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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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손원일 | 제2대 박옥규 | 제3대 정긍모 | 제4대 이용운 | 제5대 이성호 | |
제6대 이맹기 | 제7대 함명수 | 제8대 김영관 | 제9대 장지수 | 제10대 김규섭 | |
제11대 황정연 | 제12대 김종곤 | 제13대 이은수 | 제14대 오경환 | 제15대 최상화 | |
제16대 김종호 | 제17대 김종호 | 제18대 김철우 | 제19대 김홍열 | 제20대 안병태 | |
제21대 유삼남 | 제22대 이수용 | 제23대 장정길 | 제24대 문정일 | 제25대 남해일 | |
제26대 송영무 | 제27대 | 제28대 김성찬 | 제29대 최윤희 | 제30대 황기철 | |
제31대 정호섭 | 제32대 엄현성 | 제33대 심승섭 | 제34대 부석종 | 제35대 김정수 | |
제36대 이종호 | 제37대 양용모 | ||||
※ 초대: 해방병단장/조선해안경비대총사령관 · 1대~2대: 해군총참모장 · 2대~현재: 해군참모총장 ※ 27대: 예비역 신분 박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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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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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제주도지사 | |||
<colbgcolor=#003399><colcolor=#ffffff> 대한민국 제8대 해군참모총장 김영관 金榮寬 | Kim Young-kwan | |||
출생 | 1925년 9월 9일 | ||
강원도 김화군 (現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김화읍)[1] | |||
사망 | 2021년 3월 21일 (향년 95세) |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504실 148호[2] | ||
본관 | 김해 김씨 | ||
재임기간 | 제12대 제주도지사 | ||
1961년 5월 24일 ~ 1963년 12월 17일 | |||
제8대 해군참모총장 | |||
1966년 9월 1일 ~ 1969년 4월 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399><colcolor=#ffffff> 배우자 | 현병화 | |
자녀 | 이들 김홍겸 딸 김인겸, 김미겸, 김혜겸, 김희겸 | ||
학력 | 도요오카 에베라 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경동교회) [3] | ||
경력 | 제12대 제주도지사 영남화학 사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주 베트남 공화국 대한민국 대사 선인학원 상임고문 선인학원 이사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통일민주당 부총재 한국외교협회 고문 학교법인 동인학원 이사 | ||
군사 경력 | |||
임관 | 해사대학 (1기) | ||
복무 | 대한민국 해군 | ||
1946년 ~ 1969년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해군) | ||
최종 보직 | 해군참모총장 | ||
주요 보직 | 해군본부 작전국 차장 해군대학 총장 진해통제사령관 해군중앙함대 사령관 | ||
참전 | 6.25 전쟁 베트남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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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해군 군인이자 외교관.대한민국 최초의 해군 대장이자 베트남 공화국 마지막 주월한국대사였다.
2. 생애
1925년에 강원도 김화군(현 철원군 김화읍)에서 태어나 1947년에 해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4]했다. 해군본부 비서실장, 제주도지사[5], 합동참모본부 군수기획국장, 진해통제부사령관, 한국함대사령관[6]을 거쳐 1966년에 해군참모총장에 올랐고, 대한민국 해군 첫 대장 진급자라는 기록을 세웠다.예편 뒤에는 외교관으로서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 공화국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특히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직전의 교민철수를 진두지휘했고, 남베트남 패망 직전에 무사 탈출했다. 그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크게 기뻐하며, 얼마나 그를 신뢰했는지 곧바로 김영관 대사를 다른 임지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잠시 후 이대용(李大鎔) 공사를 비롯한 몇몇 공관원이 탈출하지 못한 사실을 알고선 바로 취소해버렸고, 심지어 그의 귀국인사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김영관 대사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 에피소드인데, 이는 그의 잘못이기보다 철수를 약속해놓고 조급함+욕심을 부리던 일부 교민들의 탓이 크다. 오히려 당시 대사가 해군의 전직 수장이었던 덕분에 많은 교민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 그리고 이대용 공사를 비롯한 사이공에 남은 3명의 외교관들은 베트남 공산정부에 의해 투옥되어 고초를 겪은 끝에 사이공 함락으로부터 5년이 지난 1980년에 겨우 석방, 귀국했다.
2015년 12월 완공한 제주 민군복합항[7]에 '김영관 센터'로 문화센터가 설립되었다. 해군참모총장과 제주도 지사를 모두 역임하였고 제주도에 공헌한 바가 큰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한 듯. 김영관 센터에는 실내수영장, 숙소, 식당 등이 설치되어 있다. 제주지역 해군 동원 예비군은 동원 첫날 이곳에서 소집한다.
2021년 3월 21일에 향년 95세로 별세했다.
2021년 3월 25일에 영결식을 갖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되었다.
[1]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2] 현재 임시안치된 상태.[3] 1983년 12월 4일 시무장로로 임직되었고, 1995년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생전 배우자 현병화 권사와 매주 주일예배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하였다고 한다.故 김영관 장로 추모[4] 동기생은 함명수, 장지수, 이맹기, 이태영, 공정식[5] 군인 신분을 유지한채 어떻게 민간공직 자리인 도지사자리에 앉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김영관이 도지사에 역임했던 시기는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임시적으로 군이 국가를 다스리던 군정기였기 때문에 군인이 도지사직위도 역임할수있었다.[6] 현대의 해군작전사령관[7] 군 기지 내부가 아니라, 기지 입구에 설립되어 군인, 시민 모두 이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