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어: Loạn hậu đáo Côn Sơn cảm tác[1]
1. 개요
베트남의 유학자이자 후 레 왕조(Nhà Hậu Lê , 後黎朝, 1428년 - 1788년)의 개국 공신 응우옌 짜이(Nguyễn Trãi, 阮廌(완채, 혹은 완치))가 지은 한시. 난후도곤산감작(亂後到崑山感作)이란 '난후(亂後) 곤산(崑山)에 들러 느낀 점'라는 의미로 베트남 한문학의 대표적인 시이자 민족문학의 한 갈래에 속한다.응우옌 짜이가 살던 시기 베트남은 1408년 명나라의 침공으로[2]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명의 가혹한 수탈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트남 곳곳에서 저항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응우옌 짜이 역시 타인호아(Thanh Hóa) 지방의 토호였던 레 러이(Lê Lợi, 黎利(여리), 훗날의 레 태조(黎 太祖)의 책사 역할을 하며 1418년 람선에서 봉기한 이후 10여년에 걸친 무장 독립 투쟁에 가담했다.
응우옌 짜이는 레 러이가 내세운 사상적 기반과 실질적 전술을 만든 사람으로 1428년 명군이 베트남에서 레 러이에게 패배하고 철수할 때까지 전장에서 살았다. 난후도곤산감작은 그의 저서 <억제유집(Ức Trai Thi Tập, 抑齊遺集)> 1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독립 전쟁 와중에 잠시 곤산(崑山)에 들렀을 때 지은 칠언 율시 형식의 시이다. 전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루고자 하는 응우옌 짜이의 소망이 잘 드러난다.
문학사적으로 단순한 한시가 아니라 베트남어로 읽는 시인 국음시(國音詩)의 한 갈래에 속한다는 의의가 있다.
2. 전문 해석
一別家山恰十年
Nhất biệt gia sơn kháp thập niên
집과 산을 한번 떠난지 십 년이나 지나
歸來松菊半脩然
Quy lai tùng cúc bán tiêu nhiên.
이제 돌아와 보니 소나무와 국화꽃이 반이나 모지라졌네.
林泉有約那堪負
Lâm tuyền hữu ước na kham phụ
임천(林泉)에서 지내리라는 언약 어찌 저버리겠나.
塵土低頭只自憐
Trần thổ đê đầu chỉ tự liên
먼지 쌓인 땅에서 머리 숙이면서 내 자신이 가여울 따름이다.
鄕里纔過如夢到
Hương lí tài qua như mộng đáo
향리(鄕里)를 잠깐 지나니 꿈에 온 듯한데.
干戈未息幸身全
Can qua vị tức hạnh thân tuyền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다행히 몸은 성하구나.
何時結屋雲峰下
Hà thời kết ốc vân phong hạ
어느 때에 구름 서린 봉우리 아래에다 집을 얽고서
汲澗烹茶枕石眠
Cấp giản phanh trà chẩm thạch miên
산골 물 길어다가 차 끓이고 돌을 베고서 잠들까.
Nhất biệt gia sơn kháp thập niên
집과 산을 한번 떠난지 십 년이나 지나
歸來松菊半脩然
Quy lai tùng cúc bán tiêu nhiên.
이제 돌아와 보니 소나무와 국화꽃이 반이나 모지라졌네.
林泉有約那堪負
Lâm tuyền hữu ước na kham phụ
임천(林泉)에서 지내리라는 언약 어찌 저버리겠나.
塵土低頭只自憐
Trần thổ đê đầu chỉ tự liên
먼지 쌓인 땅에서 머리 숙이면서 내 자신이 가여울 따름이다.
鄕里纔過如夢到
Hương lí tài qua như mộng đáo
향리(鄕里)를 잠깐 지나니 꿈에 온 듯한데.
干戈未息幸身全
Can qua vị tức hạnh thân tuyền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다행히 몸은 성하구나.
何時結屋雲峰下
Hà thời kết ốc vân phong hạ
어느 때에 구름 서린 봉우리 아래에다 집을 얽고서
汲澗烹茶枕石眠
Cấp giản phanh trà chẩm thạch miên
산골 물 길어다가 차 끓이고 돌을 베고서 잠들까.
독립 운동을 위해 집과 고향을 떠난 후 황폐해진 고향과 조국의 모습, 그리고 자연에 귀의하고 싶다는 본인의 소망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박하게 차 마시고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지만 풍전등화 앞의 조국을 위해 자신의 소망을 접고 떨치고 일어난 시인의 우국충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싶은 소망이 간절하게 나타난다.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잦은 외침을 받았던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이 시가 공감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꽤 잘 알려진 한시이기도 하며, 사실상 한국에 알려진 유이한 베트남 문학 작품이다.[3]
시 자체는 동진 시대 시인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영향을 받았다.
3. 여담
응우옌 짜이는 유학자인 동시에 한 왕조의 개국공신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주군을 왕으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고 왕조의 사상과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도전과 매우 유사하다. 왕조를 개업하고 난 후의 행적도 참 비슷한데, 후 레 왕조에서 승상 자리에까지 올랐고 태조가 승하한 후 시에 적힌 본인의 소망대로 전원에 은거하였으나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이 응우옌짜이의 집을 방문했다가 급사해 버리자 반대 세력들로부터 태종의 암살을 기도 했다는 모함을 받았고, 본인은 처형당하고 삼족이 멸족당했다. 그리고 성종 때 금자영록대부(金紫榮祿大夫)로 신원 복귀됐다.[1] 로안 허우 다오 꼰 선 깜 딱[2] 원래 베트남은 1400년까지 쩐 왕조(Nhà Trần, 陳朝)의 통치 하에 있었는데 쩐 왕조의 외척이었던 권신 호 꾸이 리(Hồ Quý Ly, 胡季犛(호계리))가 왕위를 찬탈해 호 왕조(Nhà Hồ, 胡朝)를 세웠다. 명은 호 꾸이 리의 왕위 찬탈을 문제 삼으며 쩐 왕조를 복귀시키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베트남으로 쳐들어왔고 호 꾸이 리는 패배하여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명은 잠시 동안 쩐 왕조를 복귀시켜 놓은 듯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쩐 왕조를 폐지시키고 베트남을 중국령으로 편입시켜 버린다.[3] 다른 하나는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 병사로 출정해 싸웠던 바오 닌이 전후 베트남의 모습을 담은 '전쟁의 슬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