사실을 청에게 알렸을 때, 총리아문의 공친왕 혁흔(奕訢)은 비교적 소극적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1880년대부터 외교관 증기택(曾紀澤)을 중심으로, 대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론이 대두했다. 1878년 말 대남 북부에서 이양재(李揚才) 반란이 발생한 뒤, 청은 통킹 일대에 군대를 주둔시키기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변경 강화였다.

2.5. 프랑스의 3차 개입과 청-불 갈등으로 비화

결국 1881년 12월, 코친차이나 총독 르미르드빌레르(Le Myre de Vilers)는 앙리 리비에르 제독에게 400명의 군대를 붙여주며 통킹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강화하라는 모호한 지침을 내린다. 이에 리비에르 역시 가르니에와 매우 유사한 패턴을 반복한다. 1882년 4월 25일 그는 하노이 성을 점령했고, 성을 지키던 호앙지에우(Hoàng Diệu, 黃耀)는 자결했다. 이후 뜨득의 요청에 응한 청이 운남, 광서 지역에서 추가 병력을 파견하여 통킹에 주둔시키지만, 리비에르는 경계할 뿐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882년 12월에 이홍장과 주청 프랑스 대리공사 부레(Frédéric Bourée)가 통킹을 홍강 기준으로 분할하여 북부를 청, 남부를 프랑스의 관리구역으로 삼는 협정을 맺자[8] 리비에르는 분노하여 팽창을 가속화하기 시작한다. 1883년 3월 그는 남딘 성을 점령했지만, 무리하게 확장하다 5월 29일에 가르니에와 같은 방식으로 꺼우저이 전투에서 흑기군에게 사살당했다. 그러나 비교적 조용히 넘어갔던 가르니에의 죽음과 달리, 리비에르의 죽음은 프랑스 내부에서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는 대대적 군사적 보복을 감행하고, 1883년 8월 말에 쿠르베 제독이 이끄는 8-9천명에 달하는 군대가 투언안(Thuận An)에 상륙했다.

2.6. 죽음

하지만 쿠르베가 상륙했을 때, 뜨득은 이미 1883년 7월에 53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였다. 죽기 전 그는 왕조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조상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뜨득의 묘비인 키엠꿍끼(Khiêm Cung Ký, 謙宮記)에 국난에 대한 자기변호와 후회가 기록되어 있다.[9]

그의 시신은 죽기 전에 건설한 흐엉 강의 상류 지역에 있는 능에 묻혔다. 뜨득은 성불구자[10]라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의 사후 조카이자 양자였던 응쩐(Ưng Chân), 응끼(Ưng Kỷ)응당(Ưng Đăng)이 후보로 추대되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은 결국 모두 제위에 올랐다. 뜨득은 결국 응쩐(阮福膺禛)을 지목했고, 그가 뒤를 잇는다. 뜨득은 죽득을 보좌하기 위한 보정대신으로 응우옌반뜨엉, 똔텃투옛(Tôn Thất Thuyết, 尊室説)과 쩐띠엔타인(Trần Tiễn Thành, 陳踐誠)을 임명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이 죽득을 폐위하고 뜨득의 이복동생 히엡호아를 옹립한다. 비록 뜨득은 성공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군주였지만, 적어도 그가 난세에 대남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의 사후 불과 몇 달 동안 이어질 혼란기는 뜨득이 분해되는 왕조를 지탱하는 마지막 안정 요소였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2.7. 성격 및 평가

대범하고 날카로웠던 조부 민망과 달리, 뜨득은 아버지 티에우찌를 닮아 유약한 성품을 지녔다. 조용하고 독서를 좋아했고, 그를 접견했던 소수의 프랑스인들에 따르면 군주보다는 시인의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그의 전기를 보면, 그가 사서오경을 특히 즐겨 읽었다는 진술이 있다. 이러한 유약한 이미지는 신체적으로도 허약했다는 점과 맞물린다. 그는 평생 잔병치레를 달고 살았고, 이따금 실신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1845년에는 천연두를 앓기도 했다.

여러모로 긴 제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남긴 유산이 좋지 않아서 베트남 국내 평가도 대체로 나쁜 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개화론자 팜푸트(Phạm Phú Thứ)나 응우옌쯔엉또(Nguyễn Trường Tộ, 阮長祚)의 상소에 뜨득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 조명되면서 뜨득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당시 뜨득은 척사론을 고수하던 유생들로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왕위 정통성 역시 도전받았기 때문에 대대적 개혁을 강하게 추진할 정치적 자원이 부족했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한 번도 개화론으로 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짚어둬야 할 것이다. 레딘(Lê Đỉnh, 黎挺), 응우옌로짝(Nguyễn Lộ Trạch, 阮露澤), 판리엠(Phan Liêm, 潘簾)을 비롯한 많은 개화파 인사들, 특히 홍콩과 싱가포르, 바타비아 등을 견문한 이들이 기술 도입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대부분 대남 조정에 의해 거절당했다. 이러한 입장은 서양 조선업과 군수 산업에 대한 큰 관심을 보였던 민망 황제의 이미지와 대조적이기에 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3. 여담

후에에 뜨득의 릉이 남아있는데, 그가 직접 무덤을 조성[11]하고 정무를 후에 황궁이 아닌 이곳에서 봤기 때문에 웅장한 궁궐이나 사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 가운데 가장 재위기간이 길다. 긴 재위기간 동안에 외세에 의해 나라가 잠식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고종과 유사점이 있다. 단, 서양문물에 그나마 개방적이었던 고종과 달리 뜨득은 완고한 거부를 보였으며, 이는 프랑스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계속적으로 빚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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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머지 보정대신은 보반자이(Võ Văn Giải, 武文解), 응우옌찌프엉(Nguyễn Tri Phương, 阮知方), 럼주이히엡(Lâm Duy Hiệp, 林維浹)이었다.[2] 대남 측 대표는 예부상서 판타인잔과 병부상서 럼주이히엡, 프랑스 측 대표 루이알퐁스 보나르 해군 준장(contre amiral Louis-Alphonse Bonard), 스페인 측 대표 돈카를로스 팔랑세 구티에레스 대령 (colonel Don Carlos Palance-Gutierres)[3] 해당 사절단이 남긴 기록으로는 팜푸트의 서행일기(西行日記, Tây hành nhật ký)와 응우이칵단의 여서기(如西記, Như Tây Ký)가 있다. 이때 참여한 인사 중 통역사로 활동한 쯔엉빈끼(Trương Vĩnh Ký, 張永記)가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후일 언어학자이자 프랑스 식민통치의 부역자로 유명해졌다. 또한, 개화기에 동아시아 국가가 유럽 본토에 파견한 사절단이라는 점에서, 메이지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 1866년 청의 빈춘(斌椿) 사절단과 1868년 벌링게임 사절단이나, 1861년 6월 시암이 프랑스에 파견한 사절단과 유사한 면도 있다. 물론 이들의 성격은 달랐다. 일부는 시찰단이었고, 일부는 국서를 교환하기 위한 공식 사절단이었다.[4] 응우옌찌프엉은 얼마 뒤 식음을 전폐하고 자살한다.[5] 프랑스 측 대표 뒤프레 준장(contre-amiral Marie-Jules Dupré).[6] 강화도 조약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7] 서정욱은 1877년에 대남의 문화, 지리, 정치를 소개하는 월남집약(越南輯略)을 출판한다.[8] 해당 협정은 결국 프랑스에 의해 비준되지 않았다.[9] Khiêm Cung Ký 소개글[10] 어릴 때 앓았던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성불구자가 됐을거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11] 아들이 없었기에 원래 태자가 쓰는 것이 관례인 공덕비의 문구도 자신이 직접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