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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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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출생3. 낙랑공주와의 로맨스4. 계모와의 갈등5. 사후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1. 소개

好童
22년 전후[1] ~ 32년 11월 (향년 불명)

고구려 제3대 국왕인 대무신왕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차비 해씨로 동부여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의 손녀이다.[2]

최씨낙랑국을 멸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에 대한 것은 보통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란 설화로 알려져 있다.

2. 출생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인 차비 해씨가 낳은 왕자. 이러니 일단 서자는 아니다. 얼굴이 수려하여 부친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래서 이름을 호동(好童)이라고 했다고 한다. #

3. 낙랑공주와의 로맨스

낙랑국과 고구려 양국의 중립지대인 옥저에서 호동왕자가 낙랑왕 최리의 행렬을 만나면서 그 유명한 낙랑공주와의 로맨스가 시작되었다.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4월조
낙랑왕은 호동이 고구려 신왕의 아들임을 알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다. 이는 고구려의 팽창을 두려워한 낙랑왕이 고구려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遂同歸, 以女妻之. 後好童還國, 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 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或云]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이 나라로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몰래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못했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원주]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4월조
낙랑공주 쪽에서 생각하면 로맨스이겠으나, 호동왕자 쪽에서 로맨스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호동이 낙랑을 사랑했다는 모습은 기록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 나라를 팔아먹으면 내가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보지 않겠다'라는 식의 협박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매국노의 멍에를 지우는 행동이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보면, 이때 호동의 행동이 국가적으로는 대의에 찬 결단일 수 있겠으나 인간으로서는 얼마나 냉혹하고 비정한 짓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동용 만화 역사서인 '만화로 보는 고구려 왕조 700년'에서는 이러한 호동의 양면적인 인간성을 차마 저연령층 아동에게 심어줄 수 없었는지 이 사건의 책임의 일부를 호동이 아닌 호동의 아버지 대무신왕에게로 돌렸다. 즉, "호동이 낙랑공주와 결혼 → 호동이 귀국했으나 적국의 공주와 결혼했다고는 말할 수 없어 고민 → 대무신왕이 낙랑을 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낙랑공주가 이를 도와주면 아버지가 허락해줄 수도 있을거라 믿음 →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고 최리가 낙랑공주 살해. 호동은 낙랑공주의 무덤 앞에서 대성통곡."과 같은 순서로 전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리가 낙랑공주를 죽일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호하려 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이용할 가치가 있는 반간(反間)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사랑의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호동이 계략을 통해 낙랑을 정벌했듯이, 곧 그 자신도 계략에 빠지게 된다.

4. 계모와의 갈등

호동이 낙랑공주를 이용하여 낙랑을 정복하는 등 군사적인 명성을 높여가자, 그가 태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인 원비는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하지 않으니 아마 음란한 짓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라며 참소하는 등 호동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대무신왕은 처음에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아이라고 미워하는 것이냐"며 반문했지만, 왕비가 눈물을 쥐어짜며 더욱 간곡히 요청하자 왕 또한 별 수 없이 호동을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억울하게 누명을 쓴 호동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칼 위에 엎어져 자결했다.

아버지인 대무신왕이 28세 때 벌어진 일이니, 호동의 나이는 아무리 많아봐야 10대 중반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는 어머니의 그릇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11월조
호동왕자의 생애는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와 비슷한 부분이 존재한다. 차이점이라면 히폴리토스는 새어머니 파이드라가 에로스의 화살을 맞아 진짜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유혹하는 것을 거절했다는 것과, 파이드라는 일단 히폴리토스를 모함한 투서를 남긴 것은 첫째 왕비와 같지만, 파이드라는 그 직후 자살했다는 점이 있다. 또한 히폴리토스는 호동왕자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게 아니라 파이드라의 투서를 보고 분노한 테세우스(정확히는 포세이돈)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순임금과 그 아버지의 예를 들면서, "호동왕자가 작은 의리를 위해 큰 정의를 버렸다"면서 비판했다.

5. 사후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대무신왕의 첫째 부인의 소생인 왕자 해우(解憂)가 태자가 되고, 대무신왕 이후 왕권은 흔들리게 된다. 잠시 친척인 민중왕이 왕위를 이었지만 급사하고, 그제서야 해우가 모본왕으로 즉위하지만, 막장이 되고 결국 모본왕마저 부하인 두로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다만 모본왕이 역사의 피해자라는 설도 있다. 문서 참조. 호동왕자의 이른 죽음이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참고로 호동은 추존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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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사국이 22년 4월에 세워졌는데, 대무신왕과 갈사국왕 손녀의 혼인은 그 이후의 일이 되어야 하므로, 32년 당시 호동의 나이는 10세 전후로 학계에서는 호동이 22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2] 삼국사기에서는 모본왕이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라고 기록했지만 정황과 모본왕이 즉위 당시 어렸다는 기록을 통해 학계에서는 호동왕자가 모본왕의 형으로 보고 있다.#[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壞其兵物[원주] 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에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5] 무휼의 신수는 청룡이다.