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張承守막노동꾼 출신 서울대 수석합격,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변호사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으로, 법무법인 로투스를 거쳐 법무법인 본 대표로 활동 중이다.
워낙 수험생들의 전설같은 존재로 각인된 탓인지, 그가 서울대에 합격하고 화제가 된 후 거의 30년이 지난 2020년대에도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고승덕 등과 함께 수험 공부의 신적 존재로 회자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불멸의 장승수 형님'이라거나 '장승수 센세'라며 회자된다.
2. 생애
1971년 8월 15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2남 중 첫째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왜관읍에서 상당히 부유했었다. 그의 부친이 6.25 전쟁 직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영어를 매우 잘 하게 되었고 왜관에 주둔한 주한미군들과 소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친교를 쌓으며 당시 금값에 맞먹은 건축용 원목을 공급받아 부자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친이 모았던 막대한 재산은 조부가 도박으로 다 탕진해 버려 자식의 앞길을 막았다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도시계획으로 집이 철거되면서 아버지도 술과 노름에 빠졌다.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광역시로 이사를 와서 부모님은 재기해 보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얼마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홀어머니가 그와 그의 남동생을 데리고 안 해본 장사가 없었으나 번번히 실패하면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도 했다. 자서전에서 어머니의 장사가 다 실패한 이유는 구멍가게라도 미래를 보는 안목과 살아남을 재투자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막무가내로 덥석 시작한 게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평가했다.[1]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원래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2학년 올라가면서 공부에 흥미를 잃고 매일 술담배에 싸움질에 맛이 들려 결국 일진이 되었다. 심지어 3학년 때 담임교사와 입시 상의를 했는데 담임교사는 "승수야, 지금 니 성적으로는 대학교 갈 데가 없다."라고 말을 하였고, 장승수는 "그럼 대학 안 가면 되지요!"라고 응수해 시크하게 넘어갔지만, 속으로는 자존심이 무너지는 등 제법 수모도 받았다. 그러다 동사무소 공무원이던 동네 친분 있는 형으로부터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직업훈련 과정을 소개받아 합법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기 위해 포크레인 운전을 배우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 후 포크레인 조수 일을 시작했다. 그 뒤 신문 보급소 총무, 오락실 홀맨 등을 하다가 오토바이가 타고 싶은 마음에 오토바이로 식당을 다니며 물수건을 배달하는 일을 했고, 밤마다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족 놀이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1년여 이런 생활을 하다가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가 나서 응급실로 실려왔는데 의사가 안 아프면 공간 차지하지 말고 나가라고 해서[2] 서러워서 울었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에 회의가 들어왔고 대학을 가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입시를 준비한다.
하지만 돈이 없으니 돈을 벌어가며 공부를 해야 했고, 내신이 매우 형편없었던 탓에(10등급중 5등급)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노가다, 가스 배달, 택시기사 등의 일과 재수학원을 수년간 오가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5년이 지나면서 내신이 폐기되고 수능 백분율에 따라 산출된 점수를 내신으로 반영하는 비교내신 제도가 생기면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1996학번으로 인문계 수석 합격했다.
특히 비교내신 제도는 장승수의 인생을 바꿔놓았을 정도로 '신의 한수'와 다름 없었다. 원래 90년대에는 입시제도가 자주 바뀌었고, 그래서 강남 부모들은 '국영수만 잘하면 된다'며 기본기만 쌓아놓으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풍토가 있었다. 장수생이었던 장승수 역시 입시제도가 바뀌거나 말거나 내 할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며 크게 개의치 않았었다. 하지만 매번 내신의 페널티로 인해 부담이 크고 연이어 낙방하던 장승수에게 비교내신 제도의 도입은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러번의 입시 실패로 자신감이 결여되어가고 있던 장승수는 아예 한해는 쉬어가며 건너뛰기도 했을 정도였는데 우연히 신문에서 비교내신 제도의 도입 기사를 보고 버프를 받아 한번만 더 베팅해보자는 결심이 섰고, '장승수 신화' 탄생의 숨은 주역이 되었다. 비교내신의 수혜자로서 수험생활 내내 그를 옭아맸던 내신이라는 족쇄에서 해방되자 내친 김에 아예 '1등'으로 합격해버렸다.
그 후 김영사에서 출간된 자신의 인생 수기인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가 1996년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유명인이 되었다.
운도 노력하는 자에게 따른다는 명언을 증명했다. 항상 내신의 페널티를 안고 경쟁자들보다 한수 접고 시작하는 불리한 악조건에서도 꾸준히 노력해온 장승수에게 '비교내신'이라는 천혜의 버프는 물론, 다소의 운빨까지 붙으며 '전국 1등'을 해버리는 바람에 파란을 일으키며 유명인사로 등극했다.
1996년에 나온 그의 자서전격인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는 2022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 2023년에도 절판되지 않고 여전히 판매되는 수험생계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장승수는 당시 장수생이었던지라 1990년대 초의 학력고사까지 나와있기에 현대의 수험생이 보기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판국에 특히 입시제도는 자주 바뀌는 특성이 있어 무려 27년 전의 수험서가 꾸준히 회자된다는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1995년 수험생이 1968년의 수험생활 책자를 보는 셈인데 90년대 풍족한 X세대들에게 보릿고개의 1960년대는 조선시대처럼 멀게 느껴지는 까마득한 과거였으니, 장승수는 그야말로 '수험계의 레전드'가 됐다는 말이 과언이 절대 아니다.
대학 재학 중에는 폐결핵과 늑막염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운동과 정신력으로 병을 극복하고, 2003년 제45회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운동은 주로 권투를 즐겨했다고 한다.
장승수는 체구는 작았으나 학창시절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법고시 준비 중에 동시에 아마추어 복서도 준비하며 1시간 떨어진 체육관까지 매일 직접 뛰어다니면서 왕복하는 등, 동시에 두가지를 준비한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이후 복싱 프로라이센스를 취득하는 등 복싱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딱히 법조인으로서 눈에 띄는 활동은 없었으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에서 강남구 지역 중 한 곳에 장승수를 공천하려 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분당구이니 서초구 을이니 구체적인 지역구까지 거론됐지만, 결국엔 흐지부지된 듯. 사실 전 해인 2011년에도 한나라당 영입설이 나왔지만 본인이 부인한 바 있다. 그러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새누리당에 대구광역시 북구 을 선거구 공천 신청을 하였으나 양명모에 밀려 출마하지 못했다.
2017년 7월에는 변호사 명의를 대여해준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2022년 5월 뉴스1TV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때 언급하기로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는 본인이 정한 제목은 아니라고 한다. 본인은 공부가 쉬웠던 게 아니라 공부가 즐거웠던 것 뿐이라고...
3. 애연가
담배와의 인연이 유명하다. 학창시절엔 담배란 놈이 탈선을 이끌었지만, 결국 서울대 수석합격 할 때까지 담배가 큰 도움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장승수는 학원에서 친구를 의도적으로 사귀지 않고, 홀로 말없는 섬을 이루어 공부만 했다고 한다. 대개 한창 놀 나이라 유혹이 많은게 수험생들에게는 고난인데, 장승수는 학창시절 신물이 날 정도로 놀아봤기에 욕구가 풀렸고, 오히려 공부에 대한 욕구로 들어왔기에 철저히 공부만 했다고 한다. 학원에 가기 전날, 친구들과의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본인 스스로 '최후의 만찬'으로 규정하여 '오늘까지만이다, 내일부터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내내 되뇌이며 다짐했다고 하며, 이후 그 말은 실제가 되었다. 철저히 마음을 정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후 학원에 들어왔기에 바로 올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공부하려면 동반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담배였다. 쉬는 시간에는 복도에 나가 창 밖을 보며 바람을 쐬면서 담배 한대는 '보상'으로 꼭 피웠다고 한다. 장승수가 항상 혼자 있는 모습을 보고, 안 되어 보였던지 말 걸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하나, 솔직히 귀찮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잡담을 하다보면 흥분되어 마음이 들뜬 상태가 되고, 잡담은 또다른 생각을 불러내어 다음 수업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또 자기최면처럼 공부가 가장 재밌다고 되뇌이며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했는데, 그 나이대 친구들이 하는 잡담이라곤 어디 놀러가고 싶다거나 여자 얘기 등등 마음에 불을 지르는 얘기 뿐인지라 그런 얘기라면 아예 안하는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였던 셈.
그래서 그냥 쉬는 시간에는 창밖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담배 한모금 빠는 낙이면 충분하고,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수업을 듣는게 가장 좋았다고 한다. 최후의 수능시험까지도 담배는 함께 했는데, 사실 1교시 끝나고 정답을 확신할 수 없는 애매한 문제들이 많아 느낌이 안좋아 또 실패하나란 생각에 착잡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밖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위로했다고 한다. "그래, 우야겠노,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데..."라며 달관의 심정까지 다다랐다는데, 마지막 시험이니만큼 후회없이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위안하며 버텼는데, 결국 수석 합격을 했다.
사실 수험생들에게 술담배란 것은 해로운 걸로 인식되고, 장승수 역시 그것들이 탈선을 부추겼다고 했으나, 드라마틱하게도 술담배는 장승수를 서울대 수석으로 이끌었다.
장승수는 담배를 매일 쉬는 시간마다 '보상'으로 활용했는데, 술은 '특별보상'으로 활용했다. 학원에 입학하기 하루 전날 '최후의 만찬'으로 친구들과 진탕 술을 마신 뒤, 그 다음부터는 한 달에 딱 한번, 모의고사 날을 '합법적으로' 술 마시는 날로 정해 그날 시험 끝나고 '보상'으로 술을 즐겼다고 한다.
즉, 장승수는 금주, 금연을 하며 무조건 의지로 참았던게 아니라 술담배를 적절히 활용했다. 실패의 경험으로 굳은 의지로 참던 재수생들은 여름 즈음부터 누적된 욕구 불만이 터지면서 무너져버리곤 한다. 이에 반해 장승수는 매일 쉬는 시간마다 '흡연의 시간'을 가지며 욕구를 풀어주며 버틴 것이다.
4. 위기 관리는 관성의 법칙으로 하라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에서는 위기관리는 관성의 법칙으로 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처음에 습관을 들이는 게 어렵지만, 일단 습관을 들여서 죽 하면 공부하기 싫은 유혹이 들어도, 그냥 틀을 깨는 게 귀찮아서라도 계속 공부해나갈 수 있다고 했다. 또, 다이어트도 마찬가지지만, 잘 지켜오다가 한번 무너지면 무너지는 데에 관성이 붙어서 다시 바로잡기가 힘들어지니 그게 부담스러워서라도 계속 하던 대로 했다고 했다. 나쁜 습관은 물들지만, 본인이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하는 '좋은 습관'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노력이 다소 필요하다.비슷한 격언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도 있는데, 일단 한번 경로를 잡으면 나쁜 경로일지라도 계속 가게 되는 경로의존성을 잘 활용하라는 의미이다. 공부든 다이어트든 일단 재미를 붙이며 탄력을 붙이면 계속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리한 목표보다는 문제 푸는 재미부터 즐기라거나 2kg 감량부터 시작하라는 전문가의 조언도 있다. 나태하게 살아오다가 어떠한 계기로 경로가 변경되어 삘받아서 몰아붙이듯이 맹훈련하고 성공하는 클리셰도 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에서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관성의 법칙을 활용하라'인데, 유혹에 한번 넘어가면 앞으로도 계속 무너질 위험이 커지나, 유혹을 잘 견뎌 틀을 잘 지켜내면 앞으로도 굳건하게 잘 견뎌내며 틀이 공고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야말로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게 중요한 이유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 것도 일단 한번 시작하면 관성이 붙기 때문인데, 관성의 법칙을 활용하라는 것은 장승수의 대표적인 명언인 셈이다.
재수생들은 수험 초기인 봄에는 나름 굳은 의지를 가지고 시작해서 잘 하나, 여름 즈음부터 급격히 무너지기도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장승수 법칙이다. 무조건 고통을 참으며 의지로 인내하기엔 수험기간이 길다보니 무너질 수 있기에 장승수가 술담배를 '보상게임'으로 활용했듯, 어느 정도 스스로 욕구를 풀어줄 수 있는 보상도 계획에 포함시켜 설계하고 관성을 잘 붙여 '꾸준히'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장승수는 억지로 하기 싫은 공부를 의지로 참으며 했던 게 아니었기에 세상에서 공부가 가장 재밌다고 되뇌이며 즐기면서 별 어려움없이 꾸준히 할 수 있었으나, 수험 말기에는 이제 내용은 다 알아서 지겨움을 느끼며 위기가 찾아왔다고 한다. 그때 관성의 법칙으로 버틸 수 있었는데, 그동안 해왔던 습관대로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현재 수준에서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를 정하면 자신감과 여유가 생기지만, 다소 부담스러운 무리한 목표를 세우면 조급함이 심해지고 성적이 안오르면 스트레스를 받아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승수는 처음에 이왕 공부하는 거 고려대나 연세대라도 가야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해서 강한 원동력으로 밀어붙였으나 그 직전에서 정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오르겠지하고 모의고사를 봐도 쳇바퀴처럼 제자리였다고 한다. 만약 계속 처음 목표를 고집했었다면 굉장히 강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리다 부러져버릴 수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두 대학을 내려놓고 그냥 이 선이라도 유지하자는 현실적인 목표로 바꿨더니 꾸준히 유지하는 점수로 성취감을 느끼며 원동력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어쨌거나 꾸준히 공부를 하다보니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서며 점수가 원하던 목표치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생각하면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닌데, 때에 따라서는 내려놓을 때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므로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목표를 적절히 스스로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상유지라는 목표로 바뀌게 되면 다소 원동력이 떨어지나, 일장일단이라고 심적으로 여유가 생겨 다소 느긋하게 매진할 수 있다. 실제 장승수도 고려대와 연세대에 입학할 점수가 안나오자 포기했더니, 심적 부담 없이 편안하게 꾸준히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오히려 마라톤의 수험생활엔 이게 적합했다.
장승수는 하루종일 공부만 했지만, 장승수는 공부가 적성에 맞았기에 크게 무리가 가지 않았고, 대신 쉬는 시간엔 꼭 나가서 쉬고, 모의고사 끝나고 나서도 본인에게 '합법적으로 술 마시는 날'로 정하여 술을 마시며 적절히 안배를 잘했다.
사실 장승수의 공부법은 수학문제를 암산만으로 푼다든지 머리 좋은 장승수에 최적화되어 있기에 일반 수험생들이 무턱대고 따라하기는 힘들지만, 대신 기나긴 수험생활의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바이블로 삼기에는 최적이다. 여러 자기계발서에서 강조해놓은 핵심사항을 장승수는 다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재수생들이 초반에는 고3학생보다 강세를 보이나, 점점 후반으로 갈수록 역전되는 경향이 보이는데, 재수생들이 후반 동력이 차츰 떨어지며 고3현역들에게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장승수는 잘 구축해놨다.
재수생들은 수험 초기 원하는 대학의 목표가 확고해서 초반 강력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지만, 그 수준까지 빨리 점수를 끌어올려야한다는 강박관념과 조바심으로 가득하여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리는 등 부담이 심하고, 또한 쥐어짜듯 올인하여 최선을 다했음에도 점수가 정체되어 있으면 맥이 탁 풀리며 탈력상태로 무너질 수 있는 타이밍이다. 하지만 장승수는 내비게이션의 경로변경처럼 즉각 목표를 낮춰잡아 수정하여 자기합리화를 통해 새로운 원동력으로 삼는 등, 꾸준히 원동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공부를 이어갈 수 있는 장치를 잘 설정해놓았다. 어차피 재수생들이야 공부의 기본기는 갖추고 있기에 3월 모의고사때는 점수가 우월하나, 차츰 몰락해가는 그래프를 그려가는 것은 공부 외적인 문제인 경우가 많은데, 그런 점에서 그런 위기 극복에 대한 노하우가 많이 수록된 장승수의 저서는 수험생들이 지치거나 힘들 때 보기에는 최고의 보약같은 비타민이다.
장승수 법칙은 정신보다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굳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경지에 오르라는 것이다.[3], 실제 장승수는 나중에는 공부가 습관이 들어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 도중에도 머리 속으로는 문제를 풀었으며, 할일 없으면 습관적으로 책을 펼쳤다고 한다. 그야말로 '관성의 법칙'이었던 것이다.
저서에서는 장승수가 자신의 일기장에 적어놓은 것을 몇개 발췌하기도 했는데, 스스로 '습관의 무서움'을 체감한 일기가 있었다. 입시에 실패 후 지쳐서 좀 쉬자며 며칠 놀았더니만 점점 관성이 붙으며 이대로 지내면 앞으로 영영 다시 못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느껴졌다며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보다며 다시 공사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5. 꼴찌의 신화
서울대 수석합격자가 장승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스타가 된 것은 바로 그가 '꼴찌'출신에 막노동꾼, 물수건 배달 등을 전전한 특이한 이력때문이다. 원래 서울대 수석합격자라고 하면 전형적인 금수저 엘리트 포스가 풍겨서 일반 수험생들과는 괴리감이나 '벽'이 느껴졌던 반면, 장승수는 흙수저 포스에 꼴찌도 했었다니 많은 수험생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수석합격 소식을 들은 것도 공사판에서 들었다고 한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다른 노가다 아저씨가 전화를 받고 뛰어와 너 수석합격했다고 알려줘서 아저씨들 껴안고 날뛰었다고 한다. 신데렐라급의 신화이니 당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하지만 자세히 보면, 꼴찌들의 교과서가 될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 않다. 밥 로스의 참 쉽죠?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방송[4]에 출연하여 장승수가 누구나 나처럼 할 수 있다고 하자, 같은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했던 배우 주현[5]이 "장승수, 너 그러다 수험생들한테 돌 맞는다"고 말했다(...).[6][7]
일단 꼴찌라고 하니 만만해 보이지만, 머리가 나빠서 꼴찌가 아니라 그냥 공부를 안 해서 꼴찌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한국어 공부를 전혀 안한다면 한국어 시험 0점 맞지 않겠는가. 하지만 차이점은 이들은 조금만 공부해도 성과가 눈부시다는 것이다. 실제 장승수도 학창시절에 공부를 전혀 안 하다가, 고3 초반에 한번 심심해서(...) 공부를 바짝 해봤다고 했는데, 순식간에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갔다고 한 적이 있다.[8]
'상춘곡' 일화에서는 장승수가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깨알같이 적힌 몇페이지 분량의 글을 토씨하나 안틀리고 금방 다 외워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장승수는 이것을 '집중력의 승리'라고 언급했으나, 오히려 평범한 학생들은 집중하기가 힘든 환경이었다. 무서운 선생님이 무작위로 학생 호명하여 상춘곡을 암기 시켜보고, 못외우면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두들겨팼다고 한다. 옆에서 퍽퍽 두들겨 맞고, 또한 전혀 안외우다가 지금부터 외우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언제 호명될지도 모르니 일반 학생들이라면 집중할 엄두도 못냈을 수 있다. 하지만 장승수는 두들겨 맞기 싫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다 외워버렸다고 한다.(...) 막판에 호명된 장승수가 토씨 하나 안틀리고 술술 말하니 학생들도 감탄하고 선생님도 놀랐다고 한다. 평범한 학생들은 반에서 1등하기도 힘든데, 전교 1등도 아니고 서울대 인문계열 입학생 중 1등을 하려면 이 정도의 기본기는 갖춰야 할 것이다.
장승수는 본인의 머리가 평범하다고 강조한다. 집중이 안될 땐 조금 전에 읽은 것조차 뭘 읽었는지 기억이 안나기도 하고, 손에 든것을 까먹고 그걸 찾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공부 방법과 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공부법을 비판했다. 마라톤을 시작하듯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면서 조금씩 스퍼트를 올리는 '단계적 학습'이 정석처럼 전해져왔는데, 장승수는 그 마라톤 비유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슬슬 어쩌고 하면 평생 가야 시동이 안 걸린다면서 처음부터 죽기살기로 덤벼들어서 습관으로 죽 밀고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바로 하루종일 잠깐도 쉬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 부터가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장승수 시절은 물론, 지금도 학습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먼저 문제푸는 재미부터 맛보고 성취감을 느끼며 조금씩 목표를 높이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실제 꼴찌가 중상위권 대학에 합격한 합격수기를 보면, 의자에 앉아있는 것부터 훈련했다는 수험생도 있다. 차츰차츰 적응해가며 올려가는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맞는 학습법이지, 장승수처럼 전혀 공부 안하던 학생이 하루 아침에 하루종일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애초 작심삼일같은 사자성어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장승수가 우려한 '시동'은, 저절로 안 걸리면 인위적으로 걸어야 한다. 물론, 공부에 적성이 맞고 재미를 느낀다면 관성이 붙어 게임에 중독되듯 저절로 점점 더 하려고 하지만, 재미없이 억지로 하는 거라면 딱 그 선에서 정체된다. 장승수가 말한 '평생가도 시동이 안걸린다'는 것도 이런 부분을 지적한 것일텐데, 그래서 미루기 극복 전문 강사들은 데드라인을 정하라고 강조한다. '나중에 하자'고 미루면 기약없이 계속 미루려는 심리가 있기에, 구체적으로 날짜를 정해놓고 그 날짜에 강제적으로 다음 단계를 시도하라는 것이다. 즉, 어느 정도 적응됐다 싶으면 스스로 인위적으로 조금씩 단계를 높여가야 하는데, 그게 안되면 그 사람은 그게 한계인 것이다. 더 높이면 아예 포기해버리니 그 선이라도 유지하는게 최선이다.
적응에도 한계가 있다. 적응이 되면 분명 '처음보다는' 편하고 수월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적응이 만능은 아니다. 본인이 그럭저럭 버틸 만 하면 적응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장승수처럼 하루종일 공부만 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한계치까지 뽑아내는게 나을 것이다. 장승수도 마지막이라고 결심한 시험에서 1교시 끝나고 느낌이 썩 좋지 않아 쉬는 시간에 밖에 나와 담배를 한대 태우면서 "그래 우야겠노,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데..."라며 마음정리를 하고 체념을 했었다는데 대박이 터졌다. 한계치까지 끌어내 열심히 하다보면 대박이 터질 확률도 높아진다. 장승수도 항상 '지역 1등'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마지막 베팅'이라던 마지막 시험에서는 지역 1등을 넘어 서울대 인문계열 수석입학이라는 초대박이 터졌다.
애초 하루이틀도 아니고 1년 내내 하루종일 공부만 한다는 것 자체가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장승수는 택시기사를 하다가 답답해서 노가다하니 소풍에 온 것처럼 오히려 살 것 같다고 했는데, 이렇듯 사람마다 적성과 성향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빡센 노가다보다는 편한 택시기사가 수월할 수 있는데, 장승수는 택시기사는 답답해서 오래하지 못하고 그만뒀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짧은 다리라도 쭉 펴고 싶었다고.(...) 마찬가지로 체질적으로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공부 시키는 것은 장승수에게 택시기사를 강제로 시키는 것처럼 한계가 존재한다. 택시기사는 답답하다며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 장승수가 그 이상으로 힘든 막노동은 척척 하고, 심지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느낀 것은 장승수에게 공부가 체질적으로 적성에 맞았다는 의미다.
장승수는 들어올 때 1등했다고 나갈 때도 1등한다는 보장이 없다며 겸손해했다.1등과 2등도 따지고보면 종이 한장 차이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만약 장승수가 서울대 차석이었다면 지금처럼 화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만큼 '서울대 수석'이라는 타이틀의 상징성이 컸다는 의미다. 당시는 '올림픽 금메달'만 우대하고 단지 운이 나빠 은메달만 되어도 외면받던 시절이다.
전국 수석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1996학년도 수능 당시에 전국 1등을 하지는 못했다. 이는 서울대 본고사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어 서울대 인문계열 입시에서 수석을 한것이 와전된 것. 공부가 가장 쉬웠어도 책 본문에서도 교수가 성적이 상당하다고 칭찬하면서 이 정도면 전국 몇 등이냐는 질문에 장승수 씨가 전국 5등 정도일거라는 답변을 한다. 당시 장승수 씨의 수능점수는 183점이었으며 수능 수석은 200점 만점에 188.6점을 획득한 서울과학고 3학년 이정원 씨이고, 이정원 씨는 서울대 입시(전기공학부를 지원해서 자연계열 입시를 봤다.)에서도 서울대 전체수석을 차지하였다.
6. 기타
- 남동생이 있는데 1973년생으로 고려대학교 서울 안암 캠퍼스 정경대학 경제학과 92학번 출신이다.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 중도 휴학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무사히 대학 졸업을 했다. 가정형편으로 인해 병역면제를 받은 본인과 다르게 남동생은 체중 미달인 데도 대학교 4학년 때 행정고시를 합격하여 기본병과장교로 군 복무를 수행했다. 2023년 기준 기획재정부에서 3급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 고등학교 때 일진 짓을 하면서 불량배 친구들과 함께 동갑내기 여고생들과 연애 소개팅을 여러 차례 했었다. 하지만 장승수 본인의 외모와 신체 등이 형편없어서 번번히 퇴짜를 맞았으며, 소개팅 중 자신을 험담하던 모 동갑내기 여고생에게 손찌검을 하고 나서부터 다시는 여자를 안 만나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가려고 했었다고.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자 생각이 차차 바뀌어지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물수건 회사에 다닐 때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갑내기 여자와 첫 사랑에 빠졌고[9][10] 그녀 또한 본인과 첫 사랑에 빠져서 서로 연애를 했었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불량한 근무 태도를 보였고[11] 사장에게 짤리고 난 뒤 의도치 않게 서로 헤어졌다가, 나중에 본인이 변호사가 되고 기적적으로 첫 사랑 그 여자와 연락이 닿아서 그렇게 서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슬하에 자녀들까지 있다. 사모님은 결혼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업주부라고. [12]
7. 관련 문서
[1]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한복집을 열었는데 하필이면 고급 기술이 필요한 일명 '깨끼옷'이 유행하는 바람에 문을 닫아야 했다고 한다. 깨끼옷은 곱솔 바느질을 사용해서 시접이 거의 보이지 않게 박음질한 옷으로, 1mm 미만으로 여유를 두고 아주 얇게, 남는 시접이 거의 없도록 접어서 다시 박는 방식이라 상당한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집안일만 해 오던 전업주부가 적당히 취미처럼 배워서 뛰어들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던 것.[2] 사실 의식이 또렷하고 의사표현이 가능하면 응급실 기준으로는 응급 환자가 아니다. 좀 냉정하긴 해도 실제 위급한 환자를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조치.[3] 올림픽 유도 금메달 송대남 인터뷰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당시 결승에서 감독이 퇴장당한 상황이라 최악의 위기였는데, 연장전 시작 10초 만에 상대 선수에게 ‘안뒤축감아치기’ 기술을 걸어 성공시키며 경기는 끝이 났다. 전술을 지도해줄 수 있는 감독의 퇴장은 송대남 선수에게 심적으로 불안감과 부담으로 다가왔으나 이러한 상황까지 대비해 지난 시간 하루에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왔던 정직한 훈련들은 기술로 이어졌으며, 생각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여 반응한 것이라고 한다.#[4] 1996년 MBC에서 일요일 오후에 방송되었던 '스타가 되기까지'라는 프로그램이다(진행자는 임성훈, 장윤정(배우)). 장승수 출연분은 1996년 3월에 방송.[5] 주현 본인이 직접 대구까지 내려와 장승수와 술 한잔하는 장면도 방송에 나온다.[6] 장승수와의 대구 술자리 당시 그말을 했다고 한다.[7] 후에 장승수 본인은, 본인 저서에서 바로 주현의 멘트를 반박하는 내용을 올린다.[8] 고3 첫 모의고사 때, 모교 인문계열 전체 300명 중에서 40등.[9] 외모는 평범했는데 대신 화장을 잘 했고 거기다 본인과 모든 면에서 죽이 상당히 잘 맞았다고 한다.[10] 장승수가 전날 밤 과음을 하여 숙취에 괴로워 하면, 사장님 몰래 라면을 끓여 주었다고 하며, 장승수도 그녀가 울적해 보이면, 퇴근 후 오토바이를 태워주며 기분 전환을 해주었다고 한다.[11] 사실 장승수 본인도 그녀에게 상당히 공감을 해 줬다. 그녀랑 나랑 둘 다 젊었을 때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돈도 적게 받는 일을 하려고 하니 싫증나는 게 당연하다고.[12] 초판을 읽었던 독자들이 먼 훗날 이 여성과 재회 후 결혼 하였다는 소식에 많은 독자들이 반가워 하며 축하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