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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야구)/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종국(야구)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프로 경력
3.1. 해태-KIA 타이거즈
3.1.1. 2006 시즌3.1.2. 2007 시즌3.1.3. 2008 시즌3.1.4. 2009 시즌3.1.5. 2010년 은퇴
4. 국가대표 경력5. 총평6. 연도별 성적

[clearfix]

1. 개요

김종국(야구)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광주일고고려대를 졸업하고 1996년에 입단했다.[1][2] 입단 동기인 장성호가 1억원을 받고 입단한 것과 달리 입단 당시 2억 3000만원이라는 해태 역대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3]

그리고 영원히 평가절하되는 이유가 고교 동기이자 아마시절 라이벌이었던 박재홍이 프로 데뷔 첫 해부터 30-30 클럽 가입을 하는 등 프로 무대에서 대활약한 점도 있다. 야구선수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덩치이지만 호타준족이고 야구센스가 뛰어나다는 점이 이종범과 흡사했으며 또한 3년 선배인 이종범의 대히트로 인해 그만큼 해태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4] 하지만 프로 초년 시절 그는 같은 해 입단한 현대 박진만과 더불어 프로 최악의 물방망이로 전락하고 만다.[5]

3. 프로 경력

3.1. 해태-KIA 타이거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2루수 부문 수상자 (2002)

학창 시절에는 유격수가 주 포지션이었으나, 입단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유격수는 전성기의 이종범이었기 때문에 2루를 맡게 되었다. 어쨌든 한대화의 LG 이적에 이은 홍현우의 3루 이동으로 한참 동안 비어있다시피했던 2루수 자리를 지키며 2년 연속(1996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는 언제까지나 수비나 주루[6]에 한정된 것이고 공격은 답답할 정도로 약했다.[7] 100타수에서 21안타 치는 선수가 2년간 전 경기 출전했으며 그렇다고 한 해에 딱 홈런 10개 치는 수준으로 이건 잠실구장도 아니고 당시 홈런치기 만만한 광주에서 친 것이었다. 더불어 원정홈런의 대부분은 비슷하게 만만한 오히려 좌-우측은 더 짧았던 대구에서 친 것,[8] 전체적으로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96년은 그렇다치더라도[9] 타고투저의 흐름이 시작된 97년에 성적이 더 떨어져 버렸으니[10] 그에 대한 실망은 30-30까지 기록하며 잘 나가던 박재홍과의 비교까지 되었기에 보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비에서는 제2의 이종범이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첫 시즌 초반에만 잠시 고전했을 뿐 순식간에 2루에 적응해 들어가며 뛰어난 수비를 펼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1] 그 덕에 96-97년의 타이거즈의 내야는 당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였던 최해식과 함께 리그에서도 손 꼽히는 뛰어난 센터라인을 자랑했다.[12]

1998년에 이종범이 일본으로 가면서 공백이 생긴 유격수 자리를 차지했지만 시즌 도중에 부상을 당하며 99년 시즌도 제대로 출장하지 못한다.[13] 2000년에 간신히 재활에 성공하며 80여 경기 동안 타율 .259 15도루[14]를 기록하며 주전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2001년 이후 김종국에 비해 공격력이 뛰어난 홍세완이 유격수를 맡게 되면서 완전히 2루수로 고정되었다. 사실 주 포지션이 유격수이다 보니 유격수 수비는 당연히 가능하지만 큰 부상 이후 어깨가 많이 약해졌던 탓에 캐치를 잘 해놓고 내야안타를 만드는 상황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홍세완의 잦은 부상으로 인해 2009년 초반까지 계속해서 2루수 뿐만 아니라 유격수로도 활약한다. 2007년에는 홍세완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2루를 맡던 손지환과 키스톤 콤비를 이루며 유격수를 주 포지션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게 20세기에 봤던 김종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타격 실력이 향상되었다.[15] 2001~2004 김종국의 성적은 492G 500안타 28홈런 141도루 170타점 291득점 .271/.347/.371 wRC+ 91.7 WAR* 11.26[16]으로 90년대보다 확연히 나아진 편. 특히나 2001~2002 시즌에는 2년 연속 규정타석을 채우면서 2할8푼의 타율을 기록해 해태의 마지막 1번타자가 될 수 있었고, 2002년에는 커리어하이를 기록, 타율 0.287, 도루 50개를 기록하며 2루수 골든글러브를 받았고 정수근, 전준호 등을 제치고 도루왕 타이틀을 얻기까지 했다.[17]

김종국의 최전성기였던 2001년~2004년까지의 김종국의 누적 도루 갯수는 141개[18]로 1위이며 그 아래로 이종범(134개)[19], 정수근(131개), 전준호(126개)가 있다. 2005년으로 넓혀도 이종범 다음인 2위(정수근과 타이)일 정도로 주력이 우수했고 성공률도 우수해서 당시 타이거즈의 득점 루트의 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특유의 수비력도 여전해서 총 133경기에 출장했음에도 실책은 단 9개에 불과할 정도로 뛰어난 수비력을 보였다. 그러나 03년부터 2할 5푼대로 다시 타율이 하락하기 시작했고[20], 2004년에 무려 9년 만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01, 02만큼은 아니라도 나름대로 반등했으나 04년을 끝으로 김종국의 방망이는 07년을 빼면 부진했으며 이때부터 수비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김종국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21]

타격 능력은 분명 동시대 유명한 2루수들인 박정태, 박종호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완벽한 수비력으로 국가대항전에 자주 선발되었고[22], 신기하게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타격까지 좋아져서 김종국의 국가대표 선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23] 이름값 있는 2루수들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선수생활을 보냈다.

3.1.1. 2006 시즌

후술할 WBC에서의 부상으로 리그에서는 5월 말이 되어서야 복귀했고, 시즌 내내 공격면에서는 더 부진하다가 결국 신인 시절 이후 오랜만에 타율 .226을 기록해버렸다. 2006시즌이 투고타저의 리그였다고는 하지만 FA를 앞두고 부진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래도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고, KIA와 협상이 몇 차례 결렬되면서 팀을 떠나게 될 위기에 처했으나, 우선 협상 마지막 날 구단 제시액을 수용하면서 2년 총 5억 5000만원에 잔류하였다.

3.1.2. 2007 시즌

2007시즌은 절망적인 팀 상황 속에서도 분전하는 와중에 2루수 못지 않게 유격수로도 출장 비중이 늘었었고, 그럼에도 작년보다 훨씬 나아진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스탯티즈에서 제공하는 WAR도 2.09에 wRC+도 96.0을 기록하는 등 황혼기를 바라보는 선수치고는 팀 내에서 여전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김종국의 마지막 전성기(엄밀히 따지면 회광반조)였다.

3.1.3. 2008 시즌

2008시즌에는 타격이 다시 추락했지만 그 대신 수비실력이 정점을 찍었는데, 113경기 785이닝 동안 실책이 단 2개[24], .996의 수비율을 기록하며 당시 3루와 유격을 오가던 이현곤[25]이 함께 키스톤으로 출장할 때면 수비력으로는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키스톤을 구성했다. 그 해 최고의 2루수로 평가받던 고영민이 넓은 수비범위와 화려한 수비를 보여주면서도 고작 8개의 에러를 기록하며 2익수, 고제트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시즌종료 후 기록을 통해 역시 2루 수비만큼은 김종국이 여전히 리그 최고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음이 드러났다. 다만, 당시김종국수비영상을 보면 빠른 발과 판단력을 통해 누구보다 먼저 이동하여 뛰어난 풋워크와 핸들링으로 어떤 타구든 깔끔하고 쉽게 처리하는 굉장히 기본에 충실한 스타일의 수비수였기 때문에 당시 중하위권이었던 팀 성적과 맞물려 정작 시즌 중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3.1.4. 2009 시즌

2009시즌은 사실상 내야백업요원이 되었지만 시즌 초에는 신인이었던 안치홍이 수비에서 불안정하자 선발로도 나서 기아 내야진에 경쟁 및 활력을 넣어주었다.# 그러나 점차 노쇠화의 영향인지 실책을 종종 하기 시작하여 유격수 출신 고졸신인 안치홍에게 주전 2루수를 넘겨주게 되었다.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야구 내적으로는 대주자나 대수비로 가끔 등장한 것 이외의 별 활약은 없었지만[26], 3차전 서재응정근우의 마찰로 일어난 벤치 클리어링 사태 때 과하게 흥분하며 맹활약하여 순식간에 검색어 3위로 떠올랐다. 또한 6차전 때의 싸인 훔치기 논란 때도 등장하여 정근우에게 삿대질하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당시 정근우는 나지완을 진정시키는 발언을 했던 것으로, 서재응이나 김종국이 고참의 지위를 이용하여 상대팀 키 플레이어인 정근우를 윽박질러 위축시키려는 졸렬한 모습은 웃음거리로 남을만 하다. 김종국은 간접적으로 기사를 통해 사후 사과를 하였으나 서재응은 하지 않았다.[27]

파일:external/9b13df547ed0c6777f5d4557b864cd1cfaf7414b8c216a89636a6545767d9bee.jpg

이 역동적인 포즈 덕분에 수많은 합성짤을 낳았다. 우사인 볼트 옆에 붙인다든가, 짜장면 배달이라거나...

우승 후 고백한 바로는 이 때 다소 오바를 한 이유가 덕아웃을 지키며 팀내 고참으로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007년 한국시리즈두산 베어스가 벤치클리어링 이후 심리전에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목도한 이후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KIA 선수들이 고참급[28]을 제외하면 전무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김종국의 오버는 심리전 최강자인 SK를 상대로 그의 말대로 팀의 선배로서 필요한 제스처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2007년 한국시리즈두산 베어스와 달리 신경전에 있어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SK를 상대로 KIA가 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엔 그의 오버질이 한 몫 했다는데 전문가들은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본인은 선배로서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참고로 정근우는 그 군기 세다는 고려대의 9년 차이나는 직속 후배.[29] 은퇴 전 기사를 통해 정중하게 사과했다. 사실 선후배 관계가 어느 학맥보다 중요한 고려대이기에 그저 우승 때문에 후배에게 졸렬한 행위를 한 것은 본인도 속이 편하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이 해태-기아를 모두 경험하고, 나름대로 고참으로써 후배들을 잘 다독이며 모범적인 선수생활을 했다고 평가받는 김종국에게 가장 큰 흑역사이긴 하다. 다만 당시에는 여기저기서 많이 까이기도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한남신의 위용" 이라는 둥, 기아 팬이나 타 팀 팬이나 대부분 하나의 추억과 이야기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3.1.5. 2010년 은퇴

파일:PYH2010091511770005400_P2.jpg
2010년 9월 15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경기에 앞서 열린 은퇴식에서 자신이 맡았던 2루를 들어 올린 모습

그리고 2010년 4월,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와 관련한 글에서는 지난 선수 생활과 한국시리즈에서의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술회되었다. 한국시리즈, 정근우에 대해서도 사과하였다. 은퇴와 더불어 팀 내 자체적으로 만든 3군에서 코치로 활동한다고 한다. 2009년 우승도 했고, 타격이 늘어날리는 없고, 최고를 자랑하던 수비력도 줄어든 게 느껴지는 상황이니 미련 없이 떠오르는 2루수 안치홍과 세대교체를 하는 느낌이었다. 은퇴식은 2010년 9월 15일이 되어서야 치렀는데, KIA 타이거즈 팬들에게 그렇게 사랑 받은 선수인 것 치고는 관중수가 너무나 적었다.[30]

은퇴식 사진

4. 국가대표 경력

아마추어때 국가대표로 많은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프로 커리어 중후반 국가대표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삿포로 아시아 선수권(올림픽 예선),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 등 프로가 참가하는 국제대회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다.

4.1.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대표팀은 결승에서 일본에게 아쉽게 패배, 준우승했다.

4.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결승전 4회말 동점 2루타를 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4.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표팀은 대만전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테네 올림픽 진출에 실패했다.

4.4.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6시즌 전 열린 제 1회 WBC에 참가했는데, 전성기를 다소 지난 시점에서의 국가대표 A팀 승선에도 이 대회에서 타율 4할을 기록했다. 다만 본선 1라운드 A조 3경기[31]본선 2라운드 1조의 첫 경기인 멕시코전까지는 주전으로 출전하였으나 멕시코전에서 2회 초 2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아드리안 곤잘레스[32]가 친 2루 방면 타구를 멋진 다이빙캐치로 땅볼 처리하다 어깨부상을 당했었다.[33] 처음에는 큰 부상이 아닌줄 알았으나 왼 어깨뼈 타박상 및 연골 손상이라는 예상보다 큰 부상인 것이 확인됐다.

5. 총평

통산 성적은 14시즌 동안 1359경기 출장, 타율 0.247, 604득점, 254 도루, 실책 112개.[34] 분명 타격성적만 보면 대학 시절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35]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단 한 번도 팀을 떠난 적이 없는 로컬 보이[36]이며, 선수 시절 내내 별다른 구설수 없이 성실했고, 시즌 전체를 말아먹어버린 부상도 종종 있었지만 시즌 전경기 출전을 무려 4차례나 했을 정도로 내구성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며,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37] 선수생활 내내 올스타에만 7차례나 선정되었을 정도로 KIA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선수 중 하나였다.[38]

6.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해태 126 428 .215 92 21 2 11 51 52 22 43 .350 .284
1997 126 371 .210 78 15 0 9 35 52 13 39 .323 .283
1998 42 125 .232 29 2 1 2 11 15 8 11 .312 .292
1999 2 3 .333 1 0 0 1 2 2 0 2 1.333 .600
2000 86 228 .259 59 11 1 2 31 26 15 24 .342 .32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KIA 101 361 .285 103 15 3
(9위)
4 25 63 21
(7위)
45 .377 .362
2002 133 527 .287 151
(5위)
26
(7위)
3
(7위)
8 53 95
(4위)
50
(1위)
64 .393 .363
2003 125 464 .250 116 23 1 6 46 67 31
(3위)
57 .343 .330
2004 133 491 .265 130 20 1 10 46 66 39
(4위)
51 .371 .333
2005 117 374 .235 88 15 3
(5위)
4 40 39 11 40 .324 .305
2006 111 323 .226 73 17 1 1 26 35 16 28 .294 .286
2007 93 288 .240 69 13 0 6 28 47 13 46 .347 .342
2008 113 300 .233 70 16 3 1 26 33 13 35 .317 .313
2009 51 108 .250 27 4 0 1 9 12 2 10 .315 .308
2010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14시즌)
1359 4391 .247 1086 198 19 66 429 604 254 495 .346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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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재홍과는 서림초-무등중-광주일고을 같이 다녔다. 동갑임에도 박재홍이 1년 학교를 먼저 들어가서 김종국이 후배였으나 박재홍이 중학교 시절 유급하면서 학년이 같아졌다. 광주일고 시절에는 3번, 4번 타순을 함께 담당했지만 고교 졸업 당시 평가는 박재홍이 다소 앞섰다고 한다. 그래서 1992년 신인 드래프트 때도 김종국이 아닌 박재홍이 해태의 1차 지명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박재홍과 김종국 간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고교 졸업 후 박재홍은 연세대로, 김종국은 고려대로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김종국은 광주에서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선수로 남은 반면, 해태의 지명을 거부한 박재홍은 현대와 SK 등 인천 연고 구단에서 대부분의 프로 생활을 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광주에서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편이다. 당연히 김종국에 대한 호평이 강하다.[2] 고려대 92학번 동기로는 조성민, 김지훈(이상 신일고), 홍원기, 손혁(이상 공주고), 유진호(중앙고), 그리고 2016년 10월까지 광주일고 감독을 맡았던 고교동기 김선섭이 있다. 동기생이 7명이어서 칠갑산회라는 동기회를 유지하고 있다.[3] 당시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해태가 2억 3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줘가면서 입단시킨 건 현대 피닉스 스카우트 파동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신인 몸값이 높아진 것도 있었지만 그만큼 김종국에 대한 기대가 꽤 컸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진우는 기아 인수를 노리고 계약한 것이니 번외로 친다. 김진우를 제외한 해태 투수 중 최고 계약금을 받은 선수는 김종국 다음 해에 입단하게 되는 좌완투수 오철민이며, 김종국과 똑같은 액수인 2억 3000만원에 입단했다.[4] 대학 리그를 평정했으며 입단 당시만 해도 해태에서는 이종범이 또 한 명 들어왔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5] 공교롭게도 1996년에 입단한 점과 데뷔 초부터 타격 능력에 비해 수비에서는 리그 정상급이라 꾸준히 주전으로 출장한 점, 둘 다 2000년대 이후 타격 실력이 급성장하며 각 포지션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6년 제 1회 WBC 대회에서 김종국과 박진만이 대표팀의 키스톤 콤비를 맞췄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일취월장했다고 할 만하다. 2023년부터는 각각 KIA와 삼성의 감독으로 서로 맞대결하게 되었다.[6] 1996년 22도루 11위, 1997년 13도루 21위[7] 당시에는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이적해 온 송인호가 잠시 2루를 맡았으나 수비는 물론 공격력도 김종국에 비해 나을게 없었다.[8] 당시 광주 98-114-98, 대구 95-117-95[9] 1996년 김종국의 성적은 126G 92안타 11홈런 22도루 51타점 52득점 .215/.284/.350 wRC+ 81.7 WAR* 1.99인데 이게 2루수 WAR* 4위다. 투고타저인 것도 있고 박정태, 김인호, 이명수를 빼면 2루수들의 타격이 다 거기서 거기였던 탓이 크다(...).[10] 1997년 김종국의 성적은 126G 78안타 9홈런 13도루 35타점 52득점 .210/.283/.323 wRC+ 61.9 WAR* 0.48로 처참한 수준이다. 투고타저여도 욕 먹을 성적인데 타고투저에 이런 성적을 내버리며 2루수 최하위권 성적을 기록했다.[11] 96년에 자신의 한 시즌 최다 실책인 17개를 기록했으나, 이듬해 실책을 한 자릿수로 줄여버리는 놀라운 수비실력을 보여주었다.[12] 중견수에는 공격력은 노쇠했으나 수비와 주루만큼은 건재했던 이순철과 그 이순철을 밀어버릴정도로 적절한 공격력과 견고한 수비를 자랑하는 김창희가 있었다. 타이거즈 역대로 따져도 센터라인은 최고였던 시기였다.[13] 그 이후 해태의 유격수자리는 박계원, 김호, 정성훈, 홍세완이 경합을 벌인 춘추전국시대였으며, 그들의 공통점은 그래도 김종국보다 타격은 좋았다 였고, 또한 김종국보다 수비가 떨어진다. 역시 공통된 의견이었다.[14] 양준혁, 강석천과 동률로 시즌 11위였다.[15]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기를 김성한이 타격 코치 시절 김종국의 타격이 너무 부진해 결국 자신의 오리궁뎅이 타법을 김종국에게만 전수했고 타율 반등에 성공했다고 한다.[16] 2루수 중 안경현에 이은 2위다.[17] 더구나 이 성적은 2010년대의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좋은 성적인데, 2할 8푼대 타율에다가 출루율이 3할 6푼대를 기록하면서 테이블세터의 미덕인 출루에 있어서 본인 몫을 훌륭하게 해냈으며, 구장+포지션+시대 보정을 받는 wRC+를 봐도 109.8을 기록하며 2루수로서 평균 이상의 타격을 보여줬다. 더구나 도루를 50개씩 하면서도 실패가 단 9개로 성공률이 84.7%에 달했는데, 이는 도루왕 경쟁을 했던 정수근이나 전준호보다도 높은 성공률이었다. 도루가 많으면서도 가치가 있었다는 뜻.[18] 2001년 21도루(7위) - 2002년 50도루(1위) - 2003년 31도루(3위) - 2004년 39도루(4위)로 이종범과 함께 매년 TOP 10에 들어갔던 선수였다. 이후로도 11-16-13-13개로 두 자릿수 도루는 계속 기록했다.[19] 이종범은 2001년에 절반만 뛰었다.[20] 근데 전성기 이전에는 2000년을 빼면 0.240을 넘긴 적조차 없고 그 2000년도 출전 경기가 적은 것을 생각하면 그 떨어진 타율조차 해태 시절보단 나았다(...).[21] wRC+로 보면 김종국은 해태 시절에는 1996년 81.7, 1997년 61.9, 1998년 67.8, 2000년 76.4로 데뷔 첫해가 커리어하이였을 정도로 처참한 편이었으나, 2001년과 2002년에는 각각 94.4와 109.8로 2루수임을 생각하면 꽤 준수한 편이었고, 2003년과 2004년에는 77.4와 85.9로 부진하긴 했으나 1996년을 뺀 해태 시절보다는 우수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96.0을 기록한 2007년을 빼면 wRC+ 60~70대를 전전하며 해태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현재 KIA 박찬호가 19, 21시즌에 기록한 타격이 김종국의 전성기를 제외한 시절의 타격과 비슷하다.[22] 02년 아시안게임, 03년 아시아야구 선수권 대회, 06년 WBC 대표팀으로 3차례 선발되었다.[23] 정규시즌에 비해 국제대회에서 임팩트를 더 강하게 보이는 정대현과도 비스무리한 케이스라 볼 수 있다.[24] 심지어 그 중 한 개는 주 포지션이 아닌 유격수 자리에서 실책한 것이다.[25] 도중에 이탈한 용병 윌슨 발데스와 불안한 뜬 공 수비가 많았던 김선빈 대신 유격수로 출장할 때가 잦았으며 이현곤 본인도 체력문제로 인해 11년까지 기아의 유격수 자리는 특출나게 고정된 선수 없이 이현곤과 김선빈이 번갈아 들어가곤 했다.[26] 1차전에서는 안치홍의 대타로 나온 최경환-차일목을 대신해 2루수 대수비로, 2차전에서는 박기남의 대타로 나온 이재주를 대신해 2루수 대수비로 들어갔고, 4차전에서는 장성호의 대주자로, 5차전과 6차전에서는 나지완의 대주자로 출전했다.[27] 훗날 서재응은 2022년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 2024년 정근우와의 대담에서 정근우가 출루하면 상대 투수 입장에서 골치가 아파지기에 SK를 잡으려면 정근우의 기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비난받을 것을 감수하고 자신이 먼저 시비를 건 것을 인정했다. #[28] 이종범, 김종국, 장성호, 이대진, 이재주 이렇게 5명 밖에 없었다.[29] 김종국은 체교과 1992학번, 정근우는 체교과 2001학번.[30] 이는 당시 KIA 타이거즈 순위와 관련 있는 사항이다. 애초 조범현 감독은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면 김종국을 엔트리에 넣을 예정이었지만 16연패로 가능성이 사라지자 프런트는 8월 즈음 휴일 홈경기에 은퇴식을 계획했다. 하지만 팀이 8월에 급상승세를 타면서 4강 싸움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은퇴식은 미뤄지고 미뤄지다 4강 희망이 없어진 9월 홈경기 때 은퇴식을 치르게 된 것. 남은 홈경기 중, 휴일 경기가 없었기 때문에 평일 은퇴식이 불가피해졌다.[31] 대만, 중국, 일본전[32] 류현진과도 한솥밥을 먹은 적 있는 그 곤잘레스가 맞다.[33] 그 뒤의 경기는 김민재가 출전했다.그 덕분에 데릭 지터에게 I like you를 할 수 있었다.여담으로 김민재의 WBC 타율 기록은 2할 7푼.[34] 부상으로 날린 1999년을 빼고 계산해도 한 시즌 평균 실책이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 실책이 10개를 넘은 적은 신인 때인 96년과 말년의 04, 05, 07년이 전부다. 이나마도 04년과 07년은 정확히 10개.[35] 이게 바로 알루미늄 배트 효과라는 것이다. 알루미늄 배트 그것도 미국제 -5드롭 배트의 반발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다만 김종국의 경우에는 대학 시절 어깨를 다친 적이 있다. 투수 만큼은 아니지만 야수의 어깨부상은 타격시 비거리와 같은 부분에서 큰 영향을 끼치는지라 이 점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36] 심지어 선수 은퇴 이후 지도자 경력도 전부 기아 타이거즈이다.[37] 대학 시절 유망주였던 김종국을 돈 많은 타 팀에서 탐내기도 했지만 김종국은 돈 없는 고향팀인 해태 타이거즈를 선택했다. 2006년 FA 당시에도 다른 팀과 계약하려는 페인트 모션 하나 없이 스스로 KIA 타이거즈 프론트를 찾아가 계약했다.[38] 또한 20대 시절에는 나름 날렵하고 곱상한 외모덕에 장성호와 함께 여성팬들이 많아 이상윤-이강철에 이은 90년대 말 00년대 초의 타이거즈의 아이돌이기도 했다. 문제는 당시 형편없던 타격 때문에 김종국을 보러 왔던 여고생들이 아재들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