都晋熙
1917년 6월 28일 ~ 1995년 5월 31일 (향년 77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1], 자는 중문(重文), 호는 두남(斗南)이다.2. 생애
1917년 6월 28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수죽리 하남마을에서 아버지 도인식(都麟植, 1898 ~ 1957. 12. 18)[2]과 어머니 순천 박씨(1895. 7. 18 ~ 1978. 2. 7)[3]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주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독학으로 공부하였고[4], 이후 상경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 31번지에 거주했다.1941년부터 경성부 본정경찰서 및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5년간 근무했고, 1946년 대한민국 육군 부사관으로 임관해 서기관을 거쳐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제3과 방첩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이등상사로 복무 중이던 1949년 조창학(趙昌學) 대한청년단 원남동 동단부장(洞團部長)으로부터 '동대문구 민보단장 및 서울동대문경찰서 후원회장으로 있는 고희두(高羲斗)[5]는 우익을 가장한 남조선로동당 적색분자이다'라는 취지의 진정서를 받았다. 그 내용은 고희두가 동대문구 민보단장 및 서울동대문경찰서 후원회장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남조선로동당 중앙집행위원 중 한 사람인 변(邊)모씨를 자택에 기거하게 하면서 집사로 고용했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남조선로동당 당원 및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회원을 향보단(鄕保團) 단원으로 고용했으며, 향보단이 해산되고 민보단으로 개편되자 이들을 민보단 단원으로 다시 편입시켰고 고희두가 이 모든 사실을 아는 자신을 암살하라고 지령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도진희는 9월 29일 오전 9시 고희두의 자택에서 고희두를 긴급 체포했고, 고희두의 아내 장순옥(張順玉)에게는 모피회사 사건과 관련해 증인 심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방첩대에 가자고 둘러댔다고 한다. 그리고 고희두를 체포해 고문한 끝에 당일 오후 5, 6시경에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에 도진희는 이튿날인 9월 30일 고희두씨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것이라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서울지방검찰청 정희택·장재갑(張載甲) 검사의 입회 아래 검시한 결과 고문치사로 판명되어 1949년 10월 22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아울러 불명예 전역 및 급료 전액 몰수 등의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복역하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잔형 집행정지처분을 받고 가출옥했고, 6.25 전쟁에 참전해 은성무공훈장, 금성화랑무공훈장 등을 수훈받은 뒤 1952년 육군 하사로 예편하였다. 그 뒤 한국여객자동차 부사장을 지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성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무소속 배상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하여 탈당하였다가 복당하였다.
1956년 김창룡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의 집에서 범행 당시 사용한 지프차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이 지프차를 저격사건 후 4일 뒤에 구입하고 수리한 뒤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증거를 인멸한 혐의, 암살자인 허태영 대령 등과 범행을 공모한 혐의를 받았다. 대한민국 국회는 정부로부터 그에 대한 체포동의 요청을 받았다. 결국 그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통과되었다. 게다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형이 실효되지 않고 집행정지 상태라서 출마 자격이 없는데 출마하였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이듬해인 1957년 9월 국회에서 의원자격심사에 회부되어 도진희의 국회의원 자격 상실이 결정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는 헌정사상 유일한 국회의원자격심사로 인한 의원직 상실 사례이다. 이어 1957년 9월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증거인멸 및 범인도피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6], 이에 상고했으나 1958년 1월 14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결국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형무소 및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60년 1월 30일 출소했다. 1962년 3월 9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강문봉 전 중장, 강홍모 전 대령, 이진용 전 대령 등과 함께 복권이 승인되었다.
1963년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해 중앙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그해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송한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4년 자유민주당이 민정당에 흡수되어 당적을 옮겼고, 1965년 민정당이 민주당과 합당해 민중당을 신설하자 다시 당적을 옮기고 중앙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민중당이 신한당과 합당해 신민당이 창당되자 당적을 옮기고 운영위원 및 지구당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송한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하고 국민당에 입당했고, 해당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병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5년 5월 31일 새벽 2시 30분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강남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 성산군파(星山君派, 성주파星州派)-행정공(杏亭公) 형(衡)파 24세 희(熙) 환(煥) 항렬.[2] 성주도씨대동보 권2 113쪽에는 도상우(都相虞).[3] 박팽년의 후손으로, 박해붕(朴海鵬)의 딸이다.[4]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학력사항에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고 학력위조를 하기도 했다.[5] 당시 주소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남동 266번지.[6] 도진희가 범행 당시 사용된 지프차를 허태영 대령의 동생 허병익 중위로부터 대여받은 뒤 변색, 도장한 것으로 인해 증거인멸 혐의가 인정되었고, 강문봉 당시 중장으로부터 130만환을 받아 허태영 대령에게 준 것이 범인도피방조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