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희선의 활동을 서술한 문서2. 데뷔
"그때 김희선 씨는 워낙 인기가 많았었던, 뭐 지금도 그러시지만, 그때는 완전 인기가 최,최,최고였거든요. 그냥 원탑이었죠. 경쟁이 안되는. 그냥 김희선. 근데 다행히 저는 그 친구가 학교 후배여서 다행히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다행히." - 김석훈
"김희선 하면 딱 그냥 한 단어 원탑. 그리고 거기서 하나 더 대면 유행. 모든 유행을 다 시켰어." - 강호동[1]
"김희선 하면 딱 그냥 한 단어 원탑. 그리고 거기서 하나 더 대면 유행. 모든 유행을 다 시켰어." - 강호동[1]
하이틴 스타 시절 |
1992년 혜성여자고등학교 재학 당시에 '고운 얼굴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김희선은 타고난 얼굴 덕에 처음부터 탄탄대로였다.[2] 연기 학원에 등록하러 갔더니, 연기 배우기 전에 대회부터 나가보라는 추천을 받았다.[3] 결과는 대상. 학생 잡지 '주니어'의 표지 모델로 얼굴을 비추자 곧바로 CF업계의 섭외 요청이 이어졌고, 각종 광고 모델로 출연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첫 광고는 1993년 출연한 롯데삼강(現 롯데푸드) 꽃게랑.[4]
CF '제일제당 하이칼스' 출연[5] 中 |
'SBS 인기가요' 초대 여성 MC |
같은 해인 1993년 SBS 청소년 드라마 《공룡선생》을 통해 배우로 데뷔했고, 이어 1994년 KBS 2TV 추석특집극 《춘향전》[7]에서 최초의 고교생 춘향이 되었다. 이듬해에 SBS 추리 드라마 《이(李)가사 크리스티》에 출연하여 처음으로 성인 연기를 선보였다. 1995년 학생 연기에서 성인 연기로 넘어가자 불과 19세의 나이에 단숨에 톱스타로 등극했고, 이로써 김희선 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그 첫 시작은 '김희선' 이라는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KBS 2TV 미니시리즈 《바람의 아들》이었고,[8] KBS 2TV 주말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과 연작 드라마 《컬러 시리즈 - 화이트》로 이어졌다. 김희선은 압도적인 미모에 자신만의 통통 튀는 신세대 이미지와 매력을 더해 김희선 신드롬을 일으키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국가적으로는 초대 한국-프랑스 명예친선대사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당시 장 폴 레오 주한프랑스대사는 "동서양이 혼합된 김희선의 얼굴은 거의 ‘예술’"이라며 김희선의 외모를 극찬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9]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들의 시청률은 《웨딩드레스》(32.5%), 《세상 끝까지》(33.5%), 《프로포즈》(35.6%), 《안녕 내 사랑》(35.9%), 《해바라기》(38.8%), 《미스터Q》(45.3%), 《머나먼 나라》(47.2%), 《토마토》(52.7%).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시청률 30%를 넘긴 작품이 8편이라는 점은 역대 배우 중에서도 본좌급이다.
특히 당시 주요 언론사에서 뉴스, 드라마, 가요프로, 쇼프로 등을 통합해 상위 10개의 프로그램을 주간 시청률 순위표 형태로 게재하던 것이 방송국에 큰 부담감과 경쟁심리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김희선은 죽은 시청률도 살리는 미다스의 손으로 통했다. 김희선이 K사로 가면 K사가 1위, S사로 가면 S사가 1위를 한다거나 월화드라마를 찍으면 월화드라마가 살고, 수목드라마를 찍으면 수목드라마가 사는 식이었다. 참패를 거듭하던 kbs2에게 거의 1년 만에 월화 흥행작을 안겨준 프로포즈,(후속으로 프로포즈와 비슷한 포맷의 청춘드라마 '스타'를 방영했으나 최고 시청률 10%대로 대실패해 조기종영했다.),[10], 경쟁 드라마들은 고작 최고 시청률 10% 중반으로 종영하는 반면에[11] 시청률을 33.5%나 올린 정통멜로 세상 끝까지, sbs에 1년 만에 주간 순위표에 드는[12] 흥행작을 안겨준 미스터Q가 대표적이다. 또한 mbc 수목드라마 해바라기가 38.8%로 의학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반면 그 후속작들은[13] 연이어 극심한 시청률 부진을 겪었는데, 그다음 김희선의 후속작 안녕 내 사랑은 전작 버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기어이 30%를 넘겼다.
- 김희선이라는 슈퍼스타를 계속 주인공으로 쓰는 건 드라마의 플롯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략) 물론 김희선의 ‘파괴력’을 감안한 것은 인정한다.”
[인터뷰]「토마토」연출 장기홍PD
또한 김희선은 거리를 완전히 장악한 스타였다. 협찬도 아닌 상품들이 오로지 김희선의 스타성만으로 40억 100억의 매출 신화를 달성하는가 하면, 김희선이 머리에 핀을 꽂는 모양조차 선풍을 일으켰다.[14] 협찬의 개념을 넘어 새로운 '사조'를 거의 매 작품마다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수년간 끊나지 않는 신드롬을 구가하여 이미 방송가에서는 신드롬을 넘어 '김희선 신화'라는 용어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을 제외하고 당시에 신화라는 용어를 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생략) 물론 김희선의 ‘파괴력’을 감안한 것은 인정한다.”
[인터뷰]「토마토」연출 장기홍PD
이같은 현상은 김희선 개인으로선 톱스타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과정이었으며 사회적으론 '김희선 신드롬'같은 용어까지 생길 정도로 그의 말투와 버릇, 패션 등을 모방하고자 하는 청소년들의 폭발적인 호응이 뒤따랐다.
(중략)
'김희선 신화'가 이번에도 이어질지 주목된다.
'김희선=히트' 공식 이어질까
(중략)
'김희선 신화'가 이번에도 이어질지 주목된다.
'김희선=히트' 공식 이어질까
그만큼 당시 김희선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며, 그녀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무조건 대박 취급을 받았다.《미스터Q》나 《토마토》 같은 대박 작품들은 거의 김희선의 힘으로 시청률을 끌어낸 것이며 《토마토》에선 상대역의 신인 배우 김석훈을 띄워주기도 했다. 《미스터Q》로는 1998년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까지 수상했다. 만 21세에 수상해 방송 3사 통합 문근영과 함께 최연소 대상 수상 기록인데, 2020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15]
1998년 연예인 부문별 인기순위 |
김희선은 1990년대 말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역대 대중문화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는 단기적 인기를 누린 것으로 여겨진다. 표에서 당시 대한민국 연예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받았기에 아예 논외의 존재로 규정되는 김국진을 제외하고는 김희선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한 연예인은 없다. 특히나 1990년대 가요계 끝판왕 서태지와[16] 흥행보증수표라는 별명을 가지며 당시 "한국 영화는 한석규가 나오는 영화,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누어진다"는 소리까지 듣던 한석규, 방송 3사 메인드라마의 주연 배우로서 모두 흥행시키며 인기를 누리던 류시원보다도 해당 부문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차지했으며, 2위인 최진실과도 그 격차가 3배 가까이 난다는 점에서 전성기의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표를 보면 영화 분야에서 심은하의 인기 점유율도 만만치 않지만, 영화는 연속극에 비해 저명도가 한참 낮은 편이다 보니[17] 체감 인기도는 김희선에게 심은하는 물론이고 어느 영화 배우들도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사실상 그 시점에서 미녀 스타 김희선의 인기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그녀를 예뻐하던 최진실의 후계자가 된다. 미녀 배우의 위상이라는 면에서는 황신혜가 있었지만 김희선이 라이징 스타가 될 시점에 황신혜는 점점 저무는 해에 가까웠고, 무엇보다 황신혜의 필모그래피는 김희선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종합한다면 인기 배우로서의 최진실의 위상[18], 미녀로서의 황신혜의 위상을 모조리 이어받은 슈퍼 스타 여배우.
최진실을 제외하고 1990년대에 활동한 여배우들은 물론이고 1990년대 중후반에 누린 그녀의 전성기와 비견가능한 2000년대 이후의 여배우는 없다. 설날과 같은 명절에 연예인 최초로 김희선 이름 석 자로 만든 예능 프로그램이 2년 연속으로 제작 및 편성되고, 최초로 드라마 자체가 배우 개인에게 맞춤제작되는 일이 있었을 정도면 그녀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rowcolor=#FFFFFF> 한국갤럽 '건국 50년 최고 연예인' | |||||
1위 김국진 | 2위 최불암 | 3위 조용필 | 4위 김희선 | 5위 최진실 | |
6위 임창정 | 7위 안성기 | 8위 유승준 | 9위 김혜자 | 10위 이미자 H.O.T | |
{{{#!folding [ 펼치기ᆞ접기 ] |
<rowcolor=#FFFFFF> 한국갤럽 '좋아하는 여자 탤런트' | |||||
1위 김희선 | 2위 김혜자 | 3위 최진실 | 4위 채시라 | 5위 이승연 | |
6위 고두심 | 7위 김혜수 | 8위 김지수 | 9위 고소영 | 10위 강부자 | |
{{{#!folding [ 펼치기ᆞ접기 ] |
한국갤럽 설문조사에서 여자 탤런트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50년간 활동한 탤런트 영화배우 가수 개그맨 코미디언 진행자를 통합한 설문조사(건국 50년 최고 연예인)에서조차 무려 4위를 기록했다.[19] 배우 중에서는 국민 아버지라 불리는 국민배우 최불암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득표를 한 것이고, 여자연예인 중에서는 배우 가수 대선배들을 뛰어넘은 최고 득표이다. 놀라운 것은 이게 불과 22세의 나이에 이룬 성과라는 점이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가 토마토 이전이라는 사실이다.[20] 이처럼 김희선의 인기는 세대 통합적, 전국민적이었다.
당시의 유행을 선도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출연한 드라마에서 착용한 액세서리는 다음날이면 번화가나 중고등학교 근처 팬시점에 김희선 ㅇㅇㅇ 라는 식으로 등장하여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모 드라마에서 들고 다니던 요요, 소위 머리 곱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머리밴드, 머리띠, 실핀 등. 그때는 협찬문화가 활발하지 않던 시대였고, 곱창밴드와 머리띠의 경우도 본인이나 스타일리스트가 그냥 산 것이었기 때문에 협찬 마케팅도 당연히 없었다.[21] 그런데 그게 전국을 휩쓰는 기현상이 있었던 것. 곱창밴드 하나만으로 당시 매출 40억 원을 기록한 사실은 전설로 남아있으며, 문화적으로 패션을 분석하는 서적에까지 등장했다.출처 머리띠는 서울에서만 100억의 매출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김희선이 머리에 핀을 꽂는 모양까지 선풍을 불러일으켜, 일명 '김희선 X자 실핀'이 1999년 액세서리 시장에서 전 매출의 90%를 차지했다.[22] 7부, 9부 바지를 시대의 유행으로 안착시킨 것도 김희선이었다.# 브릿지 염색도 마찬가지. 특히 《토마토》 방영 당시 남성들의 로망은 흰색 스키니 진에 하얀 자전거를 탄 생머리 여성으로 이는 극중에 등장하는 김희선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근처 공원에는 이런 스타일의 여성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세기말의 한 해를 결산하는 패션계 키워드에도 '머리띠부터 바지까지 모든 패션을 유행시킨 김희선', '김희선 바지' 등이 등장했다. 유일하게 포함된 연예인의 이름이었다. 한마디로 김희선은 자신이 브랜드 그 자체였다.## 심지어 토마토 화분까지 유행시켰으니.
<rowcolor=#FFFFFF> 김희선의 얼굴을 분석한 미학 칼럼 | |
{{{#!folding [ 펼치기ᆞ접기 ] |
여기서 끝이 아니라 단지 얼굴 하나만으로도 김희선은 기록적인 스타였다. 대중들에게 미의 기준을 정립했으며, 모든 성형외과 의사들이 김희선을 설명하는 공통된 표현 또한 전형적인 미인형이라는 단어였다. 당시의 다른 여배우들은 묶음으로 기사가 나오거나 부위별 미녀를 따지는 식이었다면, 김희선은 단독으로 얼굴형부터 눈 코 입 모든 것을 나노분석하는 칼럼이 나오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그렇게 얼굴을 나노분석 당한 건 최초의 일이었다.[23] 칼럼의 요지는 김희선과 똑같이 될 수 없으니 개성을 살리는 재능을 발휘하라는 것이었댜.
<rowcolor=#FFFFFF> 한국방송광고공사 '소비자' 조사 광고모델로 가장 적합한 인물 | |||||
1위 박찬호 | 2위 김대중 | 3위 김희선 | 4위 박세리 | 5위 최진실 | 6위 유승준 |
7위 최불암 | 8위 김혜자 | 9위 H.O.T | 10위 채시라 | 11위 김혜수 | |
# |
<rowcolor=#FFFFFF> 한국방송광고공사 '광고주' 실태조사 선호하는 여자 광고모델 | |||||
1위 김희선 | 2위 최진실 | 3위 김혜자 | 4위 채시라 | 5위 고소영 | |
6위 최지우 | 7위 고두심 | 8위 김현주 | 9위 김혜수 | 10위 이영애 | |
{{{#!folding [ 펼치기ᆞ접기 ] |
대중성과 스타성을 가진 최고 미녀배우로서 광고에서도 특급 대우를 받으며 활약했다. 삼성전자, LG전자, KT 등의 대기업 광고를 비롯해 굵직한 모든 광고를 휩쓸었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실시한 광고주 실태조사에서 광고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자CF모델 1위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전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연예인, 스포츠인, 정치인 통합 선호도 조사에서 3위를 차지해 연예인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그녀보다 높은 순위를 기록한 인물은 단 2명, 외환 위기 시절 스포츠 스타를 넘어 국민적 영웅이라 불리운 박찬호와 대통령. 당시 각종 설문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던 또 한 명의 국민적 영웅 박세리보다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은 김희선에 대한 국민적 호감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희선은 훗날 결혼 공백기 때도 CF가 끊인 적은 없다.
중국에서 국빈 대접을 받은 김희선 |
3. 2000년대
수많은 최초와 최고의 기록을 가진 김희선은 2000년대에도 기념비적인 자취를 남기는데, 한류라는 유행어가 가장 광범위하게 확산하게 된 계기로서 KCI등재 논문에 기록된 사실이 그것이다. 김희선은 2001년 6월 중화권에서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아주주간》의 표지모델[24]이 되었다. 김희선을 '표지모델'로 한 해당 주간지는 무려 8페이지에 걸쳐 김희선의 단독 인터뷰와 함께 한류 현상을 소개했는데, 학계에 따르면 이것이 '한류'라는 유행어가 가장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다.[25][26]'한류'라는 유행어가 중화권 지역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된 계기는 중화권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홍콩 중문 주간지 '아주주간(亞洲周刊)'이 2001년 6월 24일에 배우 김희선을 표지 모델로 하여 '文化驚艶,兩岸三地,韓流滾滾'라는 주제로 특집을 발간한 데 있었다고 보인다.
한홍석, '한류' 현상으로 본 중국에서의 한국 대중문화 수용[27]
한홍석, '한류' 현상으로 본 중국에서의 한국 대중문화 수용[27]
2000년대 초반 김희선은 큰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00년부터 약 2년간 사진작가 조세현과 관련된 누드집 고소 파문을 겪은 것이다. [28] 김희선과 조세현 사이의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 판명났지만[29], 당시에 이 사건으로 인해 김희선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2001년 순정만화 같은 멜로 영화 《와니와 준하》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자되는 작품으로 한국 영화계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감성을 확인할 수 있는 명작으로 꼽힌다. 김희선은 이 작품에서 평단의 상당한 호평을 이끌어냈고, 2000년에 이어 2년 연속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김희선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희선의 위상은 국내뿐 아니라 한류스타로서도 압도적이었는데, 이같은 사실은 2001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출간한 「중국영화산업백서. 1」에서도 논의되었다. 해당 서적에는 '《아주주간》의 표지모델' 관련 내용[30]을 비롯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원하는 한국영화는 '한마디로 김희선 같은 스타가 나오는 상업성 있는 영화'이다[31], 중국인들은 《비천무》를 '남한 최고의 미녀 김희선 출연'이라는 내용으로 홍보하였다[32], 중국에서 《비천무》는 '김희선의 높은 인지도'로 인해 화제가 되었다[33] 등. 이처럼 자신의 이름값 하나만으로 영화를 수출시킬 정도로 김희선은 독보적인 위상을 떨쳤다. 《비천무》는 국내에서도 전국 2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그해 관객순위 2위를 기록했다.[34]
김희선의 중화권 인기는 객관적 수치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2004년 한류관광의 해를 맞이해 한국관광공사가 실시한 한류관광실태조사[35]를 보면 김희선이 압도적인 1위를 점하고 있다.
- 그렇다면 현재 중국시장에서 원하는 한국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중국전영집단 산하 영화수출입공사에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담당하고 있는 쾅샤오린은 한 마디로 “김희선, 장동건 같은 스타가 나오는 상업성 있는 영화”라고 정의한다.
- 상해동방영시배급공사의 리창용 사장은 <비천무>의 경우 ‘남한 최고의 미녀 김희선 출연’, ‘한국 최고의 인기만화 각색’이라고 선전해서 역시 괜찮은 흥행성적을 기록한 바 있다고 밝혔다.
- 2001년 6월말 경에 나온 홍콩의 《아주주간》-중국어권에서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뉴스주간지-의 표지모델은 한국의 인기스타 김희선이다. 또 무려 8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하여 김희선과 장동건의 단독 인터뷰를 싣고, 한류라는 문화현상에 대해 전반적인 소개를 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중국영화산업백서. 1」(2001)
- 상해동방영시배급공사의 리창용 사장은 <비천무>의 경우 ‘남한 최고의 미녀 김희선 출연’, ‘한국 최고의 인기만화 각색’이라고 선전해서 역시 괜찮은 흥행성적을 기록한 바 있다고 밝혔다.
- 2001년 6월말 경에 나온 홍콩의 《아주주간》-중국어권에서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뉴스주간지-의 표지모델은 한국의 인기스타 김희선이다. 또 무려 8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하여 김희선과 장동건의 단독 인터뷰를 싣고, 한류라는 문화현상에 대해 전반적인 소개를 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중국영화산업백서. 1」(2001)
한국관광공사 한류실태조사 결과[36] |
2003년 브라운관에 4년만에 컴백한 김희선은 당대 최고 톱스타답게 또 한번 출연료 1위 기록을 경신한다. 회당 1500만원 출연료의 첫 포문을 열게된 것이다.
톱스타 김희선(26)이 회당 1500만 원의 사상 최고 출연료를 받으며 오는 8월부터 방송될 SBS TV 16부작 미니시리즈에 출연한다. 지난 99년 (MBC TV) 이후 4년 만의 드라마에 복귀.
TV 컴백 작품은 일본의 인기 TV 드라마 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제목은 아직 미정이다.
지금까지 드라마 회당 출연료 최고액은 SBS TV 에서 전도연이 받은 회당 800만 원으로, 김희선은 그 두 배 이상인 초특급 대우를 보장 받았다. (중략) 구본근 SBS 드라마 책임프로듀서는 24일 “김희선이 최근 SBS와 출연계약을 맺었다. 출연료는 사상 최고액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희선 회당 1,500만원 `최고`
TV 컴백 작품은 일본의 인기 TV 드라마 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제목은 아직 미정이다.
지금까지 드라마 회당 출연료 최고액은 SBS TV 에서 전도연이 받은 회당 800만 원으로, 김희선은 그 두 배 이상인 초특급 대우를 보장 받았다. (중략) 구본근 SBS 드라마 책임프로듀서는 24일 “김희선이 최근 SBS와 출연계약을 맺었다. 출연료는 사상 최고액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희선 회당 1,500만원 `최고`
2003년 선보인 《요조숙녀》가 그해 SBS 미니시리즈 중에서 2위 (1위는 올인이다.)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방을 했으나, 원작인 일본 드라마 《야마토 나데시코》의 주연 배우 마츠시마 나나코의 명연기와 비교되는 발연기로 혹평을 받았으며, 원작에 못 미치는 허술한 스토리 때문에 실패작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어서 김희선이 거절한 작품들이 대박을 치는 반면에 실제 선택한 《슬픈 연가》, 《스마일 어게인》 등의 성적은 저조해 이전과 같은 파급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한편 2005년《슬픈연가》는 드라마 전체가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구성으로 매니아층을 형성했으며, 국제적으로는 일본의 후지 TV 초청으로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일본의 국민스타 초난강으로부터 "만약 드라마를 만들게 된다면 주인공으로 출연 섭외를 하고 싶다. 연인이 되어 달라."는 이색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초난강, 김희선에 ‘연인사이’ 깜짝 러브콜
김희선이 거절한 작품들이 대박이 나면서 작품을 보는 눈이 없다고 조롱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김희선 정도 위치의 배우라면 못해도 어지간한 미니시리즈 섭외 요청은 다 들어온다. 그리고 원래 캐스팅이란 것이 A급 배우에게 먼저 요청이 가다가 불발되면 그 다음 급 되는 배우들에게 가는 식으로 이어진다. 김희선은 한 시대를 평정한 스타였는데, 1순위로 작품 섭외가 안 들어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게다가 김희선이 거절한 이유들을 보면 대부분 시기상 안 맞거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발된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작품 보는 눈이 없다고 무작정 까기에는 무리가 있다.
"승아 역의 경우, 김희선씨에게도 제안이 들어갔는데 결혼 생활 때문에 당분간 연기활동을 안하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이범수 토크(4)
이범수 토크(4)
2005년 성룡과 함께 한 영화《신화-진시황릉의 비밀》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중국 역대 최고의 오프닝 흥행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근래 10년 동안 성룡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터라 중화권 거의 모든 언론들이 영화의 흥행 성공 요인으로 김희선을 뽑기까지 했다.#
해외 활동과 국내에서 다양한 작품을 병행하려 시도했었는데 여자 배우치고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면서 CF를 찍는 것 외에는 6년이라는 긴 휴식기에 들어간다. 2007년 10월 김희선은 31세의 나이에 다소 일찍 결혼식을 올리며 유부녀 대열에 합류했다.[37] 2009년 1월 20일 딸을[38] 출산하면서 육아에 전념하게 됐고 자연스레 오랜 공백기가 생겼다.
4. 2010년대
김희선은 6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복귀작으로 SBS 드라마 《신의》를 선택했고, 2012년 8월에 첫방송되었다. 이전의 《슬픈 연가》의 캐릭터와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이고, 오랜만의 컴백작이라 기대를 모았으나 성적은 좋지 않았다. 10% 정도의 시청률로 나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오랜만의 컴백치고는 저조한 성적이었다.드라마가 종영된 이후, SBS 힐링캠프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토크쇼 나들이에 나섰고, 이듬해 강심장 후속으로 편성된 화신 - 마음을 지배하는 자의 MC로 발탁됐다. 과거 버라이어티쇼 진행 경력이 있어서인지 순조롭게 적응 중이었으나, 시청률이 갈수록 좋지 못하자 김구라와 봉태규까지 투입하며 메인 MC에 변화를 주고 한국 역대 예능 토크쇼 사상 최초의 생방 토크쇼를 선보이는 등 실험을 해보기도 했지만 끝내 3~4%대의 시청률로 종영했다.
KBS 2TV 드라마 《참 좋은 시절》으로 무려 16년여만에[39] 주말드라마에 출연했다. 이번 작품은 2014년 2월부터 그해 8월까지 방영되었고, 상대역은 꽃보다 할배로 한층 주가를 올리던 이서진으로, 거기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습니다》등의 히트 작품을 쓴 이경희 작가까지 투입되면서 상당한 상당한 기대를 받았지만, KBS 주말드라마 불패신화를 깨버린 데다 경쟁사 MBC 개막장 드라마 왔다 장보리에 시청률이 밀려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최고 시청률은 초반의 30.9%, 평균 시청률은 24%대를 기록하며 주말 드라마치고는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했다. 하지만 김희선의 연기는 꽤나 호평을 받았고, 이 작품으로 2014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에서 최우수 연기자상을 수상했다.
2015년 MBC 드라마 《앵그리맘》로 곧바로 차기작품을 선택한 김희선은 일진 출신의 억척스러운 엄마 조강자 역을 연기했다. 딸로 출연한 김유정과는 실제 23살 차이로, 김희선의 첫 엄마 역할이었다. 드라마 전반을 뛰어다니며 모성과 액션을 소화했다. 비록 시청률은 낮았지만 '역시 김희선'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연기력도 한층 좋아졌다는 반응도 많이 얻었는데, 드라마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연기 칭찬만 들었던 드라마는 처음이라며 김희선 본인도 무척 만족해 했다.
연기는 배우가 한 인물의 성격, 행동 등을 표현하는 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배우 자신이 그 배역과 겹칠 때 뜻하지 않게 정확해진다. (중략) 김희선 만큼 ‘여신’ 이후의 삶을 잘 아는 사람은 없지만, ‘여신’이 아닌 위치에 서려고 하지도 않았던 배우. 정확히 <품위 있는 그녀>의 우아진이 바람난 남편과 그의 정부와 공방전을 벌일 때조차도 지혜롭고 아름다웠던 이유다.
GQ Korea '올해의 연기: 김희선' #
GQ Korea '올해의 연기: 김희선' #
동시대의 인기 스타들이 작품 출연에 몸을 사리거나 CF로만 모습을 비추는 것에 비해 꾸준히 여러 드라마에 도전하고 있다. 본인 스스로가 연기에 대한 욕심이 있고 열심히 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20대 초반 이미지로 먹고 살았던 시기는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지금까지도 드라마의 제목이 곧 김희선인 타이틀롤 배우로[40] 활약할 수 있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스타성과 본인의 연기력 덕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화면 장악력이라는 거대한 재능에 더해 차근차근 쌓아온 연기력 덕분이다. 2018년 현재 연기로 김희선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연차가 쌓이며 완성형 배우로 성장한 케이스이다.
5. 2020년대
2020년 SBS 편성, 웨이브 오리지널로 기획된 앨리스에서 1인 2역을 맡아 호연했다. 실험적인 SF장르임에도 초반에는 웰메이드로서 굉장한 반응을 이끌었고, 4주 연속 미니시리즈 통합 1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개가 기괴해졌지만, 마지막회까지 동시간대 1위 시청률은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20, 30, 40대를 모두 오가는 독특한 역할이라는 점에서, '미모에 쏠리는 관심을 오히려 연기에 이용하는 영리한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2023년에는 달짝지근해: 7510로 12년만에[41] 스크린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남주인공 역할의 유해진과 케미도 잘 어울렸고 작품성도 좋은 평을 받으면서 무난하게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1] 2019.12.10 김영철의 파워FM 출연 中 김석훈, 섬총사 시즌1 출연 中 강호동. 보통 방송에서 어떤 연예인에 대해 언급할 때는 다른 연예인들과의 비교를 의식하여 최고 등의 식상한 표현에 그친다. '단 한 명'을 의미하는 '원탑'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건 끝판왕이라고 보면 된다.[2] 이하 출처는 TV조선 대찬인생 107회 연예계 비하인드 스토리[3] 이미 예선이 끝나고 본선이 들어간 대회에 김희선을 바로 넣어줬다.[4] 빙그레의 스낵 제품과는 다른 꽃게 모양의 모나카형 아이스크림이다. 신해철의 밴드 N.EX.T와 동반 출연해 데뷔곡 '도시인'이 BGM으로 삽입되었다.[5] 1993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 때다.[6] 지금도 배철수는 이 순간을 "내가 김희선을 데뷔시켰었다"고 회고한다. 실제로 유해진, 김희선이 게스트로 나왔던 2023년 8월 14일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그런 언급이 나온다.[7] 이 드라마를 연출한 최상식PD가 "당차고 자신만만한 모습이 고전적 춘향이와는 정반대인 성격으로 보여서 캐스팅했다"라며 "앞으로 김희선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예언했었다.[8] 하루 팬레터가 200여통이 왔다고 했다.[9] 종영 기준[10] 96년 8월 27일 종영한 '신고합니다' 이후 프로포즈(97년 6월 9일부터 방영 시작)가 첫 흥행작이었다. 이러한 흥행에 힘입어 10부작에서 14부작으로 연장 방영했다.##[11] sbs 바람의 노래, kbs2 거짓말[12] sbs드라마로서는 97년 6월 29일 종영한 '꿈의 궁전' 이후 1년 만이었다. #[13]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는 10%대를 맴돌았고, '눈물이 보일까봐' 역시 최고시청률이 20% 정도에 그쳤다.[14] 실핀을 X자 모양으로 꽂는 방식, 1999년 액세서리 시장에서 전 매출의 90%를 차지했다. 곱창밴드 40억 전설. 머리띠는 서울에서만 1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7부, 9부 바지를 시대의 유행으로 안착시킨 것도 김희선이었다.# 브릿지 염색도 마찬가지.[15] 물론 연기 폭이 좁다는 것, 미모에 기댄다는 것, 연기 능력 외의 버프 덕에 수상한다는 말도 나오긴 했다.[16] 물론 조사 당시 서태지는 공식 은퇴한지 2년여정도가 지난 상태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17] 한국 영화는 1970년대부터 수상기의 보급으로 연속극에 점차적으로 영상매체로서의 지분을 상실해 왔다. 급기야 1980년대에는 에로영화 범람으로 인한 질적 하락으로 연속극은 물론 할리우드, 홍콩 영화와 비교하여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고, 이러한 상태는 199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다. 물론 1990년대에는 영화계의 내적인 노력으로 일부 질적 발전을 이루었으나 구매력 자체도 지금보다 한참 낮았으므로 영화관람 연인원도 확실히 떨어졌고 따라서 인기에서는 여전히 연속극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단관 개봉에 영화 인구 자체가 적어 천만은 커녕, 서울 기준 50만명이면 대박이란 소리 듣던 시절이다.) 영화가 드라마를 대중의 인식에서 능가하기 시작한건 1999년에 개봉한 영화 쉬리의 흥행 이후이다.[18] 최진실은 당시에 국민 배우였지만 미녀 버프를 받지는 못했다. 다만 당시의 김희선과 달리 연기력 논란은 적었다.[19] 한국갤럽에서 진행한 처음이자 마지막 연예인 통합 설문이다(건국 50주년을 맞이해 진행). "○○님께서는 해방 이후 지난 50년간 활동한 우리나라 모든 연예인 중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라고 질문하였다.[20] 98년 설문. 아쉽게도 99년에는 갤럽 설문조사가 없었다(94년, 98년에만 조사함).[21] 김희선에게 어울리는 것을 골라 스타일링했을 뿐인데 날개 돋힌 듯 팔린다고 해 놀랐다 이후에는 패션가에 가면 자신의 제품을 써 달라고 말들을 하더라(스타일리스트). 제가 길거리에서 산 머리띠가 유행돼 그 상인이 돈을 많이 벌었대요(김희선).[22] 이지현, 정은숙 "국내 패션 스타일에 반영된 TV 드라마 의상 분석에 관한 연구"[23] 이 글을 쓴 성형외과 원장은 당시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있던 사람이다.[24] 중화권 최대 규모 주간지의 표지모델이 된 것은 김희선의 중화권 입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25] 한홍석 "'한류' 현상으로 본 중국에서의 한국 대중문화 수용", 장수현 저「중국은 왜 한류를 수용하나」[26] '한류'는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 자체적으로 만든 단어이며, 한류라는 '단어'가 크게 유행한 사실과 한류라는 '현상'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27] 국제지역연구 제9권 1호 2005. 2. pp. 1~21[28] 자세하게 설명된 포스팅. 참고로 인터넷 상에 떠돌고 있는 김희선 누드라고 하는 사진은 일본 배우 칸노 미호의 사진이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조세현 측이 위조한 계약서를 통해 누드라는 사실을 숨긴 채 김희선의 엄마와 계약했고, 나중에 이를 알게 된 김희선이 조세현을 형사고소한 것.[29] 본래 두 사람은 중앙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김희선은 '진희경, 박영선, 이영애'와 함깨 조세현 작가의 뮤즈였다.[30] p.297[31] p.116[32] p.115[33] p.289[34] 1999년 자귀모 역시 그해 서울관객 42만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당시 기준으로는 성공한 관객수이다. 그해 관객수 7위 기록.)[35] 중화권 거주민 2,004명 대상[36] 위는 중화권 거주민 2,004명 대상. 아래는 한국방문 희망 주목적에 대해 '인기스타 동행관광'이라고 답한 261명 대상. #[37] 배우자는 사업가로 알려진 일반인 박주영.[38] 딸의 이름은 연아.[39] 1997년작 《웨딩드레스》 이후 첫 주말드라마 출연이다.[40] 앵그리맘, 품위있는 그녀 등 김희선의 작품 다수가 제목이 곧 김희선의 배역을 뜻한다.[41] 국내 영화로는 화성으로 간 사나이 이후 장장 20년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