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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베이징 | 1994 히로시마 | 1998 방콕 | 2002 부산 | 2006 도하 | |
대만 | 일본 | 대한민국 | 대한민국 | 대만 | |
16회 | 17회 | 18회 | 19회 | 20회 | |
2010 광저우 | 2014 인천 | 2018 자카르타·팔렘방 | 2022 항저우 | 2026 아이치·나고야 | |
대한민국 | 대한민국 | 대한민국 | 대한민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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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호 1994 | 김병우호 1995 | 김충남호 1996 | 주성노호 1998 |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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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노호 2002 | 강문길호 2003 | 김정택호 2005 | 권영호호 2006 | 강문길호 2007 | |
<rowcolor=#ffffff> 2009 IBAF 야구 월드컵 | 2010 IBAF 대륙간컵 | 2011 IBAF 야구 월드컵 | 2015 아시아 야구 선수권 | 2017 아시아 야구 선수권 | |
김학용호 2009 | 김정택호 2010 | 천보성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11년| 2011 ]] | 윤영환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15년| 2015 ]] | 허세환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17년| 2019 ]] | |
<rowcolor=#ffffff> 2019 아시아 야구 선수권 | 2023 아시아 야구 선수권 | ||||
윤영환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19년| 2019 ]] | 정보명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23년| 2023 ]] | ||||
† 1998년이 분기점이 되는 이유는 KBO 리그 소속 선수 선발을 책임지는 KBO가 참여하기 시작한 대표팀이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이기 때문이다. | |||||
1998년 이후 A급 야구 대표팀 목록→ |
1. 개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야구 종목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야구는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으나, 북경 대회 당시는 대한민국, 일본, 중국, 대만 4개국만 참여했기에,[1]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 실질적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제대로 진행되는 첫 야구 대회였다.
특징으로는, 프로선수들의 참가가 금지된 상태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의 참가만 허용이 되었고,[2] 아마야구답게 알루미늄 배트를 먼저 선보임으로 시작이 되었다.
현재는 사라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홈구장인 히로시마 시민 구장, 구레시니코야 야구장, 히로시마 코카콜라 야구장 등 3개의 구장에서 경기가 펼쳐졌고, 대회 방식은 대회 참가 6개국끼리 A/B 두 조로 나누어 예선을 치르는 경기였다.
A조는 일본/중국/태국, B조는 한국/대만/몽골
2. 참가 선수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명단 | ||
감독 | 1명 | 김충남(연세대학교 감독) |
코치 | 2명 | 김병일(한국화장품 감독), 윤병선(건국대학교 감독) |
투수 | 7명 | 위재영(인하대),[3] 임선동(연세대),[4] 전병호(영남대), 문동환(연세대),[5] 조성민(고려대),[6] 차명주(한양대), 손민한(고려대) |
포수 | 3명 | 최기문(원광대), 진갑용(고려대), 권오영(상무)[7] |
내야수 | 6명 | 홍원기(고려대), 백재호(동국대), 강혁(한양대),[8] 안희봉(연세대),[9] 김종국(고려대), 김재걸(단국대) |
외야수 | 4명 | 박재홍(연세대),[10] 이병규(단국대), 이영우(건국대), 조경환(고려대)[11] |
3. 예선과 본선
예선
A조순위 | 국가 | 승 | 패 |
1위 | 일본 | 2 | 0 |
2위 | 중국 | 1 | 1 |
3위 | 태국 | 0 | 2 |
일본(1승) 25-2(5회 콜드 게임) 태국(1패) |
중국(1패) 1-10 일본(2승) |
태국(2패) 1-16(6회 콜드 게임) 중국(1승 1패) |
B조
순위 | 국가 | 승 | 패 |
1위 | 한국 | 2 | 0 |
2위 | 대만 | 1 | 1 |
3위 | 몽골 | 0 | 2 |
한국(1승) 21-0(5회 콜드 게임) 몽골(1패) |
대만(1패) 0-9 한국(2승) |
몽골(2패) 0-20(5회 콜드 게임) 대만(1승 1패) |
5위 결정전
태국 20-3 몽골(5회 콜드 게임) |
준결승
한국 14-0 중국(7회 콜드 게임) |
일본 13-3 대만(7회 콜드 게임) |
동메달 결정전
중국 4-9 대만 |
4. 결승전
팀명 | 1회 | 2회 | 3회 | 4회 | 5회 | 6회 | 7회 | 8회 | 9회 | R | H | E |
일본 | 0 | 0 | 0 | 2 | 0 | 0 | 2 | 0 | 2 | 6 | 0 | 0 |
대한민국 | 0 | 0 | 0 | 3 | 0 | 0 | 0 | 0 | 2 | 5 | 0 | 0 |
한국과 일본은 각각 조 1위 및 콜드게임으로 올라왔다. 특히 대회 2달 전인 1994년 8월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서로 1승 1패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12] 그만큼 일본 내에서는 관심이 많았으나, 국내에서는 관심이 적었다.[13] 오히려 축구와 마라톤이 눈에 띄게 많이 알려졌다.[14]
한국은 선발투수 문동환이 경기중반까지 호투하며 일본타선을 막아냈지만, 구원투수로 등판한 조성민의 난조로 아쉽게 패배한다.
경기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4회초에 먼저 2점을 허용했지만, 5회 2사 1·2루서 안희봉이 3점홈런을 터뜨려 3-2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이후 7회 무사 1루에서 상대의 희생번트를 어설프게 처리하다 안타를 만들어주면서 2사 2·3루의 위기를 맞았다. 여기서 대타 다카기 다이세이가 투수 키를 넘는 빗맞은 타구를 쳤는데, 유격수와 2루수가 타구처리를 서로 미루다가 2점을 내줘 4-3으로 재역전당했다.
그렇게 9회초에 일본은 추가 2득점을 하였고, 9회말에 한국은 추격전을 했으나 결국 주저앉고 1점차로 패배하였다.
5. 한국팀 관련
5.1. 대회 전 분위기
- 대회 2달 전인 1994년 8월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결승 일본전에서는 9대0의 승리를 거두웠기에,기사.[15] 본 대회 금메달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다.기사1.기사2. 더구나 금메달 획득시에는 병역혜택까지 걸려있었기에, 그 기대감은 배가되었다.
5.2. 대회 개막, 그리고 결승까지
- 한국과 일본과 대만은 이 대회에서 20득점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물론 상대팀이 야구라는 개념도 모르는 태국과 몽골이었다.
5.3. 결승전 패배 원인
- 대회 2달 전인 1994년 8월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까지 대표팀 터줏대감이었던 심재학(고려대),[17] 송재용(건국대)이 석연찮은 이유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논란이 되었다.기사. 특히 결승전이 1점차 패배로 끝났기에, 중심타자 심재학의 공백은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 문동환은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결승 일본전에서 완봉승을 기록한 전적이 있기에, 본 대회에서도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실제로 결승 일본전에 선발등판했지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만큼의 투구내용은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아쉬움을 남겼다. 이와 관련해서, 딱 30년이 지난 2024년 10월 문동환 본인이 직접 당시 자신의 상황을 대한 인터뷰를 했는데, 부상이 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아시안게임 참가를 강행했고, 그로 인해 좋은 투구를 펼칠 수 없었다고 한다.영상 12분 13초부터.
- 문동환의 후속투수로 등판한 조성민은 패전투수가 되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조성민은 이듬해인 1995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18] 대만전에서도 선발투수 문동환의 후속투수로 등판하지만, 동점을 허용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19]
-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김충남 연세대 감독은 이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까지 사령탑을 맡지만,[20] 가장 중요한 올림픽 본선에서 참가국 중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예선 광탈을 하게 되고, 결국 지휘봉을 내려놓는다.[21] 사실 김충남 대표팀 감독은 재임기간 도중 고려대 선수들에 대한 홀대논란이 있었다.[22] 위에 언급된 심재학(고려대) 엔트리 제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김동주(고려대) 엔트리 제외,[23] 그리고 각종 국제대회 중요경기 투수는 (연세대 소속) 문동환-임선동 위주 등등.[24]
5.4. 대회 이후
- 공식적으로 아시안게임 첫 정식종목에 채택된 야구에서 은메달을 걸고 귀국한 선수들은, 이후 프로에 데뷔를 하게 된다.[25] 사실 이때 은메달로 인해 병역혜택을 받지 못한 선수들의 군대문제는, 이런저런 형식으로 선수들의 운명을 갈라놓게 되며, 몇몇은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기도 한다.
- 박재홍, 이병규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무려 4연속으로 아시안게임을 나갔으나, 마지막이 좋지 않게 끝나서 아쉬움을 남겼다.
6. 여담
- 권오영은 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훗날 배재고 감독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한다. 한편, 본 대회 참가선수들 중, 훗날 KBO팀 1군감독에까지 오른 선수로는 홍원기,[27] 김종국 등이 있다.
[1] 금메달 대만, 은메달 한국, 동메달 일본.[2] 프로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때부터 허용된다.[3] 태평양 돌핀스 기지명.[4] LG 트윈스 기지명.[5] 롯데 자이언츠 기지명이었으나 실업야구 팀인 현대 피닉스에 입단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동환 문서 참고.[6] 훗날 일본프로야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7] 한화 이글스 기지명.[8] OB 베어스가 강혁을 기지명했는데 강혁이 한양대를 입단해서 강혁은 KBO에서 영구제명 됐다.4년 뒤 활약으로 영구제명이 풀린 후 1999년 프로에 입단했다.[9] 태평양 돌핀스 기지명.[10] 해태 타이거즈 기지명.[11] 롯데 자이언츠 기지명.[12] 예선에서는 일본 승리, 준결승에서는 한국 승리.[13] 동시기에 한국에서는 KBO 포스트시즌이 진행중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아마선수들이 출전하는 아시안게임 야구에 대한 관심도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14]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때까지는 축구의 나이제한이 없었기에 최정예멤버들이 출전했다. 또한 마라톤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황영조가 출전했다. 당연히 축구와 마라톤에 전국민적인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15] 최종순위는 쿠바에 이어 2위.[16] 고교시절의 부상 영향으로 병역이 면제된 상태였다.[17] 특히 심재학은 대학시절 국가대표 4번타자를 도맡았던 선수였다.[18]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대회.[19] 경기 자체는 한국이 연장 끝에 6대5로 승리한다(조성민에 이어 등판했던 투수는 차명주-임선동) . 그리고 이 경기 승리로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티켓도 획득하게 된다.[20]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듬해인 1995년에는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2위, 1995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위(올림픽 본선티켓 획득) 등 성과를 내기도 했다.[21]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부진에 묻혔지만, 김충남 대표팀 감독은 1994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2위, 1995년 유니버시아드 2위, 1995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위(올림픽 본선티켓 획득) 등 성과도 적지않게 있는 감독이다. 계속 2위만 기록하지 않았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1990년대 중반 세계 아마야구는 쿠바 전성기 시절로써, 세계대회에서 쿠바의 벽을 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외 미국이나 일본 등이 까다로운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22] 특히 병역혜택이 걸린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이와 같은 논란이 더욱 두드러졌다.[23] 1996년 당시 (타자 기준) 92학번의 김종국, 박재홍, 이영우, 홍원기 등이 졸업과 동시에 프로에 진출함에 따라 대표팀의 타선이 그전보다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속에서 김동주까지 대표팀에서 제외함으로써, 안 그래도 약화된 전력을 방임한 셈이었다. 참고로, 김동주를 대신해서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대표팀에 발탁된 몇몇 선수들은 대회내내 부진했고, 이로 인해 1996년 당시에도 엔트리관련 인맥 논란-나눠먹기 논란 등이 불거지기도 했다.[24] 상대적으로 (고려대 소속) 조성민과 손민한은, 주로 불펜으로 투입되거나 약팀 상대 선발투수로 투입되는 빈도가 많았다.[25] 대학졸업 후 프로에 바로 입단한 선수들도 있었고, 대학졸업 후 실업팀 현대 피닉스나 군팀 상무 야구단을 거친 다음 프로에 입단한 선수들도 있었다.[26] 프로 12명+아마추어 10명.[27] 첫번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