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기 관련 틀 | ||||||||||||||||||||||||||||||||||||||||||||||||||||||||||||||||||||||||||||||||||||||||||||||||||||||||||||||||||||||||||||||||||||||||||||||||||||||||||||||||||||||||||||||||||||||||||||||||||||||||||||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 1907년 2월 18일[1] | ||
전라북도 임피군 현내면 서상리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서상마을 343번지) | |||
사망 | 1992년 11월 11일 (향년 85세) |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 |||
본관 | 광산 김씨 | ||
호 | 무돌 | ||
재임기간 | 제8대 문교부 차관 | ||
1957년 12월 3일 ~ 1960년 5월 2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 부친 - 김철중 모친 - 고대준 | |
배우자 | 김은성(사별) 이운경(재혼) | ||
자녀 | 4남 7녀 | ||
학력 | 임피공립보통학교 (전학) 군산공립보통학교 (졸업) 중앙고등보통학교 (중퇴) 중국대학 (중퇴) 센다이중학교 (중퇴) 연희전문학교 (문과 / 졸업) 런던 대학교 대학원 (문학 / 석사) 명지대학교 (문학 / 명예박사)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선영 |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은관문화훈장 추서 월남장 추서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언어학자, 교육자이다.2. 생애
1907년 2월 18일 전라북도 임피군 현내면 서상리(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서상마을 343번지)에서 아버지 김철중(金鐵中)과 어머니 고대준 사이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철중 또한 독립유공자로, 동아일보사에서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근무하던 중 1926년 3월 및 8월에 각각 항일 기사를 게재하였다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금고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바 있다.1913년 고향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14년 임피공립보통학교[2]에 입학했다. 1915년 군산공립보통학교[3]로 전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필운동[4] 108-3번지으로 이주하여 이곳에 본적지를 두었고, 같은 해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5] 1924년 12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중화민국 베이징시로 건너가 중국대학(中國大學)에 진학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귀국하여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전학하였다. 1928년 휴학한 뒤 같은 해 4월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 가고시마현 센다이시 소재 센다이중학교(川內中學校) 4학년에 편입학하였다. 그러나 또 중퇴하고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복학하여 1930년 3월 졸업하였다.
1930년 9월 함경북도 경성군 동명의숙 교사로 채용되었으나 학교 재정난으로 인하여 1930년 12월 사직하고 경성부로 돌아왔다. 1931년 1월부터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사전 편찬위원으로 근무하여 사전 편찬사업에 종사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동아일보사의 지원을 받아 제1회 조선어학회 전국 순회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서 경기도 안성군[6], 충청남도 대전부[7], 전라북도 이리부[8]에서 대중들에게 바른 철자법을 교육하였다. 이듬해인 1932년 8월에는 제2회 조선어학회 전국 순회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서 평안북도 신의주부[9],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府羅面) 운향시(運餉市), 황해도 신천군,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강연하였다. 1932년 12월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1933년 11월 8일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발표에 공헌하였다. 이어 조선어학회의 '표준말 사정' 및 '외래어 표기법 사정'의 위원으로도 참여하였다.
1934년 6월 7일부로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 소속 음성학연구소로 유학하였고, 1934년 8월 2일부터 11월 9일까지 『동아일보』에 25회에 걸쳐 유럽행 여정기인 「유구도중기(遊歐途中記)」를 연재하였으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며 일본 제국 경찰의 압력으로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935년 7월 22일부터 7월 27일까지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음성학회(IPA) 제2차 국제대회에 조선어학회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어의 조직을 과학적으로 소개하였다. 이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대학원에 입학하여 한국어 음성학을 전공하였고, 1937년 7월에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7년 10월 1일 귀국 후 1938년 3월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하였고, 1939년 3월 조교수를 거쳐 1940년 4월 교수로 승진하였다.
1942년 10월 20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검속되어 10월 21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이송되었고, 1년간 함흥형무소에서 미결수로서 옥고를 치른 뒤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다음날인 9월 19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죄 판결을 받았기에 연희전문학교에서는 강제로 해임당하였다. 이후 징용을 피해 1943년 10월 함경남도 단천군 어느 광산에서 노무주임으로 근무하였으나, 1944년 3월 결국 강제징용되어 함경북도 웅기군 감투봉에서 노역하였다.
8.15 광복 후 경성부로 귀향하였고, 1946년 3월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에 복직되었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영어영문학과 학과장 및 문과대학 학장 서리를 지냈다. 1948년 한글학회 이사에 취임하여 1970년까지 역임했다. 1950년 1월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언어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주임교수를 맡았다. 1952년 미국 코넬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파견되었고, 1956년 10월 한국언어학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10]
1957년 12월 3일부터 1960년 5월 2일까지 제8대 문교부차관을 지냈다. 이후 자유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1967년 명지대학교에 부임하여 초대 대학원장을 지냈고, 1972년 퇴임하여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5년 2월에는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상하였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1992년 11월 11일 아침 8시 30분에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